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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 배우 마임이스트 유진규 + 고구려 밴드 소리꾼 이길영)
(우리의 국악을 서양의 락 장르에 접목하여 ‘아라리 락’이라고 하는 한국적 락을 구현해 나가고 있는
고구려 밴드의 리더 이길영을 만나다.)
* 인터뷰 시작~
유진규 : 음악이 듣던 바대로 우리의 아주 토속 맛, 특히 강원도에 토종 맛이 물씬 난다.
* 상당히 범상치 않은 고구려라는 밴드 이름을 짓게 된 특별한 이유는?
=> 처음에는 헤비메탈을 했었다. 머리도 길고, 쐬 좀 꼽고.. 치렁치렁하게,,
그때 좀,, 강력한 이름이 필요했고, 여러 가지 생각했는데,, 바야흐로 문화전쟁의 시대.
옛날엔 땅따먹기였다면 지금은 문화전쟁의 시대니까,, 고구려로 하자~
못다 이룬 꿈을 문화전쟁의 시대에 맞게,, 거창하게 만들었다.
그때 (헤비메탈 했을 때) 고구려 밴드. 고구려라는 이름도 대게 어울렸었는데..
점점 그 이름 때문인가,, 음악이 이렇게.. 바뀌면서,, 요즘에는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 고구려 밴드의 시작은 언제였나?
=> 밴드는 2000년도에 결성했다. 강릉에서 음악을 처음 배우고 시작을 하다가,, 속초에서,,
학생들 동아리 연습실에 찾아가 연습실을 빌려 쓰게 되었는데..
거기서부터 고구려 밴드를 만들어 1년 정도 연습을 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 락을 처음 시작한 건 언제이고 어디서였나?
=> 춘천에서,, 한 1년 반 정도 덤프트럭 운전을 하고 있었다.
원래 정선에 있을 때부터 덤프트럭 운전을 했었다.
그때,, 출장을 춘천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가 한 스물여섯 정도였던 것 같다...
강원대에,, 백령회관인가 있었는데.. 백령회관에서 헤비메탈 밴드, 블랙홀이란 밴드.
그 당시 대게 유명했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덤프트럭기사는 그냥,, 트로트 딱 듣곤 하니까. 전혀 그런 걸 몰랐다.
그런데 아는 후배가,, 한번은,, 자기가 여자 친구하고 갈려고 티켓을 끊어놓고 있었는데,,
여자 친구가 펑크를 놓고,, 이제 갈 사람이 없으니까,, 형~ 같이 가요~
그래서 우연히 거기 갔다가,, 그냥 거기서,, 아!! 저게 뭔가.. .. 나, 저거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정선을 내려와서 밴드를 만들었다. 포크레인 기사,, 등등 해서..
너 좀 기타 칠 줄 아냐? 너 좀 드럼 쳐~ 이런 식으로 해서..
나조차도 기타는 만질 줄도 몰랐다. 락에 대한 개시를? 그냥 확 받은 것 같다.
삶을 바꾼 계기(?)가 되었던 것도 같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너무 좋으니까..
해보고 싶어서, 그냥 프로로 간다기보다 아마추어로 그냥,, 직장인 취미 밴드처럼,,
일을 다니고 있으니까,, 또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돈도 좀 있고 하니..
악기도 맘대로,,, 좋은 거 갖다가 놓고.. 그렇게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 제일 처음 밴드 할 때는 이름이 뭐였나?
=> 그때,, 밴드를 만들었을 때는,, 스톤이라는 밴드였다. 돌떵거리.
* 강릉에서 처음 공연을 했었나?
=> 밴드를 만들어서 1년 정도 열심히 했다. 블랙홀도 많이 카피하고 또 해외 밴드들도 카피하고.
그땐 내가 포지션이 베이스 겸 보컬이었는데 그 베이스, 도가 어딘지도 잘 모르고,,
하여간 엄청 고생을 하면서 연습을 했고,, 근데 정선에 락 밴드가 있다는 걸 알고,,
강릉에서 락페를 기획해서... 락페스티벌을 하는데,, 섭외가 왔다.
거길 가서 공연을 했는데,, 아주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줄이 끊어졌다. 공연 도중에,,
블랙홀처럼 까만 옷에 머리 길러서 노래 열심히 했는데,, 두곡 했나?
기타 줄이 끊어진 거다.. 보통 보면,, 쏠로도 하고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준비가 안되어 있고,, 말은 하긴 해야 될 것 같아서,,
나는 땀쁘 기사고요~ 야는 저기 포크레인 기사고요~ 야는 머 카센타 종업원이고요~
우린 정선서 왔어요~ 그랬더니,, 하하하~~ 빵 터졌다.
