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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를 다녀와서
기우현
7박 9일간 터키를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8월 1일(월) 오후 3시에 출발해서 9일(화) 오후 1시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와 터키는 소위 형제의 나라로서 평소에 친근감이 있었고, 터키가 유럽과 아시아의 문명이 공존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특이함 때문에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목적이 그렇다는 것이고 나는 정년이 되기까지 안사람과 함께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같이 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은 해외여행을 같이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여행의 목적지를 그렇게 잡고 있었다.
원래는 7월말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친구와의 여행 약속이 확실히 잡히지 않아 미루고 있다가 보니 예약할 시간을 놓쳤다. 나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니 대기 상태는 좋지 않고 해서 마음 편하게 아직 여유가 있는 8월 1일에 갔다 오기로 했다. 평소대로 하나투어에 예약했다. 그런데 상품 가격이 만만치 않다. 여행 가격에 유류 할증료가 붙고 거기에 공동경비 하루 10유로씩 부부 합산하여 180유로를 내면 600만원이 넘는 돈이다. 50만원만 유로 및 달러로 환전했다. 달러는 1,000원대인데, 유로는 1,500원대다. 나는 유로 가격에 놀라서 이번에 선택 관광은 어렵겠구나 생각했다.
우선 갈 준비로 서점에 가서 ‘론리 플래닛’에서 출판한 터키 책자를 샀다. 내가 간 서점에 그 책만 있어서 샀다. 사서 읽어 보니 자세한 정보는 나와 있는데 도보 여행자를 배려한 책자였다. 지도를 보면서 이번에 여행하는 코스를 확인해 보니 터키 일주는 말뿐이고 절반의 지역만 다녀오는 코스였다. 터키의 서부에서 남부로 내려가다가 중부로 가고 거기서 북부로 올라가서 다시 서부로 오는 코스였다. 터키 여행하시는 분께 터키에 대해 어땠느냐고 여쭈어 보면 버스를 많이 탔다는 말씀을 하셨다. 터키는 면적이 779.452㎢로 한반도의 3.5배나 되는 큰 나라다. 사실상 7박 9일의 여정으로는 터키 일주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자세한 내용은 차차 읽어 보도록 하고 터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만 일별했다.
여행하기 전날에 여권, 모자, 선글라스, 잠바, 면도기와 스킨, 옷과 양말, 치약과 칫솔, 비상약(마데카솔, 정로환, 아스피린, 밴드, 소화제, 지사제), 컵라면 4개, 고추장 세트, 여행일정표와 책자, 볼펜을 준비했다. 카메라, 수영복, 선크림 또한 필수품이다. 이는 안사람이 챙기도록 했다. 그 외에 특별히 가져 간 것은 베개다. 호텔 베개가 내게는 편하지 않아서다. 외화도 환전한 돈 외에 집에 있는 몇 푼의 달러도 지갑에 챙겨 넣었다. 살 물건이 있으면 카드로 결재하면 되리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환전은 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인솔자가 동행해서 크게 어려운 점이 없다. 건강히 잘 다녀오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내가 다녀올 7박 9일의 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스탄불(1) - 차나칼레, 트로이, 아이발릭(1) - 에페소, 파묵칼레(1) - 콘야(1) - 카파도키아(1) - 앙카라(1) - 이스탄불(1)이다. 이 일정대로 견문한 내용을 쓰려고 한다.
8월 1일(월)
아침 7시 20분에 일어났다. 애들은 직장으로, 학원으로 나갔다. 나는 신문 보고 아침 먹고. 어제 오늘 챙기려고 두었던 여행 준비 작업을 마저 했다. 베개, 신문, 선글라스, 그리고 귀 후비개도 챙겼다. 혁대 끈도 길어서 조금 잘라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방학일기를 썼다. 오늘은 10시에 나가야한다. 안사람은 아침에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10시 반을 이야기한다. 무슨 계획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지만 안 된다고 했다. 늦어지면 여행사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0시에 준비를 마치고 집밖으로 나갔다. 신림역에 당도해서 리무진 탑승 장소에 가니 마침 리무진이 왔다. 그 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11시 45분쯤 도착했다. 만나는 위치를 정확히 몰라서 다시 표를 꺼내 읽어보고 제 장소로 찾아갔다. 인솔자가 여권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전화로 들려온 인솔자의 목소리로 중후한 40대 여자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인솔자는 우리에게 여행 일정표와 소책자를 주고, 30분 후에 만날 위치를 지정해 주었다. 우리는 여권을 맡기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소책자를 일별하니 실망스러웠다. 터키에 대한 소개는 4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안사람은 휴대폰을 로밍하러 대리점으로 갔다. 우리 핸드폰은 아예 로밍이 안 된다면서 기기를 빌려 왔다. 내 휴대폰은 그다지 쓸 일이 없어 로밍하지 않았다.
우리는 짐을 부치고 면세점에 들어가 선물로 줄 양주(12년도)와 말보로 담배 2보루를 샀다. 터키에서 줄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물건을 사는 것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번에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대한항공이었다. 기내에 탑승했는데 3/3/3씩 앉도록 되어 있다. 예전 비행기보다 편안한 좌석배치였다. 우리 둘이 앉고 또 한 자리 좌석은 딴 여자 분이 앉았다. 그런데 인솔자가 자리가 남는다면서 그 분을 다른 좌석으로 안내했다. 비행기 이륙 예정시각이 2시 25분이었으나 서해 쪽 중국 항로가 혼잡하다면서 25분 정도 지연되었다. 여기서 터키까지는 7시간의 시차가 난다. 그런데 터키는 서머타임제를 실시하고 있어서 6시간의 시차가 났다. 나는 시계를 터키 시간에 맞추어 시계를 돌려놓았다. 무려 11시간 10분의 비행 끝인 8시에 터키의 국제공항인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인솔자는 우선 터키 리라로 환전할 시간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10유로만 리라로 환전했다. 그리고 버스에 탑승했다. 새로 뽑은 관광버스였다. 관광객 숫자에 맞춘 듯 좌측은 한 자리, 우측은 두 자리로 된 버스였고, 벤츠 산이었다. 현지 가이드는 40대의 남자였다. 이름은 김재현. 해외여행을 많이 했고 요리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전직 요리사라고 했다. 가이드는 버스 의자가 라텍스로 되었다면서 좌석이 편안할 것이라고 했다. 가이드가 지금 터키는 라마잔(영어로는 라마단) 기간이고 물값이며 화장실 이용료가 유료라고 했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물병 2병에 1달러를 주고 샀다. 그렇게 산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식당에서 식사하고 남은 물은 챙겨 가지고 마셨기 때문이었다. 그 물은 우리가 낸 가이드 수수료에서 인솔자가 식당에서 산 물값이니 우리가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우리는 오후 9시 40분에 에세르 호텔에 도착했다. 5성급 호텔이다. 가이드는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한다고 했다. 저녁은 기내식이 전부였다. 따로 식사를 하지 않는다. 밤에 시장해서 가져온 컵라면을 하나 꺼내 먹었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우리나라 방송은 나오지도 않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다. 터키 여행이 끝날 때까지 텔레비전을 그리 보지 않았다. 아예 켜지 않은 날도 있었다. 가져온 터키 책을 좀 읽고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기에 눈을 부쳤다.
8월 2일(화)
아침 4시 20분에 기상했다. 터키에 오면서 기내에서 잔 것도 있고 시차 때문에 그래서일 수도 있다. 선크림을 바르고 아침 식사하기 전에 호텔 밖으로 나와서 산책했다. 먼저 호텔 전면을 찍고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갔다. 수수한 동네인데 식당, 여관, 미용원 등이 보인다. 한 블록을 지나 거리로 나오니 큰 도로가 나오는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은 듯 휴지가 길에 널려 있었다. 호텔 앞의 깨끗한 도로와 대조되는 또 다른 길거리 모습을 보는 듯했다.
7시에 식당에 들어갔다. 5성급 호텔과 전혀 다르게 아침은 보잘 것 없었다. 온통 양식뿐이었다. 쌀밥은 없었다. 갖가지의 빵과 치즈만 놓여 있는 듯했다. 특이한 것은 꿀이 많다는 것이다. 벌집에 꿀이 가득 든 상태로 놓인 것도 있었다. 성경에서 풍요로운 땅을 의미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터키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약속된 8시에 버스에 승차했다. 가이드는 안전상의 이유로 셋째 자리부터 승객을 앉게 했다. 우리는 앞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투어에 참여하는 여행객은 22명이었다. 그 중 2명은 현지에서 합류한 여행객이었다. 가이드가 서로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정확히 알았는데, 5명 가족 2, 4명 가족 1, 부부 여행객 2, 부녀 여행객 1, 개인 여행객 2이었다.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아서 가족 단위로 움직였고 부모는 대체로 50대여서 여행 전체가 질서가 잡히고 중후한 분위기를 보였다.
