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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渴求德)으로 마을이 구성되어있다. 으로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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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의 이모저모 http://blog.naver.com/asherjin?Redirect=Log&logNo=140139778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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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oklsh&logNo=87047594육의정 정자
http://younghwan12.tistory.com/3738두곡고택 영당
http://cafe.naver.com/ohmygyeongju/134 한국의 역사마을
낙선당 손숙돈, 이향정 이범중, 대성헌 이능단의 생몰연대는 나중에 찾게 되면 알려드리겠고 특히 대성헌 이능단과 두곡고택 이식중의 호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질 않네요. 이 것은 끝까지 찾아지지 않으면 호없이 그냥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양동마을 – 종합 안내판
중요 민속자료 제 189호
이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의 집성촌으로 국내에서는 조선시대 초에 지어진 고가古家들이 가장 많이 보존된 곳이다. 마을 앞으로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쪽에 설창산, 남쪽에 성주산으로 둘러싸인 5백여 년 전통의 유서 깊은 반촌마을이다.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가옥이 파손되었지만 아직도 기와집 54채와 초가집 100여 채가 우거진 숲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84년 마을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으며,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이 곳을 방문했다. 경주 손씨는 양민공 손소襄敏公 孫昭 1433~1484가 결혼 후 처가인 이 곳에 처음 들어와 살며 뿌리를 내렸고 여주 이씨는 찬성공 이번贊成公 李蕃 1463~1500이 손소의 장녀와 결혼해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시작됐다. 그 동안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마을에는 통감속편通鑑續編 국보 283호과 무첨당無忝堂 보물 제411호, 향단香壇 보물 제 412호,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손소영정孫昭影幀 보물 제 1216호 등 보물 넉 점, 그리고 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 23호을 비롯한 13점의 중요민속자료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서백당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조선 세조 2년1456
이 집은 경주 손씨 중 양동마을에 처음 들어온 손소孫昭 1433~1484가 지은 종택이다. 집터를 잡아 준 지관은 ‘세 사람의 현인이 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과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이 태어났다. 집 이름은 손중돈이 ‘종손은 인내를 길러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이름을 ‘참을 인忍자 1백 번을 쓴다’는 서백으로 지었다. 사랑대청 옆에 작은 담장을 두어 안팎을 구분했다. 정원에 있는 수령 5백여 년 된 향나무는 집을 지은 후 심은 기념수다.
관가정 觀稼亭
보물 제442호 조선 15세기말~16세기 초
이 집은 '농사 짓는 풍경을 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정자에서 내려다 본 들판의 풍경이 아름답다. 조선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이 분가할 때 지었다. 원래 대문과 담이 없었는데 1981년 보수할 때 새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안채는 대문에서 볼 때 왼편에 큰 방과 마루를 놓았다. 그러나 손중돈은 ‘형이 일찍 죽었는데 왼편에 큰 방을 짓고, 생활하면 동생이 형으로 바뀌는 것과 같아 안 된다’며 오른편에 방과 마루를 배치했다.
낙선당 樂善堂
중요민속자료 제73호 조선 중종 35년1540
이 집은 경주 손씨로 양동마을에 처음 들어온 손소孫昭의 셋째 아들 망재 손숙돈忘齋 孫叔暾이 분가할 때 지었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낙선당 손종로樂善堂 孫宗老의 후손이 살고 있다. 후에 지은 사랑채 이름이 낙선당이지만 집 전체를 낙선당으로 부른다. 대문 좌우로 마구간과 행랑방을 두었고 안채는 정면에 안방과 대청을 놓았으며, 건넌방은 아래쪽으로 붙였다. 안마당에 있는 아궁이는 일반 주택에서 보기 힘들며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에 비해 안채와 사랑채가 낮은 기단에 세워졌다.
수운정 水雲亭
중요민속자료 제80호 조선 선조 15년1582
이 정자는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의 증손자인 손엽孫曄 1544~1600이 학문 연구를 하기 위해 지었다. '물과 같이 맑고 구름과 같이 허무하다'는 ‘수청운허水淸雲虛’에서 정자 이름을 따왔고 자신의 호는 나머지 글자인 '청허淸虛'로 했다. 임진왜란 때 경주에 있던 이성계의 초상화를 이 곳으로 옮겨 화를 면했다. 난간을 두른 정자는 마루가 높아 뒤쪽에서 출입해야 한다. 대청의 팔각기둥에는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으며 양동마을에 있는 정자 중 경치가 가장 뛰어나다.
안락정 安樂亭
중요민속자료 제82호 조선 정조 4년1780
이 곳은 경주 손씨 문중의 서당으로 여주 이씨 문중의 서당인 강학당과 쌍벽을 이룬다. 정자의 기능도 함께 갖췄으며 대청 정면 윗부분에는 안락정, 대청 안에는 성산재聖山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세 칸짜리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방을 두었다. 대청은 앞을 터서 시원하고 양 옆의 방은 추운 겨울을 대비해 온돌로 만들었다. 대청의 앞면과 뒷면은 둥근 기둥을 세웠고 온돌방에는 네모 기둥을 놓았다. 적당히 휜 나무를 대들보로 사용해 집 전체가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정충비각 旌忠碑閣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조선 정조 7년1783
이 건물은 손종로孫宗老 1598~1636와 그의 노비였던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의 명으로 세워졌다. 손종로는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의 5대 손으로 광해군 10년1618 무과에 합격했으나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인조 때 남포현감을 지냈고 병자호란이 터지자 억부와 같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경기도 이천 전투에서 전사했다. 출입문 뒤에 정충각을 세우고 우측에 충노각을 배치했으며 사면에 가는 창살을 세워 밖에서도 비문이 잘 보이도록 했다.
무첨당 無忝堂
보물 제411호 조선 중종 35년1540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경상감사 때 물봉 언덕에 지은 종가 별채로 이언적의 맏손자인 무첨공 이의윤無忝公 李宜潤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며 사랑채를 겸하고 있다. 무첨당에는 두 개의 현판이 있다. '좌해금서左海琴書-선비는 책과 함께 풍류도 알아야 한다'는 흥선대원군이 썼다. ‘물애서옥勿厓書屋'은 중국 사신 조광趙光이 선비들에게 시험을 치렀는데 모든 선비가 최상의 점수를 받자 '물봉언덕의 학문하는 집'이라고 써준 것이다.
향단 香壇
보물 제412호 조선 중종 38년1543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병환으로 누운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중종이 지어주었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동생 이언괄李彦适에게 물려준 후 여주 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됐다. 축대 위에 세워진 안채는 하인들의 공간인 행랑채와 쉽게 구분된다. 향단은 일반 집과 달리 중앙에 안방을 두고 주위에 방, 대청, 부엌 등을 배치했다. 원래 99칸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허물어져 56칸으로 줄었으며 1976년 보수됐다.
