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베리럭스 원문보기 글쓴이: paul
포스트 코로나..
무기력해진 한국교회의 개혁방향
계란으로 바위치기일까?
1. 코로나19 펜데믹(pandemic) 현상의 영향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 펜데믹(pandemic) 현상은 전 세계를 감염병 공포상태로 휘몰아쳐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 격리, 재택근무와 더불어 식당, 카페 등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강제영업정지와 더불어 모든 국민들이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착용하는 등의 엄청난 사회문화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코로나19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세균으로 하여금 국가와 사회, 병원, 심지어 교회를 포함하여 어떤 조직이나 단체는 물론이거니와 현대과학문명의 발달로 100세 시대 의학까지 자랑하면서 바벨탑을 쌓아온 인류에게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선진국과 후진국,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가난한 자와 부자, 건강한 자와 약한 자, 종교를 가진 자와 비종교자,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자와 안 믿는 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일관적으로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예배를 구심점으로 삼는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순교를 감수하면서까지 대면예배를 드려왔는데, 방역당국의 지시에 따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영상예배로 대치해야만 하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초유의 새로운 현상을 체험해야 했다.
전국적으로 한국교회 여기저기에서 코로나19 집단발병이 나타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교주: 이만희)과 사랑제일교회(전광훈 목사)를 비롯해 인터콥선교회(BTJ 열방센터)를 정점으로 대규모집단 발생되고, 곳곳 수많은 교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기독교는 대중들로부터 지긋지긋하다는 비호감의 대상이 되고 말았으며 교회의 정통적 권위마저 땅에 떨어트려 추락시켰다.
또한 성수주일이란 전통적으로 교회참석 대면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신앙철칙이었는데, 교회가지 않고 TV나 인터넷화면을 보며 화상예배를 드리면 성수주일 하는 것과 같다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교회 재정수입인 십일조나 감사헌금 등이 격감하여 교회존립자체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2020년 3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세계경제포럼’ 등에서 “팬데믹이 바꿀 세계의 질서(The Coronavirus Pandemic Will Forever After the World Order)”라는 칼럼에서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예측했는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질서가 바꾸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든 분야가 변화될 수밖에 없는 포스트 코로나시대에 당면한 위기상황의 한국교회도 기존질서를 과감히 탈피하여 변화해야할 절대 절명의 마지막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16세기 당시 교회의 만성적 타락에 맞서 정면으로 대항해 종교개혁을 일으켜 잘못된 방향의 교회를 바로잡았던 마르틴 루터의 비장했던 결심으로 한국교회를 개혁해야만 하는 기회로 삼지 아니하고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암담해져 그들끼리 만의 교회로 사회와 점점 멀어지는 섬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개혁은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항존직(목사/장로)들의 외면과 저항에 부딪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될 수 있으나,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깰 수는 없지만 수백수천만의 계란으로 쳐서 바위를 함몰시킬 수 있다는 교회구성원인 평신도 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현실적으로는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위에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져 평신도들로부터라도 개혁의 물결을 일으켜야 한다.
비록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항존직(목사/장로)들의 외면과 저항에 당면할지라도 한국교회개혁의 흐름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역류할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며, 언젠가는 점진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개혁되어질 것으로 확신한다.
2. 한국교회는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유대교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배격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구약시대 내내 그토록 메시야를 기다렸던 바리새인들을 비롯해 당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격한 논쟁의 핵심은 마태복음 15장2절(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과 마가복음 7장3절(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과 5절(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에 기록된 “장로들의 전통(Tradition of the Elders)” 즉 예수님께서 장로들이 만들어 놓은 정결례 문제, 안식일 논쟁, 이혼문제 등 그들의 유전(遺傳)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음식 먹을 때 손을 씻어야 한다는 형식에 매인 습관은 성서의 본질이 아닌 것인데, 당시 지도자들인 장로들은 그들이 만든 비본질적인 유전과 전통에 사로잡혀 기득권을 사수하려고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해 정면 대항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마가복음 7장8~9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 라고 책망하셨다.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이스라엘 장로들의 전통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다가 AD 200년경부터 문자로 정리되고 AD 800년 무렵에 와서 ‘탈무드’로 완성되어 서기관 학파라 일컫는 랍비(Rabbi)들의 경전이 된 것이다.