가이드는 터키 지도를 두 사람에 한 장씩 나누어 주고 터키에 대해 대체적인 안내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터키에 온 목적을 여행객에게 물었다. 앞자리에 앉은 나에게도 물었는데, 나는 터키에 한 번 와 보고 싶었고 앞으로 유럽을 여행할 계획인데 그에 앞서 터키에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이드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행복을 찾아서라는 것이었다. 약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 것과 같다. 그렇지만 내가 터키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는 되었다. 이번 여행 역시 시간 속에 살면서 시간을 덧없이 흘려보내기가 아까워 조금이라도 가치와 여유를 누려보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즐기러 왔지 철학을 논하는 그런 자리는 아니지 않는가.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제는 밤길이어서 도시의 야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차나칼레로 해서 트로이로 가는 일정이다. 호기심으로 터키 땅을 바라보았다. 넓은 평야, 낮은 구릉, 그리고 비교적 건조한 땅. 이것이 버스 속에서 내가 본 터키의 모습이었다. 구릉에는 올리브 나무, 소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혼합림은 없고 단일 품종의 나무만 있다. 밭에는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런데도 터키인들은 해바라기 씨를 즐겨 먹어서 해바라기 씨도 수입할 정도라고 했다. 점심은 ‘토로이아 아고라’라는 식당에서 고등어 케밥을 먹었다.케밥이라 하면 보통 밀 전병에 고기와 야채를 싸서 먹는 그런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한다. 그런데 가이드는 케밥이 불에 조린 음식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라고 설명한다. 터키에 와서 약간 신비한 음식을 먹어 보나 했는데 그런 기대가 깨졌다. 쌀밥은 우리가 먹는 쌀밥과 달랐다. 약간 짠데, 터키 사람들은 생쌀에 소금과 치즈를 넣어서 볶다가 물에 삶아 먹는다고 했다. 이 쌀밥은 우리 고추장과 잘 조합을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는 식사 때마다 가져 온 고추장을 꺼내서 밥에 비벼 먹었다.
우리는 게리블루 항에 도착했다. 버스와 함께 승선해서 다르다넬스 해협[차나칼레 해협]을 건넜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에게 해에서 마르마라 해로 들어오는 해협이다. 이곳은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는 해협이기도 하다. 길이 61킬로, 폭 1-6킬로다. 물이 깨끗하고 바다 주변의 낮은 구릉과 해변의 집들이 평온한 느낌을 보여 주었다. 30분 만에 랍세키 항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온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고대 트로이는 아시아에 위치해 있는 도시 국가인 것이다.
버스 속에서 인솔자는 가이드 팁으로 1인당 90유로를 걷었다. 나는 합산하여 180유로를 냈다. 가이드는 선택 관광인 카파도키야 열기구에 대해 설명하면서 신청을 받았다. 나는 신청했고 안사람은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신청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타려는 준비를 하고 왔는지 19명이나 타겠다고 신청했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어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 갔던 중요한 도시였다. 이는 독일의 사업가인 슐리만에 의해 파헤쳐진 9개 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트로이에 도착하니 열주가 세워져 있고 그 안에 트로이 목마가 서 있었다. 물론 전설 속의 목마이긴 하지만, 이것은 관광용 세트였다. 우리가 트로이에 도착하기 전에 가이드는 영화 ‘트로이’를 보여 주었는데, 영화 속의 성곽과 트로이 목마가 더 사실적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선 우리는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제대로 설치한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사무실에 가까웠다. 그 속에 슐리만 사진 등 여러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에 유물이 없는 이유는 슐리만이 발굴한 보물을 밀반출해서다. 현재 이 유물의 상당수는 러시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터키는 그 문화재를 조속히 반환하는 외교적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박물관에서 나와서 성벽으로 갔다. 성벽은 우리나라 성벽과 달리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형태였다.
가이드 말로는 이런 성벽이 수직 성벽보다는 위에서 적병을 관측하기가 더 용이하다고 했다. 또 이 성벽이 삼중으로 세워져 있어서 적이 성벽 하나를 뚫었어도 또 하나의 성벽이 있어 이중 공격을 받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 연합군이 목마를 내세워 트로이 성 내부를 공격하기 전까지 이 성은 난공불락이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관측병이 올라가서 적을 관측하는 자리에도 올라갔다. 지금은 바다에 퇴적이 이루어져서 논밭만 보이지만 옛날에는 바다가 인접한 성이었다고 한다. 트로이 병사는 활을 잘 쏘고 이 성 또한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이 바닷길을 통과하는 배들은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갈등이 헬렌이라는 미녀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이 발발했다는 서사시의 내용과 또 다른 진정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적지 안에서 제단도 보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지층도 보고, 슐리만이 트로이의 보물을 캐기 위해 마구 파헤친 현장도 보고, 트로이가 함락되었을 때 탈출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로 동굴도 보았다. 그리고 오데온이라는 원형 극장도 보고 나왔다. 전체적으로 복원이 안 된 상태인데, 함부로 서두는 것보다는 낫지만은 너무 안이하게 복원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트로이 목마에 올라갔다. 3층 건물 높이인데 1층은 다리 부분, 2층은 5개의 구멍, 3층은 2개의 사각 구멍이 뚫려 있어 전체 14개의 구멍이 있다. 우리는 그곳에 올라가서 얼굴을 내밀고 기념 촬영을 했다. 인솔자가 찍어 주었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에 가서 간단한 기념물을 샀다.
그리고 버스를 3시간 타고 아이발릭이라는 도시로 갔다. 아이발릭은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해변 가 휴양도시였다. 오늘의 숙박 지는 마라호텔. 4성급 호텔이었지만 초라했다. 모텔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분이 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모기가 많다고 한다. 여태까지 해외여행을 다녔어도 모기에게 물린 경험이 없는데 뜻밖이다. 우리도 모기향을 빌려 뿌렸다. 가이드가 전자모기향 1개를 주었다. 서랍에서 전자 모기향 기구를 꺼내 전원을 켰다. 짧은 바지로 갈아입고 해변을 산책했다. 에게 해는 잔잔했고 물결은 푸르렀다. 저녁을 먹고서도 산책했다. 해변 가에서 발을 물에 담그는 정도로 그쳤다.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었다.
8월 3일 (수)
오늘은 5시 기상, 6시 식사, 7시 출발 예정이다. 5시에 기상해서 청바지를 입었다. 잠바도 준비했다. 6시에 나와 보니 아직 식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단 가까운 해변 가에 나왔는데 다른 사람들 역시 바닷가에 나왔다. 사람이 붐비었던 어제 오후와 달리 한적한 분위기다. 우리는 사진 몇 장 찍었다. 안사람은 벌써 여러 사람과 사귀었는지 대화가 활발하다. 이곳도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데, 해변 가의 어떤 아카시아는 나뭇줄기가 마치 교목같이 굵었다. 특이했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다가 식사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하고 식당에 들어가 식사했다.
오늘은 에페소로 해서 쉬린제 마을을 관광하고 파묵칼레로 가는 여정이다.
자료에 의하면 에페소(Efesus)는 기원전 2-6세기에 에게 해의 대도시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그리스 상인들로 활기를 띤 도시였다. 초기 전설에 따르면 이오니아를 다스리던 안드로클루스는 북방 도리아인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는 새 왕국을 건립하기로 마음을 먹고 델포이 신전을 찾아가 새 정착지로 적합한 장소에 대한 신탁을 구했다. 신전에서는 그가 ‘물고기, 불, 그리고 돼지’ 등의 세 가지 요소의 도움을 받아 새 도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졌다. 안드로클루스는 그리스 땅을 떠나 오랜 여행 뒤 찾아온 허기를 달래기 위해 해안에 터를 잡고 갓 잡은 물고기를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고기가 그릇 밖으로 튀어 나오면서 숯불을 뒤엎었고 이 때문에 근처 숲에 불이 나게 되었는데 이때 숲에 숨어 있던 멧돼지가 놀라 뛰어나오면서 도망갔다. 안드로클루스가 뒤쫓아 멧돼지를 잡은 지점(오늘날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지가 있는 자리)에서 장차 에페스가 될 터를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교회 역사에서 에페소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살던 곳이고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하고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성지다. 사도 바울도 이곳에서 3년간 거주했다고 한다. 언덕 너머에 성모 마리아의 집도 있고,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사도요한의 교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코스에 들어 있지 않아서 가보지는 못했다.
