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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완주군 소양읍 대흥리 종남산(終南山)에 있으며,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867년에 체징(體澄)이 창건하였다. 그 후 폐허화(廢虛化)되었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高僧) '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영천(靈泉)의 물을 마신 뒤, 영천(靈泉)으로 인하여 뒷날에 큰 절을 세울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여 샘 주위에 돌을 쌓아두었다가 제자(弟子)를 시켜 뒷날 그 자리에 절을 중창(重創)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뜻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광해군 14)에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淨) 등이 이극룡(李克龍)의 시주(施主)를 얻어서 중창하였다. 중창(重創) 후 벽암(碧巖)을 초빙하여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서 시주(施主)하였다. 당시 절 이름은 백련사(白蓮寺)이었는데, 규모가 매우 커서 일주문(一柱門)이 3km나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종남산 終南山
종남산(終南山)의 높이는 610m이다. 서방산(西方山)과 함께 김제평야(金提平野)와 산간구역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 이름은 ' 남쪽 끝에 있는 명산 '이라는 뜻으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시조(始祖)이자, 이곳 송광사를 창건한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자신이 수행하던 중국의 종남산(終南山)과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여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인조의 원찰 仁祖의 願刹
이곳 송광사는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인질(人質)로 보낸 인조(仁祖)는, 두 왕세자의 무사환국(無事還國)과 국난(國難)의 아픔을 부처님이 가호(加護)로써 치유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창(重創)한 인조(仁祖)의 호국원찰(護國願刹)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호국원찰(護國願刹)이어서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대웅전에 모신 불상(佛像)이 땀과 눈물을 흘리는 이적(異蹟)을 드러내곤 하였다고 한다. KAL기 폭파사건, 12.12 군사반란 사건, 군산 훼리호 침몰사건, 강릉 잠수함 출몰 사건, 그리고 1997년 12월 2일부터 13일까지 엄청난 양의 땀과 눈물을 흘림으로써 IMF 사태를 예견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삼존불(三尊佛) 사이 앞쪽에 있는 3점이 목패(木牌)로서, 왕실(王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각각 왕(王)과 왕비(王妃) 그리고 세자(世子)를 위한 것으로 중앙의 목패에는 ' 주상전하수만세 (主上殿下壽萬歲) '라 썼으며, 좌우의 목패에는 각각 ' 왕비전하수재년 (王妃殿下壽齋年) ' 그리고 ' 세자저하수천추 (世子低下壽千秋) '라 쓰여져 있다. 이를 목조삼전패(木造三殿牌 ... 왕, 왕비, 세자)라고 한다.
전체적인 제작방법은 뒷면에 몇 개의 목판을 대고 주연부(周緣部)를 화형(花形)으로 조각한 위에 운룡문(雲龍文)을 투각(透刻)하여 붙인 동일한 방법과 형태이며, 부분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운데 목패(木牌)는 상부에 한 마리의 용(龍)과 하부 좌우에 각각 두 마리씩의 용을 투각하였으며, 좌우의 것은 상부에 한 마리의 용과 하부 좌우에 각 한 마리씩의 용(龍)을 투각한 것으로, 왕과 왕비 세자에 있어 격(格)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좌대도 중앙의 것은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각하고 있는 데 비해, 좌우의 것은 복련(覆蓮)만을 조각하였다.
운룡문(雲龍文)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뛰어날 뿐만 아니라 크기에 있어서도 전체 높이는 중앙의 목패(木牌)가 228cm, 좌우의 것이 208cm로서 매우 큰 규모이다. 중앙의 목패 뒷면에는 ' 순치세 (順治歲) '에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1644년(인조 22)에서부터 1661년(현종 2) 사이에 조성되었고, 서쪽에 모신 목패의 기록을 통해 1792년(정조 16)에 수리(修理)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적비 事蹟碑
송광사(松廣寺)의 역사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비석(碑石)으로 1636년(인조 14)에 건립되었고, 지금은 송광사 뒷뜰에 세워져 있다. 비석의 앞뒷면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앞면의 글은 신익성(申翊聖)이 지었고, 뒷면의 글은 이취반(李就潘)이 지었다고 한다.
