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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제 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하겠느냐 하면, 그 대답이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 : 한일합방)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으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支那式)의 연의(連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년사(大東史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
그 논평의 독단(獨斷)임과 행동의 대담하였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만큼 분발하여 힘쓴 적도 없지 아니하나 나아간 것이 촌보(寸步)쯤도 못 된 원인을 오늘에 와서 국내 일반 독사계(讀史界)에 호소하고자 한다.
1) 옛 비석의 참조에 대하여 - 일찍이 사곽잡록(四郭雜錄 : 저자 미상)을 보다가 ‘신립(申砬)이 선춘령(先春嶺) 아래에 고구려 옛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申砬聞先春嶺下有高句麗舊碑), 몰래 사람을 보내 두만강을 건너가서 탁본(拓本)을 떠왔는데(潛遺人 渡豆滿江 模本而來), 알아볼 만한 글자가 3백여 자에 지나지 않았다(所可辨識者 不過三百餘字). 그 글에 황제라고 한 것은 고구려왕이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요(其曰皇帝 高句麗自王稱也), 그 상가(相加)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대신을 일컬은 것이었다(其曰相加 高句麗大臣之稱也).’고 한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서, 만주 깊은 산중에 천고(千古) 고사(故事)의 이빠진 것을 보충할 만한 비석쪽이 이것 하나뿐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해외에 나간 날부터 고구려 발해의 옛 비석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몹시깊었었다.
그러나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에게 그 항로 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우뚝 서 있는 윤관(尹瓘, 혹은 蓋蘇文)의 기공비(紀功碑)를 보았다는 말이며, 봉천성성(奉天省城)에서 간접으로 이통주(伊通州)를 유람하였다는 사람이 그 고을 동쪽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解夫婁 : 夫餘의 왕)의 송덕비(頌德碑)를 보아노라는 이야기며, 발해의 옛 서울에서 온 친구가 폭이 30리인 경박호(鏡泊湖 : 古史에는 忽汗海)의 앞쪽(북쪽)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겨룰 만한 1만 길 비폭(飛瀑)을 구경하였다고 하는 말이며, 해룡현(海龍縣)에서 나온 나그네가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의 세 섬을 가라앉히겠노라고 한 문무대왕(文武大王 : 신라)의 유묘(遺廟)를 예배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나에게는 귀로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 네댓 친구와 동행하여 압록강 위의 집안현(輯安縣), 곧 고구려 제2의 환도성(丸都城)을 얼씬 보았음이 나의 인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인지 세어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 내외라는 억단(臆斷)을 하였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이 주는 댓잎 그린 금척(金尺)과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박아서파는 광개토왕 비문을 값만 물어보았으며(깨어진 그 땅 위에 나온 부분만),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 있는 8층 석탑, 사면이 네모진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편의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을 대신하였고 그 왕릉의 넓이와 높이를 발로 재고 몸으로 견주어서 자로 재는 것을 대신하였을 뿐이었다(높이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80발인데, 다른 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게 광개토왕릉과 같음).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이었지마는 고구려의 종교ㆍ예술ㆍ경제력 등의 어떠함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 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하는 단안을 내렸다.
그 뒤 항주(杭州) 도서관에서 우리 나라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 : 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말 고려초의 사조(思潮)와 속상(俗尙)의 참고가 될것이 많았고, 한성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어떠함이나 주해의 억지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書生)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2) 각 서적의 호증(互證)에 대하여 - ① 일찍이 고려 최영전(崔塋傳)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고 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아니하며, 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도로의 소제, 도랑의 개척, 성실(城室)의 수축 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므로 이인(夷人 :오랑캐)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通典)ㆍ신당서(新唐書) 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皀衣先人 또는 帛衣先人)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 : 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掾那皂衣)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翳屬先人)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또는 선인(仙人)은 다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皀衣)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조백(皀帛)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和尙)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물으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억측의 명사(名詞)를 말해준 것이다.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치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ㆍ신당서ㆍ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으로 인하여 승군과 선인(先人)과 재가의 화상이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先人軍)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몇십 자의 약사(略史)를 6,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요,
②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安市城)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양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 : 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에도 “어찌 현화(玄花 : 눈)가 백우(白羽 : 화살)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구당서(新舊唐書)에서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렸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史官)에 뺀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명(明)나라 사람 진정(陳霆)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 의거하건대, “송(宋)나라 태종(太宗)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상하여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필경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송사(宋史)나 요사(遼史)에는 보이지 아니하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考證)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에 나는 지나인은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하여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나의 앞의 가설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지나인에게 국치(國恥)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 하여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였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紀)에 태종이 정관(貞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 하였고, 유박전(劉泊傳)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며, 본기(本紀)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아니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 2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목(綱目)에는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대게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봄을 꺼려 숨겨서, 주천자(周天子)가 정후(鄭侯)의 화살에 상했음과 노(魯)나라의 은공(隱公)ㆍ소공(昭公)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春秋)에 쓰지 아니하였는데, 공구(孔丘)의 이러한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쪽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臨床病錄)의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꾸어놓았다. 화살의 상처가 내종(內腫 : 몸 속으로 곪음)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肛門病)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격파한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隋軍)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도리어 지나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에서 끌어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 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렸음이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태종의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牧隱集 : 이맥의 저서)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 진정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春秋)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 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貞觀吟 : 당태종의 눈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항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寶藏王) 3년(서기 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하여, 돌아와서 외과 의사의 불완전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라는 것이다. 이 수십자를 얻기에도 5,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중에서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서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승군(僧軍)의 내력을 모르면 무엇이 해로우며 당태종이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롭기에 이런 사실을 애써서 탐색하느냐 할 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학(史學)이란 것은 하나하나를 모으고 잘못전하는 것을 바로잡아서 과거 인류의 행동을 여실하게 그려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끼쳐주는 것이니, 승군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만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뒤따른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심과 강감찬의 거란을 격파한 군대의 주력(主力)이 다 무엇이었던지 모르고, 따라서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의 1천영 년 군제상(軍制上) 중요한 점을 모를 것이며, 당태종이 눈을 잃고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戰局)이 속히 결말이 난 원인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라와 당나라가 연맹하게 된 배경이요, 당나라 고종(高宗)과 그 신하가 모든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前提)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동기이던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위에 든 것은 그 한두 예일 뿐이고, 이 밖에도 이 같은 일이 얼마인지를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의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 단시일에 완결시킬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3) 각종 명사(名詞)의 해석에 대하여 - 우리 나라는 고대 후에니키 인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가져다 알파벳을 만든 것처럼 한자를 가져다가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그 초창기에는 한자의 음을 딴 것도 있고 혹은 그 뜻을 딴 것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으로는, ‘소지(疎智), 일명 비처(毘處)’라 함은 빛의 뜻이 소지가 된 것이고 음이 비처로 된 것이요, ‘소나(素那), 일명 금천(金川)’이라 함은 뜻이 금천, 음이 소나로 된 것이요, ‘거칠부(居漆夫), 일명 황종(荒宗)’이라 함은 ‘거칠위’의 음이 거칠부, 뜻이 황종으로 된 것이요, ‘개소문(蓋蘇文), 일명 개금(蓋今)’은 ‘신’의 음이 소문, 뜻이 금으로 된 것이요, ‘이사부(異斯夫), 일명 태종(苔宗)’은 ‘잇위’의 음이 이사부, 뜻이 태종(訓蒙字會에 苔를 ‘잇’으로 읽음)으로 된 것이다.
