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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제창(전원법사님)
제10칙 청세고빈 第十則 淸稅孤貧
曹山和尙, 因僧問云, “淸稅孤貧, 乞師賑濟.” 山云, “稅闍梨.1” 稅應諾. 山曰, “靑原白家酒, 三盞喫了, 猶道未沾唇.”
無門曰, 淸稅輸機2, 是何心行. 曹山具眼, 深辨來機. 然雖如是, 且道, 那裏是稅闍梨喫酒處.
頌曰, 貧似范丹3, 氣如項羽4, 活計雖無, 敢與鬪富.
I. 본칙 조산 화상에게 한 스님이 말했다. “저 청세는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 좀 구제해주십시오.” 그러자 조산 화상이 “어이, 스님!” 하고 불렀다. 청세가 “예!”하고 대답하자,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들이키고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않았다고 하시는가!”
무문 화상 평하기를, 청세의 거동은 이 무슨 심사인가? 조산의 안목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네. 그렇다고 해도 말해보라! 도대체 어디가 청세가 술을 들이켠 자리인가!
게송으로 가로되, 가난하기로는 범단이요, 기개로는 항우로다! 무일푼으로 앞가림도 못하면서 감히 부를 다투다니!
II. 배경 조산본적曹山本寂5 화상은 중국 선종 오가五家의 하나인 조동종曹洞宗의 2조로 동산양개洞山良价의 선사상을 계승하고 그것을 치밀하게 이론화하였다. 회암지소晦岩智昭가 저술한『인천안목人天眼目』에는 ‘조동종은 가풍이 세밀하고, 언행이 상응하며, 근기에 따라 사물을 이롭게 하며, 말을 좇아 사람을 가르친다.6”고 하였다.
조동종曹洞宗 조동종 명칭에 대한 설이 두 가지이다. 선종의 제6조 혜능慧能이 조계曹溪에 있으면서 법을 전하였고, 다음 6세손인 양개가 동산洞山에 있으면서 도를 넓혔으므로 ‘曹洞’이라 했다는 설(일본학계의 주장)과 조동종 제2조 조산曹山과 제1조 동산洞山의 이름을 합하여 ‘曹洞’이라 했다는 설(대체로 중국에서 인정하는)이 있는데, 그 진위야 어떻든 개조를 뛰어 넘는 그의 위상을 알 수 있게 한다.
조동종은 동산양개洞山良价와 그의 제자 조산본적曹山本寂의 사자師資 2대가 개창開創한 종파다. 이 종파는 청원靑原과 석두石頭로 이어지는 선맥을 계승한 것이다. 임제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하지만 동산의 제자인 조산본적 보다는 운거도응雲居道膺 계통이 더 번영하게 되었다. 8대후에 천동굉지(天童宏智, 1091~1157)가 나와 묵조선黙照禪을 열었다. 이는 임제종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주창한 간화선看話禪과 맞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천동굉지는 선문禪門의 명저인『송고백칙頌古百則』7도 펴냈다. 또한 이 문하에서『종용록從容錄』을 쓴 만송행수萬松行秀도 나온다. 조동종의 가풍은 한마디로 무정설법無情說法 무정성불無情成佛이다. 여기서 무정無情이란 생명이 없는 존재를 말한다. 말하자면 생명이 없는 존재도 설법할 수 있으며 생명이 없는 존재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산하대지와 초목국토가 모두 성불한다는 ‘초목국토草木國土 실개성불悉皆成佛’이라는 조동종의 철학이 정립되었다.8
조동종 종풍의 특색은 세상에 잘 나가지 않고, 마치 고목처럼 오로지 좌선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종에서는 한때 조동종의 묵조선9을 무위무사無爲無事의 외도선外道禪, 고목선枯木禪, 소승선이라고 비난하였고, 조동종은 간화선을 깨달음을 기대하는 대오선待悟禪, 그리고 공안을 투과하고 또 다른 공안을 투과하는 간화선 교육과정을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다하여 제자선梯子禪(사다리선) 또는 학습선學習禪이라고 비난하였다.10
한편 동산과 조산의 “오위사상五位思想”도 조동종의 큰 특색인데, 五位는 수행인이 닦아가는 수행의 위상位相을 <정正>과 <편偏>으로 나누어 다섯 측면에서 분석한 것이다. 그래서 “편정오위偏正五位(혹은 正偏五位)”라고 하는데, 현상과 본체, 그리고 현상과 본체 그리고 자기와의 관계 등이 상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11 五位에 대한 설명은 무척 다양한데, 동산의 五位思想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산은 불교의 근본 문제에 대한 선적 파악을 통해 그 자신의 주체적 세계를 확립하고자 했는데, 그가 도달한 세계와 거기에 이르는 길은 그의 2가지 오위송五位頌에 의해 이론적으로 총괄된 것이라 간주된다. 편정오위송偏正五位頌에서의 5위는 선을 통해 도달하는 진실의 세계를 중층적으로 묘사한다. ① 평등한 세계가 도리어 차별의 세계이다(正位却偏). ② 차별의 세계가 도리어 진실의 세계이다(偏位却正). ③ 평등한 세계에서 나타난다(正位中來). 곧 평등의 진리가 차별의 세계에 들어온다. ④ 차별의 세계에서 나타난다(偏位中來). 곧 차별의 세계 그 자체에서 평등의 진리가 드러난다. ⑤ 두 세계를 동시에 갖추어 나타난다(相兼帶來). 곧 차별의 세계와 평등의 세계 전체에서 조화로운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그의 제자 조산은 의미상의 큰 차이가 없이 이를 다른 말로 개편했다. 다음 공훈오위송功勳五位頌에서의 5위는 수행의 5단계이다. 즉 ① 향하는 단계, ② 받드는 단계, ③ 깨달음을 얻는 단계, ④ 깨달음을 함께하는 단계, ⑤ 깨달음이 극에 달하는 단계이다. 결국 이런 실천적 입장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해간 것이 묵조선이다. 조동종은 송대宋代 이후 임제종과 함께 중국 선종을 주도했으며, 임제종이 공안을 수단으로 내세워 고취한 간화선看話禪에 대립했다. 그러나 묵조선은 논리성과 지성을 결여한 것으로서 오직 앉아 있는 것만을 선으로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중국 조동종은 일본에 전래되어 크게 유행했으며, 일본 선종의 3파에 속한다.12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3은 동산의 五位를 실천적인 측면에서 해석한 동안상찰 선사의『십현담十玄談』을 다시 유려한 시어로 주석을 붙인『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저술하였다.14
많은 신라 승려들이 청원계 洞山良价의 조동선曹洞禪을 전수해 온 것으로『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와 있는데, 당시는 간화선看話禪 중심이 아니었고 曹洞禪도 균형적으로 들어와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15 대표적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는 이엄(利嚴, 869~935)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이 曹洞宗을 이었다.
불성佛性과 견성見性 다음은『오가어록五家語錄』에 실려 있는 조산본적 선사의 행록行錄이다.
스님의 휘諱는 본적本寂이며, 천주泉州 포전蒲田 황씨黃氏 자손이다. 어려서는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19세에 복주福州의 영석산靈石山에 가서 출가하였고, 25세에 구족계단具足戒壇에 올랐다. 그리고는 동산洞山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동산스님께서 물었다. “스님은 이름이 무엇인가?” “본적本寂입니다.” “저런, 쯧쯧(那箇聻).”16 “본적本寂이라 이름붙일 수 없습니다.” 동산스님은 스님을 깊이 그릇으로 여겼다. (『승보전僧寶傳』에는 스님의 이름을 탐장耽章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전등록傳燈錄』에 실린 것을 그대로 따랐다.)17
다음은『조당집祖堂集』에 실려 있는 선사의 행록이다.
동산洞山스님의 법을 이었고, 항주抗州에 살았다. 법명謂은 본적本寂이며, 천주泉州 포전현蒲田縣 사람으로 속성은 황씨다. 어릴 적부터 9경九經을 익혀 출가하기를 간절히 바라더니, 19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부모의 허락이 나서 복당현福唐縣 영석산靈石山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2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은사가 계 받을 것을 허락하였는데, 거동과 몸가짐이 마치 오랫동안 익힌 것 같았다. 그 길로 행각을 나서서 처음으로 동산스님 법회를 찾으니, 동산이 물었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 스님께서 아무개라고 대답하니, 동산스님이 다시 말했다. “본분(向上)에서 다시 말해 보아라.” “말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말할 수 없는가?” “아무개라고 이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러자 동산스님이 근기를 깊이 인정하였다.18
조산이 동산을 처음 참알했을 때의 문답이다.19 불리는 이름을 아닌 본래 자기에 대한 견해를 묻고 있다. 본래 자기란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 본심本心, 자성自性 혹은 본래면목 등으로 불리는데, 사람마다 본래 지니고 있는 “근본”을 말한다.
초기 선종에서는 불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였는데,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불성을 표현하는 직지인심의 禪法은 마조로부터 시작한다.『마조록馬祖祿』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한다.