이 비석(碑石)의 제목인 ' 전주부송광사개창지비사호선종대가람사 (全州府松廣寺開創之碑賜號禪宗大伽藍사) '라는 전서(篆書)는 신익성(申翊聖)이 썼고, 비문(碑文)의 글씨는 선조(宣祖)의 여덟번 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광(珖)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 곳에 터를 잡은 뒤 제자들에게 훗날 여기에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한 연유로 1622년에 중창되었다는 이야기와 송광사의 지세(地勢) 및 보조국사에서 벽암(碧巖)에 이르는 계보 등이 주된 내용이다.
이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고려(高麗)시대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종남산(終南山)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이라 부르는 우물을 발견하고,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매우 특이하여 장차 이곳에 절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 징표로 샘 주위의 네 귀퉁이를 돌로 쌓아 두었다.
그후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순천(順天)으로 가서 조계간 계곡에 송광사(松廣寺)를 짓고 그의 법이 머물게 하였다. 그 뒤 보조국사는 제자들에게 전주(全州) 종남산(終南山)을 지날 때마다 그곳에 절터를 마련해 두었다는 사실과, 그곳에 절을 지으면 반드시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보조국사의 뜻은 오랫동안 옮겨지지 못하다가 조선 중기에 접어들어 광해군(光海君) 14년인 1622년에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淨), 덕림(德林), 득수(得淳), 홍신(弘信)스님 등이 보조국사의 뜻에 따라 사찰을 세웠다.
이 공사는 14년이 걸려 인조 14년인 1636년에 드디어 완성을 보게되어, 당시 무주(武州) 적상산(赤裳山) 안국사(安國寺)의 주지(住持)로 있던 벽암대사(碧巖大師)를 초빙, 개창조(開創祖)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절터의 땅은 승명(勝明)스님의 증조부인 이극룡(李克龍)이 시주(施主)하였다고 한다. 건물이 모두 완성된 뒤 벽암대사를 모시고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수천 명으로부터 시주(施主)를 받았으며, 보조국사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라 정했다고 한다.
가람배치 伽藍配置
일주문을 들어서면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종루(鐘樓)가 차례로 나오고, 종루 옆의 대웅전(大雄殿)을 지나면 뒤쪽에 나한전(羅漢殿)을 비롯한 전각들이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一字)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 배치가 자연스러워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와 한자(漢字)까지 같다. 순천(順天) 송광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봄이 되면 진입로부터 약 2km에 걸쳐 펼쳐지는 벚꽃이 장관을 이룬다.
일주문 一柱門
송광사 일주문(一柱門)은 원래 대웅전으로부터 약 3km되는 '나드리'라는 곳에 세워져 있던 것을 절의 경내가 축소됨에 따라 1814년(순조 14)에 정준(定俊)스님이 조계교(曺溪橋) 부근으로 이건(移建)하였다가, 1944년에 해광스님이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기둥 두 개에 보조기둥 두 개를 세웠으며, 다포집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균형(均衡)이 잘 이루어져 있다. 원기둥은 민흘림기둥이며, 보조기둥에는 연화무늬가 조각되었으며,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고 있다.
주초(柱礎)는 덤벙주초이며,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 .. 대청 위 장여 밑에 대는 넓적한 도리)과 평방(平枋) 위에 공포를 두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기둥 앞뒤 면의 3출목의 앙설(仰舌)이 매우 화려하다. 현판에 적힌 사찰 이름을 종남산(終南山) 송광사라 부르는 이유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절터를 구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서 영천수(靈泉水)를 발견하고 큰 절을 세울 것을 결정한 후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기 않았다는 것에 서 유래한다. 영천수(靈泉水)를 받아둔 돌구유(석조. 石槽)는 지금도 관음전 뒷편의 논귀퉁이에 있다.
금강문 金剛門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 173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성(覺性 .. 벽암대사)이 중창(重創)할 때 건립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나, 상량문(上樑文)이 없어 정확한 건립연도는 알 수 없다. 정면 3칸, 측면 2칸, 기둥 높이 293cm, 주심간 375cm의 팔작지붕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단(基壇)과 기둥의 주춧돌을 구축하였다.
다포집 양식으로 처마는 홑처마이며, 외3출목, 내3출목이다. 쇠서와 4출목의 살미9목조건축물에서 기둥 위와 도리 사이를 장식하는, 촛가지를 짜서 만든 부재)들이 중첩되어 하나로 이어지고 있으며, 끝에는 연꽃과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둥근 모양의 창방(昌枋)과 사각형의 평방(平枋)을 결구(結構)하였으며,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대들보는 2량이다.
