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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천문학(天文學)과 항해술(航海術)의 발달, 그리고 지리지식의 확대(2)
임광자 추천 0 조회 108 08.05.09 08: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천문학(天文學)과 항해술(航海術)의 발달, 그리고 지리지식의 확대(2) 이 길상

천문학(天文學)과 항해술(航海術)의 발달, 그리고지리지식의 확대(2)               이길상

나. 항해술(航海術)의 발달

(1) 지중해(地中海) 항해와 갤리선(船)

갤리선의 복원 모형도, 바티칸 로마바다에 떠다니는큰 배 가운데 돛을 달고 바람의 힘으로 다니면 Sailing ship, 즉 범선(帆船)이라고하고, 돛을 보조수단으로 하고 노를 저어 나가는 배를 Galley라고 부릅니다. 물론지금은 스포츠, 오락, 혹은 경기를 목적으로 하는 요트(yacht)나 보트(Boat) 등에서돛을 단 범선이나 노(櫓)를 저어 가는 소형 배들도 볼 수 있지만, 그 외 각종 선박에서돛이나 노를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1세기 전만 하여도 거의 모든 배는돛을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중해(地中海)는 글자 그대로 육지에 둘러싸인 바다로서,망망대해(茫茫大海)라기 보다는 큰 호수와 같았기 때문에 고대부터 이 바다를 누비고다녔던 수많은 종족들은 범선보다는 갤리선을 사용하였는데, 일찍이 페르시아전쟁(492~ 479 BC)을 위시해서, 페니키아인 들의 왕성한 상업활동, 포에니전쟁(264 ~ 146BC), 십자군 전쟁( 1096 ~ 1270), 이탈리아 도시들의 상업활동, 레판토해전(1571)등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부터 화물수송에 이르기까지 동원된 것도 이 갤리선이 였습니다.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고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영화벤허에서, 단연 압권(壓卷)은 마차경기에 두는 사람들이 많으나, 마차경기 못지 않게감동을 주는 것은 북소리에 맞추어 힘겹게 갤리선의 노를 젓는 노예들의 일그러진모습도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일 것입니다. 이런 갤리선이 지중해에서 성행한 것은,비교적 바람이 약한 지중해에서 돛에만 의존했다가는 바람이 없을 때 곤란하고, 섬이많고 청명한 날이 많아서 항로가 일정하며, 만일의 돌발사태가 발생해도 섬 기슭이나강어귀로 피하는데 노를 젓는 것이 유리하고, 고대부터 이곳에는 노예 구하기가 쉬웠던것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이런 갤리선이 르네상스기에 들어서면 베네치아·제노바등의 도시상인들에 의해서 길이 35 m이상으로 길쭉하게 대형화되었으며, 양쪽 뱃전에는각각 30개 이상의 노를 젓기 위한 자리가 있었고, 자리마다 하나의 긴 노를 3명 이상이같이 잡고 북소리 등의 장단에 맞추어 노를 앞으로 밀었다가 당기면서 젓는데, 배의속도는 노 젓는 횟수와 비례하기 때문에, 북소리의 간격이 짧아지고 요란하면 노젓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배는 빨리 가지만 노 젓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금방 구슬땀이맺히게 되겠지요.

그러나 당시로서는 속도가 빨랐고, 기동력도 뛰어나14세기부터 베네치아는 전투용인 경(輕)갤리선과 수송용인 중(重)갤리선을 건조하여최대의 해상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빛을잃어가기 시작한 16세기 이후 원양항해를 감당하지 못하여 설자리를 잃고 점차 쇠퇴하였는데,지중해 각국에서는 노예와 더불어 죄수를 동원하여 강제로 전투용 갤리선의 노를젓게 하는 전통도 갤리선과 함께 사라졌다고 합니다.

(2) 대양항해와 범선(sailing ship/帆船)

카라벨(바크) 형 범선. 덴마크갤리선이 지중해에서널리 사용된 것과는 달리 바람과 풍랑이 거친 북방의 거친 바다에서는 예로부터 바이킹의활동시기부터 범선(帆船)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범선이라고 해서 반드시 돛만을 가지는것은 아니고 돛과 노(櫓)를 함께 갖추고 있다가, 순풍에는 돛을 이용하고, 그 외는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범선이 15세기에 와서는 상업자본주의에 따른 원양 항해가많아지면서 규모가 커지고, 마스트(돛대)가 3개인 횡범선이 생기고, 각 마스트에몇 개의 횡범을 달아 속력을 높인 새로운 범장(帆檣)양식의 카라벨(Caravel)형으로발전하였습니다.

