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보여행 3일차에는 삼랑성(정족산성)과 전등사 그리고 고려시대의 능묘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강화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산성으로 이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전등사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장사각 그리고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와 서책을 보관한 선원보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1866년 병인양요 때 순무천총(정3품직) 양헌수 장군이 이곳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승리한 곳이기도 합니다. 전등사의 원 이름은 진종사인데 고려시대 때 왕실의 원찰이 되면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여기에는 또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의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전등사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여기는 남문입니다. 이 남문을 따라 1866년 11월 9일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하다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에게 패하여 물러났습니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는 다음날 철군 준비를 하고 그 다음날 11월 11일 작약도를 떠나 청나라로 완전히 철수합니다.
↑삼랑성의 남문 종해루(宗海樓). 전등사는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다릅니다. 보통의 사찰과 달리 일주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홍예문에 문루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등사가 정족산성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해(宗海)는 바다로 흘러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혹은 '덕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모인다' 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인 장사각이 있고 역대 임금들의 족보와 문서를 보관한 선원보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해루란 말이 나온 듯합니다.
沔彼流水(면피류수) : 넘쳐 흐르는 저 강물이여
朝宗于海(조종우해) : 바다로 흘러가는구나
시경 소아편에 있는 구절인데 여기서 따온 말로 추정됩니다. 서경(書經)에도 백천조종우해(百川朝宗于海)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내가 바다로 흘러들러간다'는 뜻입니다.
이 편액은 조선 영조때 강화유수 권교가 걸었습니다. 그 전에 영조는 친히 이곳에 와서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지키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에 취향당이란 편액을 하사합니다.
↑남문에서 전등사로 올라가는 길. 길 옆에 느티나무 등 활엽교목이 많이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전등사는 고구려 승 아도에 의하여 381년에 창건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삼국사기는 소수림왕 2년(372년) 중국의 전진에서 순도라는 승려가 왕명으로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서 이를 받고 답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뒤 2년 후에 승려 아도가 들어오면서 소수림왕은 초문사를 지어 승려 순도를, 이불란사를 지어 승려 아도가 주석하게 하였습니다.
그후 아도는 강화에 와서 이곳에 절을 창건하고(381년) 진종사라 하였습니다. 현재 초문사와 이불란사는 없어지고 진종사는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어 강화에 있으니 이 전등사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절이 되는 셈입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아도라는 승려가 세 곳에 등장을 하는데 모두 동일 인물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습니다.)
↑전등사 대조루로 방향을 틀기 직전에 아름다운 찻집이 있습니다. 죽림다원입니다.
↑전등사 대조루 전등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누 아래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도화상이 이 절을 창건한 때에 강화도는 고구려 땅이 아니고 백제 땅이었습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시기였으니 백제의 국력이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구려의 승려인 아도화상이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는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록이 잘못되어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역사 기록을 그런 식으로 취급한다면 살아 남을 수 있는 기록들이 얼마나 될 지 모릅니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학자들의 조선 역사 연구 태도는 매번 이런 식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다고 하면 역사가 하나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단군조선도 식민사관에서는 실재한 나라가 아닙니다. 신라의 박혁거세도 이들에 의하여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화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 되고 맙니다.
↑왼쪽 대조루 맞은편이 대웅전입니다. 마침 초파일 직전이라 연등꽃이 피었습니다. 대조루 아래를 통과하여 층계를 올라서면 정면에 대웅전이 보이도록 건물을 배치하여 놓았습니다.
전등사 창건 기록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로 건너가 도리사를 창건하기 이전에 이곳에 머물면서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도화상의 출신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눌지왕 때 신라로 들어와 선산에서 전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 도리사를 창건하였으나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모례의 집에 토굴을 파고 은거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합니다. 신라의 불교가 공인된 때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 이후였습니다.(고구려에 온 아도화상과 고구려에서 신라로 온 아도화상이 동일 인물인지 동명이인인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전등사 대웅전. 보물 178호입니다. 문이 닫혀 있지만 저 법당에 보물이 한 점 더 있습니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고종 19년(1232년) 강화도로 천도합니다. 1259년 고종은 이곳 강화 전등사에 가궐을 짓기로 결정합니다. 가궐은 임시로 지은 궁궐로 이궁이나 행궁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고종은 가궐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해 세상을 떠납니다.