각 공포의 벽화는 보상화무늬로 장식하였다. 건립 당시에 조성된 것은 아니지만 금강문(金剛門) 안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 2구(軀)와 오른쪽과 왼쪽에 동자상(童子像)을 배치하였는데, 왼쪽 동자상(童子像)은 사자(獅子)를, 오른쪽 동자상(童子像)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금강역사 金剛力師
금강역사(金剛力士)는 인왕상(仁王像)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석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구실을 담당하며, 이 신(神)은 여래(如來)의 온갖 비밀(秘密)된 사적(事迹)을 알고 5백 야차신(夜叉神)을 거느리면서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금강역사의 형태는 권법(拳法)자세, 무기(武器)를 든 자세, 또는 무기를 든 자세와 권법자세를 동시에 츃고 있는 자세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공통적인 특징은 얼굴이 분노형(憤怒형)이고, 상체(上體)는 나체형(裸體形)으로 나타낸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 조각에는 희귀한 편인 근육(筋肉) 표현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나신상(裸身像)이라는 점에서도 금강역사상의 미술사적 의의는 매우 높다고 하겠으며, 인도(印度) 재래신(在來神)의 불교화라는 점에서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주목된다.
보통 사찰 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다. 이 가운데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은 천상계(天上界)의 역사(力士)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가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密迹金剛)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가지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夜叉神)으로,부처님의 비밀한 사적(事迹)을 들으려는 서원(誓願)을 세웠으므로 밀적(密迹)이라고 한다.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頭光)이 있다. 이는 이들이 단순히 힘센 이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智慧)를 고루 갖추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통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은 입을 크게 열어 '아'하고 소리를 내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밀적금강(密迹金剛)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흔히 입을 열고 있는 역사(力士)를 ' 아금강역사 ',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 훔금강역사 '라고 하는데, 이때의 '아'는 범어(梵語)의 첫글자이고, '훔'은 끝 글자이다.
이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永遠)과 통일(統一)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의(上衣)를 입지 않고 옷을 허리에 걸친 채 주먹을 쥐어 밖에서 안으로 한팔을 올리고 한 팔을 내린 자세를 취하거나,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있는 모습 등을 취하기도 한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천왕문 天王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 좌우 칸에는 천왕(天王) 2위(位)씩을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하고, 중앙 칸은 통로(通路)로 사용할 수 있도록 평면을 구성하였다. 송관사개창비문(松廣寺開創碑文 .. 1636년)의 화사질(化士秩)에 의하면 , 천왕전(天王殿)이라고 적혀 있는데, '문(門)'이라 하지 않고 격(格)을 높여 '전(殿)'이라고 부른 점이 주목된다.
정면에서 보면 중앙 칸에는 2짝 판문이 달려 있어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인방위에 홍살(紅箭)을 설치하였다. 좌우 칸에는 벽의 높이 3/4 부분에 상방, 1/4 부분에 하방을 설치하여 벽(壁)을 3분할(三分割) 하였는데, 상방 위에는 정자살고창, 상방과 하방 사이에는 판벽, 하방 밑에는 벽체를 각각 설치하였다.
측면은 모두 벽체로 막고 박공 부분에는 널판을 내려 측면 지붕 가구(架構)를 가렸다. 그런데 상부 양쪽 끝 위수분은 천장 서까래와 의 사이에 약간 틈을 두어 측광(側光)이 천왕상(天王像) 머리 뒤에서 스며들어 오도록 조치하였다.
소조사천왕상 塑造四天王像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4.2m이다. 이 사천왕상(四天王像)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성을 지니고 있는 사천왕상이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1649년(인조 27) 이전에 완성된 것은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이곳 송광사 사천왕상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 행하여진 일련의 사찰 재건 사업에서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었던 벽암각성대사(碧巖覺性大師)가 주도한 장인(匠人) 계열을 중심으로 조성하였던 순천 송광사 그리고 화엄사와 더불어 동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이 세 사찰은 지리산(智理山)을 중심으로 한 벽암(碧巖) 문도(門徒)들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의승군(義僧軍)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점에서 사천왕(四天王)의 호국호법(護國護法) 정신과 맞닿아 있다.
이 사천왕상(四天王像)은 조선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完成度)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均衡)이 조화로울 뿐만 아니라 재질이 소조(塑造)이기 때문인지 얼굴의 주름살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활달한 몸의 움직임과 함께 분노상(憤怒像)이 잘 드러난 얼굴 표정은 이 작품의 우수성을 대변하고 있다. 4위(位) 모두 한쪽 다리는 악귀(惡鬼)가 받들고 있고, 다른 한쪽 다리는 수직(垂直)으로 내리고 있다.