정선에 무슨 저런 밴드가 있냐~ 며 웃음바다가 되고,, 그래도 그맘때 부활.
부활이 그때 같이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부활 김태원씨가,,
롤리 나잇이 대게 히트할 때였는데, 전국투어를 하는데 같이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었다.
그땐 그게 기회인지도 모르고,, 아이~ 우리는 일 해이돼요~~ 라고 했다는... 하하~~
우린 바뻐요~~ 하하하~~ 그 때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맘때 정선 친구들은 남아있고,, 나만 더 하고 싶어졌다.
첫 무대를 나름 큰데서 하다 보니까.. 나 이제 강릉 가서 제대로 해야겠다 생각하고..
혼자 강릉을 넘어갔다. 강릉에서 한 2년 정도,, 헤비메탈 밴드를 만들어서 막 하다가,,
친구들한테 서울을 가자고 했더니 안가더라.. 그럼 혼자라도 가겠다 했더니,,
주변에 있는 음악 하는 친구들 중에,, 서울서 음악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럼 우리 같이 밴드를 만들어서 올라가자! 그런 제안을 하고.
일단, 그냥 올라가면 안되니까.. 연습, 1년 정도 진짜 열심히 좀 해서 올라가자. .
그래서 속초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고구려 밴드를 만들게 된거다. 그때가 출발이 된거다.
* 서울로 와서는 어찌 되었나?
=> 서울로는 아무 연고도 없이 왔다. 무작정 상경을 했다. 결국엔 생활이 안되었다.
아는데도 없고, 연고도 없이 올라오다 보니까. 나머지 멤버들은,, 좀 힘들어서,,
하나둘씩 나가기 시작 하는 거다. 시골로 내려가는 친구도 있고..
떨어져 나가서 어디 친척이나 연고가 있는 친구는 거기 가고,,
나는 그때,, 이제부터 음악을,, 그냥 우리한테 잘 맞는 걸 하자~ 하고 제안을 했는데..
이게 잘 안 받아 들여지고.. 오랫동안 양악만 한 친구들이라서. ..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제 다 떠났다.
혼자 남고 결국 해체되고. 그래서 다시 고구려 밴드 2기를,, 모집을 하는데,,
초창기 친구들은 또래들이었다. 다 한해 밑에 아니면,, 일이년 터울이었다.
음악을 한 십몇 년 하다 보니까,, 다~ 뭔가를 아니까,,
새로운 걸 제안 했을 때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고 이게 선이 있으니까.. 힘들더라...
그래서,, 어린 친구들을 데리고 하자~ 차라리 말 잘 듣는 친구들로.
그래서 어린 친구들을 불러서 했는데,, 또 넘 어리니까,, 쫌..
그런데 그 친구들이랑 했을 땐 어느 정도,, 색깔은 나왔다. 내가 생각 했던 거.
누가 뭔 얘기를 해도 아냐~ 이건 이렇게 가~ 매우 독선적으로 밀어 붙였다.
그 멜로디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 안돼~ 막 이런 식으로, 밀어 붙이니까.. 색깔은 나왔는데..
그 친구들도 버티지 못하더라. 음악 세계가 틀리고.. 어리니까 일단 따라 온 거지..
형이 가자고 하니까.. 따라 왔는데 결국은 2년째. 막 위태위태했었다,, 그런데 그 맘 때.
소속사가 생기게 되었다. 소속사에서,, 첨에 제안이 뭐 였나면 음악 색깔 좋다~
일단 계약을 했다. 위태로울 무렵이었지만.
멤버들도 버티기 힘들어 하는 상황에서도,, 어째든 기회가 왔으니까..
우리 이제 다시 하자! 거봐라~ 형 말대로 하니, 되잖냐~ 하자~!
딱, 이제 소속사가 생기고, 연습실도 생기고, 열심히 연습을 해서 ,,
앨범 1집, 녹음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회사 대표가,
야~ 이거, 이거 안팔린다~ 그리고 너! 사투리 고쳐라~ 그리고, 밴드 이름 바꿔라~
그리고 음악, 이런 거 말고,,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다시 만들어라~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물론 나도 스타가 되고 싶어서 서울로 올라와서 음악이 좋아서 한 거지만,
내 안에 없는 것들을 만들라고 하면은,, 못 만들지 않겠나. 그리고 또 가식적이라서 좀, 힘들더라.
