지리산 둘레길 #06 수철- 성심원
12.5Km / 누적거리 80.2Km
2012.11.11. 일요일 / 4시간 소요
수철 / 지막 0.8Km / 평촌 2.0Km / 대장 1.4Km / 내리교 3.2Km / 내리한밭 1.2Km / 바람재 1.5Km / 성심원(풍현마을) 2.4Km
수철에서 지막으로, 저 앞에 금서 농공단지가 보인다.
그냥 더 걷기로 한 것이 아니다. 단풍이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이곳에서, 무엇보다 발이 무거워 그만 걷고 싶어하는 길동무를 난 온갖 역량(?)을 동원해서 설득해야 했다. 이렇게 보통 둘레꾼들을 위하여 꾸며놓은 장소에서 우리가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특별하지 않은가. 순천에서 서울까지 도보 여행을 했고, 또 책도 펴내지 않았는가. 앞으로 서울에서 속초,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부산, 남해안을 거쳐 순천까지 걸어야할 우리는 프로가 아닌가. 마침내는 산티아고 길까지 가야할 우리이니 조금만 더 걷자. 그리고 우리만의 장소에서 두 손 꼭 잡고 포근하게 잠들자. 그래야 내일 비가 와도 수월하게 어천까지 갈 것 아닌가. 고맙게도 길동무는 언제나처럼 나에게 양보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포근하고 아름다운 수철을 등 뒤로 하고, 삭막하고 황량한 들판을 걸어 나간다. 등 뒤에 미련을 두면 앞 쪽으로는 늘 얼마간 거친 들판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지막 가는 길에 돌아본 필봉, 저 멀리 왕산 풍경
지막리, 평촌을 지난다. 가끔 뒤돌아보며 필봉, 왕산에서 이어지는 우리가 걸어왔던 야트막한 고동재 능선을 바라보기도 한다. 수철 마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능선이 무척 포근하게 느껴진다. 필봉자락이 끝날 무렵 우리가 걷는 왼쪽으로 금서천 건너 농공단지가 펼쳐진다. 금서 농공단지. 무슨 항공사 비행기 날개를 생산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대장마을이 나온다. 대진고속도로가 경호강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대전-진주 고속도로. 산청에 다 왔다. 우린 여기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내일 어천을 향해 걷기로 한다.
지리산 둘레길 산청 안내센타에서 읽은 글
산청 둘레길 안내센타에 들른다. 친절한 안내자의 도움으로 산청 중심지에 숙소를 잡는다. 우리는 샤워를 마친 후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산청성당으로 향한다. 오후 6시 미사. 신부님과 미사 전에 어천 둘레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길동무는 미사 시간에 신부님 앞에서 졸고, 나까지 졸면 신부님께 미안해서 나는 졸지 못하고. 우린 숙소에 돌아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손잡고 다정하게 잠들자는 약속은 둘 다 까맣게 잊고.
산천 성당 성모상
벌써 아침이다. 커튼을 연다. 비가 온다. 길에 고인 빗물 웅덩이를 살피니 빗방울이 느껴진다. 비가 꽤 오나보다. 그래도 우린 길을 나선다. 산청 시가지를 벗어나 산청중고등학교 근처에 이르니 둘레길 표지판이 보인다. 내리를 향하여 걷는다. 비내리는 산청의 아침, 우산을 쓴 두 남녀, 우리가 둘레길을 걷는다. 오늘 같은 날 둘레길을 걷는 이는 우리밖에 없을 듯하다.
내리 한밭길
아침 빗길을 나서는 둘레꾼
내리교를 건너 경호강 오른 쪽 길을 걷는다. 이 길을 내리 한밭길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강물과 함께 걷노라니 다리가 나온다. 비내리는 날 강건너 산과 오른 쪽 들 건너 산에는 산안개가 변화무쌍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저 느낌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을까? 나는 왼손에 우산을 들고 오른손으로 는 산안개가 주도하는 신비한 풍경을 포착하느라 바쁘다. 촬영이 끝나면 겉옷 사이에 카메라를 쑤셔 넣어 렌즈를 보호하고, 안개 사이로 산이 비쭉비쭉 모습을 들어내면 다시 카메라를 꺼내는 동작을 반복하며 길을 걷는다.
