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원들이 깨어 있어야 ‘민주노조’가 가능합니다!
- 경기남부타워크레인지부 사무국장 전용수 회원 인터뷰
구노회 회원 가운데 타워크레인 노동자가 한 분 있다. 전국건설노조 수도권지역본부 경기남부타워크레인지부 전용수 사무국장(53).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이 3개월 넘게 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 가지 못하다가 추석이 지난 9월 18일에야 댁으로 찾아뵈었다. 반백의 머리에 칼칼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의 소유자, 그런데 왠지 그날따라 많이 지쳐 보였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노동운동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아휴 어려운 얘기인데…….” 하며 빼시더니,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술술 이야기를 털어 놓으신다. “79년 박정희가 죽었을 때 내가 3일을 울었어요. 대단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80년 광주 항쟁이 벌어졌을 때도 나는 언론사들이 대서특필한 이야길 그대로 믿었어!”
그랬던 그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1986년 인천에서 ‘5·3 항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손님을 태우고 서울대학교를 들어갔는데 학생들이 전단지를 막 뿌리고 있었다. 손님이 타고 있어서 읽지는 못하고 제목만 슬쩍 봤더니 “파쇼를 박살 내자”라고 적혀 있었다. “파쇼”가 뭔지도 몰랐던 그는 전단을 받은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다고 한다. 그래도 궁금해서 손님을 내린 다음 길 어귀에 차를 세워 놓고 찬찬히 읽어 보았다. “그걸 보니까, 전두환이가 진짜 나쁜 놈이더라구(웃음)” 회사에서 찍힐까 봐 전단지는 가져 가지 않고 버렸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내용이 머릿속을 뱅뱅 돌면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친 김에 기독교 회관, 왕십리 성당 같은 곳에서 열리던 민주주의, 노동법 강좌나 강연회를 계속 찾아 다녔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권해준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 초판)이란 책을 읽고는 어릴 때 생각도 나고 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주고, 매질만 하는 게 싫어서 뛰쳐나왔다.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머슴살이, 버스 계수원, 구두닦이, ‘호텔 뽀이’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한번은 구두닦이를 하다가 동네 아이들과 패싸움이 벌어졌는데 상대편 가운데 검사 아들이 한 명 끼어 있었다고 한다. 먼저 시비 걸고 때린 건 그 쪽인데 경찰은 가난한 ‘딲새’들한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다. 꼼짝없이 ‘폭행범’으로 몰려 인천소년교도소(충의대)로 가게 됐다. 그곳은 매일 군대식 ‘얼차려’와 폭행이 난무하는 “인간 도살장”이었다. 1년 6개월 동안을 버티며 처음으로 국가 폭력의 야만적인 실상을 체험했다.
1987년 6·10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그는 계급의식에 눈을 떴고 열성적인 현장 활동가로 거듭 났다. 어용노조가 지배하던 택시 현장에서,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지역 연대 파업을 조직했다. 그때는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전투성이 최고조였던 시기다. 경찰이 사장과 한 통속이 돼 파업 노동자들을 연행해 가면, 노동자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경찰차를 뒤집어 버리고 밤새 투쟁해서 연행된 동지들을 구출해 왔다.
그러나 척박한 노동 현장을 바꿔내는 투쟁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현장에서 함께 활동했던 많은 동지들이 불의에 맞서 분신으로 항거했다. 숭고한 희생에 힘입어 ‘민주 집행부’가 들어섰지만 그들 역시 사업주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조합원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현장에 계속 남아 있던 그는 썩은 집행부를 견제하기 위해 감사로 출마해서 당선됐다. 회사는 노조 집행부와 짜고, 뇌물로 회유해 보고 협박도 해 봤지만, 그에겐 안 통하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노조 활동을 못하게 과장으로 승진시켰다. 당연히 그는 거부했다. 출근 투쟁을 하며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엔 해고를 당한다.
타워크레인 기사가 된 건 2004년부터다. “잠은 푹 잘 수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시작했다고 한다. 1년 만에 자격증을 딴 후 곧장 타워크레인노조에 가입을 했고 얼마 안 있어 교선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2007년 파업 투쟁에도 참여했다.
이번 파업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어 보았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다.
“10월 중순에 그간의 집행부 활동에 대한 중간 평가를 해서 과반수가 안 나오면 깔끔하게 물러날 겁니다. 지도부가 어영부영 제 역할 못하면 조합원들이 파업하다가도 갈아치우는 게 민주노총, 전노협의 전통이고 독립노조의 전통 아니겠어요!”
건설노조 타워크레인분과는 대표자회의에서 ‘올해 파업을 최대한 짧고 굵게 싸우고 끝낸다’는 기조를 가지고 6월 7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2007년처럼 총파업을 벌인 게 아니라 지부별, 지회별, 현장별로 럭비공처럼 파상 파업을 벌였다. 조합원들도 절반은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6월 달까지 반응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런데 7월 들어서면서 사용자 단체인 타워크레인 협동조합이 ‘복수노조 조항’을 내세우면서 단체협상을 거부했다. “노조 지도부가 처음엔 복수노조 조항이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될 거라 판단했는데 이것이 실수였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타워크레인노조는 전술을 바꿔 협동조합과의 중앙교섭을 중단하고, 8월부터 8개지부가 전면 총파업에 들어갔다. 현장에서 임대사(타워크레인을 임대해주는 회사)를 압박해 ‘노조의 요구를 이행하겠다’는 내용의 확약서를 받아냈다. 업체들의 90%가 협약서를 제출하고 나서, 그 현장에만 조합원들을 복귀시켰다. 아직 확약서를 제출하지 않은 업체가 2퍼센트 가량 남아 있어 투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고 한다.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은 1년에 평균 8개월 동안 일을 하고 나머지 4개월은 실업상태에 놓여있다. 평균 월급은 250만 원 정도 받는데 실수령액은 210만 원밖에 안 된다고 한다.
전국 건설현장에서 한 해 160건 정도의 타워크레인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타워크레인 사고는 커다란 재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철저한 안전 대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윤에 눈먼 업체들은 안전한 ‘벽체지지방식’ 대신에 비용이 덜 들어가는 ‘와이어지지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작업할 때 지상에 있는 신호수의 역할이 중요한데,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신호수는 거의 없고 아무나 불러다 막 시킨다고 한다.
건설 현장에서 작업팀들이 자기 공정부터 먼저 끝내기 위해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에게 촌지를 주는 관행도 있다. 이 때문에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이 혹사하거나 안전 대책이 소홀해지면서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지는 조합원들이 제 살 깍아 먹는 촌지 수수 관행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복수노조 시대에 대응하면서 제도적인 결함들을 바꿔 내려면 현재 1,630명인 조합원 수를 더욱 확대해서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국에 타워크레인 노동자 수는 5,000여 명인데 실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는 3,000여 명밖에 안 된다. 이런 심각한 고용 불안 때문에 조합원들 다수가 노조 조직을 확대하는 데 부정적이라고 한다. ‘조합원들이 멀리 보지 못하고 너무 작은 이익에 골몰하고 있다‘며 그는 못내 안타까워했다. 부디 그의 바램대로 타워크레인노조가 폭넓은 연대를 구축하면서, 더욱 강력한 노동조합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인터뷰 정리-이광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