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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손경찬의가로등 원문보기 글쓴이: 일세기
우리지역 문화예술인을 찾아
·일시: 2020. 2. 19(수). 오전
·장소: 영호남수필문학협회 사무실
·진행: 김미화(시인부락 편집주간)
·정리: 배숙연(시인부락 편집국장)
절기로 우수에 대구MBC 사옥 인근에 있는 사무실을 찾았다. 따뜻한 날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 겨울도 아니다. 우수(雨水)라는 말은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이니 이제 추운 겨울이 가고 새봄을 맞게 되었다는 계절의 신호인 것이다. 아직 한 차례 꽃샘추위가 남아있지만 곧 남녘으로부터 개화했다는 봄소식이 들려올 때가 됐다.
사무실 입구에 ‘영호남수필문학회’와 ‘독도기념사업회’라는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초인종을 누르자 손경찬 시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아늑하게 꾸며진 사무실 의자에 앉아 손 시인이 만드는 차를 기다리는 잠시 작품, 도서 등으로 꾸며진 사무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명화와 사진, 서예, 도자기 등과 함께 책장에 진열된 서적, 각종 상패와 사진들이 얼마나 많은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잠시간 둘러봤지만 마치 작은 전시실 같다. 차를 마시면서 방문한 목적을 말한 뒤에 꾸며진 사무실이 사진 전시장, 도자기 전시장 같다는 말을 끝내며 유명인사들과 찍은 사진이 많기에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느냐 물으니, 손 시인이 다소 쑥스러워하면서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라고 했다. 이 자리에 올 때까지 그 인맥의 흔적만큼 복잡다난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해서 시인부락 편집부에서는 ‘우리지역 문화예술인을 찾아’의 주인공 손경찬 대구예총 정책기획단장과 조우를 하게 됐고 긴 이야기를 이어갔다.
매우 바쁘실 것 같은데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여기는 제 개인사무실입니다만 차 마시며 대화하는 도중 이야기 나눈 사무실이 ‘작은 전시장’ 느낌이라는 하셨지요. 여기에 있는 것처럼, 서예, 사진, 그림, 도서, 그리고 상패와 인증서처럼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씩 차근차근히 푸는 일들을 하지요.
시간이 나면 신문사 등에서 청탁하는 글쓰기 등 개인 창작 활동을 하면서 지역문화예술계 인사들과도 자주 어울려 우리지역사회의 현안을 토로하고, 또 사회봉사하는 사람들과도 만나 여러 가지 현안들을 이야기하다보면 하루 일과가 너무 짧아요.
모습에서 강한 인상이 풍겨나는데 유소년기가 궁금하네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참 막막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제가 어릴 때, 청소년기는 있는 듯 없는듯해요, 이 말은 요즘 아이들이나 청소년들과는 다른 환경 때문인 거지요.
저는 유복자이고 어렸을 때 고향인 영해시장에서 고기장사하는 어머니와 함께 단둘이 살았는데, 장사할 때 집에 혼자 둘 수가 없어 항상 시장터에서 살았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다가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혼자서 어머니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화장했으니 그 시절의 애환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청소년기도 힘든 삶의 연속이었으니 어릴 때부터 혼자서 자립하는 자립정신 하나는 철두철미한 배어있습니다.
저의 유년기를 말한다면 시 습작을 하던 시기에 쓴 ‘부모’라는 자작시에서 그 내면과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에 한번 담아보겠습니다. 어린 시절 감내하기 힘들었던 마음과 외로움이 묻어있는 한편의 시입니다.
‘힘겹고 외로울 때 마다
상대산 언덕에 올라
목 놓아 울던 서러운 시절이
내게 있었습니다.
어미 소 찾아 바다로 가는 듯
송천강물을 보면서
허기진 마음에
한없이 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얼굴조차 모르는 아부지
그 아부지가 그리워서 울었고
열한 살 어린 나를 두고
돌아가신 엄마가 미워서 울었고 …
눈물을 모를 그 나이에
이미 눈물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어쩌면 송천강물이
웃음기 잃은 내 어린 시절의 눈물 같아
냇물이랑
강물이랑 가리지 않고
자식처럼 맞이하는
부모 같은 그 바다가 사뭇 그리워서
따뜻한 정이 그리운 날은
송천강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상대산 언덕에 홀로 앉아서
버릇처럼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 「부모」 전문
개인사에서 가장 연향을 미친 사건은 무엇인가요?
