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7월 30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본문 : 창세기 2장 25절, 히브리서 4장 13절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세기 2장 25절, 새번역>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 새번역>
2008년 4월 전까지는 교도소와 구치소 등 교정시설에서는 ‘알몸수색, 알몸 신체검사’가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입소 또는 이송 수용자가 신체의 은밀한 부위에 담배 등을 숨겨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칸막이나 차단막 등이 설치된 독립 공간에서 알몸 상태로 신체검사를 해 온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와 지적들이 있었지만 교정시설 측에서는 연간 9만 여명의 신입 수형자 가운데 평균 15건 정도의 부정물품 반입 사례가 적발되고 있기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알몸 신체검사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고 인권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속적인 지적과 언론 비판 등을 받아들여 2008년 4월 1일부터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알몸이 되도록 ‘발가벗겨지다’라는 말은 실제적으로는 옷을 입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은유적으로 폭로당하다, 까발려지다, 탄로나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어 집니다. 아무 것도 감출 것이 없이 만 천하에 있는 모습 그대로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숨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발가벗겨진 진실’ 이라는 글귀만 떠도 사람들은 너도나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숨겨져 있던 것을 알게 된 쾌감일까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발가벗겨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다른 사람을 발가벗기는 것에는 너무도 큰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용기 있는 사람만이 스스로 ‘발가벗겨진 진실’을 자백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기를 가진 존재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실 앞에, 진리 앞에, 무엇보다 말씀 앞에, 또한 하나님 앞에, 늘 스스로 감추고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서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진실을 불편해 한다고 하더라도, 진리가 없다고 하잖게 여기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없는 거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희망이라고 전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치 옷매무새를 정돈하기 위해 다시 거울 앞에 서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매무새를 정돈하기 위해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감추는 것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서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부분을 거울이 발견하게 해 주듯, 말씀이 바로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았던 시편 기자는 일찌감치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 새번역>
이 말씀뿐만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시편 119편은 오롯이 말씀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무려 176절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많은 부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다면 시편 119편으로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말씀 앞에 ‘발가벗고’ 서고자 합니다. 감출 것 없이! 숨길 것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다시!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야 하는지 그 이유를 5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말씀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이 무형이 아닙니다.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 1장 1절, 새번역>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말씀,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CCTV가 한 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CCTV에 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기계가 죽은 상태라면 사람들은 CCTV를 의식하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입니다. 기록으로 남겨질 이유가 없으니 조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CCTV를 고쳐서 다시 제 역할을 하게 만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CCTV가 잘 작동되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조심하고 의식하고 신경 쓰게 됩니다. 하물며 이런 기계 앞에 서도 우리의 행동이 달라지는데 살아 있는 말씀,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 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아있는 말씀이 나를 비추면, 살아있는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있는 모습 그대로 말씀 앞에 나아가는 것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살아 있는 말씀 앞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둘째, 말씀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조그마한 기계 덩어리인 CCTV도 힘이 있습니다. 증거물이 될 때도 있고, 감시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힘보다 더 위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주관해가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습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능력과 권능으로 이 땅에 드러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말씀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다른 어떤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가장 큰 무기였습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말씀으로 힘써 싸워 이겼습니다. 그곳이 전쟁터이든, 선교지이든, 어떤 곳이든지 먼저 말씀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가장 큰 힘은 말씀의 힘임을 믿었기에,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힘을 의지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힘은 모든 것을 함락시키고, 말씀 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말씀의 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신비한 힘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연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열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오직 말씀만은 열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새번역>
말씀은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습니다. 영혼과 정신을 구분시키십니다.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깊은 곳에 품고 있는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는 힘이 있습니다.
