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9월 9일 월요일]
『대동야승』 제8권 [해동야언 Ⅱ] 세조기(世祖紀) <이시애의 난>
저자 허봉은 이시애(李施愛 ? ~ ? 본관 길주. 판회령부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패관잡기》를 인용한 기록을 남긴다.
「성화(成化) 정해년 (1467년)에 길주(吉州) 사람인 전 회령 부사(會寧府使)였던 이시애(李施愛)가 반역하여 절제사 강효문(康孝文) 등을 죽이고, 그 당으로 하여금 글을 주어서 통하게 하니, 조정에서는 귀성군(龜城君) 준(浚)을 도총사(都總使)로, 우찬성 조석문(曹錫文)을 부도총사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에 나(어숙권)의 조부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은 좌승지로 있었는데,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초계(超階)되고 신면(申㴐)을 대신하여 함길도 관찰사가 되었다.
공이 가는 도중에서 들으니, 함흥 백성이 다시 난을 일으켜 전 관찰사였던 신면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이시애의 모사였다. 공(어세공)이 안변부(安邊府)에 들어오니, 백성이 도망하여 흩어진 자가 10명 중에 9명이요, 또 함흥에 이르니 한 사람의 영접도 없으며, 야외를 순회하니 민가가 모두 비어 있었다.
가끔 사람을 만나면 모두 도망쳐 숲속에 숨는지라 손짓하여 큰 소리로 불러 타이르며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반역자 이시애를 토벌할 따름이요, 너희들 백성과는 관련이 없으니, 각기 전날과 같이 직업에 힘쓰라.”고 하고, 인하여 농량을 배급해 주며 서로 깨우쳐 알도록 하였다.
어떤 이가 공에게 자객(刺客)이 무서우니 방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공이 대답하기를, “만일 이 처지에서 호위병을 설치하면, 더욱 백성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고서 다만 이속(吏屬) 두어 사람을 거느리고 다녔다.
하루는 적당 한숭지(韓崇智)라는 자를 잡았는데, 제장(諸將)이 조정에 아뢰고자 하니, 공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군중(軍中)의 일은 모두 주장이 결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함길도 사람으로 한숭지와 같은 놈이 하나 둘이 아니니, 속히 참형하여 적들의 마음을 고립시키고, 민중의 의혹을 풀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곧 문 밖에 내다가 참형에 처하였다.
함길도 군민이 그들의 죄를 면하고자 하여 다투어 수난자(首亂者)의 성명을 써서 도총사(都摠使)에게 가져 왔는데, 공은 그 수효가 많아서 다 죽일 수가 없다 하고서 드디어 그 글을 불사르니, 군중의 반측자(反側者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하는 자)들이 그제야 안정되었다.
관군(官軍)이 홍원현(洪原縣)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이 내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도총사(이준)는 적을 피하여 진을 옮기고자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는 적의 경계에 들어 있고 인심은 혼란한데, 주장이 만일 움직이면 대적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파멸하는 것입니다. 아군이 비록 적으나, 모두 정예 군사인데, 어찌 약함을 보입니까.” 하여, 이에 그쳤다.
다음날 도총사가 또 적이 밤을 타고 습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함관령(咸關嶺)으로 퇴진코자 하니, 공이 불가하다며 말하되, “우리의 대군이 적의 후방에 있으니 적이 반드시 내습하지 못할 것이나 비록 그들이 내습하더라도, 적의 후방에 있는 우리 대병과 협공하여 그들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이 밤에 만일 행진한다면, 적이 반드시 와서 행진을 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패배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그치게 했다.
다음날 고개를 넘어서 살피니, 적이 과연 치중(輜重 이동하는 군수품)을 끊으려고 복병하고 있는지라, 관군이 그들을 추격하자 도망치고 말았다. 위기에 임하여 일을 헤아림이 이와 같았다.
적을 평정한 후에 함길도를 남북(南北)으로 나누고, 공을 옮겨서 북도 관찰사가 되게 하자 북도 지방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당시 공의 나이 36세였다. 《패관잡기》이하 동」
「이시애(李施愛)가 장차 모반하려고 꾀할 때에 그 무리로 하여금 우민(愚民)들에게 말을 전파하기를, “하삼도(충청ㆍ전라ㆍ경상)의 수륙 군사가 같이 몰아오고, 평안도와 항해도의 군대는 설한령(薛罕嶺)을 넘어와서 우리 함길도 백성을 모조리 살해할 계획을 한다고 선동하며, 또 해적(일본)이 나타났다.”고 하니, 관찰사 오응(吳凝)도 이 말을 믿고 각 고을에 공문을 발송하여 백성들을 등산하게 하니, 백성이 더욱 의혹하였다.
그가 반란할 때에는 발언하기를, 본도 절도사와 여러 진장(鎭將)들이 같이 모의하여 반역하였다 하고, 반역하여서는 드디어 절도사들을 죽였다. 전쟁에 패해서 길주(吉州)로 달아날 때에 이르러서도 그 휘하(麾下)들은 오히려 이시애의 반란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길주의 별시위(別侍衛) 허유례(許由禮)가 적당의 여수(旅帥) 이주(李珠)를 달래어 적중에 들어가서 휘하들에게 이시애의 반란을 알리고, 갑사(甲士) 이운로(李雲露)와 황생(黃生) 등과 같이 이시애를 잡아 관군에 묶어 보내었으니, 이때에 이시애가 비록 이미 극도로 위축되기는 하였으나, 그를 사로잡은 공은 실로 허유례 및 두 사람의 도움 때문이었다.」
「이시애는 길주의 호족 출신으로 조선 초 대북방민회유정책으로 중용되어 1451년(문종 1) 호군이 되고, 1458년(세조 4) 경흥진병마절제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 판회령부사를 역임하였다.
