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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죗값을 치르다 : 조선의 명판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의 관리들은 태형이나 장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경우 모두 속전, 이른바 벌금을 내고 직접 매를 맞지 않았다. 일반 백성들도 너무 나이가 많거나 혹은 아이를 임신한 산모처럼 매를 칠 수 없는 경우라면 속전으로 형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밖에 범인을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 피고에게 태장을 치는 대신 속전을 내도록 한다거나 혹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 목숨으로 죗값을 물을 수 없었으므로 속전을 바치도록 하여 이를 피살자의 집에 주기도 했다.
죗값과 속전(贖錢)
속전은 해당 범죄에 대해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거나 유배 혹은 태장 등의 신체형으로 죗값을 치르지 않고 일체 벌금으로 대신하는 제도였다. 때문에 중국의 ‘대명률’에는 아래와 같이 각종 범죄의 처벌에 해당하는 속전의 액수가 정해져 있었다. 조선 초 세종대에 이르면 ‘대명률’의 속전 조항을 조선의 사정에 맞게 해석하였다. 가령 ‘대명률’의 장10대에 해당하는 600문을 조선의 경제 사정을 감안하여 3분의 2로 감액하여 200문으로 기준한 다음, 10대마다 200문을 더하여 장(杖) 100이면 속전 2관, 장(杖) 60 도(徒) 1년(年)이면 4관 등으로 매 1등에 1관씩을 더하여 장 100에 도 3년이면 8관으로 하고, 장 100에 유(流) 2천리면 10관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매 1등에 1관을 더하여 장 100 유 3천리면 12관, 교형 혹은 참형의 경우는 14관의 속전을 받도록 했다.
볼기 품을 파는 자
돈으로 형벌을 대신하자 매를 맞아주고 대신 돈을 받아 생계를 꾸리는 자들도 나타났다. 장 10대를 맞아야 하는 죄인이 속전으로 200문을 내야 한다면, 산술적으로 장 1대당 속전 20문이므로 장 10대를 맞아주는 조건으로 200문 이하의 돈을 받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매를 맞아야 하거나 200문을 벌금으로 내야 하는 범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를 맞지 않으면서도 200문 이하의 비용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다면 나쁠 게 없는 흥정이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매를 대신 맞아주는 일은 하나의 직업처럼 성했다. 이에 18세기 후반의 학자 성대중은 자신의 저술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매로 돈을 버는 자들의 웃지 못할 일화를 소개하였다.
평안도 안주에 볼기품을 팔아 먹고사는 자가 있었다. 다른 고을의 한 아전이 병영(兵營)에서 곤장 일곱 대를 맞게 되었는데, 엽전 다섯 꿰미를 걸고 대신 맞아줄 사람을 구하자 그가 흔쾌히 대신 맞기로 하였다. 곤장치는 자는 그가 자주 오는것이 밉살스러워 일부러 매우 세게 쳤다. 그는 곤장이 갑자기 이처럼 매서울 줄 몰랐다. 우선 한 번은 꾹 참았지만 두 번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자 그는 다섯 손가락을 굽혔다. 엽전 다섯 꾸러미를 뇌물로 주겠다는 표시였다. 곤장 치는 이가 못본 척하고 더욱 매섭게 치자, 그는 곤장을 다 맞기도 전에 죽게 되리라 짐작하고는 굽혔던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을 굽혔다 편 것은 엽전 열 꾸러미를 주겠다는 암호였다. 곤장 치는 이가 그제야 가볍게 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를 다 맞고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으스대며 말했다.
“내 오늘에야 돈이 귀한 줄 알았네. 돈이 없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게야.”
그는 열 꿰미의 돈이 죽음을 면하게 해 준 줄만 알고 다섯 꿰미의 돈이 화를 부른 줄은 알지 못하였으니 너무나도 어리석다.