수졸당 守拙堂
중요민속자료 제78호 조선 광해군 8년1616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守拙堂 李宜潛 1576~1635이 지었으며 여주 이씨 수졸당파의 맏이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사랑채는 이의잠의 6대손으로 대사헌을 지낸 양한당 이정규養閒堂 李鼎揆가 영조 20년1744에 증축했다. 바로 앞에 양졸당파의 맏이가 살고 있는 양졸정이 있다. 두 집의 진입로는 능선을 활용해 서로 보이지 않도록 자리 잡고 있다. 대문간채는 사랑채와 떨어져 지붕을 낮춰 세웠고 안채 뒤쪽으로 언덕 위에 사당이 있다.
두곡영당 杜谷影堂
향토문화재 조선 인조 14년1636
이 곳에는 조선 선조 때 경상도 하양 현감을 지냈던 수졸당 이의잠守拙堂 李宜潛 1576~1635의 영정이 봉안됐다. 이의잠이 하양 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자 주민들이 보답으로 그의 영정을 만들어 하양유림河陽儒林에 모셔 놓았다. 그 후 경주유림慶州儒林으로 넘겨졌으며 이의잠의 후손들이 두곡고택杜谷古宅 옆에 영당을 건립하고 영정을 이 곳으로 옮겼다. 매년 음력 9월9일인 중양절에 추모제를 지낸다. 전면에 담장과 함께 삼문을 설치했으며 영당 뒤 언덕에는 동호정이 있다.
심수정 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 조선 명종 15년1560
이 정자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동생인 농재 이언괄聾齋 李彦适 1494~1553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 이언괄은 벼슬을 포기하고 형 대신 노모를 모셨다. 철종 때 소실됐으며 1917년경 새로 지었다. 네 그루의 회화나무를 손상시키지 않고 집을 지어 나무와 건물이 조화를 이룬다. 정자 이름은 이언괄이 지은 한시에서 따왔다.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양동마을의 서당역할을 했다. 마을의 정자 중 규모가 가장 크며 누마루에서 향단이 잘보인다.
겉은 단순하면서도 속은 복잡한 사람이 있고, 겉은 복잡하면서도 속은 단순한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편할까? 당연히 후자다. 사귐에 별 탈 없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는 어떨까? 아무래도 전자다. 조작은 단순하고 속은 내가 알 필요 없는 복잡함이 있는 기계가 편하다. 집은 어떨까? 양동마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집인 심수정은 간단한 가운데 복잡함이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이언적의 동생인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 1560년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을 찬찬히 읽고 있으면 후손들을 위한 문중의 안배가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에 놀라게 된다. 그 치밀한 안배를 이렇게 단순한 평면에 녹였다는 것도 놀랍다. 이 집의 평면은 단순하다. ㄱ자다. 북동쪽 획에 방이 한 칸 있는데 이름이 이양재다. 그리고 북서쪽 획에 방이 하나 더 있다. 거기에 맞춰 북동쪽 획에 마루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삼관헌이고, 북서쪽 획에 누마루가 있는데 이름이 함허루다. 이 간단한 집에 편액이 심수정, 이양재, 삼관헌, 함허루, 모두 네 개나 달렸다.
먼저 이 집이 어디를 향해 앉았나 보자. 이양재에서 문을 열면 삼관헌 마루를 통해 시선은 느티나무를 건너 양동천을 지나 무첨당 종가의 사당에 닿는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 가지를 기르라(二養)’는 뜻에서 편액의 이름을 따왔다. ‘음식을 절제하여 몸을 기르고, 말을 삼가 덕을 기르라’는 의미다.
‘세 가지를 보면 알 수 있다(三觀)’는 뜻인 삼관헌은 ‘어진 사람은 그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일처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굳센 사람은 그 뜻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데서 따왔다. 그 의미를 물적으로 강화하기 위해서 삼관헌에서 무첨당 사당으로 난 문이 세 개요, 그 문을 열고 보이는 느티나무도 세 그루다.
그리고 함허루의 ‘함허(函虛)’는 허가 꽉 차있다는 뜻이 아니라 ‘꽉 차있어도 텅 빈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말로 증자가 안회의 겸손함을 추모하여 한 말이다.
마지막으로 심수정(心水亭)의 경우 ‘정(靜)이라는 한 자는 마음속의 물과 같다’는 이언괄의 말에서 따왔다. 이 간단한 집에 이렇게 많은 상징과 구조가 움직이고 있다. 진리는 간단할지 모르나 그것을 표현하는 상징은 복잡하다.
이향정 二香亭
중요민속자료 제79호 조선 숙종 21년1695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6대손으로 온양 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二香亭 李範中 이 숙종 21년 1695경에 지은 것이다. 안채 꺾인 곳에 부엌을 두고 왼쪽으로 작은 창고와 아래방, 앞쪽으로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했다. 큰 방 뒤편에 있는 사랑채는 부엌과 툇마루가 있는 서재로 꾸며 기능상 변화를 주었다. 건넌방의 마루는 넓게 확장하고 난간을 돌려 누마루의 정취가 느껴진다. 사랑채 오른쪽 끝에 중문을 세웠고, 건물 사이는 담을 쌓아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다.
상춘헌 賞春軒
중요민속자료 제75호 조선 영조 6년1730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5대손인 동고 이덕록東皐 李德祿 1677~1743이 지은 사랑채다. 이덕록의 증손으로 대사간을 역임한 이정덕李鼎德이 증축했고 후손인 상춘헌 이석찬賞春軒 李錫贊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랑채 마당 동편에는 동산을 계획적으로 꾸몄다. 본채 가운데에 안대청과 건넌방을 두었고 안대청과 사랑대청에 있는 가운데 기둥은 둥글게 만들었다. 사랑마당 북쪽에 사당이 있으며 북쪽 돌 축대에는 계단을 조성하고 꽃나무를 심어 사랑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성헌 對聖軒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조선 영조 8년1732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11대손인 이능단李能亶이 분가할 때 지었다. 대성헌은 '성주봉을 마주라고 있다'는 뜻으로 멀리 무첨당과 성주봉이 잘 보인다. 본채와 옆채가 붙어있으며 사랑채는 대청과 툇마루가 붙은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행랑채에는 대문을 세우고 방을 놓았으며 가축을 길렀다. 각 건물은 소박하고 간결하여 막돌로 기단과 주춧돌을 쌓고 그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웠다. 사랑채의 대청 앞쪽은 두 칸에 여덟 짝 문을 기둥 없이 달고 네 짝씩 접어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두곡고택 杜谷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7호 조선 영조 9년1733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6대 손인 이식중李湜中 1711~1777이 분가할 때 지은 것으로 양동 윗마을의 대표적인 가옥이다. 그 후 이언적의 동생인 이언괄의 14대손-두곡 이조원杜谷 李祖源이 구입해 후손들이 '두곡고택'이라고 불렀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 마당이고 건너편에 사랑채, 아랫채, 안채가 있다. 사랑 마당에는 산의 경사지에 감나무 등 과일나무를 심어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다. 부엌 뒤에 있는 디딜 방앗간은 마을에 몇 개 안 남은 것 중 하나다.
