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 / 정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이 몇 개
저 안에 천둥이 몇 개
저 안에 벼락이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고난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시대적 고난처럼 정녕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하르트만이 열거한 것과 같은 긍정적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가 그의 《윤리학》을 "모든 가치 있는 것은 드물고 어렵다" 라는 말로 끝맺었듯이, 그것은 무척 가치 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다음에 인용한 <대추 한 알〉을 보면, 장석주(1954~) 시인도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은 대추 한 알이 익는 데도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과 같은 고난이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이 말은 거꾸로 이런 고난이 없었다면 대추가 붉어지지도 둥글게 영글지도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시는 우리에게 우리가 겪는 고난이 우리를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우리를 숙성시킬 것이라고 위무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진정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연 무엇일까요?
키르케고르는 그것은 오직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라고 했지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 가장 엄밀한 의미로 표현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종말이 죽음이며 죽음이 종말인 병이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절망인 것이다. (………)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것,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려는 것, 이것이 온갖 절망에 대한 공식이다"라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망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절망은 정신, 곧 자기 내부의 병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절망하여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경우이고, 둘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이며, 셋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럼, 우선 첫 번째 경우를 볼까요? 키르케고르의 설명에 따르면, 절망하여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경우는 "가장 흔한 일"로서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아예 모르는 무지몽매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요즈음 청소년이나 젊은이 가운데서 이 같은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왜 학교에 다니는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직장에 다니는 지, 왜 ‘워킹 푸어’인지, 왜 취업을 못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낱낱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활기에 넘치는 생활을 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이들의 은밀한 비밀은 자기에 대한 철저한 절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지만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며, 아무런 희망도, 욕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가장 절망적이기도 하지요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중에서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