지명(地名)으로는 ‘밀성(密城), 추화(推火)라고도 함’은 ‘밀무’의 음이 밀성, 뜻이 추화로 된 것이요, ‘웅산(熊山) 공목달(功木達)이라고도 함’은 ‘곰대’의 뜻이 웅산, 음이 공목달로 된 것이요, ‘계립령(鷄立嶺), 일명 마목령(麻木嶺)’이라 함은 ‘저름(겨릅)’의 음이 계립, 뜻이 마목으로 된 것이요, ‘모성(母城), 막성(莫城)이라고도 함’은 ‘어미’의 뜻이 모, 음이 막으로 된 것이요, ‘흑양(黑壤), 금물노(今勿奴)라고도 함’은 ‘거물라’의 ‘거물’의 뜻이 흑, 음이 금물로 된 것이요, 양과 노는 다 ‘라’의 음을 취한 것이다.
관명(官名)으로는 ‘각간(角干)을 혹은 발한(發翰)이라 함’은 ‘불’의 뜻이 각, 음이 발로 된 것이고, 간(干)과 한(翰)은 다 ‘한’의 음을 취한 것이나, 불한은 군왕(郡王)을 일컬음이요, ‘누살(耨薩)을 혹 도사(道使)라 함’은 ‘라’의 뜻이 도, 음이 누로 된 것이고, ‘살’의뜻이 사, 음이 살로 된 것이니, ‘라살’은 지방장관을 일컬음이요, ‘말한’, ‘불한’, ‘신한’은 삼신(三神)에서 근원한 것인데, 뜻으로는 천일(天一)ㆍ지일(地一)ㆍ태일(太一)이 되고, 음으로는 마한ㆍ변한ㆍ진한으로 된 것이요, ‘도가’, ‘개가’, ‘크가’, ‘소가’, ‘말가’는 다섯 대신의 칭호인데, ‘도ㆍ개ㆍ크ㆍ소ㆍ말’ 등은 뜻으로, ‘가’는 음으로 저가(猪加)ㆍ구가(狗加)ㆍ대가(大加)ㆍ우가(牛加)ㆍ마가(馬加)로 된 것이다.
이같이 자질구레한 고종이 무슨 역사상의 큰 일이 되는가? 이것은 자질구레한 듯하나 지지(地誌)의 잘못도 이로써 바로잡을 수 있고,사료의 의혹도 이로써 보충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에서부터 모든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해모수(解募漱)와 유화왕후(柳花王后)가 만난 압록강이 어디인가? 지금의 압록강이라 하면 당시 부여의 서울인 합이빈(哈爾濱)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고, 다른 곳이라면 달리 또 압록이 없어 그 의문을 깨뜨리지 못하였더니, 첫 걸음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비에 지금의 압록강을 아리수(阿利水)라 하였음을 보고 압록의 이름이 아리(阿利)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두 번째로 요사(遼史)에 ‘요흥종(遼興宗)이 압자하(鴨子河)를 혼동강(混同江)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것을 보고 ‘압자(鴨子)가 곧 ’아리‘인즉, 혼동강 곧 송화강(松花江)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인가?’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東史綱目) 고이(考異)에, ‘삼국유사의 ’요하(遼河) 일명 압록(鴨綠)‘과 주희의 여진이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세 압록(鴨綠)이 있다.’고 하였음을 보고 송화강이 고대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가 만난 압록강이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마한전(馬韓傳)에 ‘비리(卑離)’를 건륭제(乾隆帝)의 삼한정류(三韓訂謬)에는 만주의 패륵(貝勒 : 패리)과 같은 관명(官名)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생각하기를 삼한의 비리는 삼국지리지(三國地理志) 백제의 부리(夫里)이니, 비리나 부리는 다 ‘울’의 취음(取音)이요, 도회(都會)의 뜻이다. 마한의 비리와 백제의 부리를
참조하면, 마한의 벽비리(壁卑離)는 백제의 파부리(波夫里)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부리(爾陵夫里)요, 모로비리(牟盧卑離)는 모량부리(毛良夫里)요, 감해비리(鑑奚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里)니, 비록 이 음과 저 뜻이 이역(異譯)이 있기는 하나 그 대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이 관중(管仲)과 싸우던 때에 지나 산서성(山西省)이나 영평부(永平府)에 비이(卑耳)의 계(谿)를 두었으니, 비이는 비리 곧 ‘울’의 번역이다. 이에서 조선 고대의 ‘울’이곧 산해관(山海關) 서쪽까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고증이 역사상의 큰 일이 아니지마는 도리어 역사상의 큰 일을 발견하는 연장이라 하겠다.
