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순천 승주읍의 이팝나무 노거수
2003년 5월 11일, 따르릉! 따르릉! 유난히 크게 울리는 새벽의 전화벨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누가 이렇게 이른 아침에 전화를 해대느냐고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이팝나무 꽃이 피었다는 전갈이었 다. 꼭 한 달 전 이곳을 찾아갔다가 마을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이팝나무가 꽃 피면 연락 달라는 부탁을 해 둔 기억이 났다. 알려준 고마움에 대한 인사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카메라 가방을 챙겨서 그대 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팝나무 꽃은 5월 초·중순의 약 10여 일 동안 활짝 핀다. 때를 잠깐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도착시간은 10시 남짓, 물이 담긴 못자리 위로 살포시 비춰지는 꽃 핀 이팝나무의 자태가 카메라 앵글에 그대로 잡힌다. 위로 뻗은 몇 몇 가지에 꽃이 조금씩 달려있다. 다른 곳의 이팝나무처럼 온 통 꽃이 나무 전체를 뒤집어쓰는 풍만함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더욱이 수나무라서 짝을 찾지 못한 꽃가루 들은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끝나는 것이니, 평생 홀아비 신세로 지내는 쓸쓸함이 나무에서 묻어난 다.
자라는 곳은 도로에서 마을 쪽으로 50m쯤 들어간 작은 야산 자락이다. 높은 축대가 쌓여 있고 나무 옆에는 각이 진 큰 바위가 비죽비죽 나와 있다. 뿌리로 감싸버리기에는 너무 거창하여 옆에 두고 나무는 바위를 피 해 자람을 이어갔다. 나무높이 18m, 가슴높이의 둘레 세 아름 (4.6m), 뿌리 근처의 둘레는 7.6m나 된다. 가 지 뻗음은 동서 8.9m, 남북 8.8m이다. 옆으로 난 가지는 대부분 분질러지거나 썩어 없어져 버려서 키만 멀 뚱하게 커 보인다. 흑갈색의 줄기는 다른 이팝나무 고목보다 더 색깔이 짙어 거의 시꺼멓게 보인다. 어쩐 지 죽음이 가까워 보이고 줄기 여기저기에는 오래전 충전처리를 한 흔적이 남아있다. 곳곳에는 버섯 갓이 나와 있다. 부실처리로 나무속이 한참 썩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폴리우레탄으로 나무의 빈 부분을 충 전처리 한 표면에다는 조잡하게 ♯자 모양으로 비뚤비뚤하게 나무 껍질모양을 그려 넣어 놓았다. 한마디 로 노거수의 품위를 완전히 망쳐 놓았다. 충전부분을 걷어내고 방부처리를 다시 해야 할 일이 시급하다. 그 러나 첫 이 나무를 면회하고 2년이 훨씬 지난 2005년 가을에 찾았을 때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렇게 시급 한 조치는 하지 않으면서 화강암에 동판을 붙인 호화입간판만 새로 세워져 있다. 그나마 소개 내용도 부실 하고 영문표기 잘못도 눈에 띈다. 불필요한 사치일 뿐이다. |
나무의 나이는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자료에는 5백년, 최근의 문화재청 자료는 4백년이다. 고목 나이 1백 년 차이는 80살 먹은 노인과 81살 먹은 노인의 차이만큼이나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나이를 판단하는 기준 은 필요하니 왜 백년이 줄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이팝나무 천연기념물로서는 붙여진 일련번호가 가장 앞선다. 그만큼 역사와 전통이 있다는 뜻이다. 일제강 점기의 지정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지름이 컸고 수세도 왕성하였다한다.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이었으 며 꽃핌의 상태를 보고 한해 농사의 흉풍을 가늠하는 기상목(氣象木)이기도 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함은 나무도 마찬가지, 지금은 노쇠하여 볼품이 많이 없어졌다. 최근에는 나무와 거의 붙여서 정자가 지 어졌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늑한 쉼터이나 나무에게는 이래저래 생명을 단축하는 시설일 뿐이다. 삶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는지는 물론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것 같다.
남해 고속도로 승주IC에서 빠져나와 광주 쪽으로 좌회전한다. 국도 22호를 타고 1km 남짓이면 오른편에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공식명칭인 ‘쌍암면 이팝나무’에서 쌍암면은 20여 년 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없어 진 이름이고 지금은 승주읍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