근암고택 謹庵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6호 조선 정조 4년1780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8대손인 태로 이정수台老 李鼎壽 1758~1784가 지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이희구李熙久가 홍릉참봉을 지냈기에 참봉댁으로도 불린다. 대문채 뒤편에 안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 거리를 두고 사랑채를 배치했다. 조선시대에 이처럼 안채, 사랑채, 대문채를 각각 떼어서 배치한 경우는 드물다. 각 건물의 규모는 작고 안채와 사랑채는 둥근 기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1900년대 들어서 사랑채가 불에 타자 건물을 팔작지붕 형태로 신축했다.
경산서당 景山書堂
향토문화재 조선 19세기 초
이 서당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맏손자인 무첨공 이의윤無忝公 李宜潤 1564~1597을 모시기 위해 강동면 오금리에 경산서원으로 세워졌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강동면 안계리로 옮겨지면서 여주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축소됐다. 그 후 1970년 포항제철이 안계댐을 세우자 현재 위치로 다시 옮겼다. 서당과 관리사로 나누어 담장을 쌓았고 중간에 일각문을 설치했다. 서당은 강당, 동재, 삼문 등 세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양끝에 방을 두었다.
사호당 沙湖堂
중요민속자료 제74호 조선 헌종 6년1840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11대 손으로 진사를 지냈던 사호당 이능승沙湖堂 李能升 1827~1881이 살던 곳이다. 집은 행랑채와 앞이 터진 안채, 그리고 사랑채로 지어졌는데 전체적으로 사랑채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사랑채 앞으로 넓은 공간을 두어 기능을 최대한 살렸으며 사랑방 옆에 누마루를 두었다. 안채와 사랑채는 네모기둥으로 세웠으나 안대청과 사랑대청의 앞면 중앙, 사랑방과 사랑대청 사이의 중앙, 사랑 누마루 앞 등 네 곳은 둥근 기둥으로 변화를 주었다.
강학당 講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조선시대 고종 7년1870
이 집은 여주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경주 손씨 문중의 서당인 안락정安樂亭과 쌍벽을 이루며 대사간을 지낸 이연상李淵祥이 낙향하여 학생을 가르쳤다. 강학당은 담장과 대문이 없고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을 온돌로 두었다. 안방 앞에 마루방과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으며 마루방은 여름에, 온돌방은 겨울에 사용했다. 왼편의 행랑채는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백성들의 가옥 형태며 뒤쪽으로 성주봉이 있다. 강학당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건너편에 있는 향단과 그 일대가 잘 보인다.
옥산서원 玉山書院 종합 안내판
사적 제 154호 조선 선조 5년1572
이 서원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된 47 곳 중 하나다. 옥산서원은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그리고 2년 후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求仁堂이 앞에 있으며 뒤편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구인당은 헌종 4년183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글씨다. 추사가 쓴 현판 뒤에는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驪의 조카였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가 쓴 또 다른 옥산서원 현판이 있다. 구인당이 화재로 다시 짓게 되자 헌종은 추사에게 새로 현판을 쓰게 해 전면에 달게 했으며 이산해의 현판은 구인당 내벽으로 옮겨 걸게 했다. 그래서 이산해의 현판은 구인당 마루에 올라서야 볼 수 있다. 도산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과 함께 국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서원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 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보물 제 526호 등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옥산서원 玉山書院 영역 안내판
사적 제 154호 조선 선조 5년1572
이 서원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한 것으로 ‘옥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앞쪽에는 공부하는 곳인 구인당求仁堂, 뒤편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글씨다. 추사 글씨의 현판 뒤에는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驪의 조카였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가 쓴 또 다른 옥산서원 현판이 있다. 이산해의 현판은 구인당 마루에 올라서야 볼 수 있다. 도산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과 함께 국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서원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 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보물 제 526호 등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강학 공간 - 영역 안내판
이 곳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구역으로 무변루無邊樓, 구인당求仁堂,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중국 송나라 때 철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주염계찬周廉溪贊’에서 따왔다. 원래는 납청루納淸樓라 이름 붙였으나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노수신盧守愼은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며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구인당은 서원의 주건물로 이 곳에서는 강의와 토론이 열렸고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왔다. 구인당 현판은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가 썼다. 민구재와 암수재는 모두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됐다. 민구재는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첩하게 잠시도 머무름 없이 실천하여 사회에 공헌하는데 있다’라는 뜻이고, 암수재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나날이 새롭게 밝게 펼쳐져 나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향 공간 - 영역 안내판
이 묘역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구인당 동편에 있다. 사당인 체인묘體仁廟, 경각經閣인 어서각御書閣, 신도비각 등으로 이뤄져 있다. 체인묘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체인묘 좌측에는 선조 10년1577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이 있으며, 우측에는 어서御書, 어필御筆, 내사본內賜本, 퇴계수필退溪手筆, 각종 전적典籍 등을 봉안한 경각이 있다. 신도비는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가 썼다. 전사청은 서원에서 제사 전날 미리 제사상을 준비하고 설치하는 건물로, 평소에는 제기와 제례 용구를 보관한다. 제기고로도 불리며 제상을 보관하는 마루방을 설치한다. 고직사는 서원을 지키고 제수를 마련하는 노비들의 생활 공간인데 비록 노비들이 살지만 제사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하루를 묵어 가므로 기와집으로 크게 짓는다. 노비들이 기거하는 고직사는 제향 공간 가까이에 위치한다.
독락당 獨樂堂 – 종합 안내판
보물 제 413호 조선 중종 11년1516
이 곳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40세가 되던 해에 임금과 사돈관계에 있던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관직을 삭탈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사랑채다. 이곳에는 이언적이 25세 때 혼인한 석씨부인의 살림채와, 아버지 이번李蕃이 지은 계정溪亭, 그리고 독락당이 있다. 독락당은 이언적 선생이 파직당한 뒤 지은 집이라,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시기에 지었던 양동마을 내의 향단보다 훨씬 소박하다. 특히 기존의 가옥과 계정 사이에 세워진데다 겹겹의 건물과 담으로 둘러 쌓여 외부에서 보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옥산서원보다 1백여 년 전에 건축되었으며 옥산서원으로도 불리는데 이언적은 말년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다. 독락당 옆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았으며 대청에서 창살을 통해 냇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독락당 현판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가 썼고, 옥산정사 현판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글씨다. 독락당 어서각에는 중종 8년1513에 실시한 사마시 합격자 명단-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탁본한 해동명적海東名蹟, 이언적의 친필 저술 5종 13책 등 수많은 서적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경청재 敬淸齋 – 개별 안내판
조선 선조 34년1601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의 손자 준浚과 순淳 두 형제가 옥산정사 등을 관리하기 위해 지었다. 이들은 ‘계정과 독락당은 이언적의 별서別墅이고 이외 유택은 부모님의 정성이 가득한데 집과 담장 수리를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현했으니, 후손 중 혹시 토지에 대해 다툰다면 불효로 논단할 것’이라는 화의문和議文을 작성했다. 중종 경청재는 3년1538 때 청백리에 오른 이언적을 위해 ‘청백은 공경지심에서 나온다’라는 의미에서 후손들이 이름 붙였다.