이시애의 조부 이원경은 원래 평안도 출신의 고려계 몽골인으로 이름이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이었다. 1370년 1월 이성계의 제1차 요동정벌 때 이성계가 동녕부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라산성(亐羅山城)에 주둔하여 이성계에게 맞서던 이오로테무르는 곧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제 선조는 본래 고려인이니, 신하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항복했다.
그러나 세조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북방민의 등용을 억제해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였다. 이에 북도인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세조는 이징옥의 난 이후 북쪽 변방 출신 장수를 불신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호적을 개정해 호패제도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1465년 보법(保法)을 실시하였는데, 시행 과정에서 많은 폐단과 부작용을 일으켰다. 즉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 생산의 감퇴와 농민의 유망(流亡)을 촉진시켰으며, 지방 세력가와 대토지 소유자의 격심한 반발을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지방 세력가들은 그들의 반자치기관의 성격을 가진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반정부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함길도의 토호였던 이시애 역시 지위 확보에 불안을 느끼던 중, 1467년 어머니의 상으로 칩거하는 동안에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매부 이명효(李明孝)와 모의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남도의 군사가 육로 · 해로 양방으로 쳐들어와 북도의 군민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지방민을 선동해 민심을 혼란시키는 한편, 당시 동북 지방의 군권을 쥐고 있던 함길도병마절도사 강효문(康孝文)과 휘하 군관들을 살해하고 각 지방의 수령들을 살육해 반란을 일으켰다.
난이 일어나자 도내 각지의 유향소의 토호들과 농민들이 호응해 거대한 반란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에 이시애는 절도사를 자칭하고, 단천 · 홍원 · 북청 · 함흥 등 함흥 이북의 여러 지역을 점거하였다.
남도의 군사가 육로·해로로 쳐들어와 북도의 군민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지방민을 선동하자, 북도 내 유향소의 토호들과 농민들이 호응하였다.
반란의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구성군 이준(龜城君 李浚)을 4도병마도총사,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 허종(許琮)을 함길도절도사로 삼고, 강순(康純) · 어유소(魚有沼) · 남이(南怡) 등을 대장으로 삼아 3만의 관군을 동원시켜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다.
그리하여 반란이 일어난 지 3개월이 지난 8월에 이르러서야 관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홍원 · 북청 · 이원 등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 때 이시애는 길주인 허유례(許惟禮)의 계교로 부하 이주(李珠) · 황생(黃生) 등에 의해 체포되어 참형, 이어 각 도에 효수되었다. [daum백과사전]」
이어서 [daum나무위키]는 <이시애의 난>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실제로 이시애의 난은 단순한 봉기 이상의 것으로, 함경도라는 하나의 도(道)가 사실상 독립 시도하는 것을 진압하는 내전에 가까웠다. 경군 역시 한 지역을 새로이 정복하는 형식으로 반란 종식에 성공했다.
30년 전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 이후 이시애와 함경도 토호들은 최후의 변방 세력으로서, 이 내전은 통일 국가로서의 한반도의 최종 국경을 확정하는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시애의 난>은 <이징옥의 난>과 품격과 차원을 달리한다. 이징옥은 삼한의 명문 인천이씨로 함길도도절제사를 역임하며 두만강 국경선을 확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큰 인물로서 계유정난을 당해 단종에 충성하며 불의한 수양대군을 토벌하고자 하는 대의명분을 갖고 거병했다.
그러나 이시애는 조부가 이성계 장군에게 항복한 고려계 몽골인으로 성은 이씨이지만 본관은 길주로서 최하품 집안이었다. 이시애는 대의명분 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호패법과 보법 시행으로 쌓인 함경도인들의 불평불만을 이용하여 함경도를 중심으로 ’大金‘이란 왕조를 건국하고자 획책한 간물이다. 한명회와 신숙주를 공범으로 모해하고, 남도군이 북도인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온다는 등 온갖 모해와 모략을 자행하는 걸 보면 항복한 몽골인답게 대대로 심중에 이미 반역의 야심을 갖고 있었다.
강순, 남이 장군의 활약이 없었으면 함경도를 이시애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에게 내줄 뻔 했다. 그럼 지금 국경선은 신의주- 원산을 잇는 정도의 선일 것이다.
함경도 지역은 오랫동안 여진족들이 거주하다가 세종조에 겨우 국토로 편입하여 삼남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채워 넣으며 국토를 내실화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거리가 먼 함경도인들은 조선 시대 내내 차별 대우를 받으며 조선 정부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다.
그 사례를 임진왜란 때 국경인 등 흉적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왜적에게 넘긴 데서 볼 수 있다. 그 정서적 여파로 해방이 되고서는, 함께 차별 대우를 받은 평안도와 함께 서울을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보다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 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미래의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수백 년 동안 쌓인 지역 차별 의식부터 서서히 없애가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의 <이징옥의 난>과 <이시애의 난>, 중기의 <이괄의 난>이 함경도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공통점이 있다. 李氏朝鮮 말기의 <이인좌의 난>과 함께 에서 <李氏의 난>이 네 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