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방
옷장과 천장 사이
스핑크스가 엎드려 있다
배진우
나는 좋은 원두만 취급하는 카페에서 일했고
6가지 이상의 커피 맛을 알고
17번의 순서를 지켜야하는 청소방법과
세련된 의미와 종종 새로운 형식을 생각하지만
그것이 품격이 되지는 못한다
지방시와 샤넬을
에르메스인데 헤르메스라 부르는
매장을 번갈아 가며
백화점 1층에서 일하는 친구는
나보다 품격이 있어 보인다
품격이 있기에
친구는 당당해야 한다고 그러나
친구는 살아오면서 실패보다 성공이 더 많다
나는 친구보다 성공이 적다
성공은 더 어렵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런다
그러니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의 방
옷장과 천장 사이
스핑크스가 엎드려 있다
엎드려 있는 스핑크스가 나한테 수수께끼를 낸다
옷장과 천장 사이에서 침묵하는 것만으로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오이디푸스가 어느 책에서는 조금 고민했다 그러고
어느 책에서는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대답했다고
번역하는 사람마다 여유가 달라서 그랬겠지
밑으로
밑으로
사람이라는 대답을 듣고 떨어졌다던
그때 그 스핑크스가
나의 방
갈색 옷장과 꽃무늬 천장 사이에
엎드려 있다
수수께끼를 낼 것처럼 엎드려 있다
실은
좋은 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먹고 죽으려고 하는 데도 없는 돈
먹고 죽으면 무슨 때깔일까
돈 먹고 죽은 귀신은
기호 같을까
단어 같을까
숫자 같을까
굶어 죽은 사람이랑 다를까
그런데 먹고 죽을 돈 없는
나도 귀신 같은가 나는 귀신인가
나는 귀신인데 왜 귀신을 무서워할까
돈도 무서워하는데
귀신이랑 돈은 다른데
같을 수 없는데
나는 왜 두 개를 무서워할까
고민하는데
옷장과 천장 사이에
귀신이 있을까
돈이 있을까
형광등 꺼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옷장과 천장 사이에
원고료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산 시집만 있는 건 알고 있다
알라딘 가서 팔면
절반 절반 절반 정도로
다시 중고로 팔 수 있는
시집만 쌓여 있는 거 아는데
양장본도 몇 개 있고 찢어진 표지도 몇 개 있고
의미고 형식이고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민 하는데
나의 방
천장과 옷장 사이에서
스핑크스가 대뜸
인사도 없이
질문을 하는데
이상한 비유 써가면서
계속하여 묻는데
침묵을 던지는데
사람이라고
사람인 거 아는데
대답은 못하겠더라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거 같아서
그래서 지금도 대답 못 듣고 수수께끼만 내는
나의 방
검은 천장과 검은 옷장 검은 종이 검은 경계 검은 습기 검은 덩어리
검은 펄럭임 검은 책 검은 벌레 검은 배열 검은 글자 사이
스핑크스가 엎드려 있다
나는 병이 많은데
아픈 것은 아프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프지 않고
다만
몸 안에는 돈 드는 것들이 가득 차서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죽고 싶게 만든다
오래 살면 돈 나가는데
오래오래 살아서 유명해지라며
소고기 사주는 친구가 너는 아니었지만
혀 없는 입이었으면 좋겠다
동명동 동리당 장진우식당 지음책방 재주당 손탁앤아이허
충장로 이자와규카츠 서브웨이 서가앤쿡 스타벅스
스타벅스 카페모카 콜드브루 그란데 사이즈에 바닐라 시럽 두 번 추가
글 쓰면서 접속사 종종 잊어버리는데
톨 사이즈보다 500원 더 비싼
그란데 사이즈
발음은 정확하고
청록파 박목월, 박두진,...