5년 뒤인 1264년(원종 5년) 6월에 정족산성 가궐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곳에서 4개월 동안이나 대규모 법회를 하여 왕실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였다고 하니 전등사는 고려 왕실의 원찰이었던 셈입니다. 원찰이란 살아생전 어떤 소원을 이루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사찰을 말합니다.
↑전등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불상. 보물 178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삼존불상 좌우에 보이는 것이 업경대입니다. 업경대는 전생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살아서 지은 모든 업들이 이 거울에 나타난다고 하여 보통은 명부전이나 지장전에 많이 설치합니다.
원종은 가궐이 완성되고 2년 뒤인 1266년에 진종사 중창불사를 대대적으로 벌입니다. 원종의 아버지 고종은 명목상 국왕이었지만 당시의 실권자는 최씨정권의 최우였습니다. 최우는 강화에 천도하면서 선원사를 짓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팔만대장경을 만들라고 명을 내립니다. 선원사는 최우의 원찰인 셈인데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고종 말년에 최씨정권의 마지막 교정별감인 최의가 죽음을 당하자(1258년, 고종 45년) 왕권은 잠시 고종에게로 돌아갑니다.
당시 고려 왕조의 궁궐보다도 최씨정권의 진양부가 더 위세가 있었습니다. 고종은 이것이 못마땅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씨정권이 막을 내리자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가궐을 짓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 다음해에 고종이 죽어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원종이 다시 명을 내려 가궐을 완성합니다. 시기적으로 무신들의 권력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들이 왕에게 이양되었을 때 비로소 가궐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원종은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고 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합니다. 개경으로 환도를 하고 나서도 진종사는 왕실의 원찰로 날로 번성하여 갔습니다. 원종이 죽고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바로 충렬왕입니다.
충렬왕은 태자 시절에 혼인을 하여 태자비가 있었는데 즉위 몇 달 전에 원나라의 제국대장공주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제국대장공주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었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태자비는 가장 먼저 결혼하고도 정비가 되지 못하고 후궁이 되는데 이가 바로 정화궁주입니다.
정화궁주는 충렬왕의 첫아들은 낳지만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서 아들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제국대장공주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혀 힘든 생활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궁에 유폐되기도 하였습니다. 제국대장공주가 죽어서야 비로서 충렬왕과 함께 궁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화궁주는 평소에 불심이 강했는데 이 절에 옥등과 불경을 하사합니다. 그 이후로 진종사를 전등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는 정화궁주가 전해준 불경 가운데 '경덕전등록'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름을 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웅전 처마 밑에 유명한 나부상(裸婦像)이 있습니다.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습니다. 불경의 본생록을 보면 석가모니불의 전생이 원숭이 대왕이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원숭이는 지혜롭고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동물로 나옵니다. 그래서 나중에 원숭이는 용이나 사자처럼 불법을 수호하는 신령한 짐승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전등사는 인왕문이나 천왕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국토를 수호할 신장들이 없습니다. 원숭이를 대웅전 처마 네 모퉁이 세운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네 귀퉁이의 나부상의 모습이 모두 다릅니다. 대웅전 처마 네 귀퉁이에 벌거벗은 여자가 올라가 있는 이유를 설화는 이렇게 전합니다.
이 절을 지을 때 도편수(건축의 총책임자)가 정을 두고 있는 주모가 어느날 도망을 갔습니다. 공사가 끝나면 함께 살겠다고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 맡긴 도편수로서는 눈앞이 캄캄해질 일이었습니다. 배신감이 치를 떨던 도편수는 그날부터 대웅전 마무리 공사를 하면서 그 여인을 처마 위에 올려 그 무거운 지붕을 받쳐 들고 있게 하였습니다.
↑여기는 왼손으로만 지붕을 받치고 있습니다.
