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y, I'm leaving..."
나즈막히 들려오는 목소리..
눈을 뜨고 있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동이 텄고
나츠코와 수현은 보스니아로 떠날 채비를 마치고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은 너무 아쉬운데
피곤에 찌든 몸을 일으키기 힘들어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bye' 한마디 인사만 해주었다.
찰칵...문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눈을 떴을땐 작은 창이 감당하기 힘들만큼 한가득
두브로브닉의 뜨거운 햇빛이 방안을 가득채우고 있었다.
나츠코가 갔다. 수현이도 갔다.
이미 떠난지 3시간이 지난 시간이었다...
전날 사둔 커다란 바게뜨를 조금 뜯어 먹고
혼자 집을 나섰다.
미세스 다웃파이어같은 할머니는 어제 나츠코에게 역정내시던 표정을 싸악 감추시곤
내게 환하게 아침인사를 해주셨다.
어제일은 어떻든 간에 아침에 웃어주니까 기분은 좋아졌다.
민박집에서 old town까지 걸어서 약 20분이 걸리는데
두브로브닉의 잔인한 태양은 내 연약한 살을 20분도 채 걸리지 않고
구리빛으로 구워버렸다.
전날과 같은 루트로 old town을 돌아보고나니,
이제는 두브로브닉 old town을 외부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어느 여행기에서 본 적이 있는 그 구도로 사진을 찍고 싶어서
old town을 빠져나와 열심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도도 없이 높은 곳만 찾아 올라갔다.
솔직히 지나고 나서 느끼는 거지만,
2004년 유럽 여행중 가장 힘든 시간이 바로 이때였다.
물이 마시고 싶었는데 물 사러 가게에 들어가는것도 귀찮게 느껴지고
오르막길 오르느라 힘빠진 다리 쉬어가고 싶어도
오히려 다리 멈추게 하는게 더 힘들게 느껴져서 관성의 법칙에
두 다리의 움직임을 맡겨두었다...내 의지로 걷는게 아니라
내 뜻과는 상관없이 다리들이 저절로 번갈아가며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길게 뻗은 Beach>
이쯤인것 같았다..사람들이 사진 찍는 장소가..
저기 저 아래에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고,
작은 바위 위에서 바다속으로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땀 삐질삐질 흘리면서 종아리엔 타조알만한 알통 만들면서 꾸역꾸역 올라왔거늘
난 저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왠지 그곳엔 비키니를 입지 않고서 들어가는 것이 불법인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검은색 긴 츄리닝 바지와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완전 복장 불량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수영복 챙겨오는건데..(아예 갖고 가지도 않았음)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가 그림의 떡처럼 느껴졌다.
발이라도 한번 담그고 돌아올걸..
터벅터벅 내려오다가 심장 멎는줄 알았다.
5~10분쯤 걸었을까..
내가 거의 한시간을 걸어올라온 길 말고
old city에서 이곳으로 바로 통하는 지름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구시가에서 나와서 그 근처 마을을 한바퀴 돌아나와서
오르막길을 수십분 걸어올라왔었다.
억울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나는
이 지름길을 이용해서 저녁에 다시 올라오기로 결심했다.
<내전으로 인해 무너지고 부서진 두브로브닉의 곳곳을 표시해둔 표지판>
무지하게 배가 고파왔다.
구시가로 다시 들어와서 작은 골목길 사이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로 들어갔다.
맛은 없었지만 살기 위해선 먹어야했다.
작은 간이 벤치가 골목길 가에 놓여있었는데
마침 맞은편 벤치에 너무나도 익숙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젊은 부부와 아직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아기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그들은 부산에서 왔는데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3개월정도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동유럽 일주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 가족, 나 말고도 한 사람의 한국 사람이
두브로브닉에 더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자신들은 그날 저녁에 두브로브닉을 떠날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한명의 한국 사람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나도 다음날 아침에는 두브를 떠나 스플릿으로 가야했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나는 페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old town 입구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야드롤린냐(jadrolinja) 페리 사무실을 찾아나섰다.
이곳 페리 사무실은 페리 선착장 바로 맞은편에 있으며
국제선 버스 정류장과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페리 사무실로 들어간 나는 다음날 오전 9시에 출발하여
이튿날 오전에 리예카에 도착하는 페리를 예약하였다.(195kn)
나는 여행지에서 주로 카드를 사용하는데
그런면에서 크로아티아는 참으로 불편한 나라이다.
카드를 잘 받아주지 않아서 몇번이나 환전을 다시 해야 했는데
다행히 수수료는 없었다.(말로는 없다고 했는데 어쩌면 계산했을지도..)
내가 버스를 마다하고 페리를 이용했던건
페리를 타게 되면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일주일내로 스탑오버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리예카라는 크로아티아 북쪽에 위치한 도시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슬로베니아로 이동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두브로브닉-리예카행 폐리를 예약했고
그 중간위치에 해당하는 스플릿에서 스탑오버할 생각이었다.
<페리 사무실 앞엔 리치 피플들의 요트가 늘어서 있지요>
다시 버스를 타고 민박집에 들렀다가 피부를 진정시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두워지니 선선한 바람도 불고 돌아다니기 참 좋았다.
낮에 해수욕을 즐기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두 옷을 갖춰 입고
old town 곳곳을 신나게 누빈다.
독일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휴양지라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여기저기 독어밖에 안들린다.
갑자기 엄습하는 외로움..
쌍쌍이, 아니면 가족들끼리 무리지어 다니는 그들 사이에서
혼자 걸어다니는게 너무 싫게 느껴졌다.