11 분주 무업(汾州無業, 760~821)스님이 스님을 참례하였다. 스님께서는 그의 훤칠한 용모와 종소리같이 우렁찬 목소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높고 높은 법당(佛堂)이나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 무업스님이 절하고 끓어 앉아서 물었다. “3승三乘 교학은 그 이론을 대략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문禪門에서는 항상 바로 마음이 부처라고 하니,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네.” 무업스님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찾아와 가만히 전수하신 심인心印입니까?” “그대는 정말 소란을 피우는군. 우선 갔다가 뒤에 찾아오게.” 무업스님이 나가는 차에 스님께서 불렀다. “여보게!” 무업스님이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무엇인가?” 무업스님이 딱 깨닫고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둔한 놈아! 절은 해서 무엇 하느냐.”20
16 홍주수로洪州水老 스님이 처음 스님을 참례하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절 한번 하라” 수노스님이 절하자마자 스님께서 별안간 한 번 걷어찼다. 여기서 수노스님은 크게 깨닫고 일어나면서 손뼉을 치고 “하하”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것 참 신통하고나, 신통해. 백천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털끝 하나에서 그 근원을 알아버렸도다.” 그리고는 절하고 물러났다. 그 뒤 대중에게 말하였다. “마조스님에게 한 번 채인 뒤로 지금까지 웃음이 그치질 않는구나.”21
마조는 무업의 겉모습을 거론하며 ‘그 속에 부처가 없구나!’라고 그의 깨달음을 타진한다. 이에 ‘부처라고 하는 그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실토하자, 마조는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네가 찾는 “그것”이지, 그밖에 별 다른 것은 없다고 바로 알려준다. 그러나 무업은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이에 마조는 ‘우선 갔다가 다시 오게!’라고 일단 내보냈다가 방을 나가는 무업을 부른다. 무업은 ‘마음’에 대한 의문으로 꽉 찬 상태로 문을 나가다가 예상 밖의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다. 이때 고개를 돌리는 그 행위가 바로 ‘그것’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마조는 홍주 스님에게도 무업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마음에 대해 알려준다. 즉, ‘머리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행위’가 바로 “불성의 작용”임을 깨닫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불성이란 항상 주재하니 모든 움직임이 모두 부처인 것이지, 마음이니 부처니 하며 새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 佛性의 작용으로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一心의 性을 불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견성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모든 생각과 행위의 움직임이 전부 불성의 작용이므로, 불성을 直指하는 방법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역시 직접적이고 즉각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마조어록에 보면,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든지, 뒤에서 갑자기 이름을 불러 돌아보게 한다든지, 걷어찬다든지, 후려친다든지, 눈썹을 찡그린다든지 하는 등의 동작을 통하여 불성의 움직임을 직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행위를 통하여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불성을 표현함으로써 제자를 지도하는 것은 마조 이래 그 문하에서 행해진 선의 가장 큰 특징이 된다. 禪宗史에서 보면, 江西의 마조 문하와 湖南의 석두 문하가 모두 이러한 직지인심의 禪法을 실천하여 五家의 종파를 이루면서 중국선종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므로 직지인심의 선법의 연원은 역시 혜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육조단경에 아직 직지인심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직지인심의 출발을 마조로 보는 것이다.22
마조가 선지를 나타내는 용어는 주로 마음(심心)인데, 그 마음은 바로 佛性이라고 하는 <성性>과 佛性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상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조선에서 견성見性(불성을 파악하는 것)이란 움직이는 相을 통해 性을 보는 것이다. 이처럼 살아 움직이는 작용이 바로 불성임이 마조 이래 이어온 그 문하의 전통이다. 부연하면, 마조선은 용用을 통해 체体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체보다는 용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3 그러나 행동(用)으로 견성(体)을 나타내는 것이 간접적인 언어 설명보다는 역동적이고 또한 즉각적인데 반해, 그 행동만을 모방해 견성을 흉내 낼 수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禪旨의 직접표현에는 언어를 통한 간접표현에 비하여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적극적이라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그것은 心의 구조상 또는 인식 기능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心은 性과 相이라는 양 측면이 있으며, 相의 측면만이 육근이라는 지각기관을 통하여 육식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직접표현이건 간접표현이건 모두 六境이라는 相으로 표현되고 육식이라는 相으로 인식되어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선지의 직접표현이라고 하더라도, 相을 통하여 性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이 점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함정이란 人心에는 이해하여 모방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스승의 직지인심의 행위를 보고서 실제로는 견성치도 못했으면서 그 겉으로 드러나는 相을 나름으로 해석하여 모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본래 선지의 직접표현이란 見相을 하고서 見性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직접표현을 보고서 견성치는 못하고 견상만으로 그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함정 때문에 선지의 직접표현은 항상 自己否定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견상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선지의 직접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견상만으로 그친다는 것은 바로 知解로써 이해하여 말이나 행위를 비슷하게 모방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조가 法常에게 비심비불이라 말한 것이나, 구지화상이 시자의 손가락을 칼로 자른 일이나, 현칙 선사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모두 이러한 함정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22
동산은 조산에게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에 ‘조산’이라고 이름을 말하자 그런 이름이 아닌 진짜 너의 진면목을 보이라고 주문한다. 이에 ‘아무개라고 이름 붙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동산은 당시 유행하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표현을 원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선도회 화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은 모두 이 경에서 나옴!>에서처럼 어떤 살아 움직이는 ‘조산’을 보여주기를 원했을 수도 있겠다.
조산의 대응은 처음이라 아직 미숙하여 선의 역동성이 부족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혹은 조동종의 새로운 선지禪旨를 펼칠 기틀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직 살활자재한 자유인의 모습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후에 있었던 선문답에는 그의 자신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이 조산이 부처님만 못하지.” “세간에 나오신 뒤엔 어떻습니까?” “부처님이 나만 못하느니라.”24
이후 펼쳐진 그의 활약상을 보자.
「조산록曹山錄」 시중示衆 3. 스님께서 행각할 때에 오석 관(烏石觀)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비로자나 법신의 주인입니까?” “내가 그대에게 말해준다면 따로 있는 것이 된다.” 스님께서 동산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동산스님이 말씀하셨다. “좋은 대화이긴 하다만 그대가 한 마디를 덜 했구나. ‘어째서 말씀해주지 않습니까?’ 하고 왜 묻질 않았더냐.” 스님께서 다시 가서 앞 말에 이어 묻자 오석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말해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를 벙어리로 만드는 셈이며, 말을 했다고 한다면 나를 말더듬이로 만드는 것이다.” 스님께서 돌아와 동산스님께 말씀드렸더니 깊이 수긍하셨다.25
『무문관無門關』「제24칙 이각어언離却語言」장에는 한 선승이 풍혈風穴 화상에게 “말을 해도 진리에 어긋나고 안 해도 어긋나니, 어떻게 해야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 통(진리에 계합)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풍혈 화상은 “長憶江南三月裏 庶鳥鴣啼處百花香”이라고 당당하게 노래한다.26 한편「제32칙 외도문불外道問佛」에는 외도外道가 세존께 “말 있음으로도 묻지 않고 말이 없음으로도 묻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세존은 말없이 앉아 계신다. 이에 외도는 “세존께서 대자대비로써 미혹의 구름을 열어 나를 깨닫게 하셨습니다.”라고 찬탄하며 절을 하고 물러난다.27
말더듬이도 되지 않았고 벙어리도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대처하였을 뿐이다. 맞고 틀리고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수행에 따라 근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나, 옛 선사들은 행각을 떠나 선지식들을 만나면서 스스로 터득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운문雲門스님이 물었다.28 “무엇이 사문의 행동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절 밥 먹는 것이다.” “그렇게 해나가고 있을 땐 어떻습니까?” “쌓아 모을(畜)수도 있느냐?” “모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모으려느냐?” “옷 입고 밥 먹는데 무슨 어려움 있겠습니까?” “왜 털 쓰고 뿔 달린 축생이라고 말하지 않느냐?” 그러자 운문스님은 절하였다.
스님께서 시중示衆하셨다. “제방에서는 모두들 격식을 붙들고 있는데, 어째서 딱 깨치게 해 줄 한 마디를 던져 그들의 의심을 없애주지 않느냐.” 운문스님이 대중 속에서 나오더니 물었다. “아주 부사의不思議29한 곳에서는 어째서 있는 줄을 모릅니까?” “바로 그 부사의함 때문에 있는 줄을 모른다.”
설두스님은 달리 대답(別語)하였다. “달마가 왔군.”30
조산본적과 24세 연하인 운문종의 개조 운문문원 간의 선문답들이다. 모두 운문이 묻고 조산이 대답하는 형식인데, 운문이 그의 문하에서 잠시나마 공부했었던 것 같다. 화두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으로 유명한 운문은 17세에 출가하여 교학과 계율에 깊은 지견을 얻는다. 그러나 교학이나 계율이 궁극적인 자신의 본분인 일대사一大事는 해결하지 못함을 깨닫고, 선禪의 길로 접어든다. 후에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는다.31
10. 스님께서 덕상좌德上座에게 물었다. “‘보살이 선정에 들어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너는 소리를 듣는다.’ 하였는데 무슨 경에 나오는 말씀이냐?” “『열반경』에 나옵니다.” “선정에 들기 전에 들었겠느냐, 선정에 든 뒤에 들었겠느냐?” “스님, 흘러갑니다.” “말을 하려면 분명하게 해야 비로소 반쯤 했다 할 수 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울물 아래서 맞이해 오겠네.”32
여기서 두 가지 답, ‘스님, 흘러갑니다.’와 ‘여울물 아래서 맞이해 오겠네.’는 어떻게 다른가? 이중 무엇이 ‘즉여卽如’의 답인가?33
12. 스님께서 강상좌强上座에게 물었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되, 물에 달이 비치듯 사물에 응하여 모습을 드러낸다(應物顯形). 그 응해 주는 도리를 무어라고 말하겠느냐?” “나귀가 우물을 보는 격입니다.” “말을 하려면 확실히 해야 얼추 맞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나귀가 우물을 보는 격이다.”34
이 대화에는 ‘응물현형應物顯形’이란 말이 나오는데, 본체인 불성과 세간만법 간의 관계, 즉, 체体와 용用의 관계에 대한 조산본적의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참 법신’을 들어 모든 사람들의 ‘참 법신’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본래의 취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은데 중생에게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물에 비친 달과 같다.’라는 말은 사람 사람들의 법신의 존재와 그 기능을 바르게 깨닫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35
나귀와 우물은 별개이지만 법의 차원으로 보면 본래 하나이다. 불성은 만물에 내재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나귀나 우물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세상만물이 모두가 별개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별개인 것과 같다.
“우물로 나귀를 엿보는 것과 같다”36고 하였는데, 우물의 물은 밝은 거울과 같아서 불성을 대표하고, 우물에 비춰진 당나귀의 모양은 우물의 물이 비추어낸 산물이니, 이것이 바로 불성이 “응물현형應物顯形”하는 것이다. 우물물이 “응물현형應物顯形”할 수 있는 것은 우물물이 사물을 비출 수 있는 성질 이외에, 또 반드시 “응물應物”을 비치는 것이 있어서이며, 이 “응물應物”을 선종에서는 보통 가연假緣이라고 한다. 형形은 체體의 작용이다. 따라서 만법의 형체 및 그것의 운행 변화 속에서 진여불성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은 양개의 “무정설법無情說法”과 한 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다.37
따라서 만법의 형체 및 그것의 운행 변화 속에서 ‘진여불성’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동산의 ‘無情說法’이다. 동산이 무정설법을 말하게 된 연유는 동산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다음으로는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스님을 참례하고 물었다. “지난번 소문을 들으니 남양혜충(南陽慧忠, ? ~775) 국사國師께선 무정無情도 설법을 한다는 말씀을 하셨더군요. 저는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위산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가?” “기억합니다.” “그럼 우선 한 가지만 이야기해 보게.” 그리하여 스님은 이야기를 소개하게 되었다. “어떤 스님이 묻기를, ‘무엇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라고 하였더니 국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담벼락과 기와 부스러기다.’ ‘담벼락과 기와 부스러기는 무정無情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도 설법을 할 줄 안다는 말입니까?’ ‘활활 타는 불꽃처럼 쉴 틈 없이 설법한다.’ ‘그렇다면 저는 어째서 듣지를 못합니까?’ ‘그대 스스로 듣지 못할 뿐이니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듣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듣는다.’ ‘스님께서도 듣는지요.’ ‘나는 듣지 못하지.’ ‘스님께서도 듣질 못하였는데 어떻게 무정이 설법할 줄 안다고 하시는지요.’ ‘내가 듣지 못해서이지. 내가 듣는다면 모든 성인과 같아져서 그대가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한다.’ (중략) 스님이 이야기를 끝내자 위산스님은 말하였다. “여기 내게도 있긴 하네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 뿐이다.” “저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위산스님이 불자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하였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설명해 주십시오.” “부모가 낳아주신 이 입으로는 끝내 그대를 위해 설명하지 못한다.”38 “스님과 함께 도를 흠모하던 분이 있습니까?” “여기서 풍릉灃陵 유현攸縣으로 가면 석실石室이 죽 이어져 있는데 운암도인雲岩道人이란 분이 있다. 풀섶을 헤치고 바람을 바라볼 수 있다면 반드시 그대에게 소중한 분이 될 걸세.” (중략) 스님은 드디어 위산스님을 하직하고 곧장 운암스님에게 가서 앞의 이야기를 다 하고서 바로 물었다. “무정無情의 설법을 어떤 사람이 듣는지요?” “무정이 듣지.” “스님께서도 듣는지요?” “내가 듣는다면 그대가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한다.” “저는 무엇 때문에 듣질 못합니까?” 운암스님이 불자를 일으켜 세우더니 말하였다. “듣느냐?” “듣지 못합니다.” “내가 하는 설법도 듣질 못하는데 하물며 무정의 설법을 어찌 듣겠느냐.” “무정의 설법은 어느 경전의 가르침에 해당하는지요?” “보지도 못하였는가.『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 ‘물과 새와 나무숲이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한다.’라고 했던 말을.” 스님은 여기서 깨친 바 있어 게송을 지었다.
