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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어버이주일 설교모음]1
mfc153 추천 0 조회 100 12.12.04 02: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땅히 공경할 자를 공경하라! (레 19:32)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양식만 축내는 노인을 죽게 하거나 버리는 문화는 보편적이었습니다.

웨스트고드랜드의 국경지방에 에테르니스 스타피라는 천길 벼랑이 있는데 늙어 수입가계(收入家計)에 도움이 안 되면 이 벼랑에 모셔가 떼밀었던 현장으로, “에테르니스 스타피”하면 노인을 떼밀어 죽인 노사(老捨)문화를 일컫게 됐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벼랑이 아니라 다리에서 떼밀었습니다. 노인을 데폰타니라 불렀다는데, 다리에서 떼밀리는 사람이란 뜻이라 합니다.

탐험가 “헌트”가 피지 섬에 상륙했을 때 살아있는 어머니의 장례라는 이상한 의식에 초대받아 갔었습니다.

노모의 생매장 의식으로 헌트가 놀라 살인행위라하여 말렸지만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새끼줄로 목을 졸라 살해하는 것을 적어 남겼습니다.

여진족들은 노부모를 자루에 담아 나무에 걸어놓고 단 한방의 화살로 쏴죽여야 효자로 칭송받는다는 견문이 「용재총화(傭齋叢話)」에 나옵니다.

우리나라 지명에 “살애비들, 살애비굴, 노사암(老捨岩), 노사굴(老捨窟)” 등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살노속(殺老俗) 가로속이 있었음을 말해주며 세종10년에 임금이 교지를 내리기를 “고려 때는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미쳐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노부모를 밖에 내다버리니 이 폐습을 두어둘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면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꼭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매달려 한 평생을 허무하게 끝내는 자들이 많습니다.

성공하는 자들은 해야 할 일을 철저하게 골라서 해낸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리자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꼭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여 그대로 실천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써 이 땅위의 공동체에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교회나 각 기관에서 만날 수 있는 부모님이나 어른들, 손위의 사람이나 선배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레19:32)라고 모세에게 가르쳐 배우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다시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나이가 많으면 머리가 세기 마련입니다. 센 머리는 나이 많음의 증거요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버릇들이 없어서 젊은 것들이 건방지게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려 어른 노릇을 하려고 덤비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검은 머리가 별로 없는 모 목사가 하루는 사우나에 갔습니다. 노인들이 둘러앉았다가 다들 일어나더라는 겁니다. 70대 들어선 노인들이 “아이고 어르신 어서 오십시오”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 모 목사는 자기는 아직도 60정도인데 70노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그날 민망스러워 혼이 났다는 겁니다. 당장에 염색을 했노라고 하는 말을 전해 듣고는 한바탕 웃었습니다.

머슈헨리(Mathew Henry)는 “하나님께서 장수의 일반적인 축복으로 영예롭게 하신 자들을 우리는 공경해야 한다. 연로하며 지혜롭고 선한 자들은 갑절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 백성들은 마땅히 그들에게 명예를 돌리며 그들이 안락하게 여생을 누리도록 배려해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문을 구하고 경청해야 한다(욥 32:6,7). 신앙은 훌륭한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있으며, 마땅히 존경해야 할 자들에게는 존경을 표해야 함을 우리에게 명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는 것은 존경의 표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녀들, 젊은이들, 아랫사람들, 행정적으로 하부조직에 속한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성도들이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여 손해 볼 일 없습니다.

잠언은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20:29)라고 말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영광은 체력과 힘입니다. 젊은이들의 힘은 정말 신비스럽습니다. 젊은이들의 힘의 일부를 노인들을 위해, 늙은이들을 위해 쓰는 것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늙은이들의 백발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발관에서 나에게 “큰일 났습니다. 머리가 희끗 희끗 하네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당신은 큰일이 무엇이며 작은 일이 무엇인지 그 나이 되도록 그렇게 터득을 못했습니까?”라고 쏘아붙였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발을 하러 가서 “아저씨 큰일 났네요, 자꾸만 머리가 희어지네요,

머리 염색좀 해주세요." " 아이고 목사님 얼마나 깨끗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데요, 절대 머리 염색하지 마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달 동안에 말하는 것을 많이 배웠구먼...
위클리프는 “센 머리는 세상의 권위와 존경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했습니다.

2.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레19: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탈 강해 집에 “겸손이 어린 자의 위치를 알게 하는 것임과 같이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는 말씀 속에는 두 가지의 교훈이 담겨져 있다.”

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노인을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노인을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노인을 알아본다는 것은 단순히 구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러한 구분은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의미는 이것이 아닌 좀 더 높은 차원의 안목인 것입니다.

?노인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 이상으로 노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필요한 것을 젊은이들에게 일일이 말 못합니다.

?노인이 지금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노인들도 욕구가 있습니다.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일일이 말 못합니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노인들은 밥만 먹여 주면은 되는 줄로 압니다. 노인들이 무슨 짐승입니까? 밥만 먹여 주면 되게 말입니다.

?노인이 지금 거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장소적인 위치보다는 마음의 위치, 정신적인 위치, 영적인 위치를 헤아리고 보살피라는 말입니다.

?노인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노인들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은 엄청 많습니다.

둘째는 노인들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노인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나님을 경외함같이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선을 행할 주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하였습니다(참조, 약 4:17). 노인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 노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노인의 형편을 살필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위하여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듯이 이 모든 일들을 우리는 성실하게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가난한 농부가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부지런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라는 소문이 이웃 마을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이웃 마을에 한 부잣집이 있었는데 그 부잣집 아들은 노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여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효자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부잣집 아들은 농부가 효자라는 소문을 듣고 가난한 농부면서 어떻게 어머니를 모시기에 소문이 온 마을에 퍼져 칭찬이 자자할까 궁금하여. 실상을 보기 위해 농부의 집을 찾아가서 싸리문 밖에서 모자의 동정을 지켜보았습니다.해가 저물어 저녁때가 되어 아들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마루에 앉아 있는데 그 어머니가 세숫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와서 아들의 발을 닦아주며 하시는 말씀이, “오늘 들에서 일하느라고 고생이 많았지? 별일은 없었느냐? 어깨는 아프지 않았느냐?” 하시며 발을 다 닦아주고 어깨까지 주물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잣집 아들은 문 밖에서 이 광경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서 문 안으로 들어서며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어머니께 발을 닦게 하고 어깨를 주무르게 하는 자식을 세상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찬하다니 너 같은 불효자식은 이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라고 야단을 했습니다. 그러자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농부는 “나는 부모님께 어떤 식으로 하는 사람이 효자이고 효도가 무엇인지 잘 모르며 특별히 어머니에게 잘 하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어머님이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을 하시게 하고, 잡수시고 싶어 하시는 음식을 성의껏 구해다 드리는 것뿐입니다. 지금 보시다시피 발을 닦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을 못하게 하면 섭섭하게 생각하시어 우울한 표정을 지으시니 어머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게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부잣집 아들은 이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서 “부모님을 편안하게 원하시는 대로 모시는 것이 효자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3.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32)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딩이 하루아침에 지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숱한 과정을 겪어야 유명한 빌딩이 세워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옛날에는 서양 노인들이 한국을 보고 노인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3-4대가 한 집에 살면서 정을 나누는 것이 그렇게 보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서양이 노인 천국이요, 우리나라는 노인들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노인들은 오갈 데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노인들 복지 시설은 안 돼 있고, 젊은이들은 부모를 싫어하므로 노인들은 오갈 데가 없어졌습니다.

젊은이들은 노인들, 부모들과 같이 살던 따로 살던 공경하는 자세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연결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고르반” 사상이 강했습니다.

부모는 공경하지 않아도 십일조나 바치고, 금식이나 하고, 가난한 자 구제나 하면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부모나, 노인들을 공경하지 않고 어찌 하나님이 공경이 되느냐는 말씀이셨습니다.

천륜은 인륜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인륜을 뛰어 넘어 천륜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이셨습니다.

끝맺는 말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열매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 사회는 노인에 대한 공경이나 연장자에 대한 예우보다도 직위에 대한 존경 또는 권위에 대한 굴복과 실용주의로만 흐르고 있어서 노인은 존경하고 정성껏 모시기보다는 하나의 귀찮은 존재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쓸모없는 부류들로만 여기는 사악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설교 : 신삼철 목사)

아버지를 생각하는 그의 아들 예수 (요 17:1~11)

요즈음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되는지 모른다. 거리에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라. 바지 위에다 치마를 입고, 속 옷같이 생긴 옷을 겉에 입는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정신이 없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급격한 변화를 겪은 민족이다. 신발의 예만 들더라도 인류 문명이 여러 종류의 신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이 인류의 역사 속에 흐르는 다양한 종류의 신을 한 세대에 다 신어본 사람들은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이라고 한다. 우리 아버님 세대에만 해도, 짚신 > 고무신 > 운동화 > 군화 > 가죽구두 > 국내외 고급 브랜드 구두를 신으셨다.

이같이 우리 나라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그런 세대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옷 입는 스타일만 바뀐 것이 아니라 생활 스타일도 많이 바뀌고 있다. 굳이 결혼해서 얽매여서 아이 낳고 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예배 시간에 어느 학생이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목사님이 모자를 벗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더니 끝까지 벗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가면서 목사님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이 안경 쓰고 계신 것이나 내가 모자 쓰고 있는 것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세대의 톡톡튀는 그런 생각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까 신인간이라 혹은 신인류라고 부를 정도이다. 그리고 미래학자들이 예견하기를 앞으로는 도덕의 원칙, 종교의 원칙 등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실제로 어느 딸이 낳아준 엄마에게 “탈렌트처럼 예쁘게 낳아주지 않았으니 나를 책임지라. 나에게 성형수술비 얼마를 내 놓으라”는 식으로 원망을 하였다고 한다.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삶의 중요한 원칙들은 지켜져야 되지 않겠는가?

오늘 함께 나눌 삶의 중요한 원칙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삶의 원칙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으로 향하여 갈 때에 열가지 삶의 원칙을 가르쳐 주셨다.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원칙을 지키고 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 까지는 주변의 사람들과 이러한 원칙을 지키며 살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을 향하여 지켜야할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세월이 지난 후에 모세가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십계명을 풀어서 전한다.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십계명에 기록된 이 말씀, 특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부모를 향하여 공경하라는 이 말씀은 과거 수 천년 전에 세운 약속이 아니다. 시내산에서 세운 약속이 아니다. 이 약속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바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기에 이 약속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지금도 유효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고별의 기도문이다. 예수님의 기도문 속에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마음, 그리고 육신의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마음, 그리고 주변에 어르신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배우기 바란다.

분명한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께서 베푸신 은혜를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가 곧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고백하신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공로임을 자랑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세밀하게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부모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릴 때의 일이다.

어머님이 영일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도 그 학교의 학생이었다. 체육시간에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나는 꼴찌를 했다. 운동장을 몇 바퀴를 달리는 오래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달리다가 나도 모르게 우연히 엄마가 가르치는 교실을 바라보았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고 운동장에서 꼴등으로 달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어릴 때에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앞서기를 위해서 몸을 틀었을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며” 이 찬양을 부를 때면 어렸을 때에 어머님의 이 눈빛이 생각난다.
이같이 부모님의 마음은 한결같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의 마음 밖에 없다. 이 시간에 우리의 부모님들을 생각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함께 불러보자.

1.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어머니 아버지의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유지될 수 있을까? 부모님은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 하나뿐이다. 베푸신 은혜를 세밀하게 기억하자. 자식의 허물이 있으면 소리없이 그것을 덮어 주시려고 뒤에서 애쓰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우리는 세밀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는다.

어느 햇살 따스한 오후, 그네에 걸터 앉아서 아빠와 아이는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빠, 내가 이기면 장난감 사주고 아빠가 이기면 제가 안마해 드릴께요.” 꼬마 아이는 신나서 가위바위보를 한다. “와! 내가 이겼다. 아빠, 이번엔 피자 내기 가위바위보 해요.” 계속해서 가위바위보를 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이의 신이 난 표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로 말한다.

“이제 우리 가위바위보 그만하고 장남감도 사고 피자 먹으로 갈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할아버지가 ‘참 다정한 아버지구나.’ 생각하고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보기 좋구려. 아들이랑 다정하게 가위바위보 하는 당신 모습이 말이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다. “가위바위보는 우리 애가 너무 좋아하는 놀이예요.

하지만 저는 단 한번도 이길 수가 없답니다. 우리 애가 무엇을 낼 것인가를 이미 전 다 알고 있거든요.

그 놈은 일년 전 사고로 손가락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는, 녀석이 철이 드는 언젠가는...

더 이상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그런 날이 안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면 제 가슴이 많이도 아플 테니까요.” 아들은 손가락이 없으니 매번 주먹만 낸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서 언제나 가위만 낸다. 아버지는 언제나 이길 수 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져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이 아닌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길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져주신다. 부모님은 우리를 언제나 이길 수 있었지만, 언제나 져주셨다. 자식 사랑 때문에.... 어버이 주일을 지나는 이날 우리는 부모님의 세밀한 사랑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이렇게 베푸시는 은혜와 고마운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해야 되겠는가?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렸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 고통이 앞에 놓여져 있었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 길을 피해서 다른 길로 가고 싶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소리 내어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래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 모진 고통의 길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원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면 나는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백하셨다. 십자가의 길을 갈지라도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려야겠다는 효자의 길을 걸으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렸다. 부모는 자식을 끔찍하게 사랑한다. 그 사랑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부모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릴 책임이 있다. 자기의 뜻 데로 되지 않는 다고 하여 부모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 사람은 천하의 불효자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말씀은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는 점이다. 부모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그 말씀은 곧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기대가 있다는 점이다.

시골 어떤 지역에는 닷새 만에 장이 선다. 장이 서게 되면 아들은 그동안 모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서 장에 팔러 나간다. 늦은 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이제나 저제나 아들을 기다린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걱정이 되어 동구 밖까지 나가본다. 멀리서 한 사람씩 보이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좀 더 자세히, 좀 더 멀리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간다. 이 애틋한 마음을 한자에서는 어버이 친(親)이라고 한다. 이제 아들은 시장에 가서 나무를 팔아 그 돈으로 어머니께 드릴 반찬과 몇 가지 일용품을 사들고 오다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만난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어머니! 다리 아프실텐데 어찌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제가 업어드릴 테니까 이 지게 위에 타십시오.” 그래서 노인을 지게 위에 태우고 오는 아들의 모습이 한자의 효도 ‘孝’자이다. 부모님은 자식을 언제나 나무 위에 올라서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신다. 언제 오나. 어떻게 되고 있나. 잘 하고 있나. 궁금한 마음으로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우리는 그 부모님의 눈빛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편안하게 지게에 모시고 돌아오는 모습이 바로 효이다.
질서와 원칙이 무너지는 이 시대에, 혼란스럽게 변화되는 이 시대에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려는 효를 통해서 우리 나라의 좋은 전통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정신이 우리의 가정에도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어머니” (요 2:1-11)

1. 서론 : 어머니 주일과 오늘 본문의 의미

오늘은 어머니 주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생각해온 마태복음은 오늘 잠깐 쉬고, 어머니 주일에 맞는 본문을 택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오늘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예수님의 첫 이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The Public Life)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행한 이적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라는 표현에는 어떤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첫 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첫 사랑은 잊지 못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일의 처음 경험은 잘 잊혀지지 않는 강한 매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첫 이적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첫 번째 이적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내 때가 아니라”고 이 일에 나서려고 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은근하게 밀어붙이는 모습 때문에 오늘 본문의 귀한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예수님의 첫 이적은 바로 어머니 마리아의 노고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 1. 로마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의 기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로 인하여, 카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숭배하는 성경적인 근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흔히 “성모 마리아”라고 표현하면서 신앙의 한 대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 천주교회에 가면, 성모 마리아 상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왜 당신들은 마리아를 섬기십니까?” 하고 질문하면, “마리아는 우리의 주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서, 거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오늘 본문을 제시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요청을 결국 들어주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리들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간구하면, 이 간구를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바르게 잘 전달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마리아를 성모로서 숭배하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것은 약 4세기경부터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6세기경에 로마 카톨릭을 배경으로 한 로마 군대가 어떤 이방 민족을 정복하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무력으로 정복하고자 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무력 정복과 동시에 선교적인 차원에서 정복하고자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복하고자 한 그 이방 민족은 여신, 특히 어머니 신을 섬기는 민족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포교를 하면서 우리 기독교도 어머니를 숭상한다는 사실을 소개하기 위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내세우게 된 것이라고 하는 학설도 있습니다. 즉, 이방 민족의 어머니 신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로 대체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2. 이에 대한 개신교회(The Protestant Church)의 입장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우리 개신교에서는 로마 천주교처럼 마리아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존경하고 배울 점을 찾고자 하지만, 신앙이나 기도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 점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로마 천주교와 우리 개신교의 차이점인 것입니다.

2. 마리아와 예수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은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마리아에게서 배울 수 있는 신앙인의 모습, 특히 어머니와 연관된 의미에서 귀한 모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부모 된 우리 모두가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을 배운다면, 우리 역시도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귀한 도구들이 되게 할 수 있는 훌륭한 부모들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두 곳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3절입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리고 5절입니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우리는 이렇게 두 곳에 나타난 예수님의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모습이 바로 오늘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귀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두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의 모습을 살피도록 하십시다.

2-1.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어머니의 모습 - 결혼식 집의 어려운 사정에 동참함.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어머니의 첫 번째 역할은 결혼식을 치르는 가정의 어려운 형편을 예수님께 고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적용해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 혼인잔치 집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는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고자 하는 마음을 지녔습니다. 이러한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은 당연하게 보이는 모습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그리 쉽지마는 않은 모습입니다. 사실 남의 어려운 사정을 보고서는 겉으로는 “참으로 안 됐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안 그런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쌤통이다”, “그거 참 고소하다”고 여길지도 모를 것입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별로 친하지 않거나, 보이지 않게 경쟁상대로 여기는 사람일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남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될는지 두고 보자는 식으로 남의 어려움을 감상하고자 하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없는지요?

우리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어딘가에서 부족한 점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혼인집 주인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혼인을 치르는 집인 만큼 결혼준비에 얼마나 만전을 기했겠습니까? 하지만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손님이 예상외로 많이 왔나 봅니다.

