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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쓸 부분은 97학번에 관한 것이다.
사실 97학번은 나의 대학 생할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새내기 시절에 그분들은 2학년이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이 나를 비롯한 우리 98학번을 이끌어 주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그렇게나 재미난 대학 생활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학에 처음 들어오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문화적인 충격이라고 할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것은 누구라도 다 겪어본 일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었다.
나는 내 주변의 상황이 급변하게 되면 좀처럼 그에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
물론 한 번 적응하면 또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도 느린 적응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대학 때도 그랬다. 나는 도무지 대학생이 되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수업은 오전 11시에 끝나지 시간은 남아 돌지 아는 사람은 없지.... 과연 무엇을 해야 했을까?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97학번은 보잘것 없고 삭아지 없는 날 돌보아 주고
교육학과의 세계로 이끌어 주셨다.
97학번에 관한 글을 쓰려니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바로 '미안함'이다.
그분들은 나에게 열과 성을 다해 최선을 다했으나
나는 그 분들에게 진정으로 잘하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97학번과의 특별한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가지는 못한 듯 싶다.
물론 98년도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와 97학번 선배 몇몇 과는 정말로
특별한 관계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의 은혜를 모른 나의 잘못으로 인해
그렇게 소중한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가지 못한 듯 싶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물론 순서에는 큰 의미가 없다.
1. 이런 한영민 같은 경우가(97학번 16번 한영민)
우리 과에는 여러 유행어들이 있는데 '이런 한영민 같은 경우가'라는 유행어는
매니아들 사이에선 아주 인기가 있는 것이다.
당혹스런 일이 생기거나 황당한 일이 일어났을 때 혹은 심기가 불편할 때 우리는
그 유행어를 심심치 않게 사용하곤 한다.
영민형은 정말 이상하다고밖에는 얘기할 수 없다. 영민형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싸대기 3천대를 적립시킨다는 등 말도 안되는 얘기들로 우리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영민형에 대한 평가를 종합해 보면 대개 영민형은 이상한 사람이다
혹은 알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주위의 평가와는 달리 영민형을 꽤 오랫동안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영민형은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꽤나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에 대해 사람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영민형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일반인들의 뇌리에 박혀 영민형의 놀라움을 인식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1학년 때 영민형은 학교에 없었다. 이스라엘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이스라엘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외국에 나가 있었다.
그당시에 나로선 이스라엘에 유학을 간다는 것이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카투사에 갔다고 했다. 카투사 역시 일반인들이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고는 졸업 후 케디에 취직을 했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케디에 취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케디에 취직을 한 후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영민형은 우리가 흔히 취득하는 워드 자격증보다는 기사 자격증이나 기타 여러 가지를 취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영민형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세는 분명 나에게 없는 것이다.
나는 남들이 많이 하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지 그렇지 않은 것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영민형은 그러한 진취적인 기상을 갖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일반 사람들이 영민형의 그런 기상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그것을 너무 과소평가한다는데 있다.
하루 빨리 영민형의 진정한 가치를 사람들이 알아서 영민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2. 주주총회 자타칭 회장(97학번 4번 안찬숙)
주주총회 자타칭 회장이라는 별명은 예전 비야비야에 감자님께서 쓴 글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가 찬숙 누나를 흔히 곰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그것보다는 주주총회 자타칭 회장이라는 것이
더욱더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이 별칭을 빌려왔다.
물론 여기에서의 주주총회의 주자는 술주자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내가 처음 교육학과에 와서 가장 놀란 것들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술을 저렇게 많이 먹고 또한 여인들이 술을 저렇게 많이 먹을 수도 있구나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는 않겠지만 나는 1학년 1학기 때까지만 해도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으며 특히 여인들이 술을 많이 먹는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육학과의 여인들은 보란듯이 술을 들이 붓고 자랑스러워 하였다.
(그 후로 나도 술을 들이붓는 여인들을 아주 자랑스러워 하였다.)
그 대표 주자가 찬숙 누나다. 아무리 들이부어도 얼굴색도 별로 변하지 않는 찬숙 누나를
회상해 보면 주주총회 자타칭 회장이라는 별칭은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찬숙 누나를 보고 내가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은 '꼼꼼함'이다.
찬숙 누나한테 내가 가장 많이 배운 것이 바로 꼼꼼함이다. 찬숙 누나와 나는 교육부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내가 1, 2학년 때 교육부의 활동은 그 양질에 있어서 교육학과 공식 조직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자료와 교육적인 내용은 실질적인 교육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해 주었다.