이런 항해술(航海術) 발달에 크게 기여한 것이 포르투갈의엔리케(Henrique O Navegador / 1394 ~ 1460) 항해 왕자로서, 그는 주앙 1세(아비스왕조창시자)와 형 두아르테, 그리고 조카 아폰수 5세 등 세 명의 왕을 섬기면서, 이탈리아를비롯한 유럽 각지의 우수한 항해자, 조선(造船) 기사(技師)등을 이베리아반도 서남단의 자그레스 궁전에 불러다 놓고, 연구(硏究), 시작(試作), 항행(航行) 등에 전념하도록하는 한편, 이들간 즉, 어부와 선원과 지리 천문학자의 협동이 이루어지도록 적극후원하였습니다.

엔리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선박의 개량이라고 할수 있는데, 그는 선체(船體)나 범주(帆走)장비의 개선에 주력해서 바이킹의 배에쓰이던 4각형의 횡범(橫帆/세로의 돛) 한 장짜리 북방형과, 삼각형의 종범(縱帆/늘어뜨린돛)을 가진 남방형의 장점들을 종합, 선박에 마스트 세 개를 새우고, 각 마스트에는횡범 네 개씩을 달고, 활대(帆桁/범항)가 마스터 주위를 돌게 해 놓음으로서, 종범에못지 않게 바람을 잘 가르고, 순풍(順風)일 때는 횡범에 의해서 빠른 속력을 낼 수있었고, 어느 방향에서든 바람이 불기만 하면 배는 달릴 수 있게 개량하였습니다.

엔리케왕자 자신은 몸이 약하고 심한 뱃멀미로 배를탄 적은 없고, 쓸데없는 일에 돈을 너무 많이 쓴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자그레스 궁정에살다가 죽었고(1460), 포르투갈이 이렇게 개량된 배를 가지고 희망봉의 발견, 인도항로의개척 등은 그의 조카뻘이 되는 주앙 2세(Juan Ⅱ. 영: John Ⅱ. 1481 ~ 95) 때부터,인구 150만의 포르투갈이 세계의 항해 왕국으로 비약시킨 것은 엔리케의 공적이 매우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때 모든 선박이 이런 카라벨형은 아니고, 갤리선도 동시에사용되고 있었는데, 레판토해전(1571)에서는 갤리선이, 영국의 엘리자베드여왕이에스파냐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깨트린 도버해전(1588)에서는 범선이 중심자리에있었다고 합니다.

(3) 나침의(羅針儀)와 해도(海圖)

매리타임 박물관 소장의 나침반. 미국배의 크기나속력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당장 먼 바다에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정표(里程標)가따로 없는 큰 바다에서 육지나 섬이 보이지 않는다면, 현재의 자기 위치를 안다는것은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겠지요. 날씨가 맑아서 해나 달, 밤하늘의 별이라도있으면,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겠지만 구름이 끼고 폭풍이라도 불어서 배가 제자리에서몇 바퀴 돌기라도 한다면, 선장이던 선원이던 전혀 방향감각을 잃고 말 것입니다.이럴 때 방향을 가리키는 기구가 있다면 참으로 편리하겠지요. 이래서 등장하는 것이나침반이었고, 처음 등장 이후 지금까지 나침반은 항해의 필수도구가 되었습니다.

나침반(compass / 羅針盤), 컴퍼스(일본식 발음은곰빠수) 등으로 불리는 나침의(羅針儀)의 원리가 자석(磁石)이라는 것은 다 알고계시지요. 자석의 기원은 중국이라고 보고 있는데, 동양에서는 지남철(指南鐵) 또는지남차(指南車)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자석을 처음부터 항해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방향을 더욱 상세히 알기 위하여 24방위로 분할하고, 자침을 가벼운 갈대 또는 나무등에 붙여서 물에 띄우거나, 명주실에 달아매어 주택이나 묘지의 방향을 보는데 사용되었다는것이 11세기 북송시대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夢溪筆談)이라는 책에서 설명하고있습니다.