청소년기 때도 저는 고향에서 살았지요. 영해 대진해수욕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해수욕장 인명구조요원으로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평생 시골에서 장사하면서 하루벌어 하루 먹는 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연고가 없는 저에게는 어려운 거지요.
그러다가 귀인을 만났지요. 영해 해수욕장 부근에 해변을 끼고 전망이 좋은 곳에 삼성가의 맏 아드님 별장이 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고 이맹희 회장님과의 인연인데 그 분이 대진 해수욕장에서 오셨다가 장사하면서 인명 구조하는 저의 모습을 보고 “서울가서 나와 함께 있지 않을래?”하는 권유해서 여름철에는
고향에서 장사를 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 회장님이 “그럼 이 곳에 집을 지어 별장으로 쓰면서 자네도 관리하며 이용하도록 하자”고 해서 제가 직적 공사 감독을 하면서 이곳에 별장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 분을 모시면서 한 일들을 소개해주신다면 ?
참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때는 대한민국 재벌을 대표하는 삼성가의 맏 아드님이 사업을 이어받아 일들을 하였으나, 결국 재계 후업을 이어받지 못하고 외계인으로 생활하시다가 안타깝게 돌아가셨지요. 10년을 함께 생각했기 때문에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회장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꿰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곁에서 라이터를 켜면 회장님께서 담배를 입에 무실만큼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국내에서 호젓이 생활하시다가 남미로 가서 영주할 생각을 하고 내게 의향을 물었는데, 끝까지 동해해 모시겠다고 대답했으나 출국하기 전날 밤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있다가 새벽녘에 고향 영덕으로 줄행랑을 쳐 버렸지요. 하, 하,
그 후 영덕에서 머무를 때인 1991년에 첫 지방선거가 있었고, 관심이 있어 영덕군의회 의원선거에 나가 당선됐습니다. 그때가 저의 나이 서른살 무렵일 때죠. 당선증을 들고 맨 먼저 찾아간 데가 이 회장님이었어요. 가서 당선증을 내놓고 용서를 빌었지요. 실은 지역사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외국에 동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10년 가까이 모신 인연으로, 또 지방의원에 당선됐다는 사실을 기특하게 여겨 저를 용서해주셨고, 앞으로 잘하라고 격려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문회예술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아무래도 이 회장님을 모시던 때라 할 수 있지요. 그 당시 이 회장님께서 문화예술을 사랑하시면서 많은 분들과 교류를 이어왔는데 제가 그 심부름과 연락을 취하면서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만나게 됐지요.
그게 인연이 되어 문화예술이 인간의 정신을 살찌우면서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 기본적인 용어나 문화예술의 융성의 기본 취지 등 현안들에 대해 차츰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마련됐지요.
문화예술의 융성이야말로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잘사는 나라,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생활하는 부(富)도 필요하겠지만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질적 발전도 필요한데, 그 해답은 바로 문화예술의 융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예술가들이나 예술분야 종사자들이 자신의 능력대로 예술세계를 마음껏 펼쳐 나갈 수 있고, 그 기반 위에서 사회구성원들이 예술적 가치를 향수(享受)함인데,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예술을 대중에게 연결시키는 문화예술소비운동은 당위성을 가기도 그 당시 문화예술계 원로들의 화두였습니다.
지방의원 시절은 어떤가요?
30대 초반에 고향에서 지방의원이 됐고 경북도의회 의원 생활을 했습니다만, 동해안에 있는 경북 영덕군은 인구도 적지만 지방재정자립도가 낮고 또 교통거리로서 차량을 이용할 때 서울에서 가장 먼 오지(奧地)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지방자치가 주민을 대신해서 자치단체의 집행부가 지역개발과 주민복리를 증진하는 일이 주된 것인데, 지방의원들은 주민 삶의 현장에서 직접 주민들과 몸으로 부딪쳐가며 민원을 해결해주고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게 사명이지요.
그 당시에는 고향발전을 위해 많이 고민하고 중앙으로 상위기관으로 다니면서 예산확보도 많이 하고, 주민들이 원하는 숙원사항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밤낮없이 뛰어다녔던 시기로 참으로 보람과 애환이 겹쳤던 시기입니다.