조각자 나무 – 수목 안내판
천연기념물 제 115호 조선 중종 때 1530년경
이 나무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독락당을 지은 후 성리학을 연구할 때 내실 후원에 심은 것으로 중국 주엽나무로도 불린다. 이언적은 평생 중국을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무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친구로부터 얻어 심은 것으로 보여진다. 가지 사이의 폭은 약 6m에 이르며 크기는 높이 약 6.5m, 둘레 약 4.6m로 6월에 흰 꽃이 핀다.
동강서원 東江書院 - 종합 안내판
시도기념물 제 114호 조선 숙종 21년1695
이 서원은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손중돈은 양동마을 경주 손씨 입향조이며 세조 13년1467에 벌어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계천군 손소溪川君 孫昭의 아들로 김종직金宗直에게서 공부를 배웠다. 성종 13년1482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 관찰사, 이조판서, 우참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조선시대 전기에 유명한 학자며 중종 때 청백리에 올랐다. 상주목사로 재직했을 때는 고을을 잘 다스려서 주민들이 상주 단밀에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모셨다. 동강서원은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뒤 1960년 신위를 모신 묘우廟宇와 강당. 신문神門 등을 다시 세웠고, 1986년에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신도비각을, 1999년에 탁청루濯淸樓를 복원했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손중돈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서원의 강당인 순교당은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한다. 활원재活源齋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현재는 서원의 큰 행사나 손님접대에 사용되고 있다.
[명사]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영원(永遠)히 변(變)하지 않는 네 가지 진리(眞理)로서,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통틀어 이르는 말
[명사]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주택의 형태에 따라 국민성도 달라질 수 있다]
일본의 과거 주택들은 선이 직선이고 날카롭고 각이 진 곳은 직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형태의 주택을 매일보고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유사한 성격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일본의 대표적인 국민성은 사무라이(武士)정신이다. 즉 극과 극,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한옥은 자연스러운 곡선이 많고 또 사계절을 수용한다. 유연한 곡선과 그 속에 자연의 순리를 바라 볼 수 있는 부드러운 시선(視線) 등이 있기 때문에 유연(悠然)하면서도 예리(銳利)한 선비정신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종교의식에 따라 건물의 형태도 달라질 수 있다. 기독교는 원죄의식(原罪意識)이다. 하나님의
창조물(創造物)인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創造主)의 명령을 뱀의 유혹에 따라 거역(拒逆)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죄(罪)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강조한다. 내 죄를 회개(悔改) 하고 창조주인 하나님에게 복(福)을 빌면 복(福)을 주기에 나의 기도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잘 듣기기를 원한다. 따라서 회당(會堂) 건물은 하늘을 향해 뾰쪽하게 첨탑(尖塔)형식으로 높이 올라가야 했다.
불교(佛敎)는 자력신앙(自力信仰)이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스스로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사성제(四聖諦 : 苦, 集, 滅, 道)를 행해야 했고 사성제를 행하기 위해서는 팔정도(八正道)를 행해야 한다.
끊임없는 고행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그러기 위해서는 속세와 인연을 멀리하고 조용히 명상(冥想)하는 것이 필요했다. 속세와 멀리 떨어진 곳 또는 홀로 조용히 사색하면서 진리를 터득하여야 하기 때문에 사찰은 깊은 산속에 맑은 물이 흐르고 사람의 속된 삶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자리 잡는 이유 이다.
그러나 유교(儒敎)는 우환의식(憂患意識)이다. 이웃 들에게 인사 할 때 우환이 있는지 묻는 이유가 그 우환의식 때문이고 현재에 일어나는 모든 근심과 걱정, 모든 일을 선비들은 스스로 모범적으로 처리해 이 세상을 신이 이상세계를 만들어 주기 전에 스스로 이 세상을 도덕사회(道德社會)로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송이 난화(蘭花)은 피어 온 방안을 청향(淸香)으로 가득 차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유가(儒家)의 주택은 상징적(象徵的), 철학적(哲學的), 윤리적(倫理的), 교육적(敎育的)인 설계를 기준으로 한다.
그것도 모자라면 고사(古事)에서 상기(想起)할 수 있는 문장(文章)중에 문단을 뽑아 자기 집 당호로 정하고 편액을 걸어 후손들이 항상 그 뜻을 기억하도록 했다.
당호(堂號){집이나 건물등에 붙여지는 별도의이름}
편액{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그러나 현재 건축되는 주택들은 주거의 편리성을 추구하고 빠르게 대량으로 짓기에 그러한 모습들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의 주택들은 그 구조가 단순하다. 어릴 때부터 이러한 구조에 살다 보면 사물을 관찰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때 그 기법이 단순해 질 수도 있다.
요즈음의 아이들이 문제 해결이나 사물을 관찰을 하다 안 되면 쉽게 포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할 수 도 있다. 물론 더 배우고 성인이 되면 달라 질 수 있지만 어릴 때부터 단순해진 기초사고력을 넓히기는 힘이 든다.
한옥은 다양성(多樣性)을 제공 한다. 한옥의 구조를 자세히 보면 기둥, 마루판, 서까래, 대들보 모두 각각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안 대청을 기준으로 양 옆에 배치된 방의 벽을 자세히 보면 의도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양쪽 벽면의 모습이 어딘가 다르게 설계된 것을 볼 수 있다. 양동의 관가정(觀稼亭)의 예를 들면 양 벽면에 큰 문과 작은 문이 있다 그러나 비대칭(非對稱)으로 배치 되어 있다. 문과 문 사이의 간격도 다르며 한 쪽은 좁고 한 쪽은 넓다.
문살도 큰 문은 최근에 보수(補修)해 같은 모양이지만 양쪽 방에 있는 작은 문의 문살 모양은 각기 다르다. 양쪽 벽면에 결구된 창 방 의 나무 모양세도 다르다.
결구{일정한 형태로 얼개를 만듦. 또는 그렇게 만든 물건}
창방{한식 나무 구조 건물의 기둥 위에 건너질러 장여나 소로, 화반을 받는 가로재.
오량(五樑) 집에 모양을 내기 위하여 단다}
모든 부분이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왜 이렇게 설계 배치 하였을까? 어릴 때부터 다양한 모습을 보고 자라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물을 볼 때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인식(認識)하고 집을 지었던 것이다.
성장하면서 학문을 하게 될 때나 어떤 문제나 사물을 관찰할 때,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끝까지
해결하고야 마는 정신, 즉 우리의 국민성인 끈기를 배양하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배려인 것이다.
지금의 주택들은 문 하나로 출입도 하고 사람도 부른다. 그러나 한옥의 대부분 집들은 방 하나에
문이 둘 내지 셋, 넷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의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문이 크고 적은 것이 한 방에 있을 때 큰 문은 출입문(出入門) 작은 문은 호창(呼窓) 의 용도이다.
호창{본래는 앞에서 큰 소리로 불러 외치는 행위를 말함}.
