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와 꽃
황현중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는 언제나
귀퉁이 허물어진 토방이었고
벗은 발목은 늘
황톳빛 노을 묶는 시간이었습니다
워낭 소리에 소여물 냄새 흐르고
먼 데 개 짖는 소리
초가지붕 위에 이윽고 박꽃 벌면
막걸리 거나하게 고인 아버지 가슴에
마당귀 채송화라도 피었을까
눈자위 자욱 꽃불 밝히시고
쇠꼴 수북한 바작 속에서
개망초를 꺼내시던 아버지의 손,
적막한 절간의 풍경처럼
개망초 한 다발 처마 밑에 걸렸습니다
달빛 아래 너울너울 하얀 소리들
한 떨기 승무를 나는 보았습니다
흙 속에 파묻힌 아버지 일생에
꽃 따위는 없을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 지금도 부끄럽습니다
흙으로 살았던 아버지의 가슴은
언제나 꽃밭이었다는 걸
왜 나는 몰았을까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이 들어와
가파른 내 가슴에 꽃 심는 날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짓마다
시가 되어 꽃피는 날 있습니다
- 『우리詩』 2023년 2월호
그리움과 아름다움은 늘 과거이다. 돌아갈 수 없고 만날 수 없기에 그때 그 사람은 더욱 그립고 아름답다.
벌써 50여 년 전 이야기이다. 내가 다녔던 한재초등학교, 그 뒤에는 병풍산이 있다. 전남 담양과 장성을 가로지르는 갈재에서 뻗어 우뚝 솟은 산. 일 년에 두 번씩 소풍 가고, 머루랑 다래랑 따 먹고, 가재 잡고, 야영하고, 연애하고, 녹음기 틀어 놓고 노래하고 춤춘 산. 산이 높으니 골짜기가 깊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땔감을 마련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도시락 싸 들고 병풍산에 들었다. 갈퀴로 마른 솔잎을 긁어모으고 조선낫으로 잡목을 베어 칡넝쿨로 묶었다. 어른 키보다 두 배가 큰 짐을 지게에 실었다. 원두막만 한 지게를 지고 산에서 마을로 내려갔다. 십 리 길을 작대기로 지게 다리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긴 행렬. 해 질 녘 장관이었다. 지게를 진 어른들은 고단하고 힘들겠지만, 바라보던 어린 우리에게는 한 폭의 풍경화이었다.
아버지는 이 땔감을 말려 밥을 짓고 소죽을 쑤었다. 또, 오일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벌었다. 돌이켜보니 “아버지의 자리는 언제나 / 귀퉁이 허물어진 토방이었고 / 벗은 발목은 늘 / 황톳빛 노을 묶는 시간이었습니다.” 50년이 넘게 묵은 그 고단한 명화에서 가장 빛나던 정수는 지게 위 땔감, 그 땔감 위에, 장원급제한 사람의 머리에 너풀거리는 어사화처럼, 근사한 파리똥 나뭇가지 서너 개였다. 나비를 데리고 다니며 춤추게 하는 빨갛고 토실한 그 파리똥은, 내가 다시는 볼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이었다. 서산에 걸린, 농익은 해와 어쩌면 그렇게 어울렸을까! 그것은 열매나 꽃이라기보다는 둥글고 온전한 ‘삶춤’이었고, 절창인 ‘삶시’이었다. “적막한 절간의 풍경처럼 / 개망초 한 다발 처마 밑에 걸렸습니다 / 달빛 아래 너울너울 하얀 소리들 / 한 떨기 승무를 나는 보았습니다.”
옛날 우리네 아버지는 늘 말 없는 집안 기둥이었다. 속은 한없이 넓고 따뜻하지만, 밖으론 냉철하고 권위 있는 철학자이었다. 가난과 시련과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승화하여, 자신에게 엄격하고 이웃에게 관대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초인이자 마을 수호신인 당산나무이었다.
고귀한 것은 힘들고 드물다(스피노자). 나를 있게 한 고귀한 분, “나도 모르게 / 아버지가 되는 때”, 마음속에서 시리게 떠오른다. 그립고 아름다운 그분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아버지!
- 본지 편집위원 김정원,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우리 詩》, 14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