셋째, 말씀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시편 1편 1~2절, 새번역>
이 방법도 해보고, 저 방법도 해보고 우린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이 다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이 가진 밑천이 다 바닥나게 됩니다. 이제 하나도 남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때가 되어서야, 밑천이 다 드러나고 자신의 한계가 발가벗겨져야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나님이 기다리신 것입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했을 때 그 물건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제품의 ‘사용설명서’입니다.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이 사용설명서를 보면 친절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꼭 사용설명서를 참고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방법대로 하다가 실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란 사용설명서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장 좋은 방법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가 바로 말씀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은 결코 지식이 아닙니다. 말씀은 ‘사주팔자’ 해석 책이 아닙니다. 말씀은 ‘마술봉’이 아닙니다. 말씀을 우리의 생각하는 범주에 넣고 오해하기에 우리가 말씀을 잘 찾지 않는 것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자면 영과 혼을 분리시키고 싶지 않고, 관절과 골수 안에 숨겨진 나의 깊은 마음과 의도를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말씀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긴 보되 내가 원하는 말씀만 보게 되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모든 지식 위에 지식입니다. 하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말씀은 직접 운행하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알려주기 위한 방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 내 방법 다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이제 그만 차선을 찾아 헤매는 것을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이사야 40장 8절, 새번역>
영원히 서 있는 말씀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넷째, 말씀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의 기원입니다. 말씀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조금도 숨겨진 것들이 없었습니다. 숨겨진 의도도, 숨겨진 비밀도, 숨겨진 욕망도 없었습니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세기 2장 25절, 새번역>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것에는 수치가 없고, 부끄러움이 없고, 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 말씀을 반대하는 불순종으로부터 수치와 부끄러움과 죄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작이 된 말씀 앞에 무엇을 감출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말씀 안에 살면서 무엇을 숨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말씀은 투명한 삶의 기본터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가장 깨끗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아갈 때 우린 다시 ‘에덴동산’의 아담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시작되었던 그 날로,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았던 그 날로, 우리는 지금도 돌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말씀 앞에 서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끝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말씀은 언제나 시작이라고 우리에게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말씀은 모든 것을 소생시키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게 하십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며, 살아나서 살리게 합니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 새번역>
주님의 영이 에스겔 선지자를 뼈들이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로 데려 가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지 오래 되어 뼈들조차 아주 말라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 37장 3절A, 새번역>
그러자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에스겔 37장 3절B, 새번역>
그러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 하나님이 이 뼈들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힘줄이 뻗치게 하고, 또 너희에게 살을 입히고, 또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너희가 다시 살아나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에스겔 37장 4~6절, 새번역>
그래서 에스겔은 그대로, 명을 받은 대로, 대언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대언을 하기 시작하자 무슨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뼈들이 서로 이어지는 요란한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 위로 살갗이 덮였습니다. 하지만 생기는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에스겔 37장 9절, 새번역>
그리고 에스겔은 이번에도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섰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내 백성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 속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서 너희가 살 수 있게 하고, 너희를 너희의 땅에 데려다가 놓겠으니,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룬 줄을 알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에스겔 37장 11~14절, 새번역>
말씀은 모든 것을 다시 살리는 힘, ‘소생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이 망했다고 끝났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으로 오늘도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가십니다. 말씀을 대언한 에스겔은 소름 끼치도록, 피부 깊숙이, 이 말씀에 대해서 각인했을 것입니다. 말씀은 죽어 있던 모든 것을 소생시킬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죽어 있는 우리의 영을 다시 살리실 유일한 소생법도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함께 다시 말씀 앞에 섰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절한 부탁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 앞에 설 때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식도, 위선도, 비밀도, 감추고 싶은 모든 것들도, 스스로 내려놓고 말씀 앞에 섰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 행동이 ‘다시’ 말씀 앞에 서는 행동입니다.
이 전에 수많은 것들을 걸치고 말씀 앞에 섰었다면, 이제 ‘다시’ 말씀 앞에 설 때는 살아 있고, 힘이 있고, 가장 좋은 방법이며, 시작이며, 모든 것을 소생시키실 말씀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발가벗고’ 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럴 때 드디어 하나님과의 진짜 만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셨던 만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하여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죽어 있던 나의 삶을 소생시켜 나가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모두 다 함께 이 말씀 앞에 다시 섰으면 좋겠습니다.
주의 말씀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은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살아야만, 여러분은 요단 강을 건너가 차지하게 될 그 땅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47절, 쉬운말성경>
결단 찬양 - 온 맘 다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