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나폴레옹 시대(3)
3. 종신 통령에서 황제로 (1)
왕당파의 위험이 사라지고 입법부에는 반대파가 없고 자신의 개인 인기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니 나폴레옹이 이제야말로 제위를 향한 전진을 시작할 때라고 판단한 것은 당연하였다. 5월 6일 호민원이 공화국 제1통령에게 평화와 국가 재건의 위해한 사업에 대한 ‘국민의 감사’를 결정하고, 이틀 뒤에는 이 결정 보고를 받은 원로원이 제1통령의 임기를 10년 더 연장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문제에 관하여 협의를 받은 참의원은 국민투표의 의제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종신 통령으로 함이 어떤가?”로 고쳤다. 호민원도 원로원도 아무 이의가 없었다. 8월 초 국민투표의 결과는 찬성 356만 8,885표에 반대 8,374표였다. 이틀 뒤 8월 4일, 보나파르트가 직접 기초한 새 헌법이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공화 10년 테르미토르 16일 헌법에 관한 원로원령”으로 공포되었다. 이제 보타바르티슴이라는 특이한 새 정치제도가 국민의 동의 위에 수립되었다.
이 공화 10년 헌법은 호민원의 의원 수를 100명에서 50명으로 줄이고, 호민원을 3부로 나누어 그 힘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회의를 비공개로 하게 하였다. 원로원은 의원 수를 늘리고 증원된 의원의 임명권을 제1통령에게 주었다. 특기해야 할 것은 참의원 의원들과 장관들 가운데서 선임되는 추밀원(Conseil prive)이 신설된 점이다. 추밀원은 조약의 인준권과 원로원에서 심의되지 않은 문제들의 제안권이 있었는데,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고 제1통령의 전제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요컨대 공화 10년 헌법이 수립한 정부는 명목상으로 공화제이나 사실상으로는 군주제였다. 그러므로 2년 뒤 제정이 선포되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종신 통령제는 제정에 이르는 2년간의 구멍 마개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기간을 제정 준비에 집중하였다. 극소수의 자코뱅 과격파와 왕당파 골수분자 외에는 모든 계층의 국민이 국내 질서의 회복과 대외 평화의 실현을 쌍수로 환영하였다. 극소수의 공화파는 나폴레옹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철저히 탄압되어 이제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아직도 반보나파르트의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극소수의 맹목적인 왕당파뿐이었다. 왕당파가 영국에서 나폴레옹 암살 계획을 꾸며 프랑스로 침입했을 때 나폴레옹은 그들의 두목 카두달(Georges Cadoudal)과 피슈그뤼 및 이들과 접촉한 모로 장군을 체포하였다. 1804년 2월의 일이었다. 모로는 공화주의자로서 왕당파와의 관계를 극력 부인하였다. 그는 해외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기에게 비협조적인 장군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독일에서 활동하는 왕당파의 세력도 일소하였다. 바덴에 망명하고 있는 앙갱 공작(Duc d’Enghien)을 몰래 납치해다가 3월 20일 하룻밤 사이에 약식재판을 거쳐 총살한 후 그 시체를 미리 파놓은 무덤에 묻어버렸다. 나폴레옹의 아첨꾼들은 나폴레옹 암살 계획 사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가 암살로 급사할 경우 무서운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과대 선전을 하면서 보나파르트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은 보나파르트만이 혁명의 혼란을 막고 프랑스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나폴레옹의 수법과 야심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혼란의 방파제로서의 보나파르트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앙갱의 처형 후 일주일도 안 되어 원로원은 나폴레옹에게 ‘그의 영광처럼 그의 사업도 불후의 것’이 되도록 진정하였다. 이 진정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일반 여론이 알아차릴 시간이 지난 후, 이번에는 호민원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세습 황제로 추대하자는 동의가 제안되었다. 입법원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그 안을 선포하였다. 5월 18일 새 헌법이 “공화 12년 플로레알 28일 원로원령”으로 공포되었다. 새 헌법은 나폴레옹을 세습황제로 만든 것 이외에는 2년 전 것과 별 변화가 없었다. 이 헌법도 공화 10년 헌법이나 공화 8년 헌법과 마찬가지로 국민투표의 인준을 규정하고 있었다. 10년 임기 제1통령도, 종신 제1통령도, 이제 또 세습황제도 국민 동의의 형식을 빌리는 것에 보나파르티슴의 특색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국민투표는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 실은 기정사실에 대한 국민의 체념의 표현이었다.
나폴레옹이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르봉 왕가의 왕족들이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을 루이 17세라고 칭하였고, 그가 일찍 죽자 루이 16세의 큰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라고 자칭하면서 왕정의 회복을 주장하고 있는 판국에, 그들의 왕정을 부정하면서 다른 왕정을 창업한다는 것은 논리상 모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낳은 왕이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역사상 프랑스인 최초의 군인 황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헨에 있는 샤를마뉴의 사당을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처럼 가톨릭 교회의 성별을 필요로 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는 교황 피우스 7세에게 제관의 대관을 교섭하는 데 성공하였다. 피우스는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을 교회 앞에 무릎꿇게 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주재하기 위하여 파리로 향하였다.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대관식은 교황이 제관을 나폴레옹의 머리 위에 씌워주려는 극적인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나폴레옹은 관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일반 관중 쪽으로 돌아서서 제 손으로 관을 제 머리 위에 얹었다. 그의 제관은 다른 어느 누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해서라는 것을 온 세상에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자기 손으로 황비 조제핀 드 보아르네(Josephine de Beauharnais)에게 관을 씌워주었다. 이제 나폴레옹의 제위는 이중으로 성별되었다. 하나는 국민투표의 인민의 소리(vox populi)에 의하여 또 하나는 종교의식의 신의 소리(vox Dei)에 의하여. 피우스 7세가 나폴레옹에게 걸었던 기대는 하나밖에 실현된 것이 없었다. 그것은 혁명력을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다시 사용한 것이었다. 1806년 1월 1일부터 옛 역서가 다시 사용되었다. 이는 혁명의 종결을 알리는 또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