그래서 가득 준비했던 포도주가 동이 났습니다. 이 혼인집은 나중에 하인들이 나오는 것과, 두, 세통 드는 물 항아리가 6개씩이나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넉넉한 집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주가 모자라는 난처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모든 수고와 준비에도 어려운 일이 생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러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리아의 깊은 이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은 대부분 자기중심적이어서, 남들이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형편에서 상대방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게 주인들은 종업원들이 자기 일처럼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또 종업원들은 주인들이 자기 이익만 채우려고 한다고 불평합니다.

이렇게 서로 오해한다면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주인의 입장에 있든, 종업원의 입장에 있든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어려운 형편에서 그 집의 입장을 이해하였습니다. 최선을 다 했는데도 포도주가 모자랐을 것이라고 이해했기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2-2.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어머니의 모습 -문제 해결의 바른 대상을 찾음

마리아의 모습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른 대상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아들 예수에게 의논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구나”하고 아들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처신은 단순히 예수님께 말했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모습입니다. 즉,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 다음 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즉각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응답에 대해 “독일성서공회”에서 발간된 해설서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물음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여자여, 나와 당신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자여!’ 라는 호칭은 그 어머니께 냉혹한 말로 들렸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히브리적 어법도 역시 그에게 냉혹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 어법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거부하며 그 요구 자체의 한계성을 지적하거나 혹은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통고하는 표현방식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러한 강한 거부반응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일을 추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마리아에게는 이 가정의 어려움에 대한 문제해결의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모습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예수에 대한 강한 기대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에게 이러한 사정을 말했던 것 역시, 그저 말할 사람이 없어서 예수에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어떤 의지가 있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해 줍니다. 이렇게 어머니 마리아는 이 가정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을 위한 대상자로 예수를 택한 것입니다. 이 점이 마리아의 또 하나의 귀한 모습인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는 일종의 돈 문제입니다. 돈만 있으면 당장 어디 가서 사다가 채울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돈이 있으면 해결될 수 있다” 혹은 “어떤 높은 사람의 말 한마디면 해결될 수 있다”라고 여기고 그리로 향하고자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인이기에 기도를 하겠지요. 하나님께 구하기도 하고, 또 해결을 위한 합당한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하나의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일을 추진한 사실을 본다면 그저 형식적으로 예수에게 말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2-3.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어머니의 모습 - 하인들에게 명함

마리아는 예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에게 명하였습니다. “이 예수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명령에 결국은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하던 예수님으로 행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하인들에게 명하여,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이르고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그 물은 포도주로 변하게 되는 귀한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마리아로 하여금 이렇게 하인들에게 “이 예수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명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에 대해 요한복음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복음서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12살 되던 때에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절기를 지키러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절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일행 중에 함께 있는 줄 알았습니다만 나중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성전에서 성전의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수님을 발견해서 찾았던 일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렇게 야단치듯 말했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러한 일이 있은 후부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예수에 대해 깊이 있는 관찰을 하게 된 것입니다. 눅 2:51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왜 예수에게 혼인집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했으며,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에게 “이 예수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명할 수 있었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에 대한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관찰이 지속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모습과 행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매일 매일의 삶에서 터득되어온 신앙의 결실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3. 결론 - 마리아의 활동으로 인한 결과

이러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활동은 그 자리에 귀한 모습들을 남겨 놓게 되었습니다. 첫째로는 그 혼인집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혼인집에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손님으로 온 사람들에게 귀한 칭찬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11절,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리고 세 번째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때가 임한 사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자기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는 귀한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이러한 것들은 그저 포도주만 있다고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즉, 이러한 것들은 돈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대 교부 시프리안(Cyprian)은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어머니”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교회는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상이 예수님의 어머니의 모습과 활동의 결과입니다. 오늘날 부모 된 우리들도 이러한 마리아와 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끼침으로 칭찬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되는 귀한 역사가 나타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어머니날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뜻이 계셔서 그를 통해 독생자를 낳게 하시고, 그의 손에 길리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부모 된 자로서, 이렇게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신앙과 자세를 본받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하시고, 이웃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됨으로 진정한 삶과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노강국 목사)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엡 6:1-4)

미국의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젊은 부부가 아기 하나를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는 하나 밖에 없는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습니다. 낮에는 산기슭을 일구어서 닭을 키우고 밤이면 자주 고장 나는 재봉틀 하나로 남의 옷을 수선하면서 삯바느질을 해서 자녀를 키웠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을 하였습니다. 아들은 졸업을 하는 날 졸업생들을 대표해서 졸업 연설을 하게 되어 있었고 학장으로부터 대통령을 대신해서 금메달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아들의 영광스러운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입고 나갈 만한 변변한 옷 한 벌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궁리 끝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가 네 졸업식에 마땅히 참석해야 되겠지마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좀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아들은 “어머니, 그것은 안 되는 말입니다. 어머님이 참석하지 않는 졸업식이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데서 받는 금메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머니,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참석하지 않으시면 제가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고 강하게 이야기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졸업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루한 옷차림과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 때문에 아들을 부끄럽게 할까 봐 사람들이 보는 앞에 나설 수가 없어서 뒷좌석에 숨다시피 하여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아들은 단상에 올라가서 멋진 졸업연설을 했습니다. “제가 이런 영예를 얻게 된 것은 두 분의 공로덕분입니다. 하나는 제가 아무리 비천하고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고 할지라도 평등하게 길을 열어주신 교수님들 덕분이고, 둘째는 매우 가난한 가운데서도 늘 삯바느질 하면서 저의 학자금을 대어 주면서 기도하고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늘 격려하신 어머님의 한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하고는 대통령이 보낸 영광스러운 금메달을 목에 걸고 바로 내려와서 뒷좌석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앉아있는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은혜였습니다.”하고 모든 공을 어머니에게 돌려 드렸습니다.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그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 아들은 1902년 프린스톤 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그로부터 10년 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외쳤던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의 외침에 많은 약소국가들이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삼일운동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그가 바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입니다. 그렇게 그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아니하는 아들이었기에 그가 재임하던 1914년, 미국 국회에서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거국적으로 어머니의 은혜를 기리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전 세계의 교회가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 날로 지키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교회도 오래 전부터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바꾸어서 어버이께 감사하고 기념하는 날로 만들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 5월,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서 지금까지도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려고 애 많이 써 왔지만 이제 한 단계 더 효도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순종해 보리라 다짐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오늘의 1절 말씀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또 부부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자식이 없으니까 부모는 될 수 없지만 자녀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자녀 아닌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누구누구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있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이 말씀은 한 사람도 예외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깨닫고 이 말씀에 순종해야 되겠습니다. 혹시 부모님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더 효도하고 충성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녀이면 부모에게 주안에서 순종하는 이것이 반드시 해야 될 일입니다. 2절에 보면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것은 효도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일이 어떤 일이라고 했습니까? <옳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옳은 일이란 말은 공동번역에는 마땅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일도 하지 못하여서 사회가 얼마나 어지러워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습니다만 오늘 본문 원문에는 <순종하라>는 말 뒤에 ‘왜냐하면’이란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순종하라 왜냐하면 이것이 옳으니라>. 왜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부모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런 사랑, 저런 사랑, 많이 말하고 있지만 부모님의 사랑만큼 크고 위대한 사랑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 이 세상에 사랑하는 대상들이 많지 않습니까? 형제간에 사랑합니다. 친구 간에 사랑합니다.
형제간의 사랑이 있지마는 형제도 한 쪽이 지나치게 잘 되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으면 형제간이라도 시기(猜忌)한다고요. 또 부모에게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할 만큼 가까운 친구일지라도 친구가 지나치게 잘 되고 칭찬받으면 친구 사이라도 시기한다고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시기하지 아니하는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랑은 시기하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사랑만은 시기하지 않는다고요.
자식이 잘 될 때 어느 부모가 ‘아, 이놈 봐라, 나보다도 더 위치가 나아지네, 더 많은 재물을 가지네, 더 인가 많네, 좀 밟아버려야지.’하고 자식을 시기해서 못되게 하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시기하지 아니하는 사랑,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은 부모의 사랑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가장 큰 사랑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아가페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만큼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는 어떡하든지 자식에게 좋은 것 주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이 떡 달라, 생선 달라하면 뱀을 주며 돌을 줄 부모가 어디 있느냐, 너희가 악한 부모라도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이 너희 부모가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부모들은 내가 못 먹어도, 못 입어도, 못 배워도 자식만은 잘 되게끔 하려는 것이 부모의 사랑인데 이런 사랑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합니다. 결혼하고 난 다음에는 그때부터 일생동안 누구에게 매입니까? 자식에게 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버는 돈 가운데서 자식에게 안 쓰고 전부 모아서 혼자서 한번 써 보세요. 아주 편안하게 일생동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버는 수입의 대부분을 자식들에게 다 투자하지 않습니까? 기러기 아빠들 보세요. 자식 공부 잘 시키기 위해서 부부와 떨어지고, 자식과 떨어져서 돈 버는 기계처럼 자식들에게 돈 보내지 않습니까?
누가 이런 사랑을 하겠습니까? 이런 사랑은 부모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이런 사랑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마땅한 일이고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잉태했을 때 엄마가 자식을 보호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자식이 뱃속에 있을 때 엄마는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약을 먹으면 뱃속에 있는 자녀가 잘못 될까봐서 열이 펄펄 나고 아파도 그냥 참지 내가 낫겠다고 약 먹지 않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습니까? 음식도 아기에게 좋은 것을 골라서 먹습니다. 뱃속에서부터 온갖 정성을 다 해서 키우지 않습니까? 아기가 뱃속에서 먹는 피도 여러 말을 먹는답니다. 나와서 먹는 젖은 흰 피 입니다.
나폴레옹이 1812년 9월 14일에 러시아를 침공해서 모스크바를 함락시켰습니다. 파죽지세로 가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싸우지 않고 계속해서 후퇴를 했습니다. 지금은 9월이지만 앞으로 몇 개월만 있으면 그들이 맥을 못 추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후퇴하면서 마을마다 식량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먹을 것이라고는 다 없애 버립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 군대가 따라가면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11월 쯤 되니까 눈이 오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거의 50만 명 정도의 나폴레옹 군대가 아사(餓死)하거나 동사(凍死)합니다.
나폴레옹 군대가 어느 마을에 가니까 그 마을에는 사람이 좀 있습니다. 그런데 한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젖을 먹일 정도면 이 마을에는 먹을 것이 좀 있겠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총을 들이 대면서 먹을 것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전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다그쳐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뭐 이런 것이 있느냐면서 총 개머리판으로 어머니를 밀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젖을 먹고 있던 아기도 같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기가 먹고 있던 것은 젖이 아니었습니다. 아기는 젖 달라고 보채는데 어머니는 먹지 못해서 젖이 안 나옵니다. 어머니는 젖을 칼로 찢어서 피를 먹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자기의 피를 먹이면서까지 자식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는 이와 같은 부모의 사랑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순종하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양주동 씨가 쓴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 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 하리요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어제도 국민일보에 보니까 강남경찰서 손창환 씨가 어머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한 장을 소개했더라고요. 새벽 6시에 출근준비를 하다가 보니까 문틈에 작은 메모지가 있어서 펴 보았더니 어머니의 편지였습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늦게 귀가하는 아들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서 어머니가 철자도 다 틀리고 보니까 무슨 날인지도 모르겠는데 옆에 기자가 해석을 해 놓아서 알만한 글자들이었습니다.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편지였습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살고 있는 88세 된 어머니가 자식을 위한 걱정의 편지였습니다. 그 어머니만 그렇게 걱정하겠습니까? 이 땅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은 다 자기 자식들의 건강과 잘됨을 위해서 염려하는 어머니들입니다.

‘아들, 내 말 좀 들어보소.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일세. 이 세상은 좋은 것도 많이 있지만 이름모를 병도 너무 많아. 내 몸을 내가 조심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젊은 나이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네. 아들도 50을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이네. 요새 사람들은 좋다는 것은 다 먹고 좋다는 운동도 다 하네. 아들은 물론 시간도 없지만 제발 몸 관리 좀 하게. 시간 나는 대로 병원에 가서 혈압도 재보고 검서도 가끔 해서 제발 내 몸을 내가 챙기고 관리도 좀 하라는 말일세. 어미의 간절한 부탁이네.’
이것이 아들에게 보내는 88세 된 어머니의 편지였습니다. 이 세상에 어머니의 이런 사랑보다도 더 귀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에 자녀들은 마땅히 순종하고 공경해야 됩니다. 인간의 죄 중에 가장 무섭고 악한 죄는 사람에 대한 배신입니다.
가장 고귀한 사랑을 받고 배신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것입니다. 미움 받고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 미워하고 그 고귀한 사랑을 받고도 배신한다면, 부모의 사랑에 배신한다면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도 무조건 쳐 죽이라>. 신명기 11장에는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징계를 듣지 아니하는 자가 있거든 공회에 끌고 가서 모든 사람들이 다 돌 하나 씩 들고 그를 쳐 죽여서 돌무덤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사랑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30장 17절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힐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너희가 그런 사람을 안 죽이면 내가 그들을 죽여서 저 들판에서 죽게 해서 까마귀와 독수리 새끼에게 먹이가 되게 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그것을 하지 아니하면 그가 하나님인들 바로 섬기겠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보면 <말세에는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얼마나 신문지상에 부모를 거역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점점 더 핵가족화 되어 갑니다. 살기가 나아지면서 부모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도 물론 부모에 대한 불효가 있었지마는 점점 불효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가정의 달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지금까지도 효도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부터 좀 더 효도하면서 살아가리라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실천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명심보감에 팔반가(八反歌)라는 부모와 자식에 대한 애정을 비교하여서 지은 노래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 부모는 열 자녀를 아무 부담 없이 키우는데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일들이 있으니 자녀와 부모를 대하는 마음이 어찌 그리 다른가’해서 여덟 가지를 대조시키는 노래인데 그것을 기초로 하여서 권효가(勸孝歌)라는 노래가 지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효도를 권하는 노래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이내말씀 들어보소 하나님께 영혼받고 부정모혈 육신되어
천금일신 귀한몸이 이세상에 태어나서 금지옥엽 사랑받아 자란것이 아니런가
교육받고 수양받아 입신양명 하는것과 남혼여취 결혼살이 가정살이 하는가며
아름다운 이세상에 한평생을 누리는 것 부모님의 크신공덕 아니고야 있을손가
부모님의 그은혜는 하늘보다 높건마는 청년남여 많은중에 효자효부 귀할세라
시집가는 새아씨는 시부모를 싫어하고 장가드는 아들에는 살림나기 일심이라
제자식이 꾸짖으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책망하면 듣기싫어 성을내며
시끄러운 자식소리 듣기좋아 즐기면서 부모님은 두말안해 잔소리라 빈정대네
자식들의 오줌똥은 손으로써 주무르며 부모님의 가래침은 비위상해 밥못먹고
과자봉지 쥐고와서 자식손에 쥐어주고 부모위해 고기한근 사올줄도 모른다네
강아지가 아프며는 가축병원 찾아가도 늙은부모 병들며는 예사롭게 생각하네
열자식을 기른부모 하나같이 길렀건만 열자식이 한부모는 어이하여 못섬기나
그대몸이 귀하거든 부모은공 생각하고 서방님이 사랑커든 시부모를 중히하소
죽은후에 후회말고 살아생전 효도하여 하나님께 복을받고 부모님께 낙이되세
안먹어도 상관없는 술담배는 빨고먹고 한자리에 앉으며는 수많은돈 쓰면서도
부모위해 쓰는돈은 옴리암리 따져보니 늙은부모 기쓰시게 무슨대접 할수있나
반만년의 오랜역사 깊이상고 하여보면 명문귀족 번영함은 효자후손 분명하고
불효자식 끝이없이 무궁무진 고생이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지성으로 효도하세

왜 부모에게 순종하며 공경하라고 했습니까? 옳은 일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깊이 깨닫고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하여서 다시 한번 효도를 실천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꼭 해야 할 일입니다.

