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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남북의 국립묘지를 찾아 역사화해를 모색하다 2015.05.28 10:55 Posted by 오작교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210번지(옛날 주소,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산44-7번지). 이곳은 바로 국군묘지로 시작해 훗날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묘지로 승격된 서울현충원이다. 국내 9개의 국립묘지 중에서 가장 대표성과 상징성을 지닌 곳이다. 2년여에 걸쳐 북한의 국립묘지 참관을 모두 마치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지하철 4호선 동작역에 하차해 개관시간에 맞춰 당도한 나는 현충문에 들어서자마자 그만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 눈에 들어온 묘역의 수많은 시설물들이 웅장한 것은 물론이고 주변의 자연생태계는 이미 울창한 숲으로 조성돼 첩첩산중을 연상케 했으며, 깨알같이 보이는 수만 개의 묘비들은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뤄 황홀경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신을 가다듬은 후 참관을 위한 도움 요청을 위해 입구 우측에 마련된 현충원 관리사무소를 찾아 나의 방문 목적을 알렸다. 이리저리 분주해 보이는 남녀 직원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의 방대한 업무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식 직원들은 80여명 남짓 된다고 했다. 그 인원으로 이런 엄청난 시설을 운영한다는 것이 벅차게 느껴졌다. 나는 방전된 셀폰을 충전시켜놓고, 무려 143만㎡가 된다는 거대한 규모의 묘역을 효율적으로 소화하기 위해 안내책자를 받아들고 직원들로부터 사전설명을 청취한 후 마치 산행을 준비하듯 본격적인 참관길에 올랐다.
어찌된 영문인지 전국에는 두 개뿐인 국립현충원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동작동 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관이고 대전현충원은 ‘보훈처’ 소관이라고 했다. 경내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지난 50여 년 동안 산림지역 내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인근 야산의 훼손을 금지하는 등 철저한 보전 조치를 한 결과로 마치 휴전선 일대 D.M.Z(비무장지대)처럼 서울도심 속 청정지역으로 느껴졌으며 호국공원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하고 아름다운 장소로 여겨졌다.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가다
나의 길 안내를 잠시 도와주려는 직원과 함께 사무실을 나와 묘역 전경을 바라보니 모든 비석에는 한눈에 봐도 조화로 된 무궁화와 꽃병이 놓여 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최근 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무연고 묘지들이 급속히 늘어나 10년 전부터는 찾지 않는 모든 비석에 일괄적으로 무궁화 조화를 꽂아둔다”고 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 조화들도 퇴색하기 때문에 매년 현충일과 추석을 앞두고 항상 교체 작업을 하는데, 그때마다 일손이 모자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도 했다. 전체 묘역의 60%를 차지한다는 6.25 한국전쟁 전사자 유족들이 고령화되면서 묘지를 찾는 발길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었다.
나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쓸쓸한 묘지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안은 채, 등반에 앞서 의례적으로 가장 먼저 현충탑을 찾았다. 노산 이은상이 지은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라고 새겨진 ‘현충시’가 박정희 대통령 휘호로 오석평판에 새겨있었다. 제단 앞 향로와 향합대에 쓰여진 ‘충혼’이라는 글귀도 역시 박 대통령의 휘호라고 한다. 탑의 좌우에는 화강암 석벽이 조각상과 함께 펼쳐 있는데 좌측 석벽은 5인의 애국투사상, 우측 석벽은 5인의 호국영웅상이 청동상으로 세워져 있었으며, 탑 내부는 위패봉안관이 있고 위패봉안관 지하에는 납골당이 모셔져 있었다.
참배를 마친 나는 다시 분수대로 돌아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무조건 발길을 돌렸다. 등산을 하듯 땀을 흘리며 고지대를 올라갔더니 그곳이 바로 해발 179m라는 서달산 정상이었다. 산자락에는 바위들이 옹기종기 있는데 그중에 거북이 형상 같은 일명 ‘거북바위’가 있어 냉큼 올라 멀리 전경을 내려다보니 한강 너머로 북한산, 남산, 용마산, 인왕산, 북악산 등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펼쳐졌다. 미리 검색한 인공위성 맵과 안내책자를 보니 한강과 과천 사이에 자리 잡은 이곳 서울현충원은 앞으로는 한강, 뒤로는 관악산 공작봉이 호위하듯 펼쳐 있는 형세다. 공작봉을 주봉으로 하여 정기어린 능선이 병풍을 치듯 묘역의 3면을 감싸고 있는데다 앞으로는 한강이 유유히 굽이쳐 흘러서 그런지 매우 안정적이고 아늑해 보였다.
그러나 현충원이 위치한 산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내가 서 있는 서달산이 서울현충원을 뒤에서 살포시 껴안고 있는 형국이라서 묘역 전체가 당장 서달산 아래로 부채처럼 펼쳐진 듯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인근 주민들은 이곳 서달산을 흔히 국립묘지 ‘뒷산’ 혹은 ‘둘레길’이라고도 했다.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는 ‘산수의 기본이 유정(有情)하고 산세가 전후좌우에 펼쳐져 흐르는 듯하여 하나의 산봉우리, 한 방울의 물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으로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할 수 있다’고 기록됐는데 그 설명에 공감이 갔다.