속전으로 치부(致富)하다
속전으로 치부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탐욕스런 사또들 또한 거둬들인 속전으로 자신의 잇속을 채우고 있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남인계 대학자 허 목(許穆:1595~1682)은 그의 ‘기언(記言)’에서 형벌을 돈으로 대신하는 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권세로 정치를 어지럽히고 재물로 법을 빼앗는 것[서위탈화(庶威奪貨)]이야말로 법을 어지럽히는 일 가운데 으뜸이라고 강조하고, 사건을 접수한 사또들이 송사를 돈으로 대신하면서 이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현실을 비판했다. 허 목은 “증명할 수 없는 말은 사정을 파악하기 더욱 어려우니 털끝만큼도 가림이 없고 한 점도 오점이 없게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옥사의 양측 말 사이에서 사사롭게 치부(致富)해서는 아니 된다. 옥사를 팔아 얻은 재물은 보배가 아니니 오직 죄상이 쌓여 온갖 재앙이 내릴 뿐”이라고 주장했다.
17세기에 이미 허 목은 속전으로 사욕을 채우는 사또들을 비판했다. 이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다. 세상의 나쁜 풍속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이를 그냥 두고 넘어갈리 만무했다. 그는 ‘목민심서’에서 당시 수령들이 벌이는 가렴주구의 행태들을 낱낱이 거론한 바 있다. “오늘날 수령된 자는 스스로 학정을 펼쳐 원망이 조정으로 돌아오게 한다. 부세 징수를 연기하라는 왕의 조서(詔書)가 내려왔지만 이를 감추고 반포하지 않은 채 오로지 백성들에게 긁어내어 스스로 치부하거나, 부채를 탕감하라는 명을 담은 조서를 받고서도 역시 이를 감추어 반포하지 않고 아전들과 작당・농간하여 그들의 요리(料理)에 이바지한다.
또한 병자를 구호하고시체를 묻어주라는 명령을 감추어 반포하지 아니하며, 결혼 못한 자의 혼인을 권하고 부모 없는 어린이를 거두어 주라는 명령을 감추어 반포하지 아니한다.” 재상(災傷)을 가로채 먹고는 “조정에서 수재와 한재를 인정하지 않고 깎아버렸다”고 하거나 많은 굶주린 백성을 구호 대상에서 제외하고는 “조정에서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고 둘러대고, 잔약하고 굶주린 백성이 호소하면 “조정의 명령이 지엄하니 난들 어찌하겠나” 라고 답하며, 무고한 백성을 가두어두고 속전의 명목으로 돈을 빼앗고자할 때에는 “조정의 금령이 본래 엄한데 네가 어찌 죄를 범했는가”라고 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을 원망하며 아우성치게 한다.
다산은 소 도살령을 금한 자들로부터 받아내는 속전 즉 우속(牛贖)을 문제 삼았다. 조선후기에는 농사에 이로운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도록 한 정부의 금령이 엄했다. 이를 어기고 소를 잡아먹은 자들은 형벌을 면치 못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전을 내고 매를 면했다. 때문에 감사와 사또들 가운데 탐욕스러운 자들은 누구보다 앞서 우금을 엄하게 한 후 이를 어긴 백성들로부터 속전을 뜯어 냈다. 가령 감사는 듣고 보는 것을 오직 서리(胥吏)에 의존하고 같은 지방 백성들의 증언은 듣지 않으니 이에 간교한 아전들이 이 기회를 틈타 묵은 감정을 보복하려 계획한다.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고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거나 혹은 빚 독촉을 받고 원한이 사무치면 서로 상대를 사사로이 도살했다고 무고 하는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익명으로 고발하면 이를 들어주지 않도록 되어 있었지만 감사는 속전으로 배불릴 생각만 하고 자세하게 살피지 않은 채 다만 무고를 인정하고 속전을 토색했다. 아전의 간교와 권세는 날로 높아가고 이로 인해 백성의 고통은 늘고 재물은 날로 줄어들었다. 다산은 정사의 잘못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다고 비난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장(杖) 1백 도(徒) 3년의 형벌을 면하기 위해 속전 28냥을 바치면 되었는데 지방에서는 더 많은 속전을 받아냈다.