2. 효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

그럼에도 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일이기에 효도했다고 표창하거나 칭찬해야 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일을 하지 아니까 하나님은 효도하면 축복해 주시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땅에서 잘 된다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신명기 28장에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네 떡반죽 그릇과 소생과 모든 생업에 다 축복해 주마>고 약속하신 축복이요, 장수하는 축복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 세대가, 자녀가 계속해서 대를 이어가면서 가문을 이어가는 축복을 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효도하여서 받는 축복과 효도하지 않아서 저주받는 예들이 성경 속에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효도하지 않아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마는 함같은 사람 보세요.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를 과하게 마시고 술에 취했습니다. 술먹고 난 다음에 술주정하는 형태가 여러 가지인데 노아는 옷을 벗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옷을 훌렁 벗고 드러누워서 추태를 부립니다. 함이 그 모습을 먼저 보았습니다.
함이 나가서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취해서 옷을 발가벗고 있다고 와서 한번 보라고 사람들에게 그 추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늦게 들었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옷을 뒷걸음으로 들고 가서 아버지에게 덮어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술에서 깨었습니다. 보니까 그 모양입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에게는 얼마나 축복을 하는지 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야벳은 창대하게 될 것인데 앞으로 셈이 복을 받아서 셈의 장막에 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구라파가 야벳의 후손입니다. 한 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환태평양 시대가 되어서 셈의 장막, 아시아에 살고 있는 셈의 후손의 집에 깃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가 되고 있습니다. 막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은 어떻게 저주했습니까? 종의 종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만 되어도 대단한 저주인데 종의 종이 되는 삶을 살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인권이 이야기 되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나 흑인들의 인권이 무시되고 있습니까? 백 년, 2백 년 전에는 완전히 짐승 취급을 받지 않았습니까? 효도하지 않다가 저주를 받은 후손들이 역사상에서 그런 대접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압살롬 보세요. 다윗이 얼마나 사랑한 자식이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아끼면서 손에 놓지 아니하고 키웠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처가 하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몸을 한번 보세요. 찍혀서 상처 나고, 넘어져서 상처 나고, 벌레 물려 긁어서 상처 나고, 갖가지 상처가 많이 있을 거예요.
압살롬은 얼마나 귀하게 키웠던지 상처하나 없는 자식으로 사랑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장성하여 아버지를 몰아내어 죽이고 자기가 임금이 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군대를 모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있는 아버지를 잡아 죽이고 임금 되기 위해서 들어오니까 아버지가 어떻게 자식과 싸우겠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머리를 풀고 신발도 벗고 울면서 예루살렘 성을 떠납니다.
그런데 미처 데려가지 못했던 후궁들이 성에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들어 와서 왕궁을 차지하고 내가 왕이라고 하며 아버지의 후궁들을 다 겁탈하지 않습니까? 그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아버지에게 그렇게 불효하더니 어떻게 죽었습니까?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요압이 창 셋을 가지고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주변에 있던 군사들이 칼로 난도질을 해서 죽였습니다. 불효자는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효자들 보세요. 이삭 보세요. 이삭을 아버지가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 상황을 보면 그 당시 이삭의 나이가 27살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하는데 27살이나 되는 아들을 아버지가 강제로 손을 묶어서 장작더미 위에다 올려놓고 칼로 찌르려고 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약속의 자식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주셨는데 너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믿고 너는 번제로 드려져야 되겠다.”
아버지가 다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아버지의 뜻이면 그렇게 하십시오.”하고 “손 묶으십시오.”하고 묶이고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겠습니다.”하고 스스로 올라가서 “아버지 찌르십시오.”하고 아버지의 칼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기까지 순종했던 이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얼마나 축복하십니까?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험악한 생을 보냈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도 얼마나 험악한 생을 삽니까? 그렇지만 이삭만은 얼마나 평탄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파도 물이 안 나오는데 이삭은 파기만 하면 우물이 나옵니다. 그 당시 우물은 생명 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거부로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축복을 효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요셉은 또 얼마나 효자입니까? 아버지가 형들의 안부를 물어 오라고 했습니다. 헤브론으로 보냈습니다. 헤브론에 가니까 형들이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형들이 없더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갈 텐데 다시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겜에 가도 형들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우리 형들 못 보았느냐고 물으니 도단에 있는 것 같다고 하자 또 도단으로 갔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갔다가 형들에게 팔림을 당해서 죽을 고생을 하지 않습니까? 그 순종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3. 효도의 방법

장수하고 싶습니까? 잘 되고 싶습니까? 효도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구체적으로 효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몇 가지로 명령하고 있지요?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에 “예” 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믿지 아니하는 부모가 교회가지 말라, 예수 믿지 말라고 할 때 잘 설득하고 잘 이야기해서 신앙을 지켜야겠지만 다른 일반적인 말씀에는 다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님 말씀에 아니라고 뻗대지 않고 순종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 나가야 겠습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가치를 두라는 것입니다. 높이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부모만큼 높임 받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릴 때는 부모를 최고로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데 중학생 쯤 되면 부모님도 모르는 게 있구나하고, 고등학생 쯤 되면 무식하구나, 대학생 쯤되면 세대 차이나고 아무 것도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 안 듣고 뻗대고 하다가 40, 50, 60이 되면 아, 그때 부모님 말씀이 옳았구나하고 깨닫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가장 존경받아야 할 분은 바로 부모님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사람이 내 부모보다 더 존경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그런 사랑과 희생을 베풀던가요? 어떤 사람은 남의 부모는 칭찬하고 자기 부모는 멸시하는데 가장 못난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존경해야 할 분이 내 부모님입니다. 내가 내 부모 존경하지 아니하면 누가 내 부모를 존경하겠습니까? 오늘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높임 받아야 할 분은 내 부모님이라고 생각하고 말 한마디에도 가장 존경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부모님이 예수님을 모른다면 부모님이 구원받으시도록 금식을 해서든지,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해서든지 부모님이 예수 믿으시도록 해서 신앙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해서 천국까지 같이 가시도록 하는 것이 자식으로서는 최고의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온갖 효도를 해 보세요. 이 땅에서만 끝나는 효도 아닙니까? 잠언 22장 25절에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고 네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어떨 때 기뻐합니까? 자기가 잘 될 때보다 자식이 잘 될 때 더 기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말씀대로 믿음대로 열심히 성실히 살아서 내가 남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때 부모님은 더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88세 되신 어머니의 편지처럼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고 건강을 위해서 술도 덜 먹고 바깥에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도 빨리 들어오는 구체적인 실천을 해서 건강관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성실히 일해서 남에게 존경받고 칭찬받고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될 때에 그것이 부모님에게 기쁨을 주는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신세게 이마트에서 3,702명의 부모들에게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이번 어버이날에 무슨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느냐고 했더니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습니다. 여러분들 부모님 같으면 어떤 대답을 하셨겠습니까? 무슨 선물을 받고 싶어 하시겠어요?
돈, 현금입니다. 현찰 받았으면 좋겠다는 대답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 다음에 상품권, 그 다음에 건강식품, 그 다음에 여행상품, 그 다음에 옷, 그 다음에 화장품, 이런 등등의 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서 실제적으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잘 연구해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며 효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효도는 마땅한 일인데 나는 정말 효도를 하고 있는가, 좀 더 할 수 없는가,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효도테스트라는 글이 작년에 메리놀 병원에 가니까 걸려 있더라고요. 제가 써 왔습니다. 모두 열 가지인데 이 열 가지 중에서 여러분들은 몇 가지나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지 들어 보세요.

1. 어머님 생신을 알고 있다. 그리고 기억하고 대접한다.
2. 어머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3. 아버지의 취미생활을 알고 있다.
4.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라고 종종 말한다.
5. 하루 한 통화는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를 한다.
6. 부모님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종종 한다.
7. 부모님을 업어드린 적이 있다.
8. 부모님을 업는 순간에 뭔가 느껴졌다.
9. 맛있는 음식이나 멋진 볼거리를 보면 부모님 생각이 난다.
10. 나는 솔직히 말해서 효자, 효녀인 것 같다.

여러분은 몇 가지나 해당되는 것 같습니까? 그런데 그 밑에 재미있는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역시 효자야 라는 사람은 대부분 효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고 해 놨더라고요. 그리고 아홉 개 이상 예라고 하는 사람은 효자, 효녀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네 개나 여덟 개 사이에 예라고 했다면 좀 더 노력해야 한다. 세 개 미만은 지금 빨리 부모님에게 달려가서 정말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개과천선하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지난주일 숙제 드렸습니다. 집에 있는 식구들과 허깅하면서, 안아주면서 기도해주고 축복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라고 했는데 해 보셨습니까? 지난주일 뿐만 아니고 계속해야 될 일입니다. 계속하세요.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서 또 한 가지 숙제를 드립니다. 이 한 주간 동안에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실 선물 한 가지를 꼭 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버이 말씀에 순종하고 가장 가치 있는 분들로 공경하고 부모님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리문답에 보면 부모에게 대한 효도를 이야기하면서 부모는 꼭 아버지, 어머니뿐만 아니라 스승이나 지도자도 부모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면 부모와 같은 분에게 효도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니 하나님 아버지에게 효성스러운 귀한 자녀들 되어서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윤성진 목사)

부모님 공경에 푹 빠져 봅시다 (엡 6:1-3)

작가 조연경씨가 쓴 <효도별곡> 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두 분의 노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수요일 오후 3시가 되면 두 분이 함께 만두집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들어선다든가, 식탁에 마주앉아 서로 바라보는 표정 등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할아버지가 먼저 오는 편이었지만, 비나 눈이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만두를 시킨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드실 생각도 않고, 마치 이별을 앞둔 연인들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상대방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라, 아마 옛날에 서로 사랑하던 사이로서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첫 사랑?의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1주일에 한번씩 만나 젊은 시절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 날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따라 할머니는 자주 눈물을 닦으며 어깨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 날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안고 가는 할아버지. 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도, 또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보였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첫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 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끼리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 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오후3시만 되면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의 가슴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물론 연로한 부모님을 생이별시켰던 자녀들의 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자녀들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살겠다고 결혼식에서 서약하신 노부모를 생이별시켜, 가슴에 한을 품게 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변에 이런 아픔과 이런 외로움 속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보면 자기 자식에게는 아낌없이 투자하면서도 자기의 부모님에게는 인색한 자식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요즘 들어 부모를 거역하고 부모를 버리고 이민을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아픔과 현실속에 우리는 오늘 어버이 날을 맞이했고 또 어버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그리고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할까요?

첫째로,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1절)
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얼마나 강력한 표현입니까? 여기서 옳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맞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맞다는 뜻입니다.’ ‘원리에 맞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기본원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갑니다. 저는 소방관이 불을 끄기 위해서 건물 위로 물을 뿜어대는 것을 본적은 있지만 아직까지 물이 밑에서부터 위로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철학과 윤리에서 효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너무나 마땅한 일이고 옳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도 그렇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어긴다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2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란 십계명중에 5계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제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요,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인간에게 말씀하신 계명 중에 첫 번째의 계명일 뿐만 아니라 오직 이 계명만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보되어 있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도덕이고 윤리이고 예의범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이것이 최고의 도덕이고 윤리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하여 엄하게 다루시고 심판하십니다.
출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출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신21:18절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18절)
신21:21절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21절)
우리 하나님은 부모의 말씀을 듣고 순종치 않는 자들을 완악하고 패역한 자들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를 다른 어떤 죄보다 더 중하게 다루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어떻게 효도해야 합니까?

첫째로, 주 안에서 순종함으로 효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1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떻게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합니까? 주 안에서 순종함으로 효도해야 합니다. 효도는 곧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존경하고 잘 아는 조지 워싱턴대통령을 아시지요. 그의 어릴 때 꿈은 뱃 사람이 되고 마침내 선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장이 될려면 먼저 뱃사공이 되어야 하겠기에 그는 결단을 하고 짐을 꾸려 가지고 배를 타러 나가려고 했습니다.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나 뵈었는데 뱃사공이 되겠다는 아들이 마음에 놓이지 않아 아들의 손을 잡고 계속 울기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워싱턴은 그 때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어머니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내 꿈을 좇을 수는 없다.' 나의 꿈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래서 그는 자기의 꿈을 포기하고 다시 짐을 내려 놓고 어머니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기에 마침내 그는 미국에 유명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자녀된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통하여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부모님을 통하여 양육받게 하셨고 부모님을 통하여 한 없는 사랑을 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 순종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나와 동일한 신앙을 갖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부모님이 가진 것이 없고 나 보다 더 배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사단의 도구가 되어 자식된 우리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다든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부정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까지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시어머니들 가운데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네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너를 우리 집의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머니의 말씀대로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하겠습니까?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를 해야 하겠습니까? 전략적 후퇴를 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것은 다 순종해도 우상숭배에 대하여서 만큼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고 진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서 만큼은 절대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효도는 순종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로, 조건 없이 공경해야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2절)
부모를 순종하는 일에는 ‘주 안에서’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공경해야 합니다. 효도가 무엇입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1.부모님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할 때 공경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티마’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말의 뜻은 ‘높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낮춰 사랑하지 말고 수평적으로 사랑하지 말고 ‘높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낮춰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부모님을 불쌍히 생각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병에 걸렸어도 치매에 걸렸어도 부모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수평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높이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높이 사랑한다는 것이 뭘까요?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이 곧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은 늘 궁핍했습니다. 그 바람에 에이브라함 링컨은 어릴 때부터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일평생 동안 받았던 학교교육은 다 합쳐도 일년이 채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20세가 되기까지 도끼자루를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힘든 노동을 해야 되었습니다.

그런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제 링컨이 상원의원들 앞에서 취임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원의원들은 대부분 학벌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가문이 좋은 귀족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런 상원의원들이 배우지도 못했고 또 비천한 신분출신의 링컨을 대통령으로 섬겨야 하니까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링컨이 막 입을 열어서 취임연설을 하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조금은 거만한 듯이 보이는 상원의원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링컨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더니 자기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들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링컨에게 보이면서 이렇게 빈정대었습니다.
"이 구두를 누가 만든지 아시오? 바로 당신 아버지가 만든 것이오. 당신이 어쩌다 운 좋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당신 아버지가 신발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소."
그 소리를 듣고 여기저기서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에이브라함 링컨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눈물은 아버지에 대한 수치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의원님, 내가 상원에서 첫 연설을 하기 직전에 나에게 아버지를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님 덕분에 제가 잠시 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졌습니다. 정말 우리 아버님은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아마도 이 가운데는 우리 아버님이 만드신 신발을 신고 계신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혹시 신고 계신 신발이 불편하시거든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물론 돌아가신 아버님의 기술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그래도 아버님의 어깨너머로 저도 기본적인 기술은 다 배웠습니다. 아버님이 만드신 신발에 대해서는 아들인 제가 책임지고 최선을 다해서 고쳐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졌습니다. 더 이상 링컨 대통령을 깔보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진정으로 공경하는 그 마음에 모든 사람들이 깊은 감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아버지가 아버지다와야 공경을 하고 어머니가 어머니다와야 공경을 하고 시어머니가 시어머니다와야 공경을 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면 아내가 아내다와야 사랑을 할 것이 아니냐는 반문과도 같고 아내더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면 남편이 남편 다와야 복종할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과도 같은 원리입니다. 다 이렇게 주장을 하고 생활하면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이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가정은 무너지고 맙니다.
물론 부모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 부모는 하나님 앞에서 그부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무책임하다고 하는 것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한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모는 부모대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무리 무책임해도 그 무책임이 자녀의 무책임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와만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년 TV 홈쇼핑에 이색 상품이 나타났습니다. 이름하여 황금수의입니다. 안동포는 그 자체만도 수의가 수십만 원을 호가 하는데 거기에 99% 황금을 입힌 수의를 판다는 것입니다. 수천만 원짜리는 보통이고 안동의 한 삼베 회사는 1억 원짜리 수의를 상품으로 내 놓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다음 그 시신에 황금으로 된 수의를 입히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란 살아계실 때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답지 않을지라도 존경하는 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의 인격, 성품, 직위, 학식, 재산, 행위들을 따지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이 있다면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합니다.

2. 부모님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이 나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아버지 야곱을 비릇해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초대를 받아 애굽으로 내려와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애굽 사람들은 농경문화를 가진 민족이었기 때문에 목축을 하는 사람들을 천민으로 생각했습니다. 창46:3절에 보면 “애굽 사람들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요셉의 아버지의 직업은 양과 소를 키우는 목축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을 자랑스럽게 애굽의 왕에게 소개합니다. 아버지와 형들의 직업도 당당하게 소개합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창47:3절)
생각해 보십시오. 총리 요셉의 아버지가 천민들의 직업인 양과 소를 키우는 목축이라면 애굽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어쩌면 총리로서의 권위에도 금이 가는 치명적인 사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자기의 출신과 부모와 형들의 직업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자랑합니다. 이것이 요셉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요, 복 받은 비결입니다.

여러분, 누가 효자입니까? 자기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식이 효자입니다. 부모가 잘났던 못났던, 배웠던 못 배웠던, 세련되던 촌스럽던, 부모는 나를 키우신 부모이기에 자랑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한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가장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분이 부모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못 배웠다고, 못 났다고, 촌스럽다고, 지저분하다고 부모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잔소리한다고 부모와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또 부모가 짐이 되어 자신들이 행복할 수 없다고 부모를 귀찮게 여기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 체면 때문에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 절대 축복 받지 못합니다.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식을 하나님께서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게 하십니다. 요셉이 이렇게 큰 영예와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애굽이 싫어하는 직업을 가진 아비 야곱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모공경의 축복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3절)
여기서 잘 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타브`인데 그 뜻은 형통한다, 막힘이 없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잘됨과 장수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잘되고 장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록펠러입니다. 물론 그의 인생에 오점도 있었지만 그는 세계 제일의 갑부로 98세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늘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첫째, “너는 수입의 십일조를 반드시 하나님께 바쳐라."
둘째, “너는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언제나 제일 앞자리에 앉도록 해라."
셋째, “너는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을 때 목사님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제나 들어라."
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했던 록펠러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98세까지 장수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또 성경을 보면 부모를 공경함으로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발가벗고 누워 주무실 때에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줌으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어냈던 함의 후손은 저주를 받았지 않습니까?

또 이방여인으로서 젊은 날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던 어머니를 공경하여 보아스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게 되는 축복을 받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잘됨과 장수의 축복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푹 빠져 봅시다. 다른 일에 푹 빠지 말고 부모님을 존경하고 자랑하는 일에 푹 빠져 봅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처럼 가장 확실한 투자가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효도하십시오. 기회를 잃기 전에 효도해야 합니다.
옛 글에 “나무가 아무리 가만히 서 있고 싶어도 바람이 가만히 나두지 않고 흔들어 주며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오래 봉양하고 싶어도 부모가 기다려 주지를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효도 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아버님도 지난 4월 24일 주일 저녁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온 자녀들과 함께 하는 중국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신발도 준비해 놓으시고 모자도 사 놓으시고 그렇게 마음 설레며 여행을 준비하셨는데 그 여행 일주일 전에 쓰러지셨습니다. 서울에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 서울 병원으로 올라오시면서까지 운동화를 챙기셔서 올라 오셨는데 신어 보지도 못하고 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아버님이 운명하시기 하루 전 중 환자실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귓전에 목매어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가 있었기에 내가 오늘 내가 여기 있게 되었고 아버지의 기도대로 이렇게 오륜교회가 지어졌노라”고 “평생을 위하여 기도해 주신 아버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며 목매어 외쳤습니다.
이제 저는 부모님이 모두 떠나셨기에 이제는 부를 수도 없고 여행을 시켜 드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효도는 살아계실 때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 전화 한번 더 하시고 용돈도 좀 드리시고 부모님에게 순종하시고 부모님을 인정해 드리시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편안하게 해 드리십시오. 그리고 오늘 어머니를 부를 수 있고 아버지를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이날이 되면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신 그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기도해 주신 그 부모님의 은공을 생각하며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습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부모, 왜, 어떻게 섬길 것인가? (엡 6:1~3)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가정의 달 5월 오늘은 8일입니다. 이날은 어버이날인 동시에 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날 입니다. 지난주일 어린이주일로 지키면서 “자녀,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어버이 주일은 부모, “어떻게” 뿐만 아니라 “왜” 섬길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지만 자녀는 부모를 왜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하는 것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현실인 것 같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왜 순종해야 합니까? 본문말씀 속에서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자녀로서 부모를 잘 섬겨야 하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고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는 길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은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부모가 되는 기회를 가지지 못할지 모르지만 아무도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의 도리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세상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논리에 근거해서 설득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하고 바른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맺는 인간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존중되는 윤리입니다.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했고 기독교 윤리 밖에서도 준수됩니다.

부모가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어쩌면 윤리 이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이 본능적인 사랑을 받은 자녀라면 누구나 부모를 순종해야 옳습니다. 이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나머지 인간관계가 바로 될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없다든지 꼭 윗사람을 공경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모든 도덕의 근간이 되는 부모 공경의 의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배워야 학교에서 선생님을 존경할 수 있고 사회에서 윗사람을 존경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 순종은 모든 사회도덕과 사회 질서의 기본입니다.