전공 과목에서 교육학의 이론을 배웠다면 교육부에서는 실제의 교육에 대한 개념을 정립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 교육부의 중심에는 언제나 찬숙 누나가 있었다.(1학년 때는 희숙 누나가 부장이었지만)
찬숙 누나는 교육부에서 논의해야 할 주제들을 언제나 꼼꼼하게 준비해 왔고
우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찬숙 누나가 준비해온 교육부 자료에 의해 활동을 했다.
찬숙 누나의 준비는 치밀하고 꼼꼼했다. 한번도 자료를 대충 준비하거나 중복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언제나 정확한 자료가 준비되었다.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교육인들 중에서 누가 가장 담임 업무를 잘 할 것이가?'
이에 대해서 난 주저 없이 찬숙 누나를 꼽을 것이다.
본인도 담임 업무를 횟수로 4년 째 해 오고 있지만 항상 실수를 하곤 한다.
해마다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잊고 빠트리고.....
하지만 찬숙 누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담임의 업무를 꼼꼼하게 잘 해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 거북님(97학번 6번 이미숙)
97학번 중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미숙 누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미숙 누나는 특히 나에게 잘해주었던 거 같다. 항상 많은 대화를 하고 나의 일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
밥도 무척이나 많이 얻어먹었던 거 같다. 미숙 누나랑 즐겨 갔던 음식점은 미화식당 근처 아프리카라는 곳이다.
그 곳의 돈까스가 아주 일품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미숙 누나는 돈까스가 나오면 밥은 전혀 먹지 않고
돈까스만 골라서 먹었다. 밥과 함께 하지 못하는 돈까스는 상상할수 조차 없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한 편지도 꽤 많이 썼었던 거 같다. 그 당시 교육부에서 유행하던 마니또라는 제도를 등에 업고
많은 편지를 주고 받은 기억이 난다. 물론 그 당시에 나는 교육인 몇 명과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
그 당시의 학보통은 메일보다는 손수 쓴 편지들이 날아다니던 낭만이 있었다.
아무튼 편지의 내용에는 항상 날 걱정하고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 편지를 받고 또 편지를 쓰면서
악독했던 나의 마음이 조금은 착하게 변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하루는 미숙 누나가 나에게 인형을 선물해 주었다.
인형은 나의 생일 선물로 준비된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여지껏 생일 파티를
해 본 적이 1번 밖에는 없다.(그 생일 파티도 98학번의 박미영이 갑작스레 해 준 것으로 나는 잘 모르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생일을 전혀 챙기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도무지 생일을 왜 챙겨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생일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생일 선물로 이쁜 인형을 선물해 주니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나 조차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난 사실 인형을 아주 좋아한다.)
미숙 누나는 지금 나와 같은 지역에서 교직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 차로 15분만 가면 미숙 누나가 있는 학교이며 바로 김정은 양의 학교와 같다.
대학교 1학년 때의 정서로 미숙 누나와 맛있는 밥을 먹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려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아쉬울 따름이다.
4. 띨표님(97학번 10번 이인표)
드디어 우리의 띨표님에 관한 언급을 할 때가 왔다.
무수히 많은 어리버리한 교육인 그들 중에 단연 으뜸은 바로 띨표님이 아닌가 생각된다.
포레스트 검프 사건, 화장실 사건, 한문 수업 다른 교수님께 다른 강의실에서 듣기 사건 등
띨표님의 일화들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정상적인 사람이 일생에 한 번 겪을 법한 일을
저리도 많이 경험했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기에서 띨표님의 일화를 하나 하나 열거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다 열거하려면
도저히 분량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띨표님은 사실 나와는 홍보편집부 부장과 편집 부장으로서의 인연을 가지고 있다.
99학년도에 띨표님은 홍편부장님이었고 나는 편집 부장으로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뜻을 탄생시켰다.(그때 만들어진 한 뜻이 아마도 과실에 있을 것이다.)
그 한뜻은 양과 질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단은 양이 무척이나 많다. 게다가 그 구성의 다양성에서는 더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의 한뜻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교육학과의 설문조사와 같은 것들은 바로 그때 확립된 것이었다.
물론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 나는 매일 뺀질 거리다가 끝에서야 조금 편집에 관여했을 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어려운 작업을 통해서 띨표님께 느낀 것은 바로
띨표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대만이 포기를 모르는 남자라면 띨표님은 포기를 모르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띨표님은 정말 무섭도록 집요한 사람이었다.
