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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요한 14,23)
완연한 가을로 접어드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연중 제 30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독서와 복음 모두 일관된 하나의 메시지,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탈출기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이방인들과 대면하는 상황 속에서 지켜야 할 약자에 대한 3가지 보호법을 이야기하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보호법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과거를 기억하며, 새로이 정착하게 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만나게 될 토착민들인 이방인들을 관대하게 대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당시 가난한 이들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과부와 고아들을 특별히 돌보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남편과 자식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과부와 부모를 여윈 고아들은 당시 사회 안에서 아무런 재산도 상속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규정은 가난한 이들에게 꾸어준 돈에 대한 지침으로서 생존을 위해 돈을 빌려야만 하는 가난한 이들을 관대하게 대하라 명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관대함의 처사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도 함께 이야기합니다. 일교차가 큰 이스라엘 지역의 날씨를 감안해 본다면, 가난한 이에게 겉옷이란 저녁 무렵 기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부자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겉옷을 빼앗긴다는 것은 추운 밤을 맨몸으로 지새워야만 하는 가련한 지경에 처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지라도 밤이 되면 그 옷을 돌려주라고 명하심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예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와 관심이 단순히 추상적 차원에서만 언급되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제 2 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공동체가 모범적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된 사실을 칭찬합니다.
테살로니카인들은 하느님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이방의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큰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섬기고 본받는 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그들의 하느님을 향한 굳은 믿음을 칭찬하며 테살로니카인들의 이 같은 모습이 인근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모범으로 본보기로 여겨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칭찬합니다.
이 같은 오늘 두 독서의 말씀은 얼핏 보기엔 각기 개별적 의미를 지닌 서로 다른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독서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독서의 말씀 안에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중심 테마로 연결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두 독서의 연결성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확인되며 더 나아가 그 의미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벌이는 예수님의 논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호시탐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꼬투리를 잡고자 그 분의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바리사이들은 득달같이 달려와 예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사두가이들의 복수를 하려는 마냥 예수님께 덤벼들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바리사이의 이 질문은 예수님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한 다분히 의도적 질문입니다. 동시에 바리사이는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식을 외적으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바리사이의 이 같은 의도가 바로 그의 질문 속의 “가장 큰 계명”이라는 표현 안에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의 이 질문은 유다인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질문으로서 율법의 모든 규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듯 보입니다. 유다인들이 회당에 모일 때면 흔히 토론의 주제가 되었던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 그 중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이 물음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어찌 보면 흔하디흔한 이 질문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약간 비틀어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바리사이는 ‘첫째가는 계명’이 아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 묻습니다. 248개의 실천적 계명과 365개의 금지사항으로 구성된 율법들 가운데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계명이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위의 바리사이의 질문처럼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그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명쾌한 답을 도출하기 어려운 난해한 질문을 던짐으로서 바리사이는 예수님이 이 애매모호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는지, 그리고 그 대답에 따라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예수님을 몰아넣고자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율법의 첫째가는 계명을 설명하십니다. 유다인이라면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나서 바로, 그리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암송해야 하는 이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이야기하심으로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조차 이견의 여지가 없는 율법의 대원칙을 다시금 확인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며 그것이 바로 율법의 둘째가는 계명이며 그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달려있는 계명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의 탁월함이 돋보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바리사이의 질문에 예수님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유다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첫째가는 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질문을 던진 바리사이도 이렇다 할 구실을 잡을 것이 없는 문안한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을 첫째가는 계명으로 대응한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한 발 더 나아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계명을 들어 그것이 바로 율법의 둘째가는 계명이며 이것이 첫째 계명과 짝을 이루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이룬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같은 대답이 갖는 탁월함은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 대답으로 어떻게 교묘한 바리사이의 질문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아니 오히려 질문을 던진 바리사이가 무색하리만큼 훌륭한 대답을 하신 이 답변의 탁월함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은 이 대답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셨던 것일까?
이와 같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미사의 시작 예식에 바쳐진 본기도문의 내용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금 전 바쳐진 본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저녁 암송하는 신명기의 구절을 되뇌며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사랑의 실천은 바로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의 계명,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켜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율법 준수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본질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정해 놓은 테두리와 범주로 이웃의 경계를 마음대로 그려 놓고 이러저러한 사람들만을 자신의 이웃으로 삼은 채,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배척하였습니다. 자신들과 같은 동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라고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이라고 자신들의 이웃의 범주에서 그들을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생각, 같은 행동, 같은 마음을 지닌 이들만을 이웃으로 삼아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바로 이 같은 행태, 곧 하느님 사랑을 이야기하며 정작 내 주위의 가난한 이웃들을 모른 채 하며 그들을 배척하는 행태를 꼬집어 지적하십니다. 곧 하느님 사랑의 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배제된 모든 율법의 준수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과 본질을 잃어버린 빈껍데기와 같음을 통렬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에 바쳐진 기도문이 이야기하고 있듯, 모든 일을 사랑으로 이루시는 아버지 하느님은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이십니다. 단 한 사람도 소외되는 일 없이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와 같은 하느님을 믿고 그 분을 사랑한다고 우리가 고백한다면 내 주위의 가난한 이웃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바로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바라시는 사랑의 실천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규범으로서의 사랑의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오늘 제 2 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우상에 빠져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나만의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우상, 내 가치관과 세계관이라는 나만의 착각과 교만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혀 율법의 정신인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웃 사랑의 실천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나와 맞지 않는 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냐며,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냐며, 나를 죽일 듯 괴롭히는 저 사람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냐며 이웃 사랑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실상 이 모든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듯이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만의 인간적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느님 사랑이라고 하는 첫 번째 계명을 우리가 삶 안에서 지켜낼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이라고 하는 은총의 힘으로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람, 도저히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며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이웃 사랑의 실천적 원동력은 바로 하느님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둘의 관계,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원천적으로 일치하며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사랑하는 송동교우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지금의 삶 안에서 화해하지 못하고 불목하는 형제가 있다면 오늘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사랑을 삶 안에서 실천하려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용서하지 못하던 그 형제를 용서하게 되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의 새 계명이며 우리 삶의 규범, 곧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나만의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나만의 고집과 아집 그리고 교만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사랑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말씀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여러분의 삶 속에 언제나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를, 이를 통해 여러분의 삶이 다툼과 불목이 아닌 화해와 용서로 가득 찬 삶,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이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요한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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