둘째로 부모 순종은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네가 주님 안에 있다면”,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네 삶이 예수 믿고 변했다면” 부모를 순종하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흔히 에베소서와 쌍둥이 서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골로새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니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기 때문에 신앙인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려서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다 자라서 성인이 되어도 부모를 공경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는 계명은 “첫 계명” 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도리를 보아도 그렇고 신앙의 이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도 지금 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될 열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서 네 개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고 여섯 가지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지켜야할 계명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첫 번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납득이나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믿고 따라야 할 첫 번째 도리가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윤리가 한국 사회에서 잘 못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효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효도 하는 방식이 틀릴 뿐입니다. 효도를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은 부모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부모를 예수를 믿는 사람만큼 잘 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고 나면 우리가 섬겨야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을 때 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 부모를 잘 섬겨야 복 받을 거라는 이기적인 논리가 아닙니다.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마지막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복을 누리는 지름길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입니다. 모든 자녀 된 이들을 향해서 축복을 약속하면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생들은 그게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는데도 그렇지요? 자기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데도 하나님은 하면 상급을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가 워낙 잘 못 하기 때문에 좀 잘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축복의 첫째는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오래 사는 것만이 복은 아닙니다. 정말로 어떤 분들은 오래 살아서 그것도 자녀들이 부모를 대우하지 않으면 오래 사는 것이 저주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제 TV를 보니까 세상에 냉장고를 철사로 쇠줄로 감아 놓았더라고요. 부모가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집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복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정말 못 죽어서 산다고 하지 않겠어요? 보통 집은 안에서 문을 잠그는데 밖에서 문을 잠그도록 만들어 놓은 집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가둬두는 것입니다.

축복은 잘 되고 땅에서부터 잘 될 때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형통의 축복을 성경은 먼저 약속하고 있습니다. 장수의 축복 앞서서 형통의 축복이 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형통의 축복을 약속하는데 여기 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들으면 형통한다는 겁니다. 잘 들어야 됩니다. 눈을 감으면 귀도 감깁니다. 그렇죠? 잘 들어야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형통의 축복은 여호수아 1장 8절에도 나옵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가장 고전적인 약속으로 시편 1편3절에 나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면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부모에 대한 순종이 주는 또 하나의 뚜렷하고 특징적인 복은 장수입니다. 장수의 축복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계명을 준수하는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웰빙” “운동” 그것이 장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부모 공경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이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주고 저 세상에서는 영생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잘 살기를 원치 않는 사람 있습니까? 귀를 닫으십시오. 건강한 가운데 오래 사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안 들어도 됩니다. 모두 다 잘 되기를 바라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이중 약속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더블 보너스가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참 사람들은 하나님 말을 잘 안 들어요. 안 믿어요. 그래가지고 부모를 잘 섬겨야 오래 산다고 그러는데 괜히 생명 보험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보장하는 보험이 아니라니까요. 나는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이 받는 돈이더라고요. 생명보험은요. 저는 아직 가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잘 순종하면 오래 살리라. 그건 내가 받는 축복입니다.

내가 오래 살아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택을 줄 수 있는 것이 진짜 해택을 주는 거지 내가 일찍 죽어서 보험금타서 살면 모르긴 해도 집사람이 지금보다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아요. 잘 되는 것은 나가다가 로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로또사면 잘못하면 심장마비가 걸리고 그렇지 않아도 관계가 끊어집니다. 갑자기 몇 억이 생기면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잘 섬기면 잘 된다고 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말씀을 잘 안 듣지요?

이렇게 잘 되는 축복하고 오래 사는 축복까지 원샷에 두 가지 축복까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데 부모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본문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두 단어가 강조되지요. 순종과 공경입니다.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지요? 만약 순종만 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그건 외식이고 위선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부모를 제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로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순종을 하지 않으면 공경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공경이란 단어가 “아주 무겁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명사로 쓸 때는 히브리어에서는 내장이나 간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몸속에 있는 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은 아시지요? 그래서 간암이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귀중한 간처럼 부모를 가장 중요한 분으로서 모시고 존중히 여긴다. 는 그것이 공경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부모를 잘 섬긴다는 것이 달리 말해서 부모순종을 잘 한다는 것이고 공경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잘 순종하고 잘 공경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째로 부모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를 부모로 알아 모셔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순종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부모, 존귀한 분 귀한분이라는 것, 나의 삶에 축복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어머니가 그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날마다 위해서 기도하고 복 빌어주면 그는 복을 받는 겁니다. 축복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부모 마음을 상하게 하면 절대 잘 되지 않습니다. 오래 살 수 없습니다.

부모가 훌륭한 분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아니 부모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돈을 펑펑 대 주어서가 아닙니다. 부모는 부모라는 이유하나로 존경해야합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똑똑해져서 우리 엄마가 정말로 존경할 만한 분인가 아닌가부터 따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질 수 있는 똑똑한 아이를 낳은 사람이 바로 여러분 부모입니다. 내가 존경을 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이것이 여러분이 고민하라고 맡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해야 될 것이 공경하는 것이 여러분의 도리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지 부모가 부모노릇을 했니 어쨌니? 그렇게 하는 것은 그건 배은망덕한 자식들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가 없었더라면 여러분이 따질 만큼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를 잘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위치를 인정하고 그 말씀을 잘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잘 듣는 그것이 순종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내가 동의 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는 우선 접어두고 일단 잘 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들어보면 어떤 때는 우리가 얼핏 들어보면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런 말조차도 그 말씀을 하는 배후에는 자식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려야 제대로 된 자녀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8년 외국생활을 하고 들어와서 아침마다 할머니가 따뜻한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으라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엄청 받아서 한국말도 잘 안되는데 나를 붙들고 할머니를 설득을 해 달래요. “ 빵도 영양가가 있다는 것을 ”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했지요. 할머니가 손자들을 괴롭히려고 그런 말을 하겠느냐 손자들이 너무 귀하고 오랜만에 만나서 좋으니까 제일 좋은 것 주고 싶어서, 할머니가 아는 범위에서는 따뜻한 미역국에 밥 말아 먹는 거니까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이해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할머니는 바뀌지 않는다. 할머니는 하나님과 닮아서 불변하시다. 그러니 네가 이해하고 네가 할머니가 날 사랑해서 하는 말이거니 그렇게 생각하면 짜증낼 일이 없잖니, 할머니가 날 사랑하셔서 오늘 아침에도 어제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우리 부모가 어떤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지 몰라요. 그래도 그 말씀의 배후에는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그것이 제대로 된 자녀입니다. 모든 일을 합리적인 말씀을 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보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아버지에게는 하나님께서 왜 지혜를 주시지 않았는고? 탄식을 하더라고요. 그 아들도 지금 나이가 들어서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어떤 분도 까다로운 분일수도 있어요. 그래도 순종해야 됩니다.

베드로전서를 보십시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 선하고 관용하는 자, 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자. 어떻게 직장에서 까다로운 상사만 가리키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집안에서 좀 모시기 힘든 부모님일수도 있고 또 좀 힘든 시부모님일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로 섬기는 방법은 부모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겁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될 때는 우리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사도들이 전도하다가 잡혔는데 관원이 위협을 합니다. 더 이상 전도를 못하도록 예수 이름으로 입도 뻥긋하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어떻게 대답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합니다.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가장근본은 하나님 말씀이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것 생각하지 않으므로 나라가 지금 노인 천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할 때 그대로 따라갑니까? 정부가 무슨 말을 해도 우리가 어느 것을 해야 하는지 성경에 따라서 성경이 뭘 가르치는지를 귀 담아 듣지 않으니까 나라 전체가 지금 어려워 지지 않습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과 비교해서 하나님 말씀과 어긋나면 부모나 정부나 할 것 없이 NO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면서 순종해야합니다.

때로는 자녀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부모들도 있을지 몰라요. 나쁜 일을 심지어는 도적질을 하는 것을 시킬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말 하는 배후에도 부모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실 부당한 지시를 하고 말 하고 간섭을 하면 따른다는 것 존경하는 것이 쉽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부모입니다. 참된 순종은 언제나 공경의 자세를 동반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부모님의 필요를 채워드리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부모가 뭘 필요를 하는 건지 그것을 채워 주는 겁니다. 당대에 예수님 당시 신앙이 좋다고 늘 폼을 잡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지요? 이사람 들은 부모 몫으로 드려야 할 재산을 하나님 앞에 다 위탁 시켜버리고 다 하나님께 드렸으니까 나는 부모 섬김 하는 것 이제는 안 해도 된다. 고르반 드림이 되었다. 부모님 몫을 내가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니까 높으신 하나님께 드렸으니까 덜 높으신 부모님을 안 섬겨도 된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책망을 했습니까? 너희는 너희관습을 쫓아서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다고 야단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부모님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생활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은 어떨까요? 십일조를 매월 잘 내면서 부모님 용돈을 드리지 않는다면 현대판 고르반은 아닐까요? 그러면 십일조 내는 대신에 그것으로 용돈을 내라는 말씀입니까? 또 그렇게 듣는 사람도 있어요. 알아서 하세요. 박하와 해양의 십일조, 의와 신 이것도 저것도 소홀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경제적 필요에 대해서 자녀로서 책임을 다할 것을 성경은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오죽하면 불신자 보다 더 악한자라고 그렇게 까지 말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설교를 듣고 나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못 들은 사람도 있고 이런 설교를 5월 달마다 벌써 10년 20년째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좀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나 생활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양쪽 부모님 다 제대로 챙기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없으면 전화라도 한 통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께 한 달에 전화 한통 한 것 때문에 파산되는 사람 있으면 제가 우리 집으로 모셔 살게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찾아뵙는 일을 시도해 볼만합니다. 분기에 한 번 정도는 초청해서 우리 집에 며칠 와서 묵고 가십시오. 그렇게 이야기 해 보면 어떨까요? 특별히 좋은 교회 울산교회 교인 같으면 멀리 계신 부모님들이 있으면 5월은 초대하는 달로 삼으세요. 5월 며칠부터 축제를 하지요? 멀리 계신 부모님들께서 올해는 왜 초청을 하지 않지? 라고 생각하도록 5월이면 멀리계신 부모님을 초청해 오는 달로 삼으십시오.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일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시적이지요? 살아계실 동안만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살아계셔서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려 드릴 수 있고 여러분이 찾아뵈올 수 있다고 하면 설교 들은 사람답게 한번 결심한번 합시다. 바뀌어져야 합니다. 좋은 교회 울산교회, 그 교회 교인들은 부모 섬기는 것 참 잘한다고 이렇게 전국에 소문나기를 나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울산교회 교인만 되기만 하면 복을 받는데 알고 보니 부모를 잘 섬겨서 복 받고 건강하게 오래 잘 살더라. 이렇게 소문이 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좀 잘 하려고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까 내일 아침 식사는 대구까지 올라가서 장인하고 함께 혼자계신 장인과 식사라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 점심때는 어머니에게 가서 인사를 드려야겠다. 전화를 했더니 시골이 얼마나 좋은지 안 올라오시겠데요. “너네나 한번 왔다가라.” 우리는 모시러 가려고 했는데 그러나 저러나 내가 한번 무언가 바뀌어져야 되지 않겠어요? 10년 20년 설교를 들었는데 꼭 해 오던 데로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올해는 우리 한번 결심을 해야겠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건복지부와 KT가 함께 한 광고문구가 마음을 찔리는 게 있었어요. “부모님은 내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줄 아십니다.” 라는 제목의 글로서 처음 5분 통화는 공짜로 KT에서 감당하겠다고 전화를 하라. 그러더군요. 오죽하면 전화회사가 우리에게 그러겠습니까? 읽어 보니까 좀 생각되는 게 있어서 여러분에게 읽어 드릴게요.

대학시절 친구들과 술 마시며 어울릴 때도 공부하느라 바쁘다며 집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삼시 세끼 꼬박 챙겨 먹으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바쁘다며 정신없이 끊어버렸습니다.
첫아이 돌 고속버스로 올라오신 어머니를 바쁜 회사일 마무리하자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게 만들었습니다.
내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줄로 아시고 이제는 알아서 미리 챙기시는 부모님 시간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마음이 부족했던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향해서도 주께 하듯 해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하기 위한 테스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소년시절부터 청년시절에 이르기까지를 한마디로 순종했습니다. 열두 살 때 그는 당신이 예사 아이와 다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당신자신이 하나님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권위 아래서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가장 고통의 순간에도 어머님을 향한 공경의 마음을 잃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있는 것을 보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친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요19:26) 내 대신 당신을 섬길 아들입니다. 라고 요한을 소개했습니다.

물론 우리 번역이 상상력이 없이 번역을 해서 우리에게는 좀 걸립니다. “여자여” 엄마에게는 “여자여” 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번역을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쓸 수 있는 가장 극존칭 용어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유명한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사용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을 뿐만 아니라 그 고통스런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의 구체적인 필요를 위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요한을 보고 “보라 네 어머니라.” 지금부터 네 어머니로 섬기라고 말 했습니다.

요한은 그 시로부터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섬겼고 여러분이 터키에 성지순례를 가보면 에베소에 가보면 교회에 있는 한 숲속에 한 산 중턱에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습니다. 거기 갔을 때 저는 아주 뭉클한 감동이 있었어요. 단순히 어느 동네처럼 관객을 끌기 위해서 순례자를 모우기 위해서 붙여 논 이름이 아니라 거기에는 요한이 마리아를 섬겼던 집이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요한은 60세에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이주해서 90이 넘도록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사는 장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언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의 원형경기장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에 자리한 곳이 바로 성모 마리아의 집입니다. 자기 어머니의 노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심으로 어머니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 분을 주님이라고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제 우리는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 부모의 필요를 채워드리는지 돌아볼 차례입니다. 의식주의 필요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정서적인 필요도 채워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좋은 교회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미국의 어느 노인은 이런 광고를 신문에 내었답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분에게는 1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오죽 외로웠으면 그런 광고를 내겠습니까? 늙어가는 우리 부모님의 노후에 정서적인 필요를 채워드리는 일에 올 한해는 시간을 드립시오. 한 달에 한 통화 반드시 하겠다. 그렇게 결심해 보십시오. 내가 처음부터 매주일 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매일 하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한 달에 한번은 마음에 담긴 전화를 드린다고 그렇게 결심해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신앙을 갖지 못한 부모님이라면 하늘 아버지를 만나도록 하는 일에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가까이 계신 분을 전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소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적 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부모를 버려두고 우리만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주님으로 섬기다가 천국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하직하도록 해야 될 책임이 바로 자녀인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까?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신앙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고 이중의 축복이 따르는 계명입니다.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축복과 함께 약속과 함께 하나님이 순종하라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떻게 부모님을 섬겨야 하지요? 먼저 부모님을 마음에서부터 존경해야합니다. 여러분이 똑똑합니까? 부모님이 아니었으면 그 똑똑한 여러분은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을 귀담아 듣고 시키는 것을 하십시오. 그리고 부모님이 나이가 들면 부모님의 필요를 여러분이 이제는 채워드리고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하나님과 더 잘 사귈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 자식 된 도리입니다.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해 보십시오. 일 년 후에는 제가 설교 하지 않고 여러분이 간증하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일 년 동안 결심하고 부모를 순종했더니 얼마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말이 있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주대망 2005년은 좋은 교회 울산 교회 성도님들께 부모 섬김의 원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정근두 목사)

[어버이주일] 어버이의 마음 (잠 23:17-26)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자녀들을 낳으시고 기르시느라 애쓰신 모든 부모님들에게 우리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몇 해 전 신문에 기고되었던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아홉 살에 나는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내가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나는 초조하게 무려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서른일곱 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걸 액자로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습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에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되었다고 합니다.

쉰세 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 왔을 때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며 행복해했다고 합니다. 예순한 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멀찍이 서서 나이 든 후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고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저 자나 깨나 부모는 자식 생각을 하며 지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보내셨다. 하나님께는 등이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아기를 업어주셨고 가슴에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안아주셨으며, 하나님께는 젖줄이 없으시기에 어머니를 보내셔서 젖을 먹여 길러주셨고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로 돌보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 땅에서 계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진정으로 우리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은 어버이밖에 없습니다. 어버이의 용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는 어버이의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본문 17절과 18절 말씀에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어버이들은 자식에 대한 천륜의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려인의 풍속 중에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효의식이 희박한 민족에게서 행해졌던 것인데 나이 많고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부모를 깊은 산에 갖다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삶이 힘들어 젊은 사람들이라도 살아남기 위하여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한 방편이었던 걸로 압니다.