사천왕상 복장유물
1994년 10월 사천왕상(四天王像) 개채(改彩) 보수 작업 중에 보탑(寶塔)을 들고 있는 사천왕상의 보관(寶冠) 끈 뒷면과, 왼손에 받쳐 든 보탑(寶塔)의 밑바닥에서 묵서(墨書)의 명문(銘文)이 발견되었고, 여러 점의 복장품(腹藏品)이 나왔다.
보관(寶冠) 끝에는 ' 순치을축년십월일필금산화면조?위? ( 順治乙丑年十月日畢金山畵面造?爲? ) '라고 쓰여 있었다.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에는 숭정(崇正) 병자년(丙子年)에 법당과 동서 재료(齋寮)를 완성하고 단청을 시채(施彩)하였으며, 천왕전(天王殿)은 여인(呂仁)이라는 승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1636년과 1649년 사이에 사천왕상이 조성되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그리고 보탑(寶塔) 밑바닥에는 건륭(建隆) 51년(1786)에 중수(重修)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복장품(腹藏品)으로는 용(龍),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사천왕상을 제외한 3위(位)의 천왕상의 등 부분 속에서 법화경과 화엄경을 비롯한 경전류(經典流)와 후령통(候領筒) 등이 나왔다. 경전류(經殿流)로는 정강(靖康) 정미년(丁未年 .. 1129)과 천계(천계) 8년(1443)에 조성된 귀중한 목판본이 포함되어 있었다.
종루 鐘樓
보물 제12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송광사 대웅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1857년(철종 8) 대웅전을 중건(重建)할 때 제봉선사(霽峰禪師)에 의하여 대웅전과 함께 중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종루(鐘樓) 안에 종(鐘)과 북을 달아놓았는데, 범종(梵鐘)의 주조(鑄造) 시기는 1716년이므로, 건물은 종(鐘)의 주조 시기보다 약 140년 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 1244호
이 종루(鐘樓)는 평면형이 십자형(十字形)으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목조건축 평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로 특이하며, 평면형 형태에 따라 ' 십자각(十字閣) '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양간(樑間)은 8.15척(尺), 도리칸은 24.5척(尺)으로 두 개의 팔작지붕이 '十'자로 교차된 형식이며, 하층 바닥은 누형식(樓形式)으로 한 층 높이 세워져 있다.
십자(十字)형 평면 건물로 '십자(十字)'는 태극(太極)의 기본형으로 동(動)과 정(靜)의 핵심이며, 교차하는 도리(道理)를 말하고 있다. 지하에 전달하는 종(鐘)이 십자(十字)의 중앙에 달려 있어, 소리를 울려 전하기 전에 형상된 모습만으로도 선(禪) 지식의 심오함을 느끼게 한다.
이 건물은 공포가 다포식으로 평방(平枋) 위에 공포를 배치하였는데,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삼출목(內三出目)인 포작(包作)이 짜여져 옥개(屋蓋)를 받게 하였다. 공포의 살미첨차(山彌瞻遮)는 앞 끝이 조선시대 다포계 공포의 전형적인 갸냘픈 앙서(仰舌)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소첨 및 대첨들이 아래끝은 원호(圓弧)가 아닌 직선형(直線形)으로 급하게 잘라내고 있어 지방색(地方色)이 농후하게 표현되고 있다.
건물에 비하여 공포대가 우람하게 보이고 있으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세부조각은 연약한 것이 이 건물 공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처마는 겹처마로 서까래와 부연(副緣 .. 처마 끝에 덧얹어진 짤막한 서까래)은 일반건물에 비하여 가늘고 섬세한 느낌을 주며, 추녀는 비교적 높게 치켜올려져 있어 누각(樓閣)의 아름다움을 추녀 곡선(曲線)에서 살리고 있다.
가구(架構) 형식은 창방(昌枋)이 대들보 구실을 하게 되었고, 평주(平柱)에서와 같이 내부에도 공포를 짜서 지붕 구조를 받도록 한 점이 특이하다. 단청(丹靑)은 모루단청(毛老丹靑 ..부재의 끝부분에만 무늬를 놓아 그린 단청)인데 내부 기둥 몸에는 용(龍)을 그려 장엄하게 하였고, 창방의 계풍은 수목화초(水木花草)로 장식하고 있다.