也太奇兮也太奇정말 신통하구나, 정말 신통해 無情說法不思議무정의 설법은 불가사의하다네 若將耳聽終難會귀로 들으면 끝내 알기 어렵고 眼處聞時方得知눈으로 들어야만 알 수 있으니39
16. 한 스님이 물었다. “사문沙門이라면 큰 자비를 갖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여섯 도적이 찾아오면 어찌해야 합니까?” “역시 큰 자비로 무장해야 한다.” “어떻게 큰 자비로 무장합니까?” “단칼에 휘둘러 없애야지.” “없앤 뒤엔 어떻습니까?” “비로소 그들과 동화될 수 있다.”40
『중용中庸』4장에는 “지미知味”41라는 말이 나온다. ‘맛을 안다’는 말이다. 도올은 ‘맛味’이란, 생리적 욕구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화적 감각이며, 심미적 감성의 압축태라고 말한다. 맛은 감성과 이성을, 필연과 자유를, 과학과 도덕을 통합한다.
‘中庸’은 과, 불급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맛을 아는 것’이다. 독일어 Geschmack42은 철학계에서 “취미趣味taste”라고 번역하는데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Geschmack, 맛은 미를 판정하는 능력, 공통감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맛은 전문가의 세계이며, 고도의 수신을 통해 달성된다. 따라서 교敎란, 맛을 아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다. “삶의 맛”을 아는 것, 그것이 멋이고, 멋은 우리 몸의 궁극적 도덕성이다.43
보통 맛은 입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몸의 모든 구규九竅(우리 신체의 아홉 구멍)에도 맛은 해당된다고 한다.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생식과 배설구멍이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다. 九竅를 통한 육근六根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모든 경계들에서 자유로워야 비로소 법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멋을 즐기는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19. 한 스님이 물었다. “만법은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전도顚倒44에서 나온다.” “전도하지 않을 땐 만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지.” “어디 있습니까?” “전도해서 어찌하겠나.”45
23. 스님께서 유나維那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느냐?” “식초 통을 끌고 왔습니다.” “험한 길을 가게라도 되면 또 어떻게 끌고 가겠느냐?” 유나는 대꾸가 없었다.
운거雲居스님이 대신 말하였다. “잘 해보겠습니다.”
소산疏山스님이 대신 말하였다. “진정 놓아버려야 할 것입니다.”46
운거와 소산 두 스님 중 누가 ‘즉여’의 답을 하고 있는가? 한편 여기에 대해서는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인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가 나한계침(羅漢桂琛, 867~928)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 일화를 떠오르게 한다. 문익이 젊은 시절, 도반道伴과 전국을 행각할 때 갑자기 내린 폭설暴雪에 지장원地藏院에 잠시 머물다 떠날 때의 이야기이다.
계침 선사가 문밖에서 법안 선사와 동료 세 사람을 전송할 적에 계침 선사가 물었다. “상좌여, 그대들은 평소에 삼계가 오직 마음이라고 하였느니라.”하고는 손가락으로 뜰아래에 있는 돌을 가리키고 말하기를, “이 돌이 마음 안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이에 법안 선사가 말하였다. “마음 안에 있습니다.” 계침 선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먼 길을 다니며 행각을 하는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무거운 돌덩이를 마음에 담고 다니는가?” 법안 선사가 이에 크게 깨달았다.47
26.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날 없는 칼입니까?” “물에 담갔다 갈아서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을 쓰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닥치는 대로 죽이지.” “만나지 않은 자는 어찌됩니까?” “역시 머리가 떨어지지.” “닥치는 대로 죽인다는 것은 굳이 그렇다 쳐도 만나지 않은 자는 무엇 때문에 머리가 떨어집니까?” “모두 다 없앨 수 있다고 하지 않더냐.” “다 없앤 뒤에는 어찌됩니까?” “이 칼이 있는 줄을 비로소 알게 된다.”48
깨달음이 見性이 견성(볼 견見)이 아니라 현성(나타날 현見)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것이 옳은가? “남쪽 산은 검고 북쪽 산은 희구나!”
27. 한 스님이 물었다. “모습에 있어서 무엇이 진실입니까?” “모습 그대로가 진실이다.” “당장 어떻게 보여주시겠습니까?” 스님께서는 불자를 세웠다.49
29. 한 스님이 물었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 한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입니까?” “토끼 뿔은 없다 할 필요가 없고, 소뿔은 있다 할 필요가 없다.”50
있는 그대로 보면 되지 분별망상을 내지 말라는 말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것을 다시 또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는 뜻으로 “나는 오직 즉심즉불卽心卽佛이네!”라고 한 대매법상大梅法常의 말과도 통한다.
마음에 입각한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은 진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여(直下承當), 자신이 보장寶藏임을 알아서 취하여 마음과 부처가 다르지 않고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니, 소뿔이 본래 있는 것처럼 그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구절에 의문이 있어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마음이 허깨비가 되고(以心爲幻化) 부처가 상이 되어(佛爲相好)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한층 족쇄를 더하게 되기 때문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으로 그 병폐를 없애서 마음과 부처가 모두 상(心佛皆相)임을 말한 것이니, 토끼 뿔이 본래 없는 것처럼 그것이 없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51
30. “어떤 사람이 항상 있는 사람입니까?” “내가 잠시 나왔을 때 마침 만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항상 있지 않는 사람입니까?” “만나기 어렵지.”52
어떤 사람이란 본래면목(불성)을 지칭하는데, 모든 중생들은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항상 짝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하고 있다.
34. 한 스님이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땅에서 넘어지면 누구나 땅을 딛고 일어선다.’하니, 무엇이 넘어지는 것입니까?” “하려 하면 넘어지지.” “무엇이 일어남입니까?” “일어나게”53
53. 한 스님이 물었다. “눈이 모든 산을 덮었는데 무엇 때문에 한 봉우리는 하얗지 않습니까?” “다름(異)속에 다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다름 속의 다름입니까?” “갖가지 산색山色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54
선도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에서 점검하는 화두이다. 차별심을 내지 말라는 뜻이면서, 차별계를 통해 평등계를 설명하고 있다.
III. 사설 淸稅의 가난 잠시 지난『무문관無門關』「第05則 향엄상수香嚴上樹」제창으로 돌아가자. 향엄(香嚴智閑, ? ~898)이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의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의 질문에 막혀, 위산을 하직하고 향엄산으로 들어가 암자를 짓고 살 때이다. 어느 날 마당에서 풀을 베다 무심코 던진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 화두를 깨치고 게송을 읊는다. 그 유명한 “향엄격죽香嚴擊竹”이다.55
一擊忘所知한 번의 딱! 소리에 알려던 것 다 잊었으니, 更不假修持다시는 닦을 필요 없게 되었네! 動容揚古路 안색을 움직여서도 옛 길을 선양하여, 不墮悄然機 이제 다시 실의에는 떨어지지 않으리라. 處處無踪迹 가는 곳 어디에도 자취 없고, 聲色外威儀 빛과 소리 그 밖에서 모든 행위 이루어지니 諸方達道者 제방의 도를 아는 이들은 咸言上上機 모두가 상근기라 하리.
이 소식을 스승인 위산이 전해 듣고 “향엄이 깨쳤군!”이라고 하자, 앙산(仰山慧寂, 803~887)이 “이는 알음알이로 지은 것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고는 향엄에게 가서 묻는다. “스승님이 사제의 오도송을 칭찬하시던데 그대가 다시 한 번 해 보게.” 이에 향엄이 일전의 게송을 다시 읊으니, 앙산이 “이는 오랜 훈습으로 기억했다가 지은 것이다. 만일 바른 깨침을 얻었다면 따로 한 마디 해 보게!”라고 하였다. 이에 향엄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去年貧未是貧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고 今年貧始是貧 금년의 가난이야말로 비로소 가난일세. 去年貧 작년 가난은 猶有卓錐之地 송곳 꽂을 만한 땅이라도 있었건만 今年貧錐也無 금년에는 꽂을 송곳조차 없구나!
꽂을 대상도 꽂는 주체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즉 가난의 대상도 없고 가난의 주체도 없으니 무엇을 가난이라고 할 것인가?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가난이라고 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가난은 일체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무념의 경지(깨달음)를 말하고 있다. 이는 본칙에서 청세가 말하는 가난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가난하다고 떠벌이지 않는다. 어떤 논리를 가지고 말한다고 해도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과 같다. 아직 철저하게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조주는 “저는 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무심하게 말한다. “그만 내려놓게!” 그러므로 앙산도 말하기를 “사제가 여래선如來禪은 깨쳤다고 하겠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56”고 지적한다. 그러자 향엄이 다시 게송을 읊는다.
我有一機 瞬目視伊 나에게 한 기틀(마음)이 있어, 단번에 그를 알아보네! 若人不會 別喚沙彌 만약에 알아보지 못한다면, 따로 사미라 부르지 마오.
이를 듣고 비로소 앙산이 향엄의 깨달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나(我)’는 작은 나(Atman)를 가리키고 ‘그(伊)’는 큰 나(Brahman)인 본래면목(여여如如, 진여眞如, 도道, 무위진인無位眞人 등으로 불리는)을 가리킨다. 我와 伊는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한편 게송에서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고 하였는데, 알아 본 순간 상대적 차별심에 빠지게 된다. ‘한번은 직접 만나야 하겠지만, 만났다고 하면 이미 둘이 되어’57버리기 때문이다.