알고 보니 무덤터로서의 서울현충원 자리는 조선시대 선조가 자신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할 정도로 매우 전통 있고 유서 깊은 명당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충원 중턱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 묘소에서 이승만 대통령 묘소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서울시 유형문화재 54호로 지정된 창빈 안씨 묘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비록 후궁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봉분과 호석등 당시 왕족 묘지의 형식을 두루 갖춘 꽤 규모 있는 무덤이었다. 창빈 안씨는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후궁이기도 하면서 조선왕조 14대 임금인 선조의 친할머니가 되며, 원래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에 있었지만 풍수지리상의 문제로 명당을 찾던 중 1년 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고 한다.
경내에는 아홉 가지의 섹션별 묘역과 시설물들이
현충원 경내는 주요 묘역들이 섹션별 모두 9가지로 조성돼 있었다. 다양한 계층의 참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국가원수묘소 3곳, 임시정부요인묘역,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 등이 조성돼 있고, 3곳으로 분산된 국가유공자묘역과 3곳으로 분산된 장군묘역이 거리를 두고 각각 떨어져있었다. 또한 이곳 국립묘지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일반 장교와 병사묘역이 2개 구역으로 조성돼 있고, 경찰관묘역과 외국인묘역도 있었다.
이 묘역들 중에 현충원 관리소 측에서 일반인들에게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한 특별한 묘지들로는 1983년 버마 아웅산 사태 희생자들의 묘소를 비롯해 ‘동쪽호국길’ 방향에 위치한 연제근상사의 묘(27묘역), 부자(夫子)의 묘(29 묘역), 형제(兄弟)의 묘(30묘역), 강재구, 이인호 소령의 묘(51묘역), 이원등 상사의 묘(53묘역)들이 있으며, 반대편 ‘서쪽호국길’에 위치한 임동춘 대위의 묘(3묘역), 육탄10용사의 묘(6묘역), 양병수 상사의 묘(묘역), 김재현 기관사의 묘(7묘역), 재일학도의용군묘역(16묘역), 1.21사태순직자묘역(24묘역), 베트남 찌빈둥 전투전사자묘역(26묘역) 등이 있었다.
국립현충원은 애초부터 국군묘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군인과 경찰들이 가장 많으나 서울과 대전의 국립묘지에는 의외로 민간인들도 80여명 정도 안장돼 있다고 한다. 화학자 이태규 박사,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이종욱, 베를린 올림픽 영웅 손기정, 동요작가 윤석중, 한글학자 주시경,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등 저명인사들이 안장돼 있다. 또한 외국인 묘역도 가볼만한 곳으로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석호필), 중국 화교 장후이린(강혜림), 위쉬팡(위서방) 열사 등은 외국 국적이지만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 1919년 3·1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탑골공원에서 함께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장후이린과 위시팡 열사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무공을 세웠던 인물들이다.
경내에 건립된 주요 현충시설물로는 현충원의 상징과도 같은 현충문과 현충탑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고, 이어 학도의 용군무명용사탑,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 재일학도의 용군전몰용사위령비, 충렬대, 경찰충혼탑, 육탄10용사현충비, 유격부대 전적위령비, 충혼당, 위패봉안관, 봉안식당, 현충관, 사진전시관, 유품전시관 등의 조형물들과 시설물들이 예술적으로 혹은 멋진 현대식으로 갖춰져 있었다. 또한 충성분수대, 충혼승천상, 충성거북상등은 한번 발길을 멈추고 살펴볼만한 조형예술작품들이고, 애국정(6각정자), 호국정, 350년력의 보호수, 공작지, 현충지등은 가볼만한 아름다운 장소들이며, 매점과 꽃집을 운영하는 만남의 집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서달산 기슭에 있는 국가사찰로 지정된 호국지장사도 가볼만한 곳이다. 또한 제1 장군묘역 정상과 서달산 정상에 올라가면 국립묘지 전경은 물론 한강과 서울시내 여러 산들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여서 직접 가볼만한 곳이었다.
또한 서달산 주변은 이미 2009년 8월 27일, 현충근린공원(일명, 달마공원)으로 결정되어 인근주민들과 참배객들의 산책과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숲속에서 삼림욕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정상에는 팔각정자와 정상표지석, 토지지신표석 등이 있고 정상 바로 아래는 동작대라는 2층 팔각정자와 여러 가지 운동시설이 구비되어 있었으며 훌륭하게 조성된 ‘동작충효길’은 일곱 코스로 설정되어 그 길이가 무려 25km(60리길)나 된다고 한다. 무덤과 도시, 무덤과 자연의 공존을 테마로 조성한 코스들은 호국공원의 교육적 효과를 누리며 동시에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명품 산책길로 거듭나 있었다.