만일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훈몽자회(訓蒙字會), 처용가(處容歌),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에서 옛 말을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씌어 있는 향가에서 이두문의 용법을 연구하면 역사상 허다한 발견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일찍이 이에 유의한 바 있었는데, 해외에 나간 뒤로 부터는 한 권의 책을 얻기가 심히 어려워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또한 얻어볼 수 없었다.
4) 위서(僞書)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 우리 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太宗의 焚書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ㆍ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이 적지 않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그렇지마는 그 가짜에 구별이 있다. 하나는 가짜 중의 가짜이니, 예를 들면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진본이 없어지고 위작이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니와, 옛날 사학가들이 늘 고기(古記)의, ‘단군은 요 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섰다(檀君 興堯竝立於戊辰).’고 한 글에 의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임금의 연대에 비교코자 하며 요 임금의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續綱目 : 金仁山 저술)에 고준(考準)한다. 그러나 주소(周召 : 厲王代의 周公과 召公)의 공화(共和 : 厲王이 달아나고 주공과 소공이 의논하여 정치를 행한 14년) 이전의 연대는 지나 역사가의 대조(大祖)라 할 만한 사마천(司馬遷)도 알지 못하여, 그의 사기(史記) 연표에 쓰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그보다도 더 요원한 요 임금의 연대라. 그러므로 속강목은 다만 가짜 죽서기년에 의거하여 적은 연대이니, 이제 속강목에 의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흐리게 함이다.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전(尙書傳)에, '구려 한맥(句麗駻貊)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고구려와 삼한이 지나의 주무왕(周武王)과 교통하였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안국(安國)이 지금의 황제의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安國爲今皇帝傳士蚤卒).”고 하였으니, ‘지금의 황제’는 무제(武帝)이다. 무제를 ‘지금의 황제’라 한 것은 사마천이 무제가 죽어서 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것을 못 보았기 때문이고, 안국을 ‘일찍 죽었다.’고 한 것은 사마천이 생전에 안국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공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다 먼저 죽었음이 명백한데, 상서전에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 시대에 창설한 금성군(金城郡)이란 이름이 있으니, 공안국이 그가 죽은 뒤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점쟁이라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상서대전이 위서(僞書)임이 또한 분명하고 거기 기록된 구려ㆍ한맥 등도 자연 명백해질 것이다. 다음은 진짜 주의 가까인데,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① 하나는 보넛의 위증(僞證)이니, 초학집(初學集), 유학집(儒學集) 등은 전겸익(錢謙益)이 저술한 실제로 있는 것이지마는, 그 글가운데 씌어 있는 우리 나라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의 위조요, 실제로 없는 것이 많으니, 이런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나라 역사에 그것을 반박할 확고한 증거들이 있거니와, 만일 우리 역사의 반박할 재료가 없어지고 저네의 거짓 기록만 유전(流轉)된 것이 있으면 다만 가설의 부인만으로는 안 될 것이니 어찌하면 옳을까?
옛날에 장유(張維)가 사기(史記)의,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武王封箕子干朝鮮).”고 한 것을 변정(辯正)하는데, 첫째로 상서(尙書)에, “나는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我罔爲臣僕).”고 한 말을 들어 기자가 이미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으니, 무왕의 봉작(封爵)에, “기자가 조선으로 몸을 피하였다(箕子避地干朝鮮).”고 한 것을 들어 반고(班固)는 사기를 지은 사마천보다 성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기자의 봉작설을 빼버리고 봉작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는 인증(人證)이다.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몽고 침입 이전)에 우리 나라 형세가 강성하여 지나에 대하여 전쟁으로 맞설 때에도 저에게 보낸 국서에 우리르 낮추어 한 말이 많이 있었거니와, 그들은 다른 나라가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내조(來朝 :조공왔다)라고 썼음은 지나인의 병적인 자존성에 의한 것이니, 이는 근세 청조(淸朝)가 처음 서양과 통할 때 영(英)ㆍ로(露) 등 여러 나라가 와서 통상한 사실을 죄다 “모국이 신하를 일컫고 공물을 바쳤다(某國稱臣奉貢).”고 썼음을 보아도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니, 그네의 기록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 지나인이 만든 열조시집(列朝詩集),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등 시화(詩話) 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가져다가 게재할 때에 대담하게 한 구절 한 줄을 고쳤음을 볼 수 있으니, 우리의 역사를 적을 때에도 자구를 고쳤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몽고의 위력이 우리 나라를 뒤흔들 때, 우리의 악부(樂府)ㆍ사책(史冊)을 가져다가 황도(皇道)ㆍ제경(帝京)ㆍ해동천자(海東天子) 등의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사에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 삼국사ㆍ고려사 등도 지나와 관계된 문제는 실제의 기록이 아님을알 것이다. 이것은 사증(事證)이다.
연전에 김택영(金澤榮)의 역사집략(歷史輯略)과 장지연(張志淵)의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에, 일본의 신공여주(神功女主) 18년에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과, 수인주(垂仁主) 2년에 임나부(任那府)를 설치하였다는 것을 모두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그대로 따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왕(奈解王) 4년(서기 199)이요, 내해왕 당년에는 신라가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별로 없었을 터인데, 이제 내해왕이 아리나례(阿利那禮 : 압록강)을 가리키며 맹세하였다 함이 무슨 말이며, 수인주는 백제와 교통하기 이전의 일본의 임금이니, 백제의 봉직(縫織)도 수입이 안 된 때인데, 수인주 2년에 임나국(任那國) 사람에게 붉은 비단[赤絹] 2백 필을 주었다 함은 어쩐 말인가? 이 두 가지의 의문에 답하기 전에 그 두 사건의 기사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증(理證)이다. 이렇게 고인의 위증(僞證)을 인(人)으로 사(事)로 또 이(理)로 증명하여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임을 알 것이다.
