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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사는 이 전서를 통해 玆山魚譜에 수록된 수산동식물 200여 종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약전의 숨결이 묻은 곳을 샅샅이 뒤졌다. '현산어보를 찾아서'는 그 고된 결과물이었다.
한데 이 교사는 자기 저서에서 玆山魚譜는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신 교수가 이번 글에서 지적했듯이 그 이전에도 이미 임형택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의 교육활동과 성과'(1998)라는 논문을 통해 이를 가장 먼저 주장했고, 김언종 고려대 교수 또한 2001년 출간한 '한자의 뿌리'에서 이에 동조하기도 했다. (김언종 교수는 나중에 종전 주장을 철회하고 '자산어보'로 돌아섰다.)
신 교수는 玆山魚譜를 '자산어보'로 읽어야 함에도 '현산어보'라는 읽기가 "그렇게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이태원 씨 저서를 "신문,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다뤘기 때문"이라면서, "한국의 출판상업주의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신 교수는 더 나아가 玆山魚譜의 '현산어보' 읽기가 "그간 무지 때문에 오독한 것을 바로잡았다는 학계의 성숙함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고, 아직까지도 무지함을 깨우치지 못한 대중에 대한 자부심 또한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산어보' 확산에 기폭제 역할을 한 이태원 씨의 전서는 당시 그에 대한 각종 언론사 서평을 보면, 玆山魚譜에 등장하는 수산동식물 200여 종을 직접 찾아 헤맨 저자의 열정이 높은 평가를 받았지, 언론과 결합한 출판상업주의 때문에 각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 이태원 씨는 玆山魚譜의 흔적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시 산림정책의 폐해를 논한 정약전의 송정사의(松政私議)라는 고문서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진본 미스터리
‘흑산도 유배자’ 혼 담긴 탐구일지, 200년 만에 빛 보나?
자신이 소장한 ‘자산어보’가 진본이라고 주장하는 石山 진기홍 옹.
오른쪽은 자산어보와 함께 발견된 다산 정약용의 ‘이담속찬’(판각본).
일제 강점기 때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자산어보(玆山魚譜)’ 진본이 현존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학계와 고문서계에 파문이 일고 있다.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일지로, 일찍이 작가 이병주가 ‘민족의 교재(敎材)’라 극찬했던 책, 자산어보.
일제 강점기 국문학계의 거두 김태준으로부터 근대 우정사(郵政史)의 대부 진기홍으로 이어지는 자산어보 진본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1814년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1760~1816)이 지은 책. 손암이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전라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하고 채집한 기록으로, 수산동식물 155종에 대한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에 관한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 3권1책.’
위의 글만 읽어도 무슨 책에 대한 설명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백과사전에 실린 ‘자산어보(玆山魚譜)’ 해설은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보다는
자세하지만 내용이 그리 길지는 않다. 국사 교과서에 나온 자산어보에 대한 설명은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 간 후 지은 책’이 고작.
자산어보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며 아이들에게까지 회자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80년대 들어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실학(實學)에 대한 연구가 봇물을 이루면서, 그의 중형(仲兄)인 정약전의 순탄치 못한 삶도 조명받기
시작한다.
2000년대 들어 자산어보 번역서가 꾸준히 나오고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시절을
무대로 한 다큐멘터리, 소설, 기행문이 쏟아지면서 자산어보는 ‘한국 최초의 어류학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최신식 어류백과사전’ ‘당대 세계
최고의 어류박물지’ 등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자산어보를 쓰기 위해 정약전은 중국 문헌을 정리, 고증하는
수준에 그쳤던 당시 저술 행태를 훌쩍 뛰어넘어 흑산도 근해의 해양 동식물을 직접 보고 만졌으며, 심지어 당시에는 금기시됐던 해부도 서슴지
않았다. 50개가 넘는 청어의 척추뼈를 일일이 세어 맞춘 그의 관찰력에는 현대 생물학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진본 소장” 주장한 石山 진기홍
정약전의 이런 저술 태도는 훗날 실학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생물학도들조차 그를
추앙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실제로 자산어보를 제대로 번역하고 소개했다는 평을 듣는 연구자의 대부분은 한학자나 실학 연구자가 아니라 생물학을
전공하고 수산청에 근무했거나 생물교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다.
1943년 자산어보에 대한 최초의 번역 해설판을 완성한 어류학자
정문기(학술원 종신회원, 1995년 작고) 박사,
1998년 자산어보를 현대어로 알기 쉽게 번역한 ‘상해 자산어보’의 저자
정석조(77·정문기 박사의 아들)씨,
그리고 2002년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 책을 통해 ‘玆山魚譜’를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이태원(34·세화여고 교사)씨 등이 그들이다.