또한 제 1장병묘역과 제 2장병묘역 사이에는 ‘현충천’이라는 시내가 흐르고 있는데 구름다리, 정국교, 장난교, 수충교 라는 이름의 다리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어 경내 분위기를 한껏 멋스럽게 하며 경내 하단부 산책길로 적당했고, 상단 산책길로는 국립묘지 경내 전체를 아우르는 ‘솔냇길’과 ‘은행나무길’이 멋지게 조성돼있었다. 나도 직접 걸어보니 좌측에서 출발하는 솔냇길을 한참 걷다보면 우측에서 시작된 은행나무 길과 서로 원을 그리며 만나는 형국으로 조성되어 있어 마치 오솔길과 숲속을 합쳐 놓은 듯한 길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또한 시민들의 산책을 위해 외곽담장도 3군데나 개방을 했는데 이 길은 그동안 걸었던 가장 멋진 산책길로 각인되었다. 또한 정문 분수대부터 아름다운 수양벚꽃나무 길이 조성돼 있고, 장병묘역은 이팝나무 길이 조성돼 있어 경내 조경의 멋을 더해주어 만개하는 꽃피는 춘삼월과 봄철에 방문하면 꽃구경에 시간가는 줄 모를 것만 같았다.
똑같은 국립묘지인데 ‘국립 현충원’과 ‘국립 민주묘지’는 대립중
나는 서달산 정상을 내려와 병사들의 묘역을 거닐며 동작동 국립묘지의 역할과 사회적 의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서울현충원은 유력정치인들이 국민적 지지나 자신의 위상을 위해 빈번하게 방문하는 곳으로 활용됐으며, 국립묘지는 자신의 정체성과 성향을 달리하는 정치세력들에 의해 이념갈등의 각축장이 되었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가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A급 전범들의 사당인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자국 내 보수우익 표를 의식해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 정치인들도 창당을 하거나 대선 또는 총선에 출마하면 으레 이곳을 찾아 분향하며 각오를 다진다. 현충탑 분향은 의례적일 뿐 전직 특정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며 마침내 자신의 정치 색깔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처럼 그동안 국립묘지가 지니고 있었던 두터운 이념적 외벽을 진보가 집요하게 흔들고 있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는 듯 보인다. 보수는 이른바 ‘반공군사주의’에 기초한 애국주의와 그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려는 공간인 국립현충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려 하고, 그런 자신들의 정체성을 흔드는 일체의 정치적 의도와 행위들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이를 즉각 부정하고 마치 하이에나처럼 반격에 나서고 있다. 반대로 진보세력은 마산 3.15묘역, 수유리 4.19묘역, 망월동 5.18묘역 등 ‘국립 민주묘지’가 구현하고 있는 가치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재성을 찾고 있으며, 현재 드러나고 있는 국립현충원에 대한 모순들을 민주와 자주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있는듯하다.
김기남 비서가 이끄는 북측 대표단의 서울현충원 참배, 김대중 대통령 서울현충원 안장, 안현태 경호실장의 대전현충원 안장, 그리고 2012년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대통령 후보들의 서울현충원 참배 사례 등을 통해 드러난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 아직도 국립현충원은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결과 갈등의 장소이다. 나는 절대적 숭고함과 신성함의 장소이어야 할 국립묘지가 왜 이처럼 정치적 연출과 이념대립의 공간이 되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특히 전직 국가원수 묘소 참배를 놓고 벌인 보수와 진보의 신경전을 떠올리며 이제라도 국립묘지에서부터 소통과 통합의 출발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남남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남과 북의 소통과 통합 그리고 갈등해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간’이 ‘상생의 공간’으로
굳이 내 정치적 성향과 브로맨스 이상형을 밝히라고 한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들이다. 두 지도자가 이끌었던 정부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에 관한 일제의 위상과 역할, 해방 이후 미국이 남한과 한반도에 끼친 영향력, 북한에 대한 기존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인식 등이 역대 정권들과는 다른 객관적인 해석을 시도했고, 이를 ‘민족, 민주, 자주’라는 통로로 실천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나는 서울현충원의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3위 묘소와 대전현충원의 최규하 대통령 묘소를 모두 참배하였다.
진보와 보수의 상징인 이들 4위의 정치적 평가와 성향이 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립묘지가 통합의 공간으로 바뀔 때 정치 분야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진정한 사회통합이 앞당겨 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지난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 묘소만 참배해 “속이 좁다”는 핀잔을 들은 반면, 안철수 의원은 이곳의 전직 대통령 3위 묘소를 모두 참배했다가 언론과 네티즌들로부터 “그게 새 정치냐?”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국립묘지에서 반민족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을 색출하여 그들의 행적과 이념적 특성에 관한 비교론에 집중하기 보다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시대를 온 몸에 지니고 있는 국립현충원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북한과는 달리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문제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단순한 선악의 잣대와 흑백의 논리로만으로는 규정지을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친일청산을 방치하거나 무조건 덮어둘 수만은 없기에 진정한 친일청산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봤다.