나我와 그渠 그리고 稅闍梨 그런데 나와 그에 대한 동산의 오도송은 그 심오함을 더한다.
切忌隨他覓 다른데서 그를 찾지 마라 迢迢與我疏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我今獨自往 이제 나 스스로 혼자 가니 處處得逢渠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 渠今正是我 그는 바로 나이지만 我今不是渠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應須與摩會 이것을 깨달아야 方得契如如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58
동산은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거渠)는 바로 나(아我)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네!’라고 노래한다. 물에 비친 모습이 동산의 형상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동산의 전부는 아니라는 뜻이다. 나의 ‘겉모습’일 뿐 나의 ‘진면목’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선언한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고. 이 게송은 앞서보았던 동산의 이론적인 ‘정편오위설’과 실천적인 ‘공훈오위설’에서 말한 사事와 편扁을 의미하는 “나(我)”와 그리고 이理와 정正을 의미하는 “그(渠)”가 상즉상융相卽相融하는 제법실상의 측면을 드러낸 게송이다.
양개는 만법으로부터 진여를 체험해 들어가 본체에 계합하는 “보경삼매寶鏡三昧”를 온 힘을 다해 널리 알렸다. 양개가 지은『보경삼매가寶鏡三昧歌』에서 오로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보경 앞에 서면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너는 그가 아니고, 그가 바로 너이다.59” 송대宋代 조동선승인 운외雲外와 운수雲岫가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다. “무릇 거울은 사물을 비출 수 있어서 드러나 보이니, 하나도 차이나 의혹이 없다. 비록 가짜이면서 진짜이고, 비록 진짜이면서 가짜이다. 만약 진짜로 가짜를 찾을 수 있고, 가짜로 진짜를 찾을 수 있다면, 진짜와 가짜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60” 여기에서, “진짜(眞)”는 이치(理)를 가리키고, “가짜(僞)”는 현상(事)을 가리킨다. 양개는 사람이 온갖 사물을 보는 것은 당연히 보경을 마주보고 있는 것과 같아서, 거울 속의 그림자는 바로 겨울 밖에 있는 사물의 생김새가 구현된 것이다. 이처럼 사물의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마주 비추어져서 그림자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물의 형체이며, 사물의 형체가 그림자로 구현된 것이고 보았다. 이 설법은 이치(理)와 현상(事)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현상의 상(事相)으로부터 이치의 체(理體)를 나타낼 수 있는 도리를 설명했다. 양개는 나중에 이 법을 본적에게 은밀히 전하고 신신당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운암雲岩 선사先師에게서 친히 보경삼매寶鏡三昧를 인가받고 현상을 궁구한 핵심을 이제 너에게 부촉한다.61” 본적은 선사의 설을 계승하며 불성은 사람마다 본래 지니고 있고, 자성은 본래 깨닫는 것임을 강조하였다.62
앞에서 보았던 향엄의 게송을 ‘나에게 대기大機가 있어 그를 보았는데,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여 달리 사미를 불렀다’라고 해석한 곳이 있는데, 我와 伊는 보통명사인 “沙彌”를 부르는 순간 我와 伊라는 (또는 我와 渠라는) 분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통합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청세가 “저는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 좀 구제해주십시오.”라고 하자 조산 화상은 바로 “稅闍梨!”라고 부른다. 조산 화상이 “稅闍梨!” 하고 부르고, “예!” 하고 대답하는 순간, 가난한 자도 부자도, 나도 그도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리 가까이 오라는 말에 가까이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63
IV. 해설 지금 잘 살고 있는가? <나는 꼼수다>로 유명한 김어준이 한 강연회에서 한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20대 젊은이들로 부터 지금까지 수 만 통의 상담 메일을 받았는데, 그 메일 내용의 70%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느냐?”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앞으로 뭘 할까?”64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르게 되었는가? 김어준은 프랑스의 정신 분석학자 라캉65의 이론을 빌어 설명한다.
“인간은 타자(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 제일 먼저 몰두하는 일이 엄마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아이가 웃었는데, 엄마가 좋아하면 아이가 자꾸 웃고, 아이가 걸었는데, 부모가 박수를 치고 좋아하면 아이가 자꾸 걸으려고 하고, 말을 했는데 주변 가족들이 박수를 쳐주면 자꾸 말을 하려고 한다. 누구나 겪는 발달 과정인데, 즉, 애초부터 아이가 태어나서, 사회를 배워가는 과정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이다.66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방향으로 사회를 배워 나가게 된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내 욕망과 다른 사람의 욕망이 구분이 안 가게 되는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는 있는데, 이걸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지, 엄마가 원해서 하는 건지, 선생님이 칭찬해주니까 하는 건지, 주변 친구들이 기대를 하니까 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항상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만 궁금하게 된다. 왜냐면 불안하니까...... 그렇게 이십대를 지나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 문득 의문이 든다. 뭔가 하긴 많이 한 것 같은 데, 여태까지 한 것이 내가 원해서 한 것인가?
행복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자기가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자기 욕망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건, 자기가 언제 행복한지를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행복하게 될지는 누가 정해 줄 수 없다. 자신이 자신의 욕망의 주인이 되어 자기 자신과 1대 1로 마주서서, 주변 모든 것들과는 무관하게 자신을 흥분시키는, 자신의 욕망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주저 없이 그냥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주변 사람들부터 설득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자신이 일을 실패 했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심리적 피드백이다. 행여 자신이 하는 일이 실패 하였다 하더라도,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거리를 만들어 놓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말하다 보면, 남을 설득시키려고 한 것인데, 자신도 그 논리에 설득이 되어 어느새 자신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정말로 어렵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려워하고 쉬이 실행할 수 없는 일로 간주하고 종래에는 안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는 일에 대한 결과를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냥 해보는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가, 실패 했을 때 타격이 얼마나 큰 지는 따지지 말고 그냥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성공을 보장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삶에 대한 후회는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 나름 성공했다고 하는 40대의 사람들의 특징을 조사해본 기관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람들의 2, 30대는 어떤 한 가지 일을 계속 꾸준히 해서 성공한 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과는 무관한,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여러 가지 많이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그 순간순간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그 즉시 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삼십대 중반 즈음부터 자신이 잘 하는 일을 결국에 찾아내었던 것이다.
김어준의 삶의 원칙은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언제 행복한지, 자신의 욕망이 뭔지,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 건지 우선 찾고, 찾아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욕망의 주체가 되어 그냥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로 결정하였다면 지금 당장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그의 충고이다.
사람들은 흔히 지금은 준비를 하고 마치 적금을 들거나 돈을 모으는 듯한 말투로 나중에 행복해질 거라 한다. 그러나 행복은 모으거나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놓친 이 행복은 10년 후 다시 한다고 했을 때 과연 같을까. 아니다. 20대의 행복은 30대의 행복과 다르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계획만큼 웃긴 것도 없다. 어차피 인생은 비정규직이고 정해진 건 없다. 계획대로 될 일도 없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살아야 한다.
지금 잘 살고 계십니다. 『中庸』14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군자는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선 부귀한 바대로 행하며, 빈천에 처해선 빈천한 바대로 행하며, 夷狄에 처해선 夷狄의 법도대로 행하며, 환난에 처해선 환난스러운 바대로 행하나니, 군자는 들어가서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다.67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좀 더 잘 살 수 있습니까?’ 가끔 받는 질문이다. 그때 마다 필자는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지금 잘 살고 계십니다.”
문제는 잘 살고 있는데도 우리들 유전자가 ‘그냥 그대로 잘 살게’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잘 살아야 할 것 같고, 남보다는 더 잘 살아야 만족하게 된다. 그 만족도 오래 가지는 않지만.
“그러면 발전이 없지 않을까요?” “계속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 그러나 발전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에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한 데서 온다. 방하착放下着! 망상 떨지 말고 하는 일에 성실하게 집중하는 것이 첩경이다.『中庸』은 말한다. “지성무식至誠無息”, 지극한 성誠은 쉼이 없다고. 성실이야 말로 가장 위대한 중용의 정신이며 시대를 초월하는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어떻게 해야 좀 더 잘 살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은 이제 밖으로가 아니고 내면으로 돌려야 할 때이다. 행복은 풍족하다고, 경쟁에서 이긴다고 오는 것은 아니다. 수행을 통해 ‘다투면 모자라고 나누면 남는다.’는 평범한 진리에 눈뜨고 평범하게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는 것, 그것이 잘 사는 길이다.
제비꽃은 제비꽃으로 피면된다.
인간의 축적본능 생태학과 진화론의 거장인 조지 C. 윌리엄스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질병의 주요한 원인은 석기시대에 완성된 인체의 적응과 현대의 환경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예로 우리의 편식과 더불어 음식점 메뉴, 슈퍼마켓을 돌면서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들에 의해 생기는 문제점이다. 석기시대에는 가장 달고 부드럽고 영양분이 많은 음식을 추구하는 것이 언제나 이로웠다. 잘 익은 과일, 먹기 좋은 땅속줄기나 사냥해서 잡은 야생동물의 가장 먹기 좋은 부분들만 찾아 먹었다. 이는 대부분의 식물들이 갖고 있는 강력한 화학무기(독풀 등)를 피하는데 도움이 되었다.68 오늘날의 인류는 석기시대와 똑같은 욕구를 가졌으나 역사상 가능했던 수준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설탕, 지방, 소금을 훨씬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는 비만, 당뇨, 심장질환, 여러 종류의 암 발병률이 높아졌는데, 석기시대의 보통 음식을 먹었더라면 그런 병에 걸릴 확률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69
인간의 몸이 환경변화에 적응하려면 적어도 만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식생활이 짧은 시간 급격히 바뀌는 바람에 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가 사회적 진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예로 호주 원주민은 대부분 당뇨병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들의 몸이 현재 식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먹을 것이 생기면 먹고 없으면 먹지 못하는 수렵채집 생활을 하였다. 그런 식습관은 그들의 몸을 영양이 부족할 때를 대비하여 저장하도록 진화하였는데, 지금은 음식이 충분하여 정기적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데도 불구하고 유전자의 설계도에 따라 계속 영양분을 축적하기 때문에 당뇨병에 쉽게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축적하는 본능, 그런 성향은 몸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인간의 유전자는 모든 것들을 필요이상 축적하려는 방향으로 진화하였고 그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1930년대 초에 미국의 ‘줄리언 헉슬리’70 교수는 미래에는 어떤 사람도 1주일에 2일 이상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업가인 ‘월터 지퍼드’는 과학 기술 덕분에 모든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를 얻고 삶의 기술을 발전시키고 마음과 정신의 평온함과 만족감을 더욱 많이 누릴 시간을 갖게 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또한 사회학자인 ‘헨리 페어차일드’71는 “근무일에 하루 평균 4시간씩만 일해도 우리가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할 만큼 많은 상품을 공장에서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세기와 21세기의 경제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 보면 업무 부담이 현저하게 줄어들어야 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산성 향상으로 생산 이익을 더 많은 돈, 다시 말해서 더 많은 물질의 형태로 받았으며 아무도 더 많은 시간의 형태로 받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시간보다 돈을 선택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많이 받은 것이다.72
그렇지 않아도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오래 일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돈을 향한 끝없는 경쟁은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결과적으로 패배자가 생기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근래 들어 국제 곡물가가 치솟아 문제가 되고 있다. 개발도상국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생산하는 식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고기를 먹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곡물을 가축사료로 쓰고 있고,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바이오 오일 생산에 곡물을 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억 명의 인구가 굶주리고 있다는 통계다.73
We Are 99% 「We Are 99%, 월가, 분노가 점령하다」, 지난 달 방영된 <KBS 스페셜>의 제목이다. 지난 9월 17일 청년 실업자 수십 명이,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 월스트리트 근처 주코티 공원에 텐트를 치고, 시작한 시위에 대한 내용이다. 그들은 외쳤다. “1%의 행복한 삶을 위해 99%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월가를 점령하라!”