자산어보 연구자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문제는 현재 남아 있는 자산어보
필사본 8개 중 어떤 것을 사료(史料)로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백과사전에서 보듯 자산어보는 현재 진본은 없고 그것을 후대에 누군가 베껴쓴
필사본만 남아 있다는 게 정설이다.
문제는 8개 필사본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 따라서 현재로선 정약전이
쓴 원래 문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힐 길이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약전의 자산어보 진본을 찾으려는 연구자나 기관의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남 바닷가 마을 오두막의 벽지로 쓰이고 말았다는 둥 근거 없는 설만 무성할 따름이다.
혹 고문서의 메카인 서울 인사동 고서점 한구석에서 진본을 찾으려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취재 결과 인사동에는 자산어보 진본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의문을 품고 취재를 하던 지난 4월 중순,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산어보 진본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으며, 그는 고문서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대가라는 내용이었다.
소문으로 알려진 ‘대가’를 추적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고문서를 연구하는 사람이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우정사(郵政史)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는 석산(石山)
진기홍(陳錤洪·91) 옹.
진옹은 어릴 적 우표수집에 열광했던 30∼40대라면 그 이름 석자를 모를 리
없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 전주우편국을 시작으로 1961년 광주체신청장으로
퇴임하기까지 30여 년 동안 한말에 발행된 우표와 서류, 책자를 모으면서 체신문화재를 보존하고 고증하는 데 한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각종 문헌과 고증을 바탕으로 일제가 만든 ‘체신의 날’(현 ‘정보통신의
날’)을 한국 최초의 우편 행정관서인 우정총국 개국(1884년, 고종 21년) 날짜(4월22일)로 바꿨으며, 동대문 보수자료로 쓰기 위해 헐릴
예정이던 구한말 우정총국 건물을 해체 직전 살려내 체신박물관으로 만들었다. 2004년 정보통신부가 간행한 ‘우정 100년사(史)’를 쓴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퇴직 이후 여러 신문에 우표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부터. 각종 진귀한 우표 전시회를 열어 우표 수집가와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진옹은 지난해 1884년 우정총국 개국의 근거서류인 ‘대조선국 우정규칙’ 등
172점의 사료와 진귀한 우표들을 체신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런 진옹이 자산어보와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것은 그가 고문서 감정계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15세기 국어와 한글필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월인천강지곡(보물
398호)’을 1961년 전남 담양의 한 사찰에서 발굴한 바 있고,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용주사에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발견하고,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화폭에 옮긴 용주사 ‘미래불(未來佛)’이 단원 김홍도의 작품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70대 이상의 고문서 연구자들은 대부분 진옹에게 필적 감정을 맡길 정도이며,
그가 ‘맞다’고 말하면 그것이 곧 ‘법(法)’이 되는 실정이다. 지금껏 그가 감정한 작품 중 후일 감정결과가 뒤집어진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진옹이 소장한 자산어보가 진본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는 대목이다.
당대 국내 어류학계의 최고 권위자이자 자산어보를 처음으로 번역한 정문기
박사는 생전에 8개 필사본을 모두 비교해본 뒤 진옹 소장본이 “8개 필사본 중 내용이 가장 충실하며 책의 체제나 입수 경위로 보아 저자 정약전의
자필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 김태준과 자산어보
진옹은 정 박사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가 제각기 자신이 소장한 자산어보에 대해 정약전의 자필본일 가능성을 제기하기 전부터 이미 이 책이 진본임을 짐작할 만한 몇 가지 단서를 들고 있었다
“자산어보는 파지(破紙)로 공중분해되기 직전, 정말 우연한 기회에 내 손에 들어왔지요. 그건 운명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때 내 손에 같이 들어온 책이 대부분 정약전의 동생인 다산의 책 진본이었지요. ‘동언잡식(東言雜識)’ ‘이담속찬(耳談續纂)’(옆쪽 사진)…. 형제의 책이 같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정약전 선생의 자필서임을 확신했습니다.
더욱이 원 소장자가 ‘조선한문학사’와 ‘조선가요집성’을 쓰고 실학에도 관심이 깊었던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1905∼49) 선생이라 심증을 굳혔죠.”
그가 말하는 ‘우연한 기회’란 무엇이고 국문학자 김태준과의 인연은 어떤 것일까. 진옹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자산어보의 원소장자였던 김태준의 죽음으로부터 자산어보를 구한 후 정약전의 친필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재구성해봤다.
