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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일
고향에서 테레비 프로
"세종대왕" 을 보면서 느낀 점을 적어 본다.
내가 본 내용은
중국에서 조선에 파견한 대사가
조선에서는 글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어디에서 듣고 일일이 따진다.
그리고 장영실이
중국에서 몰래 보고 기록한
'혼천의' 제작을 들고 장영실을 중국으로 대리고 가겠다고 일일이 따진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어느 정도의 사실들이 기록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 세종이 한글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아무도 모른다.
마치 왜 내가 조선을 공부해서 직장 생활 마치기 까지
조선관련 일을 해서 먹고 살았어도.
나는 내가 1971년 고등학교 2 학년 때 어느날 갑자기
배만드는 조선을 공부하고 싶어서
그 길로 달려 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배와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닌데
기껏 1968년 중학교 2 학년 때 충무(통영)으로 수학 여행 가면서 배를 타 보았다.
그 후 학교에서 조선을 공부하고
군대 있을 때도 조그만하지만 배를 탔고
조선소에 5년 근무하고
조선소 협력업체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했다.
아마 세종도 내가 배를 어느 날 갑자기 하고 싶었던 것 같이
어느 날 갑자기
글자를 만들고 싶어서 죽자사자 밀어 붙인게
글자 만들어 시험도 여러 차례 했지만
1900 년 전 까지 약 400 년간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00 년이 지나서
일제 식민지 하에서
기독교가 불 처럼 번져 나가고
불길 처럼 번지는 기독교 전파에
순 한글로 번역된
한글 성경이 앞장 섰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한글은 좀 재주 있는 사람들은 며칠만 배우면 어떻게든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번진 한글이 해방이 되고 국한문 혼용으로 쓰이다가
1954년 생인 우리가 중학교 2 학년
1968년 정도 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국어책을 전부다 한글 전용으로 하라고 강제로 밀어 붙였다.
독제도 좋을 때가 있다.
그 때 그렇게 강제로 한글 전용하라고 밀어 붙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요즈음 처럼
한글 전용이 되어서 문명이 중국을 앞 지를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이래저래 그런대로 한자도 배워서
일본어 조금만 공부해도 일본 기술서적 읽고 이해하는데와
국한문 혼용 문체도 그런대로 괜찮다.
우리보다 5-6년 늦은 1960년 이후 부터는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
그래도 살아 가는데 괜찮다.
그 대신에 우리가 배웠던
한자 펜습자와
한자대신 영어가 자리 잡았다.
한반도에서 한자는 청일 전쟁 때 중국이 일본에 패하면서
그 시대가 기울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만약에 청일 전쟁이 일어 나지 않아서
중국이 아직까지 우리 나라를 간섭 하고 있었다면
우리 나라는 북한 처럼 여전히 중국 다음으로 놀아 나는 수 밖에 없다.
쉬운 한글이 있어서 중국한테 큰 소리 칠 수 있다.
중국은 인구만 많다 뿐이지 글도 잘 모르는 백성이 50 %
즉 5-6 억 될 것 같다.
중국 사람들이 한글을 자기 글로 사용 한다면
법을 쉽게 배워서 위에서 누르는 압력을 가만히 참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고 있어 자기 나라 글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이 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좋다.
중국 한테 쉽게 한 수 위로 놀 수 있으니까.
미국에 널리 알려진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 지 1994년 6월호 「쓰기 적합함」이란 기사에서
레어드 다이어먼드라는 학자는'한국에서 쓰는 한글이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 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
레어드 다이어먼드는 또'한글이 간결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말했다.
또 소설 『대지』를 쓴 미국의 유명한 여류작가 펄벅은
한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하였다.
펄벅은 한국에 잠시 살았고, 한국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도 했던 사람으로서
한글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극찬하였다.
그런가 하면 시카고 대학의 메콜리J. D. McCawley 교수는 미국사람이지만
우리나라의 한글날인 10월 9일이면 매해 빠짐없이 한국의 음식을 먹으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글을 만들어 쓰는 민족은 거의 없다.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지금 사용하는 한글은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훈민정음의 탄생비밀은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상당부분 밝혀졌지만 아직도 궁금한 부분이 많다.
한국인을 이야기하면서 훈민정음에 대하여
별도로 관심을 갖는 것은 한글이 가진 절대성 때문이다.
한국인을 한국인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한글이다.
