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얼마나
오래 남을까.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가을 우체국 앞에서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문
줄도 몰랐네.
휴일 아침, 윤도현님의 "가을 우체국앞에서"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토록 푸른 가을 하늘 아래선
쇼팽보다 더 가슴 아리게 감미롭다. 그래, 가는 거다. 가을 우체국을 찾아서
남해 고속도로를 타고 마산으로 들어가서 다시 터널만
지나면 조용한 진해시가지로 들어설 수 있다. 맑은 햇살 아래 시가지는 정말 조용하다. 곳곳에 하얀 제복을 빳빳이 다려 입고 검고 네모난 가방을
든 해군 생도 몇몇이 줄을 지어 지나다닌다.
가로수 그늘에는 하얀 제복에 베레모를 삐딱하게 쓴 병사들도 여자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무어라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그 옆으로 유모차가 지나가고 건들거리는 젊은이들이 힐끔 바라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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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로타리와 진해 우체국
ⓒ2004 함정도
방사선 모양의 시가지 도로 가운데 부분이 중원 로터리다. 그 곳에
우체국이 있다. 일제 때 지은 건물로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사용하지 않고 바로 옆에 새 건물을 지어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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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체국 게시판
ⓒ2004 함정도
진해우체국의 역사
사적 제291호. 경상남도 진해시 통신동
1912년
10월 25일에 세워진 러시아 풍의 근대건축물로 같은 해 11월 부터 진해우체국 청사로 사용되었다. 동판으로 덮은 지붕에는 반원형의 채광 창을
내었고, 네 벽에도 채광을 위한 여러개의 창이 크게 만들어졌다.
지붕의 동판은 일제말기에 포탄재료로 징발되었던 것을 1984년에
복원하였다. 원래의 목조 마루는 보수 때 시멘트로 개조되었다. 정문 현관의 양쪽에는 강한 배흘림의 둥근 기둥이 세워졌고, 내부의 중앙에는 손님과
사무의 공간을 구분하는 대리석 카운터가 있다.
설계자와 시공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러시아 풍 건축양식은 당시 진해에 있던 러시아
영사관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 시대에 지은 점과 지붕에 동판을 덮은 점은 근대화 시기 일본에서 서양 건축양식이 정착되어 가던
과정을 보여 주는 좋은 예다.
동판을
얹은 지붕과 중앙의 두 배흘림 기둥 장식이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하얀 칠을 해 깔끔하고 단정했다. 입구로 들어서는 계단도 품위있게 꾸며
놓았다. 장식이 많아 서구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시기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영화 '클래식'에서 손예진이 우체국에
들어서던 장면을 이 곳에서 찍었다고 한다. 물론 '수원 우체국'이라는 간판으로 바꿔 촬영했단다. 내부는 신청사를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몇몇 제복 입은 생도들이 보였다. 뒤편으로 연결 복도를 지나 문화재청사를 살짝 들여다보았다. 바닥은 마루가 깔려 있었고 일부는 사무실로,
나머지는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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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 뒤뜰에 마련된 휴식장소
ⓒ2004 함정도
아내에게 이곳은 가슴 아픈 장소다. 장인 어른께서 이곳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어서 진해에서 어린 시절을 잠시 보냈다고 한다. 일요일마다 뒤쪽 탑산으로 가족 나들이를 했는데 그 때 찍은 사진을 본 적도 있다. 이듬해
부산으로 전출되셨고 부산 체신청에 근무하시던 중 병으로 떠나셨다. 딸들과 젊은 엄마만 남겨 두고 가야만 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때 장인어른
나이를 훨씬 지난 내 나이로도 상상조차 힘들다.
장모님은 장인어른 가신 후 처음 이곳에 들렀다고 하셨다. 지나칠 일이 있어도
일부러 둘러가셨다면서 구석구석 오래 바라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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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서 바라본 탑산
ⓒ2004 함정도
앞에는 아름드리 커다란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벚꽃이 활짝 핀
군항제 때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외는 일년 내내 조용한 도시다. 바닷가에 위치하지만 바닷가에 갈 수 없다. 대부분 군항으로 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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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남아있는 일본식 건물
ⓒ2004 함정도
벚나무 가로수 아래를 걸었다. 모퉁이에 아직도 일본식 주택이 남아
있었다. 아담한 본채에는 개량식 기와가 덮여 있었고 마당에는 잘 가꾼 향나무들이 담장 밖으로도 보였다. 주인은 누구일까. 옛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는 듯한 건물은 가을 햇살아래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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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시립도서관에 아직도 '시월유신' 기념비가?
ⓒ2004 함정도
로터리를 중심으로 중요 건물들이 둘러서 있었다. 우체국에서 길 하나
건너면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시립 도서관이 있고 다시 길을 건너면 경찰서가 인도에 가득 화분을 내놓고 있다. 이렇게 친절한 경찰서는 처음이다.
다시 길을 건너면 은행건물이고 그 건너편에는 오래된 러시아풍 2층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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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 입구
ⓒ2004 함정도
그 중 한 곳이 흑백다방이다. 1955년에 문을 연 가장 오래된 클래식
다방이자 문화공간으로 유명하다. 입구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화가이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아니스트 딸이 운영하는 이 곳은 고 유택렬 화백이 직접
칠하시고 어머니께서 생전에 모으신 골동품들로 꾸며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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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 실내(피아노와 뮤직박스가 보인다)
ⓒ2004 함정도
세월의 힘까지 합쳐져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공간에 들어서니 잔잔한 피아노
곡이 흐르고 있었다. 운 좋게도 주인 유경아님이 계셨다. 이 곳은 여러 매체에서 소개되었고 음악감상회나 연극공연이 매월 열리고 있다. 이 곳
주인이자 피아니스트인 유경아씨의 연주도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아쉽게도 지난 주에 공연이 끝났다는 것이다.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이
커피향처럼 번져 나갔다.
자동차로 돌아 나오는데 갑자기 바다가 보였다. 군인 몇 명이 다가오더니 정중히 경례를 하면서 돌아나가라고
하였다. 친절하게도 자세히 갈 길도 일러주었다. 군사 도시의 색다른 점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용원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달리는 길이 무척 시원했다. 양편으로 하얀 억새가 지천으로 피었다. 명지 가까이 오자 철새들이 하늘 가득 날아 올랐다. 우리 사는
세상은 아직도 아름다웠고 가을날의 어느 휴일은 그렇게 투명했다.
가는길
남해고속도로 동마산 톨게이트 이용 창원
방향 2번 국도 이용 장복산을 넘어 진해 시내로 들어가 중원로터리를 찾아감
첫댓글 진해 해군통제부앞에 도천국민학교가있는데 않들려보셨는지요? 본인이 바로 도천국민학교 출신입니다. 아주 정겨운 학교이지요. 우체국은 그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요, 놀랐습니다. 다음 번에는 들여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