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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제10차 겨울 집담회
교과서 속의 학술용어 문제와 외국어 번역문제
주최: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Korean Interdisciplinary Research Group/
회장: 정현기, 011-373-2117)
때 : 2006년 2월 13일(월요일 10:00-18:30)
곳 :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서울 배재정동빌딩 L층/02-319-5578)
등 록
∥행 사 일 정 표∥
09:30-10:00
여는 마당(10:00-10:20)
사 회 : 김명석(성신여대/국문학)
여는말 :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학회장 정현기(연세대/국문학)
첫째 마당(10:20-11:20) <기조발표>
사회: 변광배(한국외대/불문학)
1. (10:20-10:40)《배달말꽃》으로 본 토박이말 살리기: 김수업(경상대 명예교수/ 우리말교육연구소장)
2. (10:40-11:00) 해부학 용어 개정의 기본 방침: 강호석(연세대/육안해부학)
3. (11:00-11:20) 국어 사전을 통해 본 학술 용어: 조재수(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
사이 쉬기(11:20-11:40)
둘째 마당(11:40-13:00) <교과서 속의 학술용어문제>
사회: 이기용(연세대/철학)
1. (11:40-12:00) <국어>교과서 속의 우리학술용어: 김두루한(광양고등학교/교사)
2. (12:00-12:20) <도덕>교과서 쓰임말에 대한 연구: 박영하(서울여상/도덕교사)
3. (12:20-12:40) <수학>교과서 속의 우리학술용어: 박영훈(나온교육연구소 대표)
점심(12:40-2:00)
셋째마당(2:00-3:40) <번역을 둘러싼 문제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사회: 박치완(한국외대/철학)
1. (2:00-2:20) 그리스 신들 이야기로 본 뒤침말 옮기기: 유재원(한국외대 그리스 발칸어과)
2. (2:20-2:40) 영어 공용어 논쟁과 영어 교육: 한학성(경희대 영어학)
3. (2:40-3:00) 번역문화의 전통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김영환(부경대/신문방송학/ 언어철학)
4. (3:00-3:20) 영어번역과 글쓰기 그리고 우리말로 학문하기: 김형중(연세대/영어학)
5. (3:20-3:40) 발자크 문학 작품의 우리말 옮기기 문제 검토: 김인경(서울여대/
프랑스어학)
사이 쉬기(3:40-4:00)
모닥불토론 마당(4:00-6:00)
공동 사회: 정현기(우학모 회장/국문학), 최봉영(항공대/한국학), 최정식(경희대/철학)
1. 토론 특별 초청 인사: 김수업(경상대), 유성호(교원대/국문학), 이상진(방통대/국문학), 염시열(전북삼우초등/국어학), 최용기(국립국어원 연구관), 구연상(항공대/철학)
2. 발표자 및 참석자
닫는 마당(6:00-6:10)
닫는말: 우학모 회장
임시총회(6:10-6:20)
사회: 김명석(총무)
∥발표문 목차∥
<집담회 여는 글>
정현기(우학모 회장/연세대/국문학): 인문학적 물음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기조발표>
김수업(경상대학교 명예교수/우리말교육연구소장):《배달말꽃》으로 본 토박이말 살리기
강호석(연세대/육안해부학): 해부학 용어 개정의 기본 방침
조재수(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 국어 사전을 통해 본 학술 용어
<교과서 속의 학술용어문제>
김두루한(광양고교/국어교사): <국어>교과서 속의 우리학술용어
박영하(서울여상/도덕교사): <도덕>교과서 쓰임말에 대한 연구
박영훈(나온교육연구소 대표): <수학>교과서 속의 우리학술용어
<번역을 둘러싼 문제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유재원(한국외대/그리스발칸어과): 그리스 신들 이야기로 본 뒤침말 옮기기
한학성(경희대/영어학): 영어 공용어 논쟁과 영어 교육
김영환(부경대/신문방송학): 번역문화의 전통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김형중(연세대/영어학): 영어번역과 글쓰기 그리고 우리말로 학문하기
김인경(서울여대 프랑스어학): 발자크 문학 작품의 우리말 옮기기 문제 검토
<특별기고문>
심희기(연세대 형사소송법): 세계화, 지역화의 물결과 법령의 한글표기
김유중(항공대 국문학): 우리 내부에서의 영어의 위상과 그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검토
염시열(전북삼우초등교사): 교육무늬결(과정) 말글살이 생명힘 북돋우기
<우학모 제10회 집담회 여는 말>
인문학적 물음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정현기(우리말로학문하기 회장)
1. 인문학적 물음들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연세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원주 캠퍼스)에서 문학에 대한 여러 물음을 놓고 학생들에게 삶과 문학을 가르쳐 온 사람이다. 매 학기 강의 시작을 하면서 1학년 학생들을 만나면 대뜸 묻기를 각자 당신들 자신이 ‘나는 누구냐?’고 묻고, 그에 대한 글을 쓰도록 숙제를 내곤 한다. 그리고 나는 실상 12년 동안 무엇인가 배워 온 당신들을 가르칠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을 밝혀 왔다. 이미 그들은 초등학교 6년,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앎의 기본을 다 배웠고, 더는 가르칠 만한 새로운 앎의 밭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0년 공부면 한 세상 살기 위한 도를 이미 튼 것이나 아닐 것인가? 자세히 사물이나 세상을 읽고 보며 듣는 훈련과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쓰는 훈련 또한 그들은 12년 이상을 배웠다. 유치원이나 다른 여러 종류의 학문 쪽으로 만든 어린이 학원들에서 배운 것을 빼고 난 수치이니까 그들에게 뭔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들이 아주 많이 배워 온 배움 가운데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인문학적 물음에 대한 답 쓰기임을 단번에 알 수가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인문학에서는 시작된다.
나는 정말 누구인가? 왜 나는 여기 와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려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 삶의 뜻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그리고 하필 여러분들은 왜 이 대학교엘 왔는가? 이 학교로부터 당신들은 무엇을 배워, 그것을 어떻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물음 앞에서 젊은 학생들은 당황한다. 이 숙제에 대한 답변글쓰기로 그들도 꽤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써서 내게 제출한다. 그러나 그 대답은 대체로 내겐 어색하고도 어눌하게 보인다. 이유가 뻔하니까! 이미 무수하게 나와 있는 남들의 이야기와 관념을 그대로 베끼거나 옮겨 자기 것인 양 적어 내곤 한다.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둥, 자기 존재의 자아 됨을 찾아 진정한 나를 찾겠다는 둥 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으면 답이 막힌다. 정말 이런 물음법이 이 사회에 나아가서도 필요한 것일까? 이 문제는 또한 이런 물음을 묻는 나 자신이 짊어진, 가장 진정한 뜻의 학문적 물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뜻이 정말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란 있는 것인가?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의 가치라면 가난하게 사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막상 잘 둘러보면 이 세상 사람들은 몇 몇 사람들을 빼고는 그렇게 물질적으로만 풍요한 부자로 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묻고 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대강 알게 된다. 무엇인가 젊은 학생인 그들은 아직도 자기 삶의 기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들 은덕으로 학교엘 다니고 공부를 하고 연애들을 한다. 그렇다면 삶의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
내 마음의 속뜻으로는, 비록 가난하게 살더라도 삶 속에는 무언가 우리들이 살아갈만한 뜻과 그런 우리의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 그것이 인문학적 물음이고 답이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가치, 가치 족!(하르트만은 그의 ?미학?에서 가치족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해 놓았다. 쾌락 가치 족, 생명 가치 족, 도덕 가치 족, 사태 가치 족, 재 가치 족(이용가치), 미적 가치 족, 이렇게 정리하여 놓고 이 가치 족들은 서로 부딪치거나 의존관계, 또는 토대관계로 이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쾌락 가치 족과 도덕 가치 족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쾌락 가치 족과 생명 가치 족은 의존하거나 토대관계로 협력한다. 재가치나 사태 가치 족들 또한 적절한 관계로 의존하거나 토대를 이룬다.
그러면 가치란 무엇인가? 가치란 사물이나 존재를 읽는 잣대이다. 옳고 그름, 바르고 틀림, 좋고 나쁨, 기쁘고 슬픔, 아름답고 추함, 등의 따짐을 판별하는 잣대를 우리는 가치라 이른다. 이 잣대를 따라서 물건은 값이 매겨지고 사람은 그 삶과 인격의 격조가 매겨진다.)
모두 알다시피 1960년대로부터 우리는, 동족 전쟁을 치르고 난 뒤끝이어서, 먹고 입고 자는 잠자리 만들기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가난은 우리 앞에 널리 퍼져 급히 넘어서야 할 가장 큰 장애였고 질병이었다. 이것을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우리들 삶이 화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1960년 4월 19일, 저 광화문 네거리 광장에서 일어난 불꽃같던 젊은이들의 함성으로 한 정권이 물러났고, 민주주의를 내세워 뭔가를 정리하려던 장면 정권은 어이없게도 무너졌다. 일군의 군인들이 한강을 건너 몰려와서는 ‘잘 살아보자!’, ‘하면 된다.’, ‘자유에 대한 당신들의 양심 따위는 당분간 몰수하겠으니 그리 알라!’, 이런 구호야말로 토마스 만의 어느 작품 속 한 주인공이 힘차게 내 뱉던, 그야말로 중요하면서도 맹목적인, 정치적 사기술책 언표가 아니었던가? 이럴 때부터 이미 인문학적 물음법은 힘을 잃고 설자리가 없게 된다. 그런 물음은 배가 부를 때(배때기가 부르니까!)나 지껄이는 잠꼬대나 다름없는 것으로 억압되거나 비웃음 속에 묻혀 버렸다.
요즘 각 대학교 인문학전공의 교수들은 이중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 100 몇 번째에도 들지 못하는 대학교 교수라는 멍에를 등에 진 채, 1-2년 사이 일등급에 드는 논문을 몇 편 썼는가, 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연구비는 얼마나 따 왔는가, 학생들이 매기는 강의 평가 점수는 어떤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는 학생들 숫자를 메우기 위해 각 교수들은 특별한 수업을 개발하여 학생들을 유치하도록 해야 할 짐은 잘 짊어지고 있는가, 받아온 연구비 영수증들은 잘 챙기고 있는가 따위로 언제나 마음이 바쁘고 몸도 바쁘다. 이 시대 교육의 목적은 얼마나 취직을 잘 시켜 돈벌이에 유능한 사람을 만드는가, 돈벌이와 관련된 직종 선택을 보는 눈길을 얼마나 잘 길러주는가 따위로 점점 더 고정되어 굳어져 간다. 이렇게 되고 나면 대학교에 인문학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져 갈 뿐만 아니라, 왜 사는가, 삶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법은 미친놈이나 지껄일 잠꼬대로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왜 사는가? 이 세상은 과연 살만한 곳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미 모두 정답이 나와 있는 형편이 아닌가? 최인훈의『광장』속 주인공 이명준이 북한에 넘어갔을 때 그런 황당한 처지에 빠져 어리둥절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유토피아는 이미 결정된 사회주의 원리 틀에 맞게,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그런 관념에 포위된 존재! 이런 관념은 과연 누가 만들어 퍼뜨리는가? 한 시대를 장악하는 결정권자들은 언제나 있어 왔듯이 이미 그것이 우리 시대에는 너무 뚜렷하게 드러나 있질 않는가? 전 세계에 이익의 다리를 뻗혀 각국의 돈줄과 일자리를 장악한 거대 기업, 그리고 그것을 잘 지켜 주는 군대조직, 그것을 등에 업은 정치적 결정권자들은 인문학적 물음 따위에 코웃음 치기 일쑤이다.
우리 시대에 물질과 돈으로 해결 못할 것은 없어 보인다. 분명히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는 이런 가치가 우리 시대를 덮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그런 착시현상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운 상업적 교육 전략과 전술은 마치 미약을 먹인 듯 모든 사람들을 홀리게 해 놓았다. 철학이나 문학, 각종 예술이 모두 이런 상업적 이익가치로 평정하게 된다면, 그런 각종 문화가 진정 무슨 뜻이 있는가? 물신이 장악하고 있는 이 돈! 이 돈은 이미 물신 숭배자들을 경배하는 일정한 신도들에게 장악되어 감히 아무도 그 근처에 얼쩡거리지 못할 성곽으로 둘러쳐 진 채, 높은 관문들로 굳게 닫혀 문전에 얼씬거리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우리가 부자(富者)라고 옮겨 쓰곤 하는 영어의 rich는 그 어원이 라틴어의 rex로 왕이라는 뜻이다. 왕이란 그를 무조건 따르는 신하와 백성들이 있어야 그 권위가 서듯이 부자에게는 그 돈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그 돈의 권위가 서게 되어 있다. 돈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들이 지닌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법만 있다면 이런 착시현상도 분명 사라진다. 그러나 마음대로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 있는 힘이 돈으로부터 나오고 그것을 삶의 가장 귀중한 덕목으로 삼게 될 때 생기는 질문법은 뻔하기 짝이 없는 셈이다. 당신은 어느 대회사에 적을 두고 있는가? 연봉은 얼마나 받는가? 정년보장은 잘 되어 있는가? 늙은 이후의 삶에서 당신은 얼마나 즐겁고 쾌적한 삶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노후대책은 되어 있는가? 이런 물음으로 사람을 재는 삶의 중요한 지표가 된 시절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시절에 살고 있는 인문학의 한 교수로 나는 무엇을 가르칠 수가 있을까? 길은 두 갈래 길이다. 그 하나는 돈 버는 쪽으로 발 벗고 무조건 따라라 하는 길이다. 다음 또 하나는 이런 시대의 포위관념을 뒤집어엎기 위한 네 길을 찾아 끊임없이 고정관념에 저항하고, 거부하며 네게 올바른 너 됨을 만들고 평화와 안식을 줄 길을 찾아라 하는 길이다. 한 시대에 인도 사람 간디나, 테레사 수녀,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실천한 사람으로 우리들 머리 속에 살아 있다. 이 두 갈래에 서서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나는 고통스러워하고는 수시로 절망한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가 있는가? ‘넒은 길로 가는 길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지만 파멸의 길이요, 좁은 길로 가는 길은 삶의 길이라’고 지드가 인용하여 읽힌 성경의 구절이 이 경우에도 나는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본질적인 물음에 눈감고, 나임을 나됨으로 만들어가는 생각을 접어 둔 채 사는 삶, 자아 존재의 능동성을 잃는 삶, 남에게 시킴을 당하면서 배불리 먹고 마시며 적당하게 주어진 쾌락을 누리며 사는 삶, 피동형의 삶 그것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인지 나는 고통스러워한다.
우리를 노동력으로 부리는, 그들 기득권자들은, 모든 피동형 노동자 직원들에게 독창성을 발휘하여 능동적인 자기 능력을 발휘하라고 독촉한다. 그러나 그런 독창성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 지에 대한 독창적 해답의 보장이 없다. 이러한 시대의 유능한 개인은 대체로 돈을 벌어들이는 기계이며, 엄청난 돈벌이를 회사에 보장해 주는 돈벌이 노예로 전락한다. (키르키지아 출신 러시아 작가 아이트마토프의 장편 ?백년보다 긴 하루?에는 만쿠르트(mankurt) 라는 노예에 대한 전설 이야기가 나온다. 츄안츄안 족들과의 전쟁에서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젊은이들은 머리를 박박 깎여 낙타 유방 가죽을 씌워 태양이 내려 쬐는 밖에 내 놓으면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강렬한 사막의 햇볕과 굶주림뿐만 아니라 아시아인 특유의 뻗뻗한 머리카락이 사흘 동안이면 솟아올라 가죽을 뚫지 못하는 바람에 다시 머리 속으로 파고든다. 자기 머리카락이 파고드는 고통 때문에 젊은이들은 죽어간다. 그런데 가끔씩 힘이 센 젊은이 가운데는 닷새를 버티는 사람이 나오지만 그는 일체의 기억을 잃는 사람이 된다. 박제된 인간인 셈이다. 그런 인간을 만쿠르트라 부른다. 노예로서는 가장 훌륭한 재산이다. 그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고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을 마음 놓고 맡겨 시킨다. 나이만 족의 한 어머니가 만쿠르트가 된 아들을 찾아갔다가 아들이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채 활로 쏘아 죽임으로써, 그 어머니의 이름을 따 지은 아나베이트라는 나이만 부족 공동묘지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이다. 러시아 중진작가 아이트마토프가 내세우고자 하는 ‘기억은 곧 양심’이라는 절묘한 소설어법이 이 이야기 속에는 들어 있다.)러시아 작가 아이트마토프의 작품 ?백년보다 긴 하루?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대교육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야말로 누군가의 노예(만쿠르트)라는 주장이었다. 현대교육, 이런 교육행위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다시 묻고 또 다시 물어 풀어가야 할 삶의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은 우리의 모든 학문이란 상업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그런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를 덮어씌운 무겁고 중요한 포위관념이고, 지식사회를 덮어씌운 채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우렁찬 목소리이다. 이런 곳을 독자적으로 뚫고 나아가기란 정말 힘겹고 어려운 형편이다. 각 대학교에서는 이 임무를 맡아 교육해 달라고 하는 여러 사람들의 주문에 반응한다. 돈 잘 벌게 해 달라! 내 아들, 딸들로 하여금 돈 버는 재주를 키워 달라! 그것이 교육 지표라면 인문학은 설자리가 퍽 비좁다.
『삼국지연의』속의 한 주인공 관운장이 조조에게 잡혀 있다가 유비를 찾아 조조 몰래 빠져 나오면서 여러 관문에서 제지를 당하자 무수한 장수들을 베어 죽이는 장면들을 잘 기억할 것이지만, 그렇게 성곽 문을 무너뜨릴 용력과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란, 알다시피 오늘날 우리 사회 지식인들 가운데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대학교 시절에 툭하면 감옥에나 들락거리다가, 잘 되면 정치가로 변신하여 이상한 목소리나 가다듬는 무슨 벼슬로 한 자리 하거나, 못되면 평생 폐인으로 굳어져 세상살이에 낙오한 인생이 되기 쉽다. 자아가 살고 있는 거대한 관념의 틀을 바꾸는 일은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일생동안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2) 세상의 안과 바깥
앞에서 이야기 한 식으로 물음을 이어가다 보면 이 세상에는 안과 바깥이라는 두 개의 줄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의 안 쪽에는 대기업 사주이거나 그런 직장인이라는 것과 일류대학교가 포진해 있고, 가진 이들이 지닌 웅장한 집들이 즐비한 도시로 되어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이 물음 하나로 모든 사람들은 단번에 세상 안에 있느냐 바깥에 있느냐로 결판난다.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 학생들은 일단 원주 캠퍼스 학생임을 서울에 와서는 숨기고 싶어 한다. 세상 바깥에 놓여 있다는 자의식 때문이다. 신촌 캠퍼스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학생들과는 잘 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잘난 척을 그들 서울대학생들이 할까 보아서 그럴 터이다. 아마도 서울대학생들은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 대학교 학생이라면 또한 심한 한데 사람, 바깥으로 여길 지도 모른다. 이 무슨 해괴한 삶의 판도가 이렇게 만들어져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식사회에서 다른 예를 다시 하나 더 들면 이렇다.
각 대학교에서는 정식으로 교수를 채용하기를 꺼린다. 학생 숫자는 줄고 월급은 줄여야 하고, 학생들에게 교수가 충원되어 있다는 사탕발림을 해야 하니까 별아 별 이름의 교수직을 놓고 지식인들을 골탕 먹인다. 겸임교수, 강의전담교수, 비 정년 트랙 교수, 객원교수 등 무슨 이상한 이름의 교수를 불러놓고는 월급이 시간강사에게도 못 미치되 방학 때도 조금 월급이라고 주는 것으로 입막음을 하고 있다. 교수회의에 참석도 못하고 모든 학사결정에도 참가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인재 학대가 대학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거의 모두 유수한 국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이름 있는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들을 받은 빼어난 인재들이다. 그들은 교수이기도 하고 교수 아니기도 한 어정쩡한 대접을 교수 사회에서 받으며 설음을 견디고 있다.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 지경으로 골수 제국주의 정책의 하수국가로 전락하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신제국주의와 같은 말이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는 일부 기득권층인 정책결정권자들에게만 허용된 그런 권력의 일종이다. 월남 작가 반레가 쓴 작품『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에는 미국이 제2차 대전에서 쓰다 남은 무기로 월남을 아예 신석기 시대 이전으로 돌려놓겠다고 선언하면서 포탄을 퍼부었다는 이야기가 아리게 나온다. 그들은 이제 다시 이라크에 가서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엄청난 화력을 지닌 그들, 그것을 죄 없는 남들에게 마구 퍼붓고도 벌을 받지 않을 것으로 착각하는 그들! 얄타 협정으로 맺은 이른바 냉전 이념이 사라진, 오늘날 열전으로 몰고 가려는 무기상들과 돈 장사꾼들의 돈벌이에 의해 세계는 꼼짝없이 포위되어 그들이 만들어 던지는 관념에 노예가 되고 있는 현실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고 나는 나와 내 삶의 바깥 틀을 읽는다. <녹색평론>에 살린 자연과학자 이필렬 교수가 쓴 한 칼럼을 반박하는 글을 쓰다가 만 적이 있다. 인문학도 자연과학도들처럼 스타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에 대한 답변이었는데 그게 황우석과 같은 스타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인문학은 스타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숨는 법을 가르치는 자들이고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남들 앞에 나서서 잘난 척 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가르치며, 분수에 맞지 않는 돈을 거절하는 힘을 지니도록 가르치며, 그래서 분수에 맞는 삶을 살다가 겪는 청빈이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임도 가르친다. 월남 작가 반레의 작품 속에 사는 주민들은 하루에 세끼 밥 한 그릇과 비바람에 몸을 가릴 거친 옷 한 벌이면 만족해하는 그런 주민들에게 포격을 가해 살육을 감행한다. 무기상들! 살육방법을 극대화하는 무기를 만들어 그것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인종은 누구인가? 인문학자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숨어 지내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되 엄연한 실체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현대적 뜻의 신화 속에 사는 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神)이다.
그들, 무기와 돈이라는 환상을 부추겨 권력을 누리는 이들과 그들 가까이에서 이익을 챙기는 정치 패, 지식분자들로 구성된 기득권 층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세상과 삶의 안쪽에 든, 삶에 성공한, 이들이며 그렇지 못한 이는 세상과 삶의 바깥쪽에 있는 삶의 실패자이다. 이 안과 바깥으로 세상 읽기를 시작하다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도처에 깔려 드러난다. 예쁜 것과 안 예쁜 것만 해도 상품가치로 그것을 만들 때면 엄청난 이익을 그 가치 속에서 만들어낸다. 이른바 미적가치 족에 드는 것일지라도 모두 상품가치로 치환시키는 물신의 위력을 우리는 도처에서 보고 듣는다.
과연 우리는 이런 세상의 안과 바깥이 있다고 믿어야 하는 걸까? 그런 것이 과연 우리를 둘러 친 곳 어디에나 있는 걸까? 모든 인간의 내면 속에 안과 바깥은 언제나 공존한다. 이른바 가지고 누린다는 사람들 속에 든 어둠은 무엇으로 풀이해야 옳은가? 옛 그리스의 마이더스 왕이 타고 난 나귀 귀 이야기와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되어 침대도 기둥도, 건물도 모두 황금으로 되는 기쁨을 지녔지만, 종래에는 음식 모두도, 아내나 딸도 친구도 모두 만지자마자 황금으로 변하는 슬픔을 지닌 그를 안쪽에 사는 인간이라고 읽어도 되는 것일까? 문학의 이름으로 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 삶의 안과 바깥을 자신의 마음속에 지니고 산다. 삶의 안과 바깥이라는 관념은 물신들이 만들어 퍼뜨리는 상업적 전략이자 악의 축을 형성하는 결정권자들이 지피는 헛된 욕망의 바람잡이일 뿐이라고 나는 읽는다.
2. 우리말로 학문하기
2001년도부터 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이기상 교수는 <우리말로 학문하기>라는 학자들의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전국에 각 학문분야 학자들 모임을 주도하여 만든 철학자 이기상 교수와 그 동료 임원들은 아주 우연하게도 필연적인 말의 집짓기를 만들어 4년을 이끌어왔고, 이제 그 다음 해를 맞아 이 모임의 성격 살찌우기를 위한 말 집짓기로 열 번 째로 오늘 이 자리에 우리는 모였다. 본래 철학하는 분들에 의해 이 모임은 주도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모임은 고전 학문의 기초였던 인문학으로 구심점을 잡으면서 동시에 모든 현대 학문의 중심을 우리 말하기와 글쓰기로 만들어 가려는 열정 모으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 동안 철학, 역사학, 언어학, 문학, 민속학, 민족학, 신학,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등 많은 전공학자들이 이 모임을 빛내 주었다. 그동안 이 모임에서는 아홉 번째로 집담회를 열어 여러 분야 학자들이 자기 전공분야가 행하고 있는 학문 성격의 우리말 하기 문제를 짚어 왔다. 철학의 경우는 인문학의 핵심답게 우리말 철학사전이 꾸준히 출간되는 성과를 내고 있다. 이것은 눈에 띄는 학문적 성과여서 필연적인 말 집짓기를 이루어 가는 획기적인 탑 쌓기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드니 디드로(1713-1784)가 가난살이를 무릅쓰면서 이십 칠년간 ??백과전서?? 출간에 몰두해 온 사정들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우리 학문의 가장 핵심인 철학사전이 이 나라에서 이처럼 방대한 규모로 순조롭게 출간되고 있는 사정은 기실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격찬하고 난리들을 쳐도 괜찮을만한 그런 업적 쌓기이며 우리말 집짓기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우리 지식사회에서는 조용하게 눈감고 있는 중이다. 그 이유야말로 철학의 한 분파였다가 이제는 철학의 중심에 있다고 믿도록 바이러스를 퍼뜨려온 과학(그것은 현대의 한 신화적 믿음으로 확대되면서)이 물신의 노예 노릇을 충실하게 해 오고 있기 때문임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착종이라고 나는 믿는다. 과학적 성과 부풀리기와 그것을 대중에 퍼뜨려 떠들어 연구비를 수백억대로 늘려 받아 챙김으로써 이 시대 우리들을 혼란에 빠뜨린 내역을 최근 우리는 한 과학자의 영웅화 과정에서 잘 보았다. 이런 식의 거대한 사기극은 이 시대에 겨우 이 정도일 뿐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한 조각일 뿐일 것이다.
모든 학문의 기초란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 터이다. 이번 모임에서 우리는 여러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전문학자들의 범위를 중등학교 선생님들을 모심으로써 그 우리말로 학문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의 범위를 확장하기로 하였다. 이 모임을 주도하였던 철학 전공 쪽에서는 중심의 이 모임에서 그들은 철학사전을 다시 만들어 이미 여섯 권을 출간하는 열성을 보이고 있다. 우리말로 학문을 한다는 말의 뜻을 찾아보기로 한다. 16세기 이전의 유럽 쪽 대부분 사람들은 공용어가 라틴어였고, 자아의 문제는 여호아 하나님으로 통칭되는 신의(神意)에 의해서만 결판나는 것으로 믿고, 또 믿도록 만들어진 포위관념에 묶여 살았다. 이 유대인들이 믿었던 부족 신화가 어떻게 유럽에 전파되었는지 또 오늘날 우리에게도 널리 전파되어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덮고 있는 관념으로 자리하고 있는지는 길게 이야기할 수가 없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인들이 아랍에서 저지른 200여 년 간의 만행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들이 소개되어 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살라딘? 참조 요)
이렇게 유럽이 공용어 라틴어로 쓰던 글쓰기를 17세기 들어서면서 이른바 지방 말인 프랑스 말로 자아 나를 묻기 시작한 것에 <우리말로 학문하기>모임을 만든 철학자들은 주목한다. 17세기에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론 서설?에서 중요한 선언을 한다. 대강의 뜻은 이렇다. ‘나와 내 앞에 놓인 세계라는 텍스트 이외의 모든 텍스트를 나는 버린다.’는 것이 그 선언의 기초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는 생각하니까 존재한다.’는 유명한 프랑스 말을 썼다. 나의 나임을 나됨으로 만들어 가는 유럽인들의 자기말로 학문하기 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독일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 그리고 철학자였던 칸트가 그의 유명한 이성비판(?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등) 저술을 내기 시작한 해도 대강 18세기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 유럽인들이 제국주의 폭력에 의한 정신적 식민시대의 찌꺼기를 말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해를 년도로만 따지면, 우리나라 문예부흥기라고 일컫던, 영?정조 시대에 해당하는 연대였다. 놀라운 것은 로마제국 시대에 그들 로마인들(이들은 라틴어를 쓰던 이탈리아계 인들로 한 지방사람)이 유럽 전역을 점령하여 팍스 로마나라는 제국주의의 달콤한 행운을 1,000여 년 동안 누려왔는데, 그들은 이제 사라졌고, 그 라틴어조차 누가 쓰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옛말(古語)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라틴어를 누가 매일 쓰고 있는가? 로마제국은 어디에 있는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당시 그것을 주도하던 세력들 사이에 70여 개 다른 종족의 문화를 우선하느냐 이념(이데올로기)을 우선하느냐로 논쟁을 벌인 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념우선 정책으로 밀고 나아간 그들의 혁명은 70여 년을 굴려가다가 무너졌다. 이제 그들 소연방은 사라졌고, 러시아가 큰 정치 덩어리로 서 있지만, 주변 다른 종족들 또한 그들의 문화를 지닌 나라로 살길을 찾아 나서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이제 세계의 모든 주민들은 영어로 살아야 하다는 식의 도저한 영어 제국주의 사유법에 우리나라는 깊숙이 빠져들고 있어 보인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들은 모두 잘 사는가?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 무수한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지만 그들이 가난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사정을 우리는 잘 안다.
1446년에 우리는 이미『훈민정음』이라는 빼어난 글자를 가지고 나의 나됨을 만들어 가는 일을 시작하였다. 세종대왕의?월인천강지곡?이 씌어진 것은 ?석보상절?이라는 부처 생애를 한자에서 훈민정음으로 옮긴 글을 세조가 바치자 그것을 읽고 나서 감동한 세종에 의해 이루어진 창작품이었다. ??능엄경??,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이 우리 말글로 옮겨지면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씌어지게 된 연대 또한 15-6세기부터였다. 이런 사실 적시는 실상 유럽이나 미국보다도 우리가 무엇이 먼저 있었고, 또 문화가 어떻게 앞섰다는 투의 자기 자랑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버리려고 하는 그런 관념 마당에다 이 사실을 풀어 보임으로써, 국문학도의 한 사람인 나는 우리가 모두 정신을 좀 차려 보자고 하는 어두운 마음의 한 끝을 내보이려고 할 뿐이다.
1) 우리말의 세계적인 위상에 대하여
세계 각 국에서 자기네 말로 학문을 하고 가르치는 나라는 얼마나 될까? 우선 우리가 아는 언어를 잘 생각해 보면 대강의 대학교 교재로 씌어진 언어의 숫자를 짐작할 수가 있다. 중국 말, 아랍 말, 인도 파미르 말, 영어(영국 말과 미국 말?)독일 말, 프랑스 말, 한국 말, 일본 말, 러시아 말, 태국 말 등 세계의 말은 3천에서 5천에 달하는 것으로 언어학자들은 짐작한다. 그들도 짐작하는 숫자로만 대강을 기술할 뿐이다. 국어학자 노대규 교수는「한국어의 세계적 위상」이라는 논문을 통해 말을 중요한 것으로 하는 요인분석을 한 페이(Pei, 1956)의 학설을 보충하여 말을 쓰는 인구 숫자, 교육의 위상, 학문적 위상, 문화적 위상, 산업적 위상, 정치적 위상, 군사적 위상 따위의 아홉 가지 요인들을 미국의 통계청 자료, 유엔의 국제 통계연감, 한국통계청 자료, 미국 CIA 세계 연감 등의 자료들을 적절하게 응용하여 한국말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정리하여 놓았다. 우리 말 쓰임새의 인구 빈도로 따질 때 인구 숫자를 보이면 세계에서 26위로 정리하였으나 북한 인구를 뺀 것임으로 이것을 감안하면 이탈리아 보다 한 단계 높은 15위로 올라간다. 이것을 사용하는 언어 빈도로 따지면 13위로서, 요인 잣대 아홉 개의 통계해석으로 보면, 한국말의 세계적 위상을 19위로 결론 내리고 있다.
아홉 개의 요인 분석을 미국이나 미국 CIA 통계 치로 분석하는 데는 상당한 정확성을 보장 받을 수가 있는 반면, 문화를 읽는 눈길이 서양의 잣대에 고정되어 있다는 점은 이 논문의 약점으로 내게는 읽혔다. 군사력이나 첨단산업 구조 분석, SCI급 논문 발표 편수, 국내 총생산, 국민 총 소득, 전자제품 총 생산액 등의 잣대를 유럽이나 유엔 기구, 미국의 눈길로 읽었을 때 그것은 상당히 객관적인 통계처럼 읽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국가 부패지수나 여성 권한 척도, 남?녀 평등지수 등 한 나라 문화를 섬세하게 읽어야 하는 지표분석에서는 그렇게 서양식 잣대로만 읽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느낌을 이 논문은 상당히 강하게 주고 있기도 하다. 마치 이미 한국 전국을 석권한 노래방 문화가 노래의 참맛을 앗아갔으나 많은 이들로 하여금 노래 열등감을 풀어 주었다는 공로로 그런 상업적 문화잠식은 필요악이라는 공론과 닮은 꼴 논문으로 나는 읽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그의 논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9위나 15위에 속하는 우리말을 가지고 우리는 매일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 확인을 할 수가 있다. 3,000에서 5,000개에 이르는 세계 언어 가운데 이런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우리가 되새겨 볼만한 실상이라고 나는 본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우리가 글자를 직접 만들어 쓰고 있다는 사실 확인이다. 세계에서 글자를 누가 만들었느냐가 밝혀진 글자란 거의 없다. 알파베트로 쓰는 영어나 중국, 러시아, 프랑스 글자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기가 쓰는 글자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아는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얼마나 될까? 그것은 아마도 한국 사람들만이 누리는 앎의 특권일 것이다. 곽병찬 <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은 2005년 10월 10일 한글에 대한 여러 가지 장점을 독특한 어법으로 알려준 바가 있었다. 그가 내보인 내용을 정리하면 대체로 이렇다.
한글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가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하였고, 1998년부터 2002년 말까지 유네스코는 말뿐인 언어 2900여종에 그것을 기록하기에 가장 적합한 글자를 찾는 연구를 했는데, 여기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글자가 한글이었다. 그리고 유네스코가 문맹퇴치 기여자에게 주는 상의 이름이 ??훈만정음??을 만든 세종 임금의 이름을 딴 <세종 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글은 지구상에 있는 100여개의 글자 가운데 그것을 만든 이와 만듦 원리, 그 이념이 정리되어 있는 유일한 글자이다. 앞 논문에서도 밝혀 진 내용이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이다. 이런 사실은 글자의 간편함과 관련이 깊은 것이라는 판단. 약간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일본의 오사카 시는 엑스포 기념 세계민족 박물관을 지어 세계의 문자를 전시하였고, 이 가운데 한글에다가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설명을 붙어 놓았다.
언어학 연구에서 세계 최고라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언어학 대학에서는 글자의 합리성과 과학성, 독창성, 실용성 따위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결과 한글이 1등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한글은 컴퓨터 자판에서 모음은 오른 손으로, 자음은 왼 손으로 칠 수 있는 유일한 글자이다. 뿐만 아니라 한글은 이동전화의 한정된 자판을 가장 능률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 디지털시대의 총아로 떠올라 이른바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엄지 족들의 눈부신 활약을 우리가 눈으로 쉽게 확인하고는 한다. 시카고 대학의 매콜리 교수는 “10월 9일이면 꼭 한국 음식을 먹으며 지낸다”며 한글이 지닌 과학적 글꼴을 기리면서 존경심을 털어놓고는 하였다고 그는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더 많은 사례들로 한글 찬양론을 내세웠다. 문제는 외국의 언어학자들이 그처럼 칭찬과 드높임을 서슴치 않는 이 한글이 정작 한국에서는 푸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한자어를 섞어 써야 동양에서 소외되지 않는다는 둥 일본은 한자어를 가르침으로써 그 문화의 전통을 유지하는데 우리는 한글 글쓰기를 고집하는 부류 때문에 전통이 단절될 위기에 놓여 있다는 둥 별아 별 무식한 이야기들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 있기도 하다. 경축일 가운데 유엔의 날은 놔둔 채 한글날을 없앤 것을 어느 외국인이 비웃으며 한 말은 이렇다. ‘너희들이 유엔의 날이 왜 필요한가? 너희 나라 문화의 꽃인 한글을 기리는 한글날은 없애는 터에 왜 그런 터무니없는 날을 경축일로 삼는 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2) 나의 나 됨과 내 속의 너 찾기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정말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바른 답 찾기로 나는 파악하고 있다. 이 모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바로 철학 쪽에 기울어 있다는 점은 외국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그분들이 이 모임을 만들었고 그들의 할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으로 나는 읽어 그들의 발표 내용을 유심히 찾아 읽었고, 따라다니며 열심히 발표 내용을 들어 왔다.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너는? 우리는? 정체성(正體性=identity)이라는 말을 나는 나의 나됨이라고 쓴다. 나는 나임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마주 서있다. 마주 선 나는 그 세계를 내 방식으로 읽고 그에 적응하면서 나의 나 됨을 만들어 나아간다.
10만 명 이상의 외국 입양 한국인들이 고향을 찾아 돌아온다. 작년(2005)말 쯤, 한국이름 정경아라는 30대 여성이 또 다른 이름 트렌드 정으로 돌아와 자기가 영어로 쓴『피의 언어』를 들고 한국에 왔다. 이 자서전적인 작품은 한국어로 옮겨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눈물이 나게 만들었다. 그들이 어린이로 입양되어 외국에 가면 가장 먼저 겪는 긴장이 말이다. 신진 작가 최옥정의 작품집『식물의 내부』에 실린 단편「기억의 집」속에 나오는 입양인 펄은 미국인 아버지가 사다 설치해 준 수족관 속에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혀를 물어뜯기는 꿈을 반복해서 꾼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살 빛 머리 빛과 말이 다른 나라 사람을 어머니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존재의 단절감은 겪어 본 사람만 아는 아픔일 터이다. 뱃속에서부터 아이는 어머니의 각종 목소리와 말을 듣고 자란다.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아이가 의지하는 가장 가까운 소리는 어머니의 말이다. 우리가 모국어라 부르는 존재의 안착현상이 그렇게 시작된다. 말은 존재함의 가장 기본적 삶 판을 꾸미는 조건이다.