한글이 없다면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 나가 살면서 한국말을 사용하지만
한글을 잃어버리면 바로 그 나라에 편입되어버린다.
2대를 넘기기가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에 있는 동포들 중 한국인이 밀집되어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바로 한국인이 중국인으로 변해버린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중국 사람을 중국인이기 하는 것은 한자 때문이다.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인은 모두 자연스럽게 중화문명권으로 녹아든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글을 사용하는 민족은 아직도 살아서 중국 내에 독자적인 문명권을 가지고 있다.
한글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개인에 의하여 만들어져 전 국민이 사용하는 문자는 없다.
한글의 우수성은 애초에 훈민정음해례본에서 밝히고 있다.
하루 만에 익힐 수 있는 글자이고
어리석은 사람도 이틀나절이면 익힐 수 있는 글이라고 했다.
훈민정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훈민정음을 세종이 처음으로 만든 글자가 아니라
기존에 있던 글자를 새로운 원리에 의하여 정리하고,
보완을 했다는 내용과 지방방언을 제대로 적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저술인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에서 밝힌 바 있다.
이 두 가지를 다시 밝히려한다.
세계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글자인 한글이
어떻게 한 개인에 의해 그것도 단기간에 창제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한 다른 설이 이미 널리 유포되어 있음에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밝힌다.
먼저 '방고지전문倣古之篆文'과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는 말에서 밝혀진다.
비슷한 내용이다.
옛 글자인 전문篆文을 모방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세종실록에도 여러 번 나올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밝힌바 있다.
세종 스스로 밝혔을 뿐 아니라
정인지 서문에도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고전古篆이라는 낱말에 대하여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상제제언문이십팔자, 기자방고전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 자를 만드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실록』 계해 25년(1443년) 12월 30일 두 번째 기사
언문개본고자 비신자야 즉자형수방고지전문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더라도…"
『최만리 등의 언문창제 반대 상소문』 1444년
훈민정음이 옛글을 모방하였다는 내용은 세종실록에 엄연히 나와 있고,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던
집현전의 관리인 최만리가 반대 상소문을 올리면서 적은 내용에도 기록되어 있다.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말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뿐만이 아니다. 훈민정음해례본에도 다시 등장한다.
아전하창제정음이십팔자 약게례의이시지 명왈훈민정음 상형이자방고전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 보이시면서 이름 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상형해서 만들되 글자는 고전을 본떠서…
『훈민정음 해례서訓民正音 解例序』정인지, 1446년
훈민정음을 만들게 된 배경과 훈민정음의 원리 등을 총망라한 책이 훈민정음해례본이다.
세종의 뜻과 훈민정음의 원리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책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후일에 나오는 책에도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기록이 있다.
동방구요속용문자 이기수불비 기형무법 부족이형일방지언 이비일반지용야
東方舊有俗用文字 而其數不備 其形無法 不足以形一方之言 而備一方之用也
우리나라에는 옛날에 속용문자俗用文字가 있었다.
그 수가 갖추어지지 않고 그 모양도 정리되지 않았다.
말을 표현하는데 부족하였고 말의 사용에 부족하였다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신경준, 1750
한글 창제에 대해 적혀있는 역사적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전古篆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세종이 한민족에게 이미 있었던 글자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된 글자와 체계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론이다.
옛글자를 재야사학자들은 한결같이 가림토문자라고 한다.
많은 학자들이 위서僞書, 즉 조작된 책이라고 하는 『환단고기』에 적혀 있다.
단군시대 때, 제3세 단군이었던 가륵단군이 BC2181년에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고 이를'가림토'라 불렀다고 하였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기록이다.
가륵단군이 을보륵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었고,
38자였다는 것과 함께 글자 모양을 제시하고 있다.
더구나 당대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들의 발언과
훈민정음 사용을 반대하는 사람의 발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증거를 댈 수 있는 것들이 아주 여러 곳에 널려 있어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가림토 또는 가림다라고 불리는 문자는 세계최초의 소리글자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세종의 위대함이야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이전에도 한민족의 저력이 있었음을 밝히게 위해서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중국과 말이 달라 만든 것이 아니라 중부지방,
곧 한양의 말과 다른 지방사투리를 적기 위하여 만들었음을 밝힌다.
이는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던 내용이었지만 분명한 근거를 들어 밝힌다.