가이드는 우선 ‘양피즈’라는 가죽 공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공장에 들어가니 거기서 우리에게 먼저 패션쇼를 보여 준다. 그리고 관광객 일부에게도 패션쇼를 할 수 있도록 권유하고 나서는 쇼핑하게 했다. 안사람에게 점원은 겉과 속을 바꿔 입어도 모양이 괜찮은 옷을 소개한다. 내가 보기에 그 옷이 그럴 듯 해서 사 입으라고 권유했으나 안사람은 돈이 부담이 되는지 사지 않았다. 내가 듣기에 승객 중 1분만 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가이드의 어깨가 축 쳐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이드는 순서를 바꾸어 쉬린제 마을을 먼저 관광하기로 했다. 쉬린제 마을이 고지대에 있어 버스는 구불구불한 계곡으로 깊이 들어갔다. 쉬린제란 쾌적하다는 뜻인데 고대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현재 주민들은 1920년대 터키 공화국이 건립되면서 인구 교환정책에 따라 그리스에서 살던 주민들이 이주해 왔다고 한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시간을 주고 마을을 둘러보라고 했다. 우리 끼리 마을로 들어가는데 고불고불한 길 속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우리는 오른쪽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 거기에는 세례 요한 교회가 있었다. 지하 교회인데 보수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벽을 장식한 두 벽화는 비잔틴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교회 앞 우물은 깊지 않은데 우물 안에 둥그렇게 파진 구멍이 보인다. 사람들이 작은 동전은 물 위에 띄워 그 구멍 안에 넣으려고 시도한다. 아마도 그렇게 하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 모양이다. 좀처럼 동전은 그 구멍에 들어가지 않는데 성공하면 아주 기뻐했다. 안사람도 몇 번 시도하다 들어가니 아주 기쁜지 모르는 사람과 손을 마주치며 기뻐했다. 돌아오는 길에 안사람은 복숭아와 포도를 샀다. 이는 지루한 버스 여정 속에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우리는 그 마을에서 나와서 이곳의 유일한 한식 식당인 ‘한나 식당’으로 갔다. 모처럼 비빔밥을 먹었다.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에페소 유적지로 갔다. 가이드는 우리를 남문에서 북문 쪽으로 안내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방향이다. 지중해성 기후는 그늘은 비교적 선선한 편인데 여기는 그늘이 비교적 없고 햇볕은 뜨거웠다. 그래서 관람하기가 힘든 코스였다. 가이드는 먼저 바닥에서 새겨진 그림을 설명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표시하는 원형의 비밀 표시 그림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데 이용되던 흙으로 만든 수도관을 가리켰다. 로마는 도시를 먼저 건설하고 물을 끌어오는 기술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오데온(Odeon)이라고 불리는 5,000석 규모의 극장으로 갔다. 주로 시정 논의를 위한 회합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사진을 찍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안사람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하고 건너편 층계로 뛰어 올라갔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계단에 엎어져 있었다. 왼쪽 팔뚝과 왼쪽 무릎 위쪽이 심히 에렸다. 팔뚝은 위 계단 모서리에 무릎은 아래 계단 모서리에 찧은 것이었다. 웃옷을 벗기니 15cm 정도 피부가 벗겨져 벌겋다. 찢어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위쪽은 확인이 되었는데 청바지를 입은 아랫도리는 팔목 쪽보다 더 심한 듯했다. 인파가 많은 곳이라 바지를 내려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상태를 확인하지 못하니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가이드의 해설은 듣긴 했지만,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다음 코스로 그들이 사용했던 목욕탕과 그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은 돌계단에 앉아서 용변을 보는 형식의 건축물이었다. 각자 지정석이 있었고 손을 씻는 장소도 마련돼 있었다. 용변을 보는 앞자리에는 용변을 보는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려는 취지로 만든 악사들 연주 장소도 있었다. 거리를 따라 내려가면 폐허만 남은 시청과 도시 보물 창고로 이어지는데 거기서는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석주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계속 내려가면 아스클레피온(Asclepion: 병원)이 나온다. 상징인 뱀의 형상과 전령사 역할을 했던 헤르메스의 상이 바윗돌에 새겨져 있었다. 병원이 뱀의 형상을 사용한 것은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이 태어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잔혹한 지배자로 사후에 기록 말살형을 받았다는 도미티아누스 신전, 사도 요한이 처형을 받았다는 장소도 보았다. 신전을 향하는 길은 청소하는데 물을 사용했으며 물이 부족하면 포도주로 청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길이 붉게 물들었는데 흔히 연예인 행사에 까는 ‘레드카펫’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우리가 길 따라 내려가는 거리는 쿠레테스 거리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향료와 실크를 파는 상점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거리 중간쯤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트라이누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트라이누스 황제의 분수가 있었다. 그리고 셀서스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시장이 있었고 유곽도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이 살았던 테라스식 주택들이 있는데 입장료가 별도로 있어서 들어가 보지 않았다. 자료에 의하면 주택들 모두 수도시설을 구비하고 있고 모든 벽과 바닥은 화려한 모자이크와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셀서스(Celsus) 도서관은 전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AD 135년에 집정관이 된 아킬라가 이 지역 소아시아 총독이었던 아버지 셀서스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1만 2000권의 두루마리 문서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뭄의 도서관들에 이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광장을 벗어나면 대극장에 이르게 된다. 원래의 극장에 로마인들에 의해 개축된 흔적이 보인다. 3층 규모의 부채꼴 모양의 원형 극장인데 2만 5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개축된 장소는 상당히 경사가 급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에페수스의 전체 인구가 이 원형 극장 수용 인원의 10배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곧 이 도시 주민들이 약 25만 명에 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문으로 나오니 한쪽에 응급 진료소와 앰블런스가 보였다. 여기서는 일사병 등 환자가 많아서 상주한다고 한다. 굳이 진료소에 갈 상처는 아니었다. 그냥 지나쳤다. 유적지에서 나와서 버스에 들어갔다. 가방에서 마데카솔과 밴드를 꺼내 상처 부위에 바르고 부쳤다. 안사람이 해 주었다. 상처를 확인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파묵칼레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여태까지는 남부로 내려왔고 이제부터는 동쪽인 중부로 향한다. 3시간 거리다. 파묵칼레는 목면을 뭉쳐놓은 듯 보이는 환상적인 경관으로 ‘목화의 성’이라고 불린다. 여기는 온천수가 많이 나오는 곳인데, 지열과 온천수를 이용해서 비닐하우스를 설치하여 재배하는 곳이 여러 곳 보였다. 6시에 오늘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팜서말(PAM THERMAL) 호텔로 5성급 호텔이다. 가이드는 짐을 옮기는데 포터를 시킨다고 2불을 걷었다. 노천 수영장도 있고 그 위편에 온천수가 흘러내리는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숙소로 가는 길목 주위에는 야자수가 심어져 있고, 파란 잔디도 깔려 있었다. 그간에 메마른 땅만 보고 오다가 이런 모습을 보니 오아시스 휴양지에 온 느낌이 들었다. 객실에 들어가니 객실도 크고 침대도 3개나 놓여 있었다. 나는 상처도 났고 사우나도 들어가기 싫어서 상관이 없었으나, 안사람은 수영복을 준비하지 않아 안타까워했다. 식사 전에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에 들어가니 규모도 크고 식탁도 풍성했다. 저녁 식사 시 식당에서 어떤 사진사가 우리를 찍었다. 그 사진사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찍지 않겠다는 표시를 했는데. 그 사진사는 ‘노 프로블럼’이라고 말하면서 찍었다. 저녁 식사 후에 안사람은 사우나에 다녀오고 나는 혼자 방안에 있었다. 객실에서에도 온천수가 나오는 수도꼭지가 따로 있다. 나는 온천욕도 하지 않고 상처 주위만 피해 간단히 씻었다. 안사람의 요청에 의해 안사람이 돌아오면 사용할 수 있도록 온천수를 욕조에 가득 채워 놓았다.
8월 4일(목)
오늘은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이었다. 식사하러 가니 사진사가 우리를 부른다. 어제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유리 액자에 든 사진이 마음에 들어 물어 보니 20유로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지나쳐 식사하러 갔다.