수묵화 한 장면
다리가 아픈 둘레꾼
우산을 쓴 둘레꾼
길동무는 저리도 무심히 그리고 묵묵히 길을 가는데 나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왜 이리도 관심이 많을까? 내가 걷고 있는 이 걸음걸음, 모든 장면들을 왜 이리도 기록하고 싶을까! 혹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위대한 김정호 님과 비슷한 유전자가 나에게 물려진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 삶의 유한함이 아쉬워서 뭔가를 기록하고 싶은 것은 아닐른지. 글쎄다. 길동무가 벌써 바람재로 들어가버렸다. 나도 서둘러 언덕길을 오른다. 바람재를 넘어서니 감나무 열매가 빗속에서 더욱 노랗다. 성심원으로 가는 왼쪽길을 따라 대숲을 헤치고 다시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바람재 너머 성심원으로 가는 길
성심원으로 가는 길에 바라보는 왼쪽 강너머 산야의 풍경이 또 한 폭의 산수화다. 비오는 날의 풍경이다. 성심원 못미쳐 성모상이 노란 은행잎을 배경으로 비를 맞고 서 있다. 루르드의 성모상이다. 우리는 성모상 앞에서 주모경을 바치고 길을 간다. 성심원이 나온다.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큰 시설이다. 그 안에는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타도 있다. 물론 둘레꾼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냥 지나쳐 계속 어천으로 향한다. 성심원이 끝나는 부분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 초입에서 간단한 요기. 어제 고동재쉼터에서 산 김자칩과 감, 사과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한다. 특히 감자를 쪄서 얇게 썬 후 말려 구웠다는 감자칩은 그 개미가 독특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맛이다. 너무 배가 고파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경호강 풍경
빗속의 루르드 성모상
산청에서 성심원을 지나도록 오늘 둘레꾼은 우리 둘 뿐이다. 우산을 쓰고 숲길로 들어선다. 비에 젖은 낙엽길, 왼편으로는 경호강 물줄기 소리가 꽤 힘차게 들려오고 있다. 길동무가 물소리에 신경쓰지 말고 우리가 가는 길 낙엽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자고 제안한다. 좋은 생각이라고 공감한다. 내가 좋아하는 친한 동무의 제안이니까. 그 제안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외로운 산길에는 우리 둘 뿐이다. 어쩌면 이 지구상에 우리 둘 뿐일지도 모른다. 70억 사람들 중에 우리 둘. 빗속에 우산을 쓰고 지리산을 걷는 사람은. 단 둘뿐?
성심원 앞길
오르락내리락, 참나무 활엽수 사이로 흐르는 푸른 물, 소나무 푸른 잎 사이로 흐르는 경호강 물, 그리고 급경사의 산길을 내려서니 어천마을 입구의 포장도로가 나온다. 우린 마을 경로당까지 갔다가 다시 강을 건너 버스 정류장까지 나왔으나 11시 15분 산천 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맘씨 좋은 분이 산청까지 픽업해주었다. 알고 보니 어제 걸었던 상사 폭포 위의 비닐 하우스 쉼터 주인장이었다. 필봉 뒤에 농장이 있으며, 조경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고마운 분께 감사.
어촌 입구에서 돌아본 풍경, 멀리 성심원이 보인다.
산청에서 12시 20분 버스를 탄다. 마침 산청 장날이라 칠, 팔십 세 된 노인들이 버스 좌석을 가득 채운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정겹다. 할아버지들은 조용하고 할머니들이 활기에 넘쳐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 웃음이 쏟아진다. 이 마을 저 마을 다 들러 노인들도 모두 집 찾아 들어 가시고 우리 둘은 방곡 근처에 내려 동강까지 1Km 남짓을 걷는데 심한 비바람에 우산을 가누기가 힘들다. 그래도 우리는 어제 오늘 두 코스의 둘레길을 해냈다. 그동안 주말마다 하루 씩 밖에 못 걸었는데 처음으로 이틀을 연속 걸었다. 빗속도 걸었다. 언제 한번 열흘이고 한 달이고 원 없이 걸어볼까! 이 몸이 걷다가 점점 가벼워져 마침내 하늘을 나는 새보다 더 가벼워져, 종국에 이르러서는 새털처럼 이 우주로 날아가 사라져 버리도록 걸어볼 수는 없을까!
어천마을에 다 왔다. 다음까페<마음의 고향, 후곡>
첫댓글 모처럼 들어오니 어천마을까지 오셨네요.나도 눈짐작으로 뒤따라갑니다.
아! 감독님 영화 <허름한 의자>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