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닭 울음소리
김윤선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 웬 정겨운 소리일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꺼져있던 불씨가 되살아나듯 내 귀에 불을 붙이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 집의 사랑이 담뿍 담긴 소리, 아침부터 온종일 마당 부엌 마루 집 안 구석구석 파헤치며 놀던 닭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유년의 우리 집은 재산 1호가 닭이었다. 약 20마리 안팎의 닭은 하루하루 알을 낳아 온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병이 나신 아버지는 오랜 병고를 치르고 돌아가셨다. 천추에 한이 맺힌 가장을 보내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계란 장사를 하셨다. 날이 새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마을마다 계란을 사서 머리에 이고 오신다. 아침 서둘러 나가면 저녁 어둠 속에 무거운 계란을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오신다.
조금만 잘못하면 다 깨어지는 계란을 내려놓고, 휴~유! 한숨을 쉬며 흠뻑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가마솥에 불을 지펴 저녁밥을 하신다. 종일 엄마만 기다리던 눈이 까만 동생들과 나는 엄마가 해 주시던 맛있는 밥을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다.
온종일 활활 타는 불꽃 속에 죄인 같은 짐을 이고 밑바닥이 다 닳은 구멍 난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녀 밤이면 불 인두 고문에 살이 타듯 아야 아야! 새어 나오던 엄마의 신음 소리에 내 살이 타는 듯 아려왔다. 밤새 어머니의 앓는 소리에 잠이 들면 어느새 닭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닭은 우리 가족의 밥줄이며 기둥처럼 의지하며 살았다. 때로는 엄습한 병이 동네를 휩쓸어 그 많은 닭이 죽기도 하고 밖에서 들짐승들에게 물려가기도 하며 개들이 물어 죽이는 일도 번번이 있었다.
해마다 봄이면 둥지에 계란을 넣어 오랫동안 어미 닭이 알을 품어 새끼를 깐다. 둥우리에 약 20개 안팎 알을 암탉이 품으면 약 20일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신비의 생명을 불어넣는다. 새끼의 산란을 위해 입을 벌려 호흡하는 어미닭의 모습이 엄마들이 아기를 낳기 위해 산고를 치르는 모습 같다. 21~22일이 되면 어미 닭이 주둥이로 달걀을 꼭꼭 쪼아 껍질을 깨어 준다. 새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와 첫 상봉으로 까만 눈을 뜨고 뾰족한 주둥이가 삐악삐악 울어 댄다. 알에서 솜털 같은 날개를 달고 생명으로 잉태하여 꽃망울 같은 소리를 낼 때, 환희로움 속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갓 태어난 병아리들이 양지쪽 담장 아래 개나리 꽃송이처럼 놀고 있다. 어미는 행여 무서운 이무기들이 새끼를 해칠까, 사람이 곁에만 가도 날개를 치켜들고 새끼를 보호하고 있다. 어미가 먹이를 잡아 새끼 입 안에 쏙 넣어주는 모습이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우리 입에 넣어주시던 모습 같다. 개나리 같은 병아리들의 솜 같은 날갯짓을 보는 것이 큰 행복이었다. 저들끼리 장난을 치며 재롱을 부리는 모습도 사랑스럽고, 앞마당 텃밭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먹이를 찾아 먹는 모습도 대견해 보였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 모이주머니가 풍선처럼 볼록하게 채워지면 병아리를 안고 모이주머니를 만져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병아리가 언제 자라 성인이 되었다고 장닭이 목소리를 다듬으며 첫울음을 울 때, 머리를 빡빡 깎고 군 입대하던 오빠들 같았다. 장부의 모습을 자랑이라도 하듯 목을 쭉 빼고 “꼬끼오.” 울음을 과시하면 암탉 네 마리가 수탉의 주변을 맴돈다. 부리로 주둥이를 맞대며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장닭은 훤칠한 다리에 붉은 볏과 주황색 털에 듬성듬성한 곳에 검정색 긴 꼬리를 치켜들고 장부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가끔 날개를 털며 펼쳐서 한껏 멋을 부리며 암탉 주변을 한 바퀴 삥 돌며 짝짓기를 한다. 암탉 네 마리는 검정 털에 목 주변 약간 노란 빛이 반들반들 윤기가 나며 사춘기 소녀처럼 수탉에게 갖은 교태로 다가온다.