문지방이 높고 낮음에 따라 용도가 다르다. 문지방이 낮은 것은 출입문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호창이다. 미닫이 여닫이가 같은 방에 있다면 여닫이는 출입문, 미닫이는 호창이다. 어릴 때 우리가 문을 급히 소리 나게 열면 어른들이 복 달아 난다고 꾸중을 한다. 사실은 복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고 어른을 놀라게 했다는 나무람이다.
미닫이는 소리가 크기 나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視線)이 집중(執中)된다. 따라서 호창이 된다. 여닫이는 소리가 적게 나기 때문에 출입문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용도를 구분함으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내가 이 집의 구성원임을 인지해 이 일은 할 수 있고, 저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윤리의 기초를 다듬어주었다. 성장하면서 학문을 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함이다.
한옥은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바라보는 시각이 현대처럼 재산증식(財産增殖)의 수단으로 생각지 않고
내 몸이라는 생각을 했다.
집을 팔아 이득을 남기면 내 몸을 팔아 이득을 남기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집을 팔아 재산을
증식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집터를 정할 때부터 완성할 때까지 자연과 동화되게 하고 그 순리에 따르며 그 속에서 사람의 윤리와 예절, 의례, 사고력 등을 배려해 면밀하게 분석한 집을 설계 후 건축했다.
그 지방의 풍토, 기후, 산수, 교통 등을 감안한 집터를 선조들은 어떻게 정했을까?
풍우(風雨)와 한서(寒暑)와 맹수및 적으로부터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짓기 시작했지만,
농경사회가 발달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집의 용도는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여러 가지 필요조건에 의해 집의 구조와 형태는 지역마다 달라진다.
우리의 선조들은 삶의 터전에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윤리와, 사고력과 철학, 예절,
가족 간의 질서와 친목을 생각하며 집터를 정했다.
선조들이 집터를 정하는 방법은 대략 5가지로 나누어진다.
1.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적용했다.
풍수는 사람이 정착생활(定着生活)하기 시작한 후부터 오랜 세월동안 축적(蓄積)된
경험과학(經驗科學)이다. 옛 표현 중에 “양지 바르다”는 표현이 있다.
음양의 이론으로 보면 사자(死者)는 음(陰)지에 머무르기 때문에 양지(陽地)에 음택(陰宅)을 지어야 음양이 균형을 이룬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는 마을의 삶은 활동적으로 이루어진다. 활동적(活動的)인 것은 양(陽)의 성격이다.
따라서 마을은 양기인 햇빛이 조금 늦게 들어오는 산 아래, 즉 음양의 중간점에 이루어 음양의 균형점을 기준으로 형성하도록 했다.
그 안에서 수맥(水脈), 바라보는 지형(地形), 토질(土質)의 성분(性分) 등,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의 의학적인 요소도 적응 되어야 했다.
또 이 자리에 자손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을지, 수맥이 지하에 흐르지 않는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터인지, 위대한 인물이 출생할 수 있는지 등을 감안하여 터를 잡았다.
2. 금지하는 것, 기피할 것, 어긋나지 않을 것, 등을 감안했다.금지한다는 것은 법으로 정한 것도 있지만 금기시하는 것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민간인은 집을 100칸(間)이하로 지을 것, 영조 정조 이전 까지는 노비를 제외한 백성들은 4각기둥(특히 양반)을 사용할 것, 정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을 것, 왕과 황제는 정남으로 좌정(坐定)하여 국사(國事)를 본다.
사대부가 정남으로 집을 짓고 가사를 보면 부도덕하거나 불경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춧돌은 자연석을 사용할 것, 자연석을 초석으로 하다 보면 돌에 굴곡이 있어 기둥의 밑면을
자연석의 굴곡과 똑같이 파주어야 기둥이 고정되기 때문에 그렝이기법(파낸다는 뜻)이 도입되었다. 기둥의 높이를 제한하는 것 등이다.
대대로 물려줄 집을 나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가문의 자손들이 대대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가문의 안녕과 부흥을 이룰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에 오행(五行)도 도입된다. 가문(家門)의 상생(相生)과 연속성을 이루어야 했고 내 성(姓)에도
오행이 있고 그 오행을 어긋나지 않게 해야 집안이 편안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예로 시골에 가면 5일장이 있는데 그 옆 지방의 장날과 겹치지 않는다.
지방민과 상인(특히 보부상)은 장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고 파는 것에도 액(厄)이 있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오고 가는 길에 치안이 확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안전을 도모해야 했다.
장날을 정할 때는 각지방을 대표하는 주산(主山)을 기준(基準)으로 했다.
시장이 열리는 각 고을에서 그 주산을 바라보면 모양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 모양에 따라
수성(水性)의 산이면 수(水)에 해당하는 양의 수(數) 1,3,5,7,9중에서 선택해 장날을 정하고
5일 후의 음(陰)의 수(數)를 장날로 정했다.
화성(火性)의 산이면 화(火)에 대한 양수(陽數)를 장날로 정하고 또 5일 후의 음수(陰數)를 장날로 정하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이 무리 없이 순행된다.
장날은 관청에서 날짜를 정(定)한 것이 아니라 보부상과 지방민의 약속이다.
이렇게 장날을 정하므로 그 지방의 장날은 중복되지 않고 돌아가면서 장이 선다.
다시 돌아와 집이란 것은 대물림을 해야 했기에 방향을 정할 때도 내 사주(四柱)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내 성(姓)을 기준으로 방향을 정했다.
내 성(姓)에도 오행이 있다고 믿었고 그 오행과 방향이 어긋나면 그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았다. 그 방향이 오행에 맞더라도 그 쪽에 기피하거나 꺼려할 것들이 있으면 역시 피해야 했다.
공동묘지나 화장터, 또는 음산한 기운이 든다면 그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옳지 않은 일
이었다.
3. 실생활에 영향을 주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햇빛이 계절에 따라 어느 쪽으로부터 들어와
어느 쪽으로 지는지 등을 면밀히 관찰해 설계를 했다.
계절에 따라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양을 면밀하게 분석해 비바람이
몰아칠 때 방과 마루에 빗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해야 했고 햇빛이 받아들여 집안이 어둡지 않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4. 한옥은 기준점은 안대(眼臺)이다.
한옥의 대문이나 사랑 대청에서 정면을 보면 반드시 정면에 보이는 지형지물(地形之物)있다.
그 지형지물을 안대라고 한다.
안대의 조건은 영속성(永續性)과 불변성(不變性)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 지형지물이 변하거나 없어지면 안되기 때문에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지형지물은 한정(限定) 되어 있다.
산봉우리, 강변의 물웅덩이가 아닌 자연호수, 사람이 어쩔 수 없는 큰 바위 등이다.
매일 바라보는 안대는 사람의 심성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 지형의 기(氣)를 자기도 모르게 받기 때문이다.
붓끝처럼 생긴 산을 문필봉(文筆峰)또는 문장봉(文章峰)이라 한다. 후손들이 학자(學者)가 되기를 원한다면 문필봉을 안대로 잡아 매일 그 봉우리를 보고 그 기운을 받고, 바라보면서 학자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게 하여 학자가 배출되도록 했다.