기단(基壇)이 없이 덤벙주초 위에 팔각형(八角形)의 누하주(樓下柱)와 원형(圓形)의 누상주(樓上柱)를 놓았으며, 12개의 민흘림기둥이 다락구조를 받치고 있다. 평면은 5칸이 ' 十 '자형으로 배열되어 1칸은 입구를, 중앙칸에는 범종(梵鐘)을, 왼쪽과 오른쪽에는 목어(木魚)와 법고(法鼓)를 매달아 기능(機能)의 분화(分化)를 이루고 있다.
범종 梵鐘
숙종 42년인 1716년에 조성된 동종(銅鐘)으로, 종을 거는 고리까지 포함하여 높이 107cm이고, 아랫부분 지름은 73cm, 두께 4.5cm의 규모이다. 종의 윗부분에는 60개의 입화식(立花飾) 꽃무늬가 있고, 그 아래에 방패 모양의 꽃무늬를 양각(陽刻)하였다. 다시 그 밑에 연주형(蓮珠形) 돌기 60개가 돌려져 있고, 종의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있는 9.5cm 두께의 띠가 그 아래에 있다.
아랫부분에는 지름 6cm의 원(圓)이 8개가 양각되어 있고, 그 원(圓) 안에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아래쪽의 세로 면에는 보살입상(菩薩立像)을 조각하고 나머지 한 면에는 전패(殿牌)를 배치하였다. 보살입상(菩薩立像)은 24cm의 크기로서 머리 뒤에 광배(光背)를 두르고 보관(寶冠)을 썼으며, 전패(殿牌) 안에는 ' 주상삼전수만세 (主上三殿壽萬歲) ' 라고 양각(陽刻)되어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지름 6cm 정도에 보상당초 무늬를 둘러놓았다.
이 범종에는 ' 강희55년병신4월 전라우도 광주무등산증심사대종조성 (康熙五五年丙申四月全羅右道光州無等山證心寺大鐘造成) ' 으로 시작하여, 시주자(施主者)의 이름이 양각되어 있으며, ' 대시주계묘채구건유34년 기축9월 중수문광득 (大施主癸卯 蔡龜 建隆三四年己丑九月 重修 文光得) '이라는 글이 음각(陰刻)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 범종은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조성되었으며, 그 후 1769년에 보수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대웅전 大雄殿
보물 제1243호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건(重建)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현존 건물은 1644년(인조 22)에 벽암국사(碧巖國師)가 중창하고, 1857년에 제봉선사(霽峰禪師)가 중건(重建)하였다. 축부(軸部)인 기둥은 기단 위 초석에 세워지고, 기둥머리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구가(構架)시켜 다포(多包) 전형의 공포를 받게 하였는데, 창방과 상방(上枋) 사이에 3구할의 상방벽(上枋壁)을 만들어 이 벽면에 벽화(壁畵)를 그려넣은 것이 다른 대웅전 건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공포는 굽이 경사지게 자른 야트막한 주두(柱頭) 위에 외삼출목(外三出木), 내삼출목(內三出木)의 포작(包作)으로 지붕무게를 받게 하였다. 공포의 내외로 뻗친 살미(山味)의 외부는 조선 말기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앙서식(仰舌式)이며, 행공첨차와 결구되는 살미 끝은 봉황형(鳳凰形)의 조각으로 마감하고 있다. 소첨, 대첨들은 모두 대웅전 서쪽에 있는 범종각과 같은 교두형(翹頭形 .. 원호형(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지방색을 강하게 나타내는 사절형(斜截形 .. 비스듬히 자른 모양)이다.
대웅전 기단(基壇)은 지대석과 면석(面石)을 사용하지 않고 갑석(甲石 .. 돌 위에 올려놓는 납작한 돌)만으로 구성하였다. 기초는 덤벙주초이고, 기둥은민흘림기둥이며, 추녀마루를 지지하는 활주(活柱 .. 추녀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는 두리기둥이다. 정면 5칸에는 2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띠살문과 빗살문을 교대로 달아 변화를 주었고, 측면과 뒷면에는 판벽으로 구성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팔작지붕의 처마선이 매우 아름답다.