진보성향의 야당 대표나 정치인들이 보수의 상징인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단순 참배했다고 해서 쉽게 사회통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사회통합정신이 무엇인지 깊이 통찰하지 않은 채 입으로만 부르짖으면 오히려 정치적인 쇼로 비쳐질 가능성이 많고 득보다는 실이 많을 수 있다. 상징적인 일이긴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승만 정권의 피해자였던 백범 김구선생의 묘소를 참배해야 하며 아울러 박정희 정권의 피해자인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묘소를 참배하는 일이 더 우선이다. 진정한 똘레랑스(tolérance)는 가해자를 용서하기에 앞서 그 가해자에 의한 피해자를 더 먼저 찾아가 어루만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가해자를 용서하고 품는 것은 그 다음 순서에 해도 늦지 않다. 이처럼 죽음의 공간인 무덤들이 상생의 공간으로 바뀔 때 한국사회의 반통일적인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모티브와 시각을 제공할 수 있고 진정한 공존의 사회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작은 통찰에서 나의 발걸음은 조심스럽게 세 전직 대통령들의 묘소로 향했다.
전직 세 대통령들의 묘소 참관
호기심에서 그런지는 몰라도 현재 서울현충원 방문객들 중에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들조차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관하는 일이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전직 대통령은 모두 4명이며 이중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3인의 묘소는 이곳 서울현충원에, 10대 최규하 대통령 묘소는 대전현충원에 있다. 그러나 4대 윤보선 대통령은 고향인 충남 아산의 선산에, 16대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유택을 마련하며 국립묘지를 이탈했다.
현충원 부지에서 가장 최정상 지대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쌍분으로 나란히 안장돼 있었고 그 아래쪽에 조금만 내려가면 김대중 대통령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거기서 조금만 아래로 더 내려가면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커다란 봉분으로 합장되어 있다. 묘지 위치로 볼 때 나의 첫 참관지는 박 대통령 내외 묘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동작동 국립묘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묘역은 아늑한 명당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서울 시내 전경이 나름대로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박 대통령 헌시비였다. 비문 앞면에는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몸 부디 편히 쉬시고 이 나라 수호신 되어 못다한 일 이루도록 큰 힘 되어 주소서”라는 노산 이은상의 글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박꽃으로 마을 길이 눈부신 밤, 하얀 몸매로 나타나신 이여, 조용한 걸음을 옮기시어 우리 서로 만나던 그때부터 당신을 고운 아씨로 맞이 했습니다... 비옵니다 꽃보라로 날리신 영이시여, 저 먼 신의 강가에 흰 새로 날으시어 수호하소서, 이 조국 이 겨레를”이라고 적힌 육 여사의 추모시비가 새겨 있었다.
묘역 전체를 살펴보니 5만 9천기에 이르는 전체 묘지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넓은 면적이었다. 입구 계단부터 묘역 경계 능선에 이르기 까지, 두 내외 묘역을 위해 독립적으로 조성된 시설과 고급스런 조경이 엄청난 면적에 건립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직 대통령 묘역 마다 경비실을 설치해서 경비원 한 명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상시근무를 서며 묘소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현직 현충원장의 무궁화 화환은 세 곳의 대통령들 묘소 제대에 고정적으로 놓여 있었다. 나는 두 내외의 묘소를 참배한 후 거리상으로 바로 다음 장소인 김대중 대통령 묘소로 향했다.
장군 제1묘역 바로 아래 조성된 김대중 대통령 묘소에 다다르니, 묘소입구에는 우거진 노송들이 매우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늘어서 있는데, 묘소에 도착하자 경비실의 경비가 유난히 반갑게 맞이했다. 묘역을 참배 후 헌시비 전면을 읽어보니 ‘당신은 민주주의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어둠의 날들 몰아치는 눈보라 견디고 피어나는 의지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의 마루턱 몇 번이나 그 마루턱 넘어 다시 일어나는 목숨의 승리입니다... 당신의 오랜 꿈 지구의 방방곡곡 떠돌아 당신의 이름은 세계의 이름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의 내일입니다. 이제 가소서 길고 긴 서사시 두고 가소서”라고 새겨진 고은의 시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김 대통령 묘소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의 묘소를 방문하니 비석에는 두 줄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내외분의 묘’라고 한글과 한문 혼용으로 기록돼 있었으며, 제단 아래 우측의 헌시비 앞면에는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있는 백성되게 하시고...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라고 새겨 있었다. 참배를 마친 후 곰곰이 생각하니 박 대통령과 이 대통령 묘역은 동일하게 부부가 함께 안장됐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박정희 내외는 봉분이 각각 별도로 조성된 쌍분인데, 이승만 내외는 왕릉처럼 하나의 커다란 봉분으로만 조성된 합장묘였다. 무슨 차이인지 경비에게 물어보니 “육 여사가 피격 후 국가유공자 자격으로 묻혔기에 그 후 각각 자연스럽게 쌍분으로 모신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총격으로 절명한 뒤 국가유공자로 선정돼 국립묘지행이 결정된 것이며, 이후 10.26사태로 유명을 달리한 박 대통령도 뒤따라 육 여사 옆에 나란히 묻히는 바람에 봉분이 두 개가 된 것이다. 반면 이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직 대통령의 배우자 자격으로 기존 이 대통령의 묘소에 자연스레 합장된 경우로 판명이 났다.