이런 자석이 아라비아 상인들의 손을 거쳐서, 십자군전쟁 때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유럽에서도 자석을 항해에이용하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실용화되었다고 하는데, 13세기경 프랑스에서는항해 중 선장은 그릇에 물을 담고 그 위에 바늘을 띄우고 자석을 갖다 대어 빙빙돌게 하다가 자석을 떼면,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면서 정지한다. 는 식의 아직 초보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자석은 다만보조수단으로 사용되다가, 범선(帆船)의 등장으로 적극 활용되었다고 하는데, 갤리선과달리 범선은 밤에도 멈출 필요가 없이 계속 항해가 가능했고, 따라서 풍향이나 침로를정확히 알 필요가 더욱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1302년 이탈리아의 플라비오 조야(FlavioGioia)가 현재와 같은 모양의 나침반을 만들었다고 하며, 컴퍼스 케이스를 지금처럼카든 링(cardan ring) 위에 올려놓고, 배가 기울거나 흔들려도 방위 카드만은 항상수평을 유지하게 한 것은 이탈리아의 수학자 카르다노(Cardano. Ceronimo/1501 ~76)였다고 합니다. 이런 나침반의 발명은 범선의 안전도와 능률을 현저히 증가시켰기때문에 르네상스기의 3대 발명, 이른바 화약과 인쇄술과 더불어 나침반을 꼽는 것이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륜나침반, 즉 자이로의 원리를 응용한 자이로컴퍼스가실용화된 것은 1911부터라고 하며, 우리 나라에 이것이 도입된 것은 1945년 광복이후라고 합니다. 이야기 한가지를 덧붙이면 한 말에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가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 와 있던 서양인들로부터이 자기 나침반을 구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침반의 발명이 곧 원양항해로 이어진 것은 아니고,항로의 거리나 위치 등을 밝혀주는 해도(nautical chart or portolan chart/海圖)의작성과 이용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되겠지요. 이 해도의 작성이 컴퍼스의 등장과함께 진보되었고, 계산법에서도 9 9 법을 몰랐던 유럽인 들에게, 아라비아 숫자의도입과 함께 1202년 피사 출신의 레오나르도 피보낫치가 계산법(Liberabaci)이란책에서 편리한 아라비아의 계산법을 소개했고, 그 후 이율(利率) 계산과 관계 깊은고차방정식론, 급수론이 나왔으며, 급수론은 다시 소수(小數)와 대수(對數)의 발전에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 소수는 1585년 네덜란드의 스테빈(Stevin, simon/ 1548 ~ 1620)에 의해서, 대수는 1600년 스위스의 뷔르기에 의해서 발견되어 계산속도를현저히 높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 지리지식의 발달

(1) 원양항해의 어려움과 그 목적

바다란 거칠고 험하기 때문에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된지금도 대양 항해에는 어려움이 대단히 많다고 합니다. 범선이 기선(機船)으로 바뀐것은 1차 세계대전 후(1918)의 일이고, 15 ~ 6세기만 하여도 선장 외에는 선실도침대도 따로 없었고, 음식은 갑판에서 간단히 요리해서 먹는 것 외에 소금에 절여말린 고기, 비스킷, 말린 완두(豌豆) 정도가 고작이고, 마실 것은 약간의 포도주와항아리에 담아둔 물 정도였기에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신선한 야채(野菜)를 먹지 못해비타민 C 부족으로 생기는 괴혈병(壞血病) 등으로 쓰러지기가 일 수였다고 합니다.

선박이 많이 개량되고, 해도와 각도기, 분수의 사용등으로 항해술이 많이 발달되기는 했으나, 나무로 이어 만든 목제 선박이 태풍이라도만나면 십중 팔 구는 산산조각이 났고, 항해 중 외국 함대나 해적선이라도 만나면하물(荷物)은 고사하고 목숨조차 보전하기가 힘든 위험을 무릅써야 했기 때문에 상선(商船)이라고해도 대포(大砲)를 비롯한 각종 화기(火器)의 장착은 필수적이며, 전투가 벌어지면군대 이상으로 작전과 용병술이 있어야 했고, 나침반이 있다고는 하나 육지에서 멀리떨어지면 대양 어느 곳에 큰 소용돌이가 있어서 블랙홀처럼 배가 빨려 들어간다고믿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바다에 나갔다고 볼 수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디아스,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마젤란, 등의 항해 가의 일화를 예기하면서 그들의 모험과 용기, 지혜와 노력을 앞세우지만실상 그들이 목숨을 담보한 항해의 대가로 바랐던 것은 일확천금, 곧 떼 돈을 버는것이 목적 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떼돈을 벌 수 있는 상품으로서는 노예,황금, 향신료, 상아 등이 였는데, 이런 것이 유럽에서 생산된 것은 아니고 아프리카아니면 아시아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아프리카의 서쪽 기니만 일대의 지도를보면 노예해안(Slave coast), 상아해안(Ivory coast), 황금해안(Gold coast) 등의명칭을 쓰고 있는데, 이런 명칭이 생긴 것은 여기에서 이런 상품(?)들이 거래되었다는의미라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금이 별로 나지 않았음으로 로마제국이팽창하면서 정복 지에서 그 수요에 충당하다가 로마제국의 멸망 후로는 이슬람 상인들을통해 수입, 그야말로 금에 굶주려 있었고,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머나 먼중앙아시아의 비단길을 따라 쿠빌라이가 다스리던 원나라에 온 것도 황금을 얻는것이 목적이 였으며, 황금과 더불어 노예나 상아 역시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수입하고있었으며, 문제의 향신료(香辛料)는 그 원산지가 인도, 더 정확히 말해서 몰루카제도에서 생산되는 후추와 계피로서 역시 이슬람 상인들로부터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값비싼 상품을, 이슬람 상인을 거치지 않고,직접 구하는 길, 그것도 헐값에 얻기 위해 염치없는 항해에 앞장 선 것은 이베리아반도의두 왕국 즉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는데, 이 지역은 일찍 이슬람의 서 칼리프제국(후우마이야 왕조)의 오랜 지배하에 있었던 곳으로 십자군 전쟁과 때를 같이하여 이른바국토회복운동을 벌리면서 무어 인 들이라고 부르던 이슬람세력을 축출하고 그들로부터약탈한 재보를 가지고 국왕이나 기사들이 큰 부자가 되었으며, 돈을 더 벌기 위해주민들을 마구 약탈하고, 이슬람교도를 보는 대로 잡아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실제로는 이슬람 지배 때 보다 몇 배나 힘든 생활을 주민들은 이겨내야 했습니다.