얼른 발걸음을 재촉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후다닥 구시가 출구를 빠져나와서 버스를 탔다.
<버스 시설 괜찮죠?>
방에 들어와 조용히 가방을 쌌다.
내일 아침에 일찍 출발하려면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할것 같아서
빠뜨린것 없는지 잘 생각해가면서 챙겨넣었다.
그리고 엎드려 누워서 일기를 쓰는데
민박집 할머니가 문을 두드리시며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으셨다..
할머니는 내게 '화장실에 내가 두루마리 화장지 두 롤을 뒀는데
지금 하나밖에 없다..혹시 네가 하나 가져갔니?'라고 물으셨는데
사실 그 말투는 물어보는게 아니라 취조하는듯이 공격적이고
위협젹이기까지 하였다.
'할머니, 저는 모르겠는데요..'
'아니..모르다니, 우리집에 지금 너와 나밖에 없어, 그리고
나는 분명히 오늘 아침에 화장지 두 롤을 화장실에다 두었고
지금 하나뿐이잖아.. 니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게 어디로 갔단거니?'
아..정말 깬다. 이 할머니..
난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나 자신을 변호했고
그 할머니는 큰 눈동자를 한번 부릅뜨시더니
방문을 닫고 나가셨다.
아..정나미 떨어진다..
그리곤 상처받은 마음 겨우 진정시키고 다시 일기쓰기에 전념하는데
할머니가 다시 노크를 하셨다.
'혹시 너 독일에서 왔니?'
'독일 여행을 했어요' 라고 대답을 했더니
'혹시 너 부산에서 왔니?'라고 되물으셨다.
'아뇨..왜 그러시죠?'
부산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좀 놀라서 다시 물어보았다.
'작년에 우리집에서 묵었던 여자애가 부산 출신이고
독일에서 공부중이랬는데 그 애가 너와 많이 닮았어...'
아..이 찜찜한 느낌..
이 할머니가 내게서 누군가를 추억하고 있군..
별루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다시 문을 닫고 나가시는 할머니,
내가 펜을 잡기도 전에 다시 문을 여시면서
'너 머리카락 색 정말 자연산이니?'라고 물으신다.
'네..전 염색 안하거든요...'
'오~~정말? 난 네 머리카락 색깔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해..
염색하지 않고 이런 색깔을 가질 수 있다니 너무 부러워..'
아니, 이 할머니가 지금 내게 왜이러실까??
문득 할머니가 외모만 Mrs.다웃파이어가 아니라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여장남자인게 아닌가 생각되었고
이 집에 둘뿐이라던 할머니 말씀이 걱정으로 다가왔다.
문을 꼭 걸어잠그고 창문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내가 외롭긴 하지만,
할머니..이건 아니거든요???
첫댓글 오랜만의 여행기 재미있게 잘 읽었어.. 그 할머니 조울증 환자 같다
음, 혼자하는 여행, 외로워.. 그 휴지는 어디 갔을까?
여행기 마저 올리는건가?요즘 일케 여행사진보면 병적으로 자꾸 어딘가 가야한단 생각이 지배적인데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어....ㅠㅠ
그 할머니 참... ^-^; 언니.. 잘 지내시죠?? 요즘 싸이도 문을 닫으셔서... ^-^;
올만에 스프여행기 업뎃되었네~! 미세스 다웃파이어땜에 진짜 기분나뻤겠다, 아무리 싼값에 민박이래도 엄연한 고객인데 진짜 웃긴당...ㅠㅠ; 근데 그 갈색머리가 자연산이었구나~~~
완전 공포영화 주인공된 느낌..그 할머니 때문에..암튼 두브는 바다도 좋고, 햇살도 좋고, 경치도 좋은데 사람들이 안좋았어요..완전 우릴 걸어다니는 돈으로 보더라고... 소년님, 그 휴지 좀 찾아서 나의 억울함을 좀 풀어주시죠~~정말 눈물 나올지경이었다구요..
클스티 언니, 이거 거의 3개월만에 쓰는 여행기야..몇번이나 쓰려고 했는데 요즘 내 맘이 좀 그렇잖우.. 나도 요즘 홍콩 가고 싶다고 말했지? 피비 언니 홍콩 여행기 쏴악 다시 읽고 레스토랑, 음식 순위 매긴거 다시 훑어보고 있다구... 나무야..이젠 싸이가 싫어서 거의 안들어가..싸이가 재미없어졌어...
마린언니~~~ 내가 언니만큼만 말빨이 있었다면 그 할머니 쏘아붙이고도 남았을텐데..그 할머닌 처음부터 우리더러'너희는 싸게 묵으니까 부엌도 들어오지마'라고 하셨죠..암튼, 그 할머니 미웠음..내 머리갖고 뭐라실땐 소름끼쳤음~~
아.. 정말 스프언니 여행기 읽으면 정말 제 이야기를 읽는것 같아요. 저도 세인트 존 성채 찍으러 언덕을 헥헥거리고 올라갔다죠;; 그 외에두요 ㅋㅋ 그나저나 할머니 넘 시러요;; 소름 오싹~
마로 안녕? 너두 종아리에 알 생겼었니? 그 할머니 작년 여행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을거야.. 좋은 하루 보내...
혼자..여행을...정말 대단하세요........^^; 전...못하지 싶어요...
혼자 떠나는 여행도 좋아요..밥먹을때 뻘쭘한거랑 사진 찍기 불편한거 빼곤~~~
ㅎㅎ...두루마리 화장지 가져다 어디다 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