불신충만어법계 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 菩顯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 隨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리좌 而恒處此菩提座
광대원운항부진 廣大願雲恒不盡
왕양각해묘난궁 汪洋覺海渺難窮
불신(佛身)은 온 법계에 충만하시어 / 모든 중생 앞에 나타나시네 / 인연 따라 두루 감응(感應)하지 않음이 없으나 / 언제나 이 보리좌(菩提座)에 자리 하시네 / 넓고 큰 원력(願力)은 다함이 없어 / 망망한 깨달음의 바다는 헤아릴 수 없네
소조 삼존불좌상 塑造 三尊佛坐像
대웅전의 소조삼존불(塑造三尊佛)은 높이 5m가 넘는 거대한 불상을 본존(本尊)인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봉안하고,왼쪽에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오른쪽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하였다. 이 삼존불(三尊佛)은 소조상(塑造像 ... 흙으로 빚은 불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상기(造像記)에 따르면 이들 삼존불(三尊佛)은 1641년(인조 19) 6월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나라에 인질(人質)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조속한 환국(還國)을 발원하면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兩亂)을 겪으면서 국난극복(國難克服)의 의지와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삼존불(三尊佛)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리는 이적(異蹟)을 보인다는 속설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조성연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혼란기를 불력(佛力)에 의지하여 극복하려는 국가적인 신앙심과 역사의식이 반영된 귀중한 자료로 여겨져,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상기(佛像造像記.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3점과 함께 일괄 보물 제12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여래좌상 釋迦如來坐像
높이 550cm, 무릎너비 405cm, 무릎높이 72cm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나발(螺髮)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白好)가 뚜렷하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갖추고 있으며, 외쪽 팔에 걸친 옷주름이 무릎을 덮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몸체의 균형이 잡혀 있어 당당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근래에 위 석가모니불상에서 삼존불(三尊佛)의 조상기(造像記)와 묘법연화경(妙법蓮華經)을 비롯한 ㅂㄹ경류(佛經類),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腹藏品)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불상조상기(佛像造像記)를 통하여 이들 불상의 조성연대와 조성자, 조성 배경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약사여래좌상 藥師如來坐像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은 상호나 몸체에서 전반적으로 석가모니여래좌상과 비슷하다. 어깨 정도로 들고 있는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으며, 손바닥이 위를 향한 채 무릎 위에 놓인 왼쪽 손에는 약함(藥函)이 놓여 있다. 좌상의 크기는 높이 520cm, 무릎너비 363cm, 무릎높이 79cm의 크기이다.
아미타여래좌상 阿彌陀如來坐像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 역시 원만한 상호로서 석가여래, 약사여래상과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을 어깨 가까이 들어서 손바닥이 바깥을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으며, 무릎에 놓인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잡고 있다. 좌상의 크기는 높이 520cm, 모릎너비 356cm, 무릎높이 71cm의 크기이다.
복장유물 腹藏遺物
이 삼존불(三尊佛)에서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수습되었는데, 석가여래좌상에서는 은(銀)으로 만든 원통형 사리함(舍利函)이,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놋쇠로 만든 사리함(舍利函)이 발견되었으며, 길이 286cm, 너비 43.5cm의 조상기(造像記) 1매씩이 발견되었다.
조상기(造像記) 첫머리에 ' 숭정14년 숭덕6년 세차신사6월29일 불상조성시주목록 (崇禎十四年 崇德六年 歲次辛巳六月二十九日 佛像造成施主目錄) '이라고 하여, 1641년(인조 19)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상기(造像記)에는 주상(主上)과 왕비전하의 만수(萬壽)를 기원함과 동시에,
세자저하수천추 속환본국 봉림대군증복수역위환국
世子低下壽千秋 速還本國 鳳林大君增福壽亦爲還國
이라고 기록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인조(仁祖)의 두 아들로 인질(人質)이 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 끌려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조속한 환국(還國)을 기원하기 위하여 불상(佛像)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벽화
대웅전 천장에는 목판 5~7장을 붙여 그 위에 채색(彩色)을 한 후, 주악비천(奏樂飛天)이 그려져 있다.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는 전면에 7점과 좌우 천장에 각 2점씩 모두 11점을 그렸는데, 각기 다른 모습의 비천(飛天)들이 공양(供養)을 올리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들 비천(飛天)의 모습이 재미있는데, 비파(琵琶)를 타는 모습, 피리를 부는 모습, 장고춤을 추는 모습, 승무(僧舞)를 추는 모습, 북을 치는 모습, 바라춤을 추는 모습, 칼춤을 추는 모습 등이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비천승무도 飛天僧舞圖
의상(衣裳)이 단조롭고 꾸밈이 별로 없이 묵선(墨線)이 강조되어 채색(彩色)보다 오히려 선(線)에 의해 그림이 결정되었다. 매우 빠르고 자신있는 필치가 비천(飛天)의 자유로운 리듬을 타고 짧은 순간에 그려간 듯하다. 온 몸을 대나무에 매달고 있는 듯이 보이는 자세는 아주 부드럽고 유연한 몸놀림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주름진 얼굴에 입술을 빨갛게 칠하여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묵선(墨線)을날카롭고 힘차게 내리긋는 방법을 사용하여 유연성을 떨어지나 붓질의 힘에 의하여 매우 단단한 작품성을 발휘하였다.