또 경북도 지방의원 시절은 광역단체가 갖는 성격도 있지만 경북이 전국에서도 웅도(雄道)였으니 만큼 자긍심을 갖고 도민의 행복과 조정발전을 위해 제 한몸 스스럼없이 바치며 열정을 갖고 일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후회없이 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삶의 여정에서 ‘인생의 좌절기’는 없었나요?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시련은 있게 마련이고, 어려운 시절은 있었겠지요. 저에게는 인생에서 힘든 시기가 도의원 생활을 하던 시절에 찾아 왔지요. 서울에서 사업하던 시절에 일이 잘못돼서 제가 회장으로 있었으니까 결국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됐지요.
오랜 송사 끝에 시련이 끝이 났고, 그로 인해 정신적 신체적으로 많은 곤욕을 치루긴 했으나 어려웠던 시절이 고난들이 그 후 인생사에서 좋은 스승. 좋은 교훈이 되더라고요. 송사에 시달렸던 3년 동안을 인생 재수업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책도 많이 보고, 한때 저명한 인사들의 좋은 만남의 시간과 그때의 담론들을 떠올리면서 문화예술의 기본적인 알갱이들을 두루 섭렵했답니다.
그래서 그때의 어려운 이야기들을 써서 ‘기숙학교’라는 책을 편집해 놓았습니다만. 나중에 보니까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 할 몫이지, 사람이 영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고요.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마음이 더 단단해지고 생각이 더 강해진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지금 까지 제가 중앙에서 지방에서 열심히 살아온 그 내용들을 잘 알 고 있는 고향사람들이 저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는데, 바로 일세기(一世紀)라는 거지요. 고향땅에서 어린 시절과 또 청소년기, 그 후 사회인으로서 두루 경험하면서 중앙에 있는 내노라 하던 인사들을 만나 인맥을 쌓았고, 또 군의원과 도의원을 지내면서 고향 사람들에게 알려진 강한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요.
때로는 ‘별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래서 ‘백년만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한 인물’이라고 해서 일세기라 했다나요. 좋은 뜻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유별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하,하,하.
시련 없고 좌절을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결국 그 어려운 난관을 자기 성찰의 시간, 배움의 계기로 만들어 훗날을 대비하는 것이 중요한 게지요. 그렇게 볼 때에 저게 다가왔던 인생 좌절의 시간도 저한테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깊게 고민하면서 생각해보는 그리운 시절이네요.
문화예술인으로서 작품 활동은?
어떤 지인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호칭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그렇게 저는 사회적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듯이 제가 안해본 것이 없고요. 어렸을 때는 장사를 해봤고, 또 비서업무에, 지방의원, 서울에서 기업의 회장도 했고, 글을 쓰면서 시단에, 수필문단에, 칼럼을 두루 썼으니까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에다가 또 독도기념사업회 회장, 대구예총 정책기획단장 등 많은 직위를 가지며 활동해왔습니다.
그렇고 보니 또 하나 있네요. 지난주 2월 14일에 서울에서 제59차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 정기총회가 개최됐는데 이날 집행부 선출에서 참석한 대의원들이 직접 현장 투표해 제가 감사로 선출됐으니 ‘감사’라는 칭호까지 받게 됐네요. 문화예술분야에서도 칭호가 많아서 딱히 무엇을 내세워야 할지 저도 고민이지요.
저는 수필가로 먼저 등단해, 이어 시단에 데뷔했고, 또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칼럼니스트의 칭호를 얻었지만 아직도 작품은 얼마 되지 않아요, 그래도 습작과정에 데뷔 초기에 쓴 작품들의 지금 음미하다보면 가족사랑과 고향사랑이 주축을 이룹니다. 어차피 시인부락이 시인들과 수필가 문인들의 교류의 장이니까 초기작품 두 편을 재음미하는 의미로 소개하면서 회상해보지요. ‘아내’라는 시와 ‘동양의 나폴리, 축산항’이라는 저의 자작시입니다.
‘아내는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내게는 늘 햇살처럼 따뜻했습니다.
내 마음 깊숙이에 튼튼히 자리 잡고서
언제라도 잊지 못할 고향 바다의
푸른 물결로 다가 옵니다
그리움으로 다가섭니다.
때로는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이 되어
때로는 거센 풍랑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되어
내게 희망과 용기와
건강한 삶은 여는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러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한 당신을 존경합니다.
