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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마을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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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호 |
| 농어촌과 도시를 이어간다는 마음으로 제작을 시작한 KBS <6시 내고향>의 '백년가약'은 대한민국 농어촌 100개 마을과의 아름다운 약속을 맺겠다는 취지로, 현재 95개의 마을과 백년가약을 맺고 있다.
그 동안 제작진은 95개 마을과 약속을 맺으며 농어촌의 희망을 보아왔다. 그리고 그 희망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제작진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였다.
그리하여 제작진은 '백년가약' 97호로 우리 귀에 익숙하지만은 않은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좀 떨어진 고려인들의 새 정착지, '우정마을'과 아름다운 약속을 맺기 위해 지난 5월 26일 발걸음을 향했다.
제작진은 농업 외에 다른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우정마을 중앙에 농업기술센터를 신축하여 주민들이 보다 효율적이고 전문적으로 농업을 배우고, 일자리를 찾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
또 그들이 박차를 가하고 있는 청국장 제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들의 삶, 고단한 삶이 이제는 희망의 삶으로 바뀌길 원했다. 그리고 러시아 우정마을이 한국인의 제2의 고향이 되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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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리크스 기차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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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호 |
| 아/ 연해주 거기/ 함께 모임 나의 동포/ 까레이스키들의 가슴속에서/ 우주만큼 은하만큼 크게 울리는/ 출버렛소리며 눈빛이며/ 한밤에 백옷이 뜨는/ 백야여 백야여 (김지하, 시 '아 연해주 거기' 중에서)
5월, 그곳은 민들레 지천이었다. 광활한 대지 러시아에서 마주하는 봄은 노란 민들레가 대신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
인천 공항에서 불과 두 시간 남짓 떨어진 거리,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다다랐을 때 길고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다소 낡은 공항의 모습과 삼엄한 경비 속, 긴 수속 절차와 수없이 나오는 큰 짐들.
가녀린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큰 가방이 너무도 안타까워 보였던 중국 여상인의 모습과 카트에 담긴 승객들의 짐을 나르고 그 무게만큼 하루 품삯을 담아 가는 러시아 일용직 노동자들의 모습은 밝고 활기찬 인천 공항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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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리스크 기찻길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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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호 |
| 한적함을 넘어 차분한 느낌마저 감도는 공항 주변을 벗어나 차로 한 시간 정도를 달렸다. 우리 일행은 연해주의 소도시 우수리스크에서 북쪽으로 약 17km 떨어진 고려인들의 새로운 정착지인 우정마을로 향했다. 마을로 향하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느꼈던 그 편안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정마을의 첫 인상은 우리나라 70, 80년대 농촌과 흡사한 모습에 마치 한국에 있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켰다. 고향의 편안함을 가지고 있던 시골 거리, 그러나 그곳에도 분명 한국과는 다른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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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 위를 걸어가는 거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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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호 |
| 거리의 풀을 뜯어먹고 있던 염소와 차가 오가는 길 위를 여유 있게 걸어가는 거위, 거리에서 야생화를 꺾어 팔던 어린아이들, 거리 위에 조그마한 좌판을 벌여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천에 피어있던 민들레.
바람에 일렁이는 그 노란 물결이 시야를 가렸을 때, 나는 비로소 러시아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하늘과 맞닿아 있던 민들레 물결 위로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이 일 때 즈음, 우정마을의 한 고려인을 만났다.
넓고도 넓은 타국, 러시아에서의 그들의 한평생 삶이 민들레와 같지 않았을까. 그들의 고단한 삶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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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서 야생화를 파는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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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호 |
| "우수리스크역에는 기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역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넘겨졌다. …(중략)… 사람들은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화물차를 한 칸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화물차는 어찌나 많이 연결되어 있는지 그 끝이 까마득해 보일 정도였다." (조정래 장편소설 <아리랑> 중에서)
'고려인' 대신 우리가 부르는 말, 그리고 한번쯤 외국인의 입에서 들어봄직한 말, '카레이스키'. 이는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를 일컫는 말이다.
1863년 가난을 피해 러시아로 이민을 떠난 이들과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인 고려인들. 이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을 당했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그 땅을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잡아왔다. 그곳에서 논과 밭을 일구고 살아보려 노력했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2년 소련의 붕괴로 또 다시 터전을 잃고, 가난의 고통과 이방인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의 고통 끝에 어머니의 땅, 연해주로 다시 돌아왔다. 현재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만 해도 5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다시 돌아온 연해주는 그들에게 희망을 선사하였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그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곳은 우정마을이었다. 현재 우정마을에는 33가구, 총 100여명의 고려인들이 새로이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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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마을 나시쟈(좌), 나타샤(우) 자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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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호 |
| "우정마을에서 우리집 청국장이 가장 맛있어!"
우정마을에서 만난 고려인 '나시쟈' 아주머니의 말씀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고려인들은 청국장 제조를 비롯해 여러 가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일행이 우정마을에 짐을 풀고, 마을 사람들을 만났던 처음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모습은 같은 한국인이었지만, 언어소통이 되지 않았기에 어색한 미소만이 흘러나왔던 첫 만남. 그도 그럴 것이 한국말이라고는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그들은 이곳에서 철저히 러시아인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들도, 우리도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의 말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옆에서 비교적 능통한 한국어로 통역을 해주는 고려인 아주머니가 특유의 포근한 미소와 털털한 웃음으로 채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은 사이 서로를 엮어 주셨다.
인사를 마친 후 부엌을 둘러보니 저녁 준비로 한참 분주했다. 저녁상 위에는 러시아에서 맛보는 삼겹살에 우리의 된장, 고추장이 마련되었다. 이곳에서 자연 농법으로 재배한 각종 채소가 푸짐한 저녁상으로 차려져 있었다.
여기에 러시아의 대표적인 술, 보드카가 곁들어졌다. 술을 잘 못하시는 마을 어머님들은 우리가 맛있게 먹는 모습만으로도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같은 모습에서 제2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보드카만큼 강했다.
우정마을의 고려인들은 대가족이 농장을 꾸려 함께 일을 하는가 하면, 남편은 운전사나 목수로, 부인은 청국장 제조 혹은 농사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러는 중국 시장으로 일을 나가는 부인들도 있었다.
이곳은 일이 많지 않기에 돈도 많이 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 고려인들이 주력하고 있는 사업은 바로 '청국장 제조'이다.
러시아 콩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연해주의 콩은 농약을 한 번도 치지 않은 자연농법으로 재배한 콩이라 한국의 식탁에도 놓이고 있을 만큼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그 콩에 한국식 전통방법을 그대로 살린 제조법, 거기에 항암 효과가 크다고 알려져 있는 러시아산 '차가' 버섯 물을 우려내 만들었기 때문에 효능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도 이곳 주민들의 '차가' 청국장 자랑은 끊임없었다. 취재수첩이 수십장 넘어갈 즈음, 주민들은 "우리의 쉴 시간을 빼앗은 것 같다"며 훌쩍 자리를 떴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마을엔 정적이 감돌았다.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집들은 하나씩 불을 껐고, 낮 동안 내내 짖었던 개들은 소리를 낮추었다.
비행기로 2시간 거리인 우정마을,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를 너무 오래도록 돌아온 것은 아닌지…. 나는 몇 번을 뒤척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안타까움과 반성, 그 속에서도 설렘이 맴도는 밤, 우정마을 주민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펼쳐질 새로운 날이 기대되는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