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1-15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환대’는 누군가를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날이 뜨거울 때에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 ‘환대’를 하며 시작됩니다.
(1-2)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은 더위를 피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쉼을 가지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모습은 신적인 모습이 아니라 본문 2절에서처럼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사람 셋을 보았고,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곧장 달려나가 영접했습니다. 현대 사회의 시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고대 근동사회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합니다.
유목민 삶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근동에서 손님 환대는 죽음에서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당시 풍습은 누구든지 자신의 장막으로 다가오면 쉬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기에 오히려 환대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고 예외적인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19장에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한 것을 보아서도 당시의 풍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어떻게 맞이 하였습니까?
(3-4)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아브라함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청하며 자신의 집에서 쉬고 가기를 요청합니다. 4절에서 물을 가져와 발을 씻으라는 표현은 당시 먼지가 많은 건기의 가나안 길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지금처럼 운동화가 아닌 샌들을 신고 다니는 문화에서 발은 항상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씻을 수 있는 물을 제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은 충분해 보이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6-8)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분명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떡을 조금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쉬는 것을 승락하자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떡을 만들라고 하고, 자신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를 하게끔 하였습니다.
송아지 요리는 매우 귀한 것으로 아주 중요한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하던 음식입니다. 여기에 우유까지 준비하여 아브라함은 지극정성으로 나그네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나무 아래에서 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대화의 주제가 변하게 됩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아브라함의 장막에 방문한 그들은 대화의 대상을 바꾸어 아내 사라가 어디있는지 묻습니다. 이제 이들의 방문 목적이 드러납니다. 사라가 장막에 있다는 대답을 듣자 그들은 방문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10-12)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이들은 사라가 내년 이맘때 아들이 생길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할 때 사라는 분명 장막 문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웃어 넘겼습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아 생리가 끊어졌고, 아브라함마저 늙었으니 그들이 자녀에 대한 희망 조차 가질 수 없는 신체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족과 고향을 떠났을 때만 해도 그와 사라는 신체적으로 아들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속적으로 지나면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어 후손을 이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본다면 그들에게 아들이 생기기까지 시간을 지연시킨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조금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7장에서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라도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속으로 웃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부부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들에게 자녀가 생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지만 때때로 상황을 바라보며 절대 불가능이라고 단정짓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바심을 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오히려 실패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지만 사람인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속으로 웃어 넘겼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은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직접 밝히십니다.
(13-14)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본문 13절에서부터 나그네들은 이제 여호와라는 것이 정확하게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웃음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통해 자녀가 태어날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사라의 모습으로 오늘 본문은 마무리가 됩니다.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사라는 자신이 웃었던 것이 들키게 되자 바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고, 사람들은 자신의 거짓이 드러나게 되면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비이성적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금 네가 웃었다고 말씀하시며 거짓말을 넘어가 주시지 않습니다.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웃음으로 넘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며, 불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금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상황적으로 불가능할지라도 하나님께 있어 불가능이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각자에게 극한 상황이 다가올 때가 있고, 멸시와 환난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지만 고난과 환난이 그들을 따라왔고, 자녀를 주시겠다고 했지만 신체적인 가능성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은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갈등만 더욱 심해졌고, 상황으로 볼 때 더욱 괴로울 뿐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상황이 불가능을 말할지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자신이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습니까? 본문에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웃으며 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상황이 아닌 주님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며 나아가야 하는 성도들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환대하며 그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바라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들을 시도하다가 환난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에도 주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신뢰하며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