- 「아내」 전문
또 한편은 고향사랑이 담긴 작품으로 대구불교문인협회가 발간한 녹야원 제18집(2015)에 있는 시입니다. 이 시는 권순진 시인이 대구일보의 ‘맛있게 읽는시’ 코너에서 소개해주면서 ‘… 하긴 영덕이 고향인 손 시인만큼 각별한 고향사랑과 고향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 이도 없을 터이니 그럴 만도 하고 자격도 있다“고 추어주어서 당시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축산항을 여기에 두고
누가 미항(美港)을 말하려 드는가.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힘차게 떠오른 아침 해의
은혜로운 햇살과
한낮을 간질이는 바람
해질녘 갈매기의 울음까지
그리움 되어 가득 묻어나는 곳,
가까이 푸른 바다에서
뱃고동 나직이 울려오면
한 배 가득 풍요를 기다려온
마을사람들이 우르르
부둣가로 달려와서는
인정의 꽃을 흠뻑 피워내는 곳,
동양의 나폴리, 축산항을 두고
누가 미항(美港)을 말하려 드는가.
- 『동양의 나폴리, 축산항』 전문
이러한 시 외에도 저는 난삽한 시보다는 서정성이 있고 독자들이 공감하는 쒸운 시를 쓰고 싶습니다. 또 우리이웃들이 겪고 있는 삶의 애환이 담긴 시를 쓰고 있는데 현재 매일신문에서 매주 토요일 연재되고 있는 ‘손경찬의 장터 풍경’이 그런 류입니다. 또 시사내용들을 담아 신문에 칼럼을 많이 쓰기도 합니다.
또 직접적인 창작활동은 아니지만 문예창작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경북일보문학대전입니다. 제가 지난 2014년부터 문학대전 운영위원장을 맡아 지난해까지 6회째를 맞았는데, 한국문학에서 전통적인 문학상들이 있고 여러 문학사나 신문사 등에서 작품을 공모하고 있지만 경북일보문학대전은 전국단위에서 가장 큰 문학대전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시작한지는 6년이 됐지만 문학인들이나 우리 국민들이 호응하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반응은 매우 좋습니다. 이 공모대전을 통해 뛰어난 문재(文才)들을 배출시키면서 최고 문학상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특별난 일로 본 대전에서 응모 지역이나 편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지요.
문학대전 공모부분인 시, 수필, 소설분야에서 매년 5천편 정도가 고르게 접수되고, 국내는 물론 미국과 독일, 호주 등지에서 기성문인․신인을 가리지 않고 많은 분들이 참여해 옥고를 보내주시는 등에 저도 놀랐습니다. 갈수록 많은 문학인과 일반국민의 호응도가 높아 무척 기뻐하고 있습니다. 올해 제7회 행사에서도 많은 분들이 참여하도록 잘 홍보하겠습니다.
대구예총 정책기획단장으로서의 역할과 지역사회 봉사활동은?
대구는 문화예술의 도시입니다. 전국에서도 ‘시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왔고, 지금은 ‘뮤지컬 도시’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지요. 이는 지역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분들이 합심해 땀 흘려 노력한 결과입니다만 쉽게 얻어낸 명성은 아니겠지요. ‘대구가 시의 고장이라는 데는 예전부터 이상화 시인 등 걸출한 시인이 이 고장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게 바탕이 됐겠습니다만 지금도 저는 이상화 기념사업회 이사직을 맡아 시인을 추모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대구가 ’뮤지컬의 도시‘라고 알려진 데는 대구시민들의 문화예술을 소양과 직접적인 사랑이 큰 힘이 된 것이지요.
대구예총은 대구지역의 문화예술단체를 지원하는 곳으로 지역예술의 함양과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한편 외국과의 교류전을 통해 많은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책기획단장을 맡은 후에도 중국, 필리핀, 일본, 콜롬비아, 러시아, 베트남 등지의 문화예술단체와 자매결연 또는 공연을 상호 교류하면서 국제협력을 많이 해왔습니다. 대구공연과 예술을 소개하고 또 외국의 예술 흐름을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현지에서 경험하면서 교류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지역단체들과 함께 작종 축제와 지역활동을 많이 하는데 예를 들면 대구시민을 위한 한 여름밤의 호러축제, 대구예총 주관 청소년 음악제, 한국나눔플러스 NGO가 주관하는 하하나눔 페스티벌 등을 비롯한 여러 행사를 개인적 또는 단체적으로 지원하면서 대구예총의 격을 향상시키고 있습니다. 또 좋은 공연을 유치해 대구시민들에게 관람기회를 제공하는 등 활동을 해왔지요.