이들은 월가 금융사들의 최고 경영자들이 미국을 경제파탄의 위기에 빠뜨렸고 그 때문에 국가적 실업률이 높아져 자신들이 직장을 잃는 등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수백만 달러 이상의 퇴직금을 챙겨 떠나는 행태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서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타고 이들의 외침이 퍼져나갔다. 한 달 후 ‘We are the 99%’라는 구호를 앞세워 미국 최고 부유층 1%를 겨냥한 시위에 수많은 사람이 동참했다. 시위 소식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전해졌고, 마침내 10월 15일 80여 개국 900여개 도시에서 동시집회가 열리는 세계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74
세계 금융 시장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투자은행 겸 증권회사인 골드만삭스Goldman Sachs는 임원들을 정부에 들여보내 미국 정계를 접수하고 금융규제를 없애가며 마음껏 장사를 하다가75,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져 손해를 보자, 미국 재무부 골드만삭스 임원 출신 관료들은 국민세금을 빼내 투자손실금을 보전해 주도록 의회와 정부를 조종한다. 그렇게 대규모 구제 금융과 적극적인 경제부양으로 최소한 수치상으로는 경제가 회복되는 듯 보였고, 2009, 2010년 월가는 사상 최고의 실적을 올린다. 특히 2009년 골드만삭스는 창사 이래 최고의 실적을 기록하였고, 당기 순이익률에서 금융계 전통적 강자인 JP모건을 누르고 1위에 등극한다. 그리고 한 일이 임직원들에게 보너스로 무려 162억 불(18조)을 지급한다. 골드만삭스는 보험회사 AIG를 통해 받은 130억 불은 물론 다른 구제 금융도 전혀 상환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버드 졸업생들이 하는 일을 보면 1960년대엔 대부분 제조업에 종사하거나 엔지니어,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하버드 남자 졸업생중 거의 절반이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재들이 모두 월가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자원배분입니다. 이들이 유전공학, 생명과학 등에 종사하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스티브 미흡, 조지아대 교수, 경제사 전공)
금융이 더 규제가 필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정보의 비대칭성이 너무 크다는 겁니다. 아까 그 골드만삭스가 그런 것처럼 자기들이 내부자 정보를 이용해 돈을 걸 가능성의 여지가 매우 높고, 무엇보다도 예를 들어 조선 산업 하나가 망하면 온 경제가 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융은 워낙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른 산업보다 엄격하게 규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하준 교수)
워싱턴과 월가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금융권에 대한 대폭적인 규제완화로 금융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는데, 1997~2007년 사이 금융업은 미국기업이 달성한 총이익 중 ⅔를 차지한다. 같은 기간 동안 금융업 종사자의 소득증가분은 GNP증가분의 ⅔를 차지한다. 10억 달러(1조 1,000억 원)라는 금액은 2009년 헤지펀드 매니저 25명의 평균소득이다.
1880년대라고 해보죠. 최상위 엄청난 양의 부가 있었습니다. 그 부가 누구 소유인가요? 존 록펠러, 앤드류 카네기76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물건을 만들고 수만 명의 사람을 고용하고 산업을 건설하고 미국을 산업국가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현재로 와보죠. 최상위 1%는. 헤지펀드 매니저 입니다. 헤지펀드 매니저는 100명 정도 직원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게 다입니다. (조지아대 교수)
자본주의가 지난 10몇 년 동안 온갖 빈부격차 등 비난을 받았지만 유지가 되었던 것은 돈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일자리 창출, 설비투자도 하고, 뭔가 문명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기적 활동을 하다 보니, 어떻게 이타적 활동도 저절로 했기에 자본주의가 그나마 유지가 되었지만, 만약에 금융자본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일자리 창출도 안 되고, 경제성장도 안 되고, 설비투자도 안 되고, 문화도 발전시키지 못하면 그 금융자본은 용서가 안 되는 거죠.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원)
현재 골드만삭스는 한국의 우리은행 등 모든 은행의 대주주이고, 이번에 [자본시장법] 이 통과되어 3년 안에 한국의 많은 기업을 소유하고 지배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일본 교수가 TV에서 왜?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데 3년 걸린다고 했는데 완벽히 이해가 됩니다.77 (한 네티즌) V. 참구 이 화두는 깨달음에 대한 빈부貧富의 이원적 분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깨달음에 대해 부유하다느니 가난하다느니 하는 이원적 분별이 떠난 때가 그 첫 번째이고, 취했다느니 취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분별에서 자유로운 때가 그 두 번째이다.
VI. 재독 1. “제가 몹시 가난합니다. 부디 좀 도와주십시오.” 이게 무슨 뜻인가? 2. “청원백가주를 서 되나 마신 듯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3. “너는 아직 입술도 안 적셨다고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VII. 감상 원불교 초기 교단의 모습과 정산종사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예순다섯 분 선진님들의 추모담,『내가 모신 정산종사, 우리 회상의 법모』를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는 종산종사의 말씀들을 가려 뽑아 본다.
“신통 그것 천하 쉽다. 아무나 석 달만 공들이면 된다. 그러나 신통 그것은 못 쓴다. 도인 못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 사람을 호위하는 신장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도하고 보호한다. 이 같은 때를 당하여 언행을 조심하고 매사에 경거망동함이 없도록 주의하며, 수신에 힘쓰라.” “대종사님께서는 결정하시기 어려운 일을 당해서 청정한 마음으로 심지를 뽑아 보라 하셨으니 한 번 실시해 보라.”
“너도 너무 그리하면 당한다.”라고 하시며 “그래도 동지가 한 모퉁이는 쓸모가 있지 않느냐.”고 하셨다. 열 가지 일 중에서 한 가지 잘한 점만 보시지 아홉 가지 잘못한 것은 보지 않으시는 그 심법에서 이 어른이 정말로 크신 부처님이시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람이 곽란이 나는 수가 간혹 있다. 곽란이 날 때 침으로 피를 통해주면 살아나듯이 일생을 살 때도 눈이 헛보여 실수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한 순간의 실수를 감싸주면 영생의 문이 열리지 않더냐.” “미운 생각 갖지 말고 맛있는 것도 사다주고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서 그 사람한테 실지 불공을 해 보아라.” “선한 사람 꼴은 누구나가 잘 본다, 우리는 악한 이, 미운 사람을 제도하러 왔으니 자타증애를 벗어나 사람 꼴을 잘 봐야 한다.”
“특별한 손님도 아닌데 돈을 주면서 보내십니까?”라고 여쭈니 “저 사람이 바로 원불교를 선전하는 나팔수이다.”라며 “사람을 맞이할 때는 예우를 차리고, 떠날 때에는 후하게 전송을 해주고, 떠난 후에는 좋은 말을 할지언정 나쁜 평을 하지 말라.”
“부모 자녀의 인연도 지중하다. 그러나 사제의 인연 또한 지중한 것이다. 평생을 동거하며 영생을 동거하자.” “우리가 다성겁래에 함께 공부 사업한 사람들이요. 앞으로 늘 만나서 이 일을 할 사람들이다.”
“너무 급히 공부하다보면 이루어 지지 않는다. 欲速不達이다. 도가의 공부는 길게 잡아야 한다. 천리 길 가는 사람, 만리 길 가는 사람, 짧은 거리를 가는 사람의 걸음이 다르다. 길게 잡고 공부하면 성공한다.” “前心後心 一如淸淨, 진심으로 염원하고 서원했던 마음이 한 고비를 지내면 보통은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풀리지 않고 영원히 한 마음을 지속하게 되면 대성을 하게 될 것이고 앞날은 양양하게 된다.” “최후의 5분간이 전쟁을 이기고 지게 하는 갈림길이라는 뜻을 아느냐. 부글부글 끓는 밥을 다 되었다고 뚜껑을 열면 밥이 안 된다. 그런데 그때가 밥이 되는 때다. 마찬가지로 嗔心이 끓어오를 때 끝까지 참아라. 그것이 바로 도가 익어가는 때다. 또한 진심뿐만 아니라 자기가 공부해야 할 마음이 탐심으로 인해 허물어지려고 할 때 꾹 참으면 그때 큰 공부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충고를 잘 받는 사람이라야 행복하고 외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전제하신 후, “충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진정한 입장에서 私없이 하는 충고와 시기심 등으로 하는 사실 무근한 충고가 있다. 그러나 충고를 받는 입장에서는 진정으로 했거나, 사실 무근으로 했는지 간에 무조건 달게 받아라.”
“종법사님의 원은 무엇입니까?” “내 원은 인류, 시방세계 육도사생을 제도하는 것이지.” “성인이 무엇인 줄 아느냐. 성인은 善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자기의 본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도인은 큰일을 하되 밥 먹듯이 평상심으로 해나간다.”
“마음 넓히는 공부는 처음에는 시내 같고 다음에는 강 같고 마침내는 대해 창양 같아서 불가사의한 역량이 있나니라.”
하루는 “부처님이 꽃가지를 드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어 보았다. 정산 종사님은 곁에 있던 죽비를 가리키며 “죽비를 들었다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치는 모두 같다.”
참고한 책과 글
1) 사리闍梨는 아사리阿闍梨(âcârya)의 준말로 중에게 덕행을 가르치는 스승을 일컫는다. 원래는 사범師範이 되는 승려를 지칭하는 말로,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지도하여 그 모범이 되는 승려를 이른다. 일반 승려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승려를 부르는 존칭으로 쓰였다. ‘도리’라고 읽기도 하고 도려闍黎라고 쓰기도 하는데, 고려 시대에는 귀한 집 아들로서 절에 들어가 중이 된 총각을 대접하여 이르던 말이었다. 후에는 ‘도령’으로 발전하여 총각을 높여 부르는 말이 되었고, 도련님으로 변하기도 한다.