(2) 이베리아반도와 아프리카 무역

유럽인 들의 아프리카, 아시아, 신대륙 진출은 이곳을공포의 수렁에 빠지게 하였는데, 최초의 정복자들이 하필이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다는것이 더욱 슬픈 사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신앙과 관습을강요하는 폐풍이 있었고, 이슬람의 지배(711 ~ 1492)를 받으면서 780 여 년 간 국토를빼앗기고 게릴라전을 치르다가, 1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왕족, 귀족, 기사, 농민들이합세하여 국토회복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전투력을 익히고, 기사들은 하급 영주이기도하여 목양지를 경영하면서 이슬람인 들을 상대로 상업적인 타산과 호전적인 기질,공공연한 약탈행위를 몸에 익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인 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슬람의 지배는 못마땅한것이 당연할지 모르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기 이베리아반도는 다른어떤 유럽지역보다도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슬람인들에 의해서 쌀과 사탕수수, 종려, 석류, 누에고치, 관개용 수로 망까지 들어왔고,상업은 물론, 목양(牧羊)을 개선하고, 모직물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유리나 금속공업,제지업도 발전시켜 교육제도가 완비되고,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이나 철학, 문학이진보하고, 이로 인해서 도시가 번영했고, 특히 그라나다의 붉은 궁전 알함브라를비롯해서 각지에 많은 궁전과 사원이 세워졌습니다.

국토회복운동으로 이슬람의 지배에서 주민들은 해방되었으나,그 대가는 훨씬 더 잔학한 왕과 영주 밑에서 새로운 고통을 겪게 되었는데, 그들의철저한 약탈에 의해서 도시는 파괴되고 경지는 황폐화되었으며, 도망하지 못한 무어인들은 붙잡히는 데로 노예로 팔려갔으며, 이런 광포(狂暴)와 문맹(文盲), 욕망(慾望)으로가득찬 왕국의 지배자들이 이슬람인 들로부터 약탈한 재보로 왕성해진 에너지를 발산하기위해 새로운 황금의 세계를 찾아 나서게 되었으니 그 결과는 보나 마나 겠지요. 그단적인 예가 아메리카의 두 고대문명, 아즈텍과 잉카제국이 이들에 의해서 철저히파괴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아프리카 대륙으로 진출한목적을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토회복운동은 십자군과 같은 사명을가지고 있었고, 또 아프리카 오지에는 오래 전 성 요한의 잔(盞)을 받은 크리스트국가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으므로, 에스파냐가 이들과 연락해서 이슬람교도를 몰아내고자했다.라고 포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 후 이들이 여러 번 돌아보고아무리 찾아보아도 이교도들 뿐 크리스트 국가는 그림자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러면 이런 명분은 더 이상의 설득력이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아프리카로갔고 거기에서 다량의 금과 노예, 상아 등을 가져와 돈을 벌었습니다.

포르투갈인 들이 아프리카로부터 들여오기 시작한것은 노예, 엔리케 왕자가 서 나일강의 입구(이곳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디오피아와연결된다고 믿었음)를 찾아라고 보낸 탐험대가 강의 입구는 찾지 못하고, 1443년백여 명의 노예를 싣고 포르투갈의 라고스(Lagos)에 귀항했을 때 시민들은 기뻐서어쩔 줄을 몰랐다고 하는데, 이는 아라비아 상인들이나 해적을 통하지 않고도 황금과상아, 노예를 직수입하려던 그들의 숙원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무렵포르투갈에는 개간되지 못한 땅이 많았고, 여기에 흑인 노예들을 들여와 개간한다는것은, 그들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영혼 구제를 돕는 한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고생각하였으며, 이런 때 선주(船主)와 상인단체의 이익이 일치하여, 상인들은 기꺼이선주들에게 자금을 제공하여 이 후 아프리카 무역은 급속도로 발전, 유럽 각국이다투어 진출하면서, 대륙의 흑인 왕국은 모조리 붕괴되고 암흑, 무지몽매, 야만의대륙이라는 누명까지 안겨 주었습니다.