영호남 화합, 국민대통합과 세계평화를 위한 활동에도 힘쓰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활동 상황들을 소개해주시죠?
지역의 예술소비운동 등 대구시민사회의 예술 진흥 운동을 통해 개인의 풍요로운 삶과 지역사회의 밝은 내일을 약속한다는 의미 있는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문화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갈등관리입니다.
여기서 갈등은 아무래도 지역갈등, 세대간 갈등 등이고 나아가 한국의 현실을 두고 국제간 분쟁 등입니다. 제가 영호남수필문학회장을 맡아 문학을 통해 영호남 문인들이 교류하면서 지역의 벽을 허무는 일에 적극성을 보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서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우리사회에는 지역갈등, 이념갈등, 세대갈등 등 많은 갈등으로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건전하게 생활하는 국민이 대다수입니다. 사회 갈등을 치유하면서 국민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사회의 평화, 국가의 평화, 세계평화를 지키는 일이 아닌가하고 생각해봅니다.
조금 전 편집주간님께서 영상을 보신 내용은 어는 종교단체의 종교적 행사이기는
하나, 이들 단체에 제가 특별히 초청되어 10만 수료생들에 대해 축사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종교단체에서 종교와는 무관하게 세계평화운동을 하고 있고, 제가 그 단체의 평화대사로 임명되어 전쟁을 종식하고 지구촌에 영구히 평화가 존속되도록 하는 세계평화운동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독도 사랑이 남다르다고 소문이 났는데?
독도는 우리국민들이 마음속에 넣어두는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섬이 아니라 국민이라면 한번 그곳에 가서 독도를 직접 밟아보고 독도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을 갖도록 하자는 게 제가 맡고 있는 독도지킴이 김성도 기념사업회의 취지입니다.
이 기념사업회에서 제가 회장을 맡고 있는데, 여러 가지 사업들을 많이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사업은 독도를 알리는 일입니다. 그 첫 사업으로 대한민국 우정사업본부의 협조를 받아 독도의 사계절 우표를 만들어 일반 국민들에게 홍보하고 판매도 하고 있는데 ‘독도의 봄’ 우표집이 대해 매우 호응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한 평생을 ‘독도지킴이’로 살다간 고 김성도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는 일에 본회가 정성을 가지고 하나하나 실현하고자 하니 ‘시인부락’과 문인 여러분께서도 많은 성원과 지도편달을 당부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등산가로서도 명성을 떨치셨다고요?
부끄럽습니다. 명성을 떨친 것은 아니고요, 산이 좋아 자연이 좋아서 정기적으로 산을 탔던 것입니다. 등산이 좋은 줄 저도 늦게서야 알게 됐는데 젊었을 때는 여러 가지 일로 시간이 안되고, 또 체질적으로 많이 걷는 것도 싫어했으나 지난 2012년 2월 무렵 알고 지내던 산사랑 회원들의 권유로 거금도 적대봉에 오른 것이 첫 등산 경험이고 그 이후 등산에 맛을 들이고 나서부터 자연관(自然觀)이 달라졌습니다.
정상을 향해 한발 두발 내디디면서 결국 정상에 오르지만 힘든 행보이지요. 제가 경북신문에 산행기를 3년 넘게 연재하면서 그 기간 동안 주발을 이용해 한번도 빠지지 않고 산행을 했는데, 봄가을은 날씨가 괜찮지만 혹서기나 엄동설한에 산을 타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여름에 산에 오르면 더위로 숨이 탁탁 막히고, 또 한겨울에는 불어오는 세찬 바람으로 인해 몇 걸음을 옮기지 못합니다. 그래도 정상까지는 갔다가 와야 하는데 힘들게 정상에 올라 인근의 자연을 둘러보면서 느끼는 경외감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맛에 산행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산에 올라 정상에서 느낌을 쓰는 즉
등산하면서 제가 행한 나눔의 베품도 특별하게 생각나네요. 저는 산을 갈 때마다 철에 나는 과일 도시락 6통을 별도로 준비해갑니다. 정상에 가서 과일 도시락을 펼쳐놓고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에게 제공하지요. 힘들게 산에 오른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고생한 뒤에 맛있는 과일을 드시라고 준비한 것인데, 과일을 맛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꿀맛이라고 하며 고마워하는 것을 보면 저도 절로 기분이 좋지요, 이것이 작은 나눔의 베품이 아닐까요.
