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동체교회연합회수련회 8/23(월)-26(목)로 예수원을 다녀왔다.
신학교시절부터 한번은 꼭 가보고 싶어했던 JesusAbbey.
그 곳에서의 며칠간의 이야기를 몇 번에 나누어서 전하고저 한다.
예수원은 2002년 돌아가신 세계적인 영성의 대가 토레이신부님이 1966년 세우신 수도원이다.
현재 90세가 넘는 Jane Torrey(현재인)사모님이 예수원의 역사에 대해서 아주 감동적으로 전해주셨다.
토레이 신부님의 조부는 무디학교의 초대교장으로 당대에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다.
그가 저술한 성령론은 아직도 성령론에 관해서는 고전적인 책으로 읽혀진다.
신부님은 전쟁으로 무너진 성공회의 미가엘신학교를 재건하기 위해서 1957년 21일간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셨다.
어느 정도 신학교 일을 마치신 후에 자신이 경험한 성령의 체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태백으로 들어오셨다.
교통 편하고 사람 많은 도시를 두고 왜 하필 강원도 골짜기 태백에 자리 잡았느냐?
정말 갈급하고 꼭 필요한 사람은 어디든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단다.
당시 가장 골짜기인 강원도 태백에 10명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텐트를 지고 들어와서
빨치산과 깡패의 위협을 겪으며 손수 건물 하나하나 지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이 골짜기 수도원은 세계 각국에서 연간 1만명 이상 찾아오는 영성수련의 메카가 되었다.
깊은 이야기는 피로가 풀린 다음 날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첫 인상을 전하고저 한다.
북부정류장에서 22.150원을 주고 태백행 아침 9시버스를 탔다.
영주까지는 고속도로를 잘 가더니 그 이후로는 곳곳마다 서는 완행버스로 시간이 4시간 좀 더 걸렸다.
태백에서 들어가는 버스시간이 안맞아 예수원과 가격이 협정된 개인택시를 탔는데 요금이 18.000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Green Movement인지 알 수 있었다.
도착하여 등록하고 방을 배정해 주는데 본 건물과 떨어진 곳으로 안내하기에
'아, 목사라서 숲속의 좋은 숙소를 주는구나' 기대하며 따라 갔는데
아이쿠! 이런 17명이 한 방을 쓰는데 그나마 물이 부족해서 화장실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곳이었다.
30년 전 군대 이후로 이런 합숙방은 처음이다.
직장생활할 때 연수를 받으면 2인1실 혹은 4인1실 목회자로 세미나에 참석하면 7인1실 정도였는데 ...
기대가 깡그리 깨어지는 아픔과 동시에 과연 17명이 한 방에 잘 수 있을까?
그동안 몸이 편한 것에 익숙해졌는데 아이쿠 이런....!
그러나 들어올 때 겸손과 순종을 기도한 바 이것도 수련이고 훈련이다 생각하며 생각을 정리하였다.
예수원에는 모든 것이 불편 그 자체였다.
일반 기도원이 이런 시설이라면 금방 문닫아야 할 정도로 시설은 낙후 되었고 먹고 입고 행동하는 것도 아주 절제가 되었다.
입소와 동시에 휴대폰은 반납하고 짧은 반바지 몸에 끼는 옷은 금지 슬리퍼 끌고 다니는 것 역시 No.
하루 몇번에 걸쳐서 말을 전혀할 수 없는 대침묵과 아주 필요한 말만 조용히 할 수 있는 소침묵 시간, 그리고 노동의 시간.
둘째날 점심에 돼지고기와 오징어 두루치기를 먹었는데 식구들 이야기 '아,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고기냐? 감개무량하다.'
세미나 덕분에 예수원 식구들이 모처럼 고기를 먹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대천덕신부님도 생전에는 수련생들과 똑같이 공동식사를 하셨고
우리 식탁에서 90이 넘은 사모님과 큰 아들 벤토레이 신부님도 똑같이 드시는 것이었다.
이 곳에서는 누구도 특권은 없으며 똑 같이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불편과 세속문화와의 단절을 통해 이곳은 태초의 영성이 숨쉬는 곳이 된 것이다.
깊은 산이 공급하는 산소로 인해 인간이 호흡하는 것처럼
세속과 단절된 원시의 영성이 있기에 기독교가 혼탁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 세계가 교회 속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원리이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세상을 즐기며 살았다.
세상의 문화를 즐기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
눈만 뜨면 해로운 것을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산다.
세상을 떠나 살 수는 없으나 가끔씩 세상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들어가서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를 알고 현재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산소가 부족한 잠수함 속에서 죽는 줄도 모르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수병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씩 구별된 공간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혼탁한 세상 문화와 가치와 구별된 가치와 문화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삶이 세속과 구별된 것이 있을 때 우리는 구별된 무리인 聖徒인 것이다.
2010. 8. 27(금)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