(3) 디아스(Diaz or Dias, Bartolomeu / 1450 ?~1500.5.29)의희망봉 발견

원래의 목적과는 관계없이 역사의 전개는 엉뚱한 곳에서빛을 보게 되는데 이런 것의 하나가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마젤란의 세계일주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도 항로를 개척한 것은 포르투갈 사람들.그들이 이슬람인 들을 몰아내고 지브롤터 맞은편 세우타에 교두보(橋頭堡)를 구축한것이 1415년, 이곳을 근거로 남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여기에서이들은 의외의 장애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보자도르 곶(Cabo Bojador /W 14도 18분, N 26도 7분)의 난 코스에 이르러 거센 파도와 암초, 짙은 안개와 변덕스러운바람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이곳을 밖으로 돌아서 갈 생각을못했을까? 생각을 못했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컴퍼스가 있다고는하나 육지와 떨어져서 대양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안했고, 확실한 보장도없이 무조건 만용(蠻勇)을 부리기에는 너무 약았다 고나 할까요. 어쨌든 이 난 코스를넘는데는 원양항법이라는 것이 다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원양항법을 처음으로제시한 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지리학 집성)로서, 천체의 관측으로 자기배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배의 위치를 측정하는
구계(球界) 천문학 공식, y=90°- h + d-------(1)
에서 적위(赤緯) d에 있는 어떤 별의 남중(南中) 고도(高度) h를 해상에서 관측하면(1)에 의해서 간단하게 그 지점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아프리카 서쪽의해상에서 시리우스의 남중 고도를 잰 것이 h=52°1라면, 시리우스의 적위를 d=16°7로해서
그 지점의 위도는 y = 90°- 52°1 - 16°7 = 21°2 = 21°2 N 임을 알 수 있다고어느 책자에 소개하고 있는데 상세한 내용은 저로서도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고,다만 해양 영화 같은 것을 보면 각도기로 천체를 관측하는 모습은 여러번 본 것 같습니다.
천체관측에는 항성(恒星)외에 태양, 달, 혹성을 이용할 수 있으나, 이런 천체들은매일매일 적위가 달라지므로, 천체력(天體曆)에서 그 날의 적위를 알아내야 계산을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고, 위도는 알 수 있지만 경도(經度)의 결정은 18세기에 와서야가능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의 탐험사업은 위도(緯度)항법의 발명으로그 전기(轉機)를 마련하여, 1434년에는 문제의 보자도르 곶을 우회하여 더욱 남쪽으로내려가, 1446년 시에라 리온(Sierra Lione)에 도착, 그 후 기니만 일대를 누비다가,디아스가 전설적인 그리스도교국 프레스테스 요하네의 나라라고 상상되던 에티오피아의발견을 명령받고, 1487년 8월 세척의 배를 이끌고, 항해에 올라 그 해 말 아프리카서남 단에 도착, 다시 서(西)아프리카 남안을 2척으로 출범, 폭풍으로 13일간 표류하다가북상하여 아프리카 남동쪽 끝(남아프리카 포트엘리자베스 부근)을 발견하고, 계속북상하려 했으나 선원들의 반대로 되돌아가다가 도중 케이프다운 남쪽 끝 케이프포인트를바라보고 그 날 따라 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었다고하는데,

그 날짜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1488년 1월 이후의어느 날, 이 지구의 땅 끝을 발견하여 대망의 인도항로를 목전에 둔 국왕 주앙 2세의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겠지요. 거금을 투자하여 성공한 사업, 그래서 그는선원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하여 희망봉(Cape of good hope)으로 이름을 고치는 등부산을 떨었으나, 후에 희망봉 앞 바다에까지 갔다가 해난사고로 후사 없이 죽음으로서그 행운은 그의 종제(從弟) 마누엘 1세(Manuel I / 1495∼1521)에게 넘어 갔습니다.

(4) 바스코 다 가마(Gama, Vasco da / 1469 ~1524)의인도 항로 개척

희망봉 발견의 포르투갈 기념우표주앙 2세의 후원하에바스코 다 가마가 기함(旗艦) 산 카브리엘 이하 세척의 선단으로 구성된 포르투갈의탐험대를 이끌고 리스본(Lisbon)을 떠난 것이 후원자 주앙 2세가 죽은 후인 1497년7월 8일, 취한 코스는 디아스의 건의로 디아스가 택한 해안을 따라 간 것이 아니라북상(北上)하는 조류(潮流)를 피해 반원형을 그리며 우회해서 우선 희망봉까지 간다는계산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시에라레온 앞 바다에서 대서양의 서쪽으로 나아가다시 북상을 하였는데, 막상 3개월 동안 육지는 고사하고 섬 하나도 보이지 않자선원들은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반란을 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윽고 그들 일행은 11월 22일 희망봉을 돌아서 아프리카동해안의 여러 어촌을 거치면서 모잠비크·몸바사를 통과, 98년 4월 마린디에 도착,도중에 이슬람교도들의 적대적 방해로 시달림을 받았으나, 우호적인 마린디에서는이슬람의 수로(水路) 안내인 이분 마지드의 도움으로 드디어 인도양을 횡단, 5월22일 캘리컷에 도착,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의 대사업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나독점무역에 위협을 느낀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와, 무력(武力)에 대한 지방 영주(領主)들의경계심 때문에 정식 통상교섭은 난항을 거듭, 3개월만에 겨우 약간의 향료를 입수하고,10월 다시 인도양을 횡단하여 올 때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항해를 계속하였으나, 괴혈병(壞血病)·열병(熱病)등으로 선원의 반 이상을 잃고, 1499년 9월 9일 가까스로 리스본에 귀환하여 대대적인환영을 받았습니다.