흥 산행시도 등산의 맛을 깊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지요.
등산하면서 또 산행기를 쓰면서 세계 등산가들의 명언을 많이 보았는데, 마침 생각나는 게 있네요. 저의 산행시집 서문, ‘등산 입문의 변(辯)’에서도 적어놓았지만 프랑스 등산가 폴베의 말입니다. 그는 “온갖 일들이 규칙적으로 묶여있는 오늘날, 우리생활 속에 남아 있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완전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의 하나가 등산이다” 이 말은 등산의 자유로움을 잘 대변해주고 있지요.
지방의원 시절과 문화예술 활동, 사회봉사 활동을 하시면서 받은 표창장은 얼마나 되는지?
적 사무실에 있는 각종 상장과 상패들이 내 살아온 봉사의 결과물인 셈이지요. 상을 받자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제가 상복이 좀 많았네요. 지방의원을 하면서 태풍이 닥쳤을 때 새벽 2시에 위험지역을 순찰하면서 인명을 구한 공로로 국민훈장(사회봉사부문) 석류장을 수상했지요. 아마 지방의원으로서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게 최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이외에도 대통령 표창장, 장관 표창장, 3·1절'장한 무궁화인상' 금상 수상 등 총 110회 정도가 되네요. 상을 받은 것은 공적에 대한 대가이겠으나 우리사회에는 묵묵히 봉사하면서도 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보니 그 사람들 몫까지 다 받은 게 아닌가하고 한편으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상을 받지 않더라도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추억으로 남는 사랑이 있다면?
그 말에 갑자기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이란 시가 생각이 나네요.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싸늘한 가슴이 있네’ 하, 하, 그저 좋아하는 명시이자 많은 분들이 애창하는 노래이지요.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네요.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시인부락에서 저를 찾아주시고 ‘우리지역 문화예술인을 찾아’ 코너를 마련해주신다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시인부락의 무궁한 발전을 빌며, 또 이 인터뷰를 소중하게 생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손경찬 시인이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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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전) 초대 영덕군의회 의원
전) 경상북도의회 의원
전) (사)한국모터사이클연맹 고문
전) (사)한일청소년연구소 총재
전) (사)한국변론학술연구회중앙회장
전) 영해초등학교 총동창회 회장
전) 울진타임즈 대표
현) 대구광역시 등반연합회 수석부회장
현) 대구광역시 태권도협회 고문
전) TBC 방송국 시청자 위원
현) 경상북도의정회 감사
현) 대구예총 예술소비운동본부장
현) 박태준 기념사업회 감사
전) 대구예총 예술발전위원회위원
현) 계간 수필시대 (수필)등단 수필가
현) 계간 영남문학 (시)등단 시인
현) 국제 펜크럽 대구시지부회원
현)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현) 대구시 문인협회회원
현) 토벽문학회 회원
현) 영남 수필문학회회원
현) 대구광역시 불교문인협회 회장
현) 영남수필 작가회회장
현) 영호남 수필문학협회 회장
전) 경연인 신문사 논설위원
전) 맑은소리하모니카후원회장
전) 매일신문 매일춘추 연재
현) 사)국제당수도연맹 상임지도위원
현) 허들링청소년합창축제조직위원
현) 경북문학대전 운영위원장
현) 대구일보 대일산필.시로읽는문화기행 연재
현) 브레이크 뉴스 칼럼리스트
현) 경북매일신문 레져특집 산행기연재
현) 사단법인 독도사랑운동본부 대구광역시연합회장
현) 경일대학교 독도.간도교육센터 운영위원
현) 대통령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 통합가치분과 자문위원
현) 대구국제 호러축제 조직위원장
현) 사단법인 (비영리단체)사회정상화운동본부 대구광역시회장
현) 사단법인 대구예술총연합회 정책기획단장
현) 사단법인 k문화독립군 회장
현) 사단법인 이상화기념사업회이사
◾수상 경력
사회봉사부문 국민훈장(사회봉사부분) 석류장 수상
정호영 내무부장관상외 장관상 2회
이노베이션 사회공헌 체육부분 대상
시사투뎨이 선정 사회봉사부분 대상
3,1절'장한 무궁화인상' 금상 수상
대통령 표창·장관, 기관단체장 표창 등 총110회 수상
◾문학상
국제 펜크럽 (대구) 공로상
불교문인협회 (대구)공로상
영호남 수필문학협회 공로상
영호남 수필문학협회 문학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