남을 노예로 삼으려는 사람은 우선 노린 상대방의 이런 기본적 삶 판 조건을 파괴한다. 그래야 그가 지닌 자아 됨을 잃고 주인에게 종속되는 노예생활에 적응한다. 1938년 일본은 일본 육군성의 강압으로 육군특별지원령을 공포하면서 동시에 조선어학과 과목을 중등학교에서 폐지한다. 당시 일본인 욕망의 악귀들이 조선인 기본 삶 판의 조건인 말글을 빼앗는 수법은 그야말로 악랄한 교육 책략을 통해 이루어졌다.(이어령 선생이 쓴 당시의 일본말만 말하기를 위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써먹은 기법 이야기는 지금도 머리털이 서게 한다.) 독일이 폴란드 식민정책으로 써먹던 기법을 일본 악당들이 조선인들에게 썼던 것이다. 이름을 빼앗고 말글을 빼앗는 행위는 아이트마토프 식으로 보면 조선인 모두 일본인을 주인 삼는 완벽한 만쿠르트로 만들려는 야망의 실현이었던 셈이다. 남의 노예로 살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 수 있는가? 자유란 나의 나임을 확보하는 순서로부터 시작되는 윤리 기반이다. 이 원리는 평등원리보다 한발 앞 서 있는 삶의 원동력이다. 자유가 사람을 홀로 있게 하는 구심력이라면 평등은 그것을 밖으로 향하게 하는 원심력이 속한다. 이 두 개의 힘(에너지)을 통해 비로소 사람은 스스로 능동적인 삶의 귀한 일들을 이룩한다. 이것을 잃은 사람은 이미 그 존재 가치를 잃은 피동형의 노예 삶으로 가는 딱한 사람이다.
근래 들어 각 대학교는 이상한 기운에 휩싸여 가고 있다.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기라는 미묘한 억압이 서서히 힘을 발휘하면서 각 대학교 교수들을 억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지역을 영어로만 쓰는 지역으로 만든다는 관공서의 공식 발표가 나오는가 하면, 한 편에서는 한국의 영어 공용론이 고개를 들어 모든 주민들에게 영어를 써야만 삶을 부지하겠구나 싶게 만드는 관념 포위망이 서서히 한국 지식사회를 좁혀들고 있다. 하기는 미국군인이 한국에 주둔한 지 벌써 50여 년을 넘기고 있고, 미국의 일부 매파들은 한국이야말로 미국의 식민지로 인식하고 있을 터임으로 한국인이 자기 말글로 말하고 글 쓰는 행위는 눈꼴이 시릴 것임에 틀림이 없겠다. 동양에서는 가장 앞서서 100여 년 동안 미국 닮기를 꿈꾸어 온 일본이 그 100여 년이 지난 이후 일본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던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들을 나는 7년 여 년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묻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정말 일본인 나는 어떤 존재인가? 미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나는 누구인가? 그래도 그런 부류의 지식인들은 자아를 찾으려는 깊은 심호흡을 멈추지 않는, 살아 있음의 아픔을 제대로 알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런 자의식조차 없는 일본인들은 아마도 부지기수인 것으로 내겐 보인다. 이런 남 닮기 바이러스는 이제 한국에도 깊이 파고들었다.
미국 닮기를 삶의 가장 큰 과제로 정한 한국인들이 미국에 가서 아이를 낳으려고 애를 밴 채 미국 행 비행기를 탄다든지, 젊은 대학교수들이 기를 쓰고 미국엘 가서 아이를 낳는 짓들을 일삼는다든지, 한국 내에서 영어 공부가 삶의 필수과제인 것으로 퍼뜨림으로써 특별 과외를 부추기는 정도가 그 도를 넘어선 지는 벌써 오래 된 것 같다. 1900년도에 미국 공화당 부통령으로 출마하였던 시어도르 루즈벨트는 러시아 남진을 막기 위해 조선은 일본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주미 독일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었고, 그가 대통령이 된 1905년에는 그야말로 조선을 일본에게 넘겨주는 가쯔라-테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악당들은 언제나 해괴해 보이는 짓들을 마음 놓고 벌리기 일쑤다. 자기들 이익을 위해 남을 수단으로 여기는 모든 종족은 나는 악당이라고 불러왔다. 남의 불행을 먹이로 하여 나의 행복을 유지하겠다는 것, 그것을 주도적으로 나서서 행하는 자야말로 악귀이다. 세계는 그런 악귀들과 그들이 이끄는 악당들에 의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피를 부르는 전쟁을 치르면서 자기 욕망을 극대화한다.
한국 현대소설사 초창기에는 여러 명의 밀정 작가들이 있어왔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나는 이인직과 이광수를 들었다. 이인직의 행적과 그의 글쓰기는 두 말할 것도 필요도 없다. 이광수의 일본말 글쓰기로 내놓은 글들을 읽으면 조선인이야말로 일본사람 닮기를 서둘러 해야 사람됨의 격조를 높이고, 제대로 된 일본인이 된다는 주장을 강력하고도 교묘한 논법으로 설파하고 있다. 밀정이란 오늘날 007로 대표되는 이른바 멋쟁이로 돈 잘 쓰고 예쁜 여자 마음대로 사랑하고, 악당을 잘 처치하며,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죄가 안 되는 치외법권 속에 사는 초능력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치로 따지는 물음 위에 놓고 보면 그들은 그저 어떤 권력 집단에 속해, 시키는 대로 죽이고 파괴하며 명령에 복종하는 그런 노예이며, 한 만쿠르트이고 사악한 악당일 뿐이다. 나의 너 닮기 버릇은 그것이 지나치면 나의 나 됨을 그르치게 만든다. 내 속에 든 너를 찾아 너를 사랑하고 그를 존경하는 그런 나를 자아 됨됨이로 찾아 나서는 길이야말로 나는 인문학적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그것을 굳게 믿는다.
3. 마무리하는 말
윤동주의 시편들 속에「肝」이라는 시가 있다. 그의 시 가운데서 가장 풍자적이고 한 지성인의 꿋꿋한 기상을 내보인 작품이 바로 이 시편이다. 1941년도에 썼으니까, 이 해에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의 시집을 출간하려다가 여러 사정으로 포기하고 달랑 세 부만 손으로 베껴 친구와 스승에게 한 부씩 주어 남기고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위에
습한 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山中에서 도망해온 토기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
다시는 龍宮의 誘惑에 안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는 평소에 일본 제국주의 폭력에 대항하는 말을 글로 쓴 적이 없다. 그는 온순하고 조용하며, 침착한 사람으로 부끄럼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염치를 아는 사람, 그것은 사람됨의 격조를 올리는 최상의 덕목이다. 모든 악당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하늘의 신, 세상일을 결정하는 최고의 권력자로 독재의 상징이다. 이에 맞서는 프로메테우스 신은 지성의 상징이다. 지성은 독재자 악당으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독재자 악당의 부정을 알고 부끄러운 점을 아는 자 그것이 지식인이 행하는 앎의 기본이고 그 앎을 끝끝내 지켜 세상에 밝히는 이를 지성인이라 부른다. 나는 이 시에서 마지막 구절을 상기시킴으로써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절망과 아픔 내용들에 대응하는 지성인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면서 나의 말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대체로 이렇다.
우리들 삶의 진정한 뜻은 결코 물질적 재부 쌓기에만 있지 않다는 것, 사람은 사람끼리 주고받는, 아니 자연과 주고받는 깊은 믿음, 삶이 지닌 아픔을 서로 읽어주는 생명논리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 가난이 결코 추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 사랑을 나누면서 가난의 아픔이나 서러움을 달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지닌 그런 삶의 깊이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은 특별한 부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어떤 질병이기도 하기 때문에 결코 그것 자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부자들, 남을 먹이로 삼는 착취로 살진 부자들을 나는 특별한 부자라고 부른다. 남의 노동력이나 일의 대가를 가로채어 부자가 된 이들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하고 멸시받아야 할 삶 판의 추태가 아닐 것인가?
이 시에 끼워 넣은 삽화의 하나인 그리스 신화 이야기. 3만년 동안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꼭대기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푸른 하늘만 바라보며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아픔을 견뎌 왔다. 가끔씩 헤르메스 신을 시켜 독재자 악당 제우스는 앎의 비밀을 알려달라는 회유와 협박을 일삼는다. 악당의 행악을 끝장내 줄 임자가 누군지를 악당 자신은 모른다. 그러나 미리 예견능력을 지닌 지성인은 그것을 안다. 프로메테우스 신은 올 날들의 일을 미리 보는 신이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를 지성의 신이라 일컫는다. 독수리는 매일 낮에 찾아와 간을 뜯는다. 위의 시에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나를 먹이로 삼아 물어뜯는 너 독재자 하수인 독수리야 매일 간을 먹으니 살이 찌겠지! 그러나 나는 그런 만큼 야위어야지! 앙드레 지드의 ?사슬 풀린 프로메테?의 한 장면에는 프로메테가 사슬이 풀린 상태로 찾아 든 파리 시내 풍경을 보고 어리둥절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무엇인지를 찾아 흐르고 흐르고 흘러 어디론가 나다닌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무엇을 찾는가? 앙드레 지드의 당대 말은 그들이 찾는 것은 ‘인격’이고 ‘특이질’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람살이에 대한 결론은 ‘무상의 행위’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고 주체도 없으며 목적도 없는 삶의 바다 속에 떠있는 존재라고 그는 우리들 삶을 규정지어 놓고 있었다. 그저 스스로 인격을 찾아서 무상의 바다를 떠도는 존재! 자아에게서 특이질을 찾는 존재! 비싼 골프채를 몇 벌 가지고 있고, 아주 비싼 골프 회원권을 지녀 고급스런 곳에서 마음 놓고 골프를 친다든지, 남이 하지 못하는 은밀한 일을 한다든지, 남이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다든지, 남이 지니지 못한 물건이나 귀물을 지니고 있다든지, 남은 감히 넘보지 못할 높은 성곽에 둘러싸여 산다든지, 남은 다녀보지 못한 대학교엘 다녔다든지 하는 부질없는 그런 것들을 행하는 이를 특이질이라고 사람들은 믿으려고 한다. 가히 우스운 착시현상이 아닐 것인가? 나에게 묶여 도무지 남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은 따지고 보면 자아 나에게 밀폐된 어둠 속에 갇힌 형국이나 아닐 것인지? 나는 학생들에게 묻곤 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 대답을 찾아 나서라고 격려한다.
오늘 나는 인문학적 사유법으로 삶의 문제를 묻는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기틀이 곧 나의 나임, 나의 나됨을 찾는 길 떠남이라는 말로 요약하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나는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한 물음을 묻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내가 왜 이곳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묻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사는 이 형태의 삶 판에다 만들어 놓은, 누군가가 이미 대답을 해 준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물음을 포기하고 있으며, 악의 축을 꾸며 조직화한 결정권자들이 분명하게 우리 옆에 있음에도, 그들은 분명 우리를 자기들 노예로 삼으려고 꿈꾸고 있는 것임에도, 우리 지식인들 대부분은 눈을 감고 못 본체 하려고 한다.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이라는 말 속에 이미 그런 우리의 발걸음 길은 나 있다. 선진국만 따라 잡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선진국이란 어디에 있는가? 인문학의 눈으로는 이미 이 세상에 선진국은 없다. 미국이나 유럽을 선진국으로 읽는 행위는 내 눈에는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보인다. 그처럼 엄청난 파괴력을 갖춘 무기를 만들어 세계에 죽음을 불러오는 나라를 앞 선 나라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도덕철학의 눈으로 보아 그들은 누추한 야만국일 뿐이다. 철학적 야만국가 미국이나 유럽, 서양을 우리는 무턱대고 따르면서 그들의 충실한 노예(만쿠르트)노릇이나 하면서 네 삶을 살라고 가르쳐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말은 한자어 외래어, 본디 말들로 뒤섞여 쓰인다. 말은 사물을 베끼는 그릇이다. 그것을 얼마나 잘 베꼈는지에 따라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 깊이나 높이는 결판난다. 그리고 남이 지닌 물건을 받아들였을 때면 필연적으로 그 물건에 붙은 이름과 쓰임새, 물건의 생성역사 들이 따라 붙어 들어온다. 이것을 정리하기 위한 인문학적 소양은 필수적이다. 한 나라 말 쓰임 속에 들어 있는 여러 종을 어떻게 잘 고르며 삭혀야 하는 지에 대한 학술적 따짐을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에서는 여러 다른 시각에 따라 살피고 따지며 토론한다. 잘 못 베낀 말은 지우기로 처리해야 한다. 잘못 베낀 말은 그 폐해가 엄청나다. 앞의 예처럼 ‘선진국/후진국’ 따위의 서양 바이러스 같은 관념이 그 대표적인 잘못 베낀 말투이다. 서구인들은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구분하여 스스로 문명인임을 자랑삼는다. 그들 서구인들 이외의 아시아 제국이나 아프리카 제국 사람들은 야만인이고 그래서 마구 죽여도 괜찮은 그런 종이라고 그들은 오랫동안 믿어왔다. 일종의 자기기만이며 동시에 자기 최면일 터이다. 그래야만 그들이 인류에게 저질러 온 주기적인 야만적 살육행위가 도덕적으로 면죄될 터이니까. 내가 보기에 그런 그들의 태도야말로 야만인들이 지닌 치명적인 열등감의 소치임에 틀림없다. 프랑크 인들이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아랍세계를 쳐들어 갈 때, 1100년대로부터 2세기 동안, 그들은 사람 고기를 먹는 그런 야만이었다고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전쟁?에서 저자 아민 말루프는 적어 놓고 있다.
어째서 그들은 그렇게 남들 위에 선 존재임을 확인 받으려 하고 있을까? 온갖 폭력을 모두 다 동원하여 남들을 죽이고 아프게 하는 그들은, 과학이라는 미신을 확장하여 세계에 뿌려대면서, 그들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 서양인들은 지금도 그런 도덕적 야만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나는 읽는다. 그들 속에 있는 양심적 지성을 슬픈 눈으로 나는 읽을 뿐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악의 축 결정권자들에게 죽임 당할 위협에 놓인 사람들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저 많이 아프고 슬프며, 그들이 살찌는 만큼 나는 여위어야 하겠다고 다질 뿐이다. (끝)
<기조발표 1>
《배달말꽃》으로 본 토박이말 살리기
김수업(경상대학교 명예교수/우리말교육연구소장)
1. 들머리
<우리말로 학문하는 모임>에 나와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모임을 처음부터 우러러보며 잡지 《사이》를 사보기도 하면서 혼자 손뼉을 치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저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서 말씀을 드릴 수 있도록 시간까지 주시니 커다란 영광입니다.
인사를 드리자니 마음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한 마디 소리를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날 선비들은 때맞춤(時中)에 마음을 적잖이 썼습니다. 천하나 나라에 걸린 큰일을 내놓는 것뿐만 아니라 한 마디 말이나 한 걸음 움직임이라도 때맞춤을 못하여 지나치거나 못 미치는 것을 몹시 걱정했습니다. 거기서도 지나치는 것은 차라리 못 미치는 것보다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토박이말을 살려 쓰려고 마음먹은 뒤로 늘 때맞춤에 속으로 시달렸습니다. 저가 쓰는 토박이말도 때를 맞추어야 살아남고 못 미치거나 지나치면 헛되이 죽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저가 토박이말을 학문의 글에다 끌어 쓰는 정도가 아무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때라는 것은 한결같이 흐르고 있을 뿐이고 ‘바로 그 때’는 사람이 저마다 깨달은 바로 그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할 것은 때맞춤이 아니라 깨달음이 얼마나 참되고 옳으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저가 토박이말을 찾아서 학문하는 글에다 끌어 쓰는 노릇이 참되고 옳은가 아닌가가 걱정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가리는 일이 어렵고 머리가 아프기도 해서 그만 덮어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참되지도 않고 옳지도 못하더라도 저는 이것을 그만둘 수 없다는 느낌을 본능처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못난 소리를 털어놓고 나니까 여러분 앞에서 이야기를 이어가기가 더욱 부끄럽습니다만, 오늘은 내친걸음이라 어쩔 수가 없으니 헤아려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2. 군소리 두어 마디
‘공자 앞에 문자 쓰는 소리’를 두어 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깊고 넓게 헤아려 알고 계시는 분들에게 쓸데없는 군소리를 굳이 하겠다는 것은 혹시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저의 글을 읽을까봐 그렇습니다. 글이란 것이 생각지도 않은 사람의 눈에도 띄어서 뜻밖에 말썽을 부리는 수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1) 학문할 말이 없다는 소리
우리에게는 학문할 말이 없다는 소리를 저는 많이 들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듣기도 했고 사람을 건너서 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글로 써놓은 것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 소리에 대답할 말이 없었으면 저는 토박이말을 끌어다 쓰는 노릇을 하지 못했을 터입니다. 옹졸한 대답이겠으나 저는 속으로 이렇게 뇌까리면서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① 학문을 하지 않았으니까 없을 수밖에 없다.
토박이말로 학문을 하지 않았으니까 학문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대답입니다. 이것은 알고 보면 대답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토박이말로 학문을 하면 학문할 말이 있게 된다는 대답입니다. 학문할 말이 없으니 남의 말로 학문을 하겠다는 소리인 줄을 알겠으나 그건 갈 길이 아니라는 대답입니다. 학문하는 말은 본디 따로 만들어 놓고 쓰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따로 받아와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먹고 자고 입고 살면서 쓰는 말을 학문에도 끌어다 쓰는 것일 뿐이라는 대답입니다. 그렇게 끌어다 쓸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학문하는 사람 당신이라는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 대답에는 죄송스럽지만 지난날 우리 겨레의 이름 높으신 학자들에게 원망하는 뜻이 담겼습니다. 적어도 한글을 만들어낸 다음부터 조선이 무너져 내린 때까지 사백 년 동안에 살다 가신 수많은 학자들에게 그런 뜻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더구나 십팔 세기와 십구 세기 이백 년 동안 이름 없는 백성들까지 한글을 읽고 쓰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우리 토박이말로 학문을 하려는 학자가 다만 한 사람도 없었다는 역사까지를 원망하는 뜻이 서렸습니다. 여기서 쓸데없는 소리 한 마디를 또 덧붙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팔 세기와 십구 세기에 한문으로만 뛰어난 학문을 남겨놓은 분들을 겨레의 등불이었다고 하는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합니다. 그분들이 한문으로 적어남긴 학문을 읽어서 삶에 보탬을 받았던 사람이 백에 둘(2%)도 미치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분들을 겨레의 스승으로 여길 수 있겠느냐 하는 옹졸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도 지난날 우리네 크고 거룩하신 학자들은 학문이라 하면 으레 중국 한문으로만 해야 하는 줄로 여기고 살았던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뜻입니다. 이분들이 우리 토박이말로 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학문할 토박이말이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② 뒤침을 건너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학문할 우리 토박이말이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당장 오늘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일부터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을 바꾸어 애를 쓰면 내일은 학문할 우리말이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애를 쓰는 길은 여럿이겠지만 가장 올바른 지름길은 뒤침입니다. 그리스 문명(헬레니즘)과 유태 문명(헤브라이즘)을 묶고 이어서 유럽 문명의 뿌리 노릇을 한 라틴 문명도 이백 년 동안의 뒤침을 건너서 일어났습니다. 라틴 문명을 이어서 뛰어넘은 유럽의 여러 나라 근대 문명도 이른바 고전주의라는 뒤침의 시대를 건너서 일어났습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이런 보기를 더 꼽을 까닭이 뭐겠습니까?
우리 겨레도 한글을 만든 다음 그런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세종과 세조 때에 정음청(언문청)을 두어 중국 글말로 적힌 고전들을 우리 토박이말로 뒤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중국에서 꽃핀 유교 문화의 알맹이들과 인도에서 꽃핀 불교를 중국의 글말로 뒤친 경전을 우리 토박이말로 다시 뒤치는 일에 늑장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삶에 당장 쓸모가 있는 한문 책들(질병을 물리치고 농사에 도움을 주는)을 뒤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흐름은 머지않아 중국과 중국의 한문에 얼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제라도 나라에서 이른바 번역청 같은 관청을 세우자고 말합니다. 지난 일백 년 동안 우리는 동서양의 고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을 한글로 뒤쳤고, 무엇보다도 우리 선인들이 한문으로 적어놓은 수많은 글들도 한글로 뒤쳤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 우리네 학문과 문화의 바탕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뒤침들이 모두 우리 토박이말을 제대로 살려 쓰지를 못했고, 어름어름한 한자말 투성이로 뒤쳐서 차라리 원전을 바로 읽는 쪽이 낫겠다는 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런 뒤침은 참다운 토박이말 문명을 일으키는 바탕과 터전 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라도 동서양의 고전과 우리 선인들의 한문 전적을 깨끗한 토박이말로 새롭게 뒤쳐내는 일이야말로 토박이말로써 우리 겨레의 삶 제대로 일으켜 세우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학문하는 말과 여느 말
학문하는 말과 여느 말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농사짓고 고기잡고 장사하는 말이 그대로 학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왕조 시절 오랜 세월에 걸쳐 농사짓고 고기잡고 장사하는 우리 겨레의 토박이말로는 학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과는 아주 다른 중국의 글말인 한문으로만 학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문하는 말은 여느 말과는 다르다는 믿음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런 뿌리가 아직도 뽑히지 않아 학문하는 말과 여느 말은 하나가 아니라는 그릇된 믿음의 진창길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① 단테의 《토박이말 옹호》와 몽테뉴의 《에쎄》를 보면서
그런데 저는 이탈리아를 살피면서 학문하는 말이 여느 말과 본디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그리스 문명 안에 살았을 적에는 그리스말로만 학문을 하고 라틴말은 한낱 농사짓고 고기잡고 장사하는 말일 뿐이었습니다. 이백 년 세월의 뒤침을 건너서야 드디어 라틴말이 그리스말을 몰아내고 학문하는 말로 올라섰습니다. 라틴말이 학문하는 말로 올라선 뒤에도 이탈리아 토박이말은 농사짓고 고기잡고 장사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1181-1226)에게서 깨달음을 얻은 단테(1265- 1321)가 《토박이말 옹호》(1304-5)를 내놓으니까 그제서야 이탈리아 토박이말도 학문하는 말로 올라서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런 역사를 건너다보면서 저는 학문하는 말이 본디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들이 부려 쓰면 어떤 여느 말이든지 학문하는 말로 올라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라틴 문명을 뿌리로 삼아서 자라난 서유럽의 모든 겨레들에게서도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는 프랑스 사람들이 라틴말을 밀어내고 프랑스말을 학문하는 말로 끌어올리며, 마침내 십팔 세기에 와서는 모든 유럽 사람들에게 ‘두 가지 모국어가 있다’는 소리까지 듣는 역사를 구경하는 것이 가장 재미났습니다. 그런 역사 안에서도 몽테뉴(1533-1592)의 신분과 생애, 그의 《에쎄》(1580, 1588, 1595)와 ‘빠리 시장 바닥의 말’을 끌어들이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실토가 놀라웠습니다. 아시다시피 십육 세기 후반의 빠리 시장은 오늘의 그것과 달라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득실거리던 난장판 장터였습니다.
②) 임자는 여느 말로 하지만 거지는 학문하는 말로 하나보다.
저는 1981년에 난생처음 이탈리아에 가서 한 해 동안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가자마자 급성 간염이 드러나서 거의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는데, 같은 간염으로 입원한 고등학교 삼학년 마씨모를 만나 스무날을 한 방에서 지냈습니다. 거기서 저는 희한한 구경을 했습니다. 날마다 의사들이 몰려서 회진을 오면 머리맡에 걸린 병상일지를 들이대면서 마씨모는 우두머리 의사와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저는 1972년에 위를 잘라낸 적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도 병원 신세를 많이 졌지만 고교생 환자가 노련한 교수 의사와 맞서서 병세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일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습니다. 회진 팀이 간신히 녀석을 달래놓고 돌아가고 나면 저는 그제야 병상일지를 놓고 녀석한테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병상일지에는 날마다 녀석이 먹은 음식과 음료와 약이며 맞은 주사를 비롯해서 검사한 온갖 것들의 결과가 시간에 맞추어 적혀 있었고, 마지막에는 담당의사의 소견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녀석은 그걸 가지고 스스로 퇴원을 해도 좋다는 판정을 하면서 퇴원을 시켜주지 않는 의사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저는 녀석의 강의를 들으면서 병상일지에 적힌 모든 말이 이탈리아 사람들이 나날이 쓰는 여느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몹시도 놀랐습니다. 지난날 쓰던 라틴말에서 넘어온 낱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사람이면 누구나 알 만한 그런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상일지라는 것을 환자의 머리맡에 걸어놓는 까닭도 환자가 그것을 보고 제 병세를 내다보며 의사며 간호사와 함께 힘을 모아 병을 몰아내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보면서 저는 속으로 깨달았습니다. 제 삶을 스스로 밝혀내는 참된 학문의 임자는 여느 말로 학문을 하지만, 남의 학문을 배워서 본뜨는 학문의 거지는 여느 말과는 다른 남의 말로 학문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3) 왜 굳이 토박이말인가
이만 해도 저가 굳이 토박이말을 써보려고 발버둥치는 속내를 헤아리실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에는 이렇게 시시콜콜 이야기해도 남의 속을 못 알아주고 딴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드리는 셈치고 같은 소리를 말만 바꾸어 몇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①) 들온말로는 우리 삶의 속살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남의 말로는 우리 삶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말이란 것이 본디 삶 안에서 씨앗이 뿌려지고 싹이 돋고 자라나는 것인지라 삶과는 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말을 쓰던 그날부터 남의 글말에 담긴 진리를 보면 있는 힘을 다해서 굳이 저희 글말로 뒤쳐 제 것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 뒤침이 깊고 넓게 이루어지면 진리를 일으키는 문명의 자리가 그쪽으로 옮겨 새로운 말로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삶이란 것이 눈높이에 따라서는 언제 어디서나 그게 그거라 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아무 말로서나 누구의 삶이든지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네 말 내 말 가릴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인 줄도 압니다. 우리의 선인들이 그처럼 기나긴 세월에 걸쳐 중국의 글말인 한문으로 학문을 하면서 우리 삶을 담아낸다고 여겼던 사실도 바로 이런 생각이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눈높이를 높게 잡아 삶의 껍데기를 훑어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눈높이를 낮추어 삶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닙니다. 남의 말, 들온말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껍데기라도 주고받는 이른바 의사소통은 할 수 있으나 마음의 모든 속내까지 주고받아야 하는 어우러짐에는 다다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속살을 이루고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은 남의 말, 들온말로써는 의사소통에조차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삶의 알맹이인 그들은 남의 말, 들온말 앞에서 기가 죽고 밀려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날 기나긴 세월에 걸쳐 우리 백성들은 그렇게 기가 죽고 밀려나 살았습니다.
② 우리도 이제는 학문의 임자 노릇을 해야겠습니다.
우리도 언제까지나 학문의 거지 노릇을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로 학문하는 모임을 만들어 모이신 여러분의 마음에도 반드시 이런 뜻이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학문의 임자 노릇을 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우리 스스로의 삶을 밝히는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이면 우리 자연을 밝히고, 사회과학이면 우리 세상을 밝히고, 인문과학이면 우리 사람을 밝히는 일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연이면 우선 우리 마을의 뫼와 들과 시내와 하늘과 땅, 그리고 거기 가득한 푸나무와 곡식과 과일과 벌레와 날짐승과 길짐승과 물고기입니다. 우리 세상, 우리 사람이라도 모두 마찬가집니다. 먼저 우리 마을의 자연과 세상과 사람을 밝히는 학문을 우리가 하면 우리 마을 사람이 모두 그것에 힘입어 삶을 새롭게 만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가 학문의 임자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학문을 토박이말로 하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토박이말로 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마을의 자연과 세상과 사람을 밝히겠습니까? 토박이말로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 마을 사람들이 학문에 힘입어 삶을 새롭게 바꾸어나갈 수 있겠습니까?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듣는 토박이말을 가지고 마을 사람이 나날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자연과 세상과 사람을 밝히는 학문을 할 수 있으면 그때에는 우리가 학문의 임자 노릇을 제대로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배달말꽃》에 쓰인 토박이말
《배달말꽃》(2002)은 물론 하루아침에 문득 쓰인 책이 아닙니다. 《배달문학의 길잡이》(금화출판사, 1978)를 거치고 《배달문학의 갈래와 흐름》(현암사, 1992)을 거치며 썼습니다. 토박이말을 살려 쓰겠다는 마음도 이런 책들과 더불어 자라나고, 토박이말을 살려 쓰는 솜씨도 부끄럽지만 그런 걸음에 따라 자라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가 이야기해야 하는 ‘《배달말꽃》으로 본 토박이말 살리기’도 《배달말꽃》만 잘라놓고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지난 이야기는 접어두고 《배달말꽃》만으로 이야기한다 해도 절로 앞의 것들이 싸잡히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 점을 헤아려 주시기 바라면서 지금 저는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먼저는 글월이고 다음은 낱말입니다.
1) 글월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 겨레는 글월에서 사람 아닌 것을 여간해서는 임자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천담배가 금테 상표를 둘렀다.” “곡산공장에서 ‘555’ 담배가 생산됐다.” “위조 담배가 잇따라 등장했다.” “중국 돈이 흘러들어 간다.” “백도라지 분조가 생겨났다.” “배급과 물자가 1순위로 조달됐다.” 여기 보인 것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신문의 기자가 잇따라 쓰는 기사 하나(지난 2월 1일 치)에서 따왔습니다. 글월의 뼈대를 알아보기 쉽도록 임자말과 풀이말만 간추려 따왔습니다만, 보다시피 모두 사람 아닌 것을 글월의 임자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우리 토박이말본에 맞추어 고치면 이렇습니다. “성천담배에다 금테 상표를 둘렀다.” “곡산공장에서 ‘555’ 담배를 생산했다.” “위조 담배를 잇따라 내놓았다.” “중국 돈을 흘러들게 한다.” “백도라지 분조를 만들었다.” “배급과 물자를 1순위로 조달했다.” 이래야 우리말답게 됩니다.
이런 말본을 더러 피동형이니 사동형이니 하면서 일문법이나 영문법을 가져와 풀이하는 것을 보지만 저는 그보다 훨씬 먼저 우리 겨레가 저들과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 어천만사의 임자는 사람이고 사람만이 세상만사를 이루어내는 임자라고 보기 때문에 글월의 마지막 풀이말은 사람인 임자말에만 걸리도록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겨레가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사람이 세상 어천만사를 틀어쥐고 못된 짓을 휘두르자는 것이 아닌가 걱정할 수도 있지만, 속으로는 사람이 틀어쥐고 휘두르면서 겉으로만 어천만사에게 떠넘기고 슬쩍 비껴서는 짓보다는 훨씬 떳떳하고 올바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배달말꽃》에서 토박이말을 살려 쓰며 글월에 마음 두었던 일이 있었다면 이것 하나를 꼽겠습니다.
2) 낱말
부끄럽지만 저는 《배달말꽃》을 쓰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토박이말로만 쓰고자 했습니다. 토박이말을 찾아낼 수 없을 적에만 한자말을 쓰기로 하고 한자말조차 찾아낼 수 없을 적에는 서양말이라도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서양말은 사람이나 나라의 이름을 빼면 별로 쓰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가 《배달말꽃》 안에 끌어다 쓴 토박이 낱말을 찾아 헤아리는 노릇은 부질없습니다. 저의 속셈은 몽떼뉴가 빠리 시장 바닥의 말로써 《에쎄》를 쓰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 토박이말로써 《배달말꽃》을 쓰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제넘은 속셈이었고, ‘날이 넘는다’는 걱정을 스스로 적잖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보다 예순세 해나 일찍이 태어나신 주시경(1876-1914) 선생만큼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분은 우리 겨레의 말본과 우리말의 소리를 밝히면서 있는 토박이말로는 모자라니까 없는 낱말을 만들어 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은 여러 제자들도 있는 토박이말이 모자라면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서 쓴다는 생각을 지니고 그렇게 학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전통이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허물어지고 저는 기껏 있는 토박이말을 끌어들이는 데서 그쳤습니다. 새 말을 만들 만한 재주가 본디 없는 데다, 반드시 우리말로만 학문의 길을 열고야 말겠다는 뜻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아래에다 끌어들인 토박이 낱말 가운데 이른바 학술용어라 할 만한 것들과 새로 만든 낱말을 《배달말꽃》의 맨 처음 열 쪽에서만 골라 보이겠습니다.
① 끌어들인 여느 낱말
뜻매김(10), 갈래짓기(10), 갈래(10), 바탕(11), 뜻겹침(12), 짜임새(12), 처음(12), 가운데(12), 끝(12), 틀거리(12), 도막(12), 조각(12), 느낌(12), 생각(12), 마음(12), 겉뜻(13), 속뜻(13), 맛보다(13), 누리다(13), 마디(15), 말미(17), 동아리(19), 배달겨레(19)
② 새로 만든 낱말
말꽃(10) ‘말꽃’을 더 검게 써놓은 까닭은 이것만이 진정으로 저가 만들어낸 낱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꽃’이라는 낱말을 두고는 이미 짤막한 글을 한 꼭지 쓴 적이 있어서 끝에다 따로 덧붙이겠습니다.
, 입말(10), 글말(10), 전자말(10), 배달말꽃(17)
4. 마무리
마무리 삼아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배달말꽃》은 《배달문학의 길잡이》나 《배달문학의 갈래와 흐름》과는 아주 다른 책이 되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이들 세 책은 모두 우리 배달겨레의 말꽃을 있는 그대로 간추려서 드러내 보이겠다는 한결같은 뜻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앞의 두 책은 틀거리를 거의 바꾸지 않고 속살만을 좀 더 채워서 알아듣기 쉽도록 쓴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배달말꽃》은 앞의 두 책과는 아주 다른 틀거리의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국문학계의 논쟁거리인 갈래짓기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갈래라는 말의 뜻이 제 눈에 새롭게 드러나 보이더니 놀이말꽃, 노래말꽃, 이야기말꽃에 싸잡히지 않았던 것들이 모두 싸잡혀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 갈래의 말꽃은 저마다 굿말꽃과 삶말꽃으로 다시 갈라졌습니다. ‘굿말꽃’이라는 것이 이렇게 자리 잡는다는 사실은 저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고, 털어놓고 말씀드려서 그밖에 여러 가지들도 본디 저가 뜻하지 못했던 것들이 저로서는 적잖이 간추려졌습니다. 본디는 토박이말을 살려 쓰겠다는 마음뿐이었는데, 토박이말을 살려 쓰자니까 토박이말로 살아온 백성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게 되고, 백성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니까 말꽃이라는 것이 저절로 그렇게 갈래지고 간추려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 아래의 글은 김수업 선생님께서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편집자 주)
말꽃 타령
1.
‘문학’이란 낱말을 내버리고 ‘말꽃’이라 바꾸어 썼더니 학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빙빙 돌다가 내 귀에까지 들어온다. 써온 지가 벌써 백 년이나 되어 낯익은 낱말을 무슨 까닭에 생판 낯선 낱말로 바꾼단 말이냐 하는 것은 아주 점잖아 말을 가려서 쓰는 분들의 소리다. 영영 사라진 줄 알았던 국수주의 망령이 어디서 도깨비처럼 나타난 모양이구먼 하는 소리는 솔직해서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문학이 말꽃이라면 미술은 물감꽃이고 음악은 소리꽃이란 말인가 하는 것은 머리가 잘 돌아가고 아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트집이다.
그렇다. 말꽃은 낯선 낱말임에 틀림없고, 국수주의 냄새도 묻어 있을지 모르고, 이웃 말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구석도 없지 않다.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굳이 썼다.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못하던 어린이들과 무식한 사람들이 말꽃이라고 하니까 그것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가늠하며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는 학자가 학문하며 부려 쓰는 말도 모름지기 어린이나 무식쟁이나 모두 알아들어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학문을 한다면서 한 평생 밥을 얻어먹은 사람인데,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쓰는 모든 글말과 입말을 그런 말로만 채우고 싶어 했다. 늦게야 철이 들어 이제 겨우 찾아낸 말꽃이지만 나팔이라도 불어대며 쓰자고 외치고 싶은 까닭도 거기 있다.
2.
사실 나는 문학이라는 낱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서른 해를 넘도록 마음이 괴로웠다.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가장 자주 입에 담는 이놈의 낱말이 목구멍을 넘어올 적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 걸렸기 때문이다. 말꽃은 글말보다 입말로 더 오래 더 많이 이루어진 것인데 ‘문’으로 시작하고 학문이니 배움이니 하는 것과는 닿지도 않는 것인데 ‘학’으로 끝나니,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런 괴로움이 가장 견딜 수 없었던 때는 창피하기 그지없던 《배달문학의 갈래와 흐름》(현암사, 1992)을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그 즈음부터다. 가난하고 불쌍하고 보잘것없던 백성들이 즐기던 입말문학(그때에는 입말꽃을 미쳐 찾지 못했다)을 바탕으로 삼아서 새로 쓰려고 하니 첫걸음에서 ‘문학’이 거슬려 도무지 더는 나갈 수가 없었다. 자나 깨나 그것에 시달리며 마땅한 토박이말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문득 ‘말꽃’이 머리에 떠올랐다. 반드시 누군가가 보내주었을 듯한 느낌을 받으며 기쁨을 누를 수가 없었다. 곰곰이 헤아려보니 여간 마음에 드는 낱말이 아니기도 했다. 찔레꽃과 패랭이꽃, 살구꽃과 복숭아꽃, 참꽃과 개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불꽃과 눈꽃에다 꽃수레와 꽃구름까지 우리 겨레는 아름답고 값지고 사랑스럽고 종요로운 것을 ‘꽃’이라 불러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말꽃에 너무나도 가까운 ‘이야기꽃’이며 ‘웃음꽃’이 살아서 두루 쓰이고 있어서 기뻤다. 혼자 좋아서 날아갈 듯한 마음을 누르며 수없이 배달말꽃, 배달말꽃 하며 거듭 되뇌이고 써보고 하며 몸과 마음으로 익혔다.
얼마 동안 손주들과 이웃들에게도 말꽃 자랑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털어놓고 쓸 만한지 아닌지 판가름을 해보자고 했다. 아무도 기권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손을 들어보게 했더니 결과는 내 마음과 딴판이었다. 쓸 만하다는 사람이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낯빛을 읽은 몇 사람이 강의 마친 다음에 연구실까지 따라와서 써도 좋겠다고 했지만 맥 빠진 마음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그리고 방학이 다가와 연수원 강의에 들어가서 다시 중등학교 국어 교사들에게 판가름을 해보기로 했다. 여기서 얻은 결과는 더욱 서글펐다. 열에 예닐곱은 문학 대신으로 쓸 만한 낱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씁쓸한 마음으로 보내고, 다음 방학 때에는 초등학교 교사들의 연수에 강의할 기회를 얻었다. 삼 시 세 판이라는 말도 있으니 다시 한 번 판가름을 해보자고 했는데, 거기서는 뜻밖에도 열에 일곱이 쓸 만한 낱말이라고 손을 들어주었다.
세 판에서 두 판을 내리 지고 한 판을 겨우 이겼지만, 나는 그런 가름을 내 쪽으로만 속셈을 하면서 기뻐했다.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들은 이미 마음과 머리가 굳었다, 대학생들도 교수들에게 물이 들어서 말에서 느끼는 감각이 흐려졌다, 그래도 초등학교 교사들은 날마다 어린이들과 더불어 사니까 마음이 깨끗하고 머리가 때묻지 않은 것이다, 이런 속셈을 하면서 초등학교 교사들의 판가름이야말로 참되고 올바르다고 마음을 다져나간 것이다. 그리고는 말꽃이라는 낱말을 퍼뜨리려고 앉는 자리마다 입말로 나팔을 불며 《배달말꽃, 갈래와 속살》을 썼다. 힘에 부치는 일이라 4년 세월을 흘려보낸 다음, 드디어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의 고임에 힘입어 《배달말꽃, 갈래와 속살》을 세상에 내놓았다.