② 후세 사람의 위증이니, 원서에는 본래 거짓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이 문구를 보태어 위증한 것이다. 마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 하여, 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등에 보인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안서고(顔師古) 등으로 하여금 곡필(曲筆)을 잡아 고치고 보태고 바꾸고 억지의 주를 달아서, 사군(四郡 : 樂浪ㆍ臨屯ㆍ眞番ㆍ玄ꟙ)의 연혁이 가짜가 진짜가 되고, 역대 두 나라의 국서가 더욱 본래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증거는 본편 제 2장 지리연혁(地理沿革)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가짜 가운데 진짜니, 마치 관자(管子) 같은 것은관중(管仲)의 저작이 아니고 지나 육국(六國) 시대의 저작인 위서(僞書)이나 조선과 제(齊)의 전쟁은 도리어 그 실상을 전한 자이니,위서로서도 진서(眞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5) 만(滿)ㆍ몽(蒙)ㆍ토(土) 여러 종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이다. 김부식은 김춘추(金春秋)ㆍ최치원(崔致遠) 이래의 모화주의(慕華主義)의 결정(結晶)이니,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에 고주몽(高朱蒙)은 고신씨(高辛氏 : 고대 중국 5제의 한 사람)의 후예다, 김수로(金首露)는 금천씨(金天氏 : 黃帝의 아들 少昊)의 후예다, 진한(辰韓)은 중국 진인(秦人)이 동래(東來)한 것이다 하여,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는 지나족을 동종(同宗)으로 보아, 말살에다 쇠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편벽된 소견을 간파한 이가 없었으므로, 우리 부여의 족계(族系)가 분명치 못하여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를 캄캄한 구석에 둔 지가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가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을 보니, 삼성(三姓)의 귀족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賢王) 있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祭天)이 마한과 같고, 무기일(戊己日)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으며, 왕공(王公)을 한(汗)이라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鞮)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臣智)의 지(智)와 한지(旱支)의 지(支)와 같으며, 후(后)를 알씨(閼氏)라 함이 곧 ‘아씨’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겼다. 인축(人畜)ㆍ회계(會計)하는 곳을 담림(儋林) 혹은 대림(蹛林)이라 함이‘살임’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고, 휴도(休屠)는 소도(蘇塗)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라안에 대휴도(大休屠)를 둔 휴도국(休屠國)이 있고, 각처에 또 소휴도가 있어서 더욱 삼한의 소도와 틀림이 없었다.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 년 전에는 한방 안의 형제였다는 의안(疑案)을 가져 그 해결을 구하다가, 그 뒤에 건륭제(乾隆帝)가 명하여 지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와 요(遼)ㆍ금(金)ㆍ원(元) 세 역사의 국어해(國語解)를 가지고 비교하여보았더니, 비록 그 가운데 부여의 대신 칭호인 ‘가(加)’를 음으로 풀이하여 조선말 김가 이가 하는 ‘가’와 같은 뜻이라 하지 않고 뜻으로 주석하여 가(家)의 잘못이라 하였으며, 금사(金史)ㆍ발극렬(勃極烈)을 음으로 맞는 신라의 불구래[弗矩內]에 상당한 것이라 하지 않고 청조(淸朝)의 패륵(貝勒 : 패리)의 동류라 한 것 등의 잘못이 없지 아니하나, 주몽(朱蒙)이 만주어(滿洲語) ‘주림물’ 곧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 하고, 옥저(沃沮)가 만주어의 ‘와지’ 곧 삼림의 뜻이라 하고, 삼한의 벼슬 이름의 끝자 지(支)가 곧 몽고어 마관(馬官)을 ‘말치’, 양관(羊官)을 ‘활치’라 한 '치‘의 유라 하고, 삼한의 한(韓)은 가한(可汗)의 한(汗)과 같이 왕을 일컬음이고 국호가 아니라고 한 것 등 많은 상고할 거리를 얻었다. 또 그 뒤에 동몽고(童蒙古)의 중을 만나 동몽고 말의 동ㆍ서ㆍ남ㆍ북을 물으니 연나ㆍ준나ㆍ우진나ㆍ회차라고 하여, 고려사의, “동부를 순나라하고(東部曰順那), 서부를 연나라 하고(西部曰涓那), 남부를 관나라 하고(南部曰灌那), 북부를 절나라 하고(北部曰絶那)”고 한 것과 같음을 알았다. 또 그 뒤 일본인 조거용장(鳥居龍藏)이 조사 발표한 조선ㆍ만주ㆍ몽고ㆍ토이기 네 종족의 현행하는 말로 같은 것이 수십 종(이에 나의 기억하는 바는 오직 貴子를 ‘아기’라, 乾醬을 ‘메주’라 하는 한두 가지 뿐임)이 있음을 보고, 첫째 조ㆍ만ㆍ몽ㆍ토 네 가지 말은 같은 어계(語系)라는 억단(臆斷)을 내렸고, 지나 24사(史)의 선비ㆍ흉노ㆍ몽고 등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그 종교와 풍속의 같고 다름을 참조하고, 서양서로써 흉노의 유종(遺種)이 토이기(土耳其 : 터키)ㆍ흉아리(匈牙利 : 헝가리) 등지로 옮겨간 사실을 고열(考閱)하여, 조선ㆍ만주ㆍ몽고ㆍ토이기 네 종족은 같은 혈족이라는 또 하나의 억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억단의 옳고 그름은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의 고어 뿐 아니라 만주어ㆍ몽고어 등도 연구하여 고대의 지명ㆍ벼슬 이름의 뜻을 깨닫는 동시에, 이주(移住)하고 교통한 자취며, 싸우고 빼앗은 자리며, 풍속의 같고 다른 차이며, 문야(文野 : 문명과 야만)의 높고 낮은 원인을 구명하고, 그 밖에 허다한 사적의 탐구와 잘못된 문헌의 교정 등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재료의 수집과 그 선택 등의 수고로움에 대하여 나 자신의 경력을 말한 것이다. 조선ㆍ지나ㆍ일본 등 동양 문헌에 대한 대 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십분 만족하다 할 도서관은 없으나, 그러나 동양으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조선의 소유가 그 외부(外府)의 곳집이 되고 또 서적의 구독과 각종 사료의 수집이 우리같이 표랑생활 중에 있는 한사(寒士)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요, 게다가 새 사학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으나, 지금가지 동양학(東洋學)에 위걸(偉傑)이 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자가 백조고길(白鳥庫吉)이라 하지마는, 그가 저술한 신라사(新羅史)를 보면, 배열ㆍ정리의 새로운 형식도 볼 수 없고 한두 가지 발명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2줄 생략) 좁은천성(天性)이 조선을 헐뜯기에만 급급하여 공평을 결함으로 인한 것인가? 조선 사람으로서 어찌 조선 사학이 일본인으로부터 개단(開端)하기를 바라리요마는, 조선의 보장(寶藏)을 남김없이 가져다가 암매(暗昧) 중에 썩임을 개탄하고 아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제 5장 역사의 개조에 대한 愚見