다산은 당시 각 도의 관행을 살펴보고, 지방의 사또들이 장형(杖刑)과 이감(移監)을 거듭하면서 장백 혹은 유배형에 해당하는 범인들로부터 사죄(死罪)의 속전인 42냥을 빼앗는다고 설명했다. 지방관들이 율문을 어기고 법을 무시하는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방의 정사가 잘 이루어지는지를 우속의 징수를 통해 알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속전을 우려내는 일은 우속만이 아니었다. 조선후기에는 금주령이 매우 엄하여 이를 어길 경우 심하면 사형에 처해질 정도였는데, 사또들이 이를 이용하여 사사로이 술을 만든 죄인들로부터 많은 속전을 받아내는 일이 횡행했다.
다산은 지방을 순력하는 관찰사들 또한 속전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령 관찰사는 산송이나 묘지(墓地) 문제로 소송하는 자들과 해당 지역 수령(守令)의 학정을 호소하는 자를 잡아다 유배에 처할 수 있었는데, 이를 면하려면 속전(贖錢) 4천문이 필요했다. 또한 병든 소를 도살하는 경우에도 유배형을 면하기 위해 3천문이 필요하니 이를 이용하여 치부한 돈이 수백만 냥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이들 관찰사들은 속전을 받을 일에는 열성이면서 도리어 엄하게 처벌해야 할 토호와 간사한 아전들이 인장을 위조하여 농간을 부려도 ‘연못 속의 물고기는 살필 필요가 없다’면서 덮어두거나, 불효부제(不孝不悌)하며 처를 박대하여 음란하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자가 있어도 ‘고발한 이가 지나치다’면서 모르는 척 외면해 버리기 일쑤였다. 사또들 가운에 환곡을 처분하고 세금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도 관찰사 자신의 소행과 같으므로 용서하여 그대로 둔 채 인사고과를 최우등으로 매겨서 임금을 속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속전의 활용
다산은 죗값을 치르는 대신 거둬들인 속전으로 사또의 사욕을 채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른바 벌금으로 거둬들인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를 사또가 개인적으로 쓸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속전이야말로 그 자체로 죗값을 대신한 돈이니 이미 탐탁지 않은 재물[불설지재(不屑之財)]요 깨끗하지 않은 돈[불결지재(不潔之財)]이다. 이에 다산은 양조를 금하면서 받은 속전,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낸 데 물린 속전, 주인을 알 수 없는 장물의 압수 등으로 생긴 재물을 개인적으로 전용하지 말고 관노(官奴:관청 소속의 공노비들)들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관노야말로 관청에서 가장 고생하는 이들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들 가운데 일부는 관의 권력에 기대어 일반 백성들을 침학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관정(官庭)에 송사(訟事)하러 온 백성이 있으면 수령은 아무 말이 없는데도 제(관노)가 나서서 성내어 꾸짖고, 수령은 부드러이 말하는데 제가 나서서 고함을 지르고, 수령은 긴 말이 없는데 제가 나서서 잔소리를 하고, 수령은 아직 모르는데 나서서 사실의 기밀을 들추어내고, 수령은 명령하지 않는데 큰 소리로 매우 치라고 하여 백성의 비난을 산다”는 것이 다산의 설명이다. 이러한 관노들은 마땅히 물론 엄하게 다스릴 것이며 어길 경우 엄하게 벌주어야 한다.