3.
그건 그랬다 치고, 여기서 어쩐지 나는 말꽃에 대고 수군거리는 소리에 대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삶을 푸짐하고 넉넉하게 만드는 힘이기에 두루 좋은 일이지만, 말이란 우리 모두가 더불어 쓰는 무엇이기에 제 나름대로 생각하며 제 멋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처럼 ‘말꽃’ 같이 새로운 낱말을 굳이 찾아 쓰려는 사람과 이미 쓰는 낱말을 그냥 따라 쓰려는 사람을 놓고 어느 쪽이 바람직한 생각을 지닌 사람인지 따져서 가려보는 빌미라도 주어야 할 듯하다. 더구나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어느 쪽 생각을 지녀야 올바른 것인지 따져보는 일은 더욱 헛되지 않을 듯하다. 우리네 학문의 이 천 년 전통에는 우리 토박이말로 학문을 해보려는 마음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오직 중국 글말(한문)로만 했으며, 지난 일 백 년 동안의 현대 학문이라는 것도 일본말과 서양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첫째, 왜 써오던 말이 있는데 낯선 말을 새로 만들어 쓰려는가? 낯선 말을 만들어서라도 써야 하는 까닭은 이렇다. 학문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노릇이다. 여태 모르던 것을 알아내고, 여태 어둡던 곳을 밝혀내고, 여태 틀렸던 것을 바로잡는 노릇이 학문이다. 알아내고, 밝혀내고, 바로잡으며 좀 더 참된 것에 가까이 가려는 노릇인 학문은 알아내고 밝혀내고 바로잡은 것들을 말에다 담아내는 노릇이기도 하다. 말, 말에다 담아내지 않고는 알아내고 밝혀내고 바로잡은 그것들을 어떻게 해볼 도리를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 뷔퐁(1707-1788)은 일찍이 학문이란 사실보다 풀이해내는 말씨에 달렸고, 속살보다 드러내는 말의 쓰임새(문체)에 달렸다고 했다. 그러므로 학문의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온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오늘날 이 땅에서도 나름대로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은 많건 적건 새 말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사실을 여느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학문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고, 그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 왜 ‘말꽃’에는 트집을 잡는가? 알고 보면 그것은 새롭고 낯설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토박이말이라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낯선 말을 만들어 쓰느냐?’ 하는 소리는 ‘왜 토박이말을 꺼내 쓰느냐?’ 하는 속뜻을 감추고 있다. 여태까지 토박이말 없이 학문을 오래도록 해왔는데 하찮은 토박이말을 어떻게 다락같은 학문에다 느닷없이 끌어들이느냐 하는 뜻이다. 이를테면, <문법>도 우리에게는 없던 말이었고, <말본>도 우리에게는 없던 말이었다. <삼각형>과 <세모꼴>도 우리에게는 모두 없던 말이었고, <형용사>와 <그림씨>도 우리에게는 다 같이 없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문법과 삼각형과 형용사에는 낯설다는 트집을 잡지 않았고, 말본과 세모꼴과 그림씨는 트집을 잡아서 마침내 쫓아내고 말지 않았던가! <향가>도 없던 말이고, <가사>도 없던 말이고, <소설>도 없던 말이고, <비평>도 없던 말이고, 물론 <학문>도 없던 말이지만, 아무도 그것들을 못 듣던 소리라고 트집 잡지 않아서 활개를 치며 떵떵거리고 있다. 모두들 한자말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오늘날의 우리네 학자들도 많건 적건 새 말을 만들어내지만 트집을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이 트집 잡히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진실로 새 말을 만들어 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일본말이나 서양말을 가져와 쓰기 때문이다. 향가와 가사는 중국 한자말이어서 트집을 잡히지 않았고, 삼각형과 형용사는 일본 한자말이라 트집을 잡지 못했듯이 요즘 학자들이 젊으나 늙으나 일본말과 서양말을 마구잡이로 끌어다 생판 낯설게 쓰지만 아무도 트집을 잡지 못한다. 그런 말들은 토박이말처럼 만만하지 않고 하찮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만하고 하찮기는커녕 트집을 잡다가는 무식쟁이로 경을 칠까 두렵고, 그래서 어딘지 모르지만 무섭고 두렵게 보인다. 토박이말은 무엇이나 하찮아 보이지만 남의 말은 무엇이나 다락같아 보이는 이 골병, 이 무서운 얼암(魂癌)을 고치지 못하면 우리는 참다운 학문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다른 겨레의 말을 쥐나 개나 끌어다 쓰면서 거기에다 우리네 삶을 밝혀 담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노릇은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학문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 옹졸하고 따분한 국수주의 아닌가? 이런 트집은 정말 무섭다. 왜냐하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에게는 목숨까지도 쉽게 빼앗아 달아나는 낱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수주의는 빨갱이와 더불어 그런 낱말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것이다. 한번 국수주의자로 찍히면 그것으로 그는 옹졸한 사람이 되고, 그의 말은 아무에게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나 진배없다. 학자일 적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나더러 말꽃이라는 토박이 낱말을 썼으니 국수주의자 아니냐 한다. 그냥 문학이라는 한자말을 쓰면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면 국수주의자가 아닐 터인데, 문학이란 낱말을 못마땅하다고 내버리고 굳이 말꽃 같은 토박이말을 찾아 썼으니 국수주자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국수주의자란 무엇인가? 제 나라 또는 제 겨레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제 나라 또는 제 겨레만 생각하며 저들만 잘 살아가려 애쓰고, 남의 나라나 남의 겨레야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을 국수주의자라 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나를 헤집고 들여다보아도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내 나라와 내 겨레도 잘 모르듯이 남의 나라와 남의 겨레도 잘 모른다. 잘 모르면서도 내 나라와 내 겨레가 잘 되기를 몹시 바라는 사람이면서 중국이나 몽고도 잘 되기를 바라고, 아프리카의 피그미 겨레나 아마존 강가의 발가벗은 겨레들도 잘 살아가기를 마음으로나마 늘 비는 사람이다. 땅 위에 사는 모든 겨레들이 저마다 제 겨레의 말을 갈고 닦아서 자랑스러운 삶의 꽃을 피우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기를 참으로 바라는 사람이다. 나는 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남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옳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고, 남이야 죽든 살든 저만 잘 살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을 가장 업신여기고 싫어하는 사람이다.
참말이지 내가 말꽃 같은 토박이 낱말을 찾아내 쓰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말미는 우리나라와 우리 겨레를 살리자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설프지만 나는, 지구라는 땅덩이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물음이 생겼다. 어떤 겨레는 문명을 일으켜 스스로도 잘 살고 남들에게도 도움을 주는데 어떤 겨레는 왜 문명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남을 돕기는커녕 저를 지키지 못하여 자칫하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가? 어떤 겨레는 문명을 갈수록 빛나게 일으켜 세우며 세상을 이끄는데 어떤 겨레는 왜 한때 빛나던 문명을 이어가지 못하고 허물어뜨리고 마는가? 지중해 문명의 주인이 헬라 사람들한테서 라틴 사람들한테로 넘어온 까닭은 무엇이며, 서양의 근대문명이 어떻게 라틴 문명을 뛰어넘어 온 세상을 뒤덮을 수 있게 되었는가? 이런 물음에 시달리면서 나름대로 말, 입말과 글말이 문명의 저런 흥망과 성쇠를 만들어내는 열쇠임을 깨달았다. 제 겨레의 말을 갈고 닦아서 제 겨레의 삶을 훌륭하게 드높이면 그것이 곧 이웃 겨레와 인류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역사의 진리를 알게 되었다. 이런 마음으로 말꽃 같은 토박이말을 찾아 쓰는 나를 국수주의자로 몰아붙이면 정말이지 서운하다.
셋째, 문학을 말꽃이라 한다면 미술과 음악도 물감꽃과 소리꽃이라 해야 하지 않느냐?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 그러면 말꽃, 물감꽃, 소리꽃이 모두 꽃으로 예술을 드러내어 다소곳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올 듯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른바 문학을 가르치며 평생토록 밥을 빌어먹은 사람이기에 문학이라는 낱말을 두고 애를 태웠을 뿐이다. 미술이나 음악까지 뭐라고 할 겨를도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우리 겨레가 쓰는 우리 말을 모두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모든 낱말을 내가 어째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미술은 미술을 다루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음악은 음악을 다루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다. 그들 가운데도 어쩌다 나 같은 사람이 있어서 미술이니 음악이니 하는 낱말로는 못 견디겠으면 그들도 애를 태우겠지. 그러다가 내가 문학을 말꽃이라 했다는 소문이라도 듣고 따라서 물감꽃이다 소리꽃이다 한다면 나로서는 참으로 반갑겠다.
그런데 이런 트집에는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문학과 미술과 음악은 서로 아무런 통일성도 없이 들쭉날쭉 하지 않았느냐? 그것들이 들쭉날쭉 할 적에는 아무 소리도 없더니 어째서 문학을 말꽃으로 바꾸니까 그것들을 끌어와서 트집을 잡느냐? 이런 물음이다. 문학이 말꽃이니까 미술은 물감꽃, 음악은 소리꽃이 되어야 한다고 하자면, 마땅히 문학, 미술, 음악이 서로 생판 닮은 데가 없는 말들로 쓰일 적에 벌써 그런 트집을 잡아야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문학, 미학, 음학, 이렇게 하든지 또는 문술, 미술, 음술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문악, 미악, 음악 하든지 해야 한다면서 따지고 나서야 옳았다는 말이다. 이런 내 물음이 억지소리로 들린다면, 당신네들 트집도 억지라고 해야 논리에 맞다.
문학이란 낱말이 미술과 음악과 더불어 가지런하지 않은 것에는 아무도 트집을 잡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꽃이란 낱말은 미술과 음악과 어긋난다고 대뜸 트집을 잡는다. 이것이 우리네 지식인들의 정신 풍토다. 한자말이나 서양말에는 덮어놓고 트집을 잡지 못하면서 토박이말이면 함부로 시비를 걸어보고 싶은 풍토가 우리네 지식인의 머리 안에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면, 토박이말은 우리 선조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갈고 닦아 써온 것이기에 덮어놓고 트집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한자말이나 서양말은 우리와 다른 문화에서 만들어 쓰던 것을 갑자기 끌어다 쓰는 것이기에 손쉽게 트집을 잡아서 따져보아야 마땅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이제라도 토박이말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알뜰하게 다루며 갈고 닦아 쓰지 않고는 학문이라는 것이 우리네 삶을 참으로 밝혀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
4.
못들은 척하고 지나갈 소리에 굳이 어설픈 대꾸를 해보았다. 이런 대꾸가 말꽃이란 낱말을 살리는 데에 보탬이 되리라는 바람은 갖지 않는다. 말꽃을 죽이고 살리는 열쇠는 쓰는 사람들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목에 핏대를 올리며 말꽃을 새롭게 써야 한다고 부르짖어도 사람들이 입말이나 글말이나 전자말로 써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거꾸로 아무리 지식인들이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라 하고 즐겨 쓰면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지난날 생각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들처럼 말꽃이라는 낱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꽃이라는 낱말에 트집을 잡는 지식인들보다 더 많으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것이 쓰이지 않고 죽어버릴 것인지 즐겨 쓰이며 살아남을 것인지 점칠 수조차 없다. 다만, 진보를 거듭해온 인류의 문명사에서 그런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붙들었기에 망설임을 누르고 말꽃을 앞장서 써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말꽃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밝히는 학문이 일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가늠대가 된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할 따름이다.
<기조발표 2>
해부학 용어 개정의 기본 방침 이 글은 강호석 선생님의 PPT자료를 한글파일로 바꾼 것입니다(편집자 주).
강호석(연세대/원주의대/해부학)
1. 고유의 우리말이 있는 것은 우리말로 바꾼다.
보기 : 이개 → 귓바퀴 안부 → 얼굴 치은 → 잇몸
천문 → 숫구멍 비배 → 콧등 주와 → 팔오금
2. 어려운 한자말은 쉬운 우리말로 바꾼다.
보기 : 습주 → 주름기둥 비 역 → 코문턱,
정식 → 못박이관절 즐상근 → 빗살근
추골 → 망치뼈 첩모선 → 속눈썹샘
3. 한 글자로 된 한자용어는 두 자 이상이 되도록 하여 뜻의 전달이 쉽고 분명하게 한다.
보기 : 구(Aditus) → 입구(골반상구 → 골반위입구)
구(Area) → 구역(전폐저구 → 앞바닥구역)
사 → 경사(사열 → 경사틈새) 연 → 모서리
판 → 판막(정맥판 → 정맥판막) 인 → 비늘(인부 → 비늘부분)
능 → 능선(사골릉 → 벌집뼈능선) 총 → 얼기(신경총 → 신경얼기)
누 → 눈물(누기 → 눈물기관) 공 → 구멍
4. 두 낱말이 합쳐질 때 생략으로 인하여 의미전달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음절을 늘여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게 한다.
보기 : 접사함요 → 접형사골오목 → 나비벌집오목
실주섬유 → 뇌실주위섬유 서비기 → 서골코기관 → 보습코기관
간신함요 → 간신장오목 피 절 → 피부분절
5. 개념 파악과 기억에 부담을 주는 용어는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꾼다.
보기 : 근상막(Epimysium) → 근육바깥막
근외막(Perimysium) → 근다발막
근내막(Endomysium) → 근섬유막
6.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용어는 표현이 정확하게 되도록 한다.
보기 : 접형골융기 → 접형골접합부분(Jugum sphenoidale) → 나비뼈접합부분
승 모 근 → 등세모근(M. trapezius)
족 척 근 → 장딴지경사근(M. plantaris) → 장딴지빗근
7. 용어의 표현이나 비교 대상은 될수록 우리 문화에 바탕을 둔다.
보기 : 람다상봉합 → 시옷자봉합 접번관절 → 경첩관절
회, 구 → 이랑, 고랑(Gyrus, Sulcus) 이두 → 두갈래(Biceps)
봉 선 → 솔기 서혜 → 샅(inguinalis)
활 차 → 도르래
8. 어원에 따라 옮겨 그 구조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용어는 쉽게 그 구조가 연상되는
말로 바꾼다.
보기 : 전 자 → 대퇴돌기 → 넙다리돌기 육양막 → 음낭근육층
이상구 → 골비강입구(Apertura piriformis) → 뼈콧구멍
이상근 → 좌골구멍근(M. piriformis) → 궁둥구멍근
모 대 → 섬유띠(Lemniscus)
9. 용어는 체계와 통일성을 갖도록 한다.
1) 비슷한 유형의 구조
보기 : 부비강, 상악동, 접형골동 → 부비동, 상악동, 접형동 → 코곁굴, 위턱굴, 나비굴
2) 서로 관련있는 구조
보기 : 두개표근 → 머리덮개근(M. epicranius)
모상건막 → 머리덮개널힘줄(Galea aponeurotica)
3) 말의 순서
보기 : 천상완동맥 → 얕은상완동맥(A. brachialis superficialis) → 얕은위팔동맥
상완심동맥 → 깊은상완동맥(A. profunda brachialis) → 깊은위팔동맥
10. 한자말에서 유래한 용어 중에 명확하지 않은 표현을 바로 잡는다.
보기 : 회선근 → 회전근(Rotator) → 돌림
회 선 → 휘돌이(circumflexus) → 휘돌림
외전, 내전 → 외향, 내향(Abduction, Adduction) → 벌림, 모음
11. 외래어 중 쉬운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보편화된 외래어는 그대로 사용한다.
1)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꾼 것
보기 : 브레그마 → 정수리점 이니온 → 뒤통수점 람다 → 시옷자점
2) 보편화된 외래어를 사용한 것
보기 : 추체 → 피라미드 임파 → 림프
12. 모든 낱개 뼈 이름의 끝은 ‘○○골’로 하고, 집단으로 되어 있는 뼈를 통틀어 부를 때는 ‘○○뼈’로 한다.
보기 : 경 추 → 경추골 → 목뼈 이소골 → 고실뼈 → 귀속뼈
수근골 → 손목뼈 두개골 → 머리뼈
13. 한 용어 속에서 낱말의 배영 순서는 원칙적으로 라틴어의 역순으로 하나 발음하기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우리의 언어 습관에 따른다.
보기 : Regio carpalis posterior 뒤손목부위 → 손목뒤부위
Trigonum cervicale anterius 앞목삼각 → 목앞삼각
14. 우리말의 쓰임과 잘 어울려 이해가 쉽게 되는 낱말을 선택한다.
보기 : 눈두덩, 불두덩 : 치 구 → 불두덩(Mons pubis)
무지구 → 엄지두덩(Thenar)
눈꺼풀 : 안검 → 눈꺼풀, 포피 → 음경꺼풀(Preputium penis)
발자국, 눈물자국 : 심압흔 → 심장자국 지압흔 → 손가락자국
눈망울, 꽃망울 : 요도구 → 음경망울(Bulbus penis)
후 구 → 후각망울(Bulbus olfactorius)
15. 원칙에 따라 고친 용어가 너무 긴 경우에는 편리하게 쓰기 위하여 일부를 생략할 수
있게 한다.
보기 : 하악골섬유연골결합 → 하악골결합 → 아래턱결합
흉골쇄골유돌기근 → 흉쇄유돌근 → 목빗근
엄지손가락으뜸동맥 → 엄지으뜸동맥
16. 한자용어 중에서 고유한 우리말 용어가 있는 경우에는 이것을 사용한다.
보기 : 비강 → 코안 회 음 → 샅 상지 → 팔
늑골 → 갈비뼈 하악골 → 아래턱뼈 권골 → 광대뼈
폐 → 허파 신장 → 콩팥 직경 → 지름 경선 → 씨줄
17. 우리말이 있는 용어라도 우리말이 낮춤말이나 상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한자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보기 : 심장(염통) 항문(똥구멍) 고환(불알) 음경(자지)
안구(눈알) 방광(오줌보)
18. 한자용어의 뜻을 그대로 우리말 용어로 옮겨 사용한다.
보기 : 접형골 → 나비뼈 후두골 → 뒤통수뼈 궁 → 활
피질, 수질 → 겉질, 속질
19. 어려운 한자말은 대상물의 특징, 운용상의 편리성 등을 고려하여 우리말 용어를 새로
만든다.
보기 : 전정 → 안뜰 지주 → 잔기둥 경상돌기 → 붓돌기
설골 → 목뿔뼈 융추골 → 솟을뼈 복막수 → 복막주렁
수초 → 말이집 이조체, 삼조체 → 두동이, 세동이
종격 → 세로칸 중격 → 사이막
20. 흔히 사용되는 익숙한 한자말이라도 언어표현의 체계화가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말 용어를 새로 만든다.
보기 : (종격 → 세로칸, 중격 → 사이막), 횡격막 → 가로막
(심장정맥 → 심장정맥), 관상동맥 → 심장동맥
21. 라틴어 용어나 한자 용어가 실마리가 잘못 잡혀 개념전달이 어렵거나 용어가 명확한
정보를 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새로운 우리말 용어를 만든다.
보기 : 좌골 → (앉음뼈) → 궁둥뼈
Spermatogonia A 에이정조세포 → 으뜸정조세포
Spermatogonia intermedia 중간정조세포 → 중간정조세포
Spermatogonia B 비이정조세포 → 늦정조세포
22. 용어의 기본이 되는 위치, 방향, 움직임, 몸 부위의 뼈이름은 모두 우리말 용어를 만든다.
보기 : 근위 → 몸쪽 원위 → 먼쪽 회전 → 돌림 회선 → 휘돌림
내측 → 안쪽(내측) 외측 → 가쪽(외측)
23. 이미 널리 쓰이고 있거나 바꿀만한 알맞은 용어가 없는 경우에는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보기 : 동맥, 정맥, 신경, 골반, 갑상샘, 고실, 엽, 소엽, 체강
24. 라틴어 용어가 같더라도 필요한 경우에는 구조물의 특징에 따라 우리말 용어에서는
서로 달리 표현한다.
보기 : 전정 : Vestibulum oris 입정전 → 입안뜰
Vestibulum vaginae 질전정 → 질어귀
갑개 : Concha nasalis 코갑개 → 코선반
Concha 구갑개 → 귀조가비
궁 : Arcus alveolaris 이틀궁 → 이틀활
Arcus pharyngeus 인두궁 → 인두굽이
25. 용어를 되도록 짧게 줄이기 위하여 ‘-성’, ‘-형’등의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보기 : 선천성기형 → 선천기형 막성뼈발생 → 막뼈발생
방추형 내피세포 → 방추내피세포 소포형핵 → 거품핵
<기조발표 3>
국어 사전을 통해 본 학술 용어
조재수(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
1. 머리말: 왜 ‘우리말로 학문하기’인가?
우리 지식인들 중에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이가 있다. 또 세계화 시대라 하여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를 내세우는 학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세계화론에 대해, “세계화가 미국화냐?”, 또는 “국제간의 경제적 무한 경쟁이 곧 세계화냐?” 하는 비판도 없지 않다.
우리에게는 다행히 살아온 터전(나라)이 있고, 함께할 겨레가 있으며, 가꾸어 온 문화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에 얽매여 있을 때가 아니고 탈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 모두를 벗어버리고 세계화로만 나간다고 되는 일일까? 인류의 역사는 모였다 나뉘었다를 되풀이하였다. 그 흐름 속에서 좀처럼 변치 않은 단위가 민족과 나라, 또는 종교 집단이었다. 그래서 각 민족에게는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고, 붙들어야 할 자기의 것이 있다. 그 첫째가 말과 글이다. 학문은 바로 말과 글로 이루어지는 지식 기반이다.
‘우리말로 학문하기’란 세계의 온갖 지식을 우리 말과 글로 이해할 수 있게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외국 지식을 다루되 한문식, 일본식, 영어식 표현 등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바탕을 닦자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외국에 유학도 가고, 전문 지식의 원전을 섭렵해야 하는 일은 별개 문제다. 제 나라 학문의 근본과 교육의 보편성을 생각할 때의 언어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 지식 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둘러보고자 한다. 우리 지식인 중에는 명예와 권위를 누리면서 큰 나라 섬기기, 외래 사상 받들기, 공리공론 일삼기, 식민 통치의 앞잡이 따위로 출세하고 군림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지식은 섬기는 나라의 학설 베끼기였고, 그들의 사상은 받드는 나라의 정신이었다. 그들의 말이 그러하였고, 글이 그러하였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은 이렇게 개탄하였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전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삼(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신채호: 낭객의 신년 만필(‘도덕과 주의의 표준’ 후반부)>(1925. 북경에서)
오늘날의 우리 지식 사회는 서양의 온갖 주의와 사상을 담은 어휘가 넘치고 있다. 또 온갖 외래 종교가 들어와 성공하는 나라가 이 나라다. 서양의 주의나 사상의 옷을 입은 지식인이라야 대접을 받는다. 사대주의 그늘에서 그랬듯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 터전은 흔들리고 있다. 일제 시대에 일본어를 가르치던 초등학교에 이제는 영어 수업의 소리가 높다. 곳곳에 영어 마을, 영어 특구가 생긴다. 한문의 이해가 곧 지식이었듯이, 이제는 영어로 하지 않는 학문은 인정을 못 받는다. 주시경(1876~1914) 선생이 걱정했던 현실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때를 타고서, 외국의 말과 글은 바람 따라 흐르는 조수에 밀려 닥치는 사나운 물결처럼 몰려들어와, 미약한 국성(國性)은 전쟁에 진 싸움터의 고달픈 깃발처럼 움츠러지니, 이 때를 당하여 국성을 보존하기에 가장 소중한 제 나라 말과 글을 이 지경에 두고 도외시하면 국성도 날로 쇠퇴할 것이요, 국성이 날로 쇠퇴하면 그 영향이 미치는 바는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마침내 나라 힘의 회복은 바라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말과 글을 조사하여 바로잡아서 이를 장려함이 오늘의 급한 일이라 하겠다. <주시경: 조선어 문전 음학(머리말)>(1908. 박지홍 풀어 씀)
선생이 말한 ‘국성’이 바로 나라의 고유한 특성을 일컫는 말이니, 겨레의 정체성과 다른 말이 아니다. 국성을 지키는 바탕이 겨레의 말과 글이라면, 국성을 키우는 힘은 겨레의 말과 글로 이루어지는 학문이다.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세계의 무대로 나서되 겨레와 나라의 경계는 지워버릴 수 없듯이, 세계의 학문을 수용하되 우리 학문의 바탕은 지켜 가야 하기 때문이다.
2. 국어 사전을 통해 본 학술 용어
‘말모이’와 ‘말거울’
‘사전’이란 말을 담는 책이다. 온갖 지식(정보)을 어휘 단위로 모아 풀이하여 엮는 책이다.
우리가 일컬어 오는 '사전'이라는 말은 한자말 '辭典'을 빌어 쓴 것이다. 이 밖에 '事典'이라 하여 "여러 가지 사항을 모아 그 하나하나에 해설을 붙인 책”이라는 것이 있기도 하다. 이 밖에 '사전'을 나타내는 말로 '사림(辭林)', '사서(辭書)', '사원(辭苑)', '사해(辭海)', '사휘(辭彙)', '어전(語典)', '어해(語海)' 등이 있다. 또, 한자나 그 어휘집 이름으로 '옥편(玉篇)', '자전(字典)', '자해(字海)', '자서(字書)', '자원(字源)', '자휘(字彙)' 등의 말도 있는데, 이 이름들은 오늘날의 사전 개념과는 달리 주로 한자의 맞춤법, 음, 새김(뜻)을 밝히어 엮은 책의 이름이다. '자전'이라는 이름은 한자 이외에도 '한불자전’, ‘한영자전’, ‘법한자전' 들에서처럼 널리 그 어휘집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상의 '사전'을 나타내는 이름들은 모두 한자말이다. 우리말로는 '사전'을 일컫는 말이 없었을까? 우선, 근대 국어 연구의 개척자 주시경 선생은 1911년께 최초의 우리말 사전을 조선광문회에서 편찬하면서 그 이름을 '말모이'라 하였다. '말을 모은 것(책)'이라는 말이다. 주 선생의 제자로 보이는 어떤 이는 한글 풀어쓰기 소개글(월간 <대한인 졍교보> 10호, 25쪽, 1914. 5. 1.)에서 '씨 ㅏ리(자디ㅓㄴ)'라는 말을 썼다. '씨?알?이' 곧 '말의 씨(낱말)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역시 주 선생의 제자였던 김두봉은 그의 문법책 <깁더 조선말본>(1922년) 붙임글에서 '말거울(사뎐)' 또는 '말모이(사뎐)'라 하였다. '말거울'이란 ‘말의 모습(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일컬은 것 같다. 우리 말본의 대가 최현배는 ‘조선 사람은 조선말을 얼마나 아는가?’(<한글> 1932. 6.)에서 '말광(辭典)'이라는 말을 썼다. '말을 간직하는 광(곳간)'이라는 뜻이다. 어린이말 가꾸기에 힘쓰는 최종규 님은 '사전'을 ‘낱말책’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사전'을 일컫는 우리말 이름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도 본받아 써 오지 못하였다. 이러한 우리말 이름들을 두고 생각해 보면, '사전'이란 것은 ‘말을 모아놓은 책(말모이·말광)', 또한 '말의 제 모습을 알게 하거나 찾아 볼 수 있게 하는 책(씨알이·말거울)'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면은 바로 사전의 주요 기능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전과 학술 용어
사전에 올려 다루는 말을 ‘올림말(표제어, 등재어)’이라 한다. 올림말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말의 분야에 따라, 일반 언어를 다루는 ‘언어 사전’과 온갖 지식을 다루는 ‘백과사전’, 전문 분야 지식을 다루는 ‘학술 용어 사전’ 들이 있다. 언어 사전이면서 보편적인 전문 분야 어휘를 다루는 종합적인 사전도 있다. 우리의 종합 사전으로는 작은 규모의 것으로 문세영 저: <조선어사전>(1938)이 첫 출판물이었고, 조선어 학회 지은: <큰사전>(1929~1957)이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종합 사전이었다. <문세영>은 18 분야, <큰사전>은 49 분야, <조선말대사전>(북. 1992)은 46 분야, <표준국어대사전>(1999)은 51 분야 학술 용어를 다루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모두 50여 만 올림말 가운데 19만 전문어(고유명사 포함)를 다루었다. 이런 국어 사전들에 다룬 전문 용어는, 주로 과학 기술, 인문 사회, 예술, 종교와 신화, 기타(사람 이름·책이름·땅이름·고적 등) 분야의 용어들이다. 우리 사전에 올라 있는 이런 용어들은 바로 우리 학문 언어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전문성이란 특수성과 통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 분야에 통용되는 언어도 꼭 전문적이고 특수하여야만 할까? 특수한 지식이나 학문도 잘 이해되고 소통되려면 말(용어)이 어렵지 않고 분명해야 한다. 말이 특수하고 어렵다는 것은 이해와 전달에 부담이 된다. 그러나, 대개의 전문어에는 어렵거나 낯선 외국어들이 많다. 그래서 나라마다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쉬운 말과 자국어 표현 용어로 다듬는 일을 꾀해 오는 것이다. 전문용어와 일상용어를 비교한 한 통계 자료를 본 적이 있다.
‘전문 용어 언어공학 연구 센터’의 자료를 보면, 전문 용어와 일상 용어의 괴리가 미국은 40%, 일본은 60%에 비해 한국은 80%이다. 한국의 어른들이 얼마나 집단 내부의 끼리끼리 의사 소통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외부와 담을 쌓고 있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최용석(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과 박사 과정): 어른들이 가르치는 ‘나쁜 영어’>(한겨레신문. 2002. 1. 28.)
위의 ‘전문 용어와 일상 용어와의 괴리’ 비율에서 ‘%’ 수치를 거리 단위인 ‘리’로 바꾸어 보면, 미국은 40 리, 일본은 60 리에 비해 우리 나라는 80 리나 동떨어져 있는 셈이다. 전문 용어라 하여 일상의 언어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일반인과 전문가·학자 집단과의 의사 소통은 아주 어려운 수준이다. 언어에서도 우리 사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특권층이 군림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중심 집단은 일반 언어 대중이다. 전문가와 학자들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집단이기는 하나 일반 언어 대중을 무시하고 자기 위주의 언어만 쌓아 간다면 사회의 중심 언어는 발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날로 고유한 어휘와 표현들은 무시되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돈’보다는 ‘화폐’, ‘값’보다는 ‘가격·가치’라야 전문성을 띠는 용어로 되었다. ‘돈고치기·돈경제’는 안 되고, ‘화폐개혁·화폐경제’라야 경제학 용어가 된다. ‘값올리기·값내리기’는 쉬우니까 전문성이 떨어지고, ‘가격인상·가격인하’라야 경제 용어가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국어 사전은 이런 한자말이나 영어 합성어들로 부피가 커진다. 대부분 한자 학술 용어는 일본에서 들어온 말들이다. 영어권 학술 용어에 대하여는 지나가기로 한다.
우리말 학술 용어는 만들면 안 되는가?
우리는 우리말로 학술 용어를 만들면 안 되는가? 우리 지식인들 가운데는 일본 사람이 서양말을 번역한 용어는 그대로 받아 쓰면서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우리 학자가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지어 쓰면 어색해 하는 이가 많다. 일본이나 중국 학자는 그들 식으로 외국 용어를 번역해도 되고, 우리는 우리말 식으로 번역하여 쓰면 안 되는 것일까? 그래서, ‘사전’은 ‘말모이’나 ‘말거울’이 되지 못하고, ‘문법’은 ‘말본’이 되지 못했으며, ‘명사·동사’는 ‘이름씨·움직씨’가 되지 못하였다. '기체’를 ‘김몬’, ‘고체’를 ‘굳몬·얼음몬’, ‘액체’를 ‘묽몬·물몬’, ‘시계’를 ‘때알이’, ‘그녀'를 ‘그미’라 하는 것은 어색하다고 돌아보지도 아니하였다.
어느 나라고, 말은 민중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생겨나기도 하며, 또 전문 지식인들이 생각하고 다듬고 하여 지어 쓰게 되는 말들이 있게 마련이다(일본, 중국에서처럼).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위해서는 우리 민중들의 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우리 식으로 말을 다듬고 짓기도 해야 한다(일본, 중국의 지식인들처럼).
우리의 근대 선각자들도 이 문제를 지나치지 않았다. 주시경과 그 제자 김두봉, 최현배는 말본 용어를 우리말로 지었고, 김두봉은 언어학자로서 과학 용어의 일부인 물리학 술어(384개), 수학 술어(108개), 화학 술어(39)개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 <한글 학회 50년사(246쪽)>.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오늘날의 지식인들에게 얼마나 기억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두봉이 지은 과학 용어 몇 개를 보자.
몬결갈[物理學]. 되결갈[化學]. 힘갈[力學]. 몬바탕[物質]. 몬몸[物體]. 낱자리[單位]. 굳몬[固體]. 묽몬[液體]. 피몬[氣體]. 굳됨[凝固]. 김됨[氣化]. 물됨[液化]. 섞됨[中和]. 풀림[溶解]. 배듦[吸收]. 제되[還元]. 맞되[反應]. 밋감(밑감)[元素]. 밋알(밑알)[原子]. 감같몸[同素體]. 빛몸[光體]. 빛밋(빛밑)[光源]. 달가림[月蝕]. 해가림[日蝕]. 되쏨[反射]. 쪼임[輻射]. 퍼섞[擴散].모데[焦點]. 녘모[方位角]. ??? <한글> 1권 4호(1932. 9.)에서.
우리말 뿌리(어근)를 이용한 뛰어난 조어들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읽으면 그 뜻바탕이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말들이다. 이에 비해 오히려 뜻글자라고 하는 한자는 우리에게 그 뜻 파악이 설다. 살려 써도 좋을 말인데 억지로 지은 용어라며 또 당장에 쓰이지 않는 말이라며 외면되고, 사전에도 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 쓴 그 한자 용어들은 받아들여 처음부터 우리 과학계의 공식 용어(?)로 국어 사전에 빠짐 없이 다루어 온다. 이는 사전 편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사전이란 쓰이는 말 중심으로 엮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어디 그렇기만 한가? 수십만 어휘의 대사전에는 쓰이는 말보다는 안 쓰이는 말이 훨씬 더 많다. 이는 앞에서 밝힌 대로 사전이 쓰이는 말의 거울일 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통해 나타났던 온갖 말을 간직하는 곳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전 편찬자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이 밝힌 대로, 사전 편찬자는 다만 현재와 과거의 말을 기술할 뿐 그 쓰임새를 규정할 수는 없다. 또한 어떤 말을 쓰게 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사전 편찬인에게는 다만 현재와 과거의 말을 다루어 둘 책임이 있다. 그래서, 국어의 어휘 형식을 빌어 외래어를 다듬은 이러한 술어(용어)들도 마치 곳곳의 방언을 찾아 다루듯이 고유한 우리말 자료로서 사전에 챙겨 둘 대상이라 생각한다.
우리말 술어 허물기
그나마 살아 남아 사전에 실리게 된 우리말 술어도, 우리 학문 풍토에서는 외면과 업신여김으로 그 지위가 추락하는 예도 있다.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노력을 허무는 사례다. 조선어 학회가 지은 <큰사전>(1929~1957)에 이런 것이 있었다.
나^2 [이] ((철학)) ① 대상 인식의 주체. (자아=自我).
자아(自我) [이] ((철)) = 나^2①.
다른 나 [이] ((철학)) 자기가 자기를 고찰할 때 그 고찰의 대상이 되는 자기. (타아=他我)
타아(他我) [이] ((철학)) = 다른 나.
알다시피, 사전에서 동의어는 뜻풀이를 보인 올림말이 중심 어휘다. <큰사전>은 ‘자아’를 ‘나’로, ‘타아’를 ‘다른 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쓰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얼마 가지 못하고, 학계나 이후 사전 편찬에서는 그 중심 단어를 ‘자아’, ‘타아’로 뒤집어 버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인류학 용어로 ‘곧선사람 = 직립 원인’을 다루었다. ‘곧선사람’은 잘 지어진 말이지만 여전히 ‘직립 원인’을 중심 단어로 삼아 그 자리에다 풀이를 보였다. 식물 용어에 ‘갈잎?떨기나무·갈잎?좀나무’가 있는데 이것도 ‘낙엽?관목’으로 이끌어 풀이를 보게 하였다. 그러한 의도에는 우리말 술어는 아직 덜 익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북에서는 식물 용어, ‘이생 웅예(離生雄?)’·‘이생?@悶?(離生雌?)’를 <조선말대사전>에 ‘갈린수꽃술’·’갈린암꽃술’로 다듬어 풀이하였다.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노력을 허무는 것 중에는 이런 예도 있다. 고유어 술어가 못마땅하여 저마다 자기 술어를 개발하는 것이다. 대부분 한자 용어다. ‘높임말’이면 그만일 텐데, ‘공대말·존경어·존대어·존댓말·존칭어’ 들을 쓰는 이들이 있다. 또 ‘일곱끝소리되기’를 나타내는 문법 용어에, ‘받침규칙(<받침소리규칙)· 받침법칙’ 외에 ‘말음법칙·종성규칙·절음법칙’ 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개념에 수많은 용어들이 쌓이는 것이다.
띄엄띄엄 새로운 시도
이렇게 ‘우리말 술어 허물기’가 이어져 오는 분위기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말 술어 다듬기’의 시도가 없지 않다. 광복 이후 ‘우리말 도로 찾기’, 한글 학회의 ‘쉬운말 사전 편찬’, 정부의 ‘행정 용어 순화’ 등이 띄엄띄엄 이루어졌다. 북한에서는 1964년부터 20년간 당의 언어정책 사업으로 약 5만 어휘를 다듬었다가 1982년 재검토를 거쳐 1986년에는 널리 쓰이는 2만 5천 개를 건져 사전에 반영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각 분야별로는, 손보기의 우리말 고고학 용어, 연세대에서 다듬은 해부학 용어, 법제처의 법률 용어 순화, 물리학회와 화학회의 술어 정리, 최근 대한 의사 협회가 낸 우리말로 바꾼 필수 의학 용어 등의 결실이 있었다. 이런 노력과 관련된 과학 기사 하나를 건져 보았다.
그는 단순해 보이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우주에 대한 인류의 과학적 탐구 성과들을 비교적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간다. 붉은큰별(적색거성), 흰색잔별(백색왜성), 별무리(성단), 빛띠(스펙트럼), 빛알(광자), 빨강치우침(적색이동) 등 많은 과학용어를 산뜻한 우리말로 표기한 옮긴이의 노력도 우주를 친숙하게 느끼게 하는 데 한몫 한다. <조일준 기자: 우주 밖에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한겨레신문. 2004. 2. 14.)
여기에 쓰인 우리말 과학 용어를 보면 그 말만들기(조어)의 바탕이 앞에 보인 김두봉의 용어들과 맞닿아 있음을 느끼리라 믿는다. 우리의 정서가 그렇듯이 우리말에 대한 감각 또한 시대를 넘어서도 공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이런 노력을 외면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깨달음이 있어 그 노력을 띄엄띄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을 제대로 맺으려면 먼저 우리 지식인들이 이를 받아들여 자기 논문과 강의에 살려 써 주어야 한다. 우리말 학문하기의 첫 과제가 바로 그러한 실천과 계몽이라 생각한다. 사전 편찬에서도 새로운 우리말 술어를 거두어 반영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겠다.