그래서 전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 했더니,, 결국엔,, 짜르더라.
그렇게 나만 나오게 되고 멤버들은 거기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당시 분위기에 꽃미남 스타일의 젊은 사람 뽑아 소리꾼(보컬)으로 들어가고
작곡가들이 붙고 해서 다른 팀으로 가게 되고,, 나는 또 혼자 남은 거다.
* 고구려 밴드 1집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나?
=> 소속사에서 나와 짐을 쌌다. 고시원에서 살 때인데.. 시골로 내려가야지~ 음악을 포기하려고 했다.
너무 힘들었다. 더 이상의 자신감도 없고.. 그런데 또 설마 사람이 이렇게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기타 치는 친구 한 명이라도 있으면,
국악적인 우리 정서에 맞는 걸 표현해 낼 수 있는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진짜 없을까? 이제는 마지막이다! 라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살펴보고 있었다.
벼룩시장처럼 구인 구직 이런 식의 연주인들도 그런 사이트가 있는데 그 곳을 보고 있었다.
베이스입니다. 기타입니다. 이런 식으로 글이 올라오는데.. 장문의 어느 글이 있었다. 보니까 기타인데..
게리 모어를 좋아하고 국악을 좋아합니다. 그래? 하고 쭉 읽었다.
그리고 본인 음악은 어디 가시면 들을 수 있다, 고 해서 그 사이트 가서 들어보았다. 엇!! 이 놈이다!!
이 사람이 할아버지건 애건 상관없이 무조건 이 사람이다. 무조건 붙들고 음악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바로 연락을 했다. 그 바로 온 사람이 지금의 고구려 밴드 기타리스트 양안복 씨다.
그 친구를 만난 날은 비가 엄청 오는 여름이었다. 바로 막걸리 한잔 하러 갔다. 먹고 나서는..
우리 쨈을 해보자! 노래하고 연주해보자. 했는데 1집의 곡들, 편곡이 그 날 밤에 다 끝나버렸다.
노래는 이미 만들어 논 상태였고 연주가 되니까.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내달라 하니 척척 나왔다.
산조가락도 쩍쩍 나오는 거였다.
그래서 알고 봤더니 이 친구가 산에서 한 5년 동안 통기타로 가야금 산조만 팠더라.
락 음악도 했던 친구고 해서 이런 연주는 당연한 거였다. 딱 맞았다.
* 곡들은 이전에 직접 다 만들어 논 거였다고? 대표적인 곡들은?
=> 직접 내가 다 만들었던 것들이고 ‘아라리’란 곡이 있고. 1집 제목은 ‘주색만찬’ 청소년 계몽송.
기타를 만나고 1집 데모를 만들어 논게 있었는데..
국악 쪽에 친구가 우리나라에서 국악 창작제를 최초로 하는데 거기 출품을 해봐라~ 하더라.
그래서 그 쪽으로 데모 씨디를 보내봤다. 그랬더니 바로 1차 예심 나와라~ 하더라.
그래서 밴드를 잽싸게 꾸리게 되었다. 기타는 있고 베이스를 구해서 오게 된 친구가 지금 베이스다.
그렇게 드럼까지 해서 세션들을 붙여서 대회를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평생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금상이 된거다. 상금도 두둑하고.
그 상금으로 1집을 녹음하게 된 거다. 그리고 그 때 꾸린 팀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 밴드의 활동이 시작이 되고 멤버들도 탄탄해졌다.
* ‘아라리 락’이란 표현을 쓰는데 일반 락과 우리의 락을 구분하고 있고 분명 한국의 락이다.
‘아라리 락’이라는 걸 좀 더 설명을 한다면?
=> 1집 앨범을 내고 나니 사람들이 묻더라. 크로스오버나 퓨젼이란 말도 맞는데 그런 말들이 싫더라.
왜 크로스오버인가? 양악기를 한다고 그런가? 락을 한다고 그런가? 설명하기가 애매하더라.
크로스오버나 퓨젼이라고 대답을 하긴 해도 아닌 것 같더라.
양악기가 우리한테 들어온 지 100년이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화 될 때가 되었다.
소리와 악기의 개념은 다르지만 느낌은 똑같다. 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표현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리랑’이라는 큰 매개체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또 내가 정선 아리랑을 듣고 자라서도 그렇고.
그 정서를 그대로 옮겨서 음악을 하는데 국악 크로스오버도 아니고 락과 국악의 만남도 아니고 그냥..