2) ‘수기輸機’는 “메고 나오는 행동, 구부러진 행동”이 뜻. 종래에는 이것을 “機를 輸하다”로 읽었으나 ‘輸機’로 음독音讀하는 편이 좋다. (秋月龍珉 · 秋月眞人 著, 慧謜 譯,『선어록 읽는 방법』, 운주사, p. 83)
3) 범단范丹은 범염范冉이라고도 하며 한漢나라 진류군陳留郡 외황현外黃縣에 살았다. 자는 사운史雲, 정절貞節선생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젊어서 위종좌사尉從佐使라는 낮은 직책으로 독우督郵(군의 감독 전달자)에게 공문이나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범단은 지절志節이 있어 자신이 천하게 심부름이나 하는 낮은 관리임을 부끄럽게 여겨, 세상을 떠돌며 현인을 따르고 공부하여 성공하였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의 열전列傳 권 111에 보이며 당시 ‘시루에 먼지 끼게 하는 범사운范史雲, 가마솥에 물고기를 기르는 범래초范萊蕉’라는 속요로 노래될 정도로 가난하였다고 한다.
4) 항우項羽(B.C. 232~B.C. 202)는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무장으로 이름은 적籍 羽는 자字이다.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유방劉邦과 협력하여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霸王이 되었다. 그 후 유방과 패권을 다투다가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어 자살하였다.
5)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 화상은 천주泉州 보전莆田 출신으로 성姓은 황씨黃氏, 시호는 元證이다.『승보전僧寶傳』에는 조산탐장曹山耽章이라고 하였다. 洞山良价의 제자弟子로 스승에게서 종지宗旨를 받은 후, 무주撫州 조산曹山 숭수원崇壽院에 있다가 다시 하옥산荷玉山으로 옮겨 법석法席을 융성하게 하였다. 그의 법 계보는 다음과 같다.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 청원행사(靑原行思, ?~740) →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 약산유엄(藥山惟儼, 745~828) →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 →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 조산본적.
6) 曹洞宗者, 家風細密, 言行相應, 隨機利物, 就語接人. (智昭,『人天眼目』卷三). 習細平, 中國 南昌大學哲學系副教授, 「曹山本寂的禪學思想論析」/ 김진무 번역,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 「조산본적曹山本寂의 선학사상 논석論釋」에서 인용.
7) 송대에 들어서 선종의 공안집이 만들어 지게 되는 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설두중현雪竇重顯이 뽑은『송고백칙頌古百則』과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뽑은 『頌古百則』이다. 설두 중현이 묶은『頌古百則』은 원오극근圓悟克勤이『벽암록碧巖錄』으로 펴냈고, 굉지정각의『頌古百則』은 만송행수萬松行秀의『종용록從容錄』으로 되었다. 『碧巖錄』과『從容錄』에 이르러 선종의 기연어구機緣語句와 문답상량問答商量이 정형화된 틀로 묶여서 수행의 지침서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후에 후학지도를 위한 전문적인 공안집으로 묶인 것이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의 『무문관無門關』이다.
8) 불교용어사전에서 인용.
9) 당시는 “묵조선默照禪”이라는 용어는 없었고 다만 임제종臨濟宗의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가 조동선을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비판하면서 默照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근대에 들어서야 일본에서 묵조선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2011년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10)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無門關』20則 참조.
11) 김호귀,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重編曹洞五位 小考」.
12) 조동종曹洞宗,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3) 김시습(金時習, 1435년~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승려로 생활하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5세 때 이미『중용』『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서울 노량진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저서로『유금오록遊金鰲錄』, 최초의 한문 소설인『금오신화金鰲新話』,『관동일록關東日錄』,『매월당시사유록』,『매월당집梅月堂集』등이 있다.『매월당집梅月堂集』은 김시습 사후 18년에 중종의 명으로 100여 편의 시와 자료 등을 수집하여 10년이 걸려 3권의 문집으로 처음 완성되었다. (백과사전에서 인용 수정).
14)『십현담十玄談』은 조동종 스님인 당나라 동안상찰(同安常察, ?~961) 선사가 저술한 10가지 게송偈頌으로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 실천지침 등을 7언 율시로 노래한 선시다. 이후 법안종法眼宗의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가『十玄談』에 주석을 달았으며 우리나라에 건너와 매월당 김시습이 다시 주석을 붙인『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2009년 발견된『십현담언해본』은 김시습이『십현담요해』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명종 2년(1548년) 강화도 정수사에서 판각한 것이다.
15) 불교전기 문화연구소 엮음, 박운파 감수『조동종의 원류를 찾아서』 불교영상, 1996.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16) 니聻: 부적符籍 적, 가리키는 모양 니(이). 귀신이 죽어서 또 다시 귀신으로 된 것. 니聻는 어조사語助辭로서 힐문하는 말의 여성餘聲. 어떤 사물을 지시하는 것에 대하여 반문하거나 주의를 재촉하는 간투사. 그것!, 그래! 등과 같은 기세를 나타내는 말. 할喝(꾸짖을 갈喝, 할, 큰 소리), 쵀啐(맛볼 啐, 쯧쯧), 이咦(크게 부를 咦), 로露(이슬 露, 모두 드러냄), 산散(흩을 散), 허噓(불 噓) 등과 같이 선어에 자주 등장 하는데,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하거나 다른 뜻을 찾아보라는 뜻으로 쓰인다.
17) 師諱本寂, 泉州莆田黃氏子. 少業儒, 年十九, 往福州靈石出家, 二十五登戒. 尋謁洞山. 洞山問, 闍黎名甚麼. 師云, 本寂. 洞山云, 那箇聻. 師云, 不名本寂. 洞山深器之. (僧寶傳. 師名耽章. 此燈錄所載. 遂仍之). 찾을 심尋, 아뢸 알謁. (『조동록曹洞錄』 (선림고경총서 1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155)
18) 洞山問, 闍黎名什麼. 對曰, 專甲. 洞山云, 向上更道. 師云, 不道. 洞山曰, 為什麼不道. 師云, 不名專甲. 洞山深器之. (앞의 책, pp. 203~203)
19) 두 행록에 나온 문답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필시 하나의 사건이었겠지만 어록이 기록될 때 기록하는 사람이나 어떤 연유로 인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록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20) 汾州無業禪師參祖. 祖覩其狀貌瓌偉, 語音如鐘. 乃曰, 巍巍佛堂, 其中無佛. 業, 禮跪而問曰, 三乘文學, 粗窮其旨. 常開禪門卽心是佛, 實未能了. 祖曰, 只未了底心卽是, 更無別物. 業又問, 如何是祖師西來密傳心印. 祖曰, 大德正鬧在, 且去別時來. 業纔出. 祖召曰, 大德. 業廻首. 祖云, 是什麼. 業便領悟禮拜. 祖云, 這鈍漢, 禮拜作麼. 볼 도覩, 얼굴 모貌, 구슬 이름 괴瓌, 높을 외巍, 꿇어앉을 궤跪. (『마조록馬祖錄·백장록百丈錄』 (선림고경총서 11)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37~38)
21) 洪州水老和尚初參祖. 問, 如何是西來的的意. 祖云, 禮拜著. 老纔禮拜. 祖便與一蹋, 老大悟, 起來撫掌呵呵大笑云, 也大奇, 也大奇. 百千三昧, 無量玅義, 只向一毛頭上. 便識得根源去, 便禮拜而退. 後告衆云, 自從一喫馬師蹋, 直至如今笑不休. (앞의 책, pp. 41~42)
22) 김태완, 신라대학교 철학과,「祖師禪에서 禪旨의 표현에 관한 연구」.
23) 체体와 용用에 대한 극명한 예는 위산(潙山靈祐, 771~853)과 앙산(仰山慧寂, 803~887)의 다음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위산이 앙산과 함께 차를 따고 있었다. 위산이 말했다. “하루 종일 그대의 말소리만 들릴 뿐 모습을 볼 수가 없구나.” 이에 앙산이 차나무를 흔들어댔다. 위산이 말했다 “그대는 단지 용用만 얻었을 뿐이로다.” 앙산이 말했다. “그러면 스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위산이 양구하였다. 앙산이 말했다. “스님은 단지 체(體)만 얻으셨군요.” 위산이 말했다. “30대를 맞아야 할 놈이로구나.” (擧潙山與仰山摘茶次 潙云 終日祇聞子聲 不見子形 仰便撼茶樹 潙云 子祇得其用 仰云未審 和尙如何 潙良久 仰云 和尙祇得其體 潙云 放子三十棒)
24) 僧門, 佛未出世時如何. 曰, 曹山不如. 出世後如何, 曰, 不如曹山.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선림고경총서 10)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24)
25) 師行脚時. 問烏石觀禪師. 如何是毘盧師. 法身主. 烏石曰, 我若向爾道. 即別有也. 師舉似洞山. 洞山曰, 好箇話頭. 秖欠進語. 何不問為甚麼不道. 師却去. 進前語. 烏石曰, 若言我不道. 即瘂却我口. 若言我道. 即謇却我舌. 師歸舉似洞山. 洞山深肯之. 떠듬거릴 건謇. (『조동록曹洞錄』 (선림고경총서 1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62~163)
26) 風穴和尙 因僧問, 語默涉離微, 如何通不犯. 穴云, 長憶江南三月裏 庶鳥鴣啼處百花香. (『무문관無門關』「제24칙 이각어언離却語言」)
27) 世尊 因外道問, 不問有言, 不問無言. 世尊據座. 外道贊歎云, 世尊, 大慈大悲. 開我迷雲, 令我得入. 乃具禮而去. 阿難尋問佛, 外道有何所證, 贊歎而去. 世尊云, 如世良馬, 見鞭影而行. (『무문관無門關』「제32칙 외도문불外道問佛」)
28) 운문문원(雲門文偃, 864~949) 선사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 청원행사(靑原行思, ? ~740) →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 →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 → 운문문원. 조산과는 동시대 사람이다.