즉 ‘탈무드’란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유대사회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 구전 해설한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유대교의 율법, 전통적 습관 · 축제 · 민간전승해설 등을 총망라한 유대인들의 정신적 · 문화적인 전통유산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유전과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덮어씌우고 하나님 말씀보다 우선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3절처럼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라고 책망하신다.
또한 복음을 바로 정립시키려는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10절에서는 “듣고 깨달으라”고 경고하셨다.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이 결코 복음이 될 수 없다는 2000년 전 예수님의 분명한 선언과 외침이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에게 교회개혁방향과 원칙을 이미 제시해준 셈이다.
3. 한국교회도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과감히 타파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그동안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이 복음을 빙자해 제도를 만들어 교회 깊숙이 뿌리내린 유전과 전통을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교회헌법으로 장로라 함은 교회 항존직으로 목사와 장로를 가리킴인데 이분들이 교단노회나 총회를 통해 한국교회 교회법과 제도를 만들어왔다.
대부분은 성경에 입각해 법과 제도를 제정한 반면에 성서의 본질과 상관없이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이 전통과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역사적으로 불교에 이어서 유교가 지배적이었던 한국사회에 초창기 서양선교사들이 전한 한국기독교는 불과 100년을 지나 200년을 향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근-현대사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역사를 통틀어 괄목할만한 영향과 변화를 가져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기독교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급성장하면서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공동체를 이루어 순기능의 역할을 담당해 왔지만, 성장과정에서 세속주의, 물량주의와 함께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역기능을 초래해 무기력과 비호감으로 전락되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100여년 동안 성장과정을 차곡차곡 쌓아왔으나, 한편으로는 복음과 멀어진 이른 바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라고 일컫는 교회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전통’을 가려내어 과감히 제거해 뼈를 깎는 실천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이 오셨을 때 복음과 동떨어진 철벽의 유전과 전통을 만들어 기득권을 독차지하면서 사생결단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맞아 한국교회를 개혁하려할 때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분들은 아마도 현재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일 것이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기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섭리 / providence)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지금 개혁이 안 되더라도 언젠가는 시류의 변화물결에 순응하게 될 것이라 전망한다.
우리나라 기독교 기득권 세력인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이 외면과 저항을 포기하고 회개와 더불어 겸허한 자세로 동감하며, 솔선수범의 엄청난 고비를 어떻게 넘느냐가 한국교회가 개혁될 수 있느냐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핵심과제이다.
4. 한국교회는 다음처럼 개혁되어야 한다.
[1] 장로(항존직)들이 고착화시켜 전통으로 굳어진 교회 여러 모임을 주일예배 하나로 통합하는 대개혁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주일예배를 비롯해 오후(찬양)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삼일)예배, 금요기도회, 구역예배, 성경공부 등의 여러 형태의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교회의 규모에 따라 주일예배도 1부, 2부, 3부, 4부로 나누어 드림으로 목회자는 주일하루에 마치 음향기기 앰프(amp)의 반복(repeat)을 틀어놓는 것처럼 동일한 말씀을 수차례 반복하는 교회도 즐비하다.
복잡하고 분주한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자기생업에 충실하다가 주일하루 이 모든 모임에 참석하다보면 당연히 가족, 친척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까지도 관계가 멀어져 사회와 유리되는 현상을 맞게 되어, 교회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 곳이 아니라 사회와 분리하면서 단지 그들끼리의 모임에 불과해질 뿐이다.