3. 맺음말: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기본 방향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기본 방향을 생각해 본다.
학문 활동에서 되도록이면 우리말 용어를 쓰고, 외래 용어는 우리말 뿌리로 다듬거나 지어 쓰는 일에 뜻을 모아야 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말의 어휘 부려쓰기(구사)는 바탕을 잃고 있다. 지금도 국어 교육은 한자 교육으로 착각하는 교사가 많다. 논설이나 논문에 한자를 많이 섞어 써야 좋은 점수를 주는 교수들이 있다. 교수신문은 해마다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를 발표하고, 어떤 일간지는 한자성어를 알면 글의 핵심이 보인다는 특집 기사도 실었다. 얼마 전에 교육부 관련 소식에 ‘비문해자(非文解者)’가 늘어 ‘문해교육’을 해야 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우리 지식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사자성어를 즐겨 쓰고 한문식 말만들기에 집착하다 보니 ‘글모르는이(<글 모르는 이)’, ‘글깨치기교육(<글 깨치기 교육)’ 같은 말은 용어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비문해자’라는 식의 한자 낱말은 만들어도 되고, ‘글모르는이’ 같은 우리 낱말 만들기는 꺼리는 언어 인식에 문제가 있다.
우리말로 학문을 하려면 우리 말법에 맞는 말하기, 글쓰기를 닦아야 한다. 문법에도 맞지 않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표현들은 잘 읽힐 수 없다. 지식인들에게도 국어를 바르게 부려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저기 쏟아내는 전문가·지식인들의 글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일이다. 교수들의 칼럼을 읽다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몇 문장을 모아 보았다. 출전은 생략하기로 하며, ‘☞’ 표를 써서 필자가 다듬은 표현을 보이고, 각 문장의 결함에 관한 풀이는 되도록 줄이기로 한다.
*선생님은 예일대에서 연구원으로 좀 근무하신 후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 … 귀국하셨다. /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씨의 소설들은 본래 전통적 의미의 서사와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훌’의 세계는 보다 의도적으로 의미의 담지자, 발화의 주체가 흐트러져 있다. ☞ … 의미를 띤 사람(?) ….
*오늘도 교육자로서 부끄럽지 말자고 다짐하며 강단에 서지만, ☞ …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
*이들 ‘위기’ 담론은 사회공론화된 듯도 하다. ☞ …은 사회 공론이 된 듯도 하다.
*이른바 ‘독서 대중’에 대한 계몽의 담론이 여전히 유의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 주기도 한다. ☞… 여전히 의미 있는 현실을…
*그의 모더니즘 비판을 복류하는(☞ 스며 흐르는) 것은 모더니즘이 개인의 고립된 내면을 기술하거나, 파편화된(☞ 조각 난) 현실을 기계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세계의 소외 상태를 체념적으로 수락한다는 견해였다. ☞ |필자 주| 괄호 안에 일부의 말을 고쳐 보았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 그리고 친구 사이, 연인 사이 한국인은 '사이'에서 존재하다 '사이'에서 죽는다. 그래서 생존의 삼대 축인 인간(人間)·시간(時間)·공간(空間)에는 모두 사이 '간(間)'자가 들어 있다.
☞ 한국인의 ‘사이 문화’를 강조한 글의 한 부분이다. 첫 문장의 내용대로라면 꼭 ‘한국인’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이상하다. 또 “생존의 삼대 축”이란 한국인의 그것을 말하는 듯한데, ‘인간·시간·공간’이라는 단어는 중국·일본 등에서 먼저 생긴 말로 한국인만의 ‘사이’ 개념으로 인용하여 말할 수 있을까. 두 문장 다 슬쩍 지나치기 쉬운 표현이다. 참고로 아래 글과 비교하기 바란다. 아래의 ‘사이’ 개념은 한국인만의 것이 아니고, 관련 한자 어휘를 풀어서 온 사람에 적용해 본 동양철학적 생각이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이성적 동물이 아니다. 류영모는 인간을 사이에 던져져,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사이?존재(사이에?있음)’로 본다. 즉 하늘?땅?사이(天地間)에서, 사람?사이(人間)에서, 빔?사이(空間)에서, 때?사이(時間)에서 그 사이를 이으며 사이를 나누며 사르고(살고) 있는 ‘사이?존재’로 보았다. <이기상: 다석 사상의 현재성>(교수신문. 2001. 3. 19.)
전문적인 내용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글쓰기에 힘써야겠다. 말과 글의 표현이 쉽고 평범하다 해서 그 내용의 질이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평범하게 말 못 할 이론이나 이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모든 경전이 그러하듯 깊은 지식 내용도 쉽게 표현해야 잘 읽힌다. 그래서 철학도 자연과학도 그렇게 어려운 말로 설명해야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설명하는 이의 지식과 역량이 쉽게 풀지 못하는 수준이기에 이해가 안 되는 어려운 말이나 문맥이 나온다고 본다.
아이는 어른을 본받고 자란다. 말과 글도 그렇다. 요즘 논술 입시 바람으로 초등학생부터 글쓰기 과외가 성행하는데, 초등학생이나 대학 입시생들의 글에서 일부 지식인들의 칼럼 글 같은 어렵고 긴 표현의 문장을 본다. 입시라는 과제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이런 어른들의 글쓰기를 흉내 내야만 할까? 논술의 출제 의도와 평가 기준은 무엇이며, 또 논술의 언어 기준은 어떻게 세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외국어 용어 속에 우리말 학술 용어를 짚어 보았다.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위해서는 지식인들의 국어가 바로 서야 한다. 지식인들이 우리말을 아끼고 가꾸는 노력이 있어야 국어가 제대로 살고 우리 정신이 피어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인기 높은 사람이 나오면 곧잘 국민 인물로 일컫는다. ‘국민 가수’, ‘국민 배우’, ‘국민 타자’ 등이 나왔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말로 학문하기로 유명한 ‘국민 교수’도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교과서 속의 학술용어문제 1>
<국어> 교과서 속의 우리 학술용어
-한말글 배움책은 토박이말에 터잡아야-
김두루한(서울광양고등학교)
1. 들어가기: 한말글 가르침이 걸어온 길
을유 빛?O음 예순 한 해를 맞아 교육과정이 7차례 바뀌었음에도 ‘국어’가 어떤 것인지를 바로 세우지 못하였다. 국어교육 현장은 왜정 시대에 일본어를 국어(고꾸고)라고 윽박지르며 가르치던 시대에 배운 이들이 한동안 자리를 잡았고, 남의 말을 배운 버릇으로 제나라말글을 흉내내듯 가르쳤다. 일본글 해석법을 베낀 국문해석법이란 책이 있은 뒤로 특정 ‘자습서’에 파묻혀 공부하는 한심한 노릇을 꽤 많은 사람이 ‘국어교육’의 이름으로 한 반면 입시 굴레 속에서 우리말이 풍부하게 쓰이고 조리(논리)에 차며, 아름다운 글로 된 것을 배우는 기쁨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우리가 지닌 한말글모이(배달말사전)로 마땅한 것이 없다는 현실에서 잘 알 수 있다. 사전 편찬론에 따르면 처음부터 한말글(국어) 사전이 아니라, 전문사전, 백과사전을 겸한 것이 오늘날 양적 확대에만 치중하여 아직도 내세울 만한 ‘한말글(국어)사전’ 하나 없는 답답한 현실이다.
‘우리말 큰 사전’은 그 범례에서 “ 이 사전에 실은 어휘는 현대에 표준으로 쓰이는 순 조선말, 한자말, 외래어, 숙어, 각종 전문어는 물론이요, 옛말, 이두말, 옛제도어, 각 지방의 널리 쓰이는 사투리(표준어 아닌 말), 변말, 곁말 및 내외 각지의 유명한 땅 이름, 사람 이름, 책 이름, 명승 고적의 이름들까지 널리 망라하고……”라 하여 처음부터 국어 사전이 아니라, 전문사전, 백과사전을 겸할 것을 말하고 있다. (줄임) 이것은 물론 어휘 선정의 기준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김종택, 1993, 국어어휘론, 135쪽)
2. 한말글 배움책이 지닌 바탕스런 문제점들
그러면 교과서, 배움책에서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 한말글 배움책이 지닌 바탕스런 문제점들로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새말 만들기’에 대하여 들온말(한자말/서양말)을 내세우는 생각을 지니고 ‘국어 교육(한말글가르침)’을 펼쳐 온 문제이다.
“신어 창조에 있어서 전혀 한자에 의존하려는 이 전통은 매우 완강하게 순수한 우리말에 의존하려는 기도를 물리치고 있다. 문법을 ‘말본’, 명사를 ‘이름씨’, 자외선을 ‘넘보라살’ 등으로 대체하려는 기도는 순화론자들에 의해서, 특히 해방 뒤에는 교육부를 본거로 하여, 강력히 추진된 바 있으나 오히려 혼란을 가져왔고 극소수에 있어서 그나마 억지로 일반화되어 가는 경향이 엿보인다. 예) 셈본(산수), 세모꼴(삼각형). 이러한 신어들이 국어의 생리를 무시하고 있는 사실은 매우 유감된 일이다. 가령 국어에서 ‘꼴’이란 말은 적어도 현대어에 있어서는 깔보는 뜻을 가졌는데 이것을 ‘세모꼴’에 쓴다는 것은, 서투르기 짝이 없는 일이다. 또 한자어에 있어서 느끼는 것과 같은 간결미를 노려서인지 국어의 일반적인 조어법에 어긋나는 것도 허다하니(예. 넘보라살) 이런 점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기문, 국어사개설, 1998, 227-8쪽)
이처럼 국어학자들 중에는 ‘국어의 일반적인 조어법’을 강조하며 들온말(한자어) 중심의 낱말만들기(조어법)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한자어가 국어 어휘 자산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요, 더 나아가 귀중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심재기(1997), 국어 어휘의 구조와 특징, 국어사 연구, 태학사 767쪽
둘째 ‘한글올쓰기(한글전용)’ 정책을 줄기차게 펼쳐 온 분들이 교육과 언론에서 ‘한자를 섞어 쓰자’는 이들과 끊임없는 논쟁 속에 휘말려 왔다는 문제이다.
① 학자들과 문필인들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한자말을 쓰는 데에 따르는 이익과 권위와 정서를 그 머리와 몸 속에 지니고 있다.
② 정치나 경제 권력을 지닌 이들이 그 권위를 보이기 위해 어린이들도 쉽게 읽고 쓰는 우리 글자만 쓰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③ 신문(방송)에서 ‘油價’, ‘株價’, ‘豪雨’를 ‘유가’, ‘주가’, ‘호우’로 쓴 탓이다. (이오덕,1983)
셋째 토박이말 가르침과 남의 말 가르침을 구별하지 않은 채 제대로 된 ‘우리 교육’을 펼치지 못한 교육계의 문제이다.
“ 남의 말(외국어)을 배우는 처지에서 보면 내 나라 내 문화의 뿌리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 남의 말을 배우는 바, 그 작업은 번역이 곤란한 이들 낱말을 어떻게든지 번역해야 수용하는 목적에 맞게 된다는 점을 잊기 쉽다.
남의 말을 배울 때 번역의 생산적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위의 두 가지 현상보다 더 보편적으로 강력하게 먼저 일어나는 것이 낱말 체계의 이중, 삼중 구조이다. 이 낱말 체계의 이중 구조는 계층 내 두 가지 말의 사용과 보편적 두 가지 말 사용과 나란히 가면서 앞의 것의 경우 상층 언어를 배우지 못한 하위 계층아서도 보편적으로 있게 된다. 따라서 외국어를 오래 배우게 되면 우선 그 겨레나 나라에 보편적으로 있는 것은 낱말 체계의 이중 구조이며(이것은 우리 나라 낱말 체계의 큰 특징이다. 우리는 중국계, 일본계, 서양계, 토박이계의 네 가지 말의 복합 이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동시에 그 말을 배우게 되는 계층에서 계층 내부의 두 가지 말 사용(한문 문집을 보라)이 있고, 이것이 확산되면 보편적 두 가지 말 사용의 시기가 오고, 그 마지막으로 물론 토박이말이 완전히 죽게 되는 시기가 온다. ” (이상태,1995, 국어교육의 길잡이, 한신문화사)
3. 중등학교 배움책에서 낱말(어휘) 배우기 문제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10개 과목 가운데 중고생의 절반 이상이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막눈 수업’에 머물고 있는 것은 교사가 설명 위주로 진행하는 현재의 수업 방식과 기본 개념이 들어 있는 ‘낱말뜻익히기’(어휘개념학습)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보기를 들어 보자.
물음: 용해도를 배우는데요. 왜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는지.
대답: 저도 과외로 중학생을 가르쳐 보니까. 용해도 부분에서 학생이 아예 손 놓더라구요. 제 생각에는 그 학생이 공부를 게을리 한 것도 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농도의 기본 개념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가장 간단한, 고정된 온도에서의 농도를 이해하세요. 그리고 나서 용해도라는 단어를 이해하시구요. 아마 님이 이해하기 어려운건. 혹시 온도가 변했을 때 석출되는 소금의 양, 뭐 이런 거 아닌가여? 그리고 그래프의 개념, 용해도 그래프 있죠? 온도에 따라 용질의 양이 증가하는 거요. 그거 볼 줄 아시면 됩니다. 학원 샘한테 그 부분 모르겠다고 떼쓰세요. 그거 이해하시면 용해도 다 한겁니다. 그럼. (지식 검색 참조 naver. com)
이처럼 과학 교과서의 경우 본디 라틴말이나 영미말 등으로 되어 있던 낱말을 일본 학자들이 뒤치고, 그런 일본식 한자말을 ‘을유 빛찾음’ 예순 해를 맞고도 상당 부분 그대로 베껴쓰고 있다. 그래서 과학 용어가 입말과 달리 어렵고 종종 생뚱맞게 들리며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어렵게 배우게 되니 ‘고체-액체-기체-액화-기화-승화’를 익히게 되면서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가 나는 게 아니라 싫고 어렵고 짜증나는 공부를 하게 되는 말미가 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국어(한말글)’ 쪽에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4. 현재 쓰이는 한말글 배움책에 나타난 어휘(용어) 학습 문제
첫째, 학생들 처지에서 가르치지 않고 있다.
제6차 교육과정 ‘국어’ 배움책에서는 어휘 학습란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터무니 없이 거의 한자말로만 되어 있었다. 6차에서는 이밖에도 바탕글과 관련하여 중요 단어를 내세웠는데, 그 내용도 학생들의 처지에서 동떨어진 어려운 한자말들이 다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이 7차 배움책에서도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다. 예컨대, 배움책에서는 날개 쪽에 ‘황소개구리와 우리말’에 나온 다음과 같은 낱말들이 소개되어 있다.
번호
실린 낱말(월)
말뜻 풀이
1
적나라(赤裸裸)하다
① 몸에 아무것도 입지 아니하고 발가벗다
②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어 숨김이 없다
2
공용어(公用語)
국가나 공공 단체가 정식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법령, 공문서를 비롯하여 공식적인 기록이나 교육 또는 방송 등에서 사용되는 언어
3
토의(討議)
각자의 의견을 내놓고 검토하고 의논함
4
기발(奇拔)
유달리 재치 있고 뛰어남.
5
셰익스피어
(Shakespeare, William:1564-1616)
영국의 극작가, 시인. 비극 ‘햄릿’,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 희극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사극 ‘헨리 4세’, ‘줄리어스 시저’ 등이 있다.
6
서식지(棲息地)
동물이 깃들여 사는 곳.
7
대원군이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대원군처럼 강력하게 통상 수교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 학생들은 같은 바탕글에서 어떤 말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다음은 그 물음에 답한 어느 학생의 답이다.
‘황소개구리와 우리말’ 중 중요한 단어
① 우리말의 운명: 현재 우리말이 점점 파괴되고 잘못된 방향으로 변형되어가기에 우리말이 운명이 부정적이다. 나도 학생이지만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사람들의 언어 사용을 보면 모든지 편한 발음으로만 쓰려는 습관을 많이 목격하게된다. 최근들어 우리말을 다시 살리자는 네티켓등은 우리말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귀찮더라도 올바른 문법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언어사용이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② 지구촌: 지구촌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지구촌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문화나 생활양식등이 통합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미국화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문화들이 지구촌이라며 하나로 묶으려는 대세속에서 사라져서는 안된다. 그들만의 고유의 특성을 살리면서 지구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③ 대원군: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이용해 한국의 개방을 막은 장본인이다. 대원군의 정책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선진국의 문화는 무조건 좋은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은 더욱 옳지 못하다. 역사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나갈수 있는 하나의 도움이 된다. 무조건적인 쇄국정책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받아들이고보는 현재 상황에서는 쇄국정책을 타산지석으로 삶는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④ 토종: 지구촌, 현대화 라는 단어로 인해 고유,토종이라는 단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고유,토종이 사라진다면 한국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잃을수 있다. 토종은 수백년 수천년 전부터 조상들로 하여금 내려오는 문화이다. 우리는 토종을 지구에서 혼자 존재하는 문화로 특화하여 상품가치로 만들어야 한다.
둘째, 토박이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토박이말(고유어) 를 어떻게 배워 왔는가>
솔직히 말해서 초중고 12년 동안 고유어라고 수업을 제대로 배운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만큼 학생, 선생님 모두 고유어의 중요성을 많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북한의 경우 문화어를 표준어로 많은 외래어를 고유어로 바꾸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한국은 그러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또 고전 문학을 보는 경우에도 고유어를 중요하게 수업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거나 한번 읽어 보고 의미를 모른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도 모의고사에 많이 나오는 ‘즈믄’ 정도나 외울 뿐이다.
고유어는 수천년을 이어온 언어로 한 나라에서 꼭 보존되어야할 문화다. 그런 고유어를 살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국가와 교수, 교사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경우는 아직까지 고유어에 대한 인식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고유어를 잘 알지도 못한다. 솔직히 말해 한문을 고유어로 착각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유어를 만들겠다고 지금 와서 쏟아져오는 외래어를 모두 고유어로 바꾸는 것은 효율성도 떨어지고 옳지도 못한 행동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외래어를 고유어로 새로 만들기 보다는 일제 잔재로 인해 사용되는 많은 잘못된 표현들은 우리 고유말로 다시 고치는 것이 우선이고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먼저 고유어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고 사용한 후에 조금씩 올바른 말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쉬운 방법일것이다.
5. 한말글 배움책에서 한말이 사라진 까닭
김수업(2004)에서는 ‘학문(교육) 용어’에서 우리말이 사라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 1960년 대를 넘어서자 참된 우리 글말로 학문하는 풍토는 갑자기 무너졌다. 일제 침략과 맞서 싸우며 겨레얼을 드높이고자 하던 정신이 온통 가라앉은 탓이다. (줄임) 갈수록 일본 한자말을 쓰는 사람들이 세력을 얻으면서 1980년 대로 와서는 ‘한글’ 같은 몇몇 낱말만 간신히 살아남고 모조리 일본 한자말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말모이는 사전에게, 말본은 문법에게, 소리갈은 음성론에게, 셈본은 산수 또는 수학에게... 우리 토박이말은 일본 한자말에게 학문의 안방을 모두 빼앗기고 쫓겨나 버린 것이었다. (김수업,2004..3,우리 말 우리 얼)
이런 문제는 한자말의 범람을 막기 위한 한국말 깨끗이 하기 운동의 일환으로, 또 한글을 올쓰기함으로써 한자말을 한글로 적었을 때 말뜻 알기가 곤란함을 미리 막기 위하여 한자말을 토박이말로 된 말로 바꾸거나, 광복 뒤로 일본말 찌꺼기를 몰아내기 위해 그들을 토박이말로 바꾸는 과정으로서 (1) ‘국어정화위원회’의 ‘우리말 도로찾기’(1947.1), (2) ‘한글전용 특별심의회’의 ‘쉬운말 사전’(1967.1), (3) ‘국어순화운동협의회’의 ‘국어순화자료’(1987)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줄기차게 이어지지 못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배움터에서 한말글(국어)은 제대로 살아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살아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이제 이 문제점을 풀어나갈 수 있는 대안을 함께 찾아보기로 하자.
6. 한국말의 특성에 터잡은 새말만들기를 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 배움터(학교)에서는 주어진 낱말의 짜임새를 살피고, 이를 갈라 놓은 뒤 확인하는 수준에서 “새말을 만드는 데도 주로 한자가 사용되면서 토박이말(고유어)에 의한 조어법은 점점 쇠퇴하여 버렸다는 지적”에 그쳤다.
“ 국어에 한자(漢字)가 도입된 이후, 한자말이 고유한 우리말을 밀어 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새말을 만드는 데도 주로 한자가 사용되면서 고유어에 의한 조어법은 점점 쇠퇴하여 버렸다. 그러한 과정에서 '집-가옥(家屋), 길 -도로(道路).…….'와 같은 유의어(類義語)가 무수히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계집-여자(女子), 늙은이-노인(老人),…….'등에서와 같이 고유어 쪽에 비하(卑下)의 의미가 담기는 사례도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뫼비탈, 뫼아리, 묏골, 묏곶, 묏기슭, 묏봉우리, 묏마루, 묏부리, 묏불, 묏언덕, 노판뫼…….' 등과 같이 대단히 생산적이던 고유어의 조어법도 '산정(山頂), 산록(山麓), 산간(山間), 산사(山寺), 산신(山神), 산화(山火), 산(山)돼지, 고산(高山), 명산(名山)…….' 등에서 보듯이 한자에 밀려났다. 그 결과, 사전에 올려진 어휘의 반 이상이 한자말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먹거리’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말 낱말만들기 연구를 해 온 학계가 잘못 판단한 학설로 대중을 잘못 이끌고 있다는 문제이다.
‘먹거리’가 틀린 말이고 ‘먹을 거리’로 써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통사론에서 통용되는 이론이지 조어법에서 통용되어야 하는 이론은 아니다. ‘막는 것’이라는 통사적 언어로는 특정한 개념을 가리키기 어렵다. 물을 막는 것도 ‘막는 것’이고 사람을 막는 것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마개’나 ‘집게’, ‘베개’에서 보듯이 줄기에 무언가 새로운 형태소를 붙임으로써 특정한 개념을 대변하는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낸다. ‘먹거리’의 ‘먹’은 ‘먹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고, ‘거리’는 재료의 뜻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 낱말이 ‘먹고 마실 만한 사물’ 곧 ‘음식’의 뜻으로 쓰인다면 한 낱말로서 성립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단순히 ‘먹을 거리’의 뜻으로 ‘먹거리’라고 쓴다면 ‘먹을 거리’의 준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시도를 통사적이어야 한다는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국어학자들은 ‘먹거리’가 통용되는 과정과 현실을 면밀히 보고 생성이 완료되었다고 판단되면 우리말 어휘로서 국어사전에 올리도록 해야 할 것이고 아직 생성이 끝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조용히 지켜볼 일이지 섣불리 조어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낱말의 생성에 개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수많은 한자어는 엄격하게 말하면 성립할 수 없는 한자어가 많다. 예컨대 ‘제자(弟子)’는 ‘아우의 아들’이거나 ‘아우와 아들’이어야 하고, ‘입회(立會)’는 서서 모임‘이거나 ’서는 모임‘이어야 하는데, 이 단어들은 각 한자어의 뜻과 전혀 상관 없는 뜻으로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였다. 왜 이런 단어에는 엄격한 조어법을 적용하지 않는가? ‘돌보다, 쓰다듬다, 늦되다’와 같은 낱말은 형태소와 형태소가 직접 만나도록 하여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이런 조어법을 활용하여 폭넓게 새 낱말을 만들어 내지 못한 무능을 탓할지언정 국어의 조어력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남영신, 2000)
도대체 토박이 낱말의 뿌리(줄기)에다 뒷말을 합치는 ‘굳기름(지방)’이나 ‘해굽성(해를 향해 굽는 성질)’이란 말을 왜 써야 하는가? ‘먹거리’처럼 이런 ‘줄기합친말’을 마땅히 자연스레 써야 하는 이유를 들어보고자 한다.
① ‘먹거리’는 줄기합친말로서 예부터 써 온 우리말 만들기 조어법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우리가 조어능력을 잃게 된 것이지 우리말에 조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조어법에 얽매여서 토박이말로 된 새로운 낱말이 나타나는 것을 싹부터 자르려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② 모든 국민이 한자를 배워야 하는 인식을 옳은 것인가? 한자를 배워야 단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자말에 대한 편집증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영어로 대표되는 서양어에에 편집증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오늘날 영어나 서양어를 집중적으로 쓰는 현상을 바로 잡으려면 학자들부터 우리말의 근본 특징을 이해하고 겨레말 우선의 관점으로 ‘새말 만들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③ ‘먹거리’의 경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실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먹거리’ 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낱말 배열 방식에는 벗어나지만 오늘날도 널리 만들어 쓰이는 낱말이 무수히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말 어휘가 빈약해지고 있는 까닭은 우리 학자들이 지닌 언어 의식이 들온말 우선의 관점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런 바탕에서 한자말 중심으로 사전이 엮이고, 순수 우리말 판정을 게을리 하여 일부러 ‘우리말’을 올리지 않고 있는 탓이 아닌가? 따라서 국립국어원에서 엮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 있는 ‘먹거리’가 ‘먹을거리’의 잘못이라는 풀이는 바로 잡혀져야 한다.
한국말이 덧붙는 말이며 여러음절말이란 특성에 비추어 ‘먹거리’는 한겨레가 예전부터 써 온 말만들기 방식으로 써 온 것이기에 마땅히 부려써야 함에도 자신들이 미리 그어 놓은 금 안에 들지 않았다는 ‘학설’로 ‘먹을거리’로 써야 옳다는 식으로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문제는 이제 새롭게 ‘한국말의 특성에 터잡은 새말 만들기’의 논의로 바로 잡아야 할 과제인 것이다.
7. ‘토박이말’에 바탕을 둔 배움책을 만들자
그러면 교육계와 학계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위에서 밝혔듯이 이제 그토록 외면했던 토박이말 가르침을 제대로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온나라에서 ‘한말글사랑’의 이름으로 ‘토박이말에 바탕을 둔 한말글 가르침’을 베푸는 일에 더욱더 뭉쳐야 할 것이다. 당장은 을유 빛찾음(광복) 예순 한 해를 맞도록 토박이말에 바탕을 두지 않고, 만들어져 가르치고 있는 ‘국어 배움책’을 더 이상 써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을 비롯해 뜻있는 분들이 앞장서 ‘토박이말’에 바탕을 둔 배움책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말글을 부려써서 배우는 배움터에서 가르치는 스승이 말로는 ‘한겨레가 훌륭한 겨레이며, 한겨레말이나 한글은 온누리에서 가장 뛰어나고 좋은 글자’ 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학생들이 배우는 책의 배움말부터 대부분 일본이나 서양 책에서 제대로 옮기거나 우리 생각을 담지 않은 말로 된 ‘모순’을 그냥 둘 수가 없다. 이제까지 이어 온 잘못을 두고서 한겨레의 앞날을 밝힐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학생이 배우는 기쁨을 제대로 맛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동안 ‘나라(국가/정부)’가 꽉 쥐고 있었던 배움책 만들기의 사정이 달라지고 있는 흐름을 놓쳐선 안 된다. 예컨대, 과학기술부의 지원을 받아 새 교과서를 만들고 있는 ‘차세대 과학교과서 연구개발 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활동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어’에서 더 이상 얽매여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와 같이 ‘국어 배움책’ 을 제대로 만들어 보자는 움직임이 있다. 이 움직임은 이미 ‘한말글(국어) 교사 모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2001년 3월에 펴 낸 ‘우리말 우리글’이란 책이 그것인데, 현재 중1-3, 고등학교(공통) 배움책이 이미 나와서 학생들이 배움터에서 배우고 익히는 실정이다.
배움책이 달라지니 ‘어렵고 딱딱했던 국어’가 ‘국어책 때문에 국어 시간이 기다려지고, 국어 시간이 즐겁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것은 바로 갈말을 비롯하여 토박이 낱말이나 월로 배움책의 알맹이를써 내려가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의 과학책 사례에서 보듯이 토박이말을 써야 할 자리에 그냥 ‘익은 버릇’을 내세워 들온말을 함부로 쓰게 되면 여전히 빗나간 틀 속에 자라나는 겨레들의 생각을 가두고, 닫히게 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배움책을 엮고자 하는 기운을 새롭게 떨쳐 일으켜야 한다. 그래서 글쓴이는 지난 2005년 9월부터 그동안 별러 온 이 일을 서울 중등학교 배움말다듬기 모임의 이름(다음 카페 말다듬기 cafe.daum.net/mal21) 으로 몇 분의 선생님과 함께 시작하였다. 바라건대, 아직은 작은 모임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자리를 꾸준히 해 나가면서 시나브로 ‘배움지기(교사, 교수)’ 들이 힘을 모으게 되고 그런 울력으로 마침내 토박이말 배움책이나 배움갈말모이(학습용어사전)를 만들고 펴 낼 수 있는 그 날이 곧 오리라 생각한다.
오늘 이 모임은 그런 뜻을 일깨우는 값진 자리라 생각한다.
도움받은 글
김두루한(2000), ‘학교 현장’을 살리는 21세기 교육 평가 방안,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김수열(2004), 국어의 뜻넓이와 유래, 자하어문논집 제19집, 상명어문학회
김석득(2000), 외솔 최 현배 학문과 사상, 연세대학교 출판부
이상태(1993), 국어교육의 길잡이, 한신문화사
최현배(1963), 나라건지는 교육, 정음사
전국국어교사모임편집부(2003), 함께여는 국어교육, 전국국어교사모임
<교과서 속의 학술용어문제 2>
도덕과 교과서 쓰임말에 대한 연구
- 고1 도덕 교과서를 중심으로 -
박영하(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1. 머리말
모든 교과서의 출판사나 집필자들은 발간 후 어느 정도 시기가 흐르면 사용자들인 교사와 학생은 물론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거친 항의에서부터 점잖은 충고나 건설적인 제안, 우호적인 격려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반응들에 직면하게 된다. 더구나 국정교과서는 그 중요성과 영향력에 비례해서 독자들의 관심이 일반 검정교과서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과서 집필자는 교과서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 가기 전에 자신이 집필을 담당한 부분에 그림이나 사진, 통계자료, 도표 등이 쓰일 경우 그것이 본문 내용과 잘 맞는지, 정확한 지를 세밀하고 신중하게 골라야 하고, 사진에 대한 설명, 맞춤법, 띄어쓰기, 내용 서술의 객관성, 용어 선택에 이르기까지 교과서 검정기준에 비추어 내용의 완성도를 최대한 높여야 할 의무가 있다.
얼마 안 있으면 새로운 도덕교과서 개발을 위한 작업도 시작해야 하는데, 이에 앞서 한 번 쯤은 과거에 도덕 교과서에 나타난 문제점과 그에 따른 수정사례들을 살펴보고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도덕 교과서 개발을 맡을 사람들은 보다 나은 도덕 교과서를 만들어서 학교현장의 도덕 교사들에게는 ‘새로운 도덕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치니까 도덕교사로서 수업할 맛이 난다’는 평가를 받고, 학생들로부터는 ‘새로운 도덕교과서 덕분에 도덕수업이 즐겁고 교과서에 읽을거리나 볼거리가 많으며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도덕교육 종사자들 모두가 다 같이 힘써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새로운 교과서 개발을 앞두고 학생들이 교과서 본문 내용에 쓰인 글들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불편을 겪는지 학생들에게 직접 설문조사를 해서 나온 결과와 수업시간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자주 뜻풀이 요구를 받는 단어들을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도덕교과서 개발 담당자들에게 작게나마 참고 자료가 되기를 바라며 썼다.
2. 몸말
가. 현행 교과서 검정 기준과 추가해야 할 것들
교과서 집필자들이 대체로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국정교과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검인정 교과서는 교육부에서 정한 검정기준을 지켜야 한다. 앞으로 교과서 검정기준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뼈대는 이어진다고 보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제 7차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검정기준(공통 및 교과 공통기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새 교육과정에 따른 도덕 교과서 개발 및 심의(검정)기준 설정을 위한 협의회 자료집』(2005.12.14), 88쪽.
을 참고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심사영역
심사관점
Ⅰ. 헌법정신과의 일치
1. 대한민국의 국가체제를 부정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이 있는가?
2. 특정 국가, 종교, 단체, 계층 등을 부당하게 선전?우대하거나,
왜곡 ? 비방한 내용이 있는가?
Ⅱ. 교육기본법
교육과정과의 일치
3. 교육 이념과 교육 목표에 위배되는 내용이 있는가?
Ⅲ. 저작권 위배 여부
4. 타인의 공표되지 아니한 저작물을 무단으로 표절
또는 공표된 저작물을 현저하게 모작한 내용이 있는가?
Ⅳ. 내용의 보편타당성
5. 학문상의 오류나 정설화 되지 아니한 저작자의 개인적인
편견이 포함되어 있는가?
계속해서 위 공통기준에 따른 교과별 심사기준 가운데, 위의 책, 89쪽.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사영역
심사관점
내용 선정 및 조직
내용의 오류나 편향적 이론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특정 인물, 성, 지역, 상품 등을 부당하게 비방?왜곡하거나
옹호?우대하는 내용은 없는가?
표현?표기
한글은 한글 맞춤법, 표준어규정, 외국어는 외래어 표기법,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각종 용어는 편수자료를 따르고 있는가?
사진, 삽화, 그래프, 인명, 지명, 각종 용어, 도표, 통계자료 등은 정확하고 특히, 도표, 통계자료는 최신의 것으로 그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있는가?
편집 및 내용 체제
사진과 삽화 등은 선명하고 내용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필자는 위에서 제시한 교과공통 및 교과별 심사기준이 앞으로도 계속 유효하리라고 본다. 여기에 덧붙여서 필요한 사항을 추가하라고 한다면 필자는 ‘내용 선정 및 조직’ 항목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더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 중 하나는 ‘본문 내용 및 각종 사진, 삽화, 도표 등의 설명을 위한 용어들이 학습자의 발달 수준에 알맞은가?’이고, 다른 하나는 ‘교과서에 실릴 사진에 나오는 인물이나 단체로부터 하락을 받았는가?’이다. 이 두 가지를 굳이 보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해 보고자 한다.
나. 교과서 쓰임말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생각들
1) 왜 ‘용어’를 문제 삼는가?
누구나 한두 번쯤은 중?고등학교 때나 대학 생활을 보내면서 어떤 책을 읽다가 분명히 우리말로 써져 있긴 한데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거나, 혹은 잘 이해가 안가는 곳이 있어서 답답해하고 어려움을 겪은 일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외국 문학책이나 사회과학 책들을 읽으면서 그런 경험들을 했을 것이다. 필자는 고교생 시절에 영어 문법용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우습고 짜증나는 일이지만 어학 공부를 하는데 듣고, 말하고, 쓰는 것 보다는 가주어(假主語), 진주어(眞主語)가 어떻고, ‘관계대명사(關係代名詞)’가 어떻고, 부사적 용법의 원인, 결과, 목적이 어떻고, 형용사적 용법, 명사적 용법이 어떻고를 교사가 설명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영어에 흥미를 잃고 포기해야 했던가! 정말 통탄하고 분노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지리교과서에 나오는 어려운 말들 모두가 한자어인데 감입곡류(嵌入曲流), 감조하천(感潮河川), 결절점(結節點), ‘경동지형(傾動地形’, 경종조직(耕種組織), ‘사빈(沙濱)’,‘사취(砂嘴)’, 이심현상(離心現象), ‘해안단구(海岸段丘)’, ‘해식애(海蝕崖)’ 등등 정말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는 어려운 말들이 너무도 많다.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는데, 지금도 그것은 고쳐지지 않은 채 후배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되고 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쳐질 기미가 안 보이는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강의교재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학가에서 많이 읽히던 각종 사회과학 서적이나 철학서적 들을 접하면서 난생 처음 듣는 말들이나 전문용어들 때문에 꽤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따로 들여서 간신히 책의 내용을 이해한 적이 있다. 당시 대학생들이 읽은 수많은 사회과학 책이나 철학책들은 대부분 일본책들을 번역한 것이 많았는데, 번역한 용어들 가운데는 난생 처음 접한 것들이 많아 답답함을 넘어서 짜증이 날 때도 있었고, 심지어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나 출판사를 몹시 원망한 적도 있다. 물론 나중에는 사회과학 사전이나 철학사전을 사서 모르는 말들을 찾아가면서 책을 읽기도 했는데, 사전에 나오는 말들 역시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 때 사회과학 책이나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필자는 ‘사람들이 왜 좀 더 쉽게 책을 쓰지 못할까? 그냥 책을 읽는 사람에게 다정하게 말하듯이 또는 쉽게 이야기 하듯이 글을 쓸 수는 없을까?’ 하는 원망 섞인 의문도 가져 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이 오덕 선생님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울면서 하는 숙제’를 읽으면서 교생실습을 마쳤고,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우리말과 글을 살려 쓰고 바르게 쓰는데 앞장서고 계신 이오덕선생님을 모시고 ‘우리말 속 일본어 찌꺼기’라는 주제로 내 모임 사람들과 공부도 하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때 그 강연에서 이오덕 선생이 말씀하신 것을 돌이켜 정리해 보면, 좀 더 배웠다 하는 교수나 학자들이 좀 덜 배운 사람들에게 권위 있게 보이려고 하거나 잘난 척 하느라고 어려운 한자나 한자말(그것도 일본식)을 즐겨 쓰고, 우리말에서는 잘 쓰지도 않는 이른바 수동태형 번역 투의 말들과 새로 만든 말을 함부로 그리고 너무 많이 써서 그 밑에서 배운 제자나 학생들이 또 학교 선생도 되고, 교수도 되고 대를 잇다 보니 점점 우리말과 글을 잘못 쓰게 돼버렸다는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보통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기 힘든 법률 용어들, 그리고 더욱 더 알기 힘든 의학용어들, 신문에 기자들이 쓰는 새로 만든 말들, 그 밖에 번역된 외국책들을 살펴보면 이런 문제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우리 사회에 두루 퍼져 있으며 도덕?윤리교과서라고 결코 예외는 아니다.
필자가 수업 시간에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을 할 때마다 겪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학생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말들을 너무 어려워하고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다. 도덕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집중시키려고 학생들에게 정해진 만큼 교과서를 읽게 한 교과서 내용과 관련하여 무엇이든 물어 보라고 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질문이 바로 잘 모르는 낱말풀이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필자가 쉽게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소비하는 시간과 아이들이 겪는 불편은 이만 저만 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2) 교과서 쓰임말 문제에 대한 앞선 연구 사례
필자가 조사해 본 결과 도덕 교과서에 쓰인 말이나 문장들이 지닌 문제점에 대하여 제대로 연구한 학술논문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교육관련 잡지 가운데 주로 교과서 문제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는 ‘한국교과서연구재단’에서 발행하는 『교과서 연구』인데, 1988년 12월에 제 1호를 창간한 이 잡지는 2005년 12월까지 제 46호를 발행하는 동안 우리나라 교과서와 관련된 수많은 전문가들의 다양한 생각과 고민들을 꾸준히 담아 왔다. 이 잡지의 목차를 자세히 살펴 본 결과, 교과서에 쓰인 용어나 문장들이 지닌 문제점에 대하여 집중 탐구한 글은 다음 5가지 정도이다.