말안장 같이 생긴 쌍봉은 안장봉(鞍裝峰)이라 한다. 벼슬하는 사람은 말을 탄다.
후손들이 벼슬하기를 원한다면 안장봉을 안대로 삼아 그 기운을 받고 또 벼슬을 해야 되겠다는
집념을 가져 벼슬길에 오르도록 했다.
자손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면 노적가리처럼 생긴 노적봉을 안대로 잡아 후손들 중에 부자가 되게 하였다.이렇게 후손들이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것에 따라 지형지물을 달리 했다.
양동마을은 주산과 조산이 모두 문필봉과 문장봉이다. 또 마을 안에서 산을 보면 바위하나 하나 보이지 않는 육산(肉山)이다.
그 지기(地氣)의 힘을 받아 조선시대 이후로 많은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5. 집 주변의 산수(山水)와 풍경(風景)이 수려(秀麗)해야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매일 보게 되면 사람의 마음도 아름다워질 뿐 아니라 또 아름다음을 추구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손들이 후덕(厚德)하고 아름다운 심신(心身)을 가진 빼어난 인물이 되기를 원한다.
집 주변이 풍광이 아름답고 산수가 맑고 아름다우면 자연적으로 아름답고 맑은 모습을 매일 보게 된다. 매일 이러한 풍경을 보다 보면 자연히 자신의 마음도 몸도 아름답고 깨끗하고 맑게 가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런 심신을 가지게 되면 대중으로부터 존경 받는 빼어난 인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맑은 풍경을 차경(借景)해야 했다.
이상과 같이 간단하게 집터를 잡는 것을 서술했지만 그 과정은 상상할 수 없을 많은 조건들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완벽한 이런 터는 없다. 그래서 모자라는 부분이나 위에 서술한 것에 합당하지 못하면 수목이나 구조물로 모자라고 어긋나는 것을 보충하거나 막아야 한다.
바로 비보수(裨補樹)나 비보물(裨補物)을 심거나 배치했다.
예를 들면 동쪽에 복승나무나 버드나무, 남쪽에 매화나무나 대추나무, 서쪽에 치자나 느릅나무,
북쪽에 살구나무나 벚나무를 심어 좌청룡, 우백호 등의 비보를 한다.
우리의 지각(知覺)있는 선조(先祖)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99칸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하고 질문을 해 보면 대다수의 사람이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대통령후보(大統領候補)로 선출(選出)된 사람의 집이 좀 화려(華麗)하다고 지탄(指彈)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002년 대선(大選)때 가희동빌라 때문에 이회창대통령 후보가 곤욕(困辱)을 치른 것도 우리의 정서(情緖)에 부합(附合)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백성들이 주목(注目)하고 있는 지도층(指導層)의 직책(職責)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근검(勤儉) 절약(節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백성들도 따라서 근검절약하는 풍속(風俗)이 살아나 나라가 부유 해지고, 군사들을 강병(强兵)으로 육성(育成)시켜 국가안보(國家安保)를 튼튼히 할 수 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이렇게 말하였다, 왕과 중전(中殿)사이에 난 대군(大君)은 60칸 이하(以下) 즉 59칸 까지, 비빈(妃嬪) 사이에 난 군(君)과 공주(公主)는 50칸 이하, 49칸 까지, 옹주(翁主)와 정 2품(二品) 이상의 고관(高官)은 40칸 이하, 그 외의 관직에 있는 사람은 30칸 이하에서 적절하게 지어라고 규제(規制) 하였다.
99칸 집을 소유(所有)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3가지의 조건이 있었다.
1. 양반이되 벼슬을 하지 않아야 했디. 벼슬을 하지 않으면 지도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주(慶州) 최부자(崔富者)집의 가훈(家訓) 6개중 하나가 “진사(進士) 이상(以上)의 벼슬을 하지 마라.”하였다, 진사는 벼슬이 아니다, 요즈음의 학위(學位)다. 당시에는 말하자면 양반자격증(兩班資格證)인 셈이다. 그 이상 벼슬을 하면 정쟁(政爭)에 연류(連類) 되거나, 잘못되어 역적(逆賊)으로 몰리면 재산(財産)이 모두 몰수(沒收) 되거나, 파산(破産)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친 욕심을 가지지 않도록 가훈(家訓)으로 남겨 자손(子孫)들이 명심(銘心)하도록 하여 부(富)를 12대(代) 동안 만석(萬石)으로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지방(地方)의 유력(有力)한 양반(兩班)으로 품위(品位)를 유지(維持)하였기 때문에 9대(代) 진사(進士)를 배출 할 수 있었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학문(學問)이 없으면 지방에서 양반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학문을 갖추고, 품위를 유지하여야만 지방사림(地方士林)에서 유력한 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즉 가문(家門)의 명예(名譽)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2. 노비(奴婢)가 아닌 일반 백성이라도 경제력(經濟力)이 있으면 이런 큰 집을 짓는데 구애를 받지 않는다.민중(民衆)의 지도층이 아니기 때문에 중인(衆人)의 표본(標本)이 되지 않기 때문임다3. 벼슬을 하되 왕(王)의 허락(許諾)이 있을 경우에는 가능(可能)하였다. 왕이라고 하여 함부로 허락하지 않았다.합당(合當)한 이유가 있어야만 허락을 하였다. 예를 들어 양동전통역사마을의 향단(香壇)에 관하여 설명을 한다면, 회제(晦齊) 이언적(李彦迪)선생이 경상감사(慶尙監事)로 재직(在職)할 때에 99칸 집을 지었다
한다. 현직(現職)에 있는 사람은 99칸 집을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집을 짓게 된 이유는 중종(中宗) 38년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겸(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재직하다, 3월에 모부인(母夫人)의 병환(病患)으로 사임(辭任)을 간절(懇切)히 요청(要請)하였다, 중종(中宗)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제사(祭祀)를 받들어야 하고 어머니를 봉양(奉養)하여야한다고 상소(上疏)를 올렸더니, 중종께서 “경(卿)의 진퇴(進退)는 국사(國事)와 관계되니 허락하지 않는다.”하고, 지방직(地方職)인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로 7월에 임명(任命)을 하였다.
중종(中宗) 36년부터, 모부인(母夫人) 손씨(孫氏)를 봉양(奉養)하기 원해 여러 번 사임(辭任)을 상소(上疏)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간절한 청원(請願)으로 지방직(地方職)인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로 임명하였다.
