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15평짜리 미로
“저는 제 집보다 큰 것이나
인간보다 더 불확실한 건 믿지 않아요.”
─ 그레이엄 그린, <아바나의 우리 사람>
나는 7년 전 준공 50년에 가까운 낡은 공동주택의 한 세대를 구입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주택이었고,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꼭대기 층에 있었다. 오늘날의 주거 기준에 맞는 수리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저렴했다.
그 집을 위해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자원을 쏟았다. 당시 내 주변 모든 사람이 이 결정을 만류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요약하면 내가 어리석기 때문이었다.
이 집을 고칠 때 쓰인 주요 자재와 소품은 여러 나라에서 왔다. 스위치와 조명과 세면대는 스위스. 변기는 일본, 두 번째
세면대는 독일, 마루는 이탈리아, 타일은 이탈리아와 일본과 튀르키예.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자재들을 찾아다녔다.
나는 넉넉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내가 모은 물건들은 대부분 악성 재고였다. 세면대와 타일과 변기는 30년 이상.
마루도 10년 이상. 그것들을 모두 모아 나는 서울에 있는 낡은 집을 겨우 고쳤다. 집수리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작했지만, 공사가 끝나자 나는 그때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몰랐음을 깨달았다. 그러는 동안 이 집은 준공 50년을
넘겼고, 세계는 코비드-19를 거쳐 A.I와 트럼프 2기로 돌입했다.
이 집을 고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왜 그러냐. 왜 그렇게까지 하냐. 이제 나는 누가 어떤 의도로 묻느냐에 따라 아주
여러 가지 종류로 대답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나는 알고 싶었다. 더 길게 하면 이렇다. 나라는 한정된 자원과 재주를 가진
개인이 서울에서 그럴싸하게 산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얼마를 들이고 누구를 만나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집수리 예산 00만원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나는 얼마나 절약하고 어디에 사치를 해서 무엇을
구현할 수 있는지, 그리하여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지, 그 전에 내가 원하는 ‘그럴싸한 삶’ 이라는 게 무엇인지.
더 더 길게 한 대답이 이 책이다.
세상에는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일들도 많지만 다행히 나는 이 과정 끝에 몇 개를 알게 됐다. 오래된 집을 고칠 때 떠오르는
요소들. 몇몇 선진국에 있으나 아직 서울엔 없는 것들을 이식할 때 생기는 일들. 공사현장과 인테리어 시장의 현장 전문가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숨겨진 고품질 악성 재고들. 집수리의 관행들, 그 관행의 장단점, 그 사이에서도 뭔가 멋진 걸 해 보려
노력하는 사람들. 그 과정에서 내가 겪으며 알아낸 걸 모아 책으로 내게 되었다.
내가 뭔가 알았다고 책으로 낼 가치가 생기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독자 여러분께서 알 가치가 있는지다. 나는 그렇다고
봤다(여러분들도 그리 여겨 주셔야 나도 보람 있을 텐데…). 이런 이유가 있다.
첫째. 개인 단위에서 느낀 집수리의 경험담이다. 특히 ‘구축 리노베이션’ 이라는 집수리의 한 장르에서. 요즘은 한국에서도
오래된 집을 수리해 자신의 필요와 개성에 맞춰 사는 분들이 많아지는 듯하다. 구축 리노베이션은 신축은 물론 보통의
집수리와도 다른 면이 많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 고민하실 분들과 공유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적어 두었다.
집수리는 발주자의 개입 여부에 따라서도 양상이 상당히 달라진다. 직접 집수리의 각 요소를 발주하며 진행하는
‘셀프 인테리어’ 와 인테리어 전문가께 공사 전체를 턴키 방식으로 맡기는 공사는 차이가 있다. 어떤 식으로 진행하든
발주자가 집수리의 각 요소를 알아두면 좋다. 턴키 방식으로 인테리어를 맡겨도 마찬가지다. 정육점에 가서
“맛있는 부분 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오늘은 특히 기름기가 많은 수육을 삶을 거라 삼겹살 껍데기도 떼지 말고 주세요.”
라고 하는 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집수리 발주자에게도 도움이 될 이야기를 적으려 했다. 인테리어 공급자들도 고객의
마음을 읽는다는 면에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결과 이 책의 스토리라인은 2020년대 한국에서의 집수리 게임에 대한 퀘스트와 해결의 연속 같은 면이 있다. 철거
현장에서 신경 쓸 부분은 무엇인가, 창문은 어떻게 설치하는가, 집수리 전문가는 어떻게 찾아보는가, 내가 집에 남다른
세부 요소를 넣으려면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감수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나는 내 나름의 시간과 자원을
소모시키며 아주 천천히 이 과정을 하나씩 해 나갔다.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으나 원래 남의 고통이 나의
재미다. 나의 고되고 바보 같은 이야기가 독자 여러분께 즐거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둘째. ‘집을 산다’ 는 의사 결정 과정의 다층적 요소다. 거주는 단순히 한 인간의 기호 추구 과정을 넘어선다. 도시 거주
공간 형성에는 언제나 여러 의미가 겹쳐 있다. 부동산이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투자다. 삶의 질이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무슨 삶을 원하는가’ 처럼 상징적인 질문일 수 있다. 예쁜 걸 좋아한다면
‘내 생활공간을 어떻게 멋지게 꾸밀까’ 처럼 행복한 고민이 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 모든 부분에 대해 나름 고민한 뒤
실행에 옮겼다. 금전적으로, 상징적으로, 어느 면에서는 미적으로도. 그 고민과 실행도 책에 소상히 적으려 했다.
내가 옳다는 주장이나 자랑이 아니다. 도시 생활에 관한 견해 중 하나일 뿐이다. 그 견해의 경위를 상세히 설명하려 했다.
셋째. 이른바 취향에 대한 것이다. 누구나 삶의 모든 부분에 기호와 미감이 있다. 요즘은 그 기호와 미감이 ‘취향’ 이라는
단어로 느슨하게 묶여 온갖 곳에 쓰이는 중이다. 내게도 나름의 기호와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집을 꾸미다
보면 그러한 나 자신의 기호가 그만큼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런 요소들에 대해서도 소상히 적으려 했다. 그러므로
이 책엔 ‘여기엔 뭘 쓰면 된다’ 는 요약 정리 같은 건 없다. 나의 이런저런 경험 끝에 이런저런 이유로 무엇을 예쁘다고
간주하게 되었다는 나름의 맥락을 보여주려 했다.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본이 되겠다는 의미로, 멋진 회를
올린다기보다 어디서나 썰릴 횟감을 내놓는 기분으로.
<서울의 어느 집> 이라는 제목은 이런 생각에서 왔다. 제목대로 이건 서울의 어느 작은 집을 고쳐 나간 일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집엔 각자의 사정과 경과가 있다. 집 한 채분의 맥락과 이유, 의견과 근거가 있을 수 있다. 내 집에도
그게 있다. 작은 집이라는 물건 혹은 장소 안에 쌓여 있는 의미의 층위를 드러내려 했다.
때문에 이 책은 집수리 경험담일 뿐 아니라 특정한 시간을 보낸 나의 개인적인 고민과 직업적 환경 및 직종 변환
과정에 대한 후일담이기도 하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게 이 집수리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삶의 어떤 지점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실 독자가 혹시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과 참고가 된다면 좋겠다.
이 책의 에피소드는 겨울에 시작해서 여름에 끝난다. 아주 추운 겨울 내가 겪은 일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 시작점에 놓인 물건은 방바닥 위에서 동태처럼 얼어붙은 빨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