식사 후 버스를 타고 히에라폴리스에 갔다. 자료에 의하면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다. 여기서 ‘히에라’라는 말은 성스럽다는 뜻인데, 지하 온천수들이 쏟아져 나와 거대한 원형의 욕탕을 형성하였고, 희고 풍부한 미네랄 내용물들이 석회질 바위와 융화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이곳은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사실은 이 이름은 황제 아내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가이드가 말한다. 이곳은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는 번영했던 치료의 중심지였는데 계속되는 지진으로 지금 이 도시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먼저 언덕 위에 있는 로마극장으로 갔다. 가이드는 날이 덥고 극장은 여러 군데 보았으니 그곳에 가야할지 다수결로 정하자고 했다. 아이들은 싫다고 했으나 어른들이 주로 손들어서 가게 되었다. 가서 보니 규모가 상당히 크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12,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극장이라고 한다. 아래 계단은 내려가지 못하도록 줄이 쳐 있었으나 우리는 굳이 내려가지 않았다. 우리는 언덕 위 극장에서 아래 경관을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그리고 내려왔다. 아폴로 신전을 지나쳐 노천 온천으로 갔다. 여기서는 신발을 벗고 족욕하는 곳이다. 우리는 족욕하기 전에 건너편 경관이 좋은 곳으로 갔다. 하얀 석회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족욕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저 아래 수영장과 노천 온천장도 풍광이 좋아 보였다. 그 앞에는 광활한 넓이의 밭이 보이고 저 건너 구릉 뒤편에 거대 도시가 희끄무레 보였다. 광활한 밭 한쪽에 호텔이 생뚱맞게 있었는데, 원래 이곳이 비행장으로 검토된 지역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 호텔은 잘못 짚어서 그곳에 세운 것이리라. 건너편에서도 길 따라 돌아가니 수많은 둥근 물웅덩이가 모여 이룬 비경이 보였다.
노란 바위 구멍에 담겨 있는 파란 물. 마치 신천지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제 족욕하러 물에 들어갔다. 산속인데도 온천수라 물이 따뜻하고 물속에 석회 알갱이가 발바닥 촉감으로 느껴진다. 한쪽 수로에는 물이 콸콸 흘러가는데 사람들은 거기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온몸을 담그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나올 즈음 발을 담갔는데 온천수라 물이 미지근했고 발밑은 이끼로 미끌미끌했다. 과히 좋은 기분은 아니어서 잠시 있다가 나왔다. 우리는 모여서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이동했고 거기서 사진을 찍고 나왔다.
가이드는 이번에는 ‘이부자리’라는 목화 상점으로 안내했다. ‘이부자리?’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상점 이름 아닌가.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이 터키인과 경영하는 상점이 아닌가 싶다. 가이드는 짝퉁을 파는 가게라고 했다. 터키 사람은 한국 사람과 주로 상대했는지 한국말에 능숙했다. 안사람은 거기서 침대 이불 카바와 솜이불을 구매했다. 카드로 계산했다. 압축해서 가지고 나왔다. 무게가 나가서 공항에 갈 때까지 버스 짐칸에 놓아두었다.
우리는 다시 이동해서 콘야로 갔다. 콘야는 터키에서도 5대 도시에 들어가는 큰 도시라고 했다. 이슬람 풍이 강한 도시라고 했다. 버스 속에서 가이드는 카파도키야 열기구 탑승객에게 돈을 거두었다. 나는 120유로인 줄 알고 110유로를 주고 나머지 10유로는 달러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180유로라고 한다. 무지하게 비싸다. 하는 수 없이 내가 가져온 달러와 안사람이 가져 온 달러를 합쳐 85달러를 더 주었다. 앞으로 팁으로 줄 돈밖에 남지 않아서 곤란하게 되었다. 오랜 이동 끝 6시에 숙박 호텔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호텔 건너편에 백화점이 있다고 소개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백화점으로 갔다. 몇 사람은 백화점이 아니라 도시를 둘러보겠다고 나갔다. 우리는 백화점을 대충 둘러보고 1층의 이마트 같은 곳으로 갔다. 확실히 휴게소에서 산 물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싸다. 그만큼 휴게소는 고객에게 바가지를 씌운다는 이야기다. 거기서 안사람은 티셔츠도 사고 무화과도 사고 건과류도 사 가지고 나왔다. 계산은 카드로 했다. 건과류 판매원은 우리에게 국적을 물어 보았으나 사고 나올 때 우리에게 한 인사말은 일본말인 ‘아리가또’였다. 터키 관광객이 연간 2,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작년에 우리나라 관광객은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전체 관광객 수에 비하면 작지만 한국과의 떨어진 거리를 생각하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참 많이 다녀가는 곳이다. 나는 터키에 벼르고 왔지만 10만분의 1에 지나지 않는 우리나라 관광객이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작년에 가장 많았다고 하는데, 실상 우리나라 관광객은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에 많이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으니 아무래도 판매원에게는 일본말이 익숙할 법하다.
8월 5일(금)
오늘도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이다. 호텔 앞에 나오니 제법 산들바람이 분다. 뉴스에 이곳이 20도에서 30도라고 했는데, 고지대의 영향이 있는 듯 하기도 하다. 승객들 중 어느 한 분이 호텔 앞에 걸려 있는 태극기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가이드도 몇 번 지적했으나 호텔 측에서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호텔 측에 시정하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오늘은 데린쿠유(Derinkuyu)라는 지하 도시로 간다. 가는 도중에 ‘슐탄 한’이라는 대상들의 숙소를 글렀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의 이야기에서 보듯 상인들을 대상으로 약탈 행위가 빈번히 일어났을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요새처럼 생겼다. 2달러의 각자 부담으로 입장했다. 낙타들이 머무는 곳. 대상들의 숙소, 회랑, 그리고 가운데 큰 전망대도 있었다. 우리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3층까지 올라가 보았다. 안쪽에는 강당 같은 큰 홀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두웠는데 안쪽으로 걸어보니 내 보폭으로 80보가 넘는 길이였다. 회랑에는 대상들이 썼던 물건들이 걸려 있거나 놓여 있었다.
우리는 나와서 데린쿠유로 갔다. 가는 도중에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서 산 흔적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리고 평지 아래 깊숙한 계곡에 푸른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풍경도 보았다. 전체적으로 건조한 땅이지만 계곡 쪽에는 물이 흘렀을 것이다. 마치 실크로드 사막에서 본 풍경 같았다. 실제로 여기는 겨울에 눈이 내리기는 하지만 곧 물이 스며들어서 땅이 건조하다. 그러나 땅을 파보면 지하수가 풍부해서 그 물을 이용해서 식수나 농수로 사용한다고 한다. 실제로 스프링클러 같은 시설도 여러 곳에서 보았다. 이곳은 가축도 많이 키워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탕무, 감자를 많이 심고 포도를 재배하는 곳이었다. 민둥산도 많이 보이고 개중에는 난지도 모양 같은 산도, 요새가 세워져 있는 형상의 산도 많이 보였다. 멀리 3,000미터가 넘는다는 화산도 보였다. 마을에는 미루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고, 블록 같은 벽돌을 생산하는 공장이 많이 보였다. 블록 벽돌을 생산하는 이유는 지진에 대비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은 대리석도 많이 생산된다. 대리석도 질에 따라 값의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사람은 벽돌보다는 대리석으로 집을 짓는다고 한다.
데린쿠유는 1960년대 시골 농촌에서 닭을 키우는 과정에서 닭이 자주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 데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대 3만 명까지 수용했고 지하 20층까지 지어졌다. 사실 이런 동굴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위 때문이다. 응회암으로 사암층에 화산 용암에 스며들어 만들어졌다. 그래서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쉽게 파진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도시인 것이다. 이 주택 형성 시기는 히타이트 시대쯤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본격적인 확장기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데린쿠유에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는 안전 교육을 했다. 나는 캡모자도 거꾸로 쓰고 선글라스 안경도 일반 안경으로 바꾸었다. 우리는 지하 8층까지 내려갔다.
안전상 또는 다른 이유로 거기까지만 가게 한다고 한다. 지하 8층까지 내려갔는데도 놀랍게도 쾌적했다. 답답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계가 잘 된 도시였다. 학교, 성소, 우물, 부엌, 함정, 만남의 장소도 다 만들어져 있고 거대한 환기구도 있는데 물건 배달 통로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고해 장소도 있었는데 캄캄한 그곳도 우리는 돌아 나와 보았다. 데린쿠유에 들어가는 장소와 나오는 장소는 한 구역만 같고 나머지 구역은 달라서 혼잡은 덜했다. 나오는 길에 가축을 키우는 곳도 보았는데 동굴에서 가축을 키우는 것도 신기하지만 로마 병사들이 접근하는 발자국 소리를 쉽게 발견하게 하는 기능도 있었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바위 동굴 속에 교회들이 위치하고 있는 괴레메 골짜기를 지나 크루즈로막 강의 다리를 건넜다. 강이라기보다는 큰 내와 같은 곳이었다. 그 강 속에 밤섬 같은 조그마한 땅이 있는데 많은 물새들이 거기서 쉬고 있었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동굴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항아리에 고기 및 야채를 넣고 빵으로 둘러 봉한 후에 끓여서 내 놓는 항아리 케밥이다. 손님에게 확인하라 하고 빵을 뜯었다. 그리고 항아리 속의 내용물을 밥과 함께 접시에 담아 내 주었다. 고기 덮밥 같았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왔다.