무려 2년 동안의 간절(懇切)한 청원(請願)이었다. 가끔은 중종(中宗)이 회재(晦齊)의 어머니를 위해 경상, 충청양도(慶尙忠淸兩道)의 감사(監司)에게 명(命)하여 약(藥)을 어명(御命)으로 받들도록 한 기록(記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견(豫見)된 은퇴(隱退)를 방지(防止)하기 위하여 중종이 치밀(緻密)한 계획(計劃)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혹자는 회재 선생의 경상관찰사 재임 기간이 8개월 뿐 인데 어떻게 그런 큰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며,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情況)으로 볼 때 2년여의 기간 동안 중종과 회재의 의리(義理)와 총신(寵臣)의 성격(性格)을 미리 알고 있었던 중종의 배려(配慮)에 의한 차선책(次善策)으로 준비(準備)한 여러 가지 구조(構造)가 그것을 유추(類推)할 수 있다. 중종(中宗)이 중앙(中央)에 직(職)을 가진 자를 지방직(地方職)으로 보낼 때는 회재(晦齋)의 청원(請願)에 따라 고향(故鄕)에 있는 어머니를 자주 뵙고 봉양(奉養)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는 상주(尙州)에 있었다. 지금 같으면 승용차로 달려와 뵙고 바로 관찰사의 임소(任所)로 가면 되겠지만, 그 때는 교통수단이 말과 나귀이며, 또 관찰사의 행차(行次)에 관한 의전(儀典)과 수행원(隨行員)등의 여러 문제가 있었다. 며칠이 걸려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를 뵙고 금방 떠나기가 쉽지 않다. 며칠씩 머물며 어머니의 병 구환도 하고 봉양(奉養)을 하여야 했다.
여기에 문제(問題)가 발생(發生)한다. 예나 지금이나, 관직(官職)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임소(任所)를 자주 비울 수 없다. 자기 임소(任所)를 자주 이탈(離脫)하면 업무(業務)의 연속성(連續性)이 결여(缺如)되어 업무수행(業務遂行)에 차질(差跌)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무첨당(無忝堂)이란 회재(晦齊)의 본가(本家)가 있었지만 이 집을 따로 건축하여, 경상관찰사가 사랑마루에 앉으면 바로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空間), 즉 간이동헌(簡易東軒)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채 앞에는 행랑채를 건축하지 않는 데, 향단(香壇)의 사랑채 앞에 행랑채 같은 건물 4칸을 지었다. 이유는 과거는 내외(內外)가 엄격(嚴格)하기 때문에 객인(客人)이 안채에 함부로 출입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따라온 수행원은 관찰사의 신변보호(身邊保護)와 업무처리(業務處理) 한 것을 기록보존(記錄保存)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행랑채는 행랑채가 아닌 매당(梅堂)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인심(人心)은 언제 변(變)할지 모른다. 오늘은 충신(忠臣)이라고 하다가도 내일이면 역적(逆賊)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현직(現職)에 있는 사람이 이런 큰 집을 소유(所有)하면 문제(問題)거리가 될 수 있다.
정적(政敵)에게는 상대방(相對方)을 공격(攻擊)할 좋은 소재(素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왕이 허락한 것이라는 확실(確實)한 증거(證據)가 필요(必要)하다. 향단 사랑 대청마루에서 천정을 보면 대들보 바로 밑에 화려 (華麗)하게 조각(彫刻)된 대공(臺工) 3개가 있다. 파련대공(波蓮臺工)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것이 왕이 허락한 건물이라는 증거(證據)다.
예나 지금이나 관리는 민심의 기미(幾微)를 조심스럽게 살펴 민원(民怨)을 사전에 예방(豫防)하여 백성들의 민원(民怨)이 없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관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대 우리가 여름철에 가장 싫어하는 파리를 자세히 보면 몸 전체 부위중 머리 부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머리 부분은 대부분 눈이다. 그 큰 눈을 가지고 살살 빌면서(빈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뜻)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잘 살핀다.
관리는 파리처럼 눈을 크게 뜨고 백성에게 겸손(謙遜)하게 봉사(奉事)하고, 민심(民心)의 기미(幾微)를 조심스럽게 살펴서 민원이 없도록 하라는 것을 상징한다. 정식 동헌이면 채색(彩色)하지만 정식 관청이 아니기 경상관찰사로 계시다가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임명을 받고 떠나게 된다. 경상관찰사로 재직(在職)할 때의 용도는 없어졌다. 또 이런 큰 집을 아무리 왕이 허락했다고 하여도, 현직에 있는 사람이 소유한다는 것은 예민한 문제(問題)가 될 수 있다. 정적(政敵)들의 지탄(指彈)의 대상(對象)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도층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소유라는 것이 마땅한 처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대부인은 완쾌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형을 위해, 노모를 봉양하는데 전심(全心)하기로 한 동생 농재공(聾齋公)에게 이집을 증여(贈與)하여 노모 봉양에 전력토록 한 것이다. 농재공(聾齋公)의 맡 손자(孫子) 이의주(李宜澍)선생 때에 지금은 메미 태풍으로 멸실(滅失)된 향나무 아래 단을 만들어 아동들을 글을 가르치면서, 본인의 호(號)를 향단(香壇)이라 칭(稱)하였다. 그리고 편액(편액)을 향와(香窩)라 한 것이 연유가 되었다.
이 향단(香壇: 보물 412호)는 원래 99칸(間)이였다. 그러나 농재공(聾齋公)의 후대(後代)에 와서 가묘(家廟) 3칸을 지었다, 원래 지을 때는 잠시잠깐 업무를 보는 관청(官廳)의 용도(用度)로 건축하였기 때문에 가묘(家廟)가 없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본가(本家) 무첨당(無忝堂)에 묘우(廟宇)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상에 대한 신주(神主)를 모실 곳이 없었기 때문에 묘우(廟宇)를 증축(增築)하여 99칸을 넘어 102칸의 조선시대에 유례(類例)를 찾기 힘든 건축물이었으나, 애석(哀惜)하게도 6.25 전란 때, 폭격을 받아 지금은 56칸만 남아 있다. 다행히 후손 귀향(歸鄕)하여 여러 자료(資料)와 구전(口傳)된 마을 주민들의 구술서(口述書)등 각고의 노력 끝에 36간의 복원(復原) 승인(承認)이 문화재청(文化財廳)으로부터 받아서 멀지 않은 시일(時日) 후에는 그 웅장(雄壯)하고 화려(華麗)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장소날짜확정**
장소:태국.라오스
날짜:8.4-8.13(8박9일) 경비:120민원(식비별도).곧 예비만남이 한 번있을것이나 여권의 유효기한을확인해보세요.
공자(孔子)가 안연(顔淵)에게 가르친, 예(禮)에 의해 경계해야 될 네 가지 조목. ≪논어(論語)≫ 안연(顔淵) 편에서 나온 것으로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자 안연이 그 상세한 조목을 물었을 때, 공자가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하여 이로써 사사로움을 이길 것을 밝혔음. [참고어] 사잠(四箴).