이 설화에 대한 반응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자료를 정리하다 어느 불교 신문의 기자가 이 설화를 전하면서 쓴 글을 읽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의 아주 잘못된 두 가지 사고방식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편견과 남존여비 사상입니다. 신성한 대웅전에 벌거벗은 여자를 조각할 리도 없도 또 자비를 행하라고 가르치는 사찰에 증오하는 마음을 새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부가 아니고 원숭이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등사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전등사 홈페이지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경내에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있어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전등사는 오래된 사찰인 만큼 경내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등사 은행나무. 두 그루의 은행은 수령이 5백년이 넘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도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철종 때 이 절에 세금을 매길 때 은행 열매 스무 가마를 부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은행나무는 열 가마 밖에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고심하전 이 절의 스님들은 백련사 추송스님을 모시고 기도를 올립니다. 당시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은 스님으로 이름이 높았으므로 사람들은 추송스님이 당연히 은행 열매를 두 배 더 열게 해 달라고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마친 스님은 대중들을 돌아보면서 의외의 한 마디를 합니다.
"앞으로 이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을 것이요"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일화입니다. 제주도에서 세금을 피하기 위하여 감귤을 캐내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전등사 단풍나무. 전국에서 가장 큰 단풍나무입니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지정을 요청하고 정밀 검사를 하였는데 이 나무는 한 그루 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그루라는 것이 판명되어 지정이 무산되었다 합니다.
↑건물에 편액이 없습니다. 사찰의 사물 종과 북, 목어와 운판이 한 군데 모여 있습니다.
↑가운데 건물이 약사전입니다. 보물 179호 입니다.
↑그 옆에 극락암 돌계단이 예쁩니다.
↑전등사 약수. 무더위와 번뇌를 씻어주는 청량제입니다.
↑여기도 예외 없이 동전이 쌓여 있습니다.
↑윤장대. 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이 이 것을 돌리면 경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합니다.
↑전등사 범종. 언뜻 보아도 우리 종과는 좀 다릅니다. 이것은 중국의 철종입니다. 1097년 중국 하남섬 숭명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소리가 맑고 깨끗한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무늬나 형태가 우리나라 종과는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재질도 동이 아니라 철로 되어 있습니다. 보물 39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종이 균열이 가서 칠 수가 없습니다.
일제 말기에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모든 쇠붙이를 거두어 갔습니다. 심지어는 놋숟가락도 가지고 갔다고 하니 이 종을 그냥 둘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이 종을 빼앗아 갔습니다. 해방이 되자 이 절 주지 스님이 이 종을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평의 병기창에서 이 종을 발견하고 다시 절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 옆에 조각을 하다 만 듯한 나무 불상이 있습니다.
↑적묵당. 스님들이 참선을 하는 곳입니다. 이 절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두 점 있습니다. 적묵당에 걸린 이 편액이 진품인지 복제품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유천희경(遊天戱浭 하늘을 거닐고 물가를 노닌다.)
↑전등사 대조루에 보관되어 있는 추사의 글씨입니다. 다로경권(茶爐經卷) 찻물 끓이는 화로가에서 경전을 펼친다. 이 편액이 어떤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선암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된 '다로경권실'편액입니다. 역시 추사의 글씨입니다. 처음에는 같은 글씨인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약간 다릅니다.
↑전등사. 적묵당에 걸려 있습니다. 해강 김규진의 작품입니다.
약관의 나이로 청나라에 유학하여 그림과 글씨를 배우고 10년 만에 돌아와 고종이 명으로 왕세자 영친왕의 서예 선생을 하였습니다. 1906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술을 배워와 서울에 최초로 사진관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희정당의 벽화 내금강만물초승경도와 해금강총석정절경도도 해강의 작품입니다.
전국의 유명 사찰에 글씨를 남기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다작으로 유명합니다. 전등사에도 역시 그의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대조루 앞의 편액 '전등사'도 그의 글씨입니다.
↑정족산사고 정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현종1년(1660년) 이곳에 사고를 짓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4부 제작하여 도성의 춘추관, 그리고 전주, 충주, 성주 이렇게 4곳에 보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전주에 보관된 실록 외에 모두 불타고 말았습니다. 임란이 끝나자 전주본 실록은 바로 강화 마니산으로 옮겨서 보관합니다.
↑장사각. 정족산사고 편액입니다.
선조는 전란이 끝나고 어느 정도 나라가 안정이 되자 마니산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을 서울로 가지고 와서 세 부를 더 간행하여 이번에는 서울 춘추관을 한 부, 그리고 나머지 네 부는 깊은 산중에 보관합니다.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마니산에 사고가 지어지고 실록이 보관됩니다. 원래의 실록은 마니산에, 교정본은 오대산에, 그리고 새로 간행된 실록은 춘추관과 태백산, 묘향산에 보관됩니다.