다산은 이와 더불어 사또는 항상 관노들이 매우 고된 일을 하므로 늘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먼저 제사나 잔치가 있으면 마땅히 그 남은 음식을 관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것이며, 혹 춥고 굶주림이 심한 관노가 있으면 사또는 옷가지와 음식 주기를 집안의 가노(家奴) 보살피듯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연한 공노비(관노)이지만 부임한 사또에게는 사노들이 그러하듯이 ‘상전’이라 부를 터이니 집안의 상전이 가노를 헤아려주듯이 이들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좋은 사또라는 칭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사또는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다음 관가(官家)에 쌓인 탐탁지 않은 재물들, 즉 속전이나 무녀세를 활용할 차례이다. 다산은 속전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니 바로 고된 일을 하고도 보수가 없는 관노・관비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속전은 아니지만 무녀들에게 거둬들이는 무녀세(일종의 속전과 같다)를 이용해도 좋다. 다산은 조선후기에 무당들의 혹 세무민이 점점 늘어 이들을 금지하려면 세금(무녀포)을 무겁게 매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녀포(巫女布)는 형조(刑曹)에서 무당들이 잡신에게 제사 지내며 혹세무민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벌금이나 세금 같은 것이었다. 무당들에게 물린 속전인 셈이었다.
다산은 다른 요역은 모두 줄여도 되지만 무녀포만은 무겁게 매겨야 무당들이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이에 다산은 사또들이 해당 지역의 무녀포를 원래 정해진 금액 이상으로 증액하여 큰 고을은 200필(疋)로 그리고 중간 고을은 혹 100필로 한정하여 최대한 거둬들이도록 했다. 마을에서 조금이라도 무당 노릇을 하거나 굿이나 푸닥거리하는 자를 발견하면 반드시 잡아다가 명단에 등록하고 무녀포를 징수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매년 무녀포를 징수하여 그 악습을 징벌한다면 조선에서 무당에 현혹되는 풍속이 다소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다산은 무당들에게 거두어들인 세금 역시 불결한 재물(탐탁지 못한 돈)로 규정하고 수령이 이를 자기 주머니에 넣는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속전을 관노들에게 베풀었듯이 이렇게 거둔 무녀포 역시 마땅히 4등분하여 서리와 관노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먼저 4분의 1 한 몫은 형방(刑房)에게 나누어 주고, 그 다음의 두 몫은 관청의 사령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 한 몫은 관청에서 물 긷는 수급비(水汲婢)에게 주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녹을 받지 못하는 형방과 사령들이 심부름을 떠나거나 공무를 집행하기 위해 말 삯과 노자 등의 비용으로 충당할 수 있고, 수급비는 의복을 마련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한편, 조선후기에 도박은 가장 큰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여러 도박 중에서 마음을 망가뜨리고 재산을 탕진하여 부모와 친족의 근심거리가 되는 으뜸으로 마조(馬弔)가 있었다. 이른바 마작으로 중국의 마작을 들여다가 그 놀이방법과 패를 간단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 다음 쌍륙과 강패(골패) 등도 많은 이들을 투전으로 이끄는 악습이었다. 다산은 관아의 아전들과 군교들이 이러한 도박에 빠져 빚을 지게 되고 결국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또는 엄하게 도박을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일 개전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사또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시노(侍奴)나 시동(侍童) 혹은 심복 심부름꾼을 보내어 이를 발견하는 대로 잡아들이고 법에 따라 속전을 거두어 그것으로 노비에게 혜택을 주고 옥에 있는 죄수들을 구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무릇 관아의 돈을 축낸 경우가 있으면 이를 끝까지 추궁하여 만일 마작과 골패 등 노름 때문이라면 많이 딴 자를 잡아들여 그 액수만큼 속전을 징수하여 모자라는 돈을 보충하도록 했다.
다산은 형벌 대신에 납부한 속전, 무녀들로부터 받은 세금, 도박에 빠진 잡범들로부터 거둬들인 판돈과 벌금 등을 모두 관청의 공공 재산으로 삼아 관노들과 서리들이 사용하는 비용에 충당하도록 했다. 대신 매를 맞고 돈을 벌다가 지나친 욕심으로 죽게 된 백성이나 형벌 대신 받은 벌금을 제 돈으로 여기는 사또들의 사욕을 제어하고, 그나마 공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