비천장고무 飛天杖鼓舞
유연하고 여유로운 자세와 힘을 내고 있다. 얼굴이 어린 동자상(童子像)을 하고 있으며 구성이 한결 단순화되었음이 주목된다. 인물의 자세가 매우 극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으며, 반면에 부분의 묘사는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여 한결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림이다. 장고를 들고 군관(軍官) 모자 비슷한 형태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화려한 의상에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으며, 동자(童子)의 무복(巫服)에 맞게 휘날리는 천의(天衣)는 많이 생략디었다. 따라서 닩로우며 반면에 춤추는 모습에 힘을 느끼도록 강조하고 있다. 묵선(墨線)이 힘있게 찍어 내린 변화에서도 색다는 묘법이며 힘과 유연성을 함께 보여주는 표현이다.
비천타고무 飛天打鼓舞
북을 길게 어깨에 메고 양 손에 화려한 북채를 들고 있는 비천상(飛天像)으로 화려하고 복잡한 구성이 돋보인다. 천의(天衣)가 넓고 강하게 그려져 있어 전체적으로 무겁고 웅장한 기분을 주고 있다. 중국 귀부인의 것과 비슷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엮어진 머리 묶음줄이나 관신이 단순한 듯 하면서도 화사함을 드러내고 있다.
얼굴 양 볼에 연지를 발랐으며 천의(天衣)의 굵고 강한 검정색 선(線)과 파도 문양의 옷자락이 다른 의습(衣褶)의 가는 선(線)과 허리띠의 가느다란 선(線)들과 강한 대비(對比)를 보여주어 인물을 화려한 구성미가 돋보이게 하고 있다. 옷주름을 보여주는 채색(彩色)의 농담(濃淡)과 우림이 요철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북채를 잡고 있는 오른손의 묘사가 부적절하여 부분적인 무관심으로 보인다.
비천바라무 飛天婆邏舞
구성이 복잡하고 의상의 표현과 천의(天衣)의 묘사가 날카로운 각(角)이 많아 딱딱한 형상을 하고 있다. 유연성이 한결 떨어지지만 바라 앞으로 휘날리는 천의(天衣)가 둥그 원을 그리며 휘날리는 모습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있다. 색채는 변화가 적고 대체로 붉은 빛깔의 의상을 하고 있으며, 허리끈에는 호리병이 매다려 있다. 옷자락 끝부분과 중간에 날카로운 톱날 같은 돌출이 있어 특징적이다. 의상 처리가 독특하여 다른 작품들 속에서 드러나며 묵선(墨線)도 훨씬 속도감이 느려 굵고 변화없는 의습(衣褶) 선(線)이 딱딱한 인상을 더해주고 있다.
비천비상무 비천飛翔舞
춤을 추어 여래(如來)에게 공양(供養)하는 남성적인 여성(女性)이다. 휘날리는 천의(天衣)와 뛰어오르는 몸동작이 하나가 되어 율동(律動)이 돋보이고 동세(動勢)의 포착이 뛰어난 그림이다. 삼각형(三角形) 모양의 고깔 형태에 세 개의 날개를 꽂은 독특한 보관(寶官)을 쓰고 있다.
무장(武裝)한 신군(神軍)처럼 강조된 보다 화려한 모자와 의상(衣像)은 조선 후기 불화(佛畵) 중 신중도(神衆圖)에도 비슷한 모양이 나타나고 있다. 허리에는 호리병을 차고, 발에는 단순한 모양의 비단신을 신었고, 어깽서 늘어뜨려진 띠가 두 번 묶여져 있어 민속적(民俗的)인 모습처럼 보인다. 의습(衣褶)의 선(線)은 날카롭고 딱딱한 선(線)이 많고, 옷주름을 따라 음영(陰影)을 넣은 것이 깊고 넓게 처리되어 면(面)처럼 구별되어져 있다.