‘아라리 락’ 이다! 그냥 우리 정서! 있는 그대로! 우리는 그냥 락 밴드이니까.
이건 그냥 ‘아라리 락’! 이다. 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 보컬은 판소리와 같은 탁함과 강함이 있고, 기타도 거문고, 해금, 가야금 등의 소리가 있고
드럼도 역시 그런 것이 있고, 그런 고구려 밴드만의 특이한 소리들이 있는데 어떻게 찾았나?
=> 헤비메탈을 했었는데 우리의 것과 맞는 게 많았다.
궁상각치우, 음계, 리듬 등 크게 다를 게 별로 없다.
그런데 호흡적으로 들어가면 엄청 어려운 게 국악이다.
물론 싸운드를 그렇게 만들어 내는 건 사실 힘들었다.
1집의 경우는 헤비메탈 성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곡조만 그렇게 흘러갔던 것이다.
2집도 쫌 그렇고. 아직도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사실 우리 국악을 양악으로 시도를 한 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도 많이 하고 있지만.
고구려 밴드의 시도가 대단히 성공적인 모델이다. 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지금 하고 있는 방향이 아주 잘 찾아 가고 있는 것 같은가?
=> 처음에는 막연했었다. 어느 정도 길이 보이니까, 이거 답이 나온다. 목적 없이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소리도 있다. 밴드의 소리 개념도 있고. 꼭 만들고 싶은 것도 있다.
밴드라는 개념도 그렇고 이 음악은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도 없고.
통기타 들고 혼자 노래하기엔 약하고 같이 어울러서 자기 호흡들이 나오고 그 소리가 맞았을 때,
그 팀의 싸운드가 정리가 딱 되는 거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 우리만이 갖고 있는 소리들이 락으로 실어져서 나오는데 요새 젊은이들도 좋아하나?
=> 초창기에는 어린 친구가, ‘저 건거 창송녹죽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니~’ 하니까.
음악도 처음 듣는 것이니 아리까리 한 상황이고 이상하고 안어울리는 상황으로 보았다.
그렇게 애매하게 보다가,, 1집 정규 앨범을 내고 나름 평론가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내리고..
음악적으로 인정을 받고,, 실험적이고 좋다~ 라고 반응이 나오니까 그 다음부터는 뭘 해도 되더라.
예를 들면, 무대에서 막걸리를 먹어도 이해를 하고 농을 해도 이해를 하고 ..
처음엔 쫌 그랬는데 어느 정도 알려지니까 이제는 뭘 해도 기대를 한다. 이제는 뭘 할까? 하는 기대.
이제는 가족 단위로 온다. 3대가 오는 경우도 있다.
손자 손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쭉 공연을 보러 오시기도 한다.
‘비나리’를 하고 있으면 어느 할머니가 오셔서 돈을 놓고 비시기도 한다. 뭔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문화가 있었고 지금도 있잖는가.
밴드이지만 ‘비나리’고, 기원을 하는데 있어서는 소리가 틀리건 뭐가 틀리건 상관이 없는 거였다.
그 분들도 상관이 없고 나도 공연을 하는데 있어서 상관이 없는 거였다.
* 지금 이 시대에, 한국 사회에 젊은 문화 속에서 ‘아라리 락’을 주창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는데
거기에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 내 스스로한테는 그냥 칭찬을 해주고 싶다. 다른 거 없고 그냥..
‘길영아~ 포기하지 말고~’, ‘잘 하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하자~!’
어릴 적부터 자라면서, 칭찬이란 건 없는 환경에서 자라다가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그것을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을 때에, 기분이 좋으니까 계속 잘하게 되고.. 열심히 하게 되고..
실은, 그렇게 해서 칭찬을 듣기보다 ‘아라리 락’이 어느 형태까지 만들어 진다면,
그 차후에는 더 섞어 보려는 친구들이 많아질 것 같다.
양악과 국악과의 관계를 쉽게 생각하게 될 것 같다.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굿 당에 가서도 밴드가 굿을 하는 것이 익숙할 수도 있고..
정통 악기도 굿을 하지만 밴드가 굿을 해도 되고.
양악기를 우리 문화에 끌어 왔으면 하는 바램 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 고구려 밴드의 아라리 락이 일반 대중에게 알려 지려면 음반을 통해서 알려야 하는데
그 동안 음반은 몇 개나 되나?
=> 정규 두 장. 싱글 두 장.