캘리컷까지 왕복하는데 꼭 2년 2개월의 소요되었으며,2/3 이상의 선원을 잃게 되어 도중에 배 한 척은 불에 태우지 않을 수 없었으나,가져온 향료의 수입이 엄청나서 비용을 탕감하고도 많은 이익을 남겼다고 합니다.이렇게 인도 항로가 열리자 포르투갈에서는 거의 매년 탐험대를 인도에 보냈는데,1500년 13척으로 구성된 제 2회 탐험대를 인솔한 카브랄(Cabral, Pedro Alvars /1467/68~1520)은1500년 3월 9일 리스본을 출범하여 희망봉을 향해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서쪽으로표류하던 중, 4월 22일 우연히 브라질 서해안에 도착, 그곳을 포르투갈 국왕인 마누엘1세의 영토로 하고, 다시 동진하여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하였고 이듬해에 귀국하였습니다.

1502년 바스코 다 가마가 다시 15척의 대함대(大艦隊)를인솔하고 인도에 건너갔을 때에는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반격을 받았으나, 이를격파하고 코친·카나놀 등 각지에 상관(商館)을 설치, 인도무역 독점의 기초를 다졌고,그 뒤 백작에 봉해지고, 국왕의 인도정책 고문이 되었다가, 1524년 국왕을 대신하여현지 공관(公館)의 부패숙정을 위해 인도에 갔으나, 과로가 겹쳐 병을 얻고 코친에서 죽었습니다. 인도의 왕래가 자자지면서 향료의 값도 많이 떨어졌으나 무역으로얻는 수입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유럽의 군주들은 너도나도 인도에 관심을가졌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은 그들의 식민지로 추락하는 순서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파괴

(1) 또 다른 서방항로의 개척자 콜럼버스(Columbus,Christopher / Cristoforo Colombo / 1451 ~ 1506.5.21)

콜럼버스 일행이 타고간 산타마리아호의 복원선포르투갈이희망봉을 발견하고, 대망의 인도 항로의 개척을 목전에 두었을 때, 이웃 나라 에스파냐는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그라나다를 함락하고(1492) 역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있었습니다. 이 때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을 찾아가 희망봉을 돌지 않고도 훨씬 가깝고비용도 적게 드는 신 항로의 개척이 가능하다고 열심히 여왕을 설득하는 사람이 바로콜럼버스였습니다.

그러면 왜 별 것도 아닌 후추와 계피  따위의향신료를 얻기 위해 유럽인 들이 죽음을 무릅쓴 항해를 하면서 까지 인도를 찾아나섰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조금은 지루하고 복잡합니다. 그 첫 번째 대답은유럽에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서 고가의 귀중품으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고둘째 귀중품으로 대접받은 이유는 육식을 주로 하는 유럽인 들이 식사 후 혹은 변질된육류를 먹고 나서 입에서 나는 냄새를 제거하는데 필수적이 였다는 것, 셋째 육식을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척박한 토지에서 유치한 농업기술로는 식량을 충당할수 없었다는 것, 넷째, 변질된 육류라는 것은 겨울이 되면 목초가 없기 때문에 종자용을제외하고 모두 도축해서 보관하는데 냉장시설이 없었다는 것, 다섯째, 생산지가 아시아쪽이고 직수입이 불가했다는 것, 여섯째 직수입이 불가한 이유는 오스만 투르크가서아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어서 육로 통행이 불가했다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있습니다.

이런 향신료 외에 또하나 유럽인 들의 입맛을 당기게한 것은 황금, 마르코 폴로가 섰다는 동방견문록에는 동쪽 끝 어느 땅에는 황금의나라가 있어서, 온통 황금으로 뒤 덮여 있다고 과장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황금의나라가 치팡고(Cipango), 즉 일본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 때 일본의 무역상인들이금화를 가진 것을 보고 이 벽안의 사나이가 잘못 판단하였거나, 아니면 당장 들통날 일도 아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서 사람들의 흥미를유발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겠지요. 일본은 그때나지금이나 그렇게 금이 많이 나는 나라가 아닙니다.

콜럼버스가 제시한 서방항로의 내용은 지구의 구체설을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는 피렌체의 의사이면서 지리학자였던 토스카넬리(Toscanellidal Pozzo, Paolo / 1397~1482)와 편지를 통해서 지구구체설과 서방항로에 대한 확신을가지게 되었고,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다는 치팡고가 이베리아반도의 서남 단에 있는비센테 곶과의 거리는 약 2천 4백 해리, 평균 3 노트의 시속으로 간다면 1 개월 정도의항정(航程), 이런 것들이 그의 생각인 동시에 이사벨 여왕에게 보고 한 내용들이였습니다.