성도들은 주일예배를 바르게 드리고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 기독교정신으로 살면서 그리스도 향기를 이웃에게 발휘하여 영향력을 확산시킬 때 존재가치가 있는 것인데 교회는 그럴 시간을 물리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일하루에도 몇 번씩 드리는 예배는 효과 면에서도 예배의 집중력이 분산되어 예배 매너리즘에 빠져 진정성이 약화되어 “예수 믿는다” 보다는 그냥 “교회 다닌다” 그리고 “예배 드린다”보다는 그저 “예배 본다(구경)” 라고 교인들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입증하고 있음이 한국교회 자화상이다.
성경에 나오는 소외되었던 여인처럼 비록 떠듬거리더라도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보다는, 최근에 와서는 종이에 적어서 줄줄 읽어대어 세칭 ‘영혼(성령)이 없는 기도’를 하는 것이 어느새 장로들의 전통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100여 전에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했던 미국이나 유럽교회들이 오로지 주일예배 만 드리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기독교정신으로 살아가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수도 없이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이 세운 전통’에 따라 교회모임을 가진다.
주일하루에 여러 번 예배를 드리는 분들 중에는 교회 내에서 보면 진실한 크리스챤 같은데, 가정에서는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안 믿는 사람 같기도 하고, 교회 밖 사회생활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구분이 안 되고 오히려 그릇된 행동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까지도 교회세습, 교회재정 불법사용, 사기, 성적타락 등으로 사회문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여 과연 기독교가 인간을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를 가질 때가 종종 있다.
목회자들은 일주일에 수차례 말씀을 준비하고 전해야하기 때문에 내용도 부실해 성도들의 일반적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의 말씀을 깊이 있는 말씀연구와 기도가 바탕이 되어, 성령은혜로 증언함으로써 성령의 감화를 받아 일상생활에 적용하려는 기대를 갖고 예배에 참석한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다닐 때부터 수없이 늘 들어와 다 알고 있는 겉핥기식의 성경이야기를 되풀이해 식상한 매너리즘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성도들은 주일 단 한번 예배라도 성령의 은혜를 통해 진정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유럽이나 미국교회들처럼 한국교회도 주일예배 한번만 거룩히 진정으로 예배드림으로써 목회자들의 질을 향상시키고 성도들은 그 말씀으로 가정이나 친지 등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정신을 실천하여 영향력을 확산하도록 해야 한다.
[2] 장로들의 전통인 새벽기도회를 폐지하고 가정예배를 정착시켜야 한다.
‘새벽기도회’의 역기능을 예로 들면, 100여명의 교인 중 3 ~ 8명 정도가 기도회에 참석하는데 교회극소수 모임이 마치 신앙심이 가장 좋은 척도로 여겨지고 참석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교인들은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또한 교역자들은 매일새벽에 일어나 의무적으로 기도회를 주관해야하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 만성적 피로가 더해지기도 하지만 교회전통에 예속되어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분들 대부분이 교역자나 장로들, 안수집사들로 밤이 되면 일찍 잠을 청해야 하고 다음날 새벽기도회 마친 후에도 이른 새벽이므로 다시 잠을 자야한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회 참여하고 다시 잠을 자야해서 정상적인 생활리듬도 이상해질뿐더러, 가정예배를 인도해야할 분들이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아 자녀들이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함으로 신앙생활과 멀어져 한국교회의 암울한 미래를 자초한 것이다.
신앙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부터 성경말씀을 통해 꾸준히 훈련되어야 굳건해지는데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은 새벽기도회란 제도를 만들어 가정예배를 팽개쳐, 교회의 기초를 파괴하고 가장 신앙이 좋다고 여겨지는 극소수 몇 명만을 위하는 새벽기도회를 매일 드리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전통으로 만들어 놓은 새벽기도회를 과감히 폐지하고 교역자들부터 가정예배를 솔선하고 온 교우들에게 가정예배를 드리도록 권장해서, 가정에서부터 예배를 정립함으로써 교회 기초를 다시 세워 교회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새벽에 기도드림이란 형식보다는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밤이든지 일상생활에서 항상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 나아가 기도로 고백한 것을 실천하고 노력하는 삶이 365일 새벽기도회 참석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장로들의 전통인 오후(찬양)예배를 폐지해야 한다.