처음 나온 것은 정규 1집 ‘주색만찬’. 싱글 ‘산 너머로 가세’
정규 2집 ‘광부’. 최근에 ‘밴드래기의 노래’ 싱글 (‘밴드래기’ : 전북지방 방언. ‘장독뚜껑’)
작곡 작사는 직접 하고 있다.
* ‘아라리 락’을 구체적으로, 음악성을 갖는 과정에서 멤버들은 서양음악을 해오다가 접했을텐데
상당히 갈등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가?
=> 고구려 초창기 멤버 때도 그랬고 지금 현재 라인업 멤버들도 처음엔 다 어떤 반응이었냐면,,
내가 음악을 전공하고 음표를 그리거나 이론적으로 설명을 못하니까,,
나름 음악을 만들어 멜로디 부호는 잘 몰라도 코드 부호로 해서, 이런 진행이다 이런 식이다 들어봐라~
하면,, 이게 뭐냐.. 말이 안되는 화성법 아니냐.. 이론적으로 말도 안되는 장조와 단조도 마음대로이고..
정형화 된 박도 없고.. 마디도 막 넘어가고 막 바뀌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며,,,
나는 되는데 왜 니는 안된다고 하느냐.. 왜 말이 안되는 거라고만 하느냐.. 라며..
그런 것들이 부대꼈다. 물론 지금도,, 국악도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로 다 잘 되어 있고 전문학교도 있고.
하지만 내가 딱하게 생각하는 부분 한 가지는 물론 교육적으로는 배워야 하는 것들이지만,,
그 전에 정서라든가 그 정신을 좀 더 중요시 하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이 기능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정서와 정신은 없어지고 그런 것들은 촌스러운거 라며 기능이 고급스러운 거로 생각하는..
그렇게 되면 대화가 안되는 상황이 된다. 화성에 갇혀 못나오는..
스케일이 안맞으면 어떻게 표현을 하느냐는 식.
그래서 내가 입으로 노래를 하거나 멜로디를 표현해 주면 점점 정리가 되었던 것 같다.
(예술이란 것은 사실 틀이 없는 건데, 그리고 각 민족이면 민족마다 고유의 것들이 있는 건데,,
그런 것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 유진규)
* ‘아라리 락’을 계속 해 나가겠지만 앞으로 이런 쪽으로 음악을 만들고 싶다 하는 것은 어떤 게 있나?
=> 하고 싶은 음악이 쫌 많이 있다.
‘아라리 락’으로는 일단 늘상 꿈 꿔 왔던 것인데 드라마 같은 앨범을 내고 싶다. 마당극 같은.
음악은 하나. 씨디 한 장에 한 편의 영화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 한 장에 이야기가 있는.
스토리가 있고,, 드라마로 엮어서 그걸 그냥 콘서트 장에 옮기면 마당극이 되는.
한 편 전체가 이야기가 되고 마당놀이가 되는. 그런 거 하나 작업해 보고 싶다.
또 우리나라 최고 중에 최고 굿!!
예를 들면 밴드가 뒤에서 고수를 해주고 연주를 해주면 무당이 앞에서.
굿의 음악을 밴드가 한다고 생각했을 때,, 시도해봤으면 좋겠다.
* 굿도 하나의 드라마성을 갖고 있으니까 결국 굿과 또 하나로 합쳐질 수도 있겠다.
어떻게 보여 질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하다.
=> 여러 번 국악 팀들과 협연을 하였다.
국악기를 못이길 정도로 국악기는 최고로 엄청 튀는데,, 하면서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악기가 부디치지 않게끔 정리가 되었다.
계속 시행착오를 겪는데 정리가 좀 되는 것 같아서 이제는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한다.
* 공연은 주로 어디서 하나?
=> 홍대 클럽 위주로 공연을 한다.
* 해외 활동은 한 적이 있는지 아니면 앞으로 계획이 있는지?
=> 작년에 처음 나가봤다. 워멕스라는 월드 뮤직 엑스포, 세계 큰 엑스포인데 말 그대로 월드 뮤직.
그 나라의 전통을 갖고 세계시장에 맞는, 세계인들이 공연할 수 있는 그런..
한국 대표로 ‘들소리’가 참여했다. 거기에 나는 객원보컬로 나갔다. 대표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니가 나가봐야.. 세상을 봐야.. 알지~ 내가 니한테 백날 얘기해봐야 니는 모른다.. 가자!! 그러시더라.
예! 하고 그냥 따라 갔는데 아오~ 촌놈 아주 그냥 깜짝 놀랐다.