역사 재료에 대하여 그 없어진 것을 채우고 빠진 것을 기우며, 거짓을 제거하고 헐뜯은 것을 밝혀서 완전하게 하는 방법의 대략을 이미 말하였거니와, 편찬하고 정리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옛날 역사의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일에 왕왕 새로운 체제의 역사를 지었다는 한두 가지 새 저서가 없지 아니하나, 그것은 다만 신라사ㆍ고려사 하던 왕조 독립의 식을 고쳐 상세(上世)ㆍ중서(中世)ㆍ근세(近世)라 하였고, 권1, 권2라 하던 통감(通鑑)ㆍ분편(分編)의 이름을 고쳐 제1편, 제2편이라 하였으며, 그 내용을 보면 재기(才技)ㆍ이단(異端)이라 하던 것을 예술이라 학술이라 하여 그 귀천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요, 근왕(勤王)이라 한외(捍外 : 외적을 막음)라 하던 것을 애국이라 민족적 자각이라 하여 그 신구(新舊)의 명사(名詞)가 다를 뿐이니,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 장책(韓裝冊)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쳤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이제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우리 역사의 개조 방법의 대강을 말하자면,
1) 그 계통을 찾을 것이다. 구사(舊史)에는 갑(甲) 대왕이 을(乙) 대왕의 아버지요 정(丁) 대왕이 병(丙) 대왕의 아우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찾는 외에 다른 곳에서는 거의 계통을 찾지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공중에서 거인이 내려오고, 평지에서 신산(神山)이 솟아 오른 듯하여, 한 편의 신괴록(神怪錄)을 읽는 것 같다. 역사는 인과의 관계를 밝히자는 것인데, 만일 이와 같은 인과 이외의 일이 있다 하면 역사는 하여 무엇하랴. 그것은 지은 사람의 부주의에 의한 것이요, 본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의 국선(國仙)이 진흥대왕(眞興大王) 때부터 문무대왕(文武大王)때까지 전성하여, 사다함(斯多含) 같은 이는 겨우 열 대여섯 살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지나의 대성(大聖) 공구와 겨루게 되었고, 이 밖에 현상(賢相)ㆍ양장(良將)ㆍ충신ㆍ용사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삼국사기에 인용한 金大問의 설)고 하였으나, 그 동안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고 성식(聲息)이 아주 끊어져서, 국선 이전에 국선의 개조(開祖)도 볼 수 없고, 국선 이후 국선의 후계자도 볼 수 없이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갔으니, 이것이 어찌 신라의 신괴록이 아니랴? 고기(古記)에서 왕검이 국선의 개조임을 찾으매, 고구려사에서 조의(皀衣) 선인(先人) 등을 알 것이며, 국선의 하나됨을 찾으매, 이에 국선의 내려온 근원을 알 것이며,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이,
“선랑(仙郞)을 중흥시키자.”고 한 쟁론(爭論)과 예종(睿宗)이, “사선(四仙)의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고 하고, 의종(毅宗)이,
“국선의 복로(伏路)를 다시 열라.”고 한 조서를 보매, 고려에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유통(遺統)이 있었음을 볼지니 이것을 계통을 찾는 방법의 한 예로 든다.
2) 그 회통(會通)을 구할 것이다. 회통이란 전후ㆍ피차의 관계를 유취(類聚)한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통이라는 명칭은 있으나 오직 예지(禮志), 과목지(科目志)-회통의 방법이 완미하지 못하지만-이 밖에는 이 명칭을 응용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히 모였다가 홀연히 흩어지는 구름과도 같고, 돌연히 불다가도 그치는 선풍(旋風 : 돌개바람)과도 같아서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다.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 : 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國)을 치자.‘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지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원년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는데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이 거란(契丹 : 뒤의 遼)과 국교를 끊고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 되는 임금 광종(光宗)ㆍ숙종(肅宗) 같은 이는다 태조의 유지를 성취하려 하였고, 신하에도 이지백(李知白)ㆍ곽원(郭元)ㆍ왕가도(王可道) 같은 이들이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행치 못하고 윤관(尹瓘)이 군신이 한마음으로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창끝을 약간 시험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 이미 얻은 땅이 구성(九城)까지 금(金) 태조(太祖)에게 다시 돌려주니 이는 당시 무사들이 천고에 한되는 일로 여겼고, 그 뒤에 금의 태조가 요(遼)를 토멸하고 지나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를 일컫고 천하를 노려 보았다.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의 여진(女眞) 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하던 노민(奴民 : 高麗圖經에, “여진은 종으로 고려를 섬긴다(女眞奴奉高麗).”고 하였고, 고려사에 실린 김경조(金景祖)의 국서에도,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았다(女眞以高麗爲父母之邦)”고 하였음)이었는데 갑자기 강성해져서 형제의 위치로 바뀌었다(고려사에 실린 金景祖의 국서에, “형 大金皇帝가 글을 아우 고려왕에게 보낸다(兄大金皇帝致書干弟高麗國王).”고 하였음). 이에 나라 사람들 가운데 좀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국치에 눈물을 뿌렸다. 묘청은 이러한 틈을 타 고려 초엽부터 전해오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나라가 조공온다(定都平壤三十六國來朝).”하는 도참(圖讖)을 가지고 부르짖으니, 사대주의의 편벽된 소견을 가진 김부식 등 몇몇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묘청에게 호응하여, 대문호인 정지상(鄭知常)이며, 무장(武將)인 최봉심(崔逢深)이며, 문무가 겸전(兼全)한 윤언이(尹彦燎 :尹瓘의 아들) 등이 모두 북벌론을 주창함으로써 묘청의 세력이 일시에 전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묘청의 하는 짓이 미치고 망령되어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나라 이름을 고치고 온 조정을 협박하니, 이에 왕의 좌우에 모시고 있던 정지상은 묘청의 행동을 반대하였고,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가 다른 김부식과 함께 묘청 토벌의 선봉이 되었다. 이것이 묘청이 실패한 원인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벌한 후에 또 윤언이를 내쫓아서 북벌론자의 뿌리를 소탕해버렸다.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이로 하여 조선이 쇠약해질 터전이 잡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의 성패한 원인과 그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분명하지 않은가. 이로써 회통(會通)을 구하는 한 예를 보인 것이다.