한 집에 고령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를 고려장하기 위해 어머니를 업고 산에 올라가는데 어머니가 자꾸 허리를 젖히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지곤 해서 아들이 제대로 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을 합니다. “어머니, 내 등에 딱 붙어있어야지 왜 몸을 들어서 나뭇가지를 던집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고려장하고 네가 집으로 돌아갈 때 혹시 길을 잃어버릴까 싶어서 길을 찾게 하려고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단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은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자기는 어머니를 고려장하려고 업고 가는데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집에 돌아갈 길을 잃을까 싶어서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를 고려장하지 않고 집으로 모셔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의 자식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버릴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 말씀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법이라고 부르는데 자연법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주신 양심의 법입니다. 부모에 대한 도리는 양심의 명령이요 부모는 하나님의 마음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의 눈물에서 하나님의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부모님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국내 교도소에 수감된 어떤 분이 수감생활에 대한 참회의 글을 썼습니다. 제목이 <어머니의 눈물> 입니다. “작년 겨울 첫 면회를 오신 어머니께서는 창 너머로 고개 숙인 채 땅만 내려다보고 있는 이 불효자식에게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어머니께서는 “춥지” 그 한 마디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셨습니다. 이 한 마디를 하시고 억지로 눈물을 참으시느라고 어머니의 눈가는 붉어지더니…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은 그냥 눈물이 아닌 피눈물이었습니다. “춥지” 겨우 그 한 마디 하시고 면회시간을 다 보내버리신 어머니는 성경책 한 권을 남기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 후 다시 면회가 없으신 어머니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을 무렵, 형이 면회를 왔을 때 형에게 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말하자 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야, 이 놈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니. 너 어머니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하고 말하더랍니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가 다그쳐 묻자 그의 형은 어머니가 며칠 전화를 안 받으셔서 찾아가보니 엄동설한 추위 속에서 자식의 죄가 당신의 죄 때문이라고 방에 불을 피우지 않고 같이 감옥생활을 해야 한다며 자식과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다가 몸져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계속됩니다. “금수만도 못한 내 두 눈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나는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거스림이 하나님을 거스림입니다. 부모를 순종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존재의 방식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요, 약속된 복을 누리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 23:26 말씀에 보면 “내 아들이 내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라이언 화이트라고 하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이언 화이트가 열세 살 때에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수술 과정에서 수혈이 잘못되어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이즈)에 걸렸습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이 병원에서 잘못한 사건으로 인해 그대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의사들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날마다 기쁘고 행복하게 보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이 방송매체를 통하여 전 미국에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이 소년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소년은 5 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더불어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나는 아무 것도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전 지금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아빠가 제게 준 것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빠는 제게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고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믿게 해주셨고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버이의 사랑을 그 누가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어버이는 내게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언제나 편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 옛날 어머니는 우리가 아파 누워 있을 때 열이 오른 이마에 손을 대시고 “네 대신 내가 아파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하시면서 기나긴 밤을 대신 아파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시며 홀로 지새우셨습니다. 부모님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식을 믿어주시고 끝까지 지지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배반하고 버린다하여도 끝까지 믿어주고 도와주고 밀어주시는 분은 이 세상 가운데 어버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평생 동안 목회를 부지런히 하고 70 세가 되어서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님 앞에 나와서 “목사님, 이제 은퇴하시니까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께 여생을 지내실 집을 하나 마련해드리겠습니다”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집문서를 꼭 쥐고 계세요. 틀림없이 사업하는 자식들이 와서 집문서를 내놓으라고 할 테니까 그 문서를 내놓으시면 목사님 부부는 길거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니 집문서만큼은 내주지 마세요.”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은퇴한 후 교회에서 사준 집에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맏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에 처하니까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 집문서를 빌려 주세요. 잠시만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만 장로님들의 당부도 잊은 채 어려움을 당하는 아들 내외가 가여워서 집문서를 내어주었습니다. 그 후 아들의 사업은 부도가 나서 파산하여 아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도망을 갔고 그 노부부는 길거리에 나앉았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노부부는 자식들을 원망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큰 상처를 입히고 가면 마음속으로는 괴로워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식욕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성공과 기쁨은 부모의 큰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자녀가 성공해서 행복하게 잘 살면 그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부모의 마음은 흡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아드리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6:2 말씀에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고 했습니다. 어버이 주일에 어느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에베소서 6:1-3 말씀을 읽으라고 하니까 이 대목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격하라”고 읽었답니다. 공격이 아니라 공경입니다. 순종이 의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공경은 정서적 측면이 강조된 단어입니다. 즉,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말입니다. 순종이 외적활동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공경은 내적태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부모님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즉 제가 사춘기를 막 시작할 때 부떠 중학교 3학년때 까지 어머니는 큰 양은다라이에 떡을 담아 머리에 이시고는 떡 장사를 다니셨습니다. 예전에도 하셨던 일이지만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넉넉지는 않았어도 먹고 살만은 했기에 별 문제는 없었는데 시골 살림에 자식들 도시에 내보내서 공부를 가르치는 일은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 가기 전 어머니의 떡 다라이를 지게에다 지고 시골장이 서는 곳에 갖다 드리기도 했고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동네에서 다니다 떡을 팔러 다니시는 어머니와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날 학교에 가면 반 아이가 “너희 엄마 우리 집에 떡 팔러 왔더라”하는 친구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그 때는 철이 덜 들어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그런 어머니가 부끄럽게도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생각해보니 우리 어머니는 훌륭한 분이셨고 정직하고 당당한 분이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신앙의 대장부시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몸이 고되고 힘드셔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새벽예배에 나가 눈물로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땅 한 평, 논 한 평 물려받지 못했습니다만, 부모님의 신앙과 정신은 물려받았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대전 큰 형님 댁에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왔는데, 이제는 기력도 없으셔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시고 말씀도 어눌하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셨습니다. 당신의 고생과 수고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자식들을 위하여 끝까지 헌신하신 어머니의 모습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26 절 끝부분에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길은 여러 가지지만 부모님의 길, 신앙, 성격, 철학, 이상,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하여 후회와 아쉬움을 가지고들 계십니다. 그래서 때때로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지 못했지만 너는 지혜로워야한다, 나는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너만은 열심히 해서 좋은학교에 가야한다, 선하게 살아라, 의롭게 살라고 하시는 것은 과거에 대한 후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술을 즐기는 자와 사귀지 말라, 게으른 자와 사귀지 말라, 단정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선택, 그의 살아온 생을 인정해드리고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부모님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생을 잘못 살았다는 후회가 있을 때 부모님은 잘 살았다고, 훌륭하게 사셨다고, 부모님의 삶은 그런 상황 속에서 더없이 성공한 삶이었다고 인정해드리는 것이 부모공경의 도리인 것입니다.

옛날 조선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서울을 떠나 개성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개성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요청하기를 “내가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임금님의 용안을 한 번도 뵙지를 못했는데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을 멀리서라도 뵙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임금님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렸다가 오십 리 길을 어머니를 업고 어느 길가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해드렸는데 임금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궁으로 돌아온 임금님은 그 때 어머니를 업고 있던 그 사람을 궁궐로 불러들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 “너는 효자다”라고 하면서 상으로 금 백 냥과 쌀 한 섬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한 불효자가 돈을 벌기 위해 원치도 않는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가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내용을 보면 상을 받을 것이 아니라 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임금님은 신하에게 금 백 냥을 주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그 사람의 의도를 낱낱이 고했는데 임금님의 말씀이 “효도는 흉내만 내어도 좋은 것이니 상을 주라”고 했다는 말에 그 사람이 진짜 효자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 공경이 진심으로 우러나지 않는 분이 있다 할지라도 흉내라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옵기는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부모공경의 도리를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이 복 되고 진정한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명섭 목사)

[어버이주일] 센 머리 앞에 일어서라 (레 19:32-37)

오늘 본문을 레위기에서 택했습니다.
먼저 레위기 이야기를 좀 해야겠네요.
여러분, 레위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위기는 재미없는 성경이라고 고개를 돌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레위기는 제사 드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성경인데 1장부터 번제는 이렇게 드려라, 소제는 이렇게 드려라, 화목제는 이렇게 드려라, 속죄제는 이렇게 드려라, 화목제는 이렇게 드려라, 이런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 우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레위기의 내용은 우리와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말씀, 은혜 받은 말씀에는 밑줄을 긋지요. 가만히 보니까 레위기에 밑줄이 별로 많이 그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레위기를 읽으면서 은혜 받을 수 있는 성도가 깊이 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입니다.

신학에는 성서신학, 이론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여러 분야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금요일 저녁마다 실시하고 있는 교사양성교육에는 이런 분야들을 골고루 안배해서 강사를 초청해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신학으로 말하면 어느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실천신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신학계에서는 60년대,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실천신학은 학문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실천신학 안에는 목회학이나 예배학 같은 과목들이 있는데 그 때 그런 과목은 연세 많은 목사님들이 강사로 오셔서 목회 체험담을 들려주는 일이 꽤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배에 대한 이해가 약해졌습니다.
예배에 대한 이해가 약해지니까 교회의 기초가 약해졌습니다.
뒤늦게 실천신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은 해외에서 실천신학을 전공한 분이 돌아오면 여러 신학교에서 다투어서 모셔가려고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레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레위기를 통해서 은혜 받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레위기 19장 4절,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에 의지해서 연세 많은 분들을 공경하는 일에 대해서 살피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우리는 연세 많은 분들을 공경하는 일이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임을 알아야합니다.

32절은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레위기 19장에는 이런 말씀이 유난히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안에서만 살펴보아도 34절의 끝,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36절 중간 이후,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19장 끝인 37절 끝,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말씀은 중요하다’ ‘이 말씀은 꼭 지켜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19장에는 한 말씀이 끝날 때마다 “나는 여호와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런 말씀이 붙어 있습니다.
아까 레위기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레위기 가운데에서도 19장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레위기 19장은 중요한 말씀들이 압축되어 있는 장입니다.
예를 들어 19장 3절과 4절을 보세요.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두 절 말씀에 십계명 가운데 세 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3절 앞부분을 보세요.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십계명의 어느 계명입니까? 그렇습니다. 제5계명이지요.

3절 중간부분을 보세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의 어느 계명입니까? 그렇습니다. 제4계명이지요.

4절 중간 부분을 보세요.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십계명의 어느 계명입니까? 그렇습니다. 제2계명입니다.

우리는 에센스(essence)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에센스는 진수, 정수, 중요한 것들만 모은 것, 이런 뜻이죠.
레위기 19장은 율법의 에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레위기 19장이 연세 많은 분들을 공경할 것을 강하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나고”
“센 머리”는 백발을 말합니다.
「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성서」는 이 말을 “백발이 성성한 어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잠언서 16장 31절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세 많은 분들은 면류관을 쓰고 있는 분들입니다.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승리한 사람들에게 상급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평생을 전도에 바친 노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과 8절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저희 교회 은빛대학을 그 때는 경로대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연세 많은 분들이 ‘로(老)’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경로대학에 나오세요.’ 하면 ‘에그, 그 로자가 싫어서 안 나가요’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노인’이라는 말 대신에 ‘연세 많은 분’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바꿔야하겠다고 하고 성도들에게 공모를 했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인승대학(人勝大學)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의견을 냈습니다.
‘인생의 경주에서 승리한 분들이 모이는 대학’ 이런 뜻입니다.
참 좋은 이름이었는데 생소하게 여겨져서 대신 은빛대학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연세 많은 분들은 인생의 경주에서 이기고 면류관을 쓰고 있는 분들입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일어서라는 것은 경의를 표하라는 뜻입니다.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연세 많은 분들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는 것입니까?

연세 많은 분들의 얼굴에는 인생의 연륜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의 얼굴에는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20장 29절은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세 많은 분들의 얼굴에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 12장 12절은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세 많은 분들의 얼굴에는 많은 세월 가운데서 얻은 풍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풍상은 바람과 서리라는 뜻입니다.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 이렇게 시작되는 이태백의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백발이 삼천 발이나 되네 근심으로 저렇게 길어진 것일세 울 속의 저 사람, 어디에서 저렇게 흰 가을서리를 얻었는지 나도 모르겠네.’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그 시에서 이태백은 백발을 가을서리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 서리는 오랜 세월 속에서 저절로 얻어진 것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의 얼굴에는 많은 노고의 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를 위한 노고, 사회를 위한 노고, 자녀들을 위한 노고, 많은 노고의 자취가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앞으로 우리나라는 고령사회가 될 것이다.’ ‘노령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보도를 자주 대합니다.
이와 같은 보도의 뒷면에는 ‘연세 많은 분들이 나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이 사회의 짐이 된다.’ 이런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직위가 높은 분들에게는 머리를 숙이고, 권력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굴복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연세 많은 분들을 공경하고 정성껏 모시기보다는 그 반대로 흐른 경향이 많습니다.
핵가족화가 되면서 이런 형상이 더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연세 많은 분들의 얼굴에 있는 인생의 연륜, 깊이 있는 아름다움, 지혜, 오랜 세월에서 얻은 풍상, 노고의 자취를 보면서 일어나 공경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세요.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연세 많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경하는 일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직결되어 있습니다. 동일시되어 있습니다.

19장 3절을 보세요.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부모를 경외하는 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역시 직결되어 있습니다. 동일시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경외하라고 했는데 경외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쓰는 말이지요.

부모를 공경하는 일, 연세 많은 분들에게 예의를 표하는 일을 이와 같이 신앙적인 차원의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남자속회 공과는 ‘효도는 유교에서만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기독교는 효도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다.’ 하면서 십계명 가운데 5계명을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19장을 통해서도 성경이 부모와 연세 많은 분들을 얼마나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남자 속회인도자와 속장님들, 이번 속회 인도할 때 레위기 19장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연세 많은 분들을 공경하는 것을 그저 많은 미덕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걸고 하시는 중요한 명령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 연세 많은 분들에게 전도하는 일에 힘써야합니다.
작년에 저희 교회에는 장례가 유난히 많았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례가 많았다는 것은 힘들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목사님이 매우 부러워해요.
‘나는 지금까지 한 분밖에 천국으로 안내하지 못했는데 목양교회는 그렇게 여러 사람을 천국으로 안내했네요.’ 하면서 부러워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말을 들으면서 ‘아, 장례예배는 그 사람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일이로구나!’ 깨달았습니다.
그 분이 믿어야 천국으로 잘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일본의 비양심적인 행동 때문에 국민들이 상처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조금 성의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은 단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한 전술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 ‘일본에 이 분이 살아있으면 이럴 때 무엇이라고 할까?’ 이런 생각이 드는 분이 있습니다.
4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분인데요, 야나이하라 다다오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교육가이며 전도인이었습니다. 한자로는 시내원충웅(矢內原忠雄)이라고 적습니다.
아나이하라 다다오 선생은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는데 일본이 이차대전을 일으켰을 때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일본은 패배해야 한다고 자주 강연했습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그것을 반대했습니다.
결국 도쿄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해직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분은 「가신(嘉信)」이라는 개인잡지를 발행하면서 예언자적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가신’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해방 후 도쿄대학 총장이 되었다가 1957년에 은퇴했습니다.
이 분이 한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종말이 가까운데 신앙 없고 소망 없이 무덤에 가까이 가는 것은 못할 노릇이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깝지요.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 믿지 않는 연세 많은 분들을 보면 더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견딜 수 없이 안타까워져야 합니다.
야나이하라 다다오 선생은 또 ‘영원한 생명의 환희를 알게 될 때 장수는 축복이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축복을 누리도록 해야 힘써야합니다.

작년에는 장례가 많았다고 했는데 올해는 결혼이 참 많습니다.
어제는 주례를 두 번 섰는데요, 열두 시에 교회에서 청년 한 사람 주례를 하고 두 시에 연세대학교에 가서 감리교 원로목사님 한 분의 아드님 결혼을 주례했습니다.
앞의 결혼예배가 좀 늦게 끝났습니다. 12시 45분 넘어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교회에 계신 분들이 ‘유 목사님, 틀림없이 제 시간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이 토요일 오후이고 더구나 봄나들이가 많은 때가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주례 마치고 교회로 돌아오니까 ‘목사님, 늦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인사하는 분들이 여럿이더군요.
여러분, 제가 제 시간에 들어갔을까요? 못 들어갔을까요?
제 시간에 들어가서 주례 잘 하고 돌아왔습니다.
제 시간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이런 질문 안 하지요.
사실 좀 교통이 복잡했습니다. 저도 염려하면서 떠났습니다.
연세대학교까지 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연세대학교 안에서도 문제였습니다. 예식장은 알렌기념관이라고 학교 동쪽 끝에 있는 건물인데 그 학교가 지금 창립 120주년 행사를 하느라고 대단히 복잡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교통방송을 들으면서 길을 선택하면서 갔고 교통법규를 위반해서 양쪽 깜박이 켜고 버스전용차로로 가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도우셔서 10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가보니까 늦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점잖게 ‘에, 오늘이 날씨 좋은 봄의 토요일 오후라 교통이 복잡해서 늦는 분들이 많습니다. 10분 늦게 시작하겠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늦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감사헌금을 했습니다.
교회에 결혼식이 많은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교회가 젊어져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청년전도에 힘써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은 연세 많은 분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시편 71편 8절과 9절의 말씀을 소개해 드립니다.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우리는 더 많은 연세 많은 분들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힘써야합니다.

노년기는 영적으로 새로운 시기입니다.
노년기는 자기를 성찰하며 고백하는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있는 분들에게 전도하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셋째, 연세 많은 분들이 큰일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모세는 나이 팔십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인생의 2/3가 되는 때에 새로운 일, 큰일을 했습니다.

갈렙은 나이 팔십오 세에 가장 힘든 땅, 다른 사람들이 나서기 꺼리는 땅 헤브론 점령을 자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설교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한 설교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설교에서,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24: 14)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겜 설교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 이 설교를 했습니다.
여호수아서 23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서, 백 세가 넘어서,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신앙의 뼈대를 다시 한 번 튼튼하게 하는중요한 설교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의롭고 경건한 사람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는 그들이 삶의 종반부에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 복된 일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연세 많은 분들이 큰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저희 교회는 최근에 이상하게 몽골선교와 관계있는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몽골 어린양 교회 청년 이십여 명이 저희 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재작년에 저희 교회 단기선교팀이 몽골에 갔을 때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지요.
다음 주 토요일부터는 후레정보통신대학 전자공학과 3학년 학생 열여섯 명이 저희 교회에 와서 한 주간 숙식을 하면서 여러 곳을 방문하고 실습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6월말에는 저희 교회 단기선교팀이 몽골로 떠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사순절 금식헌금은 전액 타문화권선교를 위해 사용합니다. 그 헌금으로 방글라데시에 찬드라푸르 교회도 지었고 캄보디아에 단기선교팀도 파송했습니다.
올해 사순절금식헌금은 모두 몽골선교를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두 주일 전에 몽골에 출장 갔을 때 그곳 감리교 선교사들과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선교지에서는 선교사들끼리 갈등과 마찰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몽골의 선교사님들은 참 화목하고 단결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선교사 대표가 되는 분이 ‘맞습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김영권 장로님, 이상규 장로님 같은 연세 많은 분들이 계시다는 것도 큰 이유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김영권 장로님은 서울남연회 오류동교회 장로님인데 전자공학을 전공한 학자입니다.
연세대학교와 광운대학교 교수를 지냈지요. 지금 몽골 후레정보통신대학 총장으로 계십니다.
저희 교회 이상규 장로님이 그 학교의 부총장으로 많은 수고를 하고 있지요.
두 분 모두 70세 전후의 연세를 가진 분들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몽골 선교사 사회가 한마음으로 단합이 잘 되는 것은 순수한 정열을 가진 좋은 선교사들이 여러분 가 있기 때문에, 선교역사가 아직 짧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두 분, 연세 많은 분들이 선교 일선에서 모범을 보이며 이끌고 있는 것이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역에 가면 연세가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질서도 유지하고 길도 안내해 줍니다.
제가 가는 청년 하나는 지하철을 타러 가서 그 분들에게 무엇을 꼭 물어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자기가 아는 것도 물어봅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그 분들에게 보람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열심히 안내하고 있는데 물어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섭섭할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일부러 꼭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이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후배 세대를 지도하고 자녀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일입니다.
아까 노년기는 영적으로 새로운 시기이고 자기를 성찰하며 고백하는 시기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 때는 또 후손에게 복을 빌어주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분들의 지도를 겸손하게 받아야하며 그 분들이 우리들을 위해 더 많은 복을 빌도록 받들어야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주일에 생각해야 할 것은 계층에 따라 다릅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세대는 효도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어버이 세대는 좋은 부모, 존경 받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저와 같이 부모가 계시지 않는 세대는 추모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제가 어버이날이 들어 있는 이번 주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작년에 태어난 외손녀 안고 부모님 묘소에 가서 ‘아버님에게도 증손녀가 생겼습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이것뿐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연세 많은 분들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센 머리 앞에서, 백발이 성성한 분들 앞에서 일어서기 바랍니다.

