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한말 전남 중서부 호령한 불세출 의병장입력 2023.10.23. 15:59이관우 기자
③심남일
함평 월야 출신으로 본명은 수택
호 '남일'은 전남 제일의 의병 의미
영암 국사봉에 부대 '호남의소' 결성
뛰어난 지력과 군율 통해 기강 유지
日과 전투 26회 거성동서 70명 사살
의병해산 명령 이어 밀정 신고로 체포
대구서 39세로 순국·대한민국장 추서
심남일 의병장 영정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③심남일
심남일 의병장은 서당 훈장이었다. 지식인은 대체로 나약하다고 하지만, 소르본대학 교수로 있다 조국 프랑스가 나치 치하에 들어가자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를 떠오르게 한다.
서당 훈장이 전남 중남부 지역을 호령하는 의병부대 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1871년 월야에서에 태어난 심남일은 본명이 수택이다. 그가 거병하면서 전남 제일의 의병을 지향하며 호를 '남일'로 했다고 한다.
그는 거병하며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 입고/ 말을 타고 남도를 바람처럼 달리리/ 만약에 왜놈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모래밭에 죽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시를 지었다. 그의 결연한 의지가 이 시에 함축되어 있다. 이는 곧 '남도 의병'의 지향점이다.
신광면 덕동고개에서 거병했을 때, 월야 출신이 많았다. 1919년 4월 8일 엄청난 규모로 발발한 함평 문장 만세 시위에 월야 출신이 항쟁에 대거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병 활동이 왕성한 곳에서 만세 시위가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심남일은 거병할 때 김태원 의병부대와 연합해 영광, 장성, 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1908년 4월 김태원 의병장이 어등산 전투에서 순국하자 심남일은 의병활동이 활발한 영암지역으로 이동했다.
영암 금정에 있는 국사봉에서 영암 의병을 주축으로 '호남의소(湖南義所)'를 결성했다. '호남의소의 대장'이라는 뜻의 '호남의장(湖南義將)'이라는 직인을 사용했다. 호남의소 총사령관임을 알려준다.
호남의소라는 부대 명칭이 있음에도 일제는 '남일파'라는 이름으로 그의 의병부대를 불렀다. 호남의소가 심남일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 여겨진다.
서당 훈장 출신으로 지략이 뛰어난 심남일은 호남의소를 체계적인 전투부대로 발전시켰다. '모사장', '서기겸 모사',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탐매' 등 여러 조직체계에서 이를 잘 말해준다.
호남의소 선봉장 강무경, 중군장 안찬재, 모사 권택 등이 유생들이었다는 점도 이 부대의 성격을 이해하게 한다.
심남일은 의병부대가 지켜야 할 군율 10가지를 공포했다. 가장 핵심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군율을 어긴 자는 목을 쳤다.
반면 전쟁 중 궁핍한 백성이 있을 때는 부족한 군자금을 과감히 풀어 구휼하기도 했다. 여러 지역의 의병들이 심남일의 지도력에 호응해 연합 의병부대가 결성되는 원동력이 됐다.
심남일 의병장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위충사
호남의소 사령부가 있는 영암 국사봉은 산 정상에 포대까지 설치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일본군이 국사봉으로 접근하면 정상에서 대포를 쏴 격퇴했다는 기록이 일본군 전투일지인 '진중일지'에 보인다.
호남의소는 나주, 함평, 영암, 보성, 장흥, 강진, 해남 등지에서 신출귀몰 유격전을 벌였다. 1908년 4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해남 성내,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1909년 7월 장흥 봉무동 전투에 이르기까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필자가 확인한 26회 이상의 전투를 치러 일본 군경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쳐나가고, 강현수(강무경)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동요가 생겨날 정도였다.
호남의소는 직할부대와 다른 지역 의병부대를 엮은 일종의 연합군이었다.
의병부대의 조직을 보면 여러 지역 의병장이 부장(副長)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군장인 이덕삼은 해남 의병장 출신이고, 역시 기군장 김치홍은 영암, 군량장 이세창은 장흥 의병장, 중군장 안찬재는 보성 의병장이었다.
심남일 부대 의병부대 부하 장수들은 독자적 의병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 의병부대를 조직한 심남일은 다른 지역에서 대규모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안규홍, 전해산, 조경환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독립전쟁을 치렀다.
한말 남도 의병이 취한 '분진'과 '합진' 전술을 능란하게 운용했다.
또한 심남일은 현지 사정에 밝은 예하 부대의 판단에 따라 유격전을 전개해 일본군에 타격을 가했다.
유명한 남평 거성동 전투 당시 작전참모인 모사 권택이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하여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하여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하여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에 매복하여 서로 응원하게 하라"고 한 작전 지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호남의소가 계획을 치밀히 세워 부대를 조직적으로 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성동 전투에서 일본군 70여 명을 사살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거성동 전투는 우리 측도 박민홍 의병장의 아우 박여홍도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곧 게릴라전이 아니라 전개된 사실상 전면전이었다.
호남의소가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퇴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호남의소는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무려 26회에 걸쳐 일본 헌병대나 수비대 등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한대동-장흥 유치 신풍-함평 용진산-함평 석문산-해남 성내-화순 능주-나주 다시-보성 복내-나주 남평-화순 능주-보성 웅치-함평 천동- 장흥 장서-영암 금마(해산 1909.7.21) 등 전남 중·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남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1909년 7월 순종 황제의 의병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심남일은 평생 동지 강무경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면서 능주의 풍치 굴에서 부상당한 곳을 치료하다 밀정의 신고로 1909년 10월 9일에 체포됐다.
감옥에 갇힌 심남일은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 없는 의병들이 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라고 말했다. 대구 감옥에서 1910년 10월 4일 순국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심남일 의병장의 인영이 찍혀진 종이가 '남일 심수택의병장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심남일은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초야에서 십년 동안 글 읽던 몸이/ 한 번 전쟁에 나서니 죽음이 가벼웠네/ 나라의 원수를 버려두고 천지가 어두워지니/ 내 죽는 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그의 공훈은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에 충분하다.
함평군 월야면에는 '남일 심수택의병장기념관'이, 의병을 일으켰던 함평군 신광면 덕동고개에는 남일공원이 조성돼 있다.
광주공원에는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심남일 의병장의 중손자 심승남씨가 지난 20일 '남일 심수택의병장기념관'에서 증조부의 업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도 의병' 현장을 찾아서
지난 20일 함평군 월야면 '남일 심수택의병장기념관'에 특별한 게스트가 찾아왔다. 바로 심남일 의병장의 증손자 심승남씨였다.
그는 기념관에 들어서기에 앞서 증조부 심남일 의병장의 업적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이따금 내부로 들어가자 심남일 의병장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갓을 쓰고 한 손을 치켜세운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동상에는 "나를 따라서 조국과 겨레를 지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기념관 안에는 심남일 의병장의 초상화를 비롯해 연대기, 사진, 호남의소의 편제와 직책·훈령, 인영(印影) 등이 전시돼 있었다. 이를 통해 심남일 의병장의 항일 전쟁사를 한눈에 파악·이해할 수 있다.
이곳에선 매년 심남일 의병장을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 중이다. 지난 4일에는 제113주기 추모식이 진행됐다.
심승남씨는 "한말 남도 대표 의병장이자 증조부인 심남일의 업적을 널리 알려 남도 의병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