박 대통령 운구버스 전시관을 보며
오늘 참관한 세 전직 대통령들은 지하에 묻혀서도 정치적, 이념적으로 서로 얽혀 있어, 생시처럼 파란만장한 사후의 삶을 살고 있는 듯 했다. 경비를 통해 알아보니 이 대통령의 묘비명은 원래 ‘건국 대통령’이었지만 김대중 정부의 반대로 ‘초대 대통령’으로 바뀌었고 ‘건국 대통령’이라고 쓰인 원래의 묘비는 이 대통령 묘소 옆 땅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 또한 생전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박 대통령과 김 대통령은 사후에도 그들을 따르던 인사들에 의해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놓고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갈라져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원래 동작동 묘역의 건립 목적은 전몰장병의 안식처로 시작한 국군묘지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현충원 국립묘지에 전직 대통령들의 묘소들이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흐려졌다.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엔 역대 대통령 44명 중 윌리엄 태프트와 존 F. 케네디 단 두 명만 안장돼 있는 사실에서 보듯 미국에는 묘지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충원도 하루빨리 알링턴국립묘지처럼 정치색채 없는 시민의 순수한 추모와 휴식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들 전직 대통령 3인 모두는 자신들의 묘소 헌시비에 적히지 않은 사회적 모순과 해악들을 재임 기간에 대한민국에 남겼는데, 지하에 묻혀서도 후진들에게 이념 대립과 줄서기, 파벌의식 등을 조장하는 듯 보였다. 우연히 터키의 국민들이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하나같이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고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하루 빨리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추앙하는 대통령이 연속적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재직시 부인 육 여사가 총격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자 국민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묘 자리를 직접 선정했다. 묘지선정은 머지않아 박 대통령 자신도 함께 묻힐 자리임을 알고 가장 좋은 명당을 선정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와 비교하면 그 규모나 위치, 서열상으로 볼 때 마치 머리꼭대기에 올라간 듯한 행위로 보인다. 마치 이 박사의 묘지를 딛고 올라서며 무시한 듯한 느낌을 주면서까지 가장 높은 명당자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기존 이 박사 묘소와 차별화하듯 호화스럽게 묘역을 조성한 것에 대해 현충원 관리는 “전직 대통령들의 묘소를 왜 돌아가신 순서대로 배치하지 않았냐고 항의하는 분들도 자주 있는데, 예정에 없이 당시 상황에 따라 조성된 묘역들이라 순서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또한 대한민국의 헌법전문에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공포문이 있다. 그렇다면 해방 후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이라 해도 그 권위와 위치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못지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정 대통령이었던 박은식 선생의 묘지는 고작 8평에 불과한데 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의 묘지는 봉분지역만 80평이며 주변 단독 조경과 시설물들을 종합하면 거대한 왕릉의 규모 보다 더 크고 호화롭게 조성되었다. 마치 전체 국립묘지 안장자들을 내려다보며 호령하는 듯한 기세를 보이는 것은 누가 봐도 불합리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는 치열했던 우리 역사와 윤리를 무시하고, 위계질서와 법통을 거부한 처사이며 거만한 태도이다.
현재 대전현충원에는 8기가 들어설 국가원수 묘역이 따로 조성되어 있으며 현재 그곳에는 최규하 대통령 내외만 안장돼 있어, 7기를 안장할 공간이 아직 남아있다. 그렇다면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의 전직 대통령 3인의 묘역을 모두 대전현충원의 국가원수 묘역으로 이장하여 취임순서와 사망일자를 비율하여 공평하게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국가유공자 제1묘역을 가는 길목에 느닷없이 ‘박정희 대통령 영구차 보존관’이라는 명칭의 길 안내 표지판이 나타나서 호기심에 찾아가 봤다.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사용했던 운구차량을 반영구적으로 전시한 장소라고 했다. 4면이 온통 두꺼운 특수유리로 제작된 보존관에는 당시 운구차량으로 사용된 버스 한대가 온통 노란색과 흰색 모조 국화로 장식된 채 그날을 실감케 하듯 전시돼 있었다. 대형 유리로 대체된 버스 양쪽 벽면으로 태극기에 덮인 박 대통령의 관(모조관)이 보이도록 했다. 나는 국립묘지 경내의 아름다운 공원 같은 요지에 이런 운구차량을 전시한 것을 보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현장에 가까이 가보니 ‘대여보존관(大輿保存館)’이라는 제목 하에 한글과 영문으로 운구차량 유래에 대한 안내판이 청색바탕에 흰 글씨로 세워져있었다. “이곳에 보존된 대여는 1979년 11월 3일,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시에 사용한 운구차로서 고인의 위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원형 그대로 보존한 것입니다. 대여의 특징은 외부에 장식한 국화를 장기보존하기 위하여 유화로 제작하였으며 국장 당시의 영구를 외부에서 참관 할 수 있도록 중앙에 관대와 유리창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Tm여 있었다.