오전에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후예배 참석자들을 위해 권사님, 집사님들이 점심식사준비를 하는데, 식자재 구입, 식사준비, 식사배식 등을 맡은 이들은 주일예배에 집중하기 보다는 점심식사에 온통 관심과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오전에 주일예배 드리고 점심식사 후 또다시 오후(찬양)예배를 드림으로써 예배의 진정성, 권위성, 정숙성, 참신성도 떨어진다.
또한 주일하루동안 교회에 있는 셈이라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 친척이나 친구들을 만나 교제하는 만남도 사라져 사회생활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도 단절된다.
뿐만 아니라, 주일하루종일 교회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교회 밖 이웃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물리적으로 막는 셈이 되어 교회는 지역에서 고립된 섬으로 전락하여 그들끼리 만의 공동체에 불과하게 되었다.
교회는 주일오후 교회에서 오후예배 대신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확대해 지역주민들과 가까워져야 하고, 교회 밖을 향해 기독교정신을 발휘하여 사회봉사활동을 강화하면서 기독교 영향력을 확산시켜나갈 때 존재가치가 명확해져갈 것이다.
주일 오후예배를 만들어 교인들이 사회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막아놓은 전통을 과감히 허물어, 오전에 예배드리면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웃사회에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할 때 사회로부터의 고립에서 벗어나게 된다.
[4] 교역자들은 성경말씀을 ‘설교’한다고 착각하지 말고 ‘증언’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해야 한다.
“목사님께서 설교하신다.” 에서 ‘설교’라는 낱말은 교회에서 장로들이 전통적으로 만들어 놓은 유전으로 성경과 다르게 흔히 사용하는 잘못된 용어이다.
‘설교(說敎)’의 국어사전적인 의미는 ⓵ 종교적 교의를 설명함 ⓶ 타일러 가르침 ⓷ 그 가르침 등으로 풀이되어 있다.
영어사전에서는 ⓵ preaching(설교, 전도, 권고), ⓶ a sermon(설교, 훈계) 등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영어로는 "The sermon on the mount"라고 번역했다.
오늘날의 설교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새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포되어 성경말씀으로 계시된 복음을 '증인(witness)'으로서 '증거'하는 행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설교(說敎)’란 단어는 말씀 ‘설(說)’, 가르칠 ‘교(敎)’로써 불교용어인 설법(說法, 불교의 교의를 가르침)과 같은 선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성경말씀의 본질적 영적권위보다도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의 권위를 위해 은근슬쩍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교의를 가르치는 것과 기독교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명확히 구분해야 하므로 기독교의 잘못 고착화된 '설교'란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설교’란 말 뜻대로 단지 성경말씀을 마치 학교선생님이 교과서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여 가르치는 기능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증거자 없이도 인터넷이나 성경해설자료들을 참조해서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 ‘증언’이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한 성경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 성령의 능력으로 증언함으로써 성도들도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특수한 영역이기에 ‘증언’이라 해야 한다.
성경말씀을 알기 쉽게 설명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설교의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미 선포되어 계시(啓示)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인(證人)으로서 증거(證據)하는 것이므로 시급히 ‘증언(證言)’이라는 말로 대체해서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동무, 인민, 민중”이라는 말은 원래 참 좋은 낱말이었다. 그러나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의 남북관계에서 공산주의 북한이 이들 단어들을 빈번히 사용했으므로 그 좋은 낱말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기 껄끄러운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 이단종파에서 이사야서 43장12절을 근거로 이미 '증언‘이란 말을 사용했으므로, 정통기독교회에서는 ’증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거나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없었던 연유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의미보다는 복음을 증거 하는 행위이므로 ‘증언’이라고 해야 성경적으로도 옳은 말이다.
서도행전 1장8절에 나오는 ‘증인(證人)’도 그리스어로 ‘마르티스’란 말로 ‘증거 하는 사람’의 의미라서 복음을 전할 때 바로 ‘증언’이 되는 것이다.