오늘은 7시에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밤 8시에는 밸리댄스를 하는 곳으로 이동해서 관람한다고 한다. 술은 양껏 드셔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팁으로 한 사람당 1달러씩 걷는다고 했다. 안사람은 그 팁을 회사 측에서 내야지 승객이 내야 되느냐면서 그 문제에 이의를 달았다. 다른 승객들도 안 사람 의견에 적극 동조했다. 그렇지만 가이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서 돈을 걷었다. 이는 선택 관광이 아니고 하나투어에서 내건 상품이다. 사실 우리가 낼 돈이야 얼마 안 되지만, 이는 그간 가이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예정에 없는 쇼핑센터를 자주 방문한다든지, 밤에 나가지만 말라고 하고 적극 안내해 주지 않는다든지, 현장에 직접 다니면서 설명하지 않고 그냥 시간을 주고 다녀오라고 한다든지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점은 끝내 시정되지 않았다. 가이드도 이런 장기간 투어를 연중 많이 하다보면 많이 지칠 법하다고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4시에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까지 시간이 남는다. 대부분 숙소에 들어가 쉬고 있다. 그렇지만 안사람은 밖으로 나가 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갔다. 좀 걸으니 큰 슈퍼가 나왔다. 거기서 우리는 꿀을 샀다. 터키는 꿀이 많은 곳이다. 굳이 꿀을 파는데 가짜를 만들어 고객을 속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벌집에 꿀이 담겨 있는 작은 상자 1개가 5리라 정도 한다. 처음에 2개 샀다가 2개 더 샀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재래시장을 들렀다. 철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동안 돌아보다가 아까 버스로 건넜던 다리를 건넜다. 이제 오리들이 군집을 이루며 헤엄치고 있다. 우리는 그 장면을 찍었다. 다리를 건너니 아까 식사를 했던 동굴 식당이 나온다. 우리는 다리를 건넌 데에서 호텔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길이 있을지 몰라서 우리가 찍은 호텔 사진을 보여 주고 길을 물었다. 그러자 여기에는 길이 없고 다리를 건너 돌아가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온 길로 되짚어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나갔다 왔다고 하니까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부산에서 오셨다는 양 선생님은 꿀을 거기서 사시겠다고 했다. 그러나 가이드는 밸리 댄스를 보러 가는 위치를 모른다면서 쇼핑하러 가는 것을 제지했다. 안사람은 가이드가 우리가 가는 위치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밸리 댄스를 보러 간 곳은 결국 우리가 간 동굴식당이었다. 이는 디너쇼가 아닌가. 실망이었다. 자리는 마른안주, 과일, 빵, 포도주, 민속주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맥주는 신청하니 갖다 주었다. 춤은 경건한 의식으로 출발하였다. 남자 무용수가 치마 같은 옷을 입고 계속 그 자리에서 회전하는 춤이 그나마 보기 좋았다. 그리고 5명의 남자 무용수, 5명의 여자 무용수가 번갈아 나와서 춤사위를 보여 주었다. 안사람은 중간에 인솔자와 양 선생님과 쇼핑하러 나갔다 왔다. 여자 무용수들이 단체 밸리 댄스를 보여주고 남녀 단체 무용수가 나와 마치 러시아 춤처럼 무릎을 구부리고 펴면서 현란하고 경쾌한 발놀림으로 춤사위를 보여준다. 아이들은 이제 졸려 하고. 보는 것도 이제 끝이 났다고 했는데 인솔자가 한두 개만 더 보고 가자고 한다. 중년 나이의 밸리 댄서가 새로 나왔다. 이 무용수는 프로 같았다. 율동이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칼 던지기 쇼를 보고 나왔다. 나온 시간이 10시 45분이었다.
8월 6일(토)
오늘 열기구 타는 날이다. 일출 광경을 보아야 하니까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 4시 15분에 현관 앞으로 집합하라고 했다. 인솔자의 실수인지 호텔 측의 실수인지 아침에 모닝콜이 울리지 않았다. 사람들 소리가 나서 일어나니 4시 15분이다. 세수 하고 카메라 들고 잠바 입고 바로 나왔다. 모두 다 나와 있었다. 열기구 회사에서 온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제는 바람이 불어서 열기구가 뜨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았다. 가이드 말로는 이륙 시나 하늘에 떠 있을 때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착륙 시 바람이 심하게 불면 지상에서 퉁퉁 치면서 떨어져 만에 하나 부상자가 생길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바람이 심하게 불면 태우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2대에 분승해서 사무실에 갔다. 거기서 커피와 과자를 먹고 기다리다가 다시 현장으로 출발했다. 현장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였다.
우리는 열기구에 올라탔다. 버스 중간 크기의 바구니에 가운데는 조종사가 타고 네 구역으로 나뉘어진 공간에 6명씩 타서 총 24명이 타게 되어 있다. 우리 19명과 5명의 프랑스인이 올라탔다. 나는 프랑스인과 같이 탔다. 열기구는 한 대가 아니다. 60대 이상 뜬다. 또 시차가 있는데 우리는 첫 풍선을 탔다. 우리가 가장 먼저 뜬 것은 아니지만 1차 열기구를 타는 것이다. 조종사가 안전 교육을 영어로 시킨다. 가이드가 영어를 번역하는 것은 아니지만 뜻을 설명해 주었다. 랜딩 포지션에 기마 자세를 취하는 것. 조종사가 어느 한쪽을 가리킬 때 그쪽 방향을 바라보라는 것. 그 정도였다. 열기구는 서서히 떠올랐다.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광경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아래 풍경을 열심히 찍었다.
곧 일출이 시작되고 그 광경도 찍었다. 기기묘묘한 풍경도 보였다. 어느 바위는 돌고래 같아서 프랑스 인에게 ‘돌핀’이라고 말했더니, 그 프랑스 인은 안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라이크 어 피시’라고 미소 지으며 응대해 주었다. 풍선은 하늘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바위 옆을 스치기도 하고 마을 위를 날기도 했다. 조종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풍선의 그림자가 다른 풍선에 비치는 모습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계곡의 이름을 설명해 주었다. 조종사는 지상과 계속 무선 통신을 했다. 그리고 착륙 지점을 정한 듯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편의 일본 사람이 탄 풍선은 우리보다 먼저 떴는데 우리보다 먼저 착륙했다. 보통 비행시간이 1시간 정도라는데 우리는 1시간 20분 정도 탔다. 그래서인지 좀 긴 듯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출발 지점과 한 참 다른 곳에 착륙했는데 인솔자와 가이드가 와 있었다. 지상에서 계속 풍선을 보면서 따라 왔다고 한다. 우리는 착륙 시 기마자세를 하고 착륙했다.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조종사는 아르메니아인. 조정 자격증은 영국에서만 딸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내려와 샴페인을 터뜨리고 체리 주스가 혼합된 술잔을 건배했다. 그리고 풍선을 탔다는 인증서를 받았다.
인증서를 들고 그 조종사와 기념 촬영을 했다. 모두 흡족한 기분이었다. 가이드는 우리가 지상에서 상공 600-700미터는 올라갔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승차하여 7시 50분에 숙소에 도착했다. 식사하고 9시 3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소금호수를 거쳐 앙카라로 가는 일정이다. 소금호수로 가는 일정이어서 달걀 1개를 챙겨 가지고 나왔다. 먼저 찾아 간 곳은 데브란트 계곡. 일명 낙타바위 계곡이다.
바위가 낙타 바위 형상도 있고, 나폴레옹 모자 같은 형상의 바위도 있었다. 우리는 사진 촬영시간에 내려가 건너편 계곡 산등성이를 향해 올라갔다. 길이 미끄럽고 시간도 되어 능선 가까이 가다가 돌아 왔다. 바위 속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가보지 않았고 빈 동굴 속에는 들어가 보았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상당히 넓었다. 모래흙이 많아 미끄럽고 주변에 가시나무가 많아 찔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려왔다.