이 운구버스가 박 대통령을 추모하거나 향수에 젖게 하는 일에 얼마나 일조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대통령들과의 형평성은 물론이고 진보와 보수가 모두 어우러지며 찾아오는 공공장소에 유독 박 대통령의 장례식 관련 전시물을 갖다 놓아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최근에 다녀 온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 전시된 김일성 주석이 타고 다니던 전용 열차와 벤츠 승용차가 떠올랐다. 차라리 당사자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품들은 기념물로서 가치와 의미가 있겠지만 장례식 때 사용한 운구차량을 전시하는 것이 일반 국민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수백억을 들여 최근에 상암동에 건축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경내로 이 운구차량을 옮기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만일 김일성 주석의 생전 유언대로 그의 유해가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더라면 남북을 통 털어 박 대통령의 묘역이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호화묘역으로 기록될 뻔했다. 오히려 18년 동안의 통치기간에 피라미드를 준비 안 할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1, 2, 3 장군묘역에서 친일 장군들을 만나다
장군묘역은 제 1, 2, 3묘역으로 구분돼 각각 거리를 두고 세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1묘역은 박정희 대통령 묘소 입구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경내에서 유별나게 가장 우뚝 솟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런지 산책하던 인근 주민들은 나에게 “아, 장군봉이요”라고 알려주었다. 장군전용이라서 그렇게 불렀거니와 정상 끝자락에서 내려다보면 전체 묘역과 서울시내 전경이 한 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최고봉이기 때문인 듯 했다. 입구 좌우에는 정문을 표시하듯 호랑이 두 마리상이 대리석으로 조각돼 있었고, 묘역 유래를 알리는 안내판에 ‘광복 이후 국군 창설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6.25전쟁, 월남전쟁, 대간첩작전 등에서 조국과 자유 수호를 위해 신명을 바친 장군들이 안장돼 있다’라고 써 있었다.
장군 제1묘역 전체를 돌아보니 안장된 장성들은 육, 해, 공군 등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여 있었으며 세 곳을 합쳐 모두 약 400여명에 가까운 예비역 장군들이 묻혀 있었다. 이곳 제 1묘역에는 300여명, 제2묘역 6명, 제3묘역은 약 70여명 정도가 안장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중에 친일행적이 확인된 반민족주의 장군들 명단(강태민, 김백일, 김찬규, 김용국, 김용기, 김응조, 김일병, 김정렬, 김정호, 김준원, 김호량, 김홍준, 문용채, 박범집, 박성도, 박춘식, 신응균, 신태영, 신학진, 안광수, 안병범, 양국진, 윤태일, 이응준, 이종찬, 이종태, 임충식, 정일권, 채병덕, 최복수, 최창언 등)을 손에 들고 참관을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전체 장군묘역에는 친일파, 친일경력자는 물론 5.16, 12.12 군사쿠데타에 가담한 인물들이 다수 묻혀 있었다. 이응준, 정일권, 채병덕, 이종찬 등 일제치하 일본군 혹은 만주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황군(皇軍) 출신들 10여 명이 묻혀 있었으며 김백일, 임충식 등은 백선엽과 함께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출신 장군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의 특징은 살아생전에 자신들의 일제 친일 경력을 교묘히 숨기고 과거를 미화하거나 합리화하며 살아왔다. 또한 박정희의 5.16과 전두환의 12.12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들도 단지 장군이라는 이유로 버젓이 이곳에 묻혀 있었다.
제1묘역에서 주목할 인물은 일본 육사출신으로 해방 당시 일본군 소좌출신인 채병덕 육군 중장,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다 해방을 맞은 김백일 육군 중장의 묘지가 눈에 띄었다. 계단을 내려와 마치 계단식 전답처럼 4단으로 형성된 장군 묘역이 빙 둘러 조성돼 있어 나선형으로 돌아가며 자세히 둘러보았다. 이름 모를 장성들이 수두룩했으나 내 손에 들려진 명단을 대조해보니 경성법전 재학시절 일제 학도병 지원 제1호 출신인 친일장군 조문환 육군 중장, 일본육사 출신의 신응균 육군중장 등이 누구보다 고고하고 당당하게 누워있는 듯 했다.
장군봉을 내려와 제2장군 묘역으로 향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을 길 없어 오락가락하던 중 마침 이곳 지형을 잘 아는 연세 든 시민의 안내를 받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임정요인 묘역 남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묘역에 당도하자 매우 소박한 공간에 이응준 육군 준장, 손원일 해군중장, 김종오 육군대장, 임충식 육군대장, 신태영 육군중장, 심흥선 육군대장 등 모두 6기의 묘가 차례대로 있었다.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로 우리나라 최초의 장성출신이며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손원일은 해군을 설립한 제독으로 가까운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된 손정도 목사가 부친이며, 김일성 주석이 길림 육문중학교를 다닐 때는 자신의 집과 교회당에서 한솥밥을 먹고 자란 선후배간이다. 손 제독은 예편 후 국방부장관, 서독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당시 한국 반공연맹이사장을 비롯해 국제사회의 반공단체를 이끌었던 철저한 반공인사였다. 또 김종오는 5.16 직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임충식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국방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태영은 일본군 육군중좌 출신으로 국방부장관, 심흥선은 육사 2기 출신으로 5.16에 가담했으며 3공 시절 합참의장을 지냈다.