(1) (이사야서 43장 12절)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3) (사도행전 2장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4) (사도행전 13장 31절)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5] 하나님의 ‘일반적인 보편적 은혜’와 특별계시의 은혜‘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보편적 은혜’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은혜’란 범주(category)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혼동시켜 왔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는 산과 바다, 햇볕과 공기, 눈과 비, 등 자연현상으로 70억이 넘는 세계 온 인류 누구든지 똑같이 받는다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암에 안 걸린다는 등 생로병사에서 혜택을 받고, 교통사고가 발생해도 유일하게 살아남는 등 천재지변에서도 무탈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에서는 누구나 생로병사는 똑같은 것이다.
아침이 되면 누구든 해를 맞이하고 공기를 마시며, 눈비가 오면 누구나 다 함께 눈비를 맞는 것처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은 혜택의 하나님은혜를 말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식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구원을 확신하며 성경말씀이 중심되어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적인 은혜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성경말씀 대로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거듭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와 특별은혜를 구분 없이 혼동시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하면 만병통치할 수 있다고 우겨왔던 신유은사를 주장하면서, 왜 보이지 않는 미미한 세균인 코로나19 문제도 교회는 절대로 해결 못하는가의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영역을 하나님의 특별은혜 범주에 끌어들여 혼란을 불러와 복음의 질서를 혼탁하게 조성시켜온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이 허구였음을 고백하고 타파해야할 때이다
.
[6]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 라는 시대적 상황을 구분해야 한다.
구약시대인 ‘성부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도 있었으며, 예수님 당시 성자의 시대에는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는 시대였다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는 ‘성령의 시대’로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거나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은 100% 거짓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66권에 완벽하게 계시해 놓으셨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완전한 계시를 교역자들의 증거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발견하고 믿음으로 터득하고 깨달아 나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실 말씀을 성경에 100% 완전 계시해 놓으셨다.
만일 어느 누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의 임재를 봤다고 한다거나, 하나님이 꿈속에서 자기에게 계시했다고 떠벌리는 말은, 다시 말하면 성경의 완전한 계시가 부족해 추가로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 것으로, 계시(성경)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이단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성부시대나 성자시대에 일어났던 시대적 상황을 혼동해 지금의 성령시대에 일방적으로 억지로 짜 맞추어 적용하는 것은 성서적 오류를 범하는 무지의 소산이다.
성부시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대화했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 만나서 계시를 받았다는 등, 성자시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에 교회에서 기도해 중환자를 고쳤다는 말을 퍼트리는 것은 그야말로 무식함의 극치일 뿐이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이젠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훌훌 털어버리고 성서로 돌아가 전근대적인 하향수준을 벗어나 누구나 다 같이 고르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성경중심의 가치관을 확립함으로써 현대인들이 다시 교회를 찾도록 개선해야 한다.
[7] 하나님 믿는다고 무조건 부자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일반적 은혜’를 혼동하면서 교회에 와서 열심히 기도하면 부자가 된다는 기복신앙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일삼아 왔다.
기도만 하면 무조건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대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6-12)”,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라는 구절처럼 근면, 노력, 정직,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전제를 강조해 자본주의 신용사회에서 성경말씀 대로 살면 바람직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해야 한다.
교회가면 이른바 속칭 ‘하나님 찬스’로 무조건 잘되어 부자 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나 안 믿는 자 누구든지 성경말씀에 따라 근면, 노력, 정직, 성실하게 살면 누구나 잘될 수 있다는 덕목을 전해 하나님의 일반적 보편적인 은혜를 전해야 한다.
기독교는 영리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집단도 아닐뿐더러 물질적 축복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의미에 소중한 가치를 두는데 집중해야 한다.
부자가 되는 것은 경제의 영역이지 종교의 영역이 아님을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경제영역을 무시하고 오직 교회에서 기도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선무당과 다를 바 없는 행태는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된다.