광복 후 좌우익의 대립이 극에 달한 1949년 11월 어느 날, 서울 수색(水色) 형장에서 일제치하의 국문학자이자 좌익 선동가였던 김태준이 공개 총살형을 당했다. 죄목은 이적행위 및 간첩죄. 이희승, 조윤제와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구성하고,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 담당 강사를 지낸 그는 ‘조선한문학사’와 ‘조선소설사’(1931년 동아일보 연재) 등을 쓴 국문학계의 거두였다.
그는 일찍이 박헌영과 함께 좌파 독립운동을 벌이다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부터 남로당 문화부장 겸 특수정보 책임자로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던 김태준은 그해 9월 빨치산 국군토벌대에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 좌파 지식인 대부분이 그러했듯 그도 다산 정약용 등 실학파에 많은 애정을 보였으며, 그런 정황은 그가 쓴 각종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김태준이 죽고 1년2개월 후인 1951년 1월 말. 1·4 후퇴 이후 중공군에 밀려 서울까지 내려온 육군 모 사단 소속 김모 중위는 상급자로부터 ‘서울 마포나루 인근에 있는 공산당 협력자의 집을 수색해 불온서적을 압수하고 부산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서류상 가장 먼저 대상에 오른 곳은 김태준의 거처. 마포 김태준의 집에 도착한 그는 집안에 있던 서류와 책들을 꺼내 일부는 태우고 남은 책은 찢거나 묶은 채로 트럭의 짐칸에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보름여가 흐른 1951년 2월10일 전주저금관리국(현재의 우체국) 마당. 250명의 직원을 거느린 관리국 국장은 36세의 청년 진기홍이었다.
진 국장이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출근해 마당에 들어서자 군용 트럭 한 대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김태준의 집을 수색한 김 중위가 몰고 온 트럭이었다. 화물칸에는 파지(破紙)들이 뒤엉켜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진 국장은 파지를 뒤져 깊숙이 박혀 있는 두 묶음의 책을 발견하고 냉큼 집어들었다.
당시 진 국장은 그것이 김태준이 소장하던 책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책은 아주 오래된 고서들이었지만 상태가 양호했다. 진 국장이 다른 책이 더 있는지 살펴보려 할 때 김 중위가 관리국에서 뛰쳐나와 “당신 뭐야! 뭐 하는 거야”하고 호통을 쳤다. 진 국장이 “못쓰는 파지 중에 쓸 만한 책이 있나 해서 본 건데 뭐가 문제요”라고 따지자 김 중위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민족 최초의 어류박물지와 속담 모음집이 먼지로 사라지기 일보 직전에 목숨을 구하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진 국장은 평소 알고 지내던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1968) 선생을 만나 사연을 전하고 그때 구한 책들을 보여주니 가람 선생은 깜짝 놀라 “그 차가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며 “빨리 그 차를 뒤쫓아야 한다”고 말했다.
행여 귀한 책이 더 있을지 모르니 불타 없어지기 전에 빨리 구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2월10일(1951년) 숙직을 한 저금관리국 수위에게 수소문한 결과 군인들이 전주 상계면 지소로 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뒤늦게 쫓아갔지만, 문제의 차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진옹은 이후 트럭에서 나온 고문서 속으로, 또 정약전·약용 형제의 삶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가 이후 평생 고문서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것도, 우정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사건 때문이었다. 가람 선생에게서 대충 이야기를 들었지만 트럭에서 나온 고문서는 대부분 정약전·약용 형제의 자필본이거나 판각본이었다.
진본 심증 굳히다
당시에 구한 동언잡식은 다산이 중국의 방대한 문헌 중 조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들을 내용별로 정리한 일종의 ‘중국 문헌 백과사전’으로, 현재는 다산 연구자에게 넘어가 ‘여유당전서’에 포함돼 있으며, 이담속찬은 다산이 16세 때에 시작해 49세에 완성한 책으로 중국 속담과 자신이 직접 듣고 채집한 한국 속담들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다산이 생전에 본을 떠 출간한 유일한 책(판각본)인 이담속찬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1부가 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다.
진옹은 “다른 책들은 연구가들과 공유했지만 이담속찬만은 내주지 않을 것”이라며 “다산의 해학과 경륜, 장난기가 그대로 묻어 있는 너무 좋은 책이자 나의 최고 애장본”이라고 했다. 그는 “백과사전에 이담속찬의 표지가 중국 책 야언(�言)을 따다 붙인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 알려진 것으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산은 이담속찬에서 자신을 ‘철마산초(鐵馬山樵)’라고 밝히며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가 ‘호고당(好古堂)’이라는 둥, 책 곳곳에서 갖은 익살을 부리고 있다.