일단 시장 규모에 놀랐다. 나는 정말 우물 안 깨구리였다. 시야도 짧았고 음악의 소양도 그렇고.
그그그 세계에서 온 뮤지션들에 비하면 모든 게 짧았다.
* 각 고유의 음악이 갖고 있는 세계적인 음악성을 보여주는 자리로 알고 있는데
지금 고구려 밴드의 ‘아라리 락’도 바로 그러한 세계인 것 같다. 어떤가?
=> 많이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가능성은 봤다. 우리도 정말 열심히 하면 저 무대 설 수 있다.
아쉬웠던 건, 멤버들도 같이 갔으면 엄청 좋았을텐데.. 멤버들 데리고 그런 자리 꼭 갈 것이다.
그런 판에서 공연을 해보고 싶다. 그래도 올 해 일본으로 해외 공연을 간다.
* 글로벌 코리아,, 상을 받았던데 어떤?
=> 글로벌 리더스 코리아라고..
예술가 협회에서 주는 상이고, 그 상을 계기로 유니버셜하고 계약도 했었고 계속 진행 중이다.
사실 그 쪽에서는 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인데 나의 고집스러움으로 장사꾼과 마찰도 있었으나..
그것도 내가 세상을 너무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판이 벌려져 있으니까..
오라는 곳도 있고 초청도 받고 하니, 가서 보여주고 하면 될 것 같다.
* 일본 공연은 어떤 자리인가?
=> 일본 오사카. 아시아도서관이란 곳에서 주최를 하고 비빔밥이라는 한국어 배우는 동호회가 있는데
그 분들이 우연히 우리를 보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사실 락 음악 시장이 참 크다.
락 밴드들이 다 먹고 살 정도다. 그런데 그들에게 없는 락 음악이니까, 저게 뭐야~ 이렇게 되어..
공식으로 초청을 받았고, 가서 콘서트를 하게 된다. 가면 ‘아라리’도 지대로 한번 들려주고.
그 분들이 기획부터 하는데, 작년부터 우리를 만나려고 두 번이나 왔었다. 그 사람들은 아주 철저했다.
* 그런 기회들이 앞으로 더 크게 나가는데, 좋은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이다.
누구나 자기 길을 찾아서 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련, 좌절을 겪지만 고구려 밴드도 밴드를 했다가
홀로 남았다가를 반복하며 어려운 과거가 많았는데 그러면서도 자기 음악, 그게 바로 곧 우리 음악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을 현대 락에 담아갖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알려 주는 그 일이,
정선 아라리의 힘으로 계속 나갔으면 하는 바램 이다.
고구려 밴드, 만주 벌판을 달리던 그 기상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 사실 이 ‘아라리 락’이라는 게, 시작 단계이고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막연한 생각이지만 분명히 답은 있다고 생각은 하고,,
물론 전통도 소중하지만 현대 음악도 중요하다.
또 그 사이에 붕 떠있는 갭들도 많이 좁아졌으면 좋겠고 우리 음악을 통해서도 좁아졌으면 좋겠다.
앞으로 좀 더 기대해 주시고 지켜봐 주셨으면 한다.
* 우리 땅에는 우리 음악이지 않나 싶다.
= > 아주 그냥 ‘아라리’가 최고래요~
(자막1 : 우리의 국악을 락(ROCK)에 접목, 가장 한국적인 사운드를 구현해 내는 ‘아라리 락’의 개척자 고구려 밴드)
(자막2 : 이길영 [락가수, 작사, 작곡가, 뮤지컬 배우] 1972년 정선 출생.
춘천에서 직장 생활하던 시기에 우연히 락 밴드의 공연을 접한 후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 2000년 고구려 밴드를 결성했다.
서양악기를 통해 국악에 깃든 우리 민족의 정서와 흥을 노래와 연주로 실려 내 ‘아라리 락’의 개척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자막3 : 기타 - 양안복 / 베이스 - 서민석 / 드럼 - 이종훈 )
(자막4 : 토종 리듬과 언어의 실험, 국악 락의 진화 - 임진모 평론가 )
(자막5 : 우리의 핏줄에 녹아있는 / 민족의 정서와 국악의 소리를 / 난 서양악기로 풀어냅니다.)
(자막6 : 음악을 알면 알수록 노래를 하면 할수록 / 점점 더 우리 것에 대한 진한 애정이 생겨나는 건 왜일까요?)
(자막7 :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 ‘빛’과 ‘희망’을 노래합니다.)
(자막8 :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이 시대의 음악작업 / 고구려 밴드가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아라리 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