다음은 버스를 타고 파샤바 계곡으로 이동했다. 초기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길을 따라 먼저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경관이 좋다. 우리는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에 올라갔다.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처럼 홈을 파 놓아서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내려와서 초기 교회가 있는 쪽으로 갔다. 입구 쪽에 유치장처럼 철망을 해 놓았는데 삼면이 구멍이 크게 뚫려 있을 뿐 별다른 시설물은 없었다. 교회를 지나 건너편으로 내려가니 스머프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버섯 모양의 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이제 아까 온 길과 모두 다른 방향으로 나왔다. 안사람이 초기 교회 모습을 못 보았다기에 우리만 다시 올라갔다.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어떤 사람이 2층 높이의 굴의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고 밑에서 그 사람을 사진 촬영하는 모습을 보았다. 호기심 많은 안사람이 가보자고 해서 가보았다. 비좁은 동굴 안에 돌을 깎아 만든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아까 그 사람은 이 계단을 타고 올라 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모습만 보고 내려왔다. 손님들 중에는 이미 와서 쉬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가게에 들어가서 자기 그릇을 흥정해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 사정없이 값을 깎아 거래가 안 이루어져도 나오면 고객을 다시 불러 세워서 흥정하는 시장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물건을 하나도 제값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런 풍경이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가이드가 이번에는 터키석 판매장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이 사람은 승객들을 너무 자주 판매장으로 데리고 간다. 가격이 장난이 아니어서 모두들 사지 않고 나왔다. 점심은 터키식 볶음밥을 먹었다. 역시 고추장에 버무려 먹었다. 터키 음식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 먹은 것은 아니다. 다 먹었다. 배고프지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첫날을 제외하고는 컵라면을 밤에 숙소에서 먹지 않았다.
드디어 소금호수에 도착했다. 온통 하얀 소금밭이다. 맨발로 다닌 사람도 있었지만 화장실에 발을 씻을 수 있는 시설이 있는지도 알 수 없어 신발을 벗지 않았다. 호숫가 가까이만 갔다가 돌아왔다. 판매점에 들어가 봉지에 들어 있는 소금을 샀다. 바가지를 씌우는지 4리라나 한다고 한다. 그냥 여기 온 기념이려니 생각하고 샀다. 그리고 버스 속에서 가져 온 계란에 소금을 묻혀 먹었다.
이제는 앙카라로 간다. 앙카라는 터키의 수도다. 500만 명이 산다고 한다. 이스탄불 다음 규모의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 이스탄불은 터키 서쪽 끝에 있지만 앙카라는 북부에 있긴 해도 중간쯤 위치해서 수도로서 적당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앙카라에는 한국 공원이 있다. 가이드는 한국과 터키의 피를 나누는 형제 관계라는 것을 설명했다. 돌궐과 고구려의 우정, 터키 군의 6 25의 참전, 그들이 자원해서 참전했고 조국을 수호한다는 차원에서 밝은 표정으로 왔다는 것, 그리고 중공군과 용감하게 싸워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고아들을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내했다는 것, 88올림픽 때에 형제의 나라라고 터키 국민이 많이 한국에 찾아 왔건만 정작 한국인은 그들의 우정을 알지 못했다는 것. 이즈미르의 대지진으로 대참사가 났을 때 한국 정부는 기껏 회사 차원만도 못한 7만 불을 내놓았다는 것, 한일 월드컵 시 한국인 주심의 오심으로 터키 선수가 퇴장당하고 그로 인해 브라질에 패배했다고 생각해서 그간의 불만이 폭동 수준으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준결승에서 한국의 붉은 악마가 태극기와 그들의 국기인 월성기를 내걸자 감동해서 한국인의 집에 테러를 가하려 했던 마음을 돌려 미안한 마음에 선물을 쌓아 올려놓아서 문을 제대로 열지 못했을 정도였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말했다. 승객들도 감동했는지 말끝에 박수를 쳐 주었다. 가이드는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한국공원에 가서 참배하고 방명록에도 서명하고 1달러도 놓고 오라고 했다. 이것은 팁이 아니고 기부라고 했다. 한국 공원을 관리하는 터키인은 유가족이고 정부에서 얼마간의 월급을 받는다고 했다.
한국공원에 원래 폐문시간보다 늦은 5시 10분에 도착했다. 터키에 참전하여 순국한 전사자의 명단이 바위에 새겨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다녀간 서명이 있었다. 우리는 참배했다. 나는 방명록에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할 따름이라는 뜻의 글을 쓰고 10달러를 내려놓았다. 소녀애가 조그만 핀 하나를 기념물로 주었다. 나보다 더 많은 돈을 기부하는 분도 있었다. 공원을 나오는데 터키 소녀가 우리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5시 40분에 세르가 호텔에 도착했다. 4성급 호텔이다. 그런데 7시에 식사할 뿐 별다른 일정이 없다. 가이드는 이 부근 술집은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어 문제가 크게 발생할 수 있다고 겁주는 식으로 말을 한다. 우리는 밥 먹기 전에 양 선생님과 안사람과 같이 산책했다. 만일을 몰라 호텔 사진을 먼저 찍었고 오른 쪽 대로변으로 걸어갔다. 다른 곳도 그렇지만 여기는 수도인데도 신호등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길 건너는데 눈치껏 살펴 걸어야 한다. 몇 분 걸었는데 교외로 빠지는 것 같아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호텔 왼쪽 편으로 걸었다. 묘지공원도 있었는데 이미 폐문 시간이 지났다.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 대통령상이 있는 데까지 갔다가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나왔다. 미국에서 온 승객, 양 선생님, 밀양에 산다는 치과 의사 부부, 우리 내외, 연구원을 하고 있다는 처녀 선생님과 함께 아타튀르크 상에 있는 쪽으로 걸었다. 처녀 선생님은 모스크를 보고 싶다고 따로 나섰다. 미국에서 온 그 분은 책자를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아타튀르크 상 쪽에서 꺾어져 올라가니 멀리 성채가 보였다. 미국에서 온 분이 나에게 의견을 묻기에 가보자고 했다. 성채에 가는 도중에 아직도 유적을 발굴하는 작업 현장도 보인다. 이 성채는 9세기 비잔틴 황제 미카엘 2세가 외부 성벽을 완공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두꺼운 성벽으로 되어 있었다. 성벽 안은 공원처럼 조성해 놓았다. 우리는 성벽에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묵는 호텔도 보이고 반대편으로 아타튀르크 대통령 기념관도 보였다. 거기까지 가기는 멀어 보였다. 하늘을 보니 이제 아이발릭에서 보았던 초승달이 아니다. 반달에 가깝다. 바쁜 일정에도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계속 계단을 타고 올랐다. 문이 보이고 성안의 마을이 보였다. 우리는 문 위로 올라가 전망을 보고 내려왔다. 다 내려오는데 그 아가씨가 계단에 앉아 있다. 모스크까지 가기에는 1시간 이상 걸려 가지 않았다고 한다. 커피 한 잔 하고 여기 성채에 오르려고 와 있다고 했다. 우리는 밤중이라 위험하니 전망할 수 있는 곳까지만 갔다 오라고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가 함께 아타튀르크 상이 있는 곳까지 왔다. 동상 주위는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었다. 우리는 찻집에 가서 차 한 잔씩 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었다. 계산은 각자 분배해서 냈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양 선생님이 대신 내주었다. 일정에 없었어도 앙카라에서의 밤을 무의미하게 보낸 것이 아니라 아타튀르크상도 보았고 성채도 보았고 야경도 보았다. 또 모처럼 이렇게 모여서 대화를 하면서 친교를 했다는 것에 다들 흡족한 듯했다. 안사람도 이번 여행 중 가장 기억이 남는 곳이 일정에 따른 여행 코스가 아닌 바로 이곳이었다고 했다.
8월 7일(일)
오늘은 5시 기상, 6시 식사, 7시 출발한다. 가이드는 오전에는 이스탄불로 이동하고, 오후에는 일정을 바꿔 아야소피아 사원과 블루모스크를 관광하고, 보스포러스 해협은 정기선을 타지 않고 배를 전세로 빌려서 관광하기로 한다고 말했다.
어제는 밤에 돌아다녔고 아침에 일찍 기상해서 그런지 바깥 풍경을 보기보다는 눈을 붙이고 잤다. 간간히 눈을 떠 본 바깥 풍경은 확실히 이전 풍경과 다르다. 나무들이 확실히 많고 산이 짙푸르다. 우리나라 풍경 같아서 좀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터키 집들은 거의 똑같은 형태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에서 도적이 집을 찾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간간히 다른 형태의 집도 보인다. 그리고 큰 호수를 지났다. 호숫가의 집들도 그림 같았다. 장장 6시간을 걸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위치하고 있다. 2,000년이 훨씬 넘는 역사에 걸맞은 동서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로 역할을 다해 왔다.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고, 오늘날 1,200만 명이 살아가는 현대도시이기도 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아나톨리아를 나누는 경계선에 해당한다. 이 해협 서쪽 해안 지대에 있는 이스탄불은 다시 골든 혼을 경계로 남쪽의 구시가지(유서 깊은 반도지역)와 북쪽의 신시가지로 나뉜다.