창세기 19장에 두 천사가 죄악의 도시 소돔을 방문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1절입니다.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롯은 그들을 보고 일어났습니다.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나 영접하고 그 다음에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두 천사는 롯에게 소돔이 멸망할 것을 알려주고 여기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롯이 머뭇거리니까 그들은 롯의 손, 그 아내의 손,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해서 성 밖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강권적으로 구원을 받게 한 것입니다.
만일 롯이 일어나 경의를 표하는 일이 없었다면 롯도 소돔 주민들과 함께 멸망당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연세 많은 분들, 백발이 성성한 분들 앞에 경의를 표할 때 그렇게 할 것은 엄격하게 명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될 때 하나님은 이 사회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 공경하기에 힘써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지켜주시는 복을 받는 사회를 만들고 우리들이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유관지 목사)

 

[어버이주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1-3)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 가운데 경남 마산시 봉암동에 거주하는 67세의 안영준씨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부인 박대동씨 결혼할 때에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가 내 부모 네 부모를 따지지 말고, 양가의 부모님을 똑같이 함께 모시자”고 말입니다. 그는 38년 동안 그 약속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이 양가의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를 다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 11월 사고로 아내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의 아파트에 101세 된 친어머니와 96세 되신 장모님을 함께 모시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친어머니는 시력과 체력이 쇠약한 상태이고, 장모는 치매에 걸려서 누군가 돌봐주어야 될 입장이지만 그는 오히려 그의 효심을 칭찬하는 기자들에게 “자식이 부모님을 당연한 일인데, 그게 뭐 칭찬거리가 됩니까?”라고 하면서 오히려 부담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어머니의 날이 한국에 건너오면서 1975년부터 어버이날로 이름을 바꾸어 지켜지고 있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자녀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무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일은 당연하고 지당한 일인데, 그것이 선행으로, 칭찬거리로 비추어지는 가운데 오늘 우리 세태의 모순을 보는 것도 같습니다.

오늘의 성경 1절에 보니“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은, 지당하고 합당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하게 하지 못함은 무슨 이유일까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먼저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돌보고 계십니다. 세월이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호세아 10장 8절에 보니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너희를 향한 내 사랑은 불붙는 것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향해서 사랑을 전하고 계십니다. 마치 그 사랑은 집 나갔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두 번 째 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습니다. 품에 안았을 때에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나이가 들어서 가정을 이루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자녀를 보는 부모의 사랑은 여전이 같다고 합니다. 출근하는 50세의 아들을 향해서 80세의 노모는 오늘도 “얘야, 차 조심해라’라고 당부하신다고 하지않습니까.

일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청상과부가 되어서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잘 키웠습니다. 이 아들이 커서 늠름한 청년이 되었는데, 어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여자는 아주 몹쓸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했더니, 이 여인의 병을 고치려면 사람의 간을 먹어야 된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어날 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이 아들은 ‘우리 어머니가 살면 얼마나 오래 살까? 우리 애인이 오래 살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그 어머니를 죽여 간을 가지고 자기 애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이 아들을 향해서 어머니의 혼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아들아, 조심해서 천천히 가라. 넘어질까 염려된다...’자신의 간을 파 가는 아들에게 넘어질까 걱정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드러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다윗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허물이 있고 죄도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 압살롬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 반역해서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가까스로 위기를 피한 다음에, 요압 장군을 보내서 압살롬을 진압하게 했습니다. 요압을 보내면서 다윗은 “여보게, 내 아들 압살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게나. 그를 너그럽게 대해 주게나. 제발 그의 생명만은 빼앗지 말게나. 그를 살려서 내게 데리고 와 주게나!”하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머리가 긴 고로 노새를 타고 가다가 나무에 그 머리카락이 걸려서 동동 매달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요압에게 체포되고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병사가 와서 승전보를 알리는데, 다윗은 압살롬이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먼저 묻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단 말을 듣고, 다윗은 기뻐하기는커녕 통곡하며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하고 통곡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 왕위를 빼앗고자 하였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이토록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데, 우리 자식들의 사랑은 늘 변덕스럽기만 합니다. 평생 부모에게 효도를 다할 것 같던 마음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종종 변질되어가기도 합니다. 어릴 때 아이들을 불러놓고 “너 이 다음에 커서 엄마, 아빠한테 잘 할 거지?”하고 물으면 “그럼요! 엄마,아빠! 전 잘할거예요”하고 넙죽 대답한다고 해도 30, 40년은 지나 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향한 자식들의 마음은 이렇게 늘 변질되어 가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할까요?

첫 번째,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1절, 2절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아멘.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개의 십계명 돌판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돌판에는 첫 번째 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으로, 주로 하나님과 관계된 계명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돌판은 인간에 관한 계명들인데, 그 가운데 첫 번째로 기록되어 있는 다섯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비중 있는 계명으로, 약속있는 첫 번째 계명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보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명령은 이것을 지킬까 안 지킬까 고민할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저울질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모님께 얼마나 효도하고, 얼마나 공경할 것인지 잴 일이 아닙니다. 복종의 문제요, 순종의 문제일 뿐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공경은 부모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은혜와 은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생명을 몸속에 10개월 동안 담고 있습니다. 낳고, 기르고, 그의 인생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깊고 크고 놀랍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보답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 공경이고 효도인 것입니다.

빅톨 위고의 소설 가운데 “나인티들(?)”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정국이 몹시 큰 혼란과 가난에 빠져있었습니다. 어느 부대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길 옆에 지친 아주머니 한 분과 세명의 기진맥진한 아이들이 함께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는 이 부대의 상사가 자기 주머니에서 빵을 한 덩어리 꺼내어 아주머니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빵을 발견한 아주머니는 그 빵을 정확히 3조각으로 나눠서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나누어 주더랍니다. 그걸 바라보던 한 병사가 상사에게 물었습니다. “상사님! 저 여자는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죠?”그 때 상사가 말하기를, “그게 아니야. 저 여자는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도 배가 고파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하는 아들에게 빵 세 조각을 나눠주는 그 마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 공경입니다.

또한 부모 공경은 인간됨의 도리입니다. 사람이 제 도리를 못할 때에 금수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짐승들은 자기 새끼를 낳아서 기릅니다. 그러다가 새끼가 크면 부모와 새끼가 같이 싸움을 합니다. 때로는 물어 죽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마지막까지 효도를 다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고, 됨됨이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로 그 부모를 대게 순종하고 공경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매달려 죽어가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제자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요한아 네 어머니라.” 요한에게 그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 이후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처럼 모시고 평생을 공경하며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인간됨의 도리인 것입니다.

나오미란 한 여인의 가정이 베들레헴의 기근을 피해서 모압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방 땅에 가서 좀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남편을 잃어버리고 두 아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나오미 자신과 과부된 두 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이제 이 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너희는 아직 젊은데 다시 재가해서 너희 인생을 꾸려야지, 과부된 나를 따라오면 어떡하겠느냐?”고 만류했습니다.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그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모압 땅에 남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끝까지 따라 갑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조국이 나의 조국입니다. 나는 어머니와 떨어질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며느리 룻은 이 늙은 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밭에 나가서 일꾼들이 추수하다가 흘린 벼 이삭을 주워가지고, 음식을 만들어서 어머니를 공경하고 봉양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됨의 도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후회할 일이 많지만, 가장 마음 아픈 것은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효도하는 일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효도 할 시기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부모에게 효도할 수 없습니다.

송강 정철은 그의 ‘훈민가’에서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라고 노래했습니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지금 어려워도, 부족해도 최선을 다해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부모님을 공경 하라고 했는데, 공경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섬기듯 부모를 높여 드리는 것이 공경입니다.

부모 앞에서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그를 존경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부모를 존경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결코 내 부모를 존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부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 받는다고 서양의 속담은 이야기 합니다.
공경이란 자기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까?

또한 공경은 부모의 실수 까지도 덮어 드리는 것입니다.

나이가 드시면 지각이 떨어지고, 생각하는 것이 우둔해질 수 있고, 움직이는 것도 느려져 실수 하실 수 있습니다. 진정한 공경은 부모의 실수 까지도 덮어드리고 숨겨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종종 그런 말을 잘 합니다. “우리 엄마는 주책 중에 주책이야. 얼마나 주책인지..” “우리 아버지는 망령이 들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실수를 덮어드리고 숨겨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 노아도 홍수가 끝난 이후에 나이가 들고 긴장이 풀려서 포도주를 먹고 만취해서 옷을 다 벗어 던지고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함이란 아들이 와서 보고는 동네방네 다니며 다 소문을 냈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부모의 흉 거리를 발견하면 자기 형제자매 가족들에게 다 전화하고, 자기와 상관없는 이웃 동장, 반장에게 까지 전화해서 우리 부모가 이런다고 흉보고 다닙니다. 함이 그랬습니다. 자기 부모가 하체를 드러낸 것을 조롱하고 소문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옷을 덮어 드렸습니다. 나중에 노아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함을 저주하게 되고, 셈과 야벳에게 큰 축복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경이란 부모의 실수와 허물까지도 덮어드리는 것입니다.

공경이란 또한 순종이란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내가 진정 부모님을 공경한다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젊은 세대이고, 부모님은 연로한 세대이면,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 생각이 올은 것 같고 부모님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라도 부모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함부로 거역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또한 공경은 봉양이란 말로도 사용됩니다.

부모의 먹을 것, 입을 것, 그의 모든 살림살이를 돌봐드리고 공급해 드리는 것입니다. 의식주의 부족함이 없도록 살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봉양입니다. 룻이 바로 이렇게 그 시어머니를 봉양해 드린 것입니다. 나중에 룻과 결혼한 보아스라는 사람은 룻에게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늘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서 시어머니에게 만족감과 풍족함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물질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생각에 ‘노인들이 돈 쓸데가 어디 있다고, 무슨 용돈이 필요하겠어.’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노인일수록 용돈이 필요합니다. 부모들에게 돈을 드리면 부모님들은 손자들에게 다시 돈을 돌립니다. 그렇더라도 자식의 그 마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자들에게 줄 용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 또한 그것이 공경입니다.

잠언 23장 25절에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네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진정한 공경이란 사치스런 옷으로 감싸드리는 것, 진귀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밥 한 끼를 드려도 정성스런 마음이 담겨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 집에 가서 며칠 있는데,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집에 왔는데, “어머니 언제 가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갈비가 아닌 생선 한 마리를 구워드리더라도 맛있게 드시고, 기쁘게 드실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공경입니다.

성경은 공경에 따른 축복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 공경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축복이 따르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면 잘되고, 형통한 삶을 살고, 장수 한다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도 보면 효도 잘하는 집안에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한 번영하고 잘되는 가정은 그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정이 많다고 합니다.
룻은 그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정성껏 공경했는데, 유력한 보아스와 재혼하게 되었고, 다윗왕의 할머니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평생 동안 보살펴 드렸는데,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장수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에는 양로원이 없다고 합니다. 나이 드신 어른이 계시면 젊은이들이 서로 자기 집에 모시려고 한답니다. 나이 든 어른들을 모시면 그분들의 경험의 지혜가 내게 유익하고, 그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내 자녀들이 유익하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을 내 부모로 삼아 모시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내 부모가 아닐지라도 나이든 어른들을 자기 부모로 삼아서 모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의 진정한 복이 그것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양로원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 서로 어른들을 모시려고 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성경에는 부모를 거역하는 자, 부모를 조롱하는 자,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와 심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30장 17절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출애굽기 21장 15절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말씀하셨고, 17절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6.25동란의 일사후퇴 때였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날에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지프차를 타고 급히 어딘가를 가고 있었습니다. 강원도 시골길 도중에 다리가 하나있는데, 다리 위가 빙판길이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지를 살피는데, 다리 밑에서 그 추운 겨울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상해서 다리 밑에 내려가 보니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갓 난 아이를 가슴에 품고 죽어 있었습니다. 일사후퇴 때 만삭의 몸을 이끌고 피난 가다가 진통이 오니까 피할 곳이 없어서 다리 밑에서 출산하게 되었는데, 추운 겨울에 아이가 추위에 죽어가자 자기 옷을 벗어서 아이를 가슴에 감싸고 자신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이가 살아있어 선교사는 그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서 키웠고, 전쟁이 끝나자 같이 미국으로 돌아가서 자기 양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서 자기 양부모와 자기는 머리색이 다르고, 코도 다르고, 얼굴도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유치원을 들어가고,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아이들이 “너하고 너의 아버지 어머니는 얼굴색이 달라. 넌 고아지? 넌 주워 온 아이야?”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의 성격이 삐뚤어져만 갔습니다. 그녀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20세가 되었을 때, 그 딸을 불러 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의 출생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겠다. 6.25 동란에 한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 내가 다리 밑에서 너를 만나게 되었다. 너의 어머니는 만삭이 된 몸으로 그 추운 겨울에 피난을 가다가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갈 곳이 없어서 눈을 피해 다리 밑에서 너를 낳았단다. 그러나 추운 날씨에 네가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자기 옷을 다 벗어서 너의 몸을 감싸고, 너를 가슴에 품고, 자신은 얼어 죽었으나 너는 다행히 살아있어서 내가 데려와서 키웠단다.”
그 때 20대 딸은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며 “내가 나를 낳은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했는데요. 내가 큰 잘못을 했습니다.”라고 용서를 빌면서 회개 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 딸은 마음잡고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추운 겨울에 혼자서 어머니가 묻힌 강원도 시골 양지바른 언덕의 어머니의 묘를 찾아가 자기 옷을 한 가닥 한 가닥 다 벗어서 눈 덮힌 무덤위에 덮어드리고, 울었습니다. “어머니 저를 낳으실 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저를 살리고자 어머니는 그 추운 겨울에 얼어 죽어가셨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저를 낳은 어머니를 얼마나 저주하고 원망했는데요. 어머니 저를 용서해 주세요.”하면서 오랫동안 목 놓아 울고 용서를 빌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내 부모는 몹시 냉정하고, 내게 아무런 사랑도 베풀어 주신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부모님의 마음속에 자식을 향한 사랑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하나님을 섬기듯 효도를 다하고 그리고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이영무 목사)

 

[어버이주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룻 1:15-18, 엡 6:1-3, 요 19:25-27)

1.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우리 교회의 부모님들, 연로하신 어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충만하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총선 때 모 정당의 대표가 노인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가 큰 어려움에 직면했던 일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대적으로 경로사상이 흐려져 가는 판인데, 아무리 선거용 발언이라고는 하나 어른들을 “무대에서 살아져 가는” 세대라고 말한 것은 충분히 문제삼을 만한 망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작년 말, 안동교회 행사에 참석하여 축사하신 광주의 한 완석 목사님은 “노인들이 나이를 공짜로 먹은 줄 아느냐, 나이 먹는데도 돈이 들었다. 그러므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고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은퇴하고 나서 당하게 된 여러 가지 섭섭한 일들을 그렇게 표출한 줄 압니다. 젊은 세대, 그리고 자녀들이 항상 귀담아 듣고 또 삼가며 잘 감당해야할 일인 줄 압니다.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의 사랑하는 여인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은 산 사람의 생간을 먹어야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미쳐버린 이 청년은 달리 방법이 없어서 불효 막심하게도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간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생간을 가지고 이제 한시 바삐 자기 애인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신 없이 애인이 있는 곳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중에 자꾸 무슨 소리가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멈추어서 귀를 기울였더니 놀랍게도 어머니의 음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넘어질라, 천천히 가거라”.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런 노래를 들어 보셨지요. “이 세상의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딸이 잘되라고 행복 하라고, 마음으로 빌어주는 박 영감인데...” 그렇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다 같습니다. 박 영감의 마음이나 김 영감의 마음이나, 동양의 부모나 서양의 부모나, 옛날 부모나 오늘 날 부모나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마음뿐이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낳으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예수께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님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흥하는 길이라면 자신들은 쇠하고 또 쇠하여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모님들을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 열 가지가 있는데 그 가장 중심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하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 제 5계명은 하나님께 관한 계명 바로 다음에 있습니다. 하나님말고는 부모보다 앞설 사람은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에 관한 계명 맨 앞에 있습니다. 우리 옛 말에 “효가 백행의 근본이라”고 한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행하지 않고 하는 모든 일은 다 거짓이요 위선이란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세상의 변화가 어떻든지 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님에게 효를 하고 어른들을 공경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오늘 구약 본문에서 우리는 이방 여인으로 유대인의 가정으로 시집 온 룻과 그 시어머니 나오미와의 아름다운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룻은 결혼하자 말자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룻의 남편 뿐 아니라 시아버지 시아주버니까지 이 가문의 모든 남자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멸문의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기 이름을 기쁨이라고 하는 뜻을 가진 나오미가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하는 뜻으로 “마라”라고 했습니다. 룻은 이런 불행의 극한 상황에서 동서 오르바 마저 떠난 가정에 시어머니와 단 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 가정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그 시어머니를 남겨둔 채 차마 떠날 수 없었습니다.