* 91년 12월호(제 11호)에 김정섭이 쓴 “국어 교과서 문장 연구 - 중학교 국어 1-2 교과서 분석”,
* 94년 12월호(20호)에 신영섭이 쓴 “한국 근·현대사 관련 역사 용어의 이해”,
* 99년 6월호(32호)에 실린 “교과서 띄어쓰기 용례 조사 연구”,
* 2001년 6월호(36호)에 최용기가 쓴 “교과서 문장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 2001년 12월호(37호)에 전광진이 쓴 “교과서의 '표현, 표기'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가 혹시나 하고 몇 번이고 살펴보았지만 도덕교과서 내용서술시 용어문제와 관련된 글은 한 편도 없었다. 도덕? 윤리 교과교육과 관련하여 가장 심도 있고, 다양한 논문을 수록해 온 학술지인 ‘도덕윤리과교육’ 제1호부터 21호까지를 모두 살펴본 결과 여기에도 교과서에 쓰인 말에 대하여 문제점을 다룬 논문은 없었다. 혹시나 하고 인터넷 학술연구정보 검색사이트 http://www.riss4u.net
에 접속하여 도덕?윤리교과서에 쓰인 용어의 문제점에 관한 앞선 연구 사례가 있는지도 살펴보았더니 여기에도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국회 도서관의 전자도서관에 수록된 자료 중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배달말교육학회 기관지 <배달말교육> 23호에서 최훈영(한의사)씨가 "초등, 중등 '도덕 교과서 2002년' 바로잡기" 단행본 1권 분량인 총 230쪽에 걸쳐, 초등학교 1~6학년과 중학생들이 사용하는 <도덕> 교과서를 분석했다.
라는 글에서 제 7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중학교 도덕교과서에 나타난 잘못된 어법과 호칭들을 예를 들어가며 지적해 놓은 글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어법은 물론, 호칭도 맞지 않고, 틀린 말도 한 두 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교육인적자원부 발행 <도덕> 교과서가 '패륜서'로 되어 있기에 아들딸과 손자손녀를 학교에 보내기가 무섭다는 말까지 해놓았다. 그는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간판을 걸듯이, '효도언어'와 '가정언어'를 보존하자는 사람들이 모여서 간판을 걸어야 할 판”이라고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 하나 있었다. 이 연구는 순수하게 한글 어법상의 오류와 호칭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결국 교과서를 읽고 공부하야 할 학생의 입장에서 교과서 용어 문제에 대해 접근한 논문이나 글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왜 그럴까? 교과서가 흠 잡을 데 없이 잘 써졌기 때문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더 나은 도덕 교과서를 만들고자하는 현장 교사들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관심부족이거나 해당 교과서 집필, 연구, 심의, 발행 책임자들이 교과서 사용자들인 학생과 교사의 입장에서 좀 더 세밀하고 밀도 있는 집필상의 배려 그리고 교과서 발간 후 독자들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면서 수시로 수정 보완하려는 노력 즉, 교과서 추수 연구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3) 교과서에 나오는 말들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
필자는 지난 2005년 12월 말에 1년간의 고1 도덕 수업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누어 주고 교과서에 나오는 용어의 문제점은 물론이고 도덕교과서와 관련하여 자유롭게 학생 자신들의 생각이나 건의사항을 적어 보게 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낀 단어들과 여러 가지 건의사항들을 적어 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학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 거의 원문 그대로 옮겼다.
① ‘어려운 한자어’ 문제를 지적한 사례들
* 교과서에 나오는 명언들 가운데 한문이 많이 섞여 있어서 이해 할 수 없다.
* 생소한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 데 그것마저도 한자어로 표현한다면 더 이해가 안갑니다. 한자를 알기 쉽게 풀이해 주셨으면 합니다.
* 한자나 영어로 된 말들이 너무 많아요. 단어 뜻도 너무 어려워요.
* 어려운 말이나 사자성어는 옆에 자세한 설명을 보충해 주었으면 합니다.
* 한문을 쓸 때 음만 알려주지 말고 뜻도 써 주어서 이해가 쉽게 하고, 어려운 단어나
혁명 등 잘 알지 못하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②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말로 써달라는 요구들
* 도덕 교과서에 있는 몇몇 어려운 말들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지고 이해 속도가 느려집니다. 어려운 말들을 조금 더 쉬운 단어들로 고치거나, 어려운 단어들에 각주를 달아 설명 을 써놓는 방식으로 교과서를 고쳐서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시가 좀 더 많아져서 우리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전문적 용어 보다는 쉬운 말로 설명되어 있으면 좋겠다.
* 통일에 관한 단원 중에 북한에서 사용하는 단어나 문화 등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설명을 붙여줬으면 좋겠다.
* 너무 전문적인 단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 본 쉬운 말로 써 주세요.
* 낱말 풀이를 보면 그 낱말을 더 어렵게 풀이해 놓은 것 같아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어려운 말을 풀어 쓰면 좋겠다. 단어의 풀이까지 어려운 경우가 있다.)
* 어려운 말들이 많은데 옆에 참고 글이 모자라다.
* 교과서 내용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교과서 옆에 빈 공간에 지금보다 많이 짧 게나마 뜻풀이를 해 놓으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고 다양한 글과 그림 자료를 첨부해 주세요.
* 선생님과 수업을 할 때 잘 모르는 단어들을 학생들이 물어보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러하다는 것은 교과서에 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많다는 이야기 같아요. 그렇다고 쉬운 말로만 바꾸어 놓는 것은 학생들이 어려운 단어를 많이 모르게 되는 결과가 될 것 같구요. 그래서 옆에 어려운 단어에 대한 해석을 좀 더 해 놓으면 합니다.
* 76쪽의 사회 계약론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짧게 설명하기 위해 내용을 압축시켜 풀이를 해 놓았는데 조금 더 자세하게 풀이하거나 이해하기 쉽게 서술이 되었다면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이 많고 어려운 단어의 해석도 함께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책 마지막 페이지에 보면 '찾아보기'라는 페이지가 있는데 ㄱ-ㅎ 까지 어려운 단어들과 중요한 단어들을 적어 놓았는데 그것도 체계적으로 답(*뜻풀이를 말하는 것이다)을 달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각각 페이지에는 주석처럼 번호를 달아두고 학생들은 매시간 찾아보면서 그 뜻을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찾아보기'에 뜻을 달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위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학생들이 응답한 글들을 종합해 보면 ‘교과서 내용을 학생들의 어휘수준에 맞게 되도록 쉬운 말로 써 주면 좋겠고, 굳이 한자어나 어려운 단어를 쓰려면 책 날개부분이나 색인 부분에 알기 쉽게 뜻풀이를 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교과서 집필진이나 심의진에서 학생들의 어휘수준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교과서를 쓰지는 않으리라고 보지만, 뒤에서 소개되는 학생들의 설문응답 자료를 보면 아마 집필자나 출판사에서 반성을 많이 하게 되리라고 본다. 여기서 소개될 말들이 교수나 교사들은 그냥 편하게들 쓰는 말이지만, 학생들은 어려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국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재미없어하게 만들고, 과목 자체를 멀리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교과서 개발과정에서 학생들도 함께 참여하는 사진 및 본문 검토 작업을 과감하게 그리고 반드시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교과서로 배워야 할 학생들은 제외하고 어른들끼리만 교과서를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교과서도 하나의 상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상품이 주요 고객인 학생들에게 물어보거나 보여주지도 않고 그냥 만들기만 하면 학생들이 과연 사 주기나 하겠는가? 물론 교과서를 선정하는 것은 해당학교의 도덕?윤리 교사들이지만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요구도 이제는 만만치 않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데, 이 문제를 아주 현실적인 차원에서 검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③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말들
이제 교과서 본문으로 쓰이는 말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005년 12월 필자가 가르치는 고교 1학년 학생 350명을 상대로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말들 가운데 잘 이해가 안가는 단어를 적어 내도록 했더니 다음과 같은 응답들이 나왔다. 예상대로 한자어로 된 낱말들이 대부분이었고 이 중의 상당수 낱말들은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이 자주 그 뜻을 묻는 것들이다.
쪽수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단어
쪽수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단어
쪽수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단어
13
초국적
49
광의, 환상적 유토피아
107
지정학적
15
결사체, 프로슈머
51
필연적
111
반탁, 찬탁, 고착화
16
상충, 모색, 견해
52
장(場), 편승, 비인간화, 반사회적, 해악
113
야기된
19
심정적, 타산성
55
관점
117
호전적
20
방관
57
기성문화의 아류(亞流), 여타
123
미풍
22
탐닉
62
고사, 파산
124
이질화, 고착화
23
심미적
65
막대
125
인도주의적
24
빌미
70
애경사, 농자천하지대본
128
공론화
29
피혁공장
71
삼(대마), 두레, 상부상조
129
숙원, 역량
30
침탈
72
변모, 호미씻이
131
자생력
31
기인
74
호생의 덕
135
상충하는 요충지
32
모색, 천명
76
이상적
136
실리외교, 우방국
33
생육권
81
동서고금, 가치전도,
집단이기주의, 지역감정
138
현격, 중도
35
겸허함
82
미명
139
참모부
38
객체
83
맹금
140
실체불인정, 실지회복
39
자아정체성
86
대동사회
141
공석, 당위론적
42
부유(浮遊)
88
권익
144
복리
43
번민
89
유기체
145
현격
44
유예
92
자조
146
강령
45
이데올로기
95
주변화(周邊化)
152
초석
46
괴리
96
여망
153
이데올로기
47
파생
105
이념경쟁
154
대외적, 역량
48
공동체
106
망향
156
불식
쪽수
수업시간에
질문이 잦은 단어
쪽수
수업시간에
질문이 잦은 단어
8
질주(疾走), 신소재
49
유토피아, 매매, 광의
10
무형의 생산물
50
소외, 가속화
11
익명(匿名),
51
보편화, 필연적, 진전,
연대의식, 자행
13
초국적 기업
52
불특정 다수
14
자족적(自足的),이질적
53
편승, 장(場), 방치된
15
엘리트
54
유포, 강령
16
상충
55
경시
17
만끽
56
희한한
18
도구적 이성, 심미성
유전적 정체성
57
아류(亞流)
19
심정적(心情的)인 연대,
이성적인 타산성
58
유예, 행유
20
결속, 방관
60
문화 편식 현상
21
몰입, 선사(禪師)
62
문화식민(종속)주의
22
탐닉, 문란
64
침해
24
빌미
65
창출, 유기적인 협력체제
25
관행, 현저
66
자정능력,
27
항간
67
범순인, 절도, 아노미
28
고갈, 불가피, 안주,
금기어(禁忌語)
68
일체감
29
청정어류, 피혁, 지천
70
상사(喪事),애경사(哀慶事)
농자천하지대본
30
호소, 침탈
71
삼(대마),회소(會蘇)
31
초래,수량화,기인,막중
72
변모,호미씻이,제의(祭儀)
32
모색, 자정작용(自淨作用)
73
향약 4대 덕목
33
생육권
74
호생(好生)의 덕(德),
공동선(公同善)
34
재고, 감내
76
체계화, 저해
35
시사점, 겸허함
78
만연
36
보살
79
배타적, 족벌, 지연, ‘제2의 건국운동’
37
정체성
80
국면, 결속력
38
유한, 객체, 심대한
81
와해, 동서고금, 막론, 우위, 고양, 망각, 명산대천
39
촉진
82
타파, 상호 유기적 관련성,
40
물리적(육체적) 신원
83
맹금(猛禽)
41
부유하는 정체성, 혼미
84
냉담
43
내적 충동의 양적? 질적 변화, 번민, 증폭
86
양도
46
괴리, 오?남용, 획기적
87
천수
47
잉여, 파생, 성동(成童), 관례(冠禮)
89
유기체
48
해체, 부재, 초래
90
양립, 최소 수혜자
쪽수
수업시간에
질문이 잦은 단어
쪽수
수업시간에
질문이 잦은 단어
91
열악, 사회적 자산
144
타개, 돌연한
92
자조, 진취적, 기풍, 구현
145
영도, 종지부, 전쟁 감행
93
여지
147
배비(配備)
95
종국, 주변화, 유사성
148
블록 불가담, 언급, 의구심, 입증
96
망나니
150
대승적 차원, 비전향 장기수
97
파당정치, 궐기
152
진전, 초석, 천경지위(天經地緯),입경(入境)
104
유혈(流血)
153
위상
105
이념경쟁, 양극체제, 폐해
154
부응
106
망향의 한, 막대한 민족 역량
155
다각적, 경각심
107
훼손, 왜곡, 지정학적, 요충지, 상충
잠정적 조치, 보류, 부여, 신탁통치
156
신뢰구축, 오해를 불식, 방안을 강구
108
표명, 응집력
157
비축, 위계질서
109
연합 전선
158
핫라인
110
당파, 계급, 대내외적
159
인간적 품위와 격조, 값진 미래로 승화
111
고착화, 반탁, 찬탁, 결렬,
160
역량을 배양
112
상정, 일환으로
163
응전, 공고하게, 문명사관
113
발발, 야기
164
파란만장한, 기구한
114
상호, 개칭, 대체
166
약육강식
116
선동
167
이식
117
호전적, 결집
168
기개, 황천
118
유입
169
연결망의 구축
119
선호, 입각한, 개편, 추세
170
구심점, 포괄적, 포착
123
천리마 운동, 청산리 방법, 속도전
171
절규, 세계화의 맥락
124
상호 적대적 대립관계
172
합의 도출
125
난관, 인도주의적 차원
174
모순과 폐단
126
자긍심
175
보편적 가치, 포용
127
공영
179
자본주의 생리, 이념적 좌표
128
주안점, 우려, 난무
180
기백
129
공론의 장(場), 숙원, 후유증
181
권위주의적 요소
130
모색, 절충
182
물질적 토대
131
자생력,
183
지상 명령, 답습, 체념적 통일관,
135
도발
184
우루과이 라운드. 반덤핑관세
136
우방, 실리외교, 서방 기자
186
전시 작전권 ? 통제권 인수
137
독주, 체제 경쟁
187
가교 역할
139
참모부
188
간과, 분쟁의 화약고
140
실체불인정, 실지회복, 무력 도발 불용, 천명
189
상반된 이데올로기
141
당위론적 문제, 민족상잔, 전복
193
독실, 군자,
142
경직된, 쌍방
195
시해, 불충무도, 역신, 영걸
143
채택
200
백일천하
위에서 제시한 낱말이나 문장을 학생들이 읽기 쉽게 잘 고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교과서에 나온 말들을 잘 이해 못하는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은 명백한 의무가 아닐까? 필자는 이 문제만큼은 최대한 학생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해결의 가닥이 잡힐 것이라고 본다. 앞에서도 주장한 바와 같이 교과서를 만들 때, 학생들에게도 좀 보여주고 반응을 보아가면서 교과서를 완성해가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국단위로 표본 집단을 선정하여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나눠준 뒤 본문 내용을 읽어 보게 하고 혹시 어려운 말이나 문장이 나오면 표시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표시한 부분이 다른 학생들과도 여러 번 중복된 것은 집필자가 나중에 이를 좀 더 쉬운 말로 잘 고치면 되는 것이다. 전국을 단위로 할 경우에 번거로움과 대외적인 문제가 있다면 집필자들이 개발자들과 지인들을 통해서라도 학생들을 상대로 한 검토 작업을 꼭 거치자는 것이다.
④ 그 밖의 다양한 건의 사항들 여기에 소개되는 건의 사항들 역시 필자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인 미담나라에 도덕교과목 성취도가 상위 5% 이내인 학생들이 올린 것들이다. 필자의 인터넷 카페 주소는 http://cafe.daum.net/midamnara 이다.
교과서의 사진과 사진에 대한 설명, 용어문제 이외에도 학생들은 교과서 전반에 걸쳐 다양한 문재를 제기해 주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보는 눈들은 예리했고, 그 동안 교과서를 대하면서 불만도 많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여기에 그 불만과 요구사항들을 그대로 옮겨 본다.
* 한자어와 우리가 모르는 어려운 용어들이 많아서 글 자체가 딱딱하고 지루한 느낌을 준다. 또 어떤 상황의 예를 들어놓은 것이 예가 아니라 더 복잡하고 이해가 안가는 부분들이 많다. 한마디로 ......책이 너무 심심하다.
* 그리고 처음 교과서를 펴볼 때가 생각납니다. 잘잘한 글씨가 빽빽이 채워진 교과서를 보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왠지 모르게 교과서가 글씨로만 꽉 차있는 느낌입니다. 관련된 글이나 노래를 좀 더 채운다면 이런 느낌이 덜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청소년의 문화에 대한 내용에서는 글쓴이의 너무 주관적인 내용이 들어간 것 같아서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96쪽에 이하응(흥선군) 이라는 인물이 앞에서 설명한 공동체라든지 도덕 교과서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내용이 국사 교과서에나 다루어질 것 같은 내용이어서 약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 3단원에서 공동체에 관한 주제로 배우는데 인물학습에 공동체라는 주제와 별 관련이 없는 이하응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 교과서 80쪽의 '인간을 가장 유혹하기 쉬운 말들'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객관적인 사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내용인 것 같고, 굳지 강조하지 않아도 될 부분 같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주관적인 것을 굳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빼어 삽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청소년 문화를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보고 교과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교과서에 나온 사진을 보면 충분히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사진이고, 청소년 문화가 다 저항의 문화이고, 비행문화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지금 시대에 발맞추어 이 교과서를 배우는 청소년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과 사진을 넣는다면 학생들이 이 교과서를 보고 느끼는 부분이 더 많아 질 수 있을 겁입니다. 마지막으로 청소년 문화를 더 가꾸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부분을 삽입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청소년들이 문화를 가꾸기 위해 찾을 수 있는 공공장소를 삽입하여 청소년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준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 또한, 도덕은 우리나라의 국사나 국어 사회와 같은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정말 그중에서 보람을 느끼고, 공감을 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늘 자랑스러운 것은 책 처음 페이지에 태극기가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 교과서 76쪽에 보면 "사회계약론" 이라는 말이 있는데 옆에 부가 설명이 되어 있지만 딱딱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어 이해하기 어렵고, 81쪽에 "아노미현상"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109쪽에 ‘분단의 고착화 과정’이라고 소단원으로 되어있는데 단원의 내용을 읽어보면 "고착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히 설명이 되어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148쪽에는 ‘북한의 연방제’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연방제 또한 잘 이해가 가지 않고, 45쪽과 187쪽에 있는 "이데올로기"란 단어도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 도덕 교과서 중에 통일에 관련된 단원은 다른 단원보다 이해가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분단과정을 쭉 설명해 놓아서 지루함이 느껴지고
이해하기가 더 힘듭니다. 물론 사건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겠지만 역사를 말로 쭉 열거하기 보다는 보기에도 편하게 그림이나 삽화를 더 추가하거나 작은 표로 요약해두었으면 합니다.
* 44쪽이나 71쪽 등과 같이 "동서양 고전탐구" 라고 해서 옛날 고전들을 소개해 놓았는데 설명이 어렵게 되어있어 흥미가 떨어지고 "함께하기" 등과 같이 함께 생각해 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부분이 더욱 보충되었으면 합니다.
* 단원 앞부분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그 단원을 요약하거나 내용을 담고 있는 예화 등을
앞부분에 소개해두면 그 단원 전체를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 같고 옛날 고전이나 어려운 책들의 내용을 소개하기 보다는 예화를 곁들인 "함께하기" 코너가 더 들어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통일 쪽 단원에서는 그냥 역사를 쭉 나열하는 방식보다는 남한과 북한의 공통점과 차이점등을 소개하여 통일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인물학습에 나오는 위인들도 우리가 흔히 아는 위인보다는 잘 알지 못하는 위인이나 근대에 들어와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나 위인을 소개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 도덕 교과서인 만큼 실질적으로 우리 학생들이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내용이 많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더 쉬운 내용으로 친구들과 토론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도덕 교과서 내용에 대한 예화, 사례들을 많이 첨부했으면 좋겠습니다.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 같은 경우는 만화로 만들어 교과서를 더 재밌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내용에 비해 그림 표현이 부적절하고 자세하지가 않아 참 아쉬워요. 그리고 교과서를 보며 이해를 해야 하는데 말들이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네요. 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고 다양한 글과 그림 자료를 첨부해 주세요 ^^
3. 마무리말
교과서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다. ‘교사와 학생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교수?학습자료’라는 생각에서부터 ‘가르치고 배우는 데 필요한 여러 참고자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비록 교과서가 한 해 쓰고 폐휴지로 버려지는 신세라 할지라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학교 수업시간에서 만큼은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그래서 교과서는 교사가 가르치기 쉽고 학생이 배우기 쉽도록 알차고 유익한 내용을 담아야 하고 특히 그 내용을 채워나가는 말과 글이 학생들 수준을 충분히 배려한 것이어야 한다.
앞에서 필자는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말과 글이 학생들이 읽고 이해하기에 어렵다는 것과 학생들이 교과서 만드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들을 밝혔다. 설문조사로 얻은 응답들 가운데 어려운 말들을 알기 쉽고 문장 흐름에 걸 맞는 말들로 바꾸는 일들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넘기고자 한다.
우리 도덕 교과서를 접한 학생들의 반응 가운데는 ‘어렵고 재미없다’는 반응이 참 많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우리 도덕 교과서에 유달리 한자어가 많이 들어가 있고 문장도 딱딱하여 학생들이 혼자 읽으면서 뜻을 이해하고 공부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필자에게 그 해답을 말해보라고 하면 ‘교과서를 학생들 수준에 맞게 쉬운 말로 쓰되, 내용도 실제 살아가는 데 도움 되는 것들로 피부에 와 닿게 그리고 재미있는 글들로 채워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좋은 책은 버리기 아까울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다시 꺼내 보고 싶은 법이다. 이제 우리 교과서도 그렇게 만들어 가면 좋겠다.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서 교과서 만들기에 힘쓴다면 이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다. 앞으로 교과서를 만드는 일을 할 사람들은 제발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가슴에 한 가득씩 담고 정말 좋은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주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교과서가 나오기 전에 학생들이 꼭 미리 보고 자유롭게 느낌을 말 할 수 있도록 정중하게 그들을 초대하자. 그래서 ‘와! 이 책 정말 디자인 멋지고, 내용도 알차고 이해하기 쉽게 잘 만들었네요! 이정도면 합격이에요!’ 할 때 그 때 교과서를 세상에 나오게 하자. 아이들이 외면하는 교과서, 만들면 어디다 써먹나?
<교과서 속의 학술용어문제 3>
수학교육의 글쓰기
박영훈(나온교육연구소)
1. 번역의 문제점
1) 교과서 용어
2) 수학교육학 용어
2. 글쓰기의 문제점
1) 교과서 문장
2) 수학교육학의 논문
3. 수학 교과서에 나타난 북한 용어와의 비교
<번역을 둘러싼 문제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1>
그리스 신들 이야기로 본 뒤침말 옮기기
유재원(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과)
※ 아직 발표원고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번역을 둘러싼 문제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2>
영어 공용어 논쟁과 영어 교육
한학성(경희대/영어학부)
I. 영어 공용어 논쟁과 관련한 질문들
1. 공용어 개념 자체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벌이는 찬반 논쟁이 의미 있는지?
(복수 공용어 vs 단수 공용어?)
a. 다언어 국가에서의 공용어 개념 (예: 스위스, 벨기에, 캐나다 등)
b. 국제 기구에서의 공용어 개념
c. 미국에서는 영어가 공용어?
2. 실현 가능한 상태에서의 찬반 논쟁인지?
3. 영어를 공용어화하면 모든 한국인이 영어를 다 잘하게 되는지?
4. 영어를 모든 한국인이 다 잘할 필요가 있는지?
(영어 교사들의 영어 능력에 무관심한 이유는?)
5. 영어 공용어 논쟁에 영어영문학과나 영어교육과 교수의 참여가 저조한 이유는
무엇인지?
II. 영어 공용어 논쟁의 실체
1. 본말이 전도된 논쟁
2. 영어 교육 개혁론의 일그러진 형태
3. 영어 전문가 인책론 및 교체론
III. 우리 사회 영어 문제의 본질
1. 우리끼리의 문제이다
2. 권력의 문제, 정치의 문제이다
3. 결국은 교육의 문제이다
IV. 영어교육계의 문제
1. 교육 과정, 현장 교육, 그리고 평가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성취 기준
고등학교 3학년 성취 기준
듣기
(4) 간단한 토론을 듣고, 중심 내용을 이해한다.
(1) 관심 있는 주제의 강연, 연설 및 방송을 듣고 대체로 이해한다.
말하기
(1) 일반적인 주제에 관해 비교적 정확하고 막힘없이 대화한다.
(3) 다양한 내용의 말을 듣거나 글을 읽고, 화자나 글쓴이의 의도와 목적을 요약하여 말한다.
(4)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말을 듣거나 글을 읽고, 자기의 주장을 말하고 그 근거를 밝힌다.
읽기
(6) [심화 과정] 내용이나 인쇄상의 오류 등을 수정하면서 글을 읽는다.
(3) 다양한 주제에 관한 글을 읽고 비평한다.
쓰기
(1) 일반적인 주제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면서 쓴다.
(1)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조리있게 쓴다.
(6) 제한된 시간 내에 특정 주제에 대한 글을 조리있게 쓴다.
Q1: 수업 시간 중 위의 성취 기준과 관련된 연습을 하는가?
Q2: 시험에 위의 성취 기준 도달 여부를 평가하는 문제가 나오는가?
2. 영어 “사용”이 없는 영어 교육
Q1: 영어 교사가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Q2: 영문과나 영어교육과 교수가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3. 영어 권력의 사적 네트워크화
Q: 영어 교육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
V. 영어학계의 문제
1. 영어학계에 영어가 없다
2.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다(영어진행수업?)
3. 분석만 있고 종합은 없다
VI. 해결 방안의 모색
1.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질문 1: 영어 교사들 자신은 충분한 영어 구사력을 갖추고 있는가?
질문 2: 영어 교사들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연마시켜야 하는 것이 영어 구사력
인가?
[진단]
① 영어 교사들의 영어 구사력이 불충분한 원인에 대한 진단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과 과정 및 교육 방법의 문제
*영어 교사의 영어 구사력에 대한 규정이 없음
② 학교 수업을 통해 영어 구사력이 연마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진단
*시험 방식의 문제 (고르기 시험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평가되지 않음)
Q: 대입 수능 영어 시험의 문제 (듣기 시험의 문제: 질문이 한글로 먼저 제시됨)
[처방]
① 영어 교사들의 영어 구사력이 불충분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처방
*현직 교사 중 옥석을 가려야 한다 (연수보다는 시험이 필요하다/ 퇴출 기준을
만들 어야 한다/ 우수 교사 인증제를 시행해야 한다)
*사범대 영어교육과 운영을 개선해야 한다 (교수들의 강의 및 시험 방식부터 변해
야 한다/ 교과 과정을 뜯어 고쳐야 한다/ 졸업에 필요한 영어 구사력에 대
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cf. 네덜란드(C1?) 및 덴마크/ 전국의 국립 사범
대를 통합 운영해야 한다)
② 학교 수업을 통해 영어 구사력을 연마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처방
*시험과 관련해 필요한 조처들 (말로서의 영어를 시험에 비중있게 도입해야 한다/
시험에서 우리 말 사용을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 선택형 문제 일변도에서
탈피해 영어로 답하게 해야 한다/ 수능 시험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 외 필요한 조처들 (영어 사용의 극대화, 한국어 사용의 최소화 원칙 확립/
교과서 체제 개편―말 교과서, 글 교과서로 2원화/ 시수 문제 고려―초기 집중
교육 실시/ 영어 교육과 관련한 역할 모델 수립/ 부당한 영어 권력 집단 축출)
2. 국가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
①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어 인력 수급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인도: 2%, 한국 10% 정책?
*제주도를 시범 지역으로? (cf. 한국 유일의 2중 언어 사용 전통)
② 사회 전체가 영어 전문가 양성에 호의적이 되도록 잘 조율해야 한다
*학부모와 언론: 영어 교사 양성 방법 혁신 촉구
*교육부: 사대 영어교육과 교수들에게 강력한 권고 (부실 교사 양성 기관 폐지)
*영어 방송 활용 (더빙의 문제점, cf. 네덜란드 및 덴마크 등)
*영문과 및 영어교육과에서의 영어 상용화
*외무고시 영어 시험 방식 개선
③ 우선 순위에 따른 장단기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단기] 수능 영어 시험 방식 개선/ 현직 영어 교사들의 영어 구사력 검정/ 사대
영어교육과 운영 방식 개선
[중기] 중등 영어 수업 및 시험 방식 개선/ 부적격 교사 퇴출 및 우수 교사우대/
영어 교육 분야 내 학연, 지연 타파/ 영어 교육과 관련한 역할 모델 수립
[장기] 10% 정책 시범 실시/ 외국어 전문가 양성 방법 혁신
④ 북한의 영어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통일 이후 대비)
<번역을 둘러싼 문제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3>
번역 문화의 전통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김영환(한글철학 연구소)
1. 늦둥이 한글-우리 문화의 근원적 제약
한국 번역사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 곳에는 우리 역사의 빛과 그림자가 그대로 드러날 것 같다. 한글이 나오기 이전의 이두로 된 번역, 이를테면 <<대명률직해>>(1395) 같은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한문보다도 더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글이 나온 뒤의 번역은 그 이전의 번역과 상황이 크게 다르다. 서구 문물이 들어와 한글에 눈 뜬 이후에 또 한번 크게 달라진다.
이런 사실은 번역의 전통은 그 번역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 또는 매체로서 글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번역 문화의 전통은 쉽고 대중적인 글자가 있느냐, 그 글자를 어떻게 평가하고 활용하느냐에 크게 좌우되는데, 이 두 문제에 관하여 우리 역사는 크게 제약한 특수성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한글이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이 한글을 지성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학적이고 쉬운 한글을 예찬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낱소리 글자(알파벳)로서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글은 세계 글자 역사상 매우 늦게 세상에 나왔다. 만주어 문자가 17세기에 나오기는 하지만 몽골 문자의 모방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 한자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학문하기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고 한자로 된 중국 고전 읽기였다.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에 편입되어 있던 당시 지식인에게 중국과 다른 글자를 갖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몽골, 거란, 여진에서는 중국과 다른 고유 글자는 새 왕조가 개창될 때마다 나온 것이었다.(일본은 예외가 되는 것 같다) 최만리가 사대에 어긋난다며 반대 상소를 올린 것도 이런 사실을 알고 한 것이다.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전통은 매우 가난하다. 언문 즉 일상의 말을 적는 글자란 생각은 학문하는 말과 대조한 데서 나온 표현이다. 아마도 중세 유럽에서 글말인 라틴말과 ‘vernacular, vulgar’를 대조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다. 늦둥이 한글은 오랜 통념에 따르면 학문이나 교육에 쓸모없는 것이었다. 라틴말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 커다란 저항을 만난 것처럼 한글로 쓰고 읽는 데 지식인들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고 이에 저항하였다. 언문은 “학문에 손해되는 글자”였다.
“서리가 언문만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다면 후진이 모두 이와 같을 것이니 어찌 애를 써서 생각하고 힘써 성리학을 연구하겠습니까?”(최 만리의 상소문)
인류 문명사에서 글자를 갖게 된 것은 사건이다. 글자를 가짐으로써 기록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역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의 수단을 가진 사람은 처음에는 몇몇 특권 계급의 사람들이었으나 이 글자가 점차 발전하여 대중화되었다. 또 이 글자는 민족을 뛰어넘어 여러 민족의 말을 적을 수 있게 적절하게 변형되기도 했다. 유럽을 기준으로 본다면 낱소리 글자는 추상적이고 무의미한 부호로서 말을 적는 수단으로서 여러 나라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굳이 국적을 따질 수도 없이 국제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한자는 탈바꿈하여 소리 글자로 발전하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글자 수가 불어나 대중이 배우기에는 큰 짐이 되었다. 또 고립어인 중국어를 기초로 만들어진 글자이기에 어순도 다르고 교착어인 우리말을 적는 데는 매우 불편하였다. 15세기까지 극소수의 지배층을 빼면 우리의 삶과 문화를 기록할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를 뼈저리게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역사 기록의 가난하다 보니 문화나 전통이란 기억하는 사람도 적고 그냥 보발 것 없다고 여기게 된 게 아닐까. 글자를 너무 늦게 갖다 보니 우리의 옛날 모습을 전하는 기록을 많은 부분 딴나라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기록들은 중화주의나 일본 중심으로 왜곡된 자료이다. 옛날로 올라갈수록 중국이나 일본에 기대야 한다. 역사를 기록할 매체(글자)의 불편함 또는 결여는 역사 그 자체의 가난함이나 그 열등감으로 연결된다. 중국의 사서에서 우리는 동이족으로 묘사된다. 이런 편견은 중국 고전에 수천 년 동안이나 되풀이되는 우리 겨레에 대한 편견이다. 우리 겨레의 옛날 모습을 그냥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이미 지배와 통제라는 관심이 들어 있다. 다른 겨레를 오랑캐라 보는 관점에서도 말과 글은 큰 구실을 한다. 그리스에서 ‘바르바로이’는 그리스말에 서툰 사람을 가리켰고, 중국 한족 문화를 보편문화와 동일시해온 유교적 지식인들은 스스로 우리말을 “夷言”이라고 불러왔다. 글자가 없다는 것, 곧 성문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화적 후진성의 상징으로 보였던 것이다. 성문법이 없다는 사실이 곧 야만인 사회가 무정부 상태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불문법에 의존하는 사회도 ‘선진’ 사회 못지 않게 완벽한 통치가 가능하며 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고전과 기독교의 시각으로 본 야만인의 역사를 액면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되며, 소위 문명화된 시각을 곧 진실과 혼동한다면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바바리안>>루드굴리. 2004. 10쪽)라는 주장이 옳다면 우리를 오랑캐라 보는 중화주의적 시각도 커다란 오류라고 말해야만 한다. 글자 기록을 중심으로 하고 이것만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중화 사관의 늪에서 끝내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글을 늦게 갖게 된 사실은 단순히 우리 역사만 제약한 것은 아니다. 한글이 나오기 이전의 우리 문학의 유산은 일본에 비하면 가난하기 그지없다. 선조들이 창작한 한문학은 우리 문학이 아니라는 반론에 대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내용으로 그런 문학이 우리 역사와 연관이 있다하더라도 살아있는 문학의 전통이 되지 못 한다.
우리 사상의 전개도 우리 지식인들이 우리말글을 외면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 사상사의 전개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흘렀다. 리니 기니 사단이니 칠정이니 하면서 주자학의 정통을 고집하였고 주자학 이외의 학풍이 번져나가지 멋한 것도 일본처럼 한문을 뜻으로 읽지 않고 소리로 읽는 전통을 고수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말을 이용하여 저술하지 않고 한문으로만 저술하여 토론하면서 한문을 소리로만 읽어 귀족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띠었다. 쓰기 매체의 불편함과 우리 문화 유산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한문으로 일고 쓰기에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전체의 얼마나 되겠는가. 중국에서 부처가 중국의 부처가 되었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주자는 조선의 주자가 되지 못하고 주자의 조선이 되었다. 글자는 역사 기록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주변 민족이 글자를 갖지 못한 상황은 중국인에게 자기만이 문화 민족이라는 편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111,135쪽) 말을 적기에 적절하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갖는다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는 데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또한 번역을 통하여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주체적인 길을 여는 것이기도 했다.
2. 가난한 번역 문화의 전통-언해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전통이 매우 미약한 가운데서도 번역문화의 전통은 언해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다. 이때 한문 원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역과 거리가 있다. 한문 텍스트에 대한 주석과 풀이라는 뜻이 강하게 남아 있다. 번역의 뜻을 좁게 잡아 언해마저 번역에서 뺀다면 우리의 번역 전통은 더욱 가난해진다. 언해는 번역의 한 특수한 경우이다. 즉 입말이 아닌 고전 중국어로 씌어진 책을 입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 내용은 유교 경전과 불교 경전, 외국어 학습서, 의학과 농경 등 기술에 관한 서적이 대부분이다. 언문은 입말을 적는 글자란 뜻으로 학문하는 데는 쓰지 못하는(않는) 글자란 뜻이다. 따라서 언해는 정통 사대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며 보조적 수단이나 비사대부층을 위해 허용되는 방편이라는 성격이 강하였다. '번역'은 어떤 언어로 표기된 것을 다른 언어로 바꾸어 표현할 경우에 두루 공통적으로 쓰이는 용어인 데 대하여 '언해'는 주로 한문을 우리말로 바꾸어 표현하는 경우에만 사용된 번역 용어이다. 최초의 언해는 <<훈민정음언해>>며 한글 창제 이후 약 50년간에 출현한 번역서는 모두 합하여 40여 책, 200여 권에 이른다.
이 언해에서는 직역 투가 많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적 언어 의식이 번역에서 엄격한 뜻같음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요구는 매우 강력하였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경우가 유교 경전의 하나인 <<소학>> 번역이다. 이 책은 처음 1518년(중종 13) 김 전(金詮)·최 숙생(崔淑生) 등이 왕명으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번역 소학>>은 10권 10책이다. 현재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고, 16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복간본(復刊本)이 낙질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복간본은 16세기 국어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쉽게 풀어 쓴 부분이 있어 원전과 다르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조선 시대의 언어 의식으로는 원전과 다르다고 느껴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의 <<소학 언해>>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6권 4책으로 되어 있는데. 1586년(선조 19) 교정청(校正廳)에서 처음으로 간행하였고, 이를 저본으로 하여 몇 차례의 재간행이 이루어졌다. 너무 뜻 중심(의역)으로 흘렀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직역을 원칙으로 한《소학언해》가 간행되었다. 이것은 언해에 나타난 언어 의식이 극단적인 글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지지했음을 보여 준다.
우리의 언어 의식이나 전통은 중국이나 일본과 대조적이다. 중국의 불교 수용에서 보이는 여러 특성들은 한역 불경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불경 한역은 불교의 모습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놀았다.