콜럼버스가 처음부터 후원을 바랐던 것은 포르투갈국왕, 1484년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獻策)하였으나 희망봉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은 실효성에 의문이 많은 콜럼버스의 계획에 선 듯 동의하지않았습니다. 이에 콜럼버스는 영국왕 헨리 7세에게도 자기의 포부를 편지로 알리고,에스파냐로 찾아가 이사벨 여왕을 찾았는데, 이 여왕은 재빠르게 콜럼버스와 계약을체결하였습니다. 계약내용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섬과 육지의 부왕(副王)겸 총독으로부임하고, 이익의 9/10을 왕실에, 나머지 1/10은 콜럼버스 개인의 이익으로 하며,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市)로 하여금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을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免罪)하여 준다는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으며,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습니다.이래서 콜럼버스의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 세척의 배와 선원 120 명을인솔하고 팔로스 항을 떠났습니다.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의와틀링섬(추정)을 발견, 이어,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키고, 아메리카토인들이 장식용으로 몸에 두르고 있던 약간의 금과 견본용 노예를 대리고 1493년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그가 가져온 약간의 금제품으로 황금의 나라치팡고를 목전에 두고 돌아왔고, 치팡고의 서쪽에 있는 향료 섬까지는 가지 못하고돌아왔다고 선전하자, 전 유럽에 큰 소동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이때 생겨났으나, 문제는 향료. 한 톨도 구하지 못하고 돌아온 그로서는 여간 서운하지않았고 그에 대한 변명도 여러가지로 구구했을 것입니다. 이래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게되었는데, 1493년 제 2회 항해 때는 그의 선전에 따라, 17척의 선박에 1,500 여명의많은 사람들이 금과 향료를 찾아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금의 산출이 보잘 것 없고 향료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학대·살육하거나, 노예로 만들어 에스파냐로 대리고 온 것이 고작 이였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부를 찾아 항진(航進)하려는축적된 에너지는 이후에도 제3회항해(1498∼1500), 제4회항해(1502∼1504)까지 계속되었으나,허탕만 뒤풀이하였고, 1504년에 그의 후원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는 가운데 이미 과거의 인물이되어 죽었습니다(1506) 그러나 자신은 자기가 발견한 곳을 인도라고 믿었고, 그 후이곳이 베스푸치(Vespucci, Amerigo /1454~1512)라는 사람에 의해서 인도가 아니고신대륙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베스푸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출신으로 1479년 메디치가(家)와관계를 맺고 일하다가, 91년부터 세비야의 메디치계(系) 상관(商館)에 파견되어 일한것을 인연으로, 콜럼버스의 2·3차 항해에 쓰일 배의 건조일 을 도왔고, 1497∼1503년에걸쳐 자신이 신대륙에 여러 번 항해하였습니다. 카리브해를 지나 멕시코 일대를 둘러보고,이곳이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인도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고,1503년 알베리쿠스 베스푸시우스(베스푸치의 라틴명)의 이름으로 발행된 작은 책자"신세계"를 발간, 이런 사실을 밝히기 시작하였습니다.

1507년 독일의 지리학자 M . 발트제뮐러가 그의 저서세계지 입문(世界誌入門)에서(1507) 신세계임을 발견한 아메리고의 이름을 기념하여그것을 아메리카라고 부르기를 제창하였고, 이것이 뒤에 널리 승인되어 오늘날까지이르고 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기가 본 대륙이 인도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알고죽었기 때문에 대륙의 명칭까지 다른 사람에게 내주었으나, 그의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인하여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한라틴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의 단서를 제공한 것은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서 대량의 은이 유입되어 유럽의 가격혁명을 유발하였고,담배와 매독, 감자와 옥수수 등이 전래되어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크게 변화 시켰습니다.

(2) 마젤란(Magellan, Ferdinand, Fernando de Magalhaes/ 1480~1521.4.27)의 세계 일주

콜럼버스가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으로 에스파냐에서항해가로 일했다면, 마젤란은 포르투갈 태생으로 역시 에스파냐에서 항해하여 인류최초의 지구일주항해의 지휘자로서의 후세에 길이 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포르투갈어로는마갈랴잉시라고 부르며 마젤란은 영어식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는 포르투갈의 하급귀족출신으로, 마누엘 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의 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일하였으며, 아프리카·인도 항로에 근무하였고(1504∼11). 이어서 11년 말라카에서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모로코에서 현지무어 인과의 거래가 왕의 의심을 사게 되어 불신을 받자 포르투갈과의 인연을 끊고에스파냐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가 말라카에서 근무할 때 우수한 향료의 산지가몰루카제도(Moluccas 諸島)라는 것을 알았고, 이미 아메리카대륙 서쪽에 또 다른바다(태평양)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희망봉을 돌아가듯이 신대륙에서 남쪽끝을 돌아가면 쉽게 몰루카제도에 도착할 수 있고, 항정도 희망봉을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고 판단, 이에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5세)를 설득, 드디어 특허를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航路)로 몰루카제도에갈 계획하에 선박 5척과 승무원 237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습니다.