3) 심습(心習)을 제가할 것이다. 영국 해군성(海軍省)의, “세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鼻祖)는 1592년경의 조선 해군 대장 이순신(李舜臣)이다.”라고 한 보고가 영국사에 실려 있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당시 일본 배가 철갑(鐵甲)이요, 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면서 그 보고는 틀린 것이라고 반박하고, 조선의 집필자들은 이것을 과장하기 위하여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하여 조선과 일본 어느 나라가 먼저 철갑선을 창조하였는가 논쟁하게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런 뚜렷한 증거가 없는 위안(僞案)이라 족히 따질 것이 없거니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설명한 귀선(龜船)의 제도를 보건대, 배는 널빤지로 꾸미고 철판으로 꾸민 것이 아닌 듯하니, 이순신을 장갑선(裝甲船)의 비조라고 함은 옳으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옳지 않을 것이다. 철갑선의 창조자라 함이 보다 더 명예가 되지마는, 창조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進化)의 계급을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가, 고려의 어떤 명장(名匠)이 증기선을 창조하였다든 문구가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신용치 못한 것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겠다.
4) 본색(本色)을 보존할 것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국선(國仙) 구산(瞿山)이 사냥을 나가서 어린 짐승이나 새끼 가진 짐승을 함부로 낭자하게 죽였는데, 주막의 주인이 저녁 밥상에 자기의 다리살을 베어놓고, 공(公)은 어진 이가 아니니 사람의 고기도 먹어보라고 하였다.”고 한 말이 있다.
이는 대게 신라 당시에는 영랑(永郞)ㆍ술랑(述郞) 등의 학설이 사회에 침투되어 국선 오계(五戒)의 한 가지인, ‘살상은 골라서 하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다 실행하던 때이므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사람의 고기도 먹으리라는 반감(反感)으로 주막의 주인이 이렇게 참혹하게 무안을 준 것이다. 그것이 수십 자에 지나지 않는 기록이지마는, 신라 화랑사(花郞史)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미천황기(美川王紀)에, “봉상왕(烽上王)이 그 아우 돌고(咄固)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죽이니,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 : 美川王의 이름)이 겁이 나서 달아나 수실촌(水室村) 사람인 음모(陰牟 : 당시 부호의 이름인 듯)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음모가 밤마다 기와와 돌을 집 옆의 늪에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라 하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을불은 견디다 못 하여 1년 만에 달아나서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소금장수가 되어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 짐을 강동(江東)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 부렸다. 한 노파가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쯤 주었더니, 그 후에 또 달라고 하므로 이를 거절하였는데 노파는 앙심을 품고 몰래 짚신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 묻었다가 을불이 길을 떠난 뒤에 쫓아와서 도둑으로 몰아 압록제(鴨綠宰)에게 고발하여 짚신 한 켤레의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빼앗고 매질까지 한 뒤에 놓아 보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도 불과 몇 줄 안 되는 기록이지마는 또한 봉상왕 시대의 부호의 포학과 시민과 수령의 사악한 행위를 그린 약도이니, 그 시대 풍속사의 일반(一班)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아무 맛 없는, ‘어느 임금이 즉위하였다’, ‘어느 대신이 죽었다.’ 하는 등의 연월(年月)이나 적고, 보기 좋은 ‘어느 나라 어느 나라가 사신을 보내왔다.’하는 등의 사실이나 적은 것들이요, 위의 3), 4) 두 절(節)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그린 글은 보기 어렵다. 이는 유교도(儒敎徒)의 춘추필법(春秋筆法)과 외교주의(外交主義)가 편견을 낳아서, 전해 내려오는 고기(古記)를 제멋대로 고쳐서 그 시대으 사상을 흐리게 한 것이다.
옛날 서양의 어느 역사가가 이웃집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말을 역력히 다 들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남들이 말하는 그 두 사람의 시비는 자기가 들은 것과는 전연 달랐다. 이에, ‘옛날부터의 역사가 모두 이 두 사람의 시비와 같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하고 자기가 저술한 역사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탐보원(探報員 : 취재 기자)이 들어다가 보고하고 편집원이 다시 교정하고 그러도고 잘못이 생기는 예가 있는 신문ㆍ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의 신문이 이러하다 하면 을의 신문은 저러하다 하여, 어느 것을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으니, 하물며 고대의 한두 사학가가 자기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대로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그리고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마지막 왕 우(禑)의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세 사람이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죄를 나무랄까 하여 백방으로 우는 원래 왕씨의 왕통을 잇지 못할 요망한 중 신돈(辛旽)의 천첩(賤妾) 반야(般若)의 소생이라 하고, 경효왕(敬孝王 : 恭愍王?)이 신돈의 집에서 어떻게 데려왔다느니, 반야가 우를 궁인 한씨(韓氏) 소생으로 정하는 것을 보고 통한(通恨)하여 울부짖어 우니 궁문(宮門)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느니 하여 아무쪼록 우가 신씨임을 교묘하게 증명하였다.그러나 우는 오히려 송도(松都) 유신(遺臣)들이 있어 굴 속에 숨어서까지 우의 무함당함을 절규하였으므로, 오늘날 사학가들이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오히려 우가 왕씨요, 신씨가 아님을 믿는 이도 있다.