29) 불가사의不可思議, 이상함. 희한함. 괴이함을 뜻한다. 여기서는 밀밀처密密處의 번역으로 “치밀하고 세밀한 곳”을 말한다. 조산이 어느 때 “깊고 깊은 곳(深深)에 자세히 행하고, 은은한 때에 치밀하고 세밀하게(密密) 관찰하느니라.”라고 한 대목을 거론한 듯하다. (혜심慧諶 ․ 각운覺雲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禪門拈頌 · 염송설화拈頌說話』 7권「239. 성왕姓王」)
30) 雲門問, 如何是沙門行. 師曰, 喫常住苗稼者是. 雲門云, 便恁麼去時如何. 師曰, 爾還畜得麼. 雲門云, 畜得. 師曰, 爾作麼生畜. 雲門云, 著衣喫飯. 有甚麼難. 師曰, 何不道披毛戴角. 雲門便禮拜. 師示衆曰, 諸方盡把格則. 何不與他道一轉語. 令他不疑去. 雲門在衆. 出問, 密密處. 為甚麼不知有. 師曰, 只為密密. 所以不知有(雲竇別云達磨來也). 심을 가稼. (『조동록曹洞錄』 (선림고경총서 1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63~164)
31) 운문이 처음 설봉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설봉이 거하는 산 밑에 다다른 운문은, 한 승려를 만나 이런 부탁을 했다. “설봉화상이 집회를 열거든 두 손을 맞잡고 그 앞에 당당히 서서, “불쌍한 사람, 어째서 목에 찬 칼을 벗지 않는가?”라고 말하시오. 절대로 내가 시켰다는 말은 말고 말이오.” 그 승려는 운문이 일러준 대로 연기를 했다. 설봉은 즉각 자리에서 내려와 그 승려의 멱살을 붙들고, “어디 말해 봐, 말해”라고 을렀다. 승려는 예기치 않은 반응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설봉은 “그거 네가 한 말이 아니지?” 하고 재차 다그쳤다. 처음 승려는 자기가 한 말이라고 우기다가 서슬 퍼런 추궁에 사실대로 실토했다. “실은 절강에서 온 어떤 스님이 시켜서 그리 했습니다.” 이 말에 설봉은 대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들이여, 산 밑으로 내려가 5백 수행승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될 그 사람을 모셔 오라!” 다음날 운문이 도착했다. 그를 보며 설봉이 물었다. “어떻게 지금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가?” 운문은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둘은 말없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32) 師問德上座. 菩薩在定. 聞香象渡河. 出甚麼經. 僧云, 出涅槃經. 師曰, 定前聞. 定後聞. 僧云, 和尚流也. 師曰, 道也太殺道. 始道得一半. 僧云, 和尚如何. 師曰, 灘下接取 (『조동록曹洞錄』 (선림고경총서 1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167).
33) 선문답의 견해 즉 경계를 숭산 노사님은 네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즉 <무여無如>, <일여一如>, <여여如如>, <즉여卽如>가 그것이다. <무여>는 생각이전의 세계, 본체이므로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입을 열면 그르치니 가만히 있는 것이고, <일여>는 주객이 일체요, 본성이 동체이므로 그것을 입을 열지 않고 나타내는 것이며, <여여>는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진리요, 본체 아님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요, <즉여>는 그 진리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대기대용大機大用, 즉 올바른 행동과 생활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연필과 책을 들고 “연필과 책이 같은가 다른가?” 라고 물었을 때, <무여>는 입을 열면 그르치니 가만히 있는 것, 양구良久하는 것이고, <일여>는 일체가 동체이니 할이나 방 혹은 손가락을 드는 것이고, <여여>는 연필은 황색, 책은 푸른색이라 답하는 것이고, <즉여>는 연필로 글을 쓰고 책을 읽어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즉여>가 바른 경계이다. (숭산행원선사 법어집,『천강에 비친 달』)
34) 師問强上座云,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作麽生說箇應底道理. 上座云, 如驢覷井. 師云, 道則太煞道, 祗道得八成. 上座云, 和尙又如何. 師云, 如井覷驢 (『조동록曹洞錄』 (선림고경총서 1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68~169). 두 번째 “나귀가 우물을 보는 격입니다.”는 “우물이 나귀를 보는 격입니다.”의 오류이다. 원문을 보기 전에는 오류라고 보지 않고 다음의 일화를 떠올렸었다. 생각의 폭을 넓히는 의미에서 같이 싣는다. 하루는 방 거사가, 딸의 진리의 기틀이 얼마나 단련 되었는가 시험해 보기 위해서 한 마디를 던졌다. “일백 가지 풀끝이 다 밝고 밝은 부처님 진리로다.(明明白草頭 明明祖師意)” 그러자 딸 영조靈照가 즉시 받아서, “머리가 백발이 되고 이가 누렇게 되도록 수행을 하셨으면서 그러한 소견밖에 짓지 못하셨습니까?”하고 아버지에게 호통을 쳤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버릇없다고 하겠지만 이 법을 깨달으면 그렇지가 않다. 이 최고의 법法을 논하는 데는 높고 낮음이 없는 법이다. 그러니 방 거사가 딸을 보고 물었다. “너는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는고?” “일백 가지 풀끝이 다 밝고 밝은 부처님의 진리입니다.” 아버지 방 거사가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 자신도 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 참으로 고준한 안목이 있다. 똑같은 말을 했지만 여기에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차이가 있다. (혜암(惠菴玄門, 1884~1985) 스님 설법중) 여기에 대해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는 “거사는 말은 지극하나 뜻이 지극하지 못하고, 영조는 뜻은 지극하나 말이 지극하지 못하였다. 아무리 말과 뜻이 지극하더라도 나옹의 문하에서는 하나의 무덤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말해보라 그 허물은 어느 쪽에 있는가.”라고 착어하셨다. (나옹록懶翁錄 (선림고경총서 2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162) 이와 같은 일화가 또 있다. 금릉金陵 보은사報恩寺 현칙玄則 스님은 처음 청봉靑峰스님을 찾아뵙고 물었다. “무엇이 학인 자신입니까?” “병정동자丙丁童子가 불을 찾는구나.” 현칙스님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뒤에 스님을 찾아뵙자 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청봉스님에게서 왔습니다." "청봉스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던고?” 현칙스님이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니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나?” “병정丙丁은 불에 속하는 것인데 다시 불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을 가지고 자신을 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해해서야 어떻게 깨칠 수 있겠는가?” “저는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대가 나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대답해 주겠다.” 현칙스님이 지난번 물음을 다시 묻자, 스님이 말하였다. “병정동자가 불을 찾는구나.” 이 말에 현칙스님은 깨쳤다. (『오가정종찬 五家正宗贊』, (선림고경총서 10)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200)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묘정명심妙淨明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입니다.” “그대는 단지 사事만을 밝혔을 뿐이다.” “스님께서는 방금 무엇을 물으셨는데요?” “묘정명심!” “사事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래.” (앞의 책 p. 267) 35) 무비스님의『직지直指 강설』에서 인용.
36) “師又問(德上座):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作麽生說應底道理? 德曰: 如驢覷井. 師曰: 道則太殺道, 只道得八成. 德曰: 和尙又如何? 師曰: 如井覷驢.” 선사가 또한 덕상좌德上座에게 “부처님의 참법신은 허공과 같아서 사물에 응하여 나타나는 형상이 마치 물속의 달과 같은데, 어떻게 해야 여기에 맞는 도리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덕상좌가 “나귀가 우물을 엿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사가 “그럴듯하게 대답했다만 겨우 팔분八分만을 설명했구나.”라고 하니, 덕상좌가 “그렇다면 화상은 어떻게 설명하십니까?”라고 물으니, 선사가 “우물(井)로 나귀를 엿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本寂,『撫州曹山元證禪師語錄』)
37) “如井覷驢” 井水猶如明鏡, 代表佛性. 驢的映現是井水照的產物, 這就是佛性的“應物顯形”. 井水之所以能 “應物顯形”. 除了井水的能照性外, 還必須有, 所照 “應物”. “應物”即禪宗常說的假緣形是體的功用, 所以從萬法的形體及其運行變化中, 可以體悟真如佛性的存在實際上, 這與良价的 “無情說法”, 一脈相承對此. (習細平, 中國 南昌大學哲學系副教授, 「曹山本寂的禪學思想論析」/ 김진무 번역,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조산본적曹山本寂의 선학사상 논석論釋」)
38) 父母所生口, 終不爲子說. ‘내 부모가 주신 이 입은 절대로 자네에게 그것을 설명하라고 있는 게 아니네!’ 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부모가 주신 사람의 입으로는 절대로 그것을 말할 수 없다(즉, 그 경지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39)『조동록曹洞錄』 (선림고경총서 1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8~21. 소동파의 “溪聲便是長廣設,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誦, 他日如何擧似人.”도 무정설법을 노래한 것이다.
40) 僧問, 沙門豈不是具大慈悲底人. 師曰, 是. 僧云, 忽遇六賊來時如何. 師曰, 亦須具大慈悲. 僧云, 如何具大慈悲. 師曰, 一劍揮盡. 僧云, 盡後如何. 師曰, 始得和同. (앞의 책, p. 171)
41)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사람들이 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맛을 아는 이는 드물다.
42) 우리말로 ‘취향’이라 번역될 수 있는 독일어의 Geschmack이란 단어는 단순히 好의 성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심미적 판단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관관계까지도 통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에 의하면 Geschmack은 예술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43) EBS 기획특강,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 제12강 지미知味」.
44) 전도顚倒는 1) 엎어져 넘어지거나 넘어뜨림. 2) 차례, 위치, 이치, 가치관 따위가 뒤바뀌어 원래와 달리 거꾸로 됨. 3) 번뇌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갖거나 현실을 잘못 이해하는 일 등을 말한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란 멀리 전도몽상을 떠난다는 뜻으로,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멀리 여읜다는 말이다.『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이러한 顚倒,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크게 네 가지(四顚倒)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 가운데서 깨끗하다(淨)고 하는 顚倒, 괴로운 것(苦) 가운데서 즐겁다(樂)고 하는 顚倒, 항상함이 없는 것(無常) 가운데서 항상함이 있다(常)고 하는 顚倒, ‘나’라는 것이 없는 것(無我) 가운데서 ‘나’라는 것이 있다(我)는 顚倒가 그것이다(凡夫不知一己與世界之眞相本爲無常, 苦, 無我, 不淨, 而生之四種謬誤見解. 常, 以爲人將永遠存在 ; 樂, 以爲人生是快樂的 ; 我, 以爲有自由, 自主, 可掌握的主體之「我」 ; 淨, 以爲身心是淸淨的. 此亦卽四顚倒.). 이 네 가지 뒤바뀜으로 인해 어리석은 중생들이 미혹된 세계의 참모습을 올바로 보지(正見, 照見) 못하고, 잘못 본 전도된 모습을 진실로 착각하여 그 곳에 집착을 하게 되기 때문에 괴로움, 두려움 등의 망심妄心이 생긴다고 한다.
45) 僧問, 萬法從何而生. 師曰, 從顚倒生. 僧云, 不顚倒時, 萬法何在. 師曰在. 僧云, 在甚麼處. 師曰, 顚倒作麼. (앞의 책, p. 173)
46) 師問維那, 甚處來. 云牽醋槽去來. 師曰, 或到險處, 又作麼生牽. 維那無對. (雲居代云, 正好著力. 疎山代云, 切須放却始得). 초 초醋, 구유, 통 조槽. (앞의 책, p. 174)
47) 琛禪師, 門外送法眼三人次. 琛問曰, 上座, 你尋常道, 三界唯心, 乃指庭下石曰此石在心內在心外. 法眼曰, 在心內. 琛笑曰, 行脚人着甚來由, 安塊石在心頭耶. 法眼於此大悟.