어느 날인가 암탉이 밖에서 놀다가 누가 던진 돌에 맞아 다리가 부러진 채 소리를 질러대며 마당에서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닭의 모습에 얼른 안고 부러진 다리에 화장실에서 변을 찍어서 발라 막대기로 깁스를 해주었다. 얼마나 아플까, 닭의 눈물을 닦아주며 “아프지. 나쁜 사람이 돌을 던졌어. 내가 아프지 않게 낫게 해줄게.” 닭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파서 온몸을 떨고 있는 닭을 매일 안고 변을 발라 치료를 해 주며 하루속히 낫기를 빌었다. 지극정성으로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였더니 거짓말처럼 약 보름 만에 다리가 완쾌되어 뛰어다녔다. 닭은 동그란 눈망울로 고맙다는 눈빛처럼 내 눈을 마주하니 마치 내가 의사가 된 기분이었다.
매일 햇살을 받으며 자란 병아리가 5~6개월이 지나면서 어미 닭이 되어 알을 낳을 때가 되었다. 객지에 간 아들을 기다리 듯 어머니께서는 오늘이나 내일 알을 낳기만 기다렸다. 열다섯 마리 중 병들어 죽고 짐승이 잡아먹고 남은 닭은 겨우 다섯 마리였다. 지난날 큰 닭도 네 마리를 동네 개들이 물어 죽여 우리는 초상 울음이 났다.
그 후 온 가족이 우울 속에 남은 닭에게 사랑을 담뿍 쏟으며 알 낳기만 기다렸는데, 어느 날 읍내 건달패들이 밤중에 우리 닭을 몽땅 잡아가 버렸다. 네 놈이 공모하여 우리 닭을 다 잡아갔다. 하필이면 군입대 간 큰오빠가 첫 휴가를 오던 날 밤, 어머니가 “섭아, 우리 닭 잡아 간다. 우리 닭.” 어머니의 소리 치며 맨발로 뛰어나왔다. 어머니의 소리에 오빠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와~와 고함을 질러대며 마당을 뛰쳐나왔다. 닭장을 오빠가 나무로 정성 들여 지어놓고 군 입대를 하였는데 닭이 한 마리도 없었다.
그날이 우리 학교 운동회 날인데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계셨고 우리는 아침밥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갔다. 우울한 마음으로 학교를 갔는데 학교 입구 문방구 점 앞에 우리 닭을 잡아먹은 네 놈이 검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순간 온몸이 떨려오며 분노가 치솟아 당장 뺨이라도 때리며 “이놈, 우리 닭 내 놓아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도둑놈을 앞에 두고도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온종일 마음이 우울하여 세 가지 무용도 하지 못했다. 매스 게임과 농악놀이, 한복 입고 아리랑 춤을 몇 달 동안 연습을 하고 창호지로 작은 북도 만들고 삼색휘장과 고깔모자도 다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무용은커녕 종일 어머니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리에 종기도 나서 아파오던 차에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져 결국 울고 말았다. 여동생이 릴레이 선수로 일등을 하였지만, 자매는 눈물뿐이었다.
그 후 어둠 속에 닭이 울면 온 가족의 사랑과 희망을 주던 닭들이 생각난다.
놈들은 새 닭이 너무 맛이 있더라, 알이 주렁주렁 달려있더라, 닭을 먹은 입으로 우리 가족의 아린 상처에 염장을 지르며 돌아다녔다. 지금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가 옛날 우리 닭처럼 새날이 밝았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첫댓글 선생님의 유년 시절 이야기는 슬픈 동화 같아요.
그런 시절을 거쳐 지금의 선생님은 정말 멋지게 잘 살아오셨네요.
늘 응원합니다.
이국장님 이제 다리가 다 완쾌 되셨나요?
걱정이 되었는데
늘 내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애독자가 되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