[8] 환자가 신유은사로 병 낫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국교회 뿌리박힌 기복신앙의 하나로 신유의 은사도 바르게 증거 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 2000여년 전에는 변변한 의료시설도 없었을 때 예수님은 여러 환자들을 말씀을 통해 고쳐주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병고침 은사를 왜곡시켜 한국교회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은 신유의 은사를 빙자하여 기도로 병고침을 목적으로 장로(항존직)들의 영적인 능력으로 호도해 신유은사를 단골메뉴로 삼는 수많은 사이비기독교(이단)가 태동하고 존립하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구약시대에는 ‘성부의 시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시어 사람들에게 직접통치하시고, 말씀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고 문제를 즉시 해결해주셨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자의 시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비롯해 사람들과 직접 부딪혀 말씀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고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다.
오늘날 ‘성령의 시대’에는 문화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병원도 의사도 수없이 많아져 기독교인들도 병이 발생하면 반드시 의료혜택을 통해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
교회에서 예수님 당시 복음의 수단으로 행했던 신유은사를 빙자하여 암환자까지도 기도로 고칠 수 있다고 현혹하는 무지한 일이 교회에서 더 이상 발생해서는 안 된다.
어떤 병이라도 기도하면 완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도 중병에 걸려 병원치료를 받지 아니하면 결국 위험해진다는 점은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병을 고쳐준다고 호도하는 신유의 은사를 주장하지만, 정작 코로나19 하나에 꼼짝 못하는 현실이 완전허구였음을 확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암환자를 치료하지 아니하고 기도해서 고친다고 한다면 그 환자는 시간이 지나가면 더 악화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기독교는 무당과 다름없는 하등종교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슬로건처럼 이젠 육체적 질병은 병원에서 심리적 안정치료는 교회에서“라는 표어를 제창해야 하고 병 고침은 기독교의 영역이 아니라 치료기관의 영역이란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질병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에 속한 것으로 누구나 건강관리가 잘못되면 걸릴 수 있는데, 성경말씀에 의지하는 기독교인들은 술, 담배, 마약 등을 지양하고 절제하면서 건전한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과 생활운동을 한다든지 규칙적 생활로 건강관리를 잘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보편적인 현상을 강조해야 한다.
다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서 본다면 기독교인들은 질병에 걸렸거나 죽음에 직면하더라도 내세의 희망으로 치료에 전념하면서 신앙생활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가져 스트레스를 조절한다든지 구원의 확신으로 임종까지도 담담하게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9] 구원과 영생의 확신으로 영성을 길러야 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말씀을 거역하여 원죄를 범하고 인류가 끝임 없는 범죄를 저질러 하나님과 멀어졌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동시에 우리 죄를 대속해주심으로 구원과 영생의 은혜를 얻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단하고 유한한 세상에 살더라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엔 죽음 이후에도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릴 수 있음에서, 현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내세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더라도 담담하게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어 늘 밝은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은 영성을 쌓아가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구원과 영생의 확신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데 가장 큰 뒷받침은 현생에서 보다 진실하고, 보다 선하며, 보다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 때 가능한 것이다.
천국을 보장받은 사람들이라 이 세상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참되고 착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증언해야 한다.
하나님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면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선한 영향력)를 확산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10] 오직 ‘믿음’은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교회공동체가 비호감의 대상이 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교회는 양적, 질적 성장에만 치우쳐 믿음 만 강조하게 되어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비호감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대형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동네마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무수히 교회십자가를 볼 수 있는 세계적으로도 선교가 크게 성공한 나라가 되었으며, 인구분포도 5사람 중 한사람 정도는 교인이다.
교회가 커지고 교인이 많아진다는 점은 분명히 하나님의 큰 은혜일 수 있는데, 핵심문제는 교회가 커진 만큼, 교인 수가 많아진 만큼 한국사회에 선한 영향력이 있느냐와, 신뢰와 정직한 나라가 되었느냐에 관한 물음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교회가 비호감이 되고 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별다른 구별이 안 되어 오히려 지탄을 받는 일들이 허다해 교인이라고 내세우기가 민망한 처지가 되었다.
한국교회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에서인지 ‘오직 믿음’ 만을 강조하는 잘못된 전통을 만들었다.