남방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스리랑카, 미안바,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에서는 팔리어의 삼장이 보존되어 있고, 루교 교단에서 쓰이는 말 역시 팔리어다. 남방 아시아에서 쓰는 인도에서 성립된 번역을 대하는 전통은 아랍 번역의 전통-고전 그리스의 번역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그 나라의 말로 번역되어 있으나 그 나라 말로 된 경전은 일반 민중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으로 그다지 중요시되고 있지 않다. 승려들은 팔리어로 된 성전을 읽고 팔리어로 이해하고 있다. 티벳인들도 불교 성전을 티벳어로 번역하여 방대한 티벳 대장경을 이루어 놓았으나 번역한 것을 읽기만 해도 원문을 알 수 있을 정도 티벳 대장경을 이루어 놓았으나 이것은 산스크리트 경전을 지극히 충실하게 직역해 놓아 번역해 놓은 것을 읽기만 하여도 곧 그 원문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중국의 번역자들은 인도나 중앙 아시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와 중앙 아시아의 여러 가지 말로 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기에 힘을 기울였고, 한번 자기 나라말로 번역되자 원전을 아주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중국의 전통 문화 속에 섭취되고 동화된 것이다. 한역 불경은 원문을 많이 수정하였다. 뜻중심 번역이었다. 쿠마라지마의 번역은 번역이라기보다 창작이라고 평가받는다. 불경 번역사에서는 같은 원어가 번역한 사람마다 다르게 번역되고, 한 사람이 같은 원어를 경전이 달라질 때마다 바꾸는 경우도 없지 않다. 심한 경우는 같은 책 안에서도 바꾸는 경우도 없지 않다. 번역자의 해설을 경전의 일부인양 끼워 넣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경전이 시차를 두고 여러 번 한역되었을 경우에 뒤에 번역된 것이 원문에 더 충실하다. 정토종, 화엄종, 천태종, 선종 중국인의 생활이나 사유 방법에 맞게 교리를 세우고 대중화하였다. 직역한 불경의 대표자인 현장의 법상종은 인도의 교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과 같은데.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법상종 전통은 귀족적 종교 전통이고 낯선 인도 전통이 강한 종파로서 중국에서 그 전통이 끊어졌다. 중국인들은 오랜 번역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직역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번역에 대한 태도는 곧 외래 문화를 얼마나 주체적으로 수용하는가를 드러내는 잣대가 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를 보아도 번역 문화의 전통은 매우 풍부하다. 일본도 한자와 한문 기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한문을 뜻으로 읽는 훈독의 전통이 오래 전부터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가나의 발명이 한글 창제보다 훨씬 앞선 9세기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 나라의 힘이 점차 쇠퇴하면서 주변의 여러 민족들이 자립해서 자신의 문자를 만들기 시작하던 때와 일치한다. 그뒤로도 10세기의 요, 11세기의 서하, 12세기 금 등의 문자가 잇달아 나왔다. 15세기에 나온 한글은 시간적으로 다른 겨레에 비겨 가장 늦게 나온 것이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에 율령제가 일단 성립하자 도리어 외래 문화 도입기와는 다른 문화적 충족감이 생겨나 외래 문화와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층이 생겨났다. 한문을 고유어에 흡수하게 됨. 이런 경향은 메이지 이후 유럽 문화의 수용에서도 되풀이되었다. 메이지 초기 정부가 초빙한 외국인 밑에서 공부하고 젊은 시절 유학을 한 사람들이 2개 국어 병용을 하다가 그후의 지식인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와 흡사하다. 메이지 시대에 외국인 교사가 점차 줄어들고 영어는 책을 통하여 배우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 일반인을 위한 영어 교과서는 영문 위에 훈점을 단 경우도 있다고 한다. 훈독은 한문이 일본어 속에 흡수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일본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헤이안 시대에 해당되는 최 치원과 같은 사람에게는 중국 취향이 두드러져 나타난다. 조기 해외 유학파이자 당 나라의 관료였던 그에게 설총에게 엿보이던 중국어와 다른 우리말 표현 수단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나름대로 주체적인 표기 방법인 향찰 표기의 전통은 더는 발전하지 못하고 시들해졌다. 최 행귀 같은 이는 우리말로 된 향가를 중국인들이 알 수 없다며 도리어 한문으로 번역을 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자와 가나가 공존하면서 문화의 전통을 이룬 일본과는 달리, 한자와 한문은 한글과 서로 배타적인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는 9세기 말, 견당사가 폐지될 무렵, 훈점이 생겨나고 히라가나 가타가나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등, 고유어가 가진 구술성의 힘이 구체적으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구로즈미 마코토, <<창조된 고전>>2003 P 220-6, 237-8)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던 일본의 태도는 근대 유럽과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서도 엿볼 수 있는데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기본적으로 같다.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마루야먀 마사오 외 지음. 2000)는 이런 역사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책이다.
이런 한문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곧 중국 문화를 대표하는 유학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를 나타낸다. 우리 한글은 일본의 가나보다 뒤늦게 나온데다가 그나마 천대하는 생각이 너무나 뿌리깊게 박혀, 갑오개혁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관심마저도 거의 없었다. 우리말과 글은 “이언(夷言), 방언(方言), 언문”이라 여겼다. 우리말을 오랑캐말로 여기고 중화 제국의 한 지방말, 국지적인 말, 학술에 쓰이는 말이 아니라 나날의 삶에만 쓰이는 말이라 보고 있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유교의 세계관을 절대시함으로써, 중화 사상에 젖어 우리의 고유 문화를 업신여기는 태도가 지식인 사이에 일반화되었음을 말한다. “오랑캐 풍속(夷俗)”이라 보아 중국과 다른 고유 문화를 지워나갔고 그리하여 작은 중화란 헛된 자부심을 얻었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아랍어로 된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잊어버린 고전 문화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번역은 반역인가>>) 박 상태 지음 2006 ) 번역은 보편적 현상이며 우리 지성사가 보여준 우리말과 글에 대한 무관심이나 번역에 대한 속좁은 태도는 겨레 문화에 엄청난 짐이 되었다.
3. 번역에 대한 몇 가지 반성.
우리의 번역 전통이 가난하게 된 여러 요인이 작동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한자의 특수성과도 관련되어 있고 한자를 매개로 전래된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화이사상이 큰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언어 외적 역사적 요인과 함께 말글 의식도 번역 문화 발전의 기름진 땅이 아니었다. 엄격한 직역을 요구한 전통은 번역은 반역이란 생각과 닿아 있다. 이런 생각에 따를 대 “번역은 반역”이란 말처럼 번역에서는 잃어버리는 것이 있으며 파괴적일 수 있는 위험한 행위이다. 번역은 충실해야 하며 번역자는 부차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우리에게 강한 전통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자국어화(assimilative translation, domestication translation)하는 번역이 우위를 점하고 주류를 이루어왔다. 외국 텍스트를 자국의 문화와 언어에 동화시키는 번역이며, 의미 대 의미의 번역이다. 원전의 낯섬(외국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자국의 문화에 적합하도록 번역한다. 자연스럽고 쉽게 익히는 이른바 번역투가 없는 번역이 좋다는 전통이 강한 유럽과는 경우가 크게 달랐다. 이에 맞서는 견해는 소수 의견인데 자국어화 번역이 문화의 차이를 단절하기 때문에 원전인 외국어 텍스트의 낯섬과 그 흔적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국민에게 유창하게 읽히기보다는 원전 텍스?v의 수사성과 운치를 살려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쉴레겔, 슈라이어마허, 벤야민 등이 주장)
번역을 얕보는 전통은 오늘날 의미론이나 언어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대개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직역은 두 표현 사이의 엄격한 동일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칫 번역 불가능론, 번역 무용론에 이르기 쉽다. 직역은 또 표현마다 고정되고 명확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지만 엄격한 동일성 또는 등가성은 현실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해체주의 또는 탈근대주의에서는 한 표현마다 고정된 하나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경향이 일반화되어 있다. 한 언어가 실재 세계를 분절해 보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적지 않은 셈이다.
번역 전통을 풍부하게 하는 데에 원전과 번역본 사이의 위계 질서를 상정하는 것도 큰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로서 독특한 것이며, 동시에 다른 텍스트의 번역이다. 어떠한 텍스트도 전적으로 원작이라 할 수 없다.(“원전”이란 표현 대신 “출발 언어”란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음) 어떤 텍스트도 영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며 이미 있는 텍스트를 옮겨 쓰거나 바꿔 쓰거나 비판하며 새롭게 쓴 것이다. 근원적으로는 언어 자체가 이미 무엇보다도 먼저 비언어적 세계에 대한 번역이다. 원전의 신성함이란 우위와 권위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원전이라는 것도 이미 그 시대의 여러 텍스트와 그 이전 시대의 텍스트로 구성된 것이다. 벤야민의 생각대로 번역은 텍스트의 생존을 보장한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번역은 텍스트의 사후 삶, 즉 다른 언어로 쓰인 새로운 원문이 된다. 이런 여러 점을 생각할 때, 번역이 없었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겠는가. 한문으로만 쓰였더라면 죽어 있을 텍스트를 한글 번역으로 되살아나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원전은 번역본에 빚을 지고 있다. 문화간 시대간 의사 소통 행위로서의 번역은 매우 중요하다. 번역은 부차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 번역가는 단순히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문화와 문화를 중재하는 창의적인 예술가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다. 일본이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을 받는 데는 번역가의 힘이 컸다는 말이 오가고 있다.
모든 번역은 나름대로 독특하기 때문에 모든 텍스트는 원작이다. 그러므로 모든 번역작은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의 발명품이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특한 텍스트ㅡ를 형성한다. (
번역을 얕보는 생각은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손실과 이득을 따져서 얻은 것은 그냥 넘기고 번역가가 때로는 번역 과정의 직접적 결과로서 출발언어 텍스트를 풍부하게 하거나 명료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수잔 바스넷, <<번역학, 이론과 실제>>. 63-74족)
번역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는 데도 외국어에 대한 수요 그 자체는 조금도 주는 것 같지 않다. 오역 시비도 끊임없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지금껏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원전에 대한 강조와 함께 했다. 원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번역을 하는 것이고,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좋은 번역이었다. 우리의 문화 풍토에서 번역은 원전의 영혼을 옮겨오는 행위로, 성화를 꺼뜨리지 않고 봉송해야 한다는 신성한 위계 질서가 깨지지 않고 있다. 대상 텍스트가 어려울수록 학계에서는 ‘근본주의’가 늘어간다. 그것은 매우 배타적 원리주의이기 일쑤이며 결국 번역 권위주의를 형성해왔다. 따라서 자주 비판되어온 ‘원전중심주의’는 번역을 통해서 사라지기보다, 또 다른 중심주의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자국어로 된 학문체계의 형성”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전의 우위와 신성함을 깨뜨리는 일이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원전으로부터 뻗어나온 그물에 더 깊이 얽매이게 되어 원전을 독점한 자가 줄어들지 않고 번역자가 그 원전에 대한 권위자로 재탄생하게 되니 번역이 자생적 학문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표준화된 원전을 확정하여 원전을 잊고 우리말로 된 텍스트로 학문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 없는 원인은 원전 중심주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유학에 대한 지나친 가치 부여와 맞닿아 있다. 미국말에 대한 부러움은 미국이라는 제국의 주변부 국가들에 공통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유독 정도가 심하다. 여기에 몇 가지 통계 자료가 있다. 미국에서 외국 대학 가운데 ‘미국 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은 우리나라의 서울대학교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가 모두 1655명의 미국 박사를 배출해, 외국 대학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이 조사는 미국 시카고대가 국립과학재단과 교육부 등의 후원으로 5년 동안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의 출신 학부를 분석한 결과다. 이는 미국 대학들을 포함시킨 전체 순위에서도 버클리대(2175명)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것이다. 20위권 내에 국내 대학이 4곳이나 포함되어 있다. 반면 이웃 일본의 대학들은 순위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취득자 수 3위인 인도와 4위 타이완은 오히려 미국 박사 학위 취득자가 미약하지만 그래도 줄어드는 추세인데 우리만 계속 증가 추세라는 것이다. (<<서울신문>> 2005. 1.11) 미국말 숭배가 어디서 오는가를 말해 주는 자료가 아닐까.
교수가 되는 데도 미국 박사 학위는 커다란 권위를 갖고 있다. 도쿄대 교수 가운데 2004년을 기준으로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겨우 5.2%에 지나지 않았다. 대다수(63.5%) 교수가 일본 국내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는 50.5%가 미국 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90%에 가까운 단과 대학도 있었다. (<<시사저널>>. 2005.1.17)
토익응시자 수도 우리 나라가 전세계 응시자의 40%를 차지한다.(2005.12.5일 치 신문 보도) 한국 토익(TOE IC) 응시자가 당초 이 시험을 창안했던 일본보다 훨씬 많아졌다. 한국 응시자는 2003년 기준으로 전년 대비 49% 증가한 169만명을 기록했다. 응시자 수 기준으로 처음으로 일본을 앞선 것이다.작년 응시자는 183만명에 달해 일본(143만명)보다 무려 40만명이나 많았다. 외국계 기업 입사희망자를 비롯하여 대기업이나 공기업들이 영어 실력을 검증하는 수단으로 정착됐다. 현재 전국 1000곳 이상 기업에서 토익시험을 활용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수업을 하면서 거의 모든 계층이 토익시험에 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일본 외에 대만이 연간 약 5만 명, 태국이 4만6천 명, 중국은 3만 명이다. 일본 학문의 미국 의존이 적은 것은 그들이 오랜 번역 문화의 축적이 있고 간판보다는 실력을 우선하여 교수를 채용하기 분석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로 우리의 두 배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근대화 경험을 축적했다. 오늘날 일본이 한국과 비교해 외래 학문 의존도가 낮다. 일본은 근대화 초기에는 국가 정책으로 국내 인재들의 유학을 장려했으나, 이 유학생들이 귀국한 후 외래 학문을 자기화하는 데 애썼다. 일본 학문의 자생력은 번역이 그 밑바탕이다. 우리만이 미국말에 특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고전적인 유교 국가로서 충실한 사대의 모범생이었던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입학, 취업, 승진에서 미국말 실력에 무엇보다도 큰 값어치를 두는 현실을 생각할 때,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따진다면, 조기 유학이니 어학 연수니 해서 미국말 공부에 쏟아 부은 시간과 노력이 비합리적인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아이를 배어 부른 배를 움켜잡은 채 아이에게 미국 시민권을 쥐어 주기 위해 미군 기지가 있는 태양양의 섬이나 미국 서부로 날아가는 어머니들은 미국말만 알면 상류층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국제 경쟁력이나 지구화와 아무 관련도 없다. 제국의 권위를 업는 것이 계층 상승에 유리한 주변부 국가의 오래된 모습이다. 우리에게 제국의 언어, 보편적인 언어, 선진국의 문화어는 고전 중국어에서 일본어로 또 미국말로 언제나 바뀌어 왔다. 제국의 언어, 패권을 쥔 자의 언어를 좀더 매끈하게 해 보려는 열망은 사실상의 가족 해체는 물론, 혀 근육 절단 수술까지 하는 사람이 생겨나 외국 언론에 오르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데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미국말 ?냅걋? 하겠다는 것이 교육부 방침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과도한 사교육비가 커다란 문제로 되고 있지만 많은 부분은 미국말 배우는 데 드는 돈은 아깝지 않은 셈이다. 조기 유학이나 어학 연수 바람은 그칠 줄 모른다. 대학에서도 교양 공부도 소홀해지고 전공 공부도 뒤로 밀려났다.
대학이 미국 박사들로 채워지다보니 미국말에 대한 수요는 더욱 크진다. 전체적으로 미국적 관점에서 현실을 보는 관점을 지배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우리 교육을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예비 과정으로 만든다. 교육과 학문 분야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정확히 반영하면서 이른바 ‘우리 사회의 총체적 미국화 현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 대학원 교육의 파탄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전히 “세계 학문소비의 하위체계에 흡수되는 연습”을 열심히 할 뿐,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학문적으로 풀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마존에서 원서를 구입한 걸 자랑으로 여기고, 유행 따라 인용하는 학자의 이름을 바꾸는” 풍경도 여전하다.
4. 몇 가지 제안
여러 가지 역사적 제약과 우리말과 글에 대한 편견이 겹쳐 번역을 얕보기 쉽다. 안타깝게도 이런 낡은 태도가 다시 극심한 미국말 숭배로 되풀이되고 있다. 제국의 언어, 지배자의 언어에 대한 선망은 우리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힘센 나라, 패권을 가진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거의 맹목적인 쏠림이 다른 나라보다 심하다. 역사적으로는 우리가 오랫동안 중국 문화에 대한 존중이 지나칠 정도였고, 식민지 지배와 분단에 따른 자신감이 모자란 데서 오기도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번역 문화에 대한 자각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번역론이 쏟아져 나오고 번역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해결해야 실질적인 문제는 그다지 나아진 게 없다. 미국말 학습에 대한 수요는 여러 경로로 계속 증폭되고 있다. 번역이 애당초 문제로 삼고 있던 목표로서 우리말 글로써 가르치고 배우며 우리 문제를 주체적으로 풀어보려는 노력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가) 번역 장려 정책-경제적 지원, 번역 문화에 대한 계몽과 이론적 저항을 극복. 학문에서 관료주의와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국립 국어원을 국립 번역원으로 개편하는 것도 좋은 방법. 외국어 학자와 국어학자의 공동 작업을 추진하는 것도 좋은 방법..
나) 고전 번역이 학위 논문으로 인정되어야 자생적 학문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번역에 대한 좀더 높은 평가와 우리말로 나오는 권위있는 학술지 길러내야.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데 대한 무턱댄 우대를 없애야. 분야별로 합리적 기준을 마련해야. 외국어 강의는 예외적으로만 인정.
다)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 대학에서 받은 학위 논문을 의무적으로 우리말로 번역하게 해야.
라) 여러 대학의 외국어 외국어 문학과에 번역론을 개설하고 예비 번역사를 길러 내야.
마) 좋은 우리말 사전 영한 사전을 만들어야. (너무 많이 올린 한자말은 과감히 빼야. 우리말의 어휘를 너무 넓게 잡으면 어려운 번역이 될 가능성이 커짐. 빠진 토박이말 많음. king-왕만 있고 임금은 빠짐, chain smoker애연가만 있고 골초를 빠뜨림)
<번역을 둘러싼 문제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4>
영어번역과 글쓰기 그리고 우리말로 학문하기
김형중(연세대/영어학)
I. 들어가기
말과 글의 차이를 일상에서 느끼고 지내는 사람은 그 숫자가 적다. 말은, 특히 입말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고 당연시하기에 글을 작성하려고 종이와 필기구(요즈음은 컴퓨터와 프린터)를 끄집어 낼 때까지 상당수의 사람들이 구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이유를 따져보면 지구 상 상당한 숫자의 자연언어가 말/글이라는 두 낱말이 없이 언어(의사소통의 수단)의 복합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하나의 낱말을 갖고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영어가 20세기 중반에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지구공동체의 국제통상어(라틴어로 링구아 후랑카)로 대접받게 되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 국제통상어의 자리는 다른 민족어(국어: a national language)가 담당해왔다. 몇 개를 들어보면 페니키아어,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가 있고 동양에서는 페르시아어, 아랍어, 몽 크메르어, 중국어, 몽골어 등을 꼽을 수 있다. 유럽인과 15세기 후반 공식적 만남이 있기 전에 미주(美洲)를 살피면 노예제를 사용할 만큼 중앙집권적인 정체를 간혹 보이고 있으나, 주로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부족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북쪽에는 이눅티툿(Inuktitut), 북미 서해안의 치누크 쟈곤(Chinook Jargon), 수우(Sioux) 부족어, 오지브웨(Ojibwa)어, 이로코이연합 내 부족어, 또한 중미와 남미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문명국들이 있어 대표적인 말들이 통상적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다시 돌아와 우리말과 영어의 만남은 그 역사가 일천하지만 근래 특히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계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고 특히 대중매체에 상당량을 영어권의 낱말이나 문화적 유입을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II. 영어문장번역의 오류
원문의 낱말을 대상언어의 낱말로 같은 무게를 지닌 완벽한 번역이 가능한가의 문제는 번역이론가들이 여러 차례 다루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실제로 우리가 마주치는 번역의 생태적 특징은 항상 오류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번역은 오역이 없을 수 없다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 중 몇 예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단어의 독음에서 오는 예로는 영어문장 내에 스페인어 식 표기를 포함한 다른 나라말의 철자가 문장 내에 들어 있어 나타난다. 나바호(Navajo)를 나바조를 읽거나 다갈로그(Tagalogs)를 영어식 복수표지까지 소리 내어 다갈로그스로 읽거나 라틴아메리카의 부족어 중 미세-소께(Mixe-Zoque)는 믹스-조크라고 표시하기도 한다. 물론, 사회언어학에서 쓰는 용어인 diglossia는 서울대학교의 이익섭 선생님은 양층언어현상이라고 번역하였고, 유진 나이다의 언어간 의사소통의 사회언어학(송태효 번역 2002)에서는 언어병용이라고 새겨 넣었다. 사회언어학 용어 중 상당수가 언어자체로 정의하기 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 즉 언어외적 요소들인 자신들의 기준으로 마구잡이로 쓰이고 있고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사용자가 자신이 정한 번역용어를 자의적으로 쓰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렇지만, 독음을 한글외래어 표기법에 맞추어 적을 것인가 혹은 원음에 가깝게 표시할 것인가도 이슈로 대두되며 전문용어의 통일문제도 남북한 학문적 교류와 함께 더욱 큰 이슈로 다가올 것이 틀림없다.
2. 어귀에서 오는 오류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영어 문장에서 뉴욕부터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하면 거리가 멀다는 격리감을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한 의도를 살려야 하는데 과연 뉴욕부터 산티아고까지로 새겨야 할 것인지 혹은 우리말 문자에서는 의도적으로 바꿔 서울부터 제주까지 혹은 개마고원에서 제주까지로 할 것인지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과연 중국어로 바꿀 때는 북경(北京)에서 신장(新疆)성까지 등으로 고쳐서 번역하고 있는지 역시 알고 싶으며 그냥 로마자(Roma字)로 적은 도시이름을 한글로 전사하면 거리감이 느껴질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문제이다.
3. 문장에서는 영어가 지닌 구문적 속성으로 한 단어가 지닌 영향력의 한계가 애매한 경우에 나타난다. 한 예를 들어보면 She is an English teacher라는 문장에서 ‘English’라는 낱말이 뜻이 하나 이상인데, 선생님이 영국출신인지 혹은 영어담당하시는 분이라는 말인지 문맥이 빠지면 불명확하게 된다. 예로 자주 뽑혀지는 것으로는 “학생영화동아리”가 있는데 이 동아리가 학생들이 만든 영화를 대상으로 만든 모임인지 혹은 영화를 감상하는 모임인데 주최자가 학생만으로 이루어진 순수 학생모임인지는 구별이 가지 않는다.
4. 담화인지 상 오해가 일어난 경우를 1978년 미해군의 응급실에서 일어난 사건이 보고된 것이다. 미해군 군의관이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중 16개월 어린아이가 햇볕에 화상으로 들어왔는데 응급처치를 마치고 부모가 데리고 집으로 갔다. 6시간 후에 아이는 응급실에 다시 왔는데 다른 의사가 검사했으나 늦게 사망한 사건이었다. 아이의 양아버지는 화상을 고의로 입힌 것으로 판명되어 2급 살인죄로 기소됐다.
연방수사국 직원은 응급실 의사가 당연히 아이의 보호자가 아이를 학대하였는지 의심하고 병원에서 퇴원시키기 전에 입원했어야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최초 만났던 의사는 위증죄로 기소되었다. 피고측 변호사는 그 군의관의 모국어가 아크라논(Aklanon)이지만 다가로그와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피고는 매우 우스꽝스럽게 대명사를 구사한다고 지적했다. 이 부분이 위증같이 들린다는 피고측 변호인의 주장이었다. 전문가인 언어학자가 초빙되어 피고인 군의관의 영어사용 중 대명사의 위치가 애매할 수 있으므로 오해가 일어난 것이라고 의견을 냈다.
5. 침묵의 경우에는 문화적 배경으로 인한 오해의 근거가 되는데 긍정/부정으로 뒤바뀌어 해석될 수 있다. 미국의 동부 한 대학에 재학 중인 흑백 대학생들이 서로 간의 불상사에 대하여 처리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반드시 피부색이 흑색일 필요는 없지만) 아프리카 출신의 미국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더욱 집요하게 논쟁하려는 모습이었다. 갈등을 해소하고 타협하고 해결책을 구하려는 백인학생들보다 흑인학생들이 대화를 억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남녀 사이에서는 민족배경과 관계없이 남자학생들이 간접적이고 대결을 피하려는 전략을 사용하여 침묵하는 시간이 더욱 길었고 여학생의 경우는 더욱 능동적인 전략을 사용했다 (Ting-Toomey 1986).
서(西)아파치의 아이들은 미연방정부가 시행하는 교육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중등학교까지 부족공동체 마을 밖에서 주류사회에 교육제도에서 학업을 진행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 방학이나 짧은 휴가로 집에 오면 부모와 약 15분 이상을 대화를 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 부모는 아이들이 부족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 무엇을 배워 왔는지 알고 싶어 하고 아이들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린다. 아이들은 편하게 말을 하지만 부모는 며칠 지나야 대화를 나누게 된다. 부모가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아이들이 새로운 생각에 젖어 그들의 행동이나 태도를 쉽게 바꾸고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 어떻게 반응하는지 기다리는 편이 현명하다는 믿음에 기초한다”라고 바소는 보고하고 있다 (Basso 1970). 물론 위의 예들은 각각 특수한 경우이고 사회적 환경, 타민족과의 접촉기간, 교육수준, 사회경제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일반화시키려는 시도는 위험이 뒤따른다.
III. 실제 번역의 예
1. 르숟씨드 세일리쉬의 민담
밍크와 두띠이가(bib???b ?i ti?i? su?suwa?, t?tyika)
ㄱ. ?u?i??da(h?)b ti?i? bib????b ?i ti?i? su?suwa?s, t?tyika.
어린 밍크와 그의 어린 동생 두띠이가는 (외해에서) 견지낚시를 하고 있었다.
ㄴ. ?u?i??da(h?)b ?lgw??.
그들은 견지낚시 중이었다.
ㄷ. huy, ?udxw?xw ti?i? ?xw?lu?.
그때, [그들은] 고래를 보았다.
ㄹ. huy, bapad?xw ?lgw??.
그래서, [그들은] 고래를 놀려주었다.
ㅁ. bapad?xw ?lgw?? ti?i? ?xw?lu?.
그들은 고래를 놀려주었다.
ㅂ. huy, xwakwis?b?xw ?? ti?i? ?xw?lu?.
그때, 고래는 [이 일이] 피곤해졌다.
ㅅ. huy, b?t?xw ?? ti?i? ?xw?lu?.
그래서, 고래는 [그들을] 삼켰다. (중략)
이 민담은 전형적인 “옛날 옛적에” 같은 시작을 알리는 어귀가 나오지 않고 또 전형적인 4줄 반복 후렴구를 깨뜨리고 3줄 후렴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에 낭독자에 따라서 즉흥성이 강한 후렴구를 이용하여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도 하고 나흘 동안에 일어난 일을 사흘 동안으로 바꿔 넣으면서 부족민들이 접한 영국식 문화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채집자 헤스(Hess)는 설명하고 있다. 강조한 부분은 밑줄 친 활자를 사용하였고 생략해야 더욱 한국어다운 특징이 나타나는 부분은 겹쳐 쓴 활자로 바꿔 넣었다. 물론 괄호의 표시는 영어로 번역한 헤스교수의 잉여적인 목적어나 대명사를 지칭한다.
2. 나바호의 기도
정교한 나바호 부족의 축제인 야밤축제(Nightway)는 입회나 치료의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축제기간 모래그림이 만들어지고 길이가 긴 기도가 암송된다. 기도 중 하나는 천둥새를 부르는 것으로 남자신이 나바호 거주지의 체기히(Tsegihi)에서 다른 나바호 신들과 함께 사는 것으로 믿고 있다. (쌀즈만 쌀즈만(2004, 제3판)의 저서 언어, 문화, 사회는 자신의 모국어 체코어로 번역이 되어 간행되었다. 쌀즈만 교수는 필자에게 체코어판의 오역을 지적하면서 한국어 영어 이중언어 사용자를 구하라고 당부했으나 (원저자를 포함) 몇 번의 자문 밖에 구하지 못하였고 필자 역시 이중언어구사자가 아님을 고백해야 한다.
의 영어번역을 한국어로 옮긴 것; 꺾쇠괄호는 역자의 것)
기도문 중 두개의 작은 부분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체기히(Tsegihi)에서
새벽[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저녁 여명[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어둔 구름[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
꽃가루[로 만들어진] 집에서
..............................................
[나는 당신을 위해]몸 바쳤어요.
[나는 당신을 위해] 연기를 준비했어요.
[나를 위해 내] 발을 되돌리소서.
[나를 위해 내] 다리를 되돌리소서.
[나를 위해 내] 몸을 되돌리소서.
[나를 위해 내] 목소리를 되돌리소서.
..............................................................
이 기도문은 매우 시적이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성질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제식의 마지막 날 행해지는 나바호의 전통적 기도문의 매우 짧은 표본으로 캐나다 서북부에서 미합중국 남서부로 이주한 애타파스칸 어족의 나바호부족의 기도문이다. 운문적 성격을 생생하게 살리려면 역자의 풍부한 상상력과 어휘가 지닌 뉘앙스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나 근본적인 접근법은 역시 그 부족어가 지닌 문법적 특징과 민족시학의 정수를 배우고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현지조사의 어려움과 시간적 재정적 지원은 물론 현지에 사는 사람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갖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상상계(想像界)에 입문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IV. 비코의 언어관과 우리말로 글쓰기
서론 부분의 입말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옛날사람들이 어떻게 언어생활을 영위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사야 벌린은 비코와 헤르더(1997)라는 저서 중 역사인식의 길: 상징과 신화라는 장에서 언어의 사용에 대하여 구분하고 있다. 문자적(literal) 사용과 은유적(metaphorical) 사용으로 가르고 문자적 사용은 사물이 있는 그대로 부르기 위한 이름이고, 은유는 생생한 상상력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세련된 기교를 뜻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은유적 표현은 노력을 들여 문자적 표현으로 환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비코의 경우에는 은유와 직유 심지어 비유(풍유)마저도 의도적인 꾸밈이 아니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활의 모습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보았다. 비코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에 개념이 아닌 이미지(心像: 일본번역)로 사고했으며 “하늘이며 바다며 땅처럼 거대한 몸체에 감각과 감정을 부여했다.” 현재 우리에게 단순히 기교적,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보이는 것이 과거의 인간들에게는 실제 감각으로 들어오고 관찰하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희망하고 경외감을 나타내고 숭배한 모든 것, 요컨대 그들의 경험전체를 연결시키고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법과대학 교수직을 희망했으나 수사학 교수로 머문 비코는 역사에 황금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태고적 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정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으로 태고의 시를 택하면서 그 당시 운문과 산문이 구별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했음을 주목한다. 비코에게 시적(詩的)이라는 낱말은 원시적이나 정형화된 사회 이미지를 뜻한다. 또한 언어에 대한 비코의 착상은 언어로 어떤 사물(이름)을 기술하거나 명령, 위협, 정서를 전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행동방식일 수 있다는 착상은 매우 참신하다고 평한다.
비코에게 과거를 복원하는 두 번째 관문은 신화였다. 그에 의하면 신화는 인간이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체계적인 방식이다. 아마 신화는 신화를 만들어내고 썼던 원시인들에게 완벽히 이해되는 것이었다. 비코(New Science 352) 벌린(1997:112, 123)에서 재인용.
는 “신화는 시인이던 최초민족의 문명사이다”라고 썼다. 지금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사고하고 말했던 과거 문명인들의 자연스러운 표현양태로서 우리에게 오늘날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한 경우에만 가까스로 감지될 수 있다고 보았다. 비코는 그리스의 신화저자 호머에게서 개인적인 신화저술가의 모습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 민족의 기질(genius)을 발견한 점이 참신하다 할 것이다.
우리민족의 신화나 고대의 기록을 찾고 읽고 해석을 달아 한민족의 기질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어왔음을 알고 있다. 부여, 고구려, 삼한, 예맥의 고대시가와 신라의 이두, 향찰로 남아있는 노래와 고려가사나 조선조의 시가 역시 상당량이 한문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어서 한문해독 능력이 떨어지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렵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이신 임기중 선생님이 가사(歌詞) 2086편을 모았다는 조선일보(2006.1.17. 생활/문화면) 기사가 있다.
한글을 사용한 조선조 여인들의 서간문이나 국문소설의 중요함을 새삼 강조해도 모자랄 뿐이다.
고려대학교 송태효 박사는 “산스크리트, 훈민정음, 불경언해”라는 논문에서 훈민정음의 표기법에서 상하좌우에 자음과 모음을 결합해서 음절을 이루는 것은 산스크리트의 표기 및 이를 기본으로 한 티벳어에서도 유사하므로 산스크리트(드와나가리철자)표기법을 보면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불교경전의 번역연구가인 일본의 미즈노 고겐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한글이 티벳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확신하였다.
산스크리트의 음운체계와 훈민정음, 산스크리트 경전과 한문으로 쓴 경전 또 한문을 훈민정음으로 풀어쓴 언해본,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전해진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문화를 중국을 거쳐 한국에 까지 수입하면서 당사자들은 번역과정을 담당하면서 유교경전의 언해본에 뒤지지 않게 불경의 언해본을 철저한 고증과 직역을 통하여 풀어내고 또 각주를 달아 주석을 분주(分註)한 우리 조선왕조 학자들의 인식(에피스테메)의 경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인식체계를 통해 세상을 살피고 외래문화의 유입에 자신의 공간을 할애해주는 절대적 시각에서 유래하는 평등의 자리매김이다”라고 강조한다 (송태효 2005).
우리말로 글쓰기는 마치 방송국에서 혹은 희극배우가 입말을 통해 우리에게 표피적 즐거움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비코가 언급한 것처럼 실제로 우리민족만이 지닌 지식고고학적 측면을 재구해 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글쓰기를 마치 사이버 공간에 저장되어 있는 콘텐츠 일부를 퍼오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요즈음 학생들에게 우리말로 글쓰기는 중차대한 과제로 다가온다.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논술시험 준비로 경험한 내용과 동떨어진 입말에 대조되는 글말을 찾아내어 다듬고 자신의 논점을 명백히 드러내는 일은 점점 어려운 숙제가 되고 있다. 해외의 종합대학에서 당연히 대학신입생들에게 글쓰기 종합대학에 글쓰기중심 (writing center), 글(수리)방(writing clinic)을 운영하고 이 과외수업에 외국에서 유학한 학생들이 강의조교로 근무하고 있음은 필자가 20년 전 미주 동부에서도 경험한 바 있으며, 많은 해외에서 온 인문학도들이 북미대학생들에게 문법을 지도하고 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보다 어떤 면에서는 외국인이 강점을 보이기도 한다.
를 강조하고 적어도 일주일에 2시간 이상 약 1년을 수강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교과과정이다.
V. 나아가기
영어번역의 여러 과제 중 우선하는 것은 단순히 원전을 대상언어로 완벽히 바꿔놓는 것뿐만 아니라 독자의 시세계를 풍부하게 만들고 그들의 상상력이 원저자의 상상력과 교감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는데 있다. 하나의 자연언어를 분석하고 파악하는데 문법이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데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반면번역이론은 실제 번역을 완성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경험해서 느끼고 글말로 적어본 경우에 느낄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입말의 수준이 미천한 경우에는 논외로 하더라도 글말을 기초로 한 번역의 본질은 오역으로 시작한다고 하면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공박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문화 간의 이해를 돕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어렵게 통과한 새로운 세계에서 인문학적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우리 자신의 떨림을 맛보게 된다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떨림의 과정이 엮이고 쌓여 우리에게 “우리말로 학문”하는 몸짓으로 다가올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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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린/이종흡·강성호 (1997) 비코와 헤르더. 민음사. 대우학술총서 번역99.
송태효 (2005) “산스크리트, 훈민정음, 불경언해” 고려대학교 정보교육원
쌀즈만/김형중 (2006) 언어, 문화, 사회: 언어인류학입문. 제3판. 청주: 온누리. Language, Culture, and Society: An Introduction to Linguistic Anthropology. 3rd edition. Westview Press. (번역본)
Basso, Keith H. (1970) "To give up on words": silence in Western Apache culture. Southwestern Journal of Anthropology 26:21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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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둘러싼 문제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5>
발자크 문학 작품의 우리말 옮기기 문제 검토
김인경(서울여대)
내가 정현기 교수에게 “발자크의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옮기기 문제”에 대해 발표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은 본인이 프랑스문학 연구가이며, 박사논문으로 “사회비평과 발자크식 부르주아의 소시오그램”을 연구하였기 때문임을 우선적으로 밝혀야겠다. 그러나 프랑스 1968년 즈음 형성된 문학비평의 한 분야인 사회비평 사회비평은 문학비평의 한 방법이다. Sociocritique의 한국어로의 번역인 사회비평은 ‘사회의 비평’이라는 말과 혼동이 될 소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실제로 한국어로 번역된 ‘사회비평’을 프랑스어로 재 번역하게 되면, critique de la societe 즉 사회의 비평이 됨으로써 본래 sociocritique의 의미와는 멀어지며, 여기서 한국어와 프랑스어간의 개념정의가 중요한 문제점으로 지적이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의 비평critique de la societe은 다분히 사회학의 부분적인 원리이며 또한 그것에 안주한다는 점이다.
과 그 비평 학술용어들의 번역문제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발자크의 수용과 그 문제점들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단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가 학문을 하는데 있어 전제되어야 하는 점을 지적하겠다. 다름 아닌 다른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작품 등에 대해 경청하려는 노력, 주변에 대한 주의가 늘 현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의 가장 좋은 수단은 문학작품이며, 문학작품은 독서를 전제로 한다.
19세기 이후로 현대의 문학이 서구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이 되었고, 두 세기에 걸쳐서 특히 커다란 변화를 겪었으며, 문학은 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그 안에서 문화를 형성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역할을 담당해왔다. “문학이란 바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교육되는 것”(롤랑 바르트)임을 떠올린다면, 여기에서 문학과 제도의 관계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임을 프랑스의 발자크 수용의 경우와 한국의 발자크 수용의 경우를 통해서 지적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선적으로 프랑스에서의 발자크의 수용과 한국에서의 발자크 수용이 어떠한지를 관찰할 것이다.
그 다음 번역의 어려움과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데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교육 현장에서 프랑스이건 우리나라이건 공통적으로 학생들은 발자크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어렵고 너무나 많은 지식이 요구된다고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시대, 작품, 작가, 독자가 전체로서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작품의 프랑스적 문화코드 읽기의 어려움 때문일 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처럼 작동하는 전체를 우리말로 옮기는 데 있어 문화적 전이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교육 현장에서는 전자의 어려움,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에서는 이중의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90년대에 들어 세상의 요동 이래 우리나라의 학부나 대학원의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발자크라는 주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발자크를 말하지도 않고, 예전처럼 발자크를 읽지도 않게 되었다. 몇몇 전문 연구가들에 의해서만 발자크는 학술 논문으로 쓰여지고, 그의 작품은 이전보다도 더 다양한 방법과 주제에 의해 접근되어 분석되고 있다.