한뜻을 만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애초의 계획대로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계획된 글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뜻하지 않는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나 같으면 그것을 빼고 만들었을텐데 띨표님은 끝까지 그것을 집요하게 추적해서
기필코 만들어내었다. 그때의 한뜻이 그렇게 방대한 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띨표님의 그 포기하지 않는 집념 때문일 것이다.
또한 띨표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을 고를 때 무척 오래 고른다는 것이다.
우리 과에서 옷을 가장 오래 고를 것같은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단연 띨표님이 1위가 될 것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하루 종일 옷을 고른다고 한다. ㅋㅋ
띨표님은 97학번 중에서 지금까지 연락이 되고 또 자주 보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띨표님은 특히 결혼식 가기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띨표님께서 참석하는 결혼식은 선후배를 가리지 않는 방대함을 보여준다.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5. DP(devil potato) (97학번 7번 이미정)
교육학과에는 여러 애칭과 별칭들이 있다.
그 중에서 90년대 후반 가장 널리 불려진 애칭을 꼽으라면 단연 '감자'일 것이다.
그 누가 감자를 모르겠는가? 사실 난 교육인들의 애칭을 부르는 것을 상당히 좋아했다.
'똥칠이', '말짱황', '여고딩', '화이바' 등등의 애칭은 그들에게 더욱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중에서도 단연 짱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감자'라는 애칭이다.
이는 정말 강력했다. 그 후에 나온 그 어떤 별칭도 감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배들까지도 미정 누나가 아닌 '감자 누나'라고 불렀다.
감자 이후에 나온 '새내기킬러'니 '여고딩'이니 '똥칠이'니 '말짱황'이니 하는 애칭들도 감자에 비하면 발치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그런데 감자 누나도 그렇게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거 같다.
심지어 그것을 오히려 좋아하는 듯 도 했다.
위의 제목에다가 '감자'라고 적지 않고 DP라고 적은 것은 92학번 현구형께서 쓴 문헌에서 DP에 관한 언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DP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자칫 글의 논점을 흐릴 수 있으니 생략하도록 한다.
감자 누나는 '무엇이든 열심히'하는 스타일이었다.
감자 누나가 이끈 심리극은 최고였다.(그러고 보니 한뜻도 그렇고 교육부도 그렇고 심리극도 그렇고 97학번들이 부서의 장을 맡았을때의 활동이 정말 최고였구나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나 또한 심리극의 정식 단원은 아니었으나 조명 담당으로 특별 가입하여 최고의 심리극 공연에 참여했었다.
또한 미정 누나는 학생회 일에도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사범대 부학생회장으로서 또한 전사련에 대한 자부심으로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 냈던 거 같다.
미정 누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바로 미정 누나가 천쪼가리에다가 글자를 아주 잘 쓴다는 것이다.
학교에 보면 천쪼가리(그것을 뭐라고 하긴 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에다가 글씨들을 써서 붙여 놓은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미정 누나는 그 글씨를 아주 잘 썼다.
지금도 가끔 학교에 가면 이곳 저곳에 걸려 있는 천쪼가리의 글씨들을 보고 있으면 미정 누나가 쓴 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군 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미정 누나는 특수 교육을 하고 있다. 나는 특수 교육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단순히 특수한 아동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 밖에는 모른다.
특수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고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나도 한 때는 특수 교육에 뜻이 있었으나 그 나약함으로 인해 할 수가 없었다.
우리 학교에 있는 특수 학생을 보며 특수 교육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가를 다시금 느껴본다.
6. 청소의 신 그 앞에 무릎을 꿇다(97학번 1번 김선경)
나는 예로부터 청소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청소 검사를 빡시게 해대는 담임 선생님을 보고
이 빌어먹을 교실은 청소의 신이 와서 청소를 하더라도 담임 선생님이 검사를 하면 다시하라고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나에게 청소는 정말 지옥이다. 정말 하기 싫은 것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그런 청소에 대한 관념을 깬 분이 있었으니 바로 97학번의 1번 김선경님이다.
선경형은 나와 1년이 넘게 함께 살았다.
나는 자취를 꽤 오래 했었는데 당연히 청소는 많이 하지 않았다.
더이상 못 볼 지경에 이르면 간신히 한 번 쓸고 닦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먼지 하나도 날리지 않도록 방을 청소했다.
날이면 날마다 방을 청소했다.
어느날 어떤 후배가 선경형에게 이렇게 물었다. '형은 강의 끝나고 무엇을 하세요?'
그랬더니 선경형이 하는 말이 '응 뭐 청소도 하고 그래....'
선경형을 아는 사람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일화다.
강의 끝나고 하는 일이 청소인 것이다. 그런데 선경형은 청소에 대해 특별한 철학이 있는 듯 싶다.