마지막으로 제 3장군 묘역을 향했다. 애국지사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도로를 한참 걸어가자 오른쪽 언덕에 장군 제3묘역 간판이 보였다. 이곳도 총 4단으로 층계를 만들어 묘역을 조성했으며 약 70여명 정도 안장돼 있었다. 독립운동가 유림 선생의 아들로 5.16 쿠데타에 가담한 유원식 육군준장, 바로 위에는 육사 8기생으로 5.16쿠데타 가담했던 길재호 육군준장과 봉천군관학교 4기출신의 김응조 육군준장의 묘도 보였다. 한 단계 오르면 오른쪽 끝에서부터 이종찬 육군중장,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육군대장, 5공 때 총무처장관을 지낸 신사풍의 최창윤 육군준장, 5.16 직후 내무장관을 지낸 한신 육군대장 등이 누워 있었다. 이들 중 이종찬과 정일권 역시 일본육사 출신이며 해방 당시 이종찬은 일본군 공병소좌, 정일권은 만주군 헌병상위였다. 이들 외에도 최세인 육군대장, 조근해 공군대장 등 별 넷 대장들도 다수 묻혀 있었다.
나는 전체 장군묘역을 실제 돌아본 후 전직 장성들의 묘역을 이처럼 특별구역을 조성해 특급 대우하는 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국립묘지에 규정에 장군 묘는 1기당 26.4㎡(8평)인 반면 대령 이하 사병들의 묘는 1기당 3.3㎡(1평)이었다. 무려 8배 차이가 나는 셈이며, 대령 이하의 경우 화장 후 봉분 없이 유골을 안치하는 방식인데 장군 묘는 시신 매장은 물론 봉분과 대형 비석도 설치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다. 그 동안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국방부는 2005년 7월에 관계 법률을 제정해 장군 묘역의 화장 안치 및 1기 면적의 3.3㎡(1평) 제한키로 문서화했으나 부칙조항에 ‘장군묘역이 소진될 때까지는 시신 매장 및 26.4㎡(8평) 허용’이라는 단서를 교묘히 삽입해 장군들의 시신 매장 및 봉분 조성을 당분간은 유지키로 결정했다.
최근에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사후 현충원에 안장될 가능성이 남아있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개정된 국립묘지법 시행으로 내란죄를 저지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국가보훈처 주관 국립묘지안장심의위원회 심의대상에 올라갈 수 없게 돼 일단락이 된 듯했다. 그러나 국가장법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이 사망하는 경우 유족 등 의견을 고려해 행정안전부 장관 제청으로 국무회의 심의를 마친 후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장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안장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다. 국가장으로 장례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국립묘지도 계급차이를 안 두는데
장군묘역에 묻힌 사람 가운데 전사자는 별로 없었다. 현장에서 생몰연대가 기록된 묘비 뒷면을 읽어보면 대다수가 병원이나 집에서 병사나 자연사였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어느 예비역 장성이 전역 후 군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다가 돌연사 했는데도 거뜬히 현충원에 안장됐고 그밖에도 교통사고, 질병, 노환 등으로 자연사해도 고스란히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장성급 계급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설묘지도 아닌 국립묘지에서 이런 특혜를 받고 있는 현실은 당장 시정돼야 한다.
안현태 장군은 부정부패 혐의로 사법처리를 받은 인물인데도 대전국립묘지에 기습적으로 안장됐다. 그렇다면 최근 발생한 무기구입, 방산비리로 줄줄이 구속된 참모총장급 장성들과 지휘관급 장성들은 물론이고, 국가기밀을 팔아먹고 유출시켜 유죄판결을 받은 김상태 공군참모총장 같은 인물도 국립묘지에 거뜬히 안장될 것이 뻔하다. 이런 부패한 장군들도 죽기만하면 자동적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돼 사후 대접을 받아가며 명예를 누리는 이 나라에 어느 누가 애국과 충성을 할 것이며 이런 수준의 묘역을 누가 신성한 국립묘지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이런 부조리함을 목격한 시민들은 심지어 “국립묘지가 인간폐기물 처리소인가?”라는 개탄의 소리까지 한다.
전체 국립묘지에서의 장군묘역 공간은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2087년까지는 장군 출신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반면 영관급 이하 군인 및 전사자, 전상군경, 공상군경, 무공수훈자 등을 위한 묘역은 이미 포화상태이며, 대전현충원도 이미 여유가 없다. 그러나 장군묘역은 아직도 30~40년간 수용 공간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작 묻혀야 할 사람들은 좁은 묘지 공간마저 없어 힘들어 하는데 전혀 해당도 안 되는 퇴역 장군들의 예비공간은 여유가 넘쳐난다. 친일파를 연구하는 정운현 선생의 주장대로 퇴역장군들이 굳이 장군묘역을 조성하고 싶다면 성우회가 중심이 돼 공동묘지를 조성한 후 희망자에 한 해 그곳에 매장하면 될 것이다. 별다른 명분도 없이 단지 장군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일은 이제 중단돼야 한다.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는 장군과 사병의 무덤 크기가 4.95㎡(1.5평)로 동일하며 미국 은 장군과 병사들의 무덤 크기가 동일하며 따로 묘역 구분도 없이 장군과 병사가 뒤섞여 묻혀 있다. 내가 지난 2년 동안 참관을 다녀온 북한의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도 묘지의 차별은 전혀 없었다. 북한의 전몰장병들의 유해만 별도로 조성한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에도 역시 계급과 전혀 상관없이 묘지의 크기나 양식 등에서 아무런 차이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한국의 국립묘지만 장군과 비(非)장군으로 분리해 죽어서 조차 장병들을 계급 차별하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모두 5공 정권의 비열한 노력과 전두환 대통령의 음흉한 재가의 결과물들이었다.