㉠유신 김종정이 말하기를, “…안연이 인을 물었는데 부자가 사물로써 고하였고, 선유가 마음 다스리는 법을 논하기를, ‘성품이 편협하여 극복하기 어려운 곳을 따라 극복해 나아가라.’고 하였으니, 저하께서는 만일 천심을 기쁘게 하여 재앙을 돌이켜 상서가 되게 하려면 먼저 심술의 선악의 기미를 살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만일 본원을 맑게 하고 천리를 순연하게 하려면 부자의 사물의 교훈을 종사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 儒臣金鍾正曰…顔淵問爲仁 而夫子告以四勿 先儒論治心法曰 須從性偏難克處克將去 邸下如欲天心底豫 轉災爲祥 則莫如先察乎心術善惡之幾 如欲本源克澄 天理純然 則莫如從事乎夫子四勿之訓… [영조실록 권제94, 7장 뒤쪽, 영조 35년 9월 10일(정사)]
㉡겉과 속을 다같이 수양해야 하지만 속을 더 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속이란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란 형상이 없어서 쉽게 잡아 지킬 수 없는 까닭에 성인이 안연을 가르칠 때 사물에 지나지 않았으니, 다만 시•청•언•동에 공부를 더하도록 하였다. 이 시•청•언•동이란 것은 겉으로 하는 행동이다. 겉을 바르게 하면 속도 역시 바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자가 이 사물잠을 짓는 데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다. 시잠에는 “보는 것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 청잠에는 “간사한 생각을 막고 성실한 마음을 길러야 한다.” 언잠에는 “말을 입밖에 낼 때 조급하고 망령됨을 금해야 한다.” 동잠에는 “옳은 행동을 지켜 나가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곧 표면에 역점을 두어 예에 회복하는 절차를 삼은 것이다. ; 表裡交相養 而裡爲重 然裡者心也 心無形象 未可易以執守 故聖人敎顔淵不過四勿 只於視聽言動上加功 視聽言動表也 表正則裡亦可得以正矣 程子作四箴亦如此 視箴曰 視爲之則 聽箴曰 閑邪存誠 言箴曰 發禁躁妄 動箴曰 守之於爲 卽於表上着力 所以爲復禮之節目 [성호사설 경사문 사물잠]
紅顔多汁
黑顔一味(黑顔深口)(黑顔色骨)
圓顔眞口(圓顔眞味)
長顔小開(長顔後着)(廣顔小口)
出齒不設
大顔大口
白顔無味
남성의 물건은
溫 : 따뜻해야
頭 : 머리가 커야
歪 : 울퉁불퉁하고 곧지 않아야
長 : 길고
通 : 통통해야
여성 얼굴생김과 顔色에 대한 考察
<<한량선비님들의 여인감별법>>
옛날 우리 한량 선비님들께서는 여인을 108가지의 미색으로 분류하여 즐겼으니 그 세밀한 미적감각에 다시금 경탄을 금치 못할지니---. 말이 난 김에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여인의 얼굴과 그곳의 상관관계를 한 초식을 시전하려 하오니---.
남자의 코가 남성심볼의 크기와 상관있고 여자는 입이 보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하나 과학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대충 밝혀졌으니 그냥 한번 웃습시다.
1.紅顔多汁(홍안다즙)
얼굴의 빛깔이 검은 여자는 사랑할 때 다량의 애액(愛液)이 분출한다. 상당히 정열적이며 보배가 고온다습(高溫多濕)하여 계란이 익을 정도라 하니 남성들이 진입할 때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부주의하게 성급히 취하려 하다가는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500원 짜리 오뎅이 되기쉽다. 그러나 다량의 애액으로 인하여 진퇴에 매끄러움을 느끼고 아래에서의 리드미칼한 반동으로 쾌감이 극상승하여 혼자만의 리그로 끝나기 쉽다. 얼굴이 붉으면 물이 많다.
2.圓顔別味(원안별미)
얼굴이 둥글면 특별한 맛이있다.
3.白顔無味(백안무미)
얼굴이 흰 여자는 아무런 재미도 없다. 천성적으로 수동형이라 남자가 여간 발동을 걸어도 대답없는 메아리다. 그러나 일단 발동이 걸리면 조금 변태적인 성향을 보인다. 보배가 큰 편이라 정상위시 남성은 별로 마찰감을 느끼지 못하나 후배위(後背位)나 기승위(騎乘位)에서는 다소 쾌감을 느낄수 있다. 특이하게 69 체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얼굴이 희면 맛이없다.
4.黑顔色骨(흑안색골)
얼굴이 검으면 거시기를 밝힌다.
5.長顔後着(장안후착)
얼굴이 길면 거시기도 뒤에 있다.
6.廣顔小口(광안소구)
얼굴이 넓으면 거시기가 작다.
7.出齒不設(출치불설)
이빨이 도출되면 말할 것도 없다.
8.長顔小口(장안소구)
긴 얼굴의 여자는 작은 조개를 가지고 있다. 조개가 너무 작아도 너무 크도 남성의 쾌감에는 좋지않다. 이 경우는 적당한 크기이나 근육의 탄력성이 없어 횟수를 거듭할 수록 질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허리가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고 질겨 운동역학적 측면에서
이를 보완한다.
9.圓顔眞口(원안진구)
둥근 얼굴은 진품의 입을 가지고 있다. 공처럼 둥근 얼굴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살이 풍부하고 하관이 풍부한 계란형의 얼굴을 말하는데 양귀비가 이런 얼굴이 아니었나 한다.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참으로 대범하여 어떤 남성과도 잘 맞으며 겉으로는 거의 내색을 하지 않는다. 크나 적으나 대단한 탄력성으로 조이고 빨아들여 코피를 쏟게한다. 서서히 타올라 몇번의 고비를 넘는다. 순간순간 마다 내뱉는 감창(甘唱)소리는 남자들을 결사적으로 힘을 쏟게 만든다.
남자 거시기의 要件
溫(온) : 따뜻해야한다.
頭(두) : 머리가 굵어야 한다.
歪(왜) : 똑바르면 안된다. 좌,우로 삐닥해야 한다.
長(장) : 짧으면 못쓴다.
通(통) : 길이만 길어서 소용없다.
女口二個如差(여구이개여차) : 여자 윗입과 아랫입의 차이
1. 上口橫開 下口從開(상구횡개 하구종개)
위에 입은 옆으로 아래 입은 밑으로 째졌다.
2. 上口有齒 下口無齒(상구유치 하구무치)
위에 입은 이빨이 있고 아래 입은 입빨이 없다.
3. 上口無毛 下口有毛(상구무모 하구유모)
위에 입은 털이없고 아래 입은 털이 있다.
4. 上口長舌 下口短舌(상구장설 하구단설)
위에 입은 혀가길고 아래 입은 혀가 짧다.
5. 上口雜食 下口肉食(상구잡식 하구육식)
위에 입은 아무거나 먹고 아래 입은 육고기만 먹는다.
6. 上口吸入 下口吐出(상구흡입 하구토출)
위에 입은 씹어삼키나 아래 입은 뱉어낸다.
7. 上口有言 下口無言(상구유언 하구무언)
위에 입은 말을하고 아래 입은 말이 없다.
8. 上口好開 下口好縮(상구호개 하구호축)
위에 입은 좋으면 벌어지고 아래 입은 좋으면 오무라진다.
9. 上口外脣 下口內脣(상구외순 하구내순)
위에 입은 입술이 밖에있고 아래 입은 입술이 안에 있다.
10. 上口無快 下口有快(상구무쾌 하구유쾌)
위에 입은 쾌감을 못느끼지만 아래 입은 쾌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