내가 만일 10시간을 투자한다고 해도 선경형만큼의 청소 능력을 보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픈 일이다.
선경형에게서 특별히 배울 점은 바로 인간 관계가 아주 깊다는 것이다.
선경형의 인간 관계가 넓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대부분의 사람들과 잘 지내기는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인간관계는 무지 깊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선경형과는 그렇게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였다. 하지만 선경형과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 사이에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진실한 친구를 하나 얻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선경형은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선경형은 연락이 되지 않는 교육인 중에 한 사람이다. 하루 빨리 연락이 닿아.
다시 한번 그 숯검댕이 눈썹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7. 한딱님(97학번 14번 정은숙)
한딱님은 바로 은숙 누나를 이르는 것이다. 정말 절묘하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딱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한딱까리 하다'는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은숙 누나를 보고 있으면 그야 말로 한딱까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알고 있기론 은숙 누나는 강원도 영월이 고향이다. 출신 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을 역임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은숙 누나가 나에게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은숙 누나는 우리 새내기들에게 항상 밥을 챙겨 주었기 때문이다.
남는 시간을 주최 못하는 우리들을 자취집에 불러서 맛있는 밥과 반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양파국을 끓여 주셨다.
그 양파국이 기억에 남는 것은 꽤나 맛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난 그때만 하더라도 양파 종류를 잘 먹지 않았는데
그 양파국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맛있던 기억이 난다.
은숙 누나를 비롯한 우리집 관계자분들께서 방황하는 98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모임은 공중에서 분해되었을지도 모른다. 98학번의 모임이 자리를 잡아갈 때까지(정백당의 집이 아지트가 될 때까지) 우리를 보살펴 준 분은 바로 은숙 누나다.
은숙 누나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바로 '선후배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은숙 누나는 누구보다도 선후배 관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어떻게 하면 선후배 관계가 좋아질 것인가를 늘상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다.
교육학과의 전통인지는 잘 몰라도 한 학번 차이의 선후배 간에는 그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러지 않지만 2학기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거 같다.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 은숙 누나는 항상 선후배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은숙 누나의 얘기를 새겨 듣지 않은 우리들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그때 은숙 누나의 말씀을 조금만 더 귀기울여 들었다면 우리의 관계가 지금보다는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8. 또 다른 곰님(97학번 13번 이종규)
종규형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말로 교육학과의 열정인을 찾으라면 단연 맨 처음에 꼽아야 할 것이다.
교육학과를 아끼고 후배들을 아끼는 마음에 있어서 그 분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종규형은 언제나 바빴던 거 같다.
특히 4학년 때에는 학생회 일로 바빠서(부총학생회장인 것으로 기억됨)
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어려운 상황을 항상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우리가 술을 먹고 있으면 어김없이 맨 마지막에 나타나 우리를 골로 보내주시곤 하였다.
종규형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엘파소'와 '깡통과 철판'이다.
엘파소와 깡철은 우리가 가장 마지막에 의식을 청소하는 곳으로 일부의 매니아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던 곳이다.
1, 2차가 어느 정도 끝나고 진정한 술꾼들이 모여 가는 곳이 엘파소와 꾸이꾸이였다.
그런데 우리가 엘파소에 가면 종규형은 어김 없이 나타난다. 이것은 정말 자명한 진리였다.
내 기억으론 우리가 술 먹으러 엘파소에 갔는데 종규형이 오지 않은 적은 1번인가 2번 밖에 없었던 거 같다.
종규형이 정말 올까? 라는 물음은 여지 없이 현실로 바뀌었다. 정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종규형을 보고 내가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바로 '추종하는 무리들이 많다'라는 것이다.
종규형을 추종하는 무리는 교육학과의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들의 유대는 특별하고 심오하다. 가히 종교집단을 하나 만들어도 좋을 듯 싶다.
내가 다 알 수는 없으나 대표적인 추종의 무리가 이종필과 김정은이다.
그들에게는 나로서는 다가갈 수 없는 무서운 유대감이 있다. 그들에게는 또한 자부심이 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종규형을 보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해 본다.
휴 97학번에 대한 글을 모두 마쳤다.
상당히 피곤한 작업이다.
앞으로 98학번 99학번 00학번 01학번이 남아 있는데 과연 완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이 글에 언급되지 않은 분들은 본인과의 관계가 소홀해서가 아니라 내가 보아온 그들의 성향이 글의 목적(매우 특이하거나 본인의 심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친근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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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씨 읽을수록 웃겨....애들 생각나네...젠장할...10년이 더 지난 일이잖아...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