또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大兵)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케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를 죽여 마땅한 죄를 구하였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인데, 왕이 그가 5월 5일에 났음을 미워하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쳐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진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가 나자 헌안왕이 엄명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여 궁녀가 누각 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가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이 잘못 아이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유모가 데려다가 비밀히 길렀는데, 10살이 되자 장난이 몹시 심하므로 유모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은 차마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가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며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군사를 모아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 도둑의 괴수 기훤(箕萱)에게로 갔다가 뜻이 맞지 않아 다시 다른 도둑의 괴수 양길(梁吉)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가령 위의 말이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평생 비밀일 것인데, 그것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刑法) 밖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이겠는가?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의가 끊어졌으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갈질을 하여도 아비를 죽인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서울과 능(陵)을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이 될 것 없거늘 하물며 왕의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란이 되랴마는 고대의 좁인 논리관(論理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의 초상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만 하여도 궁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안 되었으랴?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도 태조문성(太祖文聖)의 존시(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史官)이 구태여 세달사
(世達寺)의 한 비렁뱅이 중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의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제왕이라 역적이라 함은 성패의 별명일 뿐이요, 정론(正論)이라, 사론(邪論)이라 하은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인데, 게다가 보고 들은 데 잘못이 있고, 쓰는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과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역사를 저술하는 이도 어리석은 사람이거니와, 그 써놓은 것을 가지고 앉아서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역사를 읽는 이가 더욱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의 성이 왕(王)인가 신(辛)인가를 조사하여 바로잡느니보다 다만 당시의 지나에 대하여 선전(宣戰)하고,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 함이 이루어질 일인가 실패할 일인가, 성패간에 그 결과가 이로울까 해로울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와 반대한 이성계의 시비를 말함이 옳을 것이고, 궁예의 성이 궁(弓)인가 김(金)인가를 변론하는 것보다, 신라 이래 숭상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에 새 불교를 성립시키려 함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이 아니더면 궁예의 그 계획이 성취 되었을까? 성취되었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와 대적하던 왕건의 옳고 그름을 말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이는 고대로부터 역사학자들이 논쟁하는 문제다. 이조 전반기의 사상계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사상으로 지배되고,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산인(退溪山人 : 李滉)의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러면 이조 5백 년 동안의 사회는 세종ㆍ퇴계가 만든 것이 아닌가? 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6백 년 동안은 영랑(永郞)ㆍ원효(元曉)가 각기 당시 사상계의 한 방면을 차지하여 영랑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원효의 사상이 물러나고 원효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영랑의 사상이 물러나서 일진일퇴(一進一退) 일왕일래(一往一來)로 갈아들어 사상계의 패왕(覇王)이 되었으니, 6백 년 동안의 사회는 그 두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가?
백제의 정치 제도는 온조대왕(溫祚大王)이 마련하여 고이대왕(古爾大王)이 마무리하였고, 발해의 정치 제도는 고제(高帝)가 마련하여 선제(宣帝)가 마무리하였으니, 만일 온조왕과 고이왕이 아니더면 백제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고제와 선제가 아니더면 발해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일이다. 삼경(三京) 오도(五都)의 제도가 왕검과 부루(夫婁)로부터 수천 년 동안 정치의 모형이 되었으니, 이로써 보면 한 사람의 위대한 인격자의 손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고, 사회의 자주성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살펴보자. 고려 말엽에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이르러 원효종(元曉宗)은 이미 쇠미해지고 임제종(臨濟宗)에도 또한 뛰어난 이가 없고, 다만 10만 명의 반승회(飯僧會 :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모임)와 백만 명의 팔관회(八關會 : 천신에 제사 지내어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빌고 온갖 놀이도 즐기는 모임)로 제물과 곡식을 낭비하여 국민이 머리를 앓을 뿐 아니라, 사회는 이미 불교 밖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안유(安裕)ㆍ우탁(禹倬)이며 정몽주가 유교의 목탁을 들었고, 그 밑에서 세종이 나고 퇴계가 났으니, 그러면 세종의 세종됨과 퇴계의 퇴계됨이 세종이나 퇴계 그 자신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함이 옳지 않을까?