그나마 최근 운명한 채명신 장군의 마지막은 모습이 나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채 장군은 한국 국립묘지에 안장된 수백 명의 장성들 중 역사상 최초로 장군 묘역이 아닌 사병 묘역에 자원해 묻혔다. 그의 묘지는 이곳 동작동 제 2사병 묘역인데 주로 월남전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평소 “장군 묘역이 아닌 나와 함께 싸우다 먼저 전사한 병사 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간곡한 유언에 따라, 당국이 어렵게 받아들여 법규를 고쳐가며 성사됐다고 한다. 채 장군의 묘지 바로 뒤를 보니 ‘1972년에 전사한 장상철 육군 상병’ 묘지 앞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죽어서도 수많은 국민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었으며, 오늘의 국립묘지 방문길에서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을 안겨 주었고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남북의 화해와 통합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자
프랑스의 팡테옹과 미국의 알링턴도 각각 처음에는 첨예한 이념 갈등을 겪다가 마지막에는 화해와 통합의 장으로 변모했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애초에 남북전쟁 전사자를 안치할 군인묘지로 출발했다. 연합주와 대연방주의, 분리주의와 봉합주의, 친노예제와 반노예제의 이념적 가치관 충돌로 30년간 몸살을 앓았으나 20세기가 되면서 포용의 공간으로 변신한 것이다. 애초에 북군은 알링턴에 국립묘지로 만들고 1만 6000기의 묘소를 북군 전몰장병으로만 채웠다. 그러나 36년의 세월이 흐른 1901년, 264기의 남군 전몰장병의 유해를 안장할 공간도 역사적으로 함께 마련함으로써, 남북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웠던 남군과 북군이 화해와 통합의 공간으로서의 국립묘지로 재탄생한 것이다. 팡테옹은 혁명과 반동, 공화제와 군주제, 종교성과 세속성의 상반된 대결로 100년의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복고 왕정의 상징적 인물을 함께 안치하며 통합의 장으로 변모했다.
이처럼 우리 남과 북의 국립묘지도 속히 재구조화를 통해 화합과 통합의 공간으로의 만남과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남한의 진보와 보수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족적 가치관과 공통점을 국립묘지에서 찾아 변신을 도모해야 한다. 통일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남한의 국립묘지가 속히 재구조화 개혁을 이루어 북한과의 화합과 상생을 시도하여 제2의 팡테옹과 알링톤 묘역을 조성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통일의 시작이며, 남과 북의 적대적 현실이 상생과 공영의 민족공동체로 변모해 나가는 것이다. ‘죽음의 공간’이 ‘상생의 공간’으로 변모 하는 그날이 속히 올 것만 같다.
‘묘지’에서의 친일청산과 ‘생활’속에서의 친일청산
국립묘지를 돌아보며 하루 종일 분노가 치밀었던 것은 독립유공자와 친일파가 같은 공간에 안장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는 항일투사들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모독이며 국가 체제 존속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범법행위처럼 생각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명단과 여러 연구기관 자료를 취합하면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 혐의자는 80명이 넘는다. 이중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또는 만주군 장교 출신이 50명을 차지하며 그중에서도 만주국 출신 장교가 가장 많다.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는 1930년대 후반 조선인 항일세력을 가장 강력하게 탄압한 조직 중 하나로, 이들이 살해한 핵심적인 항일운동가와 민간인 등이 수백 명에 달한다.
친일, 반민주, 반민족 인사들을 서슴없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사태의 결과들은 해방직후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과거사 청산이 전무했거나 미흡했기 때문이다. 국립묘지는 진정한 애국자들이 가야하며, 아무나 가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국립묘지에 어떤 특권을 부여 하자는 것이 아니라, 안장 자격은 국가와 국민, 민족과 사회에 공헌한 인물을 기본으로 하여 엄격한 제한을 두어야 하며, 국가보위에 가장 우선하는 참 군인과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어야 한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이등병과 군 복무를 마치고 자연사한 장군이 국립묘지 안장자격에서 똑 같은 순위일수는 없고, 전사한 대령과 예편 후 자연사 한 장군의 공헌이 같을 수 없듯이 이제 직위와 공훈은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한국적 상황에서는 대통령이나 장군의 직책 등은 우선적인 국가 공헌자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과 국가에 폐해를 끼친 대통령이나 장군까지 무조건 국립묘지에 안장 자격이 주어질 수는 없다. 나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떠나면서 진정한 친일청산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느꼈다. 진정한 친일청산이란 당장 국립묘지에서 그들의 무덤을 파헤쳐 이장시키거나 친일행적을 낱낱이 공개해 그들의 후손들까지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과 생활 속에서 이미 나타나고, 보여지는 친일요소들과 결과물들을 청산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이다. 해방 직후에 모든 백성들이 달려들어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사회악과 현상들을 한순간에 제거하기에는 벅찬 일이지만 전 국민이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서 작은 친일청산을 한다면 조만간 한국 땅에서의 친일청산의 대업은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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