48) 僧問, 如何是無刃劍. 師曰, 非淬鍊所成. 僧云, 用者如何. 師曰, 逢者皆喪. 僧云, 不逢者如何. 師曰, 亦須頭落. 僧云, 逢者皆喪則固是, 不逢者為甚麼頭落. 師曰, 不見道能盡一切. 僧云, 盡後如何. 師曰, 方知有此劍. (앞의 책, pp. 175~176)
49) 僧問, 於相何眞. 師曰, 即相即眞. 僧云, 當何顯示. 師提起托子. (앞의 책, p. 176)
50) 僧問, 即心即佛即不問, 如何是非心非佛. 師曰, 兔角不用無. 牛角不用有. (앞의 책, p. 177)
51) 習細平, 中國 南昌大學哲學系副教授, 「曹山本寂的禪學思想論析」/ 김진무 번역,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 「조산본적曹山本寂의 선학사상 논석論釋」.
52) 問, 如何是常在底人. 師曰, 恰遇曹山暫出. 云如何是常不在底人. 師曰, 難得. (『조동록曹洞錄』 (선림고경총서 1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177)
53) 僧問, 承古有言. 未有一人倒地. 不因地而起. 如何是倒. 師曰, 肯即是. 僧云, 如何是起. 師曰, 起也. (앞의 책, p. 178)
54) 僧問, 雪覆千山. 為甚麼孤峯不白. 師曰, 須知有異中異. 僧云, 如何是異中異. 師曰, 不墮諸山色. (앞의 책, pp. 185~186)
55) 필자의『무문관無門關』「第05則 향엄상수香嚴上樹」제창 참조.
56) 仰山云, “如來禪, 卽許師兄. 祖師禪, 未夢見在.”
57) 무문 화상이 평하여 말씀하시기를, 모름지기 선을 참구하려거든 제대로 참구하여야 하고, 깨달음 또한 제대로 된 깨달음이어야 한다. 오랑캐를 한번은 직접 만나야 하겠지만, 만났다고 하면 이미 둘이 되어 버린다. 無門曰, 參須實參, 悟須實悟. 者箇胡子, 直須親見一回始得, 說親見, 早成兩箇. (『무문관無門關』「제04칙 호자무수胡子無鬚」).
58) 동산이 스승인 운암(雲岩曇晟, 780~841) 화상에게 물었다. “화상께서 돌아가신 뒤, 누가 ‘화상의 초상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운암이 “그런 사람에게는 ‘다만 이런 사람이었네’라고 대답하게.” 이에 동산이 멍하니 생각에 잠기니, 운암이 “이 일을 이해하려면 자세히 살펴야 되느니라.”하고 말했다. 동산이 의심을 완전히 풀지 못하고 운암을 떠나 길을 가다가 개울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대오大悟하였다. 이에 위의 게송을 지으니 선종오도송의 효시가 되었다.
59) 如臨寶鏡, 形影相睹. 汝不是渠, 渠正是汝. (良价,『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
60) 夫鏡能鑒物, 以求發現, 一無差惑. 雖僞而眞, 雖眞而僞. 若能以眞求僞, 以僞求眞, 則眞僞自見. (『(重編)曹洞五位顯訣』卷下,『卍續藏經』第63册)
61) 吾在雲岩先師處, 親印寶鏡三昧, 事窮的要, 今付於汝. (良价,『筠州洞山悟本禪師語錄』)
62) 習細平, 中國 南昌大學哲學系副教授, 「曹山本寂的禪學思想論析」 / 김진무 번역,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교수, 「조산본적曹山本寂의 선학사상 논석論釋」.
63)『조산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僧清稅問, 某甲孤貧. 請師賑濟. 師曰, 稅闍黎近前來. 銳近前. 師曰, 泉州白家三盞酒喫後猶道未沾脣. (玄覺云, 甚麼處. 是與他酒喫.) 청세淸稅라는 스님이 물었다. “저는 외롭고 가난하오니 스님께서 구제해 주십시오.” “청세는 이리 가까이 오게나.” 청세스님이 가까이 앞으로 가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청원淸原 백가百家의 석 잔 술을 마시고서 입술도 축이지 못했다 하는구나.” 현각玄覺 스님은 말하였다. “어느 곳에서 그에게 술을 마시라고 주었느냐.” (『조동록曹洞錄』 (선림고경총서 12)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65~166)
64) 김어준, ‘청춘 페스티벌’에서 한 강연,「나는 언제 행복한가」.
65) 자크 마리 에밀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04.13~1981.09.09)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과학자들은 라캉을 비판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앨런 소칼과 리처드 도킨스가 있다. 도킨스는 라캉을 두고 “라캉이 사기꾼인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굳이 전문가의 의견을 들이댈 필요도 없다”고 평가했다.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은 1936년 마리앙바드에서의 회의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비록 이 이론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의 재구성이기도 하지만 주체의 상태에 대한 철학적 반영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이상적 단일성, 완결성을 표하면서 자아 자신은 아닌, 이미지와의 동일시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프로이드나 라캉의 이론은 인간을 너무 종교적 죄악이나 성적 강박관념의 측면에서 보므로 써, 인간을 오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연주의가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66) 김어준, ‘청춘 페스티벌’에서 한 강연,「나는 언제 행복한가」. 이하 인용문은 김어준이 강연에서 한 말이다.
67)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 在上位不陵下.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 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徼幸.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위 구절에 이어)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을 끌어내리려 하지 않고,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평이하게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할 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데가 있으니, 활을 쏘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도올서원재생술,『도올선생 중용강의』김용옥 출판사, 통나무, 1995, pp. 306~330)
68) 아이들이 채소를 싫어하고 설탕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화에 의한 것이고 이를 기억하고 있는 유전자 때문이다.
69) 조지 C. 윌리엄스는『The Pony Fish’s Glow 진화의 미스터리』 pp. 271~272.
70) 줄리언 서렐 헉슬리 경(Sir Julian Sorell Huxley, 1887~1975)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작가로, 유네스코의 초대 사무총장이다. 과학을 대중화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1958년 Knight Bachelor(기사작위)에 서임되었다.
71) 헨리 페어차일드(Henry Pratt Fairchild, 1880~1956)는 저명한 미국 사회학자이다. 그는 우생학에 관심이 많아 미국 우생학회 the American Eugenics Society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72) 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권우상 칼럼]「1주일에 2일만 일하는 시대」2010년 01월 26일자 한남일보.
73) 얼마 전 KBS에서는「KBS 글로벌 진단, 위기의 시대」 3부작, 1부 굶주리는 10억, 2부 목마른 지구촌, 3부 에너지 패권전쟁 등을 방영하였다. 현재 지구촌에서는 세계 경제성장의 축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면서 식량과 물, 에너지 자원을 둘러싼 엄청난 경쟁과 각축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 등 신흥국과 중동에서는 부와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물, 에너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글로벌 공급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불균형의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러므로 지구촌은 식량, 물, 에너지의 잉여의 시대에서 부족의 시대로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이 다큐는 아프가니스탄과 예멘,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등 그동안 우리 언론이 미처 접근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생생한 현장 취재를 통해, 지구촌에 불어 닥친 식량의 위기와 물 위기의 현실, 그리고 에너지를 둘러싼 각축전과 지정학의 변화를 분석한다. 그리고 흔들리는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는 이들 자원의 지속가능한 수급을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제시한다. (KBS 방송소개에서 인용 수정)
74) 시사포커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전 세계 확산, ‘우리가 99%다’ 구호 앞세워..., 우리나라에도 상륙」 2011년 11월 09일. 하준규 기자.
75) KBS스페셜에서 3년 전 「누가 세계 석유가격을 움직이는가?」 라는 프로에서 그 배후를 캔 것이 있는데, 그 배후에는 골드만삭스가 있었다. 즉 최근 석유가격 폭등은 “골드만삭스의 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76) 철강왕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부의 복음, The gospel of wealth」이란 잡지 기고문을 통해 ‘재산을 안고 지구의 품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명패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카네기는 ‘돈을 번 것은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힘으로 된 것이다’라는 가치관으로 이후 세계 복지사업에 전념한다. 이후 그는 미국 전역에 걸쳐 <도서관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1883~1929년 사이에 카네기가 지은 거대 도서관들이 2,509개에 이른다. 미국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1,689개, 영국과 아일랜드에 660개, 캐나다에 125개(1919년 기준) 미국 도서관 3,500개의 절반이 카네기가 지은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카네기홀, 피츠버그의 카네기도서관, 카네기 박물관, 카네기 멜론 대학, 워싱턴 카네기 인스티튜트, 덤퍼린 카네기 장학금, 뉴욕의 카네기 코퍼레이션 등이 모두 그가 기부해서 만든 단체들이다. 미국은 이러한 박애주의 정신과 복지사상이 자본주의의 배임에 깔려있다.
77) 미국과 FTA에 서명하고 나서 일본 방송에서 나온 내용이다. 지금 정치인들은 모두 복지를 논하고 있지만 복지는 물 건너갔다고 한다. FTA의 독소 조항인 ISD(투자자 국가소송제 Investor-State Dispute) 때문이다. (정태인,「한미 FTA와 복지는 양립 가능한가?」) |
첫댓글 김어준의 「나는 언제 행복한가」설명이 재미 있었습니다.
자료 잘 보겠습니다.
_()_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
전체적으로 조명이 달라져서 그런지 사진들이 은은하고 느낌이 색다릅니다.
전원 합장
모든게 다 귀한 시간 이였지만, 역시 무문관 제창이 우리 모임의 백미 라고 느껴집니다.
항상 이 시간을 위해 너무 애써주시는 우리 법사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 드립니다.. _()_
- 머리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행위가 “불성의 작용”
“모든 움직임이 모두가 부처!” 따로 찾을 것이 없다는 것.
“무엇이 부처인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그 마음이 부처!
“이름을 부를 때, 고개를 돌리는 행위!”가 그것! 그 외는 없다!
마조어록에 보면
-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
- 갑자기 이름을 불러 뒤돌아보게 한다.
- 후려치거나 걷어찬다!
- 눈썹을 찡그린다! 등의 동작을 통하여 불성의 움직임을 직지하고 있다.
마조 선에서는 견성(불성의 파악)을 움직이는 상을 통해 性을 보는 것.
허나, 행동만을 모방해 흉내 낼 수 있는 약점이 있다.
열반경,
“코끼리가 강을 건너는 소리를 들었다!”
“흘러갑니다!”
“여울물 아래서 맞이해 오겠네!”
남산 정상에 외짝손 경계가 문득 떠 오릅니다!
두 양반 경계가 모두 “설명”인 것 같습니다!
제시하신 경계! 좋았습니다.
경계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답하셨으면 더욱 좋았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득로 합장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등 노~!”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아는 사람이 없다!”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신 뒤에는 어떻습니까?”
“아는 사람이 있다!”
“무엇이 비로자나 법신의 주인 입니까?”
“월~월~월~월~!” (개 짖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