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종교는 ‘방랑’
아는 이의 전시회가 있어서 서울 예술고등학교 근처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난다.
유행가 노래가사처럼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가는 생활의 시작이다. 내가 선택한
나의 길. 버스여행을 시작하기 전,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마찬가지다. 지금의 이 ‘유목생활’도 누구나 꿀 수 있는 꿈이지만 실행은 쉽지 않으리.
나는 그림의 양식을 바꿈으로써 다른 화가와 구별되는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은 쉽지 않다. 길이 없는 곳을 걷는 것은 길을 만들면서 가는 노동을 요구하니까.
가끔 아는 이들로부터 버스 ‘차장’을 구해보라는 농담을 듣곤 하는데, 외로워 보이는
이 여행길을 같이할 길동무가 곁에 있길 바라는 우정어린 마음이겠지. 하지만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내 삶이 그러했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의 설치’가 삶의 전제조건
이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 길동무가 ‘이성異性’이라면 나는 그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 지금의 내 길은 그런 조건을 갖추기 어렵다. 그리고
그 조건에 나를 맞추지 않는다. 맞춤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 내 방식이다.
그림을 그리며 산다는 것은 공책空冊을 끼고 산다는 것이다. 공책이란 무엇인가?
‘빈’ 책이다. 화가의 운명은 바로 이 빈 책에 이미 있는 것이다. 전제는 없다. 걸어가는
바로 그것이 길인 이 삶. 자유는 외로운 것이리. 이 외로움은 위안받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림자 벗을 삼아” 방랑한다.
포천 그림노트 모임에서 공부하는 희영이, 나현이, 현정이와 차 안에서 큰소리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선생님은 종교가 뭐예요?”
“종교?”
“네.”
“내 종교는……박인희의 ‘방랑자’란 노래가사에 있는데, 좀 길어.”
“?”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이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 이게 내 종교야.”
“에이, 그게 무슨 종교예요! 종교를 말씀해달라니까요. 종교요!”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이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내 종교는 ‘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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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생곤 <...노란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