신약성서 히브리서가 ‘믿음’장이라면 야고보서는 ‘행동’장이라 일컫는데 로마서를 읽다가 회심한 마르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면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낮추었으며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이라는 믿음을 확신하고 강조했다.
교회만 와서 말씀 잘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이른바 ‘믿음’만 잘하면 된다고 부추겨 가정이나, 이웃, 직장, 사회생활에서의 ‘행동’은 개차반인 경우가 너무 허다해 실망을 줌으로써 비호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성경말씀을 깨달은 만큼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하고 기도로 고백한대로 살려는 실천이 중요하며 찬송한 가사 대로 기독교인들의 삶이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여호수아 1장7절을 보면,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라고 구약에서도 밝혔는데, 한국교회는 ‘행위‘보다는 ’믿음‘에 더욱 치우쳐 강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믿음’이냐 ‘행동’이냐는 기독교역사 2000년 동안 줄기찬 논쟁거리였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야고보서 2장 17절)이란 말씀처럼 믿음은 행동이 따라야하는데 믿음과 행동은 결국 기차레일처럼 항상 병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 등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행동이 보편화될 때 참다운 기독교의 존재의미가 살아나게 되어 예수님 제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스스로의 삶을 통해 거짓과 악함과 추악함과 교만이 팽배한 사회를 점점 정화시켜 나갈 때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1] 누가 진정한 크리스챤인가?
교회에서 흔히들 ‘oo집사는 믿음이 좋다.(나쁘다),’ ‘oo장로는 은혜를 받았다.’ 라는 말들을 자주한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 없다,’ ‘은혜 받았다.’ 라는 말들은 인간이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망령된 말이 되는 것이다.
신앙의 척도를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므로 함부로 말로 단정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갈라디아서 5장22절에서 신앙심의 결과를 성령의 9가지 열매로 규정짓고 있어서, 9가지 항목에 스스로를 솔직하게 대입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누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느냐의 구별은 피상적으로 전해 내려와 뚜렷한 기준도 모호한 주관적 단정인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목표로 실천하려 최선을 다하는 성도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22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교회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예배를 중심으로 교육, 선교, 봉사, 교제 등은 결국 성도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데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이웃과의 관계(대인관계)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지만, 타인을 미워하고 질시하며 기쁨보다는 노여움과 슬픔을 주며 화평보다는 이웃과 싸움으로 불안을 주는 경우가 즐비하다.
자신과의 관계(대아관계)에서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으로 살아야 하는데, 걸핏하면 화를 내고 성질을 부려 인내심 부족으로 주위에 불편을 조성하며, 어떻게든 내 것으로 쟁취하겠다는 욕망, 착한 생각보다는 악독한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대신관계)에서도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하나님께 충성보다는 세상물질문명의 세속적 삶에 빠져 있으며, 온유한 마음보단 교만이 가득 차서 절제생활은 뒤로해, 해서는 안 될 일, 가서는 안 될 곳, 봐서는 안 될 것,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고 나쁜 나무의 최종평가는 나무의 열매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평가는 오직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얼마나 맺어가는 노력을 하느냐이므로 성도들의 삶의 과정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
즉,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진실한 기독교인을 구분하고 가려낼 수 있는 바로미터(기준표)라 할 수 있다.
예배참석하고 기도와 찬송, 봉사와 헌금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의 9가지 열매를 행함으로 맺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성도들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12] 십일조에 대한 의식변화가 있어야 한다.
구약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셔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부터 죄를 범하게 된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마다 노아가족을 살려 구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심판)와 사랑(구원)으로 구약역사는 점철되어 있다.
마침내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을 때 역사적인 사건은, 성전의 휘장이 갈라져 계명을 반드시 모두 지켜야 하는 구약 율법시대를 청산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은혜의 시대를 선포하심이다.