우리는 보스포러스 제1교를 지나 아야소피아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거기서도 역시 케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우리는 아야소피아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웠다. 먼저 간 곳은 히포드롬(Hippodrom)이었다. 히프드롬은 블루모스크 오른쪽에 위치한 광장으로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 룩소에서 가져 온 기원전 15세기 투트모스 3세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또 하나의 탑은 청동 뱀 기둥인데 그리스 델피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가져온 것이다. 또 한 기둥은 보수중이어서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광장은 로마시대에 대전차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는 안사람과 광장을 더 걸어서 성수가 나오는 우물 시설로 된 건축물을 보고 왔다. 그 우물은 비각을 세운 것처럼 보호받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야 소피아, 즉 성소피아성당(The Hagia Sophia Museum)으로 갔다. 여기서는 유적보호차원인지 짐 검사를 한다. 그리고 헤드셋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가이드의 해설을 듣도록 주파수가 맞춰진 헤드셋이었다. 가이드는 소피아 성당에 들어가기 전 테오도시우스의 교회 유적 앞에서 간단히 설명을 했다.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 볼 때는 이 건물이 성당 같지 않고 박물관 같았다. 그러나 막상 입구에 들어서자 그 규모에 절로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자료에 의하면, 이 성당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를 자랑했으며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비잔티움을 수도로 정하고, 395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537년에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이 성당을 만들었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면서 이곳은 회교 사원으로 그 용도가 바뀌면서 성당을 둘러싸는 첨탑이 세워지고, 성당 안은 회칠로 덮어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1935년이 되어서 아타튀르크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큰 문(임페리얼 문)으로 들어서자 머리 위로 장엄한 대원개(돔)가 자리한다.
화려하게 장식된 40개의 기둥이 지탱하는 이 거대한 돔은 가볍고 밀도가 낮은 진흙을 이용해 특별 제작된, 속 빈 벽돌로 만들어졌다. 이 벽돌을 건물 벽에 감춰진 거대한 기둥들 위에 쌓아올려 돔이 마치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게 설계했다. 중앙을 지나 제단으로 가니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모자이크화와 천사장 가브리엘을 묘사한 모자이크화가 있다. 그리고 높은 곳에 만들어진 정자도 눈에 띄는데, 이는 술탄의 특별석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들어와 기도를 하고 떠나기 위해 아흐메트 3세가 만들었다고 한다.
천장에는 아라비아 글자를 금박으로 새겨 넣은 금문이 걸려 있었다. 알라신과 예언자 마호메트, 그리고 초기 칼리프(이슬람 통치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독교 사원이긴 하지만 이도 문화라고 생각해서 떼지 않는다고 한다. 임페리얼 문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샛길에는 ‘흐느끼는 기둥’이 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구리 얼굴상이 눈에 띄는데 구멍이 나있다. 가이드는 여기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 돌리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줄지어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소피아 사원을 다 구경하고 나서 한 번 해 보았다.
우리는 경사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앙에 있고 성모마리아는 왼쪽, 세례 요한이 오른쪽에 묘사되어 있다. 안내원은 모자이크화가 훼손된다며 플래시를 터뜨리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모자이크 화는 얼굴 부분만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나머지 부분은 훼손되었는데, 가이드는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신병에 효험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금박을 떼어 먹어 훼손된 것이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얼굴은 훼손할 수 없어 그나마 보존된 것이라고 말한다. 중앙에는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자리도 있었고, 남쪽에는 조에 여제와 큰스탄티누스 9세 등 역사적 가치를 지닌 모자이크 화 등이 있었다.
우리는 헤드셋을 반납했다. 그리고 블루모스크(The Sultanahmet Mosque)로 향했다. 자료에 의하면, 이 모스크의 외관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히포드럼 광장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 낫다고 한다. 그래야 완벽한 비율이 돋보이는 모스크의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또 이 사원은 블루 모스크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술탄아흐메트 모스크라고도 한다. 인근 아야소피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건물을 짓고자 하는 술탄아흐메트1세(재위 1603-1617)의 열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원은 직경 27.5m, 높이 43m에 달하며,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블루 모스크라 불린다. 돔의 260개의 창문은 스테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모스크를 설계한 건축가 메흐메트 아이는 육중하고 남성적인 외관과 아야소피아 특유의 화려하고 정교한 실내장식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모스크의 유려한 곡선에서는 관능미가 느껴지며 여섯 개의 첨탑과 안뜰은 오스만 제국의 모스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우리는 이 사원 안을 들어갔다. 중앙 입구는 신도만이 입장할 수 있고 관광객은 남문을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신발을 넣은 비닐봉지를 들고 입장했다. 지금이 라마단 기간이어서 많은 신도들이 기도드리고 있다. 중앙의 강단에는 ‘이맘’이라 불리는 사람이 청아한 목소리로 코란 구절을 읊고 있었다. 이맘이 마이크에 대고 읊조리기에 가이드의 목소리는 자주 끊겼다. 가이드는 종교 의식을 치르는 시간에는 관광객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고 지정된 시간에만 입장할 수 있는데 라마단 기간이라 들어와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네 개의 거대한 ‘코끼리 발’ 기둥이 돔을 지지해 주고 있는 모습이 아야소피아와 달랐다. 아야소피아가 화려한 건축 기술을 뽐냈다면 블루모스크는 웅장하고 안정적인 모습이라고 할까. 아무튼 이 두 건물을 보면서, 회교도들이 소피아 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이를 보존하면서 그 나름대로 건축물을 세운 마흐메트의 식견은 높이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두 사원을 보고 나왔다. 더 역사와 문화적 식견을 가지고 있고 더 충분히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있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 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한 자리에 모였다.
이번에는 유람선을 타는 시간이다. 버스를 타고 ‘골든 혼’의 선착장으로 갔다. 거기서 배를 탔다. 다들 경관도 즐기고 시원한 바람도 느끼려고 툭 터진 2층으로 올라갔다. 노인이 차를 들고 올라와서 차나 음료를 마시라고 하는데, 가이드가 이는 서비스가 아니라고 했다. 배는 출발해서 보스포러스 다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가는 도중 해안가에 많은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 있다. 아무나 낚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E·H 클럽에 가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 뜻은 everyday holiday. 즉 백수 클럽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 그리고 다리 밑에서나 해변 가에 줄지어 카페, 음식점이 성업 중이었다. 유람선도 많지만 크루즈 선같이 큰 배도 많이 보였다. 가는 도중에 여러 중후한 건물을 보았다. 그 중 클린턴 대통령이 묵었다는 호텔도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도 보았다. 자료에 따르면,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çe Sarayı)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감동을 받은 술탄 압둘메지드1세(Sultan Abdulmehcit I)의 명에 의해서 지어진 건축물로 길이는 600미터의 궁전이다. 전체 외관은 베르사이유식이고, 중앙 접견실은 56개의 둥근 원기둥과 750개의 캔들이 달린 무게 4.5톤의 거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이 이 궁전에서 서거하였다고 한다.
1시간 정도 배를 탔다. 하선해서 버스를 타고 다시 아야소피아 인근으로 왔다. 가이드가 이번에는 잡화점으로 안내한다. 마지막 쇼핑 장소라고 한다. 이번에는 한국인이 직접 상품을 소개한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터키인과 한인이 합작해서 가게를 꾸리는데 매출이 중소기업 못지않다고 말한다. 이는 여행사의 지원 아래 장사를 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남자들은 별 쇼핑에 관심 없지만, 여자들은 아니다. 한참이나 기다렸다. 쇼핑을 마치고 저녁 식사하러 갔다.
저녁은 한식이다. 서울정이었다. 그간 먹고 싶었던 김치, 두부, 된장찌개, 돼지고기 볶음, 소라무침도 나왔다.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오늘 1가족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불참했다. 밥 한 그릇하고도 반을 먹었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갈 시간. 오늘도 밤에 시가지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우리가 머물 호텔은 첫날 묵었던 에세르 호텔이다. 중심 시가지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 시내 탐방은 포기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숙소에 와서 방 배정을 받았는데 어쩐지 에어컨도 시원치 않고, 불이 안 켜지는 곳도 있다. 인솔자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객실을 바꾸었다.
밤에 나가보기로 했다. 첫날에 여기 도착할 때는 이곳이 해안가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줄도 몰랐었다. 양 선생님과 함께 나갔다. 나는 쉬고 싶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두 여자 분이 나가는데 나 혼자 방을 지킬 수 없어 동행했다. 호텔을 건너 골목을 지나 큰 거리로 나오면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대한 야시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왔을 때 왜 이곳에 휴지가 널려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몇 가지 물건도 사고 찐 옥수수도 사먹고,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고 호텔로 들어왔다. 12시 반이 이미 지났다.
8월 8일(월)
오늘은 6시 반 기상, 7시 반 식사, 8시 반 출발이었다. 어제 중요한 관광을 다 해서 여유가 있다. 오늘 일정은 오전에는 피에르롯티 공원에 가고, 오후에는 톱카프 궁전 견학하고 바자르 시장 관광한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공항으로 가는 순이다. 터키 일주의 여정이 긴 듯하였는데, 시간은 어느 새 집에 가라고 손짓하고 있다.
