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목 전 농림부 축정과장에게 듣는 쇠고기 협상
*이헌목 한국농업경영인중앙회 농업정책연구소장
· 1945년 경남 밀양 출생 · 부산고, 서울대 농과대학 졸업 ·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영학 석사 · 청와대경제비서실 농림수산담당 행정관, 농림부 시장과장을 거쳐 쇠고기 2차 협상이 주무과장인 축정과정을 1991년 12월부터 1994년 4월까지 맡았다. 이후 농림부 감사관, 유통국장, 식량국장, 농산물품질관리원장을 역임했다.
2000년 농협중앙회 조합감사위원장을 지낸 후 현재 한국농업경영인중앙회 농업정책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담=최기수 편집국장 ·정리=김진삼 차장 ·사진=엄익복 차장
*2차 쇠고기 협상 배경
1980년대 초 국내 소 사육기반 조성을 위해 정부는 송아지 입식사업을 확대했다. 여기에다 송아지 공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산 육우를 수입하면서 국내 소 사육마리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경기침체에 따른 국내 쇠고기 소비 급감으로 소 값 하락과 함께 소 대량 출하현상이 발생하면서 1983년과 1984년 소 값이 폭락하는 파동이 발생됐다.
정부는 이에 따라 1984년 10월 수급조절용 쇠고기 수입 중단과 1985년 5월 외화획득용 쇠고기 수입마저 중단한다.
쇠고기 수출국, 특히 미국은 이 같은 쇠고기 수입 전면중단에 크게 반발해 수입재개를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 소 값과 양축농가의 반발로 수입재개 시기는 계속해서 미뤄져 왔다.
급기야 미육류협회로부터 우리나라 쇠고기 수입중단이 불공정 무역행위라는 청원을 받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1988년 3월 미통상법 301조를 발동하게 된다. 또 우리나라가 쇠고기 수입을 중단하면서 이해당사국에 통보 등의 절차와 의무를 위반했다며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제소했다.
GATT 이사회는 이 제소를 받아들여 한·미간, 한·호주간, 한·뉴질랜드간의 패널을 설치하게 된다. 특히 1989년 11월 채택한 GATT 패널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수입중단 조치 철폐나 GATT 규정에 일치시킬 것을 권고했다.
특히 이해당사국과 협의 후 3개월 내에 GATT이사회에 보고토록 우리나라에 권고함에 따라 쇠고기 양자협상을 시작했다. 이 양자협상을 통해 1990년 3월과 6월 1차 합의문을 채택하게 된 것이 쇠고기 1차 협상.
쇠고기 1차 협상의 주요내용은 1997년 7월 1일까지 쇠고기에 대한 잔존수입제한을 철폐하거나, 또는 GATT 규정에 일치시킬 것을 합의한다. 1990~1992년간의 수입쿼터는 각각 5만8000톤, 6만2000톤, 6만6000톤으로 결정했다.
1993년 이후의 수입문제에 대해서는 늦어도 1992년 7월 1일 이전에 협의를 시작할 것을 합의함에 따라 1992년 6월 11일 쇠고기 2차 협상이 시작됐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정부 주도 시스템의 협상은 대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자들이 하나로 뭉쳐 조직을 통합하고 전문성을 갖추는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전문성을 갖춘 생산자 통합조직 관계자가 협상 전문가로 참여해 시장을 방어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쇠고기 수입쿼터를 놓고 미국, 호주, 뉴질랜드와 1992년 6월 11일부터 1993년 7월 15일까지 13개월 동안 2차 쇠고기 양자협상 시 농림부 축정과장으로 협상을 담당한 이헌목 한농연 정책연구소장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협상과 관련 이같이 조언했다.
이 소장과 2차 쇠고기협상 상황과 쟁점, 얻은 교훈, 앞으로도 계속될 협상과 관련한 대비책 등에 대해 들어봤다.
-2차 쇠고기 협상의 주요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쇠고기 1차 협상 합의에 따라 미국, 호주, 뉴질랜드와 1992년 6월 11일부터 1993년 7월 15일까지 13개월 동안 각각 다섯 차례에 걸쳐 양자협상이 이뤄졌습니다. 협상의 주요 내용은 1997년 수입자유화, 1993년 이후의 쿼터량과 연도증가율, SBS(업계간 자율구매제도)제도 도입 등 이었습니다.
수입자유화 문제는 1997년 7월 1일까지 쇠고기에 대한 잔존 수입제한을 철폐하거나, GATT 규정에 일치시킨다는 1900년도 합의를 재확인 했습니다. 다만 수입자유화를 최대한 막기 위해 1차 협상이 3년간 수입쿼터 등을 결정했으니 2차 협상도 3년으로 해야 한다는 우리 측 주장을 관철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996년 이후 수입문제는 1995년 6월 이전에 다시 논의를 시작하기로 함으로써 1997년 수입자유화 문제의 실질적 논의도 1995년 6월 이후로 미뤄지게 됐습니다.