(1) 룻의 결심은 혼자 남게 된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겠다고 하는 갸륵한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룻기 본문 16절에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자기 의지를 말했습니다.
며느리들에게 가장 싫은 말이 “시”자가 들어가는 단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 등등...그래서 시금치까지 싫다고 합니다. 옛날에 소위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이미 무색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나오미와 룻의 관계는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살펴 봐야할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들이 행복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했습니다. 자기 한 몸 다소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며느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들들이 죽고 난 다음 며느리들에게 말하자면 “팔자를 고치라”고 강권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시어머니의 며느리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어른들이 사랑을 먼저 베푸는 것이 원칙입니다. 소위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른들이 입만 열면 “우리가 젊었을 때...”라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생각입니다. 역사의 시침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이 지금 젊은이들의 입장을 먼저 충분히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 특히 우리 집에 들어와 살게 된 며느리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소원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메아리와 같습니다. 어떤 아이가 산에 가서 큰 소리로 “야 임마!” 했더니 그 소리가 메아리고 되어 “야, 임마!”하고 자기에게 되돌아 왔습니다. 속이 상한 아이는 더 심한 욕설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메아리도 역시 더 심한 욕설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씩씩거리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엄마는 “이번에는 가서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 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메아리도 역시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른들이 나오미처럼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면 반드시 그 사랑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2) 그런데 룻은 또 어떠했습니까? 아직 새파랗게 젊은 청춘인데 왜 자기 인생에 대한 미련이 없겠습니까? 이미 자기 동서 오르바는 그렇게 해서 시어머니를 떠나갔습니다. 룻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젊음을 즐기겠다고 불행하게 된 시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입에 붙은 인사치레가 아니라 말릴 수 없는 결심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신앙을 통해 배운 사랑이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습니다. 14절에 보면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룻의 결심이 얼마나 견고하였는가를 말해 줍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말로 하면 “경로효친”이 아니겠습니까? 성경 말씀대로 해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과연 룻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룻은 나오미 가문에 속한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을 만나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선민 아브라함의 족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효부 룻의 증손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다윗 왕입니다. 그뿐입니까? 우리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그 가운데 5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룻입니다.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메시야 족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잘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엄청난 현실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특히 자녀들, 그리고 젊은이 여러분,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은 케케묵은 구닥다리같은 인생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며 인생의 바른 도리요 그 결과 하나님께 축복 받는 길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신약 본문에는 우리 주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사도 요한 3사람의 십자가를 중심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실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마리아는 끝까지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요한이 역시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직전입니다. 그 고통이 절정에 달할 때입니다. 정말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와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자신의 고통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어머니를 두고 그냥 떠나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어머니를 모자관계로 맺어 주시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 이렇게 하여 요한으로 하여금 자기를 대신해서 마리아를 섬기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성지 순례차 에베소에 가면 성모 마리아 기념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평생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면서 거기서 성모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 당부대로 마리아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12 사도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천수를 누리면서 100여세까지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는 요한에게 계명에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서 장수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해야하는 것과 효도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하는 약속의 실현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가 노인을 경시하고 부모 공경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요 인간의 도리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두려운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윗사람의 말은 사리에 맞지 않아도 따라가야 한다고 응답한 것이 25.6%, 맞지 않으면 윗사람이라도 시시비비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58%, 또 부모가 반대해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63.8%, 반대하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 15%로 나타났습니다. 이론적으로 옳다 그르다 말하기 전에 이런 것이 우리 사회의 흐름입니다.

지금 어른들, 부모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 설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나라 독거 노인의 수가 10년 사이에 배로 늘어났다는 통계입니다. 우리 사회에 룻과 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미 박물관으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사회는 해체되고 붕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인간의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의 복이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어버이주일] 아버지의 네 가지 마음 (눅 15:11-32)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특히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조상의 유전이나 율법에 기초한 수많은 규칙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간주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은 주로 창녀와 같이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여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에게는 공민권을 박탈하고 법적 증인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죄인을 멀리하고 상종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인들을 사회에서 철저히 왕따를 시켰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그 사회의 outcast 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크신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아무도 상종치 않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하루 밤을 지내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의 회개를 기뻐하시고,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많은 창녀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동네에서 소문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당시 전통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절에서처럼 이제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시는 자리로 '죄인'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소외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고 대화하는데 세리와 죄인들이 계속 모여드니 율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계속적으로 수군거리며 쉴새없이 불평불만을 터뜨렸음을 말해 줍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이 사람은 더 이상 랍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다. 그러니 그를 추종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세 가지 비유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10절에는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잔치를 벌이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열 드라크마를 찾은 여자가 이웃을 불러 기쁨을 나누는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개인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기쁨이 됩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삼위의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여러 천사들이 동참하기 때문에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우주적인 기쁨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들려주신 세 번째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세 비유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회개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도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들이 회개를 기뻐하고 함께 참여해 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살림을 나눠주는 아버지의 마음(12)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떤 요구를 했습니까? 12를 보십시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둘째 아들에게 돌아갈 분깃은 상속 재산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상속법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두 몫을 주고, 차자에게는 한 몫을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신 21:17). 둘째 아들은 이 법을 근거로 자기의 몫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상속이란 아버지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자발적으로 자식들에게 나눠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계시는데 자기에게 상속될 재산을 나누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막심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둘째 아들이 왜 이런 무례한 요구를 했을까요? 그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며 사는 것이 불만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많은 요구를 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라, 매일아침 큐티를 해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방 여인을 사귀지 말아라, 간음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라, 탐내지 말라는 등 부지런히 계명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머리가 좀 굵어지자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졌습니다. 그런 모든 계명들이 무거운 멍에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버지 집에 사는 것이 감옥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품만 떠나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이 부담스럽고 하루라도 빨리 집구석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라면 이런 아들의 요구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버지는 어떠했습니까?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b) 두 아들에게 상속법대로 미리 살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맏아들에게 두 몫을 주고 둘째 아들에게 한 몫을 주었습니다. 살림을 나누어주어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재산을 임의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동의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13a에 보면 며칠이 못 되어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버렸습니다. 재물을 다 현찰로 바꾸어 가지고 아버지 간섭이 없는 먼 나라로 떠나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아버지가 왜 아들에게 큰 재산을 나누어 주었을까요? 아버지의 권위로 아들을 책망하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재산을 못 나누어 준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살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살림을 나누어 주면 살림을 팔아서 집을 나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만일 아들이 계속 상속을 물려달라고 요구하는데 아버지가 거절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요? 계속하여 둘째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아들과의 관계성은 점점 더 악화될 것입니다. 급기야는 아버지를 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는 카드 빚은 갚아야 하겠고, 아버지의 유산은 받을 수 없고 하니까, 유산을 빨리 물려받기 위해서 아버지를 살해한 끔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그 많은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아버지는 아들의 청을 들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돈을 움켜쥐고 아들과 원수되는 것보다는 돈을 다 잃더라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성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다 잃더라도 아들과의 사랑의 관계성은 잃지 않고자 했습니다.

요즘 돈 때문에 자식과의 인연을 끊는 부모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버리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돈보다 사랑의 관계성이 중요합니다. 돈은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성은 파괴되면 좀처럼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보험을 타기 위해서 남편을 살해하고, 두 번째 결혼한 남편도 그렇게 살해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그렇고 형제간에도 상속 문제로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습니까?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더라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분을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본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도 있고 섬기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입니다. 그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억지로 가두어놓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율법적인 관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힘을 다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릴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떠나기를 간절히 원할 때 여러 가지로 만류하시지만 계속 고집을 부리면 허락해주십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허락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으로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실재로 21-22절에 보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 돌아와서 모든 관계성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온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사는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그런 관계성입니다.

II.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13-20)

13절을 보십시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재산을 나누어 준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팔아 챙겨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이를 보면 둘째 아들은 고향에서 농사짓는 일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시골구석에 처박혀 사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시골에서 썩을 것이 아니라 큰 도시에 나가 큰 비즈니스에 종사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 그는 아버지 간섭이 못 미치는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습니까? 그는 허랑 방탕하여 그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허랑방탕을 NIV에서는 wild living 거칠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처음부터 허랑방탕하게 살려고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청운의 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도 아버지처럼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남보라는 듯이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허랑방탕하게 되었고, 모든 재산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둘째 아들이 왜 허랑 방탕하게 되었겠습니까? 첫째로 그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유혹도 많습니다. 97년 IMF 이후에 벤처기업들이 한창 일어날 때 30대 청년 사장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돈을 쓰고 함부로 싶은 유혹도 많았고, 여자들에 대한 유혹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카지노에 가서 많은 돈을 잃기도 하고,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많은 재산을 날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먼 나라로 떠나려고 하는 내면 깊은 곳에 허랑방탕하게 살아보고 깊은 욕망도 숨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에게는 청년이 피가 끓어올랐고, 많은 여자들이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 내면에도 죄악된 욕망들이 꿈틀거렸습니다. 30절에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다는 맏아들의 말을 보면 그가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유혹은 강하고 우리 인간은 연약합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려고 해도 인간의 의지에 한계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자 결심해도 정욕에 무릎을 꿇기 쉽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늘 타락한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막 7:21,22). 여러분, 둘째 아들이 특별히 악하다거나, 불량끼를 타고 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똑 같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내면에는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가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막 7:22). 그래서 둘째 아들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날 때 똑같이 허랑방탕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14절을 보십시오.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기근은 단지 한 지역에만 국한 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 나라 전체를 엄습했습니다. 이제까지 부족함이 없이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는 '비로소' 궁핍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재물이 있을 때는 친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여자들도 다 떠나갔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5,16) 그는 이제 삶의 밑바닥에서 이방인에게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더부살이 할 곳이 없어서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돼지 치는 양돈업자에게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삶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돼지 먹는 쥐염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임금으로 최저 생계비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고,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먼 이국땅으로 떠나갔지만 결국 종살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한 때 돈을 뿌리며 호의호식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빈털터리가 된 지금 그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같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의모든 불행과 비참함은 아버지 하나님의 품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간파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품속에 살았을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 사단이 찾아와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만 벗어나면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고,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돋은 세상에서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필경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진리가 없는 자유는 타락이요, 방종입니다.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들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타락한 본성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둘째 아들은 이러한 인생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스스로 돌이켰다’는 말은 본래의 '제 정신을 차리다'(come to himself;RSV)는 뜻입니다. 이는 '회개했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Jeremias,parables,P.130). 그는 그 동안 타락한 본성에 이끌려 자행자지하는 삶을 살다가 이제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상실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는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그때서야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식이 풍족하다는 말은 빵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남아돌아갈 정도로 넉넉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가 겪게 된 모든 어려움을 통해서 그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참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발견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가 잘못해서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산을 허비하면서도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망하고 주려 죽게 된 상황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것이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히브리인들은 종종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했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늘에 얻은 죄란 자기의 몸으로 지은 모든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허랑 방탕하게 살며 지은 모든 죄가 하나님 보실 때 얼마나 큰 죈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불신하고, 아버지를 대적하고, 집을 떠나온 것입니다. 자기가 떠나올 때 안타깝게 이름을 부르며 만류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한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아버지를 슬프시게 한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집을 떠났을 때는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탕진하고, 주리고, 돼지를 치면서 조금씩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간음하지 말라, 이방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탐심을 버리라는 말씀들이 얼마나 소중한 진리들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멸시하고, 아버지의 돈을 다 탕진해 버린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인간이요, 교만하고 쓸모없는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품꾼의 하나로 보아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도, 종으로서도 살 자격도 없고, 날품팔이하는 것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a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일어나서 돌아갔다는 말이 회개의 참 뜻입니다. 회개란 repent 인데 이는 turn again이라는 뜻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나왔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참다운 회개입니다. 여기서 일어났다는 말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죽은 자였는데 이제 아버지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것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최초로 취해진 의지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당할 수치를 생각하면 도저히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평생 벌어 놓은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으니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그런 자기를 받아 주실 것이라는 실날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재산을 나눠주기까지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시던 그 아버지의 사랑이 생각났습니다. 지금도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용기를 내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0b절을 보십시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상거가 먼데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날마다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 거리를 살펴보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날마다 문 열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멀리 아들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거지 중에도 상거지 모습으로 둘째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불쌍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러 번 거듭거듭 입 맞추었다는 뜻입니다.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줍니다. 아들은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고, 날품팔이로라도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말도 듣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다 용서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아들이 와서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가 고맙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아들 그 자체를 영접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냐, 창기와 함께 날아났냐? 그런 것 따지고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그 고백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인간은 천천히 하나님께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는 분이 있다면 돌이켜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동안 어떤 죄를 지었든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현재 겪는 고통과 모든 불행이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임을 깨닫고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한 발자국 다가가가면 하나님께서는 열 발자국 달려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아버지 품을 떠난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III. 큰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하는 아버지의 마음(21-24)

21-23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둘째 아들은 자기를 보고 달려나와 얼싸안고 입맞추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용서의 사랑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너무나 큰 죄인이어서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면목이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그 자체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있음을 공포하는 행위였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시입니다. 또 신을 신겼습니다. 당시 종들은 동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아들만이 신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옷, 가락지, 신는 필요성 때문에 제공된 것이라기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들로서 모든 특권을 다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돼지 먹는 주염 열매도 먹지 못하고 주려 죽게 된 자가 황태자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불평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좋은 옷을 입혀 주고, 신을 신고서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아버지 집에 머물게 된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신을 신겨 주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옷을 입혀 주는 것 모두 다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를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큰 기쁨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원어에는 그 살진 송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올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면 잡아서 잔치를 베풀 송아지를 준비 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고대했으며,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줍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어떠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죽은 자였고, 세상 죄에 대하여 산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고, 아버지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의인 열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죄인들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장차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에 죽기까지 전도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영성이 최고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해도 전도에 열심을 내지 않은 영성은 참된 영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IV. 맏아들을 설득하는 아버지의 마음(25-32)

그런데 맏아들이 들에서 돌아왔습니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집에서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종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27) 그러자 맏아들이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조차 싫어했습니다. 노했다는 말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다'는 뜻으로 그는 마음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모습은 현재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서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바리새인의 원망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맏아들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고 들어오지 않자 아버지가 직접 나와서 권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는 그 동안 아버지를 잘 섬겼다는 의로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의로운 마음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불평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왜 죽도록 충성한 나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잡아 주지 않고, 창기와 함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이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가? 여기서 이 아들이라는 말은 원어에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둘째 아들만 싸고도는 아버지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며 살아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문을 열어 놓고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을 계속하여 권했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맏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맏아들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이 얼마나 큰지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또 맏아들은 “당신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네 동생”이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았으며, 아버지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너는 네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으니 반드시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느냐?‘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 맏아들의 문제는 곧 바리새인들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의로운 심정이 가득 차서 세리와 죄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돌 던지고, 멀리 했습니다.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함께 잡수시는 예수님을 원망하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집 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영접한다고 원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죄인들이 돌아옴을 기뻐해야 함을 말해 촉구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회개하고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것은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여기고 아버지의 심정으로 맞아들이도록 요청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인격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품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갈 때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우리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의로운 심정을 버리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죄인들을 품고 섬기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버이주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 (잠 23:15-25)
오늘 말씀은 솔로몬이 그의 자녀들을 향하여 교훈한 말입니다.

이 가운데 25절의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는 말씀은 어버이에 대해 자녀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결론적으로 한 말입니다.

어떻게 자녀가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까?

의인이 되고 지혜로운 자식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15절,16절을 보면,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24절에,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이 지혜롭게 되어서 그 지혜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기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님께 기쁨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 곧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7절, 18절에도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또한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의인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그 말씀대로 삶으로써 의인이 되는 것이 부모들이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부모님들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 말씀대로 바로 살아가는 지혜롭고 의로운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부모님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19절)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22절)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을 주는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자녀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분들로서 인생의 가장 훌륭한 선배이고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그 말씀을 잘 들을 때 부모님들에게 기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자녀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들 또한, 과연 나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았는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자녀들의 마음속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비석에 쓰여 질 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일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은 믿음이 큰 분들이셨다’는 기억을 남긴다면 그 분은 부모로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가에 관계없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잠언 30장 17절에 "아비를 조롱하고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였습니다.

새 중에 까마귀는 흉조라고 합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가장 효도를 잘하는 새입니다. 까마귀는 새끼에게 먹을 것을 한 번도 물어다 주지 않지만, 새끼 까마귀들은 그 어미 까마귀가 늙어서 날지 못하게 될 때 어미 까마귀가 죽는 날까지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이것을 반포지효(反哺之孝)라고 합니다. 까마귀도 늙은 부모가 죽기까지 봉양하는데, 어찌 인간이 그 부모를 조롱하며 봉양치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의 눈은 까마귀에게 쪼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모들의 실제적인 필요가 무엇인지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 드리려면 그분들의 필요를 알고 채워 드려야 합니다. 마치 자녀가 어릴 때에 부모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부모들도 자녀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자녀로서의 사명은 부모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님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물질적인 것입니다.

돈도 필요하고, 먹을 것, 입을 것, 지낼 곳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러한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 자녀들의 도리입니다. 옛날 바리새인들은 부모들에게 드릴 것 까지 '고르반'(하나님께 바친바 되었다)하여 부모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게을리 해서 예수님께로부터 책망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한국의 부모님들은 너무 희생적입니다. 자녀들이 잘 되기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평생토록 모든 좋은 것을 자녀들을 위해 모두 바치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부모님들에게 용돈 타 쓰던 때를 생각하면서 부모님들에게도 인색하지 않게, 어디서든 곤란을 겪지 않도록 용돈을 충분히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필요입니다.

젊은 자녀들은 스트레스해소를 위해 외출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부모들에게도 동일한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부모나 노인들이 스트레스로 화를 낼 때면 마치 수양이 되지 않은 것처럼 여기고, 그들에게는 인간적인 감정도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님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분들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져야 하고 정신적인 필요도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외출이나 여행도 할 수 있게 해 드리고, 스트레스도 풀고 기분전환을 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항상 방에만 모셔 두지 말고, 어린아이들만 맡겨 두지 말고 그 정신적인 욕구가 무엇인지 잘 살펴서 필요한 것을 채워 드리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영적인 필요입니다.