마태복음 5장17절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한 예언을 다 이루심으로 율법시대를 뛰어넘어 은혜의 시대를 선언하신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율법을 613개 또는 그 이상의 계명으로 분류해 정리하기도 했는데, 신약시대에 이르러 특히 한국교회에서 이 율법문구를 지적하면서 지키는 교회는 전혀 없고, 하나님 은혜만을 강조하지만 유독하게 말라기서 3장10절에 나오는 온전한 십일조 구절을 단순 인용해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바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613개 또는 그 이상의 조항이나 된다는 율법의 배경이나 의미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다만 교회 수입의 주요원천이 되는 십일조만을 교인의 의무인 것처럼 강조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또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 통합해 드리면 되는데 한국교회는 십일조 외에도 한걸음 더 나아가 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구역헌금, 특별헌금, 부활절헌금, 추수감사절헌금, 성탄절헌금, 신년감사헌금, 생일감사헌금, 주정헌금, 작정헌금, 심방감사헌금, 각기관헌금 등 장로(항존직 : 목사/장로)들이 유전으로 만들어 놓은 헌금거두기를 위한 각종 헌금명목들을 붙여 낯 부끄럽기 짝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구약시대 십일조 개념은 성전유지비용과 더불어 유목민 공동체에서 타 족속들이 가축을 모두 탈취해가거나, 병으로 가축들이 몰사했을 경우 십시일반 거둔 것으로 도와주어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시켜주는 나눔 복지의 기능도 담당했었다.
오늘 날 한국기독교의 현실은 십일조를 거두어 교역자들에게 수많은 명목을 붙여 사례비(급여)로 지출하고 교회확장 및 재건축비 충당, 교육관과 부대시설비, 교회차량구입 및 유지비, 기도원이나 수양관 마련과 묘지구입 및 유지비 등 교회 울타리를 높이는데 대부분 사용되어 교회 울타리 밖 사회를 위해 제공되는 지출은 거의 없거나 교회재정 전체의 비율로 보면 최소한의 명목에 국한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명분으로 교회에서 받은 십일조나 감사헌금이지만, 사회 환원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려는 노력은 외면하거나 미미하고 실제로는 자기들끼리만 사용하고 마는 것이기에 십일조란 진정 하나님께 드린 것이 맞는 것인지조차 회의를 느끼게 된다.
구약성서 구구절절을 지키는 것은 모두 포기했는데 말라기서 한 구절만을 인용하면서 마치 교인의 의무처럼 강요해온 십일조는 명분도 퇴색해졌으며, 교회의 일방적 십일조 사용방법에도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는 어떤 공동체든지 유지하려면 비용이 당연히 필수이기 때문에 교회공동체도 구성원인 교인들이 자발적 헌금으로 부담하도록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둘째로 지금까지 교회 울타리만 높이는 비용을 최대한 절감해 교회 울타리 밖 이웃사회에 나눔 복지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전환함으로써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율법지킴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드려야 하는 공감대를 조성해야 한다.
내가 벌어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생명 돌봄 사랑에 참여하는 기능이라는 기독교 가치관을 정립시켜야 한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한다는 억압적이고 고전적인 관념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교회유지비용, 소외된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 나눔 복지를 실현하는 생명 돌봄에 동참하는 의미로 제도를 개선해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교회구성원들과 공감대를 이루는 의식의 변화를 이룩해야 한다.
교회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투명하게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봉사로 전환해, 교회수입의 많은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면 복지의 통로가 되어 성도들은 자긍심으로 아까운 마음 없이 흔쾌히 헌금을 드리게 된다.
한국은 비교적 정부행정제도를 통해 엄청난 예산으로 복지제도가 다방면으로 활성화되어 있는데, 이젠 교회도 이웃사회에 합리적으로 베푸는 기능이 확장되어 복지창구가 될 때 성도들도 공감대를 이루어 아까운 생각을 벗어나 교회헌금에 동참할 것이다.
선진국처럼 어떤 이들이 생을 마감할 때 남은 재산의 대부분을 교회나 학교 등에 기증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런 비영리기관들을 통해서 나눔 복지를 실현하는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삶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분위기 조성과 풍토를 교회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 정착시켜나가야 한다.
글쓴이 alesei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