1. 프랑스에서의 발자크와 『인간희극』
발자크의 작품을 읽고, 이해하기위해서 혹은 단순히 말해서 작가를 알기위해서, 또 혹은 독서를 위해서는 ‘작가와 ‘작품’ (여기에서 텍스트와 책을 포함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작가가 글을 쓰던 시대’를 ‘독자’와 함께 공부할 필요성이 부각될 것이다. 물론 작가를, 그 작품이 발표되고 읽히던 시대, 작품의 독자층을 알지 않더라도, 우리 앞에 던져진, 혹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선택이 된 한 소설을 어려움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있게 작품을 대하고자 한다면 독자나 연구가의 입장에서는 이들 네 측면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 프랑스 작가ecrivain francais (투르Tours 1799년- 파리Paris 1850년)”. 일반적으로 인물과 함께 따라 다니는 이 사전식 항목(직업, 태생지와 태생년도, 사망장소와 사망년도)은 우리들에게 낯설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발표와 연계해서 볼 때, 발자크의 경우에 해당하는 “1799-1850”은 짧은 설명이 필요한 듯하다.『인간희극』의 발자크는 1799년, 달리 해석하자면, 18세기를 마감하며 새로운 19세기를 맞이하는 해에 프랑스의 투르라는 지방에서 평민출신의 베르나르 프랑스와 발싸 (Bernard Francois Balssa)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19세기 전반부를 가장먼저 익명의 작가로, 곧이어 인쇄업과 출판업자로, 그리고 신문평론작가를 거치면서, 1830을 전기로 본격적인 소설가로 등장한다. 이 작가는 19세기 후반부가 시작되는 1850년 파리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19세기 초 발자크는 자신의 소설 서문에 역사의 시간은 지워지고, 인간들은 사라지고, 작가만이 살아남으며, 작품만이 남게 된다는 사실을 기술했고, 이러한 발자크의 염원과 확신은 지금껏 문학교육에서 확인되어 왔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19세기 이래로 교육과 연구의 틀을 짜기 시작하는 시대 구분에서 발자크와 발자크 작품은 19세기 후반기에 비로소 19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등록된다. 특히 이전과 달리 1880년대부터 뚜렷하게 대중의 호의를 얻게 되면서 대학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며, 중등교사자격시험에서 요구하는 필독 도서목록에 포함된다. 대학비평은 발자크를 ‘고전적 사실주의’이자 ‘낭만주의’의 전형으로 평가하기에 이른다. 또한 랑송의 『교육용 오노레 드 발자크의 선별 작품들』이 처음으로 출간되며, 선별된 작품들은 『의제니 그랑데』, 『고리오 영감』으로 선별된다. 이렇게 세기말에 이르러 발자크는 고전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 것이며, 알베르 티보데가 다음처럼 요약하고 있다 :
“『인간희극』은 프랑스의 한 시대의 증언이자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인간희극』은 그 세기 이상을 포함한다. 『인간희극』의 뿌리는 1789년의 세대에, 프랑스 대혁명에, 그리고 특히 경제 혁명에, 소유권의 이전에 있다. 『인간희극』이 특별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발자크 세대, 곧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태어나 1820년에 스무살이 되었고 발자크가 죽은 1850년에 엄청난 단절을 만난 세대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단절은 사람에게 단절이었지 상황의 단절이 아니었다. 곧 발자크 자신에게는 단절이었지만 그의 세기의 역사 혹은 그 세기의 희극에는 단절이 아니었다. 『인간희극』이 제2제정의 사회를 예견했고 미리 형상화했다는 것은 누차 지적된 바다. 1850년의 세대는 발자크적인 세대이다. 그리고 발자크는 계속해서 1885년의 세대의 프랑스를 알려주고 관통하며 자석처럼 끌어들인다. 발자크적인 세계와 19세기는 1789년에 시작되어 1914년에 끝난다. 1914년의 세대와 더불어 『인간희극』은 소설 혹은 역사적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상 프랑스 내에서의 발자크와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의 총결산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는 조엘 글레즈의 『발자크 비평』에 따르면, 발자크의 총서『인간희극』을 대표하는 두개의 작품 『의제니 그랑데』와 『고리오 영감』은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이면서도 오히려 『잃어버린 환상』, 『들나귀가죽』등 의 여러 다양하고 그 만큼 훌륭한 작품들을 비롯해서 발자크의 작품 전체를 가려버리는 역할도 하고 있음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19세기 말이래 제도 교육과정의 공식 프로그램 속에 채택된 두 작품『의제니 그랑데』와 『고리오 영감』은 총서에서 대표적으로 분리되어 출판되는 횟수가 다른 소설들에 비해 월등해서, 불후의 명작으로 인정받게 된다. 게다가 다른 언어로도 가장 많이 번역 소개되어 세계적으로 명작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는 법이다. 이로 인해 많은 고등학생들이 발자크는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이미지가 발자크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형성된다. 또한 대학에서도 학생들은 발자크는 쉽지 않다고 외면한다.
총서 제목이 잘 지시하고 있듯이 『인간희극』은 1840년대 이후 발자크 스스로가 구상한 하나의 내용과 완결성을 지니는 경이적인 소설을 겨냥한 거대한 야심작이기 때문일까? 일반적으로 이 작품을 일컬어 기념비적인monument 저작이라고 일컫고, 실제로 『인간희극』은 2천명 이상의 등장인물들이 『인간희극』중의 90여 작품을 넘나들며 내용을 이루면서 사회전체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까? 그런 이유로 역사가들이나 사회학자들은 발자크가 살았고 그가 묘사한 시대와 소설의 사회가 그 어느 작품보다도 더 충실하게 19세기 전반기 실제의 사회를 재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인가? 발자크가 건축하던 『인간희극』은 운동, 변화, 구성 중의 체계이며, 작품 말년에 쓰다 완성치 못한 미완성 소설로 그 구조의 허점들과 불안정성을 보이기 때문인가?
그러나 19세기 이래 현재까지 수많은 발자크 연구서에 못지않게 발자크의 작품들은 총서로 분권들(특히 문고판)로 끊임없이 출판되고, 독자층을 유지?(재)형성해가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21세기를 열어나가고 있는 독자로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대체 어떤 작품을 시작으로 『인간희극』의 독서를 시작해야 할 것인가? 계속 제기되는 문제이다. 발자크가 구상하고 자리 매김을 한 『인간희극』의 순서가 아닌 다른 순서로 엮어진 총서시리즈가 3종류나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분명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간 순으로 독서를 할 것인가? 독자들뿐 아니라 연구자 역시 따라서 갑작스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총서『인간희극』과 상관없이 각자의 선호하는 대로 별도로 한 두 작품을, 혹은 『인간희극』이라는 덩어리를 출판 연대순으로, 혹은 이야기 순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작가의 의도대로 작가가 정한 순서인 퓌른느판 대로 읽을 것을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에르 조르즈 카스텍스는 플레이야드판의 「『인간희극』의 세계」에서 “물론, 『인간희극』에 정렬된 순서와 다르게 발자크를 읽을 수도 그리고 읽게 할 수도 있지만 그 순서는 어쨌든 불완전할지언정 그 작품의 순서인 것이며 그 자신이 그 기획을 구상할 때부터 생각해 왔다는 것과 결정적으로 확정한 틀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오래도록 숙고해 왔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조직하기에는 가능치 않은 에피소드로 넘쳐흐르는 『인간희극』의 연대기 순의 통일의 부재는 세 가지 순서의 위치변동을 가능케 하고 있다. 발자크는 선적으로 이야기를 썼다기 보다는 망으로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희극』은 애초에 졸라『루공 마카르』처럼 총서를 염두에 두고 체계적으로 실행에 옮긴 계획이 아니다. 또한 체계적인 소개를 위해 뒤늦게 소설들을 재정비한 순수한 편집 작업도 아니다. 발자크의 건축은 각각의 자체의 조각들이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모자이크처럼 완성된다. 계속해서 시험해보고 또 다른 작업을 하고 <총서>를 만들어 가는 실험장과도 같은 의미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발자크의 우주를 항해한다고 표현한다. 『인간희극』은 우주이며 그에 속한 각 작품들은 별도로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처럼 각 행성(작품)은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결국 커다란 우주(『인간희극』)의 구성원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발자크의 우주와 행성이 한국에서는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2. 한국에서의 발자크의 수용
발자크의 경우, 전문독자가 아닌 일반독자 들에게 “발자크=사실주의 작가=독서에 어려움이 따르는 과다한 묘사작가=인간희극=고리오영감-의제니 그랑데”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불후의 명작 『의제니 그랑데』와 『고리오 영감』이 현재 우리 말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연구되는 유일한 소설들은 아니다. 그렇다면 발자크가 언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관찰해 보겠다.
1) 일제 점령기: 번역의 부재와 수용
<서구문학의 수용과 그 한국적 변용 ; 프랑스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문학의 수용과 그 한국적 변용>에서 송덕호는 한국에 소개된 프랑스의 리얼리즘 작가와 작품에서 한국에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의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17년 6월호 『청춘』지에 실린 모파상의 작품 『더러운 면포』라고 소개하고 있다. 모파상을 비롯해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가 전부라고 밝히고 있으며, 모파상이 특히 많은 모파상의 소개는 당시 일본에서의 모파상 유행의 반영으로 적고 있다. 모파상, 에밀졸라, 플로베르, 발자크, 알폴스 도데의 차례로 한국에 소개된 횟수로 소개하고 있다.“프랑스 사실주의의 선구인 발자크는 리얼리즘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그에 상당하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것은 당시 한국의 문단이 단편위주로 되어 있었던 반면, 그의 소설은 대부분이 장편이기 때문일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희극』의 90편 중 40편 가량 즉 거의 절반 수의 작품이 중 단편에 속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그늘에 가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기에 번역된 두 편의 발자크 작품은 다음의 둘이다.
빨삭 작, 변영로 역, 『사막안에 정열』, 『개벽』 26-27호, 1922, 7-8월호.
빨삭 작, 心卿山人 역, 『우제니 그란데』, 조선일보, 1929. 10. 15(1회)-16(2회)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주로 발자크의 인간적인 단면을 볼 수 있는 에피소드들에 해당하거나 문예사조적인 설명위주였다.
발자크를 본격적으로 수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남천으로 1939-1940년 동안 “발자크적인 것에의 정열 1-시대와 문학의 정신”; “고리오 영감과 부성애 기타- 발자크 연구노트 2”; “성격과 편집광의 문제=발자크 연구노트 3”; “관찰문학 소론-발자크 연구노트4”; “관찰문학 소론 - 발자크 연구노트 5”가 있다. 프랑스에서의 수용에서 보았듯이 제도적으로 발자크의 명작으로 선별된 『의제니 그랑데』와 『고리오 영감』위주의 분석으로 선별 수용된다.
<발자크의 수용에 관한연구>에서 우한용은 김남천의 발자크 수용과 동시에 발자크의 작품이 우리말로 옮겨지지 못함에 대하여 다음처럼 지적하고 있다. “한 작가나 문학의 수용은 수용하는 개인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나 그 시대의 문학적 분위기와도 관련된다. 김남천이 발자크를 본격적으로 수용했다고 하더라고, 발자크의 작품이 번역되어 읽히지 않는 당시의 형편에서는 문학적 취미를 뜻하는 경향에 이르기 어렵다. 수용된 문학은 그러한 경향에 의해 비판되고 창조적으로 굴절될 수 있는 것이라 본다면 김남천의 발자크 수용도 제한적인 의미만 띌 뿐이다. 발자크 수용이 전문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되어졌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론 전개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문학적 취미의 형성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살펴보면, 발자크는 엥겔스의 『문학과 예술론』 루가치의 『발자크와 프랑스 사실주의』를 통해 김남천과 박영희등에게 수용되었다. 특히 김남천는 지나치게 발자크를 사회를 기록하는 서기관으로, 혹은 복사자로만 이해하려 함으로써 직접 경험이 보여주지 못하는 영역을 볼 수 있도록 초월적인 관찰을 가능케 하는 그의 직관과 예술가에게 본질적이기도 한 종합의 재능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2) 1945년 이후 : 대학교육과 발자크의 수용
1945년 이후, 프랑스 문학이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교육된다. 따라서 50년대 이후 60년 후반과 70년대에 프랑스 문학의 수용의 확대와 번역은 발자크에게도 해당된다. 모파상이나 뒤마, 스탕달, 위고에 뒤미치지만, 문학전집에 수록되는 발자크는 위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만이 아니다. 발자크 작품의 선별 기준은 해방 이전처럼 하나가 아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프랑스 교과서의 모델『고리오 영감』, 『의제니 그랑데』와 문학사회학에서 언급된 『잃어버린 환상』, 『사촌 베트』, 『농민들』, 서정적인 작품 『골짜기의 백합』그리고 예술가에 대한 논쟁의 『미지의 걸작』등으로 기준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인간희극』 전체에서 본다면 번역된 작품 들은 상대적으로 아주 빈약하긴 해도 『농민들』 등의 장편과 『랑제 공작 부인』, 『미지의 걸작』, 『사막의 정열』 등의 중 단편소설 등의 17편이 있다. 그러나 70년대 말 이래 번역보다는 연구에 비중이 높아지면서, 발자크의 번역은 기존의 번역된 작품들 위주로 재 출판되는 데 그치다, 90년대 후반기부터 『골동품 진열실』, 『사라진느』등의 몇몇 작품들이 번역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번역된 작품이 연구 비중이나 빈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번역과 연구의 상호 관계가 적음을 알 수 있는 데, 이는 다음 장의 La Peau de Chagrind을 둘러싸고 살펴보게 될 것이다.
반면 발자크의 작품들의 번역이 아닌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크가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발자크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2006년 1월 16일, 한국 중앙도서관 검색엔진에서의 상세검색을 시도했다. 우선 목차(contents)에서 발자크 찾기를 시도했고, 검색건수는 103건 이후 논문에서 도표와 Annex로 제시할 것이다.
이 나왔다. 그중 중복출판을 제외하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발자크가 문학이론서들의 한 장을 장식하는 경우가 절반정도를 차지하였다. 그 나머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100인’,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 ‘예술문학가의 서간’, ‘천재들의 학창시절’ 등 경영, 예술 등 다양한 교양서에서 발자크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중 몇 가지를 들겠다.
“빚을 갚기 위해 글을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 실패는 성공학교의 이수과목일 뿐이다.
“경영자는 로댕의 발자크 두상일 수 없다.” -세계로 시야를 넓힙시다
“발자크 입맞춤, 그리고 청혼”-유명 위인들의 프로포즈
“발자크가 한스카 백작 부인에게”-유명 위인들의 연애편지
“발자크 - 대문호로 발돋움한 정력가”
“발자크, 상징의 작가”-예술, 부드러운 힘
“내 생명은 그대의 것 발자크”-사랑의 편지.중 남성의 편지
“커피와 육욕과 야망”
“커피 좋아하는 카사노바-오노레 드 발자크”
학교를 혐오하고 거의 절망했던 인물들. 중 발자크
“커피왕 발자크”
이렇듯 발자크는 세계의 유명인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이제 일반 독자들에게 발자크는 읽어야 할 19세기의 작가라기보다는 위인에 얽힌 일화의 상징작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3. 발자크와 번역의 어려움
외국의 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발자크의 작품을 번역할 때의 엄청난 문제점들이다. 어휘에 그친다면 번역가 모두가 저질러서는 안 될 글쓰기의 잘못, 유행하는 단어들을 과도하게 사용한 글쓰기의 잘못으로 지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과다한 의미의 형성(=나는 모든 것을 말하고, 나는 철처히 고찰한다)와 무의미의 형성(=나는 모르는 단어들을 사용한다)이 있을 수 있다.
1) 가장 먼저 발자크의 『인간희극』의 제목에 대해 고민해 보도록 하겠다. 발자크의 La Comedie humaine를 단테의 『신곡』의 언급에 따라 자동지시적으로 『인곡』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단순한 실수이거나 문학의 문외한이겠거니 웃어넘기게 되질 않는다. 반면에 좀더 유심히 살펴보면 문학 장르의 희?비극과 관련된 의미의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인간극』으로 번역하는 연구가도 눈에 띈다. 학술용어의 정립에 대한 노력으로 타당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20 세기 초의 수용 때부터 옮겨진 『人間喜劇』이 사용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발자크의 총서제목 La Comedie humaine의 제목을 『人間喜劇』으로 옮기는 데는 대부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듯하다.
알려진 바처럼 발자크의 『인간희극La Comedie humaine; The Human Comedy』은 단테의 『신곡La Divine Comedie;The Divine Comedy』에 버금가고자 하였다. 단테와 발자크를 살펴보면, 둘 모두는 희곡이 모든 장르의 기념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자크의 표현대로 작가는 시대의 비서이듯이 어떤 사회인가에 따라서 어떤 극을 쓰는 것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테의 『신곡』 즉 ‘신의 희곡’은 중세봉건제의 필연적인 표현이고, 발자크의 『인간희극』 즉 ‘인간의 희곡’은 개인적 인간의 관심사가 지배하는 부르주아시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직전의 이탈리아 사회, 프랑스대혁명 직후의 프랑스 사회 즉 중세의 시대 즉 신의 시대의 희극, 인간의 시대의 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발자크는 연극용어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인간희극』을 “풍속은 스펙터클이고, 원인은 무대 뒤와 장치입니다. 원칙, 그것은 작가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발자크는 독자로 번역되는 lecteur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더 자주 관객을 의미하는public을 사용한다. 이렇듯 발자크의 소설개념에는 어떤 극적인 차원이 늘 존재하고 있다. <무대들scenes>은 “어떤 운명의 매듭과 전환점에서의 주요 순간들”, 즉 “운명이 형성되고 방향이 달라지며, 사랑, 돈, 성공, 실패, 죽음이 분배되는 인생의 중요한 에피소드들”을 의미한다. 이렇듯 발자크는 『인간희극』이라는 전체제목으로 <총서 oeuvres completes>를 자신의 체계에 맞게 모자이크처럼 구성한다. 발자크는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현재 “장면”, “정경”, “무대”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scene>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제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무대 앞의 관객으로서 그 사건들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기에는 <scene>을 장면이나 정경으로 옮기기 보다는 <무대>로 옮기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물론 “사회연구”를 표방하는 『인간희극』은 1부. <풍속연구>, 2 부. <철학연구>, 3부. <분석연구>의 세부로 크게 나눈다. <풍속연구>는 모든 사회적 결과들을, <철학연구>에서는 감정의 원인, 인생의 목표에 대해, <분석 연구>에서는 원칙을 토대로 한다. <풍속연구>는 또 다시 <사생활무대>, <지방생활무대>, <파리생활무대>, <군대생활무대>, <정치생활무대>, <전원생활무대>로 6개의 무대로 세부시리즈물로 나뉜다. 제라르 즈네트Genette가 사용하는 상위제목(surtitire, surtitle)은 제 1권처럼 사후에 부과된 일반적인 제목들을 상위제목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한다. 대신 각각 분리된 제목을 갖고 있는 여러 권으로 된 전체의 작품에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제안한다.(『초입Seuils』) 그렇다면, 발자크에게 있어 사생활 무대, 파리의 무대, 시골생활무대, 군인생활무대 등의 제목이 상위제목에 해당한다.
2) 우리말로 옮기기의 어려움은 늘 일어나고 있다. 발자크의 한국에서의 수용을 살펴볼 때, 유독 <철학연구>의 첫 번째 작품 La Peau de chagrin과 관련하여 다양하게 옮겨진 제목들이 목격된다. 나열해보도록 하자 : 『마피』, 『상어가죽』, 『오톨도톨한 가죽』, 『도톨가죽』, 『신비로운 도톨가죽』, 『마술가죽』, 『들나귀가죽』, 『고뇌의 가죽』, 『마법의 가죽』. 어휘론 측면에서 “La Peau de chagrin”은 마술적, 고뇌의, 줄어드는 가죽뿐 아니라, 오톨도톨 장정 가죽 그 모든 것들이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La Peau de Chagrin의 제목은 가장 먼저 김남천의 (1939년) <발자크 작품 노트>에서 『마피』로 언급되었다. 이후 불문학자들 가운데 1969년 처음으로 김화영의 석사논문 <발자크에서의 비판력 마비술-상어가죽의 경우>에서 상어가죽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2000년 그의 『플로베르와 발자크』에서 상어가죽은 사라지고 『들나귀가죽』으로 재 명명된다. 일반독자를 겨냥하는 글이 아닐 경우, 실제로 번역의 어려움 때문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현재까지도 원문 그대로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다.
한경희의 최근의 논문 <『인간희극』을 구성하는 작품들의 번역제목 연구>에서 이 제목을 둘러싼 다양성의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 90년대 말 이후, 이형식, 김화영, 이철의 그리고 우리도 제목 옮기기의 어려움에 대해 지적하고 각자 설명을 덧붙이고 있지만, 모두가 다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적절한 표현을 찾자고 제안하고 있다. 발자크의 작품의 제목 La Peau de chagrin 옮기기의 어려움과 조심스러움을 잘 지적하고 있는 이철의는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면서 현재로서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된 『마법의 가죽』을 선택”했다고 그의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말로 적절하게 옮길 수 있는 제목을 찾을 때까지 그의 제안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4. 번역의 잘못인가, 문화적 전이의 문제인가?
먼저 프랑스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Chagrin의 정의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사전적 의미를 고찰해보고, 언제, 어떻게 프랑스 사전에 등록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① 현대의 프랑스 어학사전 『로베르 소사전』:
단어 chagrin은 1. 표면이 오톨도톨한 가죽 (영어로 shagreen) 이며, 2. 괴로움, 고통이기도 하다. 또한 “la peau de chagrin” <발자크의 소설 La Peau de chagrin에서 주인공의 소망을 이루게 해 주는 신기한 힘을 가진 가죽이 그것을 이용할 때마다 점점 줄어드는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se reduire comme une peau de chagrin”은 “(>>>가) 계속 줄어든다”로 해석한다.
② 『19세기 대백과사전(Grand Dictionnaire universel du XIX-siecle』, 17 vols., 1865-1890):
Chagrin은 두개의 뜻을 가진 명사이다. 1) 터어키말 sagri의 형태와 뜻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으로 당나귀 혹은 노새의 가죽으로 가공된 오톨도톨한 가죽을 나타내며 뷔퐁에 따르면 “동양인들이 sagri를 만드는 데는 바로 다름 아닌 우리가 Chagrin이라 부르는 당나귀가죽을 갖고 하는 것이다.” 물표범의 가죽을 뜻하기도 하다. 또한 la peau de chagrin 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표현이기도 한데, 가죽이면서 동물은 아니지만 불어로 여러 가지 유추를 하게 하는(씁쓸한 맛, 등) chagrin을 말하기도 한다. 농담으로는 “Avoir une peau de chagrin 당나귀가죽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은 “아주 거친 피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2) 슬픔, 괴로움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언어에서 새로운 데, 거칠고 오톨도톨한 가죽인 당나귀가죽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가죽은 문질러서 반들반들하게 하여 윤을 내는 데 사용된 가죽이 은유로 괴롭히는 슬픔의 표현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19세기의 대백과사전』에는 20세기의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발자크의 작품의 제목에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욕망에 따라 줄어드는 가죽을 지칭하는 “La Peau de chagrin”의 표현은 출판 당대에는 아직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당대에 발자크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Chagrin만 제목으로 사용할 경우 슬픔이나 괴로움, 고뇌 등으로 독자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전상의 등록에서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표현이나 신조어의 사전상의 등록은 그 사회에서의 사용의 광범위한 사용이나 대다수의 이해 이후에야 가능한 형태임을 떠올린다면, 19세기의 출판계의 거대한 사건중의 하나로 기록되는 라루스 대백과사전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La Peau de Chagrin을 주해한 피에르 시트롱은 La Peua de chagrin은 분명 cuir d'onagre 당나귀 가죽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발자크 자신도 작품 안에서 라파엘이 골동품상인이 보라고 하는 이 “PEAU DE CHAGRIN" 의 지시에 따라 살펴보는 가죽은 분명 “벽에 걸려있는 한조각의 오톨도톨한 가죽”으로 설명되어 있다. 물론 그 가죽은 『들나귀가죽』의 1부의 제목 <부적>이 의미하듯이, 마법의 힘을 갖고 있어서 라파엘이 자신이 무언가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 그 원이 이루어지면서 자신의 생명은 그만큼 줄어들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들나귀 가죽』은 1831년 출판 이래, 다수의 비평과 함께 판을 거듭하는 출판에 따라 한 세기동안 독자들에게 비평가들에게 읽혀지면서 독자적인 표현에 대한 동의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한 세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영어로는 거친 나귀 가죽The wild ass's skin (transla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Herbert J. Hunt, 1977)과 The Magic Skin으로 번역이 되어있다. 그리고 일어로는 『?皮』 (La peau de chagrin 1940년대, 50년대)인 두 편이 발견되고, 거의『あら皮』로 번역이 되어있다. 당나귀 가죽을 지시하는 ?皮와는 달리 あらかわ 도 아닌 あら皮의 경우, あら+ 皮는 하나의 지시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적용을 가능케 한다. 1. 거친 황량한 뜻의 あら(荒), 2. 조잡한 혹은 인공을 가하지 않은 あら(粗), 3. 동물의 가죽으로 당나귀나 사슴의 가죽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본 독자에게 あら皮라는 제목은 단 하나의 지시를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처럼 여러 가지 의미를 가능케 할 수 있다. 따라서 あら皮에 항상 <욕망의 철학>이라는 부제가 덧붙여 있다.
결론적으로, 발자크의 『들나귀 가죽』을 우리말로 옮기는데 있어서 제목의 문제가 현재에도 발자크 전문연구가들의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그 장의 마련이 쉽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발자크의 대표작으로 이 제목의 우리말 옮기기의 문제에 대해 신중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반응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이 작품의 번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전적으로 이 작품을 주제로 다룬 석사논문과 학술논문이 다수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번역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번역과 연구는 별개로 이루어지고 있는 단면임을 알 수 있다.
20세기 후반 조르주 무냉은 <번역의 네 가지의 어려움에 관해서 고찰>하는데, 그에 따르면 1)문명적 또는 넓은 의미로 문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애들로부터 오는 어려움, 2) 보다 엄밀한 의미로 언어학적인 장애들로부터 오는 어려움, 3) 문장 구성에서 오는 어려움, 4) 문체의 분야에서 오는 어려움(정기수, 『한국과 서양. 프랑스 문학의 수용과 영향』)이 그 네가지 어려움이다. 실제로 발자크를 번역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1. 어휘의 어려움 2. 방대한 구성 3. 문화 역사 사회 정치적 지시의 복잡함과 그 다양함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번역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이의 문제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발자크의 작품을 옮기는 데는 그 작품의 사회성과 역사성까지 옮겨야 하기에 문화적 전이라는 특수한 노력이 특히 더 필요할 것이다.
<특별기고 1>
세계화, 지역화의 물결과 법령의 한글표기
Waves of Globalization and Regionalization and
the Hangul-Lettering of Korean Law
심희기(연세대/법학)
Ⅰ. 문제의 제기
2004년 12월 29일 '국어기본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 되었다. 국어기본법 제14조(공문서의 작성)는 공공기관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도록 의무화시켰고 '한자 또는 다른 외국문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에만 쓸 수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한글을 표기한 후에 '괄호 안에 표기'(협서, 脇書)하는 방식으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제1항)하였다. 이 법 제14조는 공공기관이 작성하는 공문서의 한글사용에 관하여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규정하였다. 국어기본법은 정부에 이송되어 2005년 1월 27일 공포되었는데 새 법에 따른 대통령령은 아직 마련되지 아니하였지만 공문서의 한글사용에 관한 기존의 대통령령이 있으므로 새 법에 따른 대통령령이 새로 시급히 마련될 것 같지는 않다.
국가기관에서 제정하는 법령의 원문이 담긴 문서는 '공공기관의 공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의 하나이다. 2004년 12월 현재 한국의 각종 법령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면 국어기본법 제14조의 의의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2004년 12월 현재 '국민의 권리 의무를 정한 국회제정 법률들'의 원문은 대부분 '국한문 혼용(國漢文混用)'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행 헌법(1987.10.29. 공포)의 원문도 국한문혼용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예를 들어보자. A는 현행형법(1953.09.18. 공포) 제1조의 표기방식이다. B는 같은 부분을 국어기본법 제14조가 기대하는 표기방식(2005년 7월 이후에 제정되는 법령)으로 표기만 바꾼 것이다. B 중 밑줄 친 부분이 '한글을 표기한 후에 괄호 안에 '한자'를 표기하는 협서(脇書)' 방식이다.
A: 第1條 (犯罪의 成立과 處罰) ① 犯罪의 成立과 處罰은 行爲時의 法律에 依한다. ② 犯罪後 法律의 變更에 依하여 그 行爲가 犯罪를 構成하지 아니하거나 刑이 舊法보다 輕한 때에는 新法에 依한다. ③ 裁判確定後 法律의 變更에 依하여 그 行爲가 犯罪를 構成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刑의 執行을 免除한다.
B: 제1조(범죄의 성립과 처벌) ①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한다. ② 범죄 후 법률의 변경에 의하여 그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거나 형이 구법보다 '경(輕)한' 때에는 신법에 의한다. ③ 재판확정 후 법률의 변경에 의하여 그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형의 집행을 면제한다.
'B 방식'(이하 '한글전용'으로 약칭함)'으로 표기하면 초등학교 학생들도 잘 읽을 수 있지만 'A 방식'(이하 '국한문혼용'으로 약칭함)으로 표기하면 한국의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읽지 못하는 학생이 있을 수 있다. 한국에서 '법령의 한글표기'가 문제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법령을 국한문혼용 방식으로 표기(lettering)하면 법령의 '가독성(可讀性, readability)'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국어기본법 제14조는 법령의 '가독성'을 높이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독성을 높이려고 '공문서나 법령표기를 한글전용으로 하자'는 국어기본법 제14조의 발상은 한국에서 2004년에 처음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발상의 기원은 '근대한국의 민족주의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한에서 이 문제가 처음 거론된 시기는 지금부터 약 50년 전인 1948년의 일이다. 1948년 남한에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가 제헌국회이다. 제헌 국회에서 국어기본법 제14조의 내용과 거의 유사한 법률안이 제출되었는데 그 법률안이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안'이다. 이 법률안의 발의자는 법률안의 제안취지를 한 나라의 國語에는 그 나라의 國民精神이 흐르고 있고 民族正氣가 內包되어 있으므로 新生獨立國家인 우리나라에서도 한글을 專用함으로써 自主獨立의 精神을 內外에 誇示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법률안의 발의자들이 마련한 '원안'은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협서(脇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회 심의과정에서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협서(脇書)할 수 있다.는 단서를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倂用)할 수 있다.로 변경하자는 '수정안'이 제출되었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원안이 아니라 이 수정안이 가결되었고 이 법률이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1948.10.09 법률 제6호)로 공포?시행되었다. 1948년에 부결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원안'이 50여 년 만에 국어기본법 제14조의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50여 년이 경과한 2004년에는 어떤 연유로 모든 공문서, 특히 법률 원문의 한글표기를 강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국어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었는가, 반대의견은 없었는가, 국어기본법의 추진론자와 반대론자의 논거는 무엇이었는가?
필자는 이하에서 1948년부터 2004년에 이르는 50여 년 간 '공공기관에서 작성되는 공문서'의 표기방식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전개된 논쟁의 추이를 추적하여 2005년 7월부터 시행된 '국어기본법'의 역사적 의미를 검토하고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법령의 한글표기운동과 한국어화 운동'의 장래를 전망해 보려고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2004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국어기본법'을 '세계화, 지역화의 물결과 한국인의 대응'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바라볼 예정이다.
Ⅱ. 1948년의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안'의 귀결: 수정안의 승리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원안'(이하 '원안'으로 약칭함)을 발의한 의원들은 이 법안의 필요성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거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그들은 첫째 논거로 '민족정체성의 회복'을 거론하였다. 일제강점기(1910-1945)에 공용어는 일본어였고 일제말기에는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고 한글사용이 금지되었는데 민족해방 후에 한국어와 한글사용을 법제화하는 것은 자명한 것이라는 주장이 첫째 논거였다. 두 번째 논거로 그들은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인구의 약 20%만이 한자를 읽을 수 있는데 비하여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인구는 거의 100%라는 점을 들었다. 이 두 가지 논거를 반박하는 토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 본회의에서 는 원안이 아니라 수정안이 가결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반론은 현실론이었다. 신생 독립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인데 당시 한국인이 참고하여야 할 '과학과 기술' 관련 서적은 대부분이 한자를 사용한 일본어로 기술되어 있었으므로 한자를 교육하지 아니하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의 반론은 '문자생활의 법제화'에 대한 반대였다. '한글사용은 국민운동과 문화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추진할 일이지 한글사용을 법률로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정안은 원안발의자의 입장과 반대론의 입장을 절충한 안으로 보인다. 원안은 '정당한 안'이지만 지금 당장 법제화 시키면 실시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있으므로 '여건이 성숙할 때까지 법제화의 시기를 보류하자'는 것이 수정안의 발상이었다. 다만 '여건이 성숙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으므로 그 시기를 명시하지 아니하기로 하였다.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倂用)할 수 있다.는 수정안의 취지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수정안을 제안한 조헌영(趙憲泳) 의원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정안은 별 의미가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나 (중략) 이것이 30년 후에 완성될 지 몇 십 년 후에 완성될 지 모르나 여하간 우리가 시작만은 해야 되겠다는 것이 이 수정안의 정신이올시다. (중략) 당분간 한자는 얼마든지 써도 좋아요. 그러나 국책으로 방법은 정해야 됩니다. 적어도 지금부터 실행하지 않으면 100년 후에 가서도 마찬가지예요. (중략) 국민이 문화적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한글만으로 하자는 것이 이 법안을 만드는 근본정신일 것입니다. 이 법안을 만들지 않으면 100년이 지나도 그대로 있을 겁니다. 국회사무처 속기록(제1대 국회, 제1회 속기록, 제79호, 429면)
이리하여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은 그 명칭과는 달리 공문서의 표기를 '국한문혼용'으로 하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는 법률이 되었다. 한글 전용론자의 입장에서는 이 법률이 오히려 한글전용을 방해하는 법률로 인식될 소지도 없지 않았다. 2004년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국어기본법이 1948년 10월 9일 제정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법률 제6호)을 명시적으로 폐지 국어기본법 부칙 제2조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Ⅲ. 1968년-1970년 군사정권의 법령한글화 정책
1. 국한문혼용의 의의
이미 15세기의 왕조국가 조선에서는 조선어를 음성에 맞게 표기하는 고유한 알파벳이 창안되었지만 19세기 후반까지 조선의 공문서에 표기되는 공식적인 문자는 '한자'이었고 그 한자의 구성과 배열을 규율 하는 문법은 '한문'이었다. 공문서의 '한자-한문'표기 체제는 1894년의 갑오경장 시대부터 '국한문 혼용'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서 '국문'이란 한글(언문)을 의미한다. '국한문 혼용'으로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
첫째, 어순이 한국어의 어순으로 바뀌어 한자는 알지만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이 공문서를 좀 더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둘째, 공문서에 표기되는 문자 중에는 여전히 한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한글은 조사와 약간의 접속사 정도에서만 표기되는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국한문혼용정책의 시행은 한자를 모르는 한국인이 공문서를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였을 것이다. 남한의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1948.10.09 법률 제6호)의 시행은 1894년의 갑오경장 시대의 정책에 혁명적인 변화를 준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1945년의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의 공용어는 일본어였으므로 한국인의 어려움은 한층 가중되었다. 당시의 일본어 표기에도 한자가 대단히 많이 섞여 있었으므로 일본어 알파벳(가나, ○名)은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일제강점기의 공문서는 '일본식 한자/한문표기', '일본어 가나'로 구성되었고 공식 언어가 일본어였으므로 '공문서를 해독하는데 한국인이 겪었을 어려움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민족해방 후에 북한과 남한에서 한글전용운동이 일어나는 현상은 굳이 민족주의 운동을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소하려는 극히 자연발생적인 현상으로 파악된다. 1948년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남한의 국회에서 한글전용정책의 채택이 발의된 것은 전혀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었다.
북한에서는 민족해방과 동시에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한글전용정책의 시행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북한에 비하여 순탄하지 않았다. 무엇이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초래하였으며 그 공과(功過)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비교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그 질문에 대한 탐구를 생략할 수 밖에 없다.
남한에서 혁명적인 한글전용정책이 추진된 시기는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다.
2. 5.16 군사정권의 법령한글화 정책
1961년 5월에 남한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정부공문서규정'(1961.09.13, 각령 제137호)을 제정하여 1961. 10.1. 부터 시행하였다.
모든 공문서는 표준말인 한글국어체로 간명하게 기술하고 정자로써 가로 쓰되 띄어 쓸 것이며 수자 표시는 아라비아 수자를 사용한다. 뜻의 전달이 곤란한 것은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 쓸 수 있다. '정부공문서규정' 제15조 제1항
'정부공문서규정'은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원안'의 정신을 이어받았으며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원안'의 정신을 한층 구체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부공문서규정'의 '정부'는 행정기관 '정부공문서규정' 제2조(공문서의 정의): 공문서라 함은 행정기관에서 사용되는 문장, 통계 및 도면으로 된 행정상의 일반적인 문서를 말한다.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1년의 '정부공문서규정'으로 '행정기관 내부에서 작성되는 공문서의 한글화'는 상당 정도 진척되었지만 철저하게 진척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1968년부터 '행정기관 내부에서 작성되는 공문서의 한글화'는 보다 철저하게 진척된다. 1968.12.24.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무총리훈령 제68호(한글전용)가 제정되었다.
정부는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을 1948년 10월 9일에 제정하고 그의 실천을 위하여 정부공문서규정(대통령령 제2,056호 1965년 2월24일)으로 공용문서는 한글로 쓰도록 하고 있으나 이의 실천이 잘 되지 않고 있으므로 다음 사항을 지시하니 한글 사용에 철저를 기하도록 할 것.
1. 한글의 전용
가. 공문서 작성에 있어서 이미 한글만으로 표기하던 것을 더욱 철저히 지키고 공문서의 별지나 부록, 자료등 부속서류도 한글로 쓰도록 한다.
나.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단서에 불구하고 정부가 발행하는 모든 공문서 기타 표현물(표어, 포스타, 현수막, 아취 및 간판, 정부간행물, 신문 및 잡지 등에 게재하는 공고등 광고문 등)을 전부 한글로 쓴다. 다만, 한자가 아니면 뜻의 전달이 어려운 것은 괄호 안에 상용한자의 범위 안에서 한자를 표기해도 무방하며 1970년 1월 1일부터는 완전히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한다.
다. 법규문서도 전항에 따른다.(정부공문서 규정 제7조 1항 단서는 폐지)
2. 어휘 및 표기방법
가. 문장의 어휘도 우리말로 바르게 쓴다.
나. 각급 기관장은 한자로 쓴 기술 및 행정용어를 우선 자체 내에서 통일 사용하도록 한다.
다. 각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분기마다 통일 사용토록 한 술어를 문교부장관에게 제출하며 문교부장관은 법률술어, 과학술어, 학술술어, 및 행정술어등 기능별로 분류 관계 각 부처와 협의하여 전 기관이 같은 어휘와 표기방법을 쓰도록 한다.
3. 서식정비
가. 총무처장관은 1968년 12월 중으로 서식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에서 제정하는 모든 서식을 한글로 표기 할 수 있게 고친다.
나. 성명은 한글로 표기하되 괄호 안에 한자를 표기 할 수 있도록 한다.
다. 서식 각 난에는 난번호를 부여하여 전자처리기계나, 테레 타이프, 테렉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한다.
4. 민원서류
가. 각급 행정안내실에서는 민원서류를 대필 작성하여 줄 때 한글로 써 주도록 하고 직접 써서 가져오는 경우에는 한글로 쓰도록 지도 계몽하여 1970년 1월 1일부터는 완전 한글로 쓰도록 한다.
5. 감독확인
가. 각급 기관장은 소속직원이 사무처리과정에서 한글을 전용하도록 지도 감독하고 여러 가지 감사 때는 이의 실천상태를 확인하도록 감사 검검표 착안점에 추가한다.