삼국 말엽, 그 수백 년 동안에 찬란히 발달한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받아 소도천군(蘇塗天君)의 미신이나 율종소승(律宗小乘)의 하품(下品) 불교로는 영계(靈界)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서 사회가 그 새 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이므로 신라의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다 여러 교종 통일의 새로운 안을 내놓으려 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 영랑이 도령(徒領)의 노래를 부르고 원효가 화엄(華嚴)의 자리를 베풀었으며, 최치원이 유도에서 불도로 불도에서 선도로 바꾸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니 이에 각계가 갈체하여 이 세 사람을 맞았다. 그러니 영랑이나 원효나 최치원이 다 본인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이에 따라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에 원효가 된 것이요,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가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희랍 철학의 강단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프랑스나 독일의 현대에 났더라면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
나파륜(拿破崙 : 나폴레옹)의 뛰어난 재주와 큰 계략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大學) 읽던 시절에 도산사원(陶山書院) 부근에 태어났더면, 무러가 송시열(宋時烈)이 되거나 나아가 홍경래(洪景來)가 되었을 뿐이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분량으로 그와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면목이 아주 달라졌을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논조(論調)가 여기에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라는 불무에서 이루어질 뿐이니, 개인의 자주성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도 자주성도 없고 사회도 자주성이 없으면 역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것을 볼 때 개인이나 사회의 자주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주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며 만주며 토이기며 헝가리가 3천 년 전에는 다 뚜렷한 한 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시아에 그대로 있고 혹은 유럽으로 옮겨가서 대륙의 동서가 달라지고, 혹은 반도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옥한 땅으로, 혹은 온대 혹은 한대로 분포하여 땅의 멀고 가까움이 다르고, 목축이나 농업, 침략이나 보수 등으로 생활과 풍속이 해와 달을 지내는 대로 더욱 간격이 생겨서 각자의 자주성을 가졌다. 이것이 곧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이라 하는 것이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 시대가 고려 시대와 다르고, 고려 시대는 또 동북국(東北國 : 渤海ㆍ濊貊 등)과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과 같지 아니하며, 왕검ㆍ부루 시대와도 같지 아니하다. 멀면 1천 년의 전후가 다르고, 가까우면 1백 년의 전후가 다르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문명의 진보가 더욱 빨라서, 10년 이전이 홍황(鴻荒 : 오랜 옛날)이 되고, 1년 이전이 먼 옛날이 될는지 모르는 일이니, 이것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하는 사회성(社會性)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났다 하면, 원효는 유자(儒者)가 되고 퇴계는 불자(佛子)가 되었을는지 모르는 일이거니와, 도양(跳揚) 발달한 원효더러 주자(朱子)의 규구(規矩)만 삼가 지키는 퇴계가 되라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졸(庸拙)한 퇴계더러 불가의 별종(別宗)을 수립하는 원효가 되라 한다면 이도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니, 왜냐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낳는 원료됨과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도 개인과 같이 어느 곳 어느 때에 갑이라는 민족이 가서 그 성적이 어떠하였으니, 을이라는 민족이 갔더라도 마찬가지 성적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대개 개인이나 민족이 두 가지 개성이 있으니, 그 하나는 항성(恒性)이요, 다른 하나는 변성(變性)이다. 항성은 제1의 자중성이요, 변성은 제2의 자주성이니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치 못하여 절멸(絶滅)할 것이요, 변성이 많고 항성이 적으면 나은 자에게 정복당하여 패할 것이니, 늘 역사를 회고하여 두 가지 자주성의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겁고 가벼움을 평균하게 하여, 그 생명이 천지와 한 가지로 장구하게 하려면 오직 민족적 반성에 의하는 수밖에 없다.
5) 역사의 개조에 대한 나의 우견(愚見)으로 이상에 의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지었으니, ① 사회의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② 사회의 아직 정해지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하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行義)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이미 주실(周室)을 떠났는데, 존주(尊周 : 주나라를 존중함)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曹操)와 사마(司馬 : 司馬懿)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하게 한 구석에서 정통이 다 무엇하는 것이냐.”하며 공자ㆍ주자의 역사 필법(筆法)을 반대하니, 그의 제자 신극성(辛克成) 등은, “이는 참으로 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와 학식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부식(扶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가 이미 깊이 박혀 전 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은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하랴.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한 장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폐하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이 모두 불 속에 들어갔다. 이는 곧 ① 에 속하는 것이다.
최치원이 지나 유학생으로 떠나갈 때 그의 아버지가, “10년이 되어도 과거를 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여 하나의 한문 졸업생이 되는 것을 바랐을 뿐이었고, 최치원이 돌아와서, “무협(巫峽) 첩첩한 봉우리를 헤치고 중원에 들어가 급제하여 벼슬에 놀기 3년, 금의(錦衣)로 동국에 돌아왔다.”하고 노래하여 또한 스스로 하나의 한문 졸업생 되었음을 남에게 자랑하였다. 그 사상은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에만 있는 줄로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은 모르며, 학식은 유서(儒書)나 불전(佛典)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古記) 한 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 지나화하려는 것뿐이고, 그 예술은 청천(靑天)으로 백일(白日)을 대하며, 황화(黃化)로 녹초(綠草)를 대하는 사륙문(四六文 : 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문 문체의 하나)에 능할 뿐이었다.
당시 영랑과 원효의 두 파가 다 노후하여 사회의 중심이 되는 힘을 잃고,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구함과 같았으니 그래서 대 선생의 칭호가 한낱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고 다음에는 천추(千秋)의 혈식(血食 : 나라에서 제사를 지냄)까지 그에게 바쳐,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랑과 원효 두 파의 자리를 마주 대하고 되었다. ‘때를 만나면 더벅머리도 성공한다.’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 이는 ② 에 속하는 것이다.
어찌 학계뿐이랴. 모든 사업이 그러하니, 기훤(箕萱)과 양길(梁吉)도 한때에 크게 펼쳐짐은 신라 말엽의 안정되지 않은 판국에서 일어남이요, 이징옥(李澄玉)이나 홍경래가 거연히 패망함이 이조의 안정되어 있는 판국에서 그리 된 것이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하기를, “나도 중국의 육조(六朝 : 後五代, 곧 唐과 宋 사이 53년 동안에 일어났다 사라진 後粱ㆍ後唐ㆍ後晉ㆍ後漢ㆍ後周의 다섯 왕조)를 만났더라면 돌림천자는 얻어 했겠다.”고 하였다.
임백호 같은 시인에게 육조ㆍ오계의 유유(劉裕 : 南宋의 武帝)ㆍ주전충(朱全忠 : 後粱의 太祖) 같은 도둑의 괴수와 같이 되어 돌림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지나의 천자를 경영하려면 한ㆍ당의 치세보다 육조ㆍ오계의 난세(亂世)가 더 쉬울 것은 자연한 이치일 것이다. 이미 안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전의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이것을 부연(敷演)하고 이것을 확장할 뿐이니, 인물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 같은)은 매양 실패로 미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한 말이나, 한 일의 종적까지 없애버리므로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零度)가 되고, 오직 3백 년이나 5백 년 뒤에 한 두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가 있어 그의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요, 안정되지 않은 사회의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ㆍ혁명적 남아라야 할 듯하나, 어떤 때에는 꼭 그렇지도 아니하여, 작은 칼로 잔재주를 부리는 하품(下品)의 재주꾼(최치원 같은)으로서의 외국인의 입을 흉내내서 말하고 웃고 노래함이 그럴듯하여 사람들을 움직일 만하면 거연히 인물의 지위를 얻기도 하나, 인격적 자주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여 전 민족의 항성(恒性)을 파묻어버리고, 변성(變性)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요, 인물되기를 뜻하는 사람이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