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야수(1991년) 미국 내 수입 1억4500만 달러, 전세계적으로 2억달러, 알라딘(1992년) 미국 내 수입 2억1천만달러, 전세계적으로 3억달러, 라이온킹 (1994년) 미국 내 수입 3억3천만 달러, 전세계적으로 7억7천만달러…
미키마우스, 라이언킹, 미녀와 야수, 토이스토리 등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많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는 세계 최강의 엔터테인먼트 그룹 월트 디즈니. 창업자의 이름이 회사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통할 만큼 이 분야에서 디즈니는 독보적인 존재다.
디즈니는 소리 나는 애니메이션 제작, 컬러 애니메이션 제작, 지난 95년 토이 스토리를 통해서 100%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 등 세계 최초로 통하는 몇 가지 업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업적은 높이 평가돼 디즈니는 지난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에 의해 20세기 세계 경제를 이끈 50인 가운데 4위에 올랐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도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20인의 기업인에 올랐다.
월트 디즈니 사후에는 마이클 아이즈너가 디즈니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1984년 취임할 당시 월트 디즈니는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익률 및 시장 점유율 하락, 부채비율 증가 등 위기에 처한 디즈니 왕국을 10년 만에 초일류 기업으로 성공시킨 마이클 아이즈너는 세계 최강의 디즈니 그룹을 만든 장본인으로 통한다.
첫번째 창업 실패 후 아우 로이와 함께 디즈니 창업
월트 디즈니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인종차별주의자, 히틀러를 존경한 인물로 노조를 파괴할 목적으로 FBI 요원으로 활동했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그가 애니메이션에 끼친 영향력이다.
개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횟수인 아카데미 공로상 29회 수상, 프랑스 레종 도뇌에르(최고 훈장) 수상, 어빙 탈버그상 수상 등 애니메이션의 발전 공로자이며 말년에는 꿈과 희망의 공간 디즈니랜드를 창조해 낸 인물이기도 하다.
1901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월트 디즈니는 14살에 캔사스 시티 미술학교에 입학을 했다가 2년 후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프랑스 적십자사의 앰블런스 운전기사로 복무했다. 미키마우스를 그린 아이웍스와의 만남은 귀국 후 1920년에 광고회사에 취직하면서 부터로 1922년 그와 함께 러프 오 그램이란 중소 회사를 만들어 치과병원으로 부터 의뢰 받은 “ 토미 듀커의 이빨” 이란 홍보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흑백 무성 실사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참패하면서 부도가 나 러프 오 그램은 문을 닫게 된다.
부도직후 1923년 디즈니는 아우인 로이와 함께 필름을 판 돈으로 디즈니 브라더스를 다시 세운 다음 어브와 함께 “앨리스와 독 캣처”, “앨리스 표류기”, “앨리스와 투우사” 등의 앨리스 시리즈를 만들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이들 작품을 계기로 명성을 얻게 된 디즈니는 유니버셜사로부터 하청을 받아 “행복한 토끼 오스월드”를 만들어 극장에 개봉,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유니버셜이 오히려 유능한 디즈니사 직원과 판권을 빼앗아 가면서 겉으로는 성공했으나 속으로는 실패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미키 마우스와 디즈니랜드
1930년대는 디즈니의 황금 시기였다. 오스월드 후 1927년 디즈니는 집에 있던 쥐를 보고 캐릭터를 구상하게 되는데 1928년 착하고 귀여운 생쥐를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유성 만화영화 “스팀보트 월리” 를 발표하자 전국의 관객은 열광했고 월트 디즈니는 할리우드에서 유명해지게 됐다.
이후 1931년에 단편 22편을 만들었고 1933년에는 19편을 만들었다. 1931년 완성된 미키마우스(처음에는 몰티머였으나 이름이 미키로 바뀌었다)는 대성공을 거두나 보상문제로 어브 아이웍스와 헤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디즈니는 플루토와 구피 캐릭터를 만들었고 1934년에는 도널드란 오리 캐릭터를 만들게 된다. 1935년 “미키의 대연주회”란 애니메이션에는 미키, 플루토, 구피, 도널드 등이 음악회 연주자로 데뷔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일 뿐 아니라 날카로운 기술을 선보여 디즈니를 세계적인 만화 영화사로 만드는 획기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32년 세계 최초로 3원색 컬러를 쓴 “꽃과 나무”로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부문 상을 수상한 디즈니는 35년 “토끼와 거북이”, 1937년 “오래된 풍차” 등으로 연거푸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부문 상을 수상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월트 디즈니는 인물이 등장하는 만화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첫번째 영화가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로 1937년 12월에 개봉된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였다. 그 당시 무려 100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가 들어갔던 이 영화는 실패에 대한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800만 달러가 넘는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워너 브라더스나 유니버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같은 타사들도 극작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때부터 20년 동안은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전성기로 통한다. 피노키오(1940), 판타지아(1940), 아기코끼리 덤보(1941),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피터팬(1953) 같은 만화 영화가 이때 만들어졌고 1950년대 월트 디즈니사는 보물섬을 선두로 액션 만화영화를 제작했고 54년에는 텔레비전으로 방향을 돌려 19세기 미국 개척자의 얘기를 바탕으로 한 데이비드 크로켓(David Crockett)이라는 인기 시리즈 물을 만들었다. 1966년 디즈니는 그의 첫 영화인 유모 마법사 이야기인 “메리포핀스”로 아카데미상 5개 부문을 휩쓸고 엄청난 흥행수익을 올려 건재를 다시 한번 알리기도 했다.
디즈니의 말년 구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디즈니랜드 설립이다. 1955년 캘리포니아주 LA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애나헤임에 개장한 디즈니랜드 테마공원은 디즈니 영화사의 중요한 수익원의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1971년에는 플로리다주 올란도 부근에 디즈니 월드를 만들었고 도코와 파리에도 각각 세워져 전세계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곳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다른 테마 공원의 설립으로 디즈니사의 소유재산이 확장되고 있다. 도쿄 디즈니랜드 옆에 새로 세워진 도쿄 디즈니 Sea는 바다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디즈니랜드 파리의 옆에는 디즈니 스튜디오 유럽이 만들어져 할리우드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자료제공 : 엔메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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