3명 중 1명 자꾸만 외워도 잊어먹는데
맛집은 줄줄 외우고 있는데 가야 할 맛집 많은데
돈 고민하다가 맛집도 못 가고
청록파 이름 다 외우는 날이라도
배가 부른 건 아닌데
먹고 살려고 일한다는데
학생이라서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했는데
시인 외워도 배부르지 않고
시 써도 배부르지 않고
배는 밥먹어야 부르는데
돈은 먹으면 안 되는데
어른이 덜 먹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겠다
단어도 맛도 알고 있는 혀라면 없었으면 좋겠다
침묵하는 것은 쉬운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다
침묵은 그냥 하는 것이다
혀 없는 입안이 더욱 까맣다
나는 혀인가 나의 방은 입이고
내가 없을 때 나의 방은 더욱 까맣고
그러니 부디
나 의 방
옷 장 과 천 장 사 이
스 핑 크 스 가 엎 드 려 있 다
스핑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나를 본다
스핑크스는 스핑크스만의 비유를 했을 것이다
스핑크스가 원했던 답은 사람이 아니라서 나에게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 나는 스핑크스의 질문조차 모른다
나는 스핑크스가 민망하고
방도 귀신도 돈도 손목 주름을 핥았던 혀도
민망하여
눈치 없이 움직이는 나방파리를 내버려둔다
가만히 슬픔을 어지른다
세상 눈먼 돈이 많다
눈먼 돈을 찾는다
너를 위한 돈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 했다
돈을 찾아다여도 돈은 나오지 않는다
돈만 찾아다녔다고 아프게 혼이 난다
배가 아픈 것인지 고픈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아플 때까지 고프고
고플 때까지 아프면
둘은 비슷하지만
명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안다
걸어도
간판은 보이고
돈은 보이지 않는다
간판만 보이고
돈이 보이지 않는다
돈은 결코 적일 수 없다
싸우고 싶어 찾아다니는 적이라면
적이 아니다
모두 적이라면 돈도 적이라고 할 텐데
모두가 적이 아니라서
돈이 적이라 하지 못한다
"돈도 젊다면 젊은이라면
나에게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에서 위태롭게 외쳐도
어느 밤 나는 왕도 아니고 광대도 아닌 수수께끼도 아니다
민망하게 부운 발목도 없다
예언가를 설득할 이야기도 없다
그러니 부디
돈이랑 품격을 논하고 싶다
돈이랑 놀고 싶다
돈이랑 먹고 싶다
돈이랑 쉬고 싶다
돈이랑 여행 가고 싶다
돈이랑 친구 하고 싶다
돈이랑 공부 하고 싶다
돈이랑 청록파도 외우고
돈이랑 방충망 구멍을 메우고 싶다
돈이랑 길도 잃고
돈이랑 어울리는 색도 찾아주고
돈이랑 방학을 보내고 싶다
돈이랑 백화점 1층에서 매장을 잘못 들어가 친구와 소개도 해주고 싶다
네 친구랑 내 친구가 아니거든
그래서 우리가 조금 그헣다
여기서 나는
내도
네도
친구도
아니다
둘의 친구가 아닌 친구다
친구가 아니거든 이거나
조금 그렇다
가 나를 비유한다
나의 비유는 쉽다
나에게는 몇 개의 비유와
몇 번의 반복이 있는가
몇 개의 비유와
몇 번의 반복이 허락되는가
돈이랑 울 것이다
혼자 울 것이다
돈이랑 헤아지기 싫지만
돈을 붙잡을 것이다
눈을 감고 수양한다
눈먼 돈을 찾으려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도 돈이 없다
눈을 떠도 돈이 없을까
무섭다
돈도 없고 눈도 없어 졌을까 봐
눈을 조금 더 감고 있기로 한다
눈 없는 눈도 무섭고 돈도 무섭다
눈 없는 눈이 더욱 까맣다
돈 없는 돈은 없다
돈은 있다
없던 적이 없었다
돈 쓰는 사람도 알고 돈 버는 사람도 알고 돈으로 차를 샀다던 사람도
알고 돈 때문에 힘든 사람도 알고 돈 없어서 죽은 사람도 안다 돈이 많
아서 죽은 사람도 알고 돈이 있지만 돈 쓰기 전에 죽은 사람도 알고 돈
이 좋아 돈만 버는 사람도 안다
눈 없는 나의 눈은 있지만
돈 없는 돈은 없다
눈먼 돈을 찾고 싶으면
돈 과 나 중에서
둘 중 하나는 눈을 떠야 한다
내가 눈을 뜨면
나의 방
처음부터 있던 천장과 처음부터 있던 옷장 사이에서
스핑크스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본다
비극에서 태어난 비극을
비극은 비극을 반복하는가
돈도 없이 방도 없이 내 것인 찬장과 내 것인 옷장도 없으면서
나의 몸 점점 커지는데
스핑크스는 침묵한다
침묵하는 스핑크스에게
참고 참다가
참고 참아서
어쩔 수 없이
나는 돈이라고 외치고
시, 친구, 품격, 애정, 슬픔, 관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지훈이라고도 외친다
스핑크스는 말이 없다
혀를 씹으면서
의미와 구조 형식과 내용을 담아서
스핑크스를 본다
나의 방
천장과 바닥 사이
스핑크스를 향해 내가 있다
2019년 <현대시> 1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