자산어보에 대한 애정은 전쟁 중에도 그를 흑산도로 데려갔다. 진옹은 출장을 핑계 삼아 흑산도를 찾아 정약전의 발자취를 추적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그후 10년의 세월이 훌쩍 흐른 1960년의 어느 여름날, 그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신이 소장한 자산어보와 똑같은 필사본을 만나게 된다. 틀린 부분도 똑같고 빠진 부분도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분명 다른 사람이 쓴 필사본인데 거기에는 이 책의 원본 소장자가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확인해본 즉, 자산어보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김태준은 일제시대에 이미 자신이 소장했던 자산어보를 베껴서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 규장각에 기증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자산어보 8개 필사본 중 2개가 김태준이 소장한 자산어보를 베낀 것이라는 얘기다
소장학자들의 반박
국립 전주박물관이 소장한 정약전의 간찰. 날려 쓴 글씨다
자신이 소장한 자산어보가 진본이라는 심증을 굳힌 진옹은 이번에는 정약전의 또 다른 글씨를 찾아나섰다. 정약전의 글씨체가 있어야 자신이 소장한 자산어보가 진본임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전의 필적을 찾습니다’라는 광고도 냈다.
정약전의 필적을 찾아낸 시점은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1999년. 그해 국립전주박물관은 한 서예가로부터 정약전의 필체로 추정되는 간찰(簡札, 편지·사진1)을 기증받는다.
비록 휘갈겨 쓴 반초서(半草書)의 필적이지만 진옹은 그 간찰의 필체가 정약전, 정약용 가계(家系)의 것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진옹이 자신이 소장한 자산어보가 정약전의 친필본임을 최종 확인한 것은 2002년 서울대 근처의 고서점 주인이자 재야 고문서 연구가인 송부종씨가 정약전의 또 다른 간찰(사진2)을 발견하면서다. 진옹이 보기엔 자산어보를 쓴 인물과 절대 다른 사람의 필체일 수 없는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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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는 “진씨가 찾아와 이 편지를 본 후 ‘당신이 나와 무슨 인연이 있길래 이런 좋은 일을 했냐’며 엉엉 울었다.
이 편지에는 정약전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씌어 있을 뿐 아니라 내용으로도 이 편지가 정약전의 글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전했다.
문화재청 고문서 감정위원이기도 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우 교수는 “이 간찰은 정약용 가계의 글씨와도 닮은 점이 많고, 전주박물관 소장본 간찰과 비교해봐도 한 사람의 글씨로 볼 수 있다. 정약전의 글씨임에 틀림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편지에 대해선 많은 필적 감정가, 고문서 감정가도 이론(異論)을 제기하지 않았다.
진옹의 자산어보 진본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쪽은 고문서 전문가가 아니라 오히려 생물학도들이었다.
1998년부터 흑산도를 비롯해 정약전의 유배지를 샅샅이 뒤진 후 2002년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 책을 쓴 이태원씨는 “진기홍씨 소장본 자산어보는 다른 필사본보다 오히려 틀린 부분이나 빠진 부분이 더 많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산어보라는 책이 정약전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李晴)과의 공저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자산어보 진본은 정약전이 쓴 친필 원고를 이청이 주석을 달아 새로 쓴, 즉 이청의 글씨로 쓰인 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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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자신의 저서 ‘현산어보를 찾아서’에서 자산어보 곳곳에 보이는 ‘청안(案, 사진3 원 안)’이라는 용어가, 정약용의 제자 이청이 정약전이 직접 보고 들어서 쓴 부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대목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이청은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18제자 중 가장 사랑을 받은 제자로, 정조 때 교리를 지냈으며 주로 천문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여유당전서나 다산의 책 곳곳에 ‘청안’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이는 다산의 작품에 제자 이청이 주석을 붙인 것으로, 자산어보에 나오는 ‘청안’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다.