버스를 타고 피에르롯티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 오르는 수단은 케이블카다. 다행히 일요일이 아니어서 쉽게 탔다. 우리는 찻집 앞 전망이 좋은 의자에 앉았다. 이 찻집은 200년 된 찻집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롯티가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자주 들렀다고 한다. 찻집 안에는 그의 사진과 글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차를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묘지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느끼는 기분과는 상당히 달라서 공원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동안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내려왔다. 다시 버스로 이동해서 아야소피아 근처로 왔다. 거기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그간 밥이 입맛에는 안 맞아도 잘 먹었는데 더운 여름에 여행하느라고 지쳤는지 오늘은 남겼다. 확실히 여행은 젊었을 때 해야 한다는 말이 백번 맞다. 놀아도 놀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잘 놀 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톱카프 궁전( Topkapi Palace)으로 걸어갔다.
자료에 의하면, 이 궁전은 1453년 오스만 제국 술탄 마흐멧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이름을 바꾸어 이스탄불이라고 부르면서 처음 건설되어 그 후 꾸준히 4세기 동안 꾸준히 규모를 확장시켜 왔다고 한다. 70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이 궁전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첫 문은 황제의 문이라고 하는데 이 안은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제2의 문은 황실의 각종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만 출입이 가능했다. 오른편에는 압도적 규모의 궁전 주방이 있고, 왼편에는 화려한 황실 의회실이 있다. 그리고 왼편에 하렘이 있는데 이곳은 술탄이 거리낌 없이 방탕한 생활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별도의 표를 구입해야 들어가고 지정된 시간도 있어 가보지 못했다. 제3의 문은 지복의 문이라고 한다. 술탄의 개인 처소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바로 안쪽에 알현실이 있다. 고위 관리들과 외국 사절들이 국가 대사를 논의했다. 특이한 것은 알현실 문밖에 수도꼭지가 있다. 이는 안에서 하는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게 논의가 이루어질 때는 수도꼭지를 틀었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알현실 뒤에는 도서관이 있고, 성스러운 유물 보관실도 있었다. 거기서 홍해를 갈랐을 때 썼다는 모세의 지팡이(M0SE’S rod)(지시봉?), 모세의 의복, 모하메드의 발자국이 찍힌 진흙 판, 다윗의 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황실의 보고(treasury)가 있다. 사람들이 제1 전시실에 길게 줄이 서 있었다. 가이드는 여유가 있는 제 2-4 전시실을 먼저 볼 것을 권했다. 이곳은 황실의 미술품 및 보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제2실에서는 진주로 만든 작은 인디안 인형을 볼 수 있었다. 제3실에서는 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거대한 촛대가 볼 만했다. 제4실에서는 단검의 칼자루에 장식된 세 개의 거대한 에메랄드와 칼자루 끝 둥근 부분에 장식된 시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일명 스푼메이커의 다이아몬드라는 눈물방울 모양의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볼 수 있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다이아몬드라고 한다. 이 보석에 그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처음 발견한 행상이 숟가락 세 개 값을 받고 팔았다는 일화 때문이다. 제 4실에서 나와 뒤편으로 가니 보스포러스 해협의 시원한 물줄기가 보인다. 이렇듯 전망이 좋은 언덕에 궁전이 지어진 것이다.
그리고 인파 속에 10여 분간 기다려 제1전시실로 들어갔다. 왜 제1전시실만 사람들로 복작이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사람들이 무심코 제1전시실부터 줄 서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보석으로 장식된 술래이만 대제의 검과 블루모스크 설계자가 만들었으며 칠기로 장식한 아흐메트 1세의 옥좌를 볼 수 있었다. 제4의 문은 황실가족, 귀빈, 궁궐 시종들이 드나들었다. 그곳에는 가보지 않았다.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그랜드 바자르로 갔다. 10분 정도 걸어서 갔다. 자료에 의하면 비잔틴 시대부터 이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오스만 제국이 1455-1461에 걸쳐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아케이드를 만들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활발한 상업 활동을 위해 아케이드 바깥 부분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그래서 이렇듯 큰 시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가이드는 길이 미로 같다면서 항상 주 통로를 중심으로 다니라고 안내했다. 양 선생님과 안과 나는 같이 쇼핑했다. 안사람은 이미 몇 십 달러를 빌렸다. 그 돈으로 쇼핑했다. 안사람은 터키석 팔찌와 터키식 과자인 로쿰 3상자를 샀다. 싸게 샀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깎는데도 기술이 필요한 곳이었다. 50%를 깎았어도 잘 샀다고 할 수도 있고, 80%를 깎았어도 바가지를 썼다고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과 같은 곳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일정을 마쳤다. 우리는 저녁 식사하러 한식당인 고려정으로 갔다. 돼지고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음식이 내 입맛에는 맛깔스러운 곳이었다. 이렇듯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갔다. 출발은 9시 20분. 아직도 2시간이나 남았다. 면세점에서 터키산 양주 1병을 사고 투어를 같이한 여행객과 환담하다가 기내에 탑승했다. 여기서 한국으로 갈 때는 편서풍 영향을 받기에 2시간 단축된다고 한다. 6시간의 시차.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낮 12시 50분이다. 물론 오늘은 8월 10일(화)이다. 짐을 찾고 그가 투어를 같이 했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인솔자와 그간 안사람이 사귀었던 양 선생님과는 휴게실에서 차 한 잔 마셨다. 안사람은 그 사이에 로밍 기기를 반납하고 왔다. 환담을 더 나눈 뒤 후일에 서로 연락하자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상 7박 9일의 여정을 마쳤다. 이번 여행을 하고 보니 느낀 점이 많았다. 문화체험으로 좋았던 것은 에페소 유적지, 아야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견학이었다. 오락 체험으로는 열기구 투어였다. 그리고 일정에 없었지만 우리끼리 가본 앙카라의 성채였다. 물론 문제점도 있다. 문화 체험지는 몇 시간 감상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오락 체험으로 한 열기구 투어는 너무 값비싸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터키로 여행할 사람에게 들려 줄 말이 있다. 터키는 단지 관광으로만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전에 충분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설자의 말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문화체험지에서도 충분한 견학을 할 수 없다. 기대한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선글라스, 긴 팔 옷, 수영복은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자외선이 얼마나 강렬한지 선크림을 충분히 발라주지 않으면 화상을 입기 쉽다. 그리고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운 여름철이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버스로 매일 5-6시간 이상 타고 이동해야 한다. 내가 거기서 비교적 건강하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투어가 끝날 즈음에는 지쳤다.
그리고 여행사 측에게도 전할 말이 있다. 품격으로 갔음에도 쇼핑센터를 지나치게 많이 갔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도록 가이드를 교육시켜야 한다. 특히 문화체험지에서 부정확한 지식으로 말하거나 중요한 대목을 빼먹는 경우가 많았다. 단지 숙박 목적으로만 숙박지를 정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앙카라는 터키 수도인데 한국공원 들르는 것으로 끝이었다. 아타튀르크 기념관, 앙카라 성채, 야간 투어도 고려할 만한데 그런 일정은 없었다.
터키에 갔다 왔더니 방학이 일주일도 안 남았다. 충분히 쉬었음에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이번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금년 여름에는 내가 집에서 할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스트레스는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모처럼 안사람과 해외여행을 갔다 온 것도 보람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앞으로 힘든 여행은 점차 어려워질지 모른다. 시간 다 지나고 후회하기 전에 하나의 과제를 마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이번 여행으로 하계방학 중 여행은 끝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을 정리하고 개학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에도 말했지만, 정년퇴임할 때까지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갈 계획이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내년에는 어디로 여행을 떠나야 할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계획을 잘 세워 두는 과제만 남아 있다.(2011.8.11)
첫댓글 알찬 내용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와도 이어져 있는 곳이라서 가보고 싶었던 터키이었는데, 마치 제가 발걸음 하나하나를 옮기면서 살펴보는 것처럼 여행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주시고, 여행 준비과정이나 소감까지 자세히 소개해주셔서 두루두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너무도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까지 기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는데,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같이 해외 여행을 떠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터어키여행의 안내서라고 할 정도로 자상하게 ,쓰셨습니다.
그곳에 갈 땐 반드시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준비물과 여행시 주의할 점은 명심하겠습니다.
내용이 좀 긴데 읽고 댓글도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긴 글에 문화체험지와 관련된 내용이 없어 실감이 나지 않다고 하네요.가서 사진은 찍었는데 좋은 사진 별로 없고 올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 이제야 정리 중입니다. 불원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