국무총리훈령 제68호를 실천하기 위하여 행정부 내부에서 다음과 같은 계획이 수립되었다. 1969년 5월 1일부터 정부가 마련하는 모든 법령의 제정안, 개정안은 한글로 표기하고 이미 국한문혼용으로 표기된 부령(部令)과 대통령령은 1970년 12월 31일까지 한글화작업을 완료하며 법률의 한글화도 시도한다. 이 계획은 어느 정도 실천되었을까?
정부는 계획대로 1969년 8월 31일까지 총리령, 부령의 한글화, 1970년 12월 31일까지 대통령령의 한글화작업을 완료하였다. 이 기간에 한글화작업이 완료된 법령의 수는 총리령, 부령 748건, 대통령령 1024건이었다. 김승렬, 법령한글화사업에 관한 소고(법제 제229호, 1988.4.20, 21면)
정부가 마련하는 법률의 제정안, 개정안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부는 계획대로 정부가 마련하는 법률의 제정안, 개정안을 한글로 표기하여 국회에 제안하였으나 그 중 극히 일부만이 그대로 한글로 통과되어 공포되고 대부분은 국회에서 이를 한자로 바꾸어 통과시켰으며 국회제안 법률안은 처음부터 국한문혼용의 방식으로 제안되어 통과되었다. 김승렬, 법령한글화사업에 관한 소고(법제 제229호, 1988.4.20, 21면)
3. 5.16 군사정권기 사법부의 공문서와 판결문
'정부공문서규정'은 행정기관에 대하여만 구속력이 있는 행정명령이었으므로 이론상 '정부공문서규정'은 입법부인 국회와 사법부를 구속할 수 없다. 그러나 5.16 군사정권기에 국회는 군사정권에 협조하는 공화당이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었고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대통령에 의하여 행사되었으므로 사법부가 행정부의 한글전용시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법원이 행정부의 한글전용시책에 부합하는 규칙을 제정할 것이라는 방침이 알려지자 대한변호사협회는 1961년 12월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법원장에게 한글전용조치 철회를 건의하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일체의 법령이 국한문 혼용이고 법률술어는 한자로만 되어 있어 이를 한글로 풀어 쓸 수 없으며, 또한 음역(音譯)하는 것도 무의미하고, 필요할 때 괄호 안에 한자를 삽입한다면 거의 한자를 삽입하는 결과가 되어 국문과 한자를 이중으로 사용하는 폐단이 생겨 문서가 장황해지며, 법원과 검찰의 문서는 일반 행정관청의 문서와는 달라 복잡다기하고 내용이 방대하여 한글을 전용하면 글자 한 자를 오해 함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한글전용을 단행하면 시간과 정력의 소모를 배가하여 능률을 저해시켜 막대한 사무적체를 초래한다.고 주장하였다. 竹溪 전우영(全禹榮), 回顧錄 乃文乃武, 史草出版社, 史草出版社, 1989, 241-242
그러나 대법원은 1961. 12. 29. 다음과 같은 법원공문서규칙(1961.12.29. 대법원규칙 제90호) 당시의 대법원장은 조진만 대법원장(제3대, 1961. 6.30-1964.1.30; 제4대 1964.1.31-1968.10.19)이었다.
을 제정하여 행정부의 한글전용시책에 부응하였다.
제2조 (공문서의 정의) 법원공문서(이하 문서라 한다)라 함은 법원에서 재판사무에 관하여 사용되는 문서와 행정사무에 관하여 사용되는 문서를 말한다.
제3조 (문서형식) 모든 문서의 표준말인 한글 국어체로 간명하게 기술하고 정자로서 가로 쓰되 띄어 쓸 것이며 뜻의 전달이 곤란한 것은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 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내용의 법원공문서규칙이 1961. 12. 29. 이후 즉시 철저히 시행된 것 같지는 않다. 법원의 공문서와 판결문의 한글전용원칙이 철저히 시행된 것은 1963년 이후의 일이다.
4. 1990년대의 '법률문장의 구어체(한국어)화' 운동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 '법률문장의 구어체(한국어)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쉽게 말하자면 '법령 한글화 운동의 심화운동'이다. 법령의 한글표기는 가독성을 높였지만 '정확한 의미의 전달'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직도 해결하여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기본방향은 (1) 민주화, (2) 평이화, (3) 명확화, (4) 표준화의 4가지였다. (1) 민주화란 권위주의적인 술어나 국민감정, 시대에 맞지 않는 술어를 바꾸는 작업(예; 出頭→출석)이고, (2) 평이화란 중등교육(의무교육)을 받은 정도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술어로 바꾸는 작업[예; 溝渠→도랑(순한국어)]이다. (3) 명확화란 너무 간단하여 알기 어려운 술어는 글자수가 늘어나더라도 명확하게 풀어 쓰는 작업[예; 公利→공공의 이익]이고, (4) 표준화란 술어나 문장표현을 '한글 맞춤법 표준화 규정'에 따라 표기하는 작업이다.
5. '법률 한글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안'
1980년대 부터 한글로 표기된 법률이 조금씩 늘어나다가 2000년 부터는 연평균 약 30건 씩 한글로 표기된 법률이 신규제정, 혹은 전문개정의 형식으로 추가되고 있다. '법률 한글표기 사업'은 '조국근대화'를 표어로 내세운 1960-1970년대의 군사정부 시절부터 추진된 숙원사업이었고, '참여 민주주의'의 확산을 구호로 내세우며 2002년에 출범한 '참여정부' 시기의 여당 국회의원들은 국정감사 시에 정부의 '법률 한글표기 사업'을 강력히 종용하고 있어 '법률 한글화 사업'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2000년까지 정부는 신규제정하거나 전문개정하는 법률이 있을 때만 한글화를 추진하였지만 2001년에는 일부개정하는 법률도 한글화를 추진하기로 확대하였으며 2002년에는 모든 법률을 전면적으로 한글화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마련된 것이 '법률 한글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안'(이하 '특조법안'으로 약칭함)이다.
'특조법안'은 2003. 8. 29.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제대로 심사되지 못하고 제16대 국회 임기만료에 따라 자동폐기 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의 '특조법안'은 제17대 국회에 다시 정부제출법안으로 제출되어 2005년 12월 현재 국회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특조법안'은 이미 한글화되어 있는 법률(230여개)과 '민법 등 중장기적 연구를 거쳐 점진적으로 한글화를 추진할 일부 법률'을 제외한 모든 법률(2004년 현재 759개 법률)을 전면적으로 한글화하되, 한글화로 인하여 뜻의 전달에 어려움이 있거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혼란의 우려가 있는 술어는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 하는 조치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Ⅳ. '동아 지역공동체'의 현존에 대한 한국의 인식
2004년 6월 한국정부는 국어정책의 수립시행, 국민의 국어능력 향상, 국어의 국외 보급 및 국어정보화를 추진하고 공공기관의 공문서의 한글작성을 의무화시키는 내용의 '국어기본법안'과 '특조법안'을 정부제출법안으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자 2004년 7월 15일 전국한자교육추진연합회(이하 '연합회'로 약칭함)는 '국어기본법안과 특조법안 국회통과 저지를 위한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연합회는 '국어기본법은 한글전용을 획책하는 음모', '법률한글화는 우민화의 조장', '국어기본법안과 특조법안이 통과되면 삼류국으로 전락', '한국은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환경으로 보아 숙명적으로 주변의 한자문화권과 왕래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 '법률술어는 95% 이상이 한자로 되어 있는 한국어', '한자는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라고 주장하였다. 이 대회에는 조순(민족문화추진회 회장, 전 부총리), 박춘호(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 이영수(변호사, 전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 박원홍(전국회의원), 진태하(연합회 상임위원장) 등이 특별연사로 참석하였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2004년 11월 26일 제12차 상임위원회를 열어 '국어기본법안에 관한 공청회'를 진행하였다. 공청회에서는 5명의 진술인이 진술하였는데 3인은 찬성진술, 2인은 반대진술을 하였다. '국어기본법안'은 약간 수정된 채 2004. 12. 29.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특조법안은 2005년 정기국회의 심의로 연기되었다.
국어기본법이 2005년 7월부터 시행되었으므로 향후에 신규제정되거나 개정되는 한국의 모든 법률조항은 한글로 표기되어야 한다. 국어기본법이 사적 생활관계에서 한자사용을 금지하거나 억제하려는 법률은 아니지만 법률의 원문이 한글로 표기되면 그 반사적 효과로서 사적 생활관계에서의 한자사용도 점차 위축될 것이 예상되므로 연합회가 '국어기본법은 한글전용을 획책하는 음모', '법률한글화는 우민화(愚民化)의 조장'이라고 개탄하는 것이 전혀 일리 없는 주장은 아니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연합회'의 주장이 단순한 '수사적(修辭的)'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물적인 기반'이 있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2003년 12월 30일 한국의 경제 5단체는 '국가경쟁력 제고'와 '한?중?일 경제권 결속의 근본적인 대책'으로 77%의 대기업이 '입사 시 한자시험'을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하고 있는 한자능력검정시험에 해마다 80만 명 이상이 응시하고 있고 향후 그 수는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비록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연합회'와 그 취지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은 수시로 '한자교육진흥법안' 을 국회에 제출 하고 있다. 또 법률 한글화 사업을 추진하는 측도 한자교육 강화 취지에 굳이 반대하지는 아니한다.
필자는 한국의 법무부, 대법원에서 개최되는 법률자문회의에 자주 참여하는데 그럴 때마다 '동아사국(東亞四國,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의 법제는 어떠한가' 하는 점에 관한 관심이 점점 심화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사법개혁과 법학전문대학원 설립문제'가 중요한 현안문제인데 '동아사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한 관심대상이다.
Ⅴ. '세계화'의 심화와 '한글?한국어의 위기'
한국의 '국어기본법의 제정'과 '법률한글표기원칙의 법제화' 운동은 '한국민족주의'(Modern Korean Nationalism)의 심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국민족주의의 심화 현상 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불어 닥치고 있는 세계화?지역화 현상이다. 1997년 말에 한국에 불어 닥친 외환위기와 뒤 이은 IMF 관리체제에의 편입 이후에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영어공영화론'은 경제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수시로 제기되는 화두가 되었다. 한국인들이 영어교육에 쏟아 붇는 자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한다. 영어와 영어 캐릭터는 점점 더 한국인의 언어생활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부르는 노래 말에 영어가 포함되지 아니하면 이상할 정도이다.
따라서 한국의 '국어기본법의 제정'과 '법률한글표기원칙의 법제화' 운동은 '한국민족주의의 심화'현상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보기 보다는 '세계화?지역화'의 진척에 따라 황폐화되고 있는 '한국어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자기방어 현상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런 관찰이다. 21세기 한국에서 '한글과 한자'는 모두 '세계화'의 심화와 '영어의 강세' 때문에 함께 '쇠퇴의 위기'에 놓인 '공동운명체 관계'에 있다.
Ⅵ. 지역화의 진전과 한자교육강화론: 달려오는 동아시아 공동체
지난 50년 동안 한국의 정계에서 일관되게 진행된 '법령 한글화 사업'에 밀려 한국정부의 한자교육 강화정책은 현재 수면 아래에 잠재해 있다. '동아시아 지역공동체'(East Asian Community)의 현존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므로 '동아사국'의 교역과 교류가 늘어날수록 한자교육강화론은 수면 위로 부상하여 현실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한국에서 '한글과 한자'가 활성화될 것인가 여부문제는 '동아시아 지역공동체'의 활성화와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는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다. 20세기에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는 미국→일본→중국의 순이었다. 21세기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는 중국→미국→일본의 순으로 바뀌었다. 머지 않아 한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는 중국→일본→미국의 순으로 바뀔 것이 틀림없다.(The End)
<특별기고 2>
교육무늬결(과정) 말글살이 생명힘 북돋우기
염시열(전북삼우초등학교 배움지기)
1. 머리말
‘한글 문화 배움새로 수업하기(한글학회, 전국 국어학 학술 대회, 2001)’ 원고를 마련하면서 일본 소학교 누리집에서 수업벼름을 내려받아보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어수업벼름과 쓰는 말이 똑같았다. 아니, 이 무슨 얼빠진 일인가? 한국인 국어 교사가 일본식 의역 한자어의 전도사가 되다니! 이 일이 있은 뒤로 글쓴이는 한참을 헤맸다. 그 뒤로 수업벼름을 비롯하여 교육 때곳에서 많이 쓰는 말부터 토박이말로 바꿔 쓰기로 했다.
다른 나라로부터 들어온 말(이식 새얼 언어)을 오늘 쓰는 사람이 많다는 까닭으로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다고 내세운다면 우리말글살이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실컷 독서라는 낱말을 가르쳤는데 그 새얼의 고장이 중국이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또 그 사북 조각몬(핵심부품)의 값을 물어야 하는데 그게 어처구니가 없다. 문맹 아닌 문맹 곧 중국인이나 마찬가지의 ‘한자문맹’ 딱지는 우리 말글살이 굴대(패러다임)에서 보면 서푼어치 쓸모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부지런히 토박이말 갈말 부려쓰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늘 쓰는 낱말일수록 우리 토박이말을 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말의 앞날이 밝기 때문이다
2. 갈말 부려쓰기는 왜 한말글로 해야 하는가
다음의 <체1>,<체2>,<체3>을 견주어 살펴보면 한말글(국어) 수업에서 눈으로 살필 수 있는 것들을 챙기지 않고, 이식새얼에서 비롯된 교육과정용어를 비판 없이 그대로 쓰면서 우리 토박이말을 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낱말 몇 개를 바꿔 쓰고 안 쓰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생각하는 새얼미립을 외면하고 저들의 생각 미립을 베껴 씀으로써 우리말과 글이 늘품 하는데 어려움을 더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우리말과 글을 갈배우는 교육과정언어를 마련하는 데 우리말이 아닌 표기만 한글인 저들의 생각과 새얼이 담긴 저들의 말이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살필 문제라 할 수 있다. 까닭이야 있겠지만 <체2>는 다시 쓸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생각을 담아 우리 말글살이가 바탕이 된 배움새를 마련하는 것이 한말글(국어)을 갈배우는데 도움이 된다.
한말글(국어)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그 자체가 한말글(국어) 늘품의 바탕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말을 살펴보면 ‘공부’-‘공부하다’-‘공부하기’, ‘배움’-‘배우다’-‘배우기’, ‘학습’-‘학습하다’-‘학습하기’, ‘스터디’-‘스터디하다’-‘스터디하기’ 들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떤 말로 배움새를 써야 하는가를 조심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3. 한말글로 갈말 부려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나라는 그들의 새얼이 담긴 일상 언어를 학문용어로 재조직하여 쓰는데 우리만이 무색무취한 말인 이식 새얼에서 비롯된 말들을 비판 없이 쓰고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신식학교 교육의 시작이 ‘육영공원’ 송승석?김유원, 한국?서양 교육사, 서울, 교육출판사 1996. 126쪽.
에서 시작되었으니까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말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속적으로 써야 한다는 생각은 학교제도의 개선과 연속성이란 측면과 우리말의 홀로속과 절ㄹ로심에 비추어볼 때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체1>,<체2>,<체3>을 견주어보면 ‘학습(學習)’ 학습(學習)이란 낱말은 한국한자어사전 권1(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3), 대한문사전 제2책(청, 상무인서관출판, 1908), 신기통(최한기,1836), 동몽선습(박세무,1541)에 보이지 않고, 학(學)과 습(習)이 문장 속에서 낱자의 구실로 발견될 뿐이며 우리어린이들이 배웠던 천자문, 사자소학에도 학습(學習)이란 낱말로는 보이지 않는다.
-‘학습하다’-‘학습하기’와 같은 한자어 사용에 있어 일본식 한자어가 한국식 한자어로 재환생 심재기(1983, 47), 국어어휘론, 서울, 집문당.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땅히 토박이말에서 비롯된 ‘배움’-‘배우다’-‘배우기’ 말들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필요에 따라 다른 말들을 써야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체3>의 지도자는 자기 새얼말(문화어) 쓴 지도안이기에 부담이 없지만 우리 나라 한말글(국어) 교사는 우리말이 있어야 할 자리인 <체2>,에 <체3>처럼 ‘단원'에서 ‘지도상의 유의점'까지 표기만 한글인 말을 그대로 쓰고 있는 사실은 속새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체 1> 한말글(국어)읽기 한글 새얼 부림 새물내기 배움새
한말글(국어) 한글 새얼 부림 이때 배움새(본시 교수-학습 과정안)
날짜
2003. 11. 21, 5때째
마당/
바탕
<넷째 마당> 인물과 하나 되어
2. 소중한 만남
배움지기
배움이
3-1, 10명
이때 벼름소
이야기를 읽고, 인물이 한 일을 정리하기
여줄가리
(4/9동안),교과서<읽기> 읽기 110~115쪽
배움 바람
이야기를 읽고, 인물이 한 일을 정리할 수 있다
배울 거리
배움 얼개, 배움 내용과 이어지는 꼴몬, 견주기 눈벼름(관점)
한글
새얼
수업
부림수
(전략)
배움 모형
한글 새얼 부림 배움새<지식(창출)→부림(활용)→공유(작품)>
배움 흐름결
모람배움, 울력결 두레배움(협동적 소집단 학습),
새얼 배움 연모
모음새 일몸 책 만들기(책얼굴, 벼리, 이름감, 뒤 적이, 솟을모음 따위), 그림야담 뒤 글쓰기
http://www.edunet4u.net/edunetWebApp/MKEDAIA10.action?event=initialize&state=load
만들어 가는 배움새 바디
배움결
배움자리결
배움 일몸
속내
때결
쓸감
도움말
1) 마당 이름(단원명):넷째 마당 - 2. 아름다운 꿈을 가꾸어요.
2) 마당 열기(단원의 개관) 3) 마당 바람(단원의 목표) 4) 마당 배움 얼개(단원 학습 체계) 5) 배움 미리 수(지도 계획) 6) 마당 가늠 미리 수 7) 배움 일몸 도움말 8) 새물내기 미립과 살필 일9)
<체 2> 4학년 한말글(국어) 수업 연구지도안
단원: <둘째 마당> 1. 이야기의 샘
1. 단원의 개관 2. 단원 목표 3. 지도 계획 4. 평가 계획(관점)
5. 지도상의 유의점
단원(제재)
<둘째 마당> 1. 아야기의 샘
동기 유발 자료
본시주제
일이 일어난 차례에 따라 내용 말하기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
닭, 병아리, 달걀의 그림을 보고 무엇이 먼저 생겨났을까를 상상하고 그 이유를 들어 말한다.
차 시
2/9
교과서
(말·듣·쓰) 34~35쪽
교수 학습 목표
그림을 보고 일이 일어난 차례에 따라 이야기를 꾸며 말할 수 있다.
자료
활용
계획
학습 자료
그림자료(닭, 병아리, 달걀)
멀티미디어 활용 자료
프로젝션 TV, 실물화상기
단계
학습의 흐름
(학습 요소)
교수 - 학습 활동
시량
자료 및
유의점
교사 핵심 발문
예상 아동 활동
4학년 수업지도안(한말글(국어))-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새교실 2001년 3월호.
<체 3> お手紙(2年)第2學年は組國語科學習指導案
お手紙(2年) 第2學年は組國語科學習指導案 指導者 吉 永 幸 司
1、單元名 氣持ちを考えて讀もう 「お手紙」
2、本時の目標
?「お手紙」に出てくるがまくんとかえるくんの言っていることを讀みとり、面白いところや詳しく考えたいところ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
? 好きな會話や地の文を音讀したり、言葉を補って讀んだり話し合ったり
するこ とができる。
3、本時の展開(全8時間中 2時間目)
學 習 活 動
指導上の留意点
?本時の學習目標を確認した後、全文を音讀させる
http://www.biwa.ne.jp/~yoshi-a/tetegami.htm(2002.12.8.)
4. 한말글 갈말 부려쓰기를 해 본 미립은 어떤 것인가
한국에도 오랜 역사를 통하여 배움(교수-학습) 행위가 있어 왔으며, 우리의 연구대상으로서 소중한 것이다. 이 소중한 것을 바탕으로 겨레 참모습 배검(정체성 교육)의 미립과 교육 새얼의 절로심을 기를 수 있는 국어 교과 교육과정에 알맞은 배움새와 교육과정 언어의 광맥을 한글의 원리에서 찾아 마련한 것이 한글 새얼 부림 배움새라 할 수 있다.
학교 수업에서 새물을 내는 것과 무늬결 마당 배움새와 모음새 활동, 그리고 배움 갈음책 만들기와 같이 토박이 한글 새얼과 한통치는 배움 활동과 교육과정 언어 재조직을 통해 우리 국어 교육과정이 독창성과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배움 방안과 속내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광복 60돌에 걸맞은 국악 갈배움 얼개를 마련하는데 풍물굿에 담긴 한듬삼(밝음/법/생명)의 바탕 원리를 살필 수 있는 속살을 가축한 마을굿이 있다. 새해 마을의 고요(평화)와 늘품(발전)을 바라는 벼름소 ‘벼르다’를 으뜸꼴로 하는 ‘벼름’은 '몫'에 해당하는 단어로 '벼르-(分類)'라는 동사 어간에 名詞化接尾辭 '-ㅁ'이 결합된 형태. 벼름 ← 벼르-(:分類) + -ㅁ(접미사) ≪심재기 (1982) [국어어휘론] 집문당≫‘ 일하는 시간 표준 벼름법(作業時間 標準 配賦法)≪초중등교수요목집교육부군정청≫으로 쓰이고, 덧나면 ‘가로글씨체를 신문 지상에 발표한 뒤로부터 수십 년 동안에, 혹 혼자 궁리하고 혹 동지들과 각자의 벼름(案)을 내어놓고서 토론?연구하기도 하다가, 1942년 10월에…≪최현배, 나의 저서를 말한다≫’로 쓰이고, 인쇄 분야에서는 ‘정해진 공간 안에 가장 효과적으로 정보를 선택 정리하고 배열시키는 것’을 ‘벼름질’이라 하고 또 유기제작에서 ‘담금질한 물체는 담금질시 그 모양이 다소 꼬이거나 비틀어지는 등 변형되는데 이 변형된 재료를 바로잡는 작업을 벼름질이라고 한다.’ 건축분야에서는 ‘시공에 앞서 벽돌의 배치를 하여 보는 것을 ’벽돌벼름’ 이라고 쓰고 있다. ‘소’는 『-소 ??다른 것에 붙여 쓰는 중심 재료(材料)라는 뜻으로, 활을 만드는 재료로서의 대나무를 이르는 말』
가 잡히면 치러지는 마을굿이나 서낭굿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늘얼맞이의 배움맞이와 땅얼밟기의 알음알이 그리고 새물내기 대동굿’ 얼개다. 여기서 얻은 ‘맞이-알이-내기’를 갈배움의 섬돌 얼개로 삼고, 풍물의 ‘내고-달고-맺고-풀기’를 배움 자리로 하면 일제의 식민사고에서 만들어진 갈배움새(교수-학습과정안)의 ‘주제(主題/しゅ-だい)’, ‘도입(導入/どうにゅう:도우냐우)-전개(展開/てんかい:덴카이)-정리(整理/せいり: 세이라)(consolidation)’와 같은 무미건조한 틀거리와 갈말(학술용어)를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애쓰면 한국의 냄새와 빛깔을 보다 많이 드러내는 국악 배움벼름(수업안)을 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배움 섬돌(단계)
배움결
배움자리결
맞이
(배움?S이)
알이
(알음알이)
내기
(새물내기)
앞엣거리
말글살이
견주기
서로맞이
살핌자리
본데자리
부림자리
추스르기
새물
모음새
책모음새
이러한 생각 미립과 얼개를 가다듬으면 우리 국악 갈배음을 서양의 생각미립만이 아닌 우리 새얼(문화) 생각미립으로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3학년 새물내기 갈배움새
날짜
2005 , 5. 30 ,
마당
<넷째마당>우리들의 꿈. 2. 또 다른 내가 되어
교사
벼름소
진주를 품은 조개
여줄가리
(5/9),교과서<읽기>100-105쪽
5. 맺음말
헌법 9조는 민족 새얼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바탕가리(근거)를 내보이고 있다. 이는 교육무늬결 갈말에서 마땅히 토박이말을 먼저 쓰고 그 다음으로 만든 말을 쓸 수 있고, 그런 다음에도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말을 쓰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더군다나 식민 말글을 그대로 받아쓴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자원으로 배우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우리 새얼의 사북자리결을 그들에게 내어주면 새얼 종속이라는 기울기를 가지게 된다. 이를 새롭게 살피고 고쳐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애써야 한다.
(붙임) 이 땅의 날짜 셈
이 땅의 날짜 셈을 살피면 아기의 자람과 아랑곳한 속살이 있다. 때곳품에 따른 굿은 삼시랑할매와 조상님께 아이의 자람을 알리고 이제까지 자람에 고마운 마음을 아뢰는 자리가 되고 앞으로 튼튼하고 고이 자라기를 비손하는 자리가 된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이 나라밖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 겨레 나름의 셈살이가 있는 까닭에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제나라 셈살이에서 비롯된 말을 달력 말로 쓸 필요가 있다.
이에 이레날 이름으로 우리 토박이말을 써야 하는 까닭을 가다듬으면
첫째로 우리 날짜살이 셈말의 전통을 잃지 않고 이어갈 수 있다.
둘째로 달력에 이웃 나라의 식민언어를 그대로 쓰는 틀을 벗어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말의 소리 줄가리에 터전을 둔 어휘부(머릿속 사전)를 늘품할 수 있다.
넷째로 이 땅의 날짜살이 셈 새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모으면 우리 셈새얼(수문화)을 바탕으로 새롭게 다듬어 마련한 달자취의 이레날을 ‘밝날, 한날, 두날, 삿날, 낫날, 닷날, 엿날’로 쓰면 이레날은 ‘밝날(Sun), 한날(Mon), 두날(Tue), 삿날(Wed), 낫날(Thu), 닷날(Fri), 엿날(Sat)’과 같이 적을 수 있다.
24지철을 바탕으로 네철과 아랑곳한 속살을 밝혀 적으면 봄철과 아랑곳한 달은 ‘들봄달(2월), 온봄달(3월), 무지개달(4월)’ 이고, 여름철과 아랑곳한 달은 ‘들여름달(5월), 온여름달(6월), 더위달(7월)’ 이고, 가을철과 아랑곳한 달은 ‘들가을달(8월), 온가을달(9월), 열달(10월)’ 이고, 겨울철과 아랑곳한 달은 ‘들겨울달(11월), 섣달(12월), 한밝달(1월)’로 적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모아 우리 겨레의 삶이 드러나는 이 땅의 셈살이와 아랑곳한 달자취를 만들어보는 일은 말글살이를 넉넉하게 한다. 셈살이의 어휘부(머릿속 사전)를 이루는 이 땅의 이야기 들을 챙기고 배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일은 이 땅의 소리줄가리(음운 체계)와 새얼을 존중하고 늘품시키는 말글살이 터전이 된다.
아래 자료 ‘국어기본법을 따른 일본식 의역한자어를 벗어나는 초중학교 국어 아랑곳 소납 배움 갈말(전국국어교사모임/제주모임 , 신태일, 국어필수용어별학년 속살에 한말본 벼름을 더함)을 올리는 일도 우리생각으로 갈배우기는 바라는 마음이 있다.
<특별기고 3>
우리 내부에서의 영어의 위상과
그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검토
김유중(한국항공대/국문학)
1.
한국 사회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막강하다. 입시에서도, 취업에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직장 내 승진이나 보수 결정에 있어서까지도, 영어 실력은 전공 지식에 앞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필수 사항이다. 이러다보니 막대한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비용이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투입된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투입되는 만큼, 우리 사회나 국가가 총체적으로 영어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간 제대로 진지하게 논의된 바가 거의 없는 듯하다.
흔히 우리나라 학생들은 일단 대학에만 들어오면 공부와 담 쌓고 지낸다고 한탄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 잠시라도 대학 주변에서 지내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절대 그냥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것처럼 그렇게 치열하게는 아니지만, 한국의 대학생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열심히 공부한다. 지금이라도 평일 아침 대학 도서관을 찾아 가보면, 이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굳이 시험 기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빈 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우리 대학 도서관의 현실이다.
그런데, 막상 그들이 펼쳐놓고 공부하는 책을 유심히 살펴보라. 십중팔구는 취업 준비와 관련된 영어 토익이나 토플 책, 아니면 고시 서적일 것이다. 고시생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것이 당연시되므로 별도의 토를 달 필요는 없겠지만, 일반 학생들이 평소에도 전공 서적이 아닌 영어 참고서를 끼고 사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일반적으로 대학교 전공 성적이 우수한 사람보다도 영어 토익, 토플 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더 신용한다는 데 있다. 교양이나 전공 학점도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영어 시험 성적이 더 우수한 사람이 직장에서는 더 환영을 받는다. 전공 성적은 일정 수준 이상이면 크게 문제삼지 않는 반면, 토익 성적이 어느 수준이냐 하는 것은 취업 결정 시 매우 큰 비중으로 작용한다. 전공 성적이야 학교에 따라, 그리고 교수 개개인의 성향이나 기질에 따라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으나, 영어의 경우에는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맡아 관리하고 채점하므로 믿을만하다는 것이 영어 성적을 중시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우리 대학생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전공보다 영어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매달린다. 취업문이 점차 좁아지면서, 취업 시 요구되는 영어 토익, 토플 시험의 성적 기준도 그간 많이 상승하였다. 예전 같으면 토익 성적 850점 이상이면 공기업 사기업을 막론하고 거의 합격한다고 봐도 틀림없었는데, 작년의 경우에는 토익 성적 만점인 990점을 받고도 취업에 실패한 사례까지 생겨난 바 있다. 이런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어 활용 능력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대졸 취업 예정자들에게 거의 원어민 이상의 수준과 실력을 요구한다. 과연 그들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 능력을 얼마나 유효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는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요컨대 영어 실력은 사회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기본 능력이며, 영어 성적이 뛰어난 사람은 일단 믿고 쓸만하다는 생각이 사회 저변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탓이다.
물론 학업이나 연구의 목적을 위해서, 혹은 맡은 바 업무상 반드시 영어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토록 강조하는 만큼 우리 사회 내부에서 영어가 광범위하게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단지 지식과 교양의 척도로서, 그리고 성실성의 지표로서 영어 성적이 개인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판단 기준에는 사실상 어떠한 과학적인, 또는 통계학적인 근거도 확보되어 있지 못하다. 단지 그럴 가능성이 조금 클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이유라면 이유의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로 말하자면 이공계 전공자의 경우까지도, 왜 수학이나 화학, 물리 성적이 아니고 하필 영어 성적이어야만 하는지가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폐단은 결국 우리 사회 내부의 인재 선발 과정상의 불합리성과 문제점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예라고 하겠다. 인재 양성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공신력 있는 교육 과정을 수립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를 연구, 도입하기보다는, 우선 편한대로 객관적인 잣대로 통용되고 있는 영어 성적을 선발을 위한 기준으로 활용하고 보자는 안이함이 오늘날의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처음 이렇게 해서 시작된 영어 능력에 대한 맹신 현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국가 사회적인 인재 선발을 위한 제도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 매년 수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하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영어 공부에 매달리게 되었다. 때론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매년 상당수의 대학생들이 휴학을 해가면서까지 자비를 들여 영어권 국가로 일정 기간 동안 어학 연수를 떠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학은 대학 나름대로 이러한 학생들의 폭발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영어 원어민 교수를 다투어 채용하는 한편, 조금이라도 학생들의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자 갖은 묘안을 짜내어 영어 학습 관련 교과와 과정을 내실 있게 운영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하더라도 영어 한 가지만 확실하게 잡으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되면서, 우리 주변에는 최근, 아예 어릴 때부터 자녀들을 영어권 국가로 조기 유학보내는 풍조가 점차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리고 과연 무엇을 위해서 우리 사회 전체가 이런 식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가면서까지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목을 매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계화 시대에 개인적, 국가 사회적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라는 명분은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아무래도 문제의 핵심은 영어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 그것 때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미신에 가까운 믿음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 영어가 모든 교양과 지식의 척도가 될 수는 없으며, 인재 선발을 위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도 없다. 영어 경쟁력이 물론 중요한 지표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그것이 우리말 경쟁력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사회 생활에 잘 적응하고 대처해나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말이나 글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표현, 전달하는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
우리 나라 대학 교육이 부실하다고 매도하고 탓하기 이전에, 왜 그것이 이렇게 부실해졌는지,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사회적 검증과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2.
최근 들어 우리나라 대학들에서 새롭게 번지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전공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내용은 단순히 학교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육 관련 주무 부처와 대학 교육을 관리, 감독하는 단체 및 기관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불러 모은다.
국제화, 개방화 시대에 고급 전문 인력들의 영어 능력이 우리나라가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한 기초 발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공에 관계없이, 모든 분야의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일인가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 아니냐를 놓고, 외부에서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전공 특성에 따라 얼마든지 허용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공계 몇몇 강좌의 경우, 대부분의 용어가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조사와 서술어만 빼면 거의 영어로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도 들은 바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령 교수가 능력이 되는 경우에 차라리 영어로 강의를 진행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리라는 생각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된 상태에서 대학 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반 강제적으로, 일률적으로 권장될 때 발생한다. 말할 것도 없이 상당수의 강의는 영어가 아닌 정확한 우리말로 진행되었을 때 월등 효율적이다. 실제로 영어 전공 강의를 수강해본 대부분의 학생들의 반응이, 어떤 이유에서건 강의의 내용이나 수준에 대해 대체로 불만을 표출한 경우가 많았다는 조사 결과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교육의 효율성이나 학문 자체의 발전과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되는 전공 분야의 영어 강의를, 우리 스스로가 앞장서서 권장해야 할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범위를 조금 넓혀 본다면, 현실을 무시한 이런 일률적인 강조는 미처 생각지 못한 또 다른 문제점들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국문학, 국사학을 비롯한 국학 분야 전공자들의 경우일 것이다. 물론 이들 전공의 교수나 강사 가운데는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구사에 상당한 강점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있긴 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 가운데 영어 강의뿐만 아니라, 영어로 학술 논문 등을 써서 국제적인 학술지 등에 발표하는 사례도 있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해당 전공 분야의 학생 교육이나 해당 학계의 발전을 위해, 이러한 활동이나 성과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예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해외에서 인정받아야지만 우리나라 국학 분야의 연구가 발전한다고 볼 수 없으며,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이야기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국학 분야의 수업이나 연구 성과를 외국어인 영어를 통해서 한다는 것은 여하한 경우에라도 예외적인 경우로 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정도를 벗어난, 일종의 파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예외 내지 파격을, 우리나라 대학들이 해당 전공 분야의 교수들에게까지 일률적으로 권장, 강요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학술 연구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 분야 전공자들에게 국내와 국제 학술지의 차등화를 받아들이라는 요구도 우스운 일이지만, 더욱 우스운 것은 전공 분야 연구 능력이 아닌 영어 구사 능력으로 학문적 업적 자체가 이해되고 평가되는 현상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국내외에서 활동 중인 국문학이나 국사학 전공자가 해외에서 발행되는 한국학 관련 학술지에 영어로 발표한 논문들이 국내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바가 없다.
대학 내부에서의 이와 같은 맹목적인 영어 신봉 경향은 결국 학문 자체의 종속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현재에도 영어권 국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온 교수들의 숫자가 적지 않지만,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학교 입장에서는 어차피 비슷한 수준의 전공자인 경우라 하더라도, 영어로 강의를 진행할 수 있고 영어로 된 학술지에 발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임용하는 편이, 향후에 추가적으로 있을지도 모를 여러 가지 평가 등에 대비해두는 차원에서도 더 나아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는 그렇게 해서 임용된 교수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 역시 은연중 영어권 국가로의 유학을 선호하게 되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다. 이런 과정이 세대를 거쳐 거듭 반복되다 보면 결국 우리 학문의 토대는 그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게 종속화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산출된 학문적 성과나 업적이라는 것마저도 영어권의 학계에서 인정받은 이론과 자료들을 통해서만 입증 가능한 꼴이 되어버리니, 이러한 판단이 반드시 과장되었다고만 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극단적인 발언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럴 바에야 차라리 국내의 모든 대학들을 미국이나 영국 대학의 한국 내 분교 형태로 전환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 모른다.
우리가 진정으로 염려해야 하는 것은 학문 자체의 토대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상, 우리 대학과 학계는 영원히 세계적인 수준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남이 만들어놓은 이론에 근거한 학문, 남의 권위를 통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업적을 가지고 마치 우리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낸 성과인 양 으스대고 자랑해봐야 인정받을 수도 없을뿐더러,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것이 되지도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세계에 내놓을 수 있을만한 학문적 토대를 우리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하나하나 만들고 세워나가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물론 남이 이루어놓은 업적이나 성과를 충분히 참고해볼 필요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단순히 참고하는 것과 그것에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태도와는 분명히 구분하여야 할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세계화란 단순히 외국의 것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닐 터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나름의 시각에서 세계에 자신 있게 소개할만한 업적과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한 성과가 외국에서 인정받을 수 있게끔 소개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긴 하다. 그리고 그러한 소개를 위해 영어를 도구로 활용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영어를 통해서가 아닌, 우리말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성과를 세계 학계에 알리고 인정받을 수 있을 때, 그 때에야말로 우리 학문의 진정한 세계화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론 : 영어 공용화론, 조기 유학 열풍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한때 우리 사회 내부에서 심각한 화두로 떠오른 바 있는 영어 공용화론의 경우를 놓고 잠시 생각해보자. 영어의 공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꺼낸 데에는 물론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이들의 주장에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대한 심사숙고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은 세계화와 자유 무역으로 대변되는 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땅덩어리 좁은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보다 넓게, 전향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면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적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영어 공용화를 시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내부적인 이익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본다면, 과연 민족이나 사회의 정체성을 훼손해가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국가적 이익이란 과연 무엇인가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미래 어느 시점에 중국어 경제권의 영향력이 영어권의 영향력을 능가하게 되는 경우, 영어와 마찬가지로 중국어도 공용화하자고 할 것인가? 국제 통상이나 경제 활동을 위한 영어 활용 능력은 관련 분야의 유능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경제 이외의 분야들, 예컨대 문화나 예술, 학술 활동 등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영어 공용화 정책은 더욱 그 근거가 약하다. 오히려 어설프게 공용화 정책을 밀어붙였을 때 몰려올 폐단이,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당장의 이득보다 더 클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최근 일각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영어 조기 교육론에 대해서도 필히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말도 제대로 읽고 쓸 줄 모르는 초등학교 1, 2학년들을 대상으로 남의 나라 언어인 영어 교육을 서둘러 실시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심하게 표현하면 이는 서울 강남 지역 일부에서 불고 있는 치맛바람을 아예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하고 제도화하자는 이야기나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정책의 강행은 결과적으로 ‘성공하려면 영어부터 잘 해야 한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곧 유능한 사람이다.’라는 그릇된 인식을 어릴 때부터 확고하게 심어줄 뿐이다. 아직 가치관이 완전하게 자리 잡지 못한 초등생들에게까지 이렇게 무분별하게 영어 학습을 강요하였을 때, 과연 이들이 커서도 우리 나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닐 수 있을 것인지, 아니, 그보다도 우리말이나 글의 올바른 사용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