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8.금요성령집회 설교
*본문; 요 7:1~9
*제목; 요한복음강해(18)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는 법
1. 수요일 이야기
기도가 만사이고, 기도가 전부이고, 기도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길을 가도, 주님과 동행하며 가도 풍랑은 옵니다. 그러나 그 풍랑은 절대로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우리 주님이 반드시 이를 회복시키러 찾아오십니다. 아멘.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사건은 새로운 출애굽의 시대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시대 이후의 자녀들은, 이제 ‘생명의 떡’에 집중하는 자들입니다. 바야흐로 그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은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직업입니다. 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자녀들의 모습니다. 아멘.
2. “때”(시간)의 이야기
‘1절’을 봅시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 7:1)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니, 더 이상합니다. “그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습니까?
먼저는 ‘38년된 병자를 살리신 일’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모두 꿈꾸고 바라던 일인데 이 일 이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 6:60,66’입니다.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0,66)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고도(‘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38년된 병자의 치유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등) 이들은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놀라운 기적을 매일처럼 경험했던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경험하면 모든 믿음이 바로 세워질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말씀을 바로 듣고 이해함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더욱 더 말씀에 더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가장 불편했던 사람들이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영적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이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한 청년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가져가고 하늘의 일들을 행하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드디어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하고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욕심”이 자리하면 믿음이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주실 때에도 이유가 있고 가져가실 때에도 이유가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모든 상황에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런데 알량한 욕심이 가져가실 때 발동하여 발버둥을 치다보면 ‘욕심’이 생기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일에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로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3~5절’입니다.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 7:3~5)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여 고향 갈릴리로 왔는데, 형제들은 오히려 유대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욕심과 섭섭함 때문입니다. 형의 성공을 보고 싶었고, 형의 사역에 자신들을 부르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습니다.
결국 요한사도는 이들이 “믿음이 없었다”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 있는 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려면 욕심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동생들의 말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 7:6)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시간(크로노스)과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은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신앙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시간을 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주님도 하나님의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시간은 “지금 당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가장 적절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간이 더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크로노스를 주장하는 것은 믿음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주님을 주라고 부르시면 실제로는 종으로 여기는 행위입니다. 내 뜻대로 행하시고 내 시간계획표대로 주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후 이상한 반응을 보이십니다. ‘8~10절’입니다.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요 7:8~10)
안 가신다고 하시고 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자주 보던 모습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그러셨습니다.
이는 ‘기적’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응답치 않으시지만, ‘표적’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따르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표적’을 따르는 자들입니까?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3. 정리
믿음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욕심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 안에서 밀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이 다 채워주십니다. 이를 기억하고 욕심을 밀어내고 감사로 채워, 믿음 있는 자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때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에 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지금 당장이 아니라 가장 적절할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믿으면 카이로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지만, 표적을 좇는 자들에게는 역사하십니다. 아멘.
첫댓글 주님은 기적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역사하시지 않지만, 표적을 좇는 자들에게는 역사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오히려 "기적을 일상처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표적"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뜻과 목표입니다. 역시 "영혼 구원"입니다. 이를 위해 좇아가는 자는 기적을 일상처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