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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감독 모두 영화형식이 워낙 독창적인데다 세상을 읽는 방식, 가치관, 영화미학 등 하나하나가 현저히 대조적이어서 똑같은 식재료를 사용하지만 막상 조리방법이 전혀 다른 조리사들의 창조적인 음식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한 쪽이 일상을 섬세하게 낱낱이 밝히려드는 ‘현미경’이라면 다른 한 쪽은 사회 전체를 멀리 조망하는 ‘망원경’?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카메라’는 편견없이 진실을 밝히거나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 혹은 방법을 뜻하는 일종의 메타포로 사용되고,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헛간 타오르다 Barn Burning>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 태우기>을 버무린 <버닝> 역시 비유적, 은유적, 상징적 장치가 자주 등장한다.
알다시피 홍상수 감독이야 이른바 일상 속의 낯선 리얼리즘, 느슨한 플롯이 전매특허인데 비해 이창동 감독은 명확한 플롯, 스토리 위주의 리얼리즘이다. 하지만 <버닝>의 플롯은 한결 느슨하다. 아마 이런 점들이 두 작품 모두 관객들에게 작품의 이해를 어렵게 하지 않았을까싶고, 대체로 영화에서 비유와 상징, 메타포의 채택은 열린 해석, 열린 결말을 유도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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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의 카메라>도 그렇지만 <버닝>역시 한 번 감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두 작품 모두 두 번씩 감상했는데, 내킨김에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헛간 타오르다 Barn Burning>도 읽어봤다. 이쯤되면 뭔가 멋진 글이 써지지 않을까 궁리해봤지만 머릿속에 이미지 파편들만 난무하고, 이런저런 글감은 떠오르는데 막상 써지질 않는다. 꿩 대신 닭이라던가? 본격적인 글은 담으로 미루고, 우선 웹서핑하다 발견한 글 두 개와 이창독 감독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기교적인 인생'을 살아가지만 결코 파멸하지는 않습니다. 어쩜 우리 현대인들은 모두 하루키 식의 기교적인 인생을 꿈꾸며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먹고 살만한 직업, 몸매를 가꾸는 운동, 탄탄한 몸을 감싸는 세련된 옷, 이름과 재료만으로도 폼나는 요리, 재즈와 클래식...감미로운 외로움은 덤이구요. 이창동의 신작 <버닝>은 실재와 실재하는 않는 것, 혹은 추측의 애매성을 전면에 건 영화라고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하루키적 세계관을 불태워 버리는 이창동의 과격함으로 감상했습니다."
위 글은 영화 <버닝>을 분석했다기 보다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와 하루키의 소설 전체를 대상으로 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버닝>을 말하면서 정작 타켓이 하루키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하루키 소설을 분석한 것이라면 공감하지만 <버닝>이라면 그렇지 않다. 다만 이 글이 눈길을 끄는 것은 막상 <버닝>을 비껴간 내용이지만 '비닐 태우기'가 아닌 하루키 소설을 불태운 이창동의 <버닝> 이라는 식의 재밌는 견해 때문이다.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기이하리만큼 외톨이다. 타인과 외부 세계는 그에게 기척과 암시로서만 존재한다. 이창동 감독 역시 <밀양>이나 <시>에서와 달리, 절망의 현상을 해부할 뿐 이 절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기를 삼간다. <버닝>의 지옥은 희망의 부재 자체보다 절망과 질투를 곧게 발설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종수는 현재 내가 뭘 하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느끼는 한국 젊은 남자들의 거울이고, 해미는 그가 남성으로서 품은 선망과 열패감을 직시하도록 벤 앞에 데려다주는 장치다."
- 이창동 감독의 인터뷰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갖고 있는 미스터리한 부분을 영화적인 미스터리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적으로 우리 세상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겠다 싶었다.
소설에는 주인공들이 대마초를 피우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한 때 연극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영화에서는 종수가 아버지를 떠올리는 장면으로 바꿨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하루키가 쓴 <헛간을 태우다> 라는 제목은 그 보다 앞선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제목 <Barn Burning>에서 갖고 왔다. 포크너의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는 세상으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그 아버지가 분노에 휩싸여 남의 헛간을 태우는 이야기가 소설에 나온다. 나는 바로 그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 이 시대 젊은이들을 표현하는 데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다. 각각의 이유가 있다. 종교와 국적,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분노하는 세상이다. 그 중 특히 젊은이들이 마음에 품은 분노는 더 하다. 그런 분노 속에 현실에서는 무력감을 갖고 있다. 문제는 젊은이들은 이런 분노를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기면서도, 자신들이 느끼는 분노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거다. 요즘 세계의 문제가 바로 분노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데 있다. 세상은 점점 세련되게 변하고, 편리해지지만 정작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다는 감정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미스터리하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닐하우스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흔한, 농사짓는 농촌에서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공간이다. 어린 나이에 종수가 바라본 비닐하우스는 마치 자기 자신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을 거다. 포르쉐는 비닐하우스와는 극단적으로 반대에 있는 설정이다. 바라고 원하지만 종수의 손에 닿을 수 없는 그 어떤 것. 서울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동네(극 중 서울 반포 서래마을)에 살고 있는, 게츠비처럼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차. 두 개의 이미지는 극단적이다.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는 자신의 공간이고 포르쉐는 분노의 상징일 수 있다.
이 영화에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인 코드는 물론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있다. 예술과 문화, 문학과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코드도 숨겨져 있다. 그걸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순하게 영화적으로만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도 단순하게는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단순한 영화적 방식으로 느끼고 받아주길 바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남자의 대결로 보인다. 무력한 젊은이(종수)와 모든 걸 다 가진 듯한, 그러면서도 세련된 정체불명의 사나이(벤·스티븐연). 어쩌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신처럼 생각하고 있는 두 인물간의 대결로도 보인다. 둘 사이에 놓인 여자는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그 여자를 혼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여자로 봤다. 저녁노을이라는, 그야말로 자연의 신비 앞에서 혼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 영화에 나온 ‘그레이트 헝거’처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이미지로 그리고 싶었다.
첫댓글 아직 영화관람은 못했지만 IPTV에서 나오는 짧은 컷에서 남자를 소개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유아인의 모습을 보면서 아들만 둘 키우는 아버지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되더군요. 삶이 참 녹녹치 않은 것이지만 그래도 편하고 꽃길만 걷게 하고 싶은 맘이 있어 피하게 됩니다. 그래도 애써 접하지 않으려 해도 어느 순간 옆에 와 버티고 있네요. 잘읽고 갑니다.
<버닝>을 보면, 70년대초 오로지 돈을 벌어야한다는 일념 하나로 살던 저의 젊은시절에 비해, 오히려 외견상 풍요로워보이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더 힘겹게 살아가는듯해서 안쓰럽기 짝이 없더군요. 저의 세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달까, 매사가 지극히 단순한데비해 지금은 그만큼 삶의 욕구나 사회구조, 현실상황이 복잡해진 탓도 있을거예요. 더욱 큰 문제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맘 속으로 엄청난 분노- 정체가 애매하고 흐릿한 형태로- 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