수입쿼터 수준은 1993년 9만9000톤, 1995년까지 매년 7%씩 증가시켜 1994년 10만6000톤, 1995년에는 11만3000톤으로 합의됐습니다.”
-협상과정에서의 핵심쟁점은 무엇이었으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수입물량입니다. 쿼터 수준을 갑자기 늘리면 국내시장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게 우리 협상단의 주장이었습니다. 미국은 1997년 어차피 수입자유화가 되기 때문에 적응하기 쉽게 물량을 대폭 늘릴 것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쇠고기 수입은 합의된 쿼터보다도 더 많이 수입된 상황에서 쿼터를 줄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SBS제도 도입과 관련 수급조절용 쇠고기와 SBS 쇠고기의 가격차를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부과하는 마크-업(Mark-up, 부과금)도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SBS 참여업체 모두에게 마크-업을 적용해야 한다는 우리 측의 주장에 미국은 관광호텔용 수준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당시 관광호텔용 수입쇠고기는 마크-업이 2%에 불과했습니다.
미국 등 양자협상 상대국들이 우리 측에 대해 상당한 불신을 가지고 있던 점도 협상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했습니다. 1차 협상의 내용이 포괄적 개념 하에 원론적으로 이뤄지면서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일방적 해석한데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2차 협상에서는 국가적 신뢰 수준의 상식을 떠나 세세한 부분까지 서면으로 남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쇠고기 2차 협상이 한우산업에 미친 영향과 협상과정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어떤 점을 꼽을 수 있습니까?
“당시 쇠고기 소비가 늘어나면서 쿼터량 보다 더 많은 물량이 수입되는 등 2차 협상이 한우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차 협상에서는 쿼터량이 6만6000톤에 불과했는데 2차 협상에선 9만9000톤으로 합의했다는 지적을 농가들로부터 많이 받았습니다.
미국은 협상전문가와 농가조직 대표 등으로 협상단을 구성했지만 우리 측은 전문가가 없다는 점도 협상에서 나타난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공무원의 담당업무가 2~3년 마다 바뀌는 현실에서 공무원은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시 제가 2년 5개월간 축정과장을 맡아 협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해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미국은 쇠고기 협상에만 매달려온 협상의 전문가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우리는 협상기술이 떨어지는 아마추어 수준이었습니다.”
-최근 한·미 쇠고기 협상과 당시 협상과의 차이점은.
“2차 협상은 쇠고기 시장을 완전 개방키로 한 1997년 7월 1일 이전의 수입쿼터를 결정하는 게 골자였으며, 우리는 가능한 쿼터를 줄이려했고, 상대방은 늘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한·미 쇠고기 협상은 이미 쇠고기 시장이 개방된 상태에서 광우병(BSE)으로 인한 문제로 OIE(국제수역사무국) 기준에 따라 협상이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중단은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미국이 위생관리에 허점을 보인 것입니다. 이는 미국에서의 위생관리에 문제점이 추가 발생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수입재개 이전에 그 점을 충분히 인지시키고 미국 측으로부터 향후 위생관리 등에서 발생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장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일본의 수입중단과 광우병 재 발생은 미산 쇠고기에 대한 소비자의 불안감을 증폭시켜준 것입니다. 따라서 국제기준을 떠나 소비자 쪽에서 원산지표시 철저 등을 요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캐나다 등 앞으로 예상되는 쇠고기 협상과 관련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글로벌 경쟁시대에 정부 주도 협상은 대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정부가 축산물 시장을 방어하기 어려운 만큼 생산자 스스로 시장방어에 나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생산자들이 하나로 뭉쳐 조직을 통합하고 전문성을 갖추는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전문성을 갖춘 생산자 통합조직 관계자가 협상 전문가로 참여해 시장을 방어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또 협상에 나서는 실무자들이 농민들의 열망을 안고 협상에 나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협상이 시작되면 빨리 타결하려는 강대국 힘의 논리가 작용되고 압력도 들어옵니다만 어떤 압력보다도 큰 압력은 농민의 압력입니다.
2차 협상 당시 협상 장소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상대국 협상팀에게 압력을 가하는 축협직원과 농민들의 열정을 보면서 힘을 얻곤 했습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시위를 하던 축협직원과 농민을 찾아볼 수 없어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앞으로의 시장경쟁은 소비자 선택에 의해 우열이 가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유럽과 뉴질랜드 축산농가에 비해 우리 축산농가들도 규모 등에서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정부는 그동안 규모화 등 개발농가 대상 지원에서 벗어나 바닥을 다져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농가들은 조직을 통합해 전문가집단을 육성하는 등 시장대응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농수축산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