↑정족산사고 내부. 지금 실록은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조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춘추관의 실록은 다시 소실됩니다. 묘향산의 실록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소실되는 것이 염려되어 무주의 적상산으로 옮깁니다.(1633년) 3년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으니 결과적으로 옮기기를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군이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마니산에 보관된 실록이 크게 훼손됩니다.
↑정족산사고의 연혁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마니산에 보관된 전주본 실록이 청군의 훼손으로 낙질 파본이 생기고 또 사고에 불이나자 현종은 이를 보수하여 이곳 정족산성 사고로 옮깁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이곳에 보관된 왕조실록이 원본인 셈입니다.
여기에 있는 왕조실록은 태백산사고본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보관되다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고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명칭이 바뀌면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관하여 오고 있습니다.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 훈민정음 해례본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사고는 역대 실록을 보관하는 장사각과 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 그리고 이를 지키는 관리들이 거주하는 별당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조는 친히 이곳에 와서 별당에 취향당이라는 어필 현판을 내립니다.
↑1866년 병인년 11월 7일 강화읍성을 점령한 프랑스 군들이 이곳 정족산성에 정찰을 하기 위하여 입성합니다. 이때 프랑스군은 선원보각에 보관하고 있던 왕실의 귀중한 서적을 탈취하여 갑니다. 다행히 장사각의 실록과 선원세보는 그 전에 이곳을 수직하던 승군들이 토굴로 대피시켜 화를 면하였고 합니다.
병인양요 때 조선의 순무군 천총 양헌수 장군은 11월 6일 밤을 새워 덕포진에서 강화해협을 건너 이곳에 잠입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원군이 순무군에 명령을 내립니다. 황해도 지역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교동을 통하여 강화도의 프랑스군을 협공할 계획이 있다고 잠시 작전을 중지하고 기다리라고. 그러나 결국 작전이 여의치 않아 순무군에게 원래의 작전대로 시행하라고 하여 정족산성 진입이 하루 늦어졌고 그 사이에 프랑스군은 이곳에 와서 귀중한 서적들을 빼돌렸습니다.
↑프랑스군에게 약탈되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이던 우리나라 서적을 찾아 되돌려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병선 박사의 업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박병선 박사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우리는 의궤를 찾아 헤매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박병선 박사는 그 의궤를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분관 폐지 창고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문화는 창조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관리하고 전승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선원보각. 선원보각에는 선원보 및 왕실의 귀중한 서적들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중요한 전적들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약탈당합니다.
↑무설전. 설법하는 곳입니다. 설법하는 전각의 명칭이 무설전 즉 '설법을 하지 않는 전각'입니다.
↑무설전 내부.
↑죽림다원. 이곳은 원래 산성을 수비하는 승군들이 수직(守直)하던 곳이었습니다. 수직이란 건물이나 물건들을 맡아서 지키는 일이나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리학이 통치 이념인 조선시대는 승려들이 고려시대와는 달리 사회적 신분이 낮았습니다. 그래서 성을 쌓거나 간척을 할 때 일꾼으로 많이 동원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산성을 쌓고 관리하는 일이 많아졌고 실록이나 선원보가 사찰 근처에 보관되는 일이 많아짐에 따라 승군들의 역할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다원 앞 정원이 아주 잘 손질되어 있습니다.
도총섭이라는 직책은 이런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선조 이후에 생겨난 직책입니다. 산성을 쌓고 관리하며 국가의 중요한 재산을 지키는 것이 주임무입니다. 전등사 주지에게도 정족산성을 관리하고 왕조실록과 선원보 등을 지키는 임무가 주어졌으며 이에 따라 전등사 주지에게도 도총섭이란 직함이 내려졌습니다.
↑죽림다원 내부. 여기에 오면 추사의 글과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세한도가 보입니다.
↑출입문 위에 다로경권이란 편액이 있습니다. 전등사에 추사의 편액 글씨가 두 점 보관되어 있어서 그런지 이 다원도 추사의 글과 그림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