실제 기존 자산어보 번역자들은 ‘案’의 ‘’자가 옥편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라 이 부분만 빼놓고 번역해왔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측”
자산어보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국내 최초로 조선시대 농촌기술 서적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번역하고 있는 정명현(숭실대 강사·생물학)씨도 “자산어보는 이청과의 공저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진기홍씨 소장 자산어보가 진본이라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즉, 이들의 주장은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자산어보 초고를 쓴 뒤 이를 강진에 있는 동생 정약용에게 보냈고, 정약용은 중국 문헌에 밝은 제자 이청에게 주석을 붙이게 한 뒤 책을 새로 쓰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옹은 이런 주장에 대해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억측”이라고 잘라 말한다. 진옹은 “청안이라는 부분은 이청이 정약전의 과학적 연구 성과에 대해 중국 문헌에 나와 있는 것과 비교하거나 고증한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게 없다”며 “섬지역인 흑산도에 중국 문헌이 없었기 때문에 정약전이 강진에 있는 동생(제자 이청)의 자료를 넘겨받아 자신이 직접 써 넣은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즉, 정약전이 흑산도 근해 동식물에 대한 중국 문헌의 내용을 참조하기 위해 정약용의 제자를 시켜 자료를 조사하게 한 후 이를 흑산도로 보내게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청의 공(功)을 인정해 ‘이 부분의 조사는 이청이라는 사람이 했다’는 사실을 자산어보에 밝혀놓은 게 ‘청안’의 실체”라는 것.
감정을 의뢰해보니…
진옹은 “자산어보에는 물고기 관찰과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 흑산도 주민 장창대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이청, 장창대 세 사람의 공저가 돼야 한다. 또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다산의 저서 중 청안이라는 대목이 나오는 책은 모두 이청과의 공저가 돼야 하는 것 아니냐”며 후학들의 주장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학교수가 논문을 쓰면서 제자에게 자료수집을 부탁하고, 논문의 공동저자로 올려주는 것과 같죠. 정약전은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단히 양심적인 학자였던 듯합니다.”
그렇다면 왜 진옹은 이런 논란 속에서도 지금껏 자산어보에 대한 진위 감정을 문화재청에 공식 의뢰하지 않았을까.
“그게 1980년대 중반이던가…내가 소장한 반계(磻溪)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원고본(유형원 자필본)에 대한 진위 판정을 받기 위해 서울시에 문화재 감정을 의뢰했는데 ‘목판본 글씨와 필체가 다르다’며 위작(僞作)으로 판정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반계수록은 목판본인데 이것은 인쇄를 하기 전에 반계가 직접 쓴 것이기 때문에 필체가 같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반계의 다른 필체와 비교하지 않고 인쇄본과 비교해서 다르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감정위원들의 수준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자산어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합니다.”
진옹은 반계수록 위작 감정 이후 자신이 다른 문서를 감정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감정을 맡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신동아’는 진옹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산어보에 대한 필적 감정을 의뢰하기로 했다.
필적감정은 전주박물관 소장 정약전 간찰, 송부종씨 소장 정약전 간찰, 그리고 진기홍 소장 자산어보의 필체를 서로 비교해 같은 사람의 필체임을 확인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감정단은 문화재청의 고문서 감정위원이었거나 현재 위원인 사람, 서예·고문서 관련학계에서 추천한 사람들로 구성했다. 하지만 고문서 감정분야에서도 서예계와 비평가 그룹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어 감정단의 이름만 공개하고 각자의 평을 그대로 게재하지는 않기로 했다. 진기홍 옹 소장 자산어보의 진본 감정에 참여한 감정단은 다음과 같다.
문화재청이 나서야
▲도곡 김태정 선생(한국서예협회 초대 이사장)
▲근원 김양동 교수(계명대 서예과)
▲이완우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효봉 여태명 교수(원광대),
▲청고 공창호 선생(인사동 공갤러리 대표)
▲손종섭 선생(한학자, ‘다시 옛 시정을 더듬어’ 저자)
감정 결과 3명은 “진기홍 소장 자산어보가 정약전의 간찰 필체와 비교했을 때 동일인에 의해 쓰여진 것”, 즉 정약전의 자산어보 진본이 맞다는 견해를 피력한 반면 나머지 3명은 “진기홍 소장 자산어보는 후대에 누군가가 베껴 쓴 필사본으로 정약전의 글씨가 아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필사본이라고 주장한 감정단 중 한 명은 송부종씨 소장 간찰이 정약전의 친필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해 사실상 자산어보에 대한 감정이 제대로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었으나 일단 반대 의견으로 간주했다. 또한 이번 감정은 원본이 아닌 복사본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감정의 정확성과 정밀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감정 결과에 대한 진옹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이런 결과가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기에 동요하지 않는다. 다만 자산어보에 대한 홍보와 교육이 좀더 많이 이뤄져 우리 국민의 이해와 사랑이 커지기 바란다”고 했다.
자산어보 진본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억울하게 흑산도에 유배돼 있으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자연을 제대로 알고자 했던 정약전의 과학정신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산어보 진본 논란은 국가가 개입해서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게 관련학계의 중론이다. 행여 우리의 무관심으로 민족의 자산이 돼야 할 국보급 문화재가 장롱 속에서 빛이 바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산어보에 대한 문화재청의 공식 감정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