그가 국왕과 맺은 계약은 대개 콜럼버스의 경우와유사한 것으로 새로이 얻은 땅에 부왕과 총독자리와 수입의 1/20은 마젤란이 나머지는왕실이 차지한다는 등의 것이었는데, 선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행선지를 감춘 채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 이곳이마젤란이 예상한 해협이 아니고 강어귀라는 것을 알았고, 다시 남하를 계속, 남위(南緯)49도 20분의 율라안 항에 이른 것이 3월 31일.

여기서 포르투갈 출신 마젤란에 대한 에스파냐 선원들의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를 진압, 위기를 넘겼으나 해안을 탐험하던 배 한 척이 침몰하는불상사가 발생하였습니다. 마젤란과 그 일행의 배 4척은 8월 24일 율리안을 출발,남하를 계속, 10월 21일 남위 52도 50분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깊은 강 어귀(마젤란해협)에 진입, 600 킬로미터의 길고 험한 해협을 38일간 항해, 이 때 뒤따르던 배한 척이 도주하여 단독으로 귀국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3척의 배로 해협을 빠져나간마젤란은 해협의 출구를 "대망(大望)의 갑(岬)"이라고 불렀는데 이 때가1520년 11월 28일, 희망봉 발견에 버금 가는 일대 쾌거라 할 수 있습니다.

대망의 갑에서 대양으로 나선 마젤란은 처음에 물결이잔잔한 것만을 보고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몇 일을 가도 섬 하나 볼 수없었고, 식량마저 떨어져 배 안에 있는 쥐를 잡아먹고, 마스트의 쇠가죽까지 씹어먹는 절망과 고난의 항해를 계속, 마젤란 해협을 떠난 지 110 일 만에 마리아나 제도(諸島)의한 섬 괌(Guam)에 상륙하여 오래간만에 음식과 신선한 물을 마신 것이 1521년 3월6일.

마젤란은 앞서 말래카에서 근무할 때 산 수마트라출신 노예를 이 세계일주 항해에 데리고 다녔는데, 그에 의해 이 괌에서 목적지 몰루카제도까지는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목적지 몰루카제도를 보기 전막탄섬(Mactan Island)에서 토인들과 전투 중 목숨을 잃었고(1521. 4. 27), 나머지선원들은 겨우 배 2척으로 몰루카에 갔다가 여기서 또 한 척을 버리고 85톤 급 빅토리아호1척만으로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동방항로를 따라희망봉을 돌아서, 1522년 9월 8일, 3년만에 세비야에 귀항, 이때까지 생존자는 엘카노등 18명 뿐, 필리핀·마리아나 제도 등의 이름이 지어진 것도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계일주가 이루어졌고, 지구가 둥글다는것을 증명했지만, 마젤란이 처음부터 세계일주를 목적한 것은 아니고, 가까운 길로몰루카제도에 간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세계일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항해에서에스파냐 국왕은 싣고 온 향료만으로도 많은 이득을 얻었지만 마젤란 자신은 매우불행했습니다. 물론 그가 일부변경선을 이미 넘고 죽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는 이 때이루어 졌다고는 하나, 그 자신이 목숨을 잃은 것은 고사하고, 그 동안 에스파냐에남아 있던 처와 두 아들이 사망했으며, 막탄섬에서 죽은 마젤란은 반역자 취급을당했고, 새로이 발견된 향료 섬 몰루카는 포르투갈에 팔렸으며, 마젤란 해협의 발견자라는명예와 귀족의 칭호를 획득한 것은 항해 중 마젤란에게 반항했던 빅토리아호의 선장엘카노가 차지하였습니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로 이들 국가와 항해 가들은 영광과비난을 동시에 받았지만, 유럽이라는 지역이 이를 계기로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것을 인정해야 되는 우리들로서는, 당시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의 사정을 밝혀서 이와비교해 보고자 했으나, 다시 내용이 지루하게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서 줄이고 다음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다만 중국은 명나라 초기 홍무제는 해금정책을 취했으나, 정난의변으로 정권을 잡은 성조 영락제는 적극적인 해외 진출 정책을 추진, 정화의 남해원정을달성시켰고, 일본도 이 당시 무역선이 중국, 필리핀, 동남아시아까지 내왕하였다고하는데, 조선왕조는 해금(海禁)정책을 고수, 태종 때 이른바 호패 법을 만들고, 섬에있던 사람들까지 육지로 강제 이주 시키고, 바다를 봉쇄해 버렸습니다. 아마도 왜구의침입이 두려웠거나, 철저하게 주민을 지배해야 된다는 논리가 동시에 작용한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 - 루터, 칼뱅, 영국의 종교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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