천도헌정무 天桃獻呈舞
인체(人體)의 구성이나 인물 전체의 형태가 안정되고 아름다운곡선으로 정리되어 매우 단정한 모습이다. 의상의 장식(裝飾)이 거의 생략되어 단순하여 오히려 웅장한 화면(畵面)을 연출하고 있다. 운필(運筆)은 거침없는 필치로 정리되었는데, 그 가느다란 필선(筆線)이 유연하게 타고 흘러내렸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들어 있는 세선(細線)에 빨간색과 녹색으로 크게 잡은 화면들이 강렬한 대비(對比)를 가져와 더욱 시각적인 웅대함을 보여준다.
천도(天桃)는 도가(道家)에서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여성(女性)의 가슴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전체의 구성이 둥근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기도 하고, 긴장(緊張)을 유도하기도 하여 새이(生氣)가 살아나는 모습이다, 옷자락 끝단을 굵고 강한 검정 띠로 마무리하여 인물이 단순하나 강렬한 인상을 더하고 있다.
비천무당무 飛天巫堂舞
불교가 도래하면서 민속신앙(民俗信仰)을 수용하게 되는데, 이 경우는 무속(巫俗)춤이 불단(佛壇) 안에 들어와 있는경우이다. 하지만 이처럼어떤 무속(巫俗)인지는 모르지만 무속의 복식(服飾)을 갖추고 춤을 추는 장면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보관(寶冠)은 관모(官帽)와 형식이 비슷하고 모자에 달린 장식(裝飾)이 신분을 나타내는것으로 보인다.
발에 버선을 신겨 춤 공양(供養)임을 강조한다. 의상도 지극히 단조로운 무복(巫服)을 입고 있어 비교적 가벼운 모습으로 처리되었다. 표현에 있어서 매우 가늘고 가벼운 철선을 사용하였는데, 운필(運筆)은 빠르고 날렵하게 처리되었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 끝이 고기나 용(龍)의 꼬리처럼 상징화되어 있다.
나한전 羅漢殿
송광사 나한전(羅漢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 양식 팔작지붕 건물로 1656년에 벽암 각성(碧巖 覺性)대사가 송광사를 중창(重創)할 때 건립하였으며, 1934년에 혜광스님이 중수하였다. 이 건물은 두 번에 걸친 중수(重修)로 인해 서까래, 천장 등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으나, 주요 구조부재(構造副材)와 천장 구성 등에서는 18세기 불전(佛殿)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 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천장 윗부분을 가리게 꾸민 우물천장이다.
나한전 내부
나한전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른쪽과 왼쪽에 16 나한상(羅漢像)과 오백(五百) 나한상, 인왕상(仁王像), 동자상(童子像), 사자상(獅子像)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오백나한상, 목조셕가여래삼존상 및 권속상 일괄은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한전에 모셔진 불상은 삼존상(三尊像) 3구(軀), 16 나한상, 500 나한상, 제석상 1구, 동자상 2구,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등 모두 526구(軀)이다. 본존불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위에 놓여 있는데, 얼굴은 원만한 편이며 양쪽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정제된 얼굴 표현에서는 근엄함과 자비로움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옷에는 두꺼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고, 왼쪽어깨에서 내려진옷주름은 왼쪽 팔에 걸쳐 무릎을 덮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얹어놓았고,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석가여래의 좌우에는 과거(過去)와 미래(未來)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미륵보살)을 배치하였다. 나한전 네 벽(壁)에 걸려있는 오백나한(五百羅漢)은 남자 스님들로 오백상수(五百常手)라고도 한다. 이들은 석가여래의 제자로 아라한(阿羅漢)과의 진리를 깨달아 존경과 공양(供養)을 받을만 하고, 윤회(輪回)의 삶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도록 번뇌(煩惱)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들이다.
한동안 울나라, 중국, 일본에서는 오백나한(五百羅漢) 신앙이 성행하였으며, 이곳 송광사 오백나한(五百羅漢)은 금방이라도 중생들의 비원(悲願)을 들어줄 것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기법과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우리나라 나한상(羅漢像) 중 으뜸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