부모라고해서 신앙적인 면에 부족함 없이 항상 완벽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약해 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 믿음이 없는 말, 인간적인 말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섭섭해 하기도 하고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목사의 경우와 같아서, 성도들이 목사들을 볼 때에 목사들은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완벽한 신앙인으로 봅니다. 그러나 목사도 인간이어서 약해지고 실수할 때가 있는 것처럼, 부모들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그런 점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부모님들을 도와야 합니다.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고 영적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잘못이 있을 때는 충고도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돕고 도움을 받음으로써 성도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충고가 필요하며, 부모님들도 자녀들의 충고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효도하는 자녀들에게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의로운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대로 살아 갈 때 부모의 마음에는 한없는 기쁨이 생깁니다. 부모님들의 교훈을 따라 믿음생활 잘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부모들이 자녀들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돕듯이, 자녀들도 부모님들의 물질적인 필요, 정신적인 필요, 영적인 필요를 잘 채워줌으로 부모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철 목사)

[어버이주일] 예수님처럼 효도하라 (요 19:25-27)

기독교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독교는 부모도 모르고 조상도 모르는 종교라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독교는 부모도 모르고 조상도 모르는 그런 종교일까요? 물론 성경을 읽다보면 의미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삶이 효도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여지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유월절 절기 행사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보니까 아들 예수가 없는 겁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니 아들 예수가 성전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흘만에 아들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눅2:49절을 보면 아들 예수가 자신을 찾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또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어느 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진정한 의미를 알면 다 이해가 되고 오해가 풀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정말 부모도 모르고 조상도 모르는 불효막심한 종교일까요? 예수님은 부모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자신만을 위해 인생을 살았던 불효자였을까요? 아닙니다. 기독교만큼 부모 공경에 강조하고 가르치는 종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십계명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제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제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관한 계명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인륜의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부모공경입니다. 그리고 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에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출21:15절에 보면 부모를 업신 여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12살 어린 시절에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눅2:51절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도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마지막 그 죽음의 현장에서도 어머니를 기억하시며 마지막 효도를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처한 상황
먼저 예수님이 처하여 있는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가운데 계십니다.
18절을 보면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못박힘을 당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예수님의 손과 발은 십자가에 못박혀 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머리와 두 손과 발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체중을 이기지 못하여 손과 발은 찢어지고 있으며 피를 너무나 많이 흘렸기에 목마름은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의사인 리이터 박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찔린 곳에는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고 몸은 심한 긴장으로 인하여 혈액순환에 장애를 일으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피는 머리로 솟구쳐 극심한 두통을 일으켰을 것이고 폐에 있는 혈액은 누적되어 가슴을 압박하여 형언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피가 응고되어 멈추기 시작하면서 근육, 혈관, 신경들이 점점 굳어져 움츠러 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처절한 상황과 타는 듯한 목마름의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어서 한번 내려와 봐라”는 비웃음과 조롱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26절)

그리고 자기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습니다. 26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26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여기에 사용된 “여자여 보소서”라는 말은 무례한 호칭이 아닙니다. 여자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귀나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어떤 여인을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고대 문서를 보면 왕후에게 사용했던 존칭어가 바로 이 '귀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유명한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저 유명한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첫마디가 "귀나이" 여인이시여!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할 때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곁에 서 있던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지금 죽지만 이제부터는 바로 요한이 나를 대신하여 아들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여자여 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을까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머니!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시고 여자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메테르’ ‘어머니라’는 표현 대신 ‘귀나이’ ‘여자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그것은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시는 어머니의 아픔을 반감시켜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 줌으로 어머니의 생각을 변화시켜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자여!라고 부른 그 호칭이 바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성경에 “여자여”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이고 두 번째로는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마칠 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그때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마치는 운명 직전에 또 다시 어머니를 여자여!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공생애의 시작과 마지막에 이렇게 예수님을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여!(물론 최고의 존칭어이지만) 라고 부르신 것은 자신이 바로 육신의 아들이지만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마치고 계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창3: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처럼 남자 없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용된 여자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70인 역에서 ‘귀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라 부른 것은 당신 자신이 바로 창3: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야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요셉과 정혼하고 아직 동침하지 않았을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러므로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나신 이 아기가 자신의 혈통을 통한 아기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품 안에서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손에서 걸음마를 배우며 어머니의 무릎에서 글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아무리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래도 나은 정이 있고 기른 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 십자가에 못이 박힌채로 피흘 흘리며 죽어갑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자신이 손수 만들어 입혔던 그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지며 희희낙락 거립니다. 지나가는 자들도 고개를 흔들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시므온이 예언한 것처럼 마리마의 심정은 칼이 자신을 찌르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효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메테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귀나이’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어머니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하여 어머니의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반감시켜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지금 나는 육신의 아들로서 이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너무 슬퍼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죽음 가운데서도 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효도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 효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에게 잘 해 드려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그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자녀는 내 부모가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방법으로 열심히 효도를 하려고 합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부모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부모님이 무엇으로 인하여 주름살이 깊어지고 밤잠을 설치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무엇을 인하여 마음이 울적해 계시는지 아십니까?
부모는 자식이 마음을 몰라 줄 때 마음이 아픕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려고 구테타를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나중에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그 압살롬이 전쟁터에서 죽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삼하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 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도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아들이지만 그 아들 때문에 많은 세월 도망을 다니고 ?겨 다녔지만 그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소리내어 울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마음이 우리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109편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나를 도리어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자식이 못쓸 병에 걸렸을 때에 자식을 대신하여 죽을 수만 있으면 죽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의 그같은 마음을 몰라 줄 때에는 참으로 죽고 싶도록 외롭고 슬픈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귀찮으니까 집에 오지 말라고 말 해 놓고도 안 보면 보고 싶고, 전화를 열 번, 스무번 받아도 또 기다려 지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이드신 어머님이 맨날 주변 사람들로부터 식사 대접만 받다보니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자신이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돈을 달라고 하니까 “안 사람한테 애기해 보세요. 아마 줄 겁니다” 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할 수 없이 자존심을 버리고 며느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4만원을 주더랍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돈을 가지고는 대접이 불가능할 것 같아 다음날 3만원을 더 받았습니다. 그런데 7만원을 가지고는 여러 사람들을 대접할 수 없을 것 같아 이틀 후에 용돈을 더 달라하여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실의 탁자에 놓여 있는 가계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웬수 9월 14일 4만원. 웬수9월 15일 3만원. 웬수 9월 17일 4만원. 그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고 합니다. 효도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해라는 시가 있어 소개합니다.

《 오 해 》 - 배경음악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 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빨리 불러 와 좋은 음식 앞에서 먼저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 주머니에는 늘 돈이 얼마쯤은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오해를 오랫동안 해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이제야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27절을 보면 드디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27절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 그 제자는 바로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인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면서 어머니를 친 어머니처럼 모실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때부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처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를 다른 제자들이나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하셨을까요?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제자들은 일찍 순교를 당할 것이고 요한만이 가장 오래 살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참된 신앙을 가진 자 만이 참 효도를 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때가지만 해도 산 믿음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진정한 참된 효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신자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효를 한다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면서 “보라 네 여자이니라” 아니라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나이가 아닌 메테르, “여자여”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은 요한아! 비록 내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네 곁에 서 있는 우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느냐? 지금 네 곁에 계신 어머니 마리아는, 아니 네가 장차 돌 보아 주어야 할 어머니 마리아는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릎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나를 잉태하셨고 그 해산의 수고를 통해 나를 낳아 주신 분이시다. 그리고 나를 키워 주신 분이시다. 만일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희생과 수고가 없었다면 어찌 내가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제자 요한아! 나로 인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던 분이시고 나를 위하여 많은 눈물을 흘리신 나의 어머니시이다. 그러므로 나의 육신의 어머니를 잘 모셔다오. 이 땅에서의 어머니의 인생의 여정을 네가 책임져 다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부모가 배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훌륭한 가문을 남겨주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가난하여 많은 유산을 남겨주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아니 인생에 오점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나를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나의 어머니라, 아빠라 부르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긍지가 되듯이, 나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나의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보십시오, 저의 어머니이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보십시오 저는 부모님의 자식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 슈퍼볼 MVP를 수상한 하인스 워드 선수를 보십시오. 그는 수퍼보울에서 최우수선수(MVP)에 등극했을 때도 모든 공로를 어머니에게 돌리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지난 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정말 강한 분이십니다. 어머니는 제게 큰 영감을 주시고 항상 이끌어 주셨습니다. 어머님이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의 자랑입니다” 라며 어머니를 인정하고 어머니를 자랑했습니다. 한국 방문 내내 기자회견을 하든지 어디를 방문하든지 항상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감동이 되었으면 노대통령까지 효자상을 주고 싶다고 했겠습니까?
효도는 부모님을 인정해 드리고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 사역과 사명 때문에 부모 공경의 도리를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는 그 순간에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홀로되신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사역과 사명 때문에 부모 공경의 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예수님은 어떤분이십니까?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1:1)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1:29,36) 이 세상의 참 빛이신 분이셨습니다.(1:9)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셨습니다.(14:6) 그래서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그동안 여러 가지 기적과 표적을 통하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되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요2장)
거의 죽게 된 왕의 신하를 살려 주셨습니다.(요4장)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요6:4-13)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시기도 하셨습니다(요6:16-21)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요9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요11장)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인간의 아들로서의 본문을 망각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아들로서의 도리도 잘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구세주로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시면서도 한 어머니의 아들로서 어머니를 책임지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사역과 사명 때문에 부모공경의 도리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부모공경의 도리를 다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 십자가의 효도를 하라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어머니를 기억하시고 그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심으로 육신의 아들로서의 효도를 다하셨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효도를 십자가의 효도라 부르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효도는 고통 속에서 하는 효도를 말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자신의 한 몸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 속에서 하는 효도가 바로 십자가의 효도입니다. 예수님은 그 타는 목마름의 고통 속에서도 효도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돌보지 못하고 효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몸이 약하고 ...물론 몸이 아프면 내 손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이 듭니다. 힘들 땐 누가 옆에서 말 거는 것도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처절한 아픔과 상황 속에서도 부모님을 잊지 않으셨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자녀들 뒷바라지 하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을 생각하며 십자가의 효도를 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효는 유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효자집안에 반드시 효자가 나고 불효자 집 안에 반드시 불효자가 나옵니다. 자녀들로부터 효도받고 싶으면 지금 부모님을 잘 섬기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효도는 살아계실 때 하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작년 4월 24일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사실은 90회 생신 기념으로 온 가족이 함께 중국 여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중국여행을 앞두고 운동화도 준비해 놓으시고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여행 일주일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셨고 그만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항상 건강하실 것 같지만 좀도 오래사실 것 같지만 앗차 하는 순간에 부모공경의 계명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계명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지금 하는 것입니다.
효도는 철학이 아닙니다. 사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땅위에 주신 첫 번째 명령입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달토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버이주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1~3)

이 세상에 사는 사람 가운데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가 있기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가 있기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알에서 부화되는 즉시로 물속을 헤엄쳐 다닙니다. 송아지는 어미 뱃속에서 나오는 즉시 걷고 뜁니다. 새는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몇 달 씩 어미 새의 신세를 지는 새는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참새는 부화한 후 13∼14일이 지나면 둥지를 떠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오랜 세월 동안 부모의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갓난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유년기의 아이들 역시 부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뿐 입니까? 성인이 되기까지 양육 받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만 20세가 되어야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대접을 받는데, 그 동안 부모의 슬하에서 보살핌을 받습니다. 이러므로 자식을 위한 부모의 헌신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헌신을 당연시 하고 “부모니까 당연히 나를 위해 희생해야지, 누가 낳아 달라고 했어?” 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저는 성경에 근거하여 부모 공경의 도리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은 부모 공경의 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이르시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와 같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의 부모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잘났든 못났든 상관없이 나에게는 유일한 부모님이십니다. 나를 낳으시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면서 키우신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부모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부모님의 은덕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윤춘병 선생이 지은 “어머님 은혜”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 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어찌 어머니의 은혜만 크다고 하겠습니까? 아버지의 은혜도 마찬가지로 큰 것입니다.

송강 정철이 지은 '부의모자(父義母慈)'라는 시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버님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 나를 기르셨으니,
두 분이 아니었다면 이 몸이 살 수 있었을까?
하늘같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사오리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사람들은 부모 공경을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도 부모 공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부모 공경이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이요 윤리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부모 공경은 우리가 힘써 행하지 않으면 소홀하기 쉽습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제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태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한 달에 수십만 원 쓰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으면서 부모님에게는 단돈 몇 만원 용돈 보내드리는 것도 아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독일 속담에 “한 아버지는 열 아들을 기를 수 있으나 열 아들은 한 아버지를 봉양키 어렵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사랑 가운데 모성애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모성애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아버지들 역시 자녀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성애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서 수고한다는 사실을 어려서는 알지 못하고 장성한 후라야 알게 됩니다.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것입니다. 본능적이므로 제동을 걸기가 어렵습니다.

셸 실버 스타인이라는 작가가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그 소년은 그 나무에게로 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그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속의 왕자 노릇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서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그리고 사과도 따먹곤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때로는 숨바꼭질도 했지요.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가 말했습니다.
" 얘야, 내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먹고 그늘에서 놀면서 즐겁게 지내자.“

"난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다 커 버렸는걸.
난 물건을 사고 싶고 신나게 놀고 싶단 말야.
그리고 돈이 필요하고. 내게 돈을 좀 줄 수 없겠어?“ 하고 소년이 대꾸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내겐 돈이 없는데.” 나무가 말했습니다.
“내겐 나뭇잎과 사과밖에 없어.
얘아, 내 사과를 따다가 도회지에서 팔지 그래.
그러면 돈이 생기겠고, 그리고 너는 행복해지겠고.“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사과를 따서는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나무는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기쁨에 넘쳐 몸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즐겁게 지내자.”
“난 나무에 올라갈 만큼 한가롭지 않단 말야.”하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겐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집이 필요해,
아내도 있어야겠고 어린애들도 있어야겠고 그래서 집이 필요하단 말야.
너 나에게 집 하나 마련해 줄 수 없니? 나에게는 집이 없단다.“

나무가 말했습니다. “이 숲이 나의 집이야,
하지만 내 가지들을 베어다가 집을 짓지 그래.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 아냐.“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서는 자기의 집을 지으러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자 나무는 하도 기뻐서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 온, 얘야.” 나무가 속삭였습니다. “와서 놀자.
“난 너무 나이가 들고 비참해서 놀 수가 없어.”소년이 말했습니다.

“난 여기로부터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갈 배 한 척이 있었으면 좋겠어.
너 내게 배 한 척 마련해 줄 수 없겠니?
“내 줄기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렴.“하고 나무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멀리 떠나갈 수 있고...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겠지.“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으나...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 난 이가 나빠서 사과를 먹을 수가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뛸 수도 없고... "
"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뛰기에는 난 이제 너무 늙었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타고 오를 수도 없고..."
" 타고 오를 기운이 없어." 소년이 말했습니다.

" 미안해," 나무는 한숨을 지었습니다.
" 무언가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단 말야.
나는 다만 늙어 버린 나무 밑둥일 뿐이야, 미안해..."
" 이제 내게 필요한 건 별로 없어.

앉아서 쉴 조용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난 몹시 피곤해." 소년이 말했습니다.
" 아, 그래." 나무는 안간힘을 다해 굽은 몸뚱이를 펴면서 말했습니다.
"자, 않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얘야, 이리로 와서 앉으렴.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매우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나오는 소년은 받을 줄만 알았지 줄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나무는 소년을 위해 줌으로써 행복해 합니다. 비록 짧지만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그렇지요. 부모님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우리는 제 자식을 사랑할 줄은 알지만 부모님을 사랑하는 데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을 계명으로 명하셨습니다. 그것도 인륜에 대한 계명 가운데 맨 첫 번째 계명으로 명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핵심을 열 개의 계명으로 요약한 것인데, 이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제 일 계명으로부터 제 사 계명까지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된 계명들입니다. 둘째 부분은 제 오 계명으로부터 제 십 계명까지인데 인륜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인륜에 관한 계명 중에서 첫 번째가 부모 공경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모 공경을 그처럼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공경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범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효는 곧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려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방법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보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귀한 보배를 가져다 드릴지라도 부모님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부모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돈이 많아서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해 드릴지라도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부모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공자님은 말씀하기를 “요즈음은 부모에게 물질로써 봉양함을 효도라고 한다. 그러나 개나 말도 집에 두고 먹이지 않는가. 공경하는 마음이 여기에 따르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구별하랴”(今之孝者是謂能養 至於犬馬皆能有養 不敬何而別乎)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순종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부모를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부모님께 순종하는데도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하나님 보다 더 중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서까지 부모님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못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부모님의 말씀이 무조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지시를 내릴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순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지 않으므로 정중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을 경우에는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부모님이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2005년도 우리나라는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9.1%에 달하여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열한 명 중에 한명이 노인인 셈입니다. 그리고 혼자 사는 노인 곧 독거노인이 16.2%가 됩니다. 전국에 노인이 400여만 명인데 그 중에 60여만 명이 독거노인입니다. 그 가운데는 부양할 자식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지만, 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양을 꺼리기 때문에 혼자 사는 노인들도 상당수 됩니다.

젊어서는 자식들 키우느라 수고했건만, 자식들이 부모님을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까마귀는 새끼가 먹이를 물어다가 어미를 먹여 살리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까마귀를 인자한 새라고 해서 자오(慈烏)라고 하였으며, 여기서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늙은 부모님의 생활을 보살펴 드리지 않는 사람은 까마귀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간혹 보면, 살아생전에는 공양하지 않다가 죽은 후에 무덤을 꾸미고 거창하게 제사상을 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룻은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고 이방 모압 여인이었으나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추수하는 남의 밭에 가서 보리 이삭을 주워서 시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룻은 무슨 일이든지 시어머니와 상의하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먼저 시어머니께 드렸습니다.

또 시어머니가 시키는 일을 기쁨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룻의 효성을 귀히 보시고 보아스라는 부자와 혼인하여 행복한 생활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룻처럼 연로하신 부모님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셋째로, 부모님의 외로움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노인이 되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외로움입니다. 평생 함께 살던 남편이나 아내와 사별한 경우에는 더욱 고독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님이 외로워하지 않도록 자주 문안 전화를 하고 찾아뵈어야 합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노인학대의 유형에 보면, 노인이 의견을 말하면 간섭한다고 불평하거나 화를 내는 것, 부양자나 가족들이 노인에게 무관심하거나 냉담하게 대하는 것, 노인의 친구나 친지 등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의 경우에, 먼저 자식 부부가 부모님을 가까이 하여 대화를 나누고 집안일을 상의함으로써 가족의 일원으로서 대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를 공경하고 따르게끔 가르쳐야 합니다.

넷째로, 부모님께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도록 도와 드려야 합니다.

믿는 부모님의 경우, 주님을 잘 섬기도록 도와 드린다면 이처럼 큰 효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경우에는 전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혹 보면, 부모님이 싫어하기 때문에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는, 싫어할지라도 생명의 길이므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그러면 이러이러한 복을 주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그리하면 이러이러한 복을 주리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그리하면 복을 주리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부모 공경에는 파격적인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부모 공경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웰빙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동경합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이나 건강식품, 보약을 사다가 먹는가하면, 헬스장에 가서 열심히 운동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다고 장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으시다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부모 공경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할 때 우리의 자녀들이 이를 보고 부모 공경을 배우게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할 때 실망하고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부모가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부모를 존경하게 되고 부모의 행위를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말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갈라디아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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