국지어음 이호중국
國之語音 異呼中國
나랏 말쌈이 뒹국에 달아
우리나라 말語 소리音가 달라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말의 발음이 중국中國,
즉 나라의 가운데인 한양과 경기도와 달라'로 해석해야 한다.
어음語音은 '말의 발음, 말의 소리'를 말한다.
또한 중국中國은 '나라의 가운데'로 해석해야 옳다.
세종이 살던 시대에는 중국이란 말이 나라의 중심으로 쓰였지
나라이름으로 중국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라이름인 중국은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명明이나 대국 또는 왕조의 이름을 따서 사용했다.
다만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명칭으로 사용하기는 했다.
세상의 중심, 즉 이민족에 둘러싸인 곳으로부터 중심을 말하는 영역의 표시였다.
지금의 나라이름인 중국은 청조 후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말이다.
중국이 나라의 가운데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틀림없는 증거다.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던 세종의 둘 째 공주에 대한 기록에 남아있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정의공주유사貞懿公主遺事’가 실려 있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세종이 지방말을 문자로 적을 수 없어 서로 통하지 않음을 걱정했다.
비로소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아쉽게 다 연구하지 못했다.
제대군諸大君으로 하여금 풀게 하였으나 모두 하지 못해 公主에게 내려 보냈다.
公主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특별히 노비수백구奴婢 數百口를 하사하였다.
정의 공주는 세종의 둘째 따님으로 연창위 안맹담에게 출가하였는데
안씨 집안 족보에 이런 소중한 글이 실려 있다.
정확하게'지방말을 문자로 적을 수 없어 서로 통하지 않음을 걱정했다'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변음과 토착이란 부분은 지방방언에 대한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중국中國은 나라의 가운데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말 미'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음語音'에서'어語'만 놓고 해석한다면 말씀으로 번역해도 무관하지만
굳이'어음語音'으로 한 것은 말의 소리 또는 말의 발음이라는 뜻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리'음音'자를 넣은 것이다.
말 미는 말의 쓰임이나 말의 발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말의 쓰임이 지방마다 다른데 사투리를 한문으로는 적을 수 없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어서
한문을 익히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한 글자로 만들었음을 천명하고 문자의 이원화를 선언했다.
공식문건은 한자로, 한자를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쉬운 훈민정음을 사용하도록 했다.
훈민정음에 대한 창제과정은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가족을 중심으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했고,
세종의 아들인 대군들과 둘째 딸 정의 공주
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미대사 같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완성한 민족의 문자이다.
세종은 당대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였다.
문자의 원리, 성음의 원리 같은 현대 석학들도 깨우치기 힘든 것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림토를 가지고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한글의 원류인 훈민정음과 가림토는 한민족의 역사적인 작품이다.
문자를 계승하여 완성시켰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한글의 위대함은 깊이 들어갈수록 알게 된다.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민족, 세계 최초의 소리문자를 만든 민족이다.
세종 26년 2월20일에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집현전의 일부학자들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기 위하여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
그들은 여섯 가지 조목을 들어 훈민정음을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럼 그들이 훈민정음의 사용을 반대한 이유는..
첫째..경자(庚子)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최만리 등(崔萬理 等) 상소 왈
우리 나라는 조종 이래로 지성(至誠)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화제(華制)해 왔는데
동문동궤(同文東軌)할 이 때에 언문(諺文)을 제작한 것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다 하나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위배되어 전혀 근거가 없고 오히려 사대 모화에 수치가 된다.
둘째..중국 이외의 문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이 있으나
이는 새로 언문(諺文)을 지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소합(蘇合)의 향(香)을 버리고,
당랑(螳螂)의 환(丸)을 취하려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문명의 큰 누(累)가 되는 것이다.
셋째..이두(吏讀)는 원래 한자와 떠날 수 없고,
이두로 인하여 한자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흥학(興學)에 도움이 된다.
이두는 수천 년 동안 사용하였기에 불편하지 않은데
이를 버리고 무익한 언문을 제작할 필요가 없다.
만일 언문을 제작한다면 모두 언문을 배우려 하기에 성현의 학(學)은 소홀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언문은 한자와는 다른 하등의 간섭이 없고
이를 사용하는 것은 학(學)에 손(損)이 있고 치(治)에 무익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
넷째..언문을 사용함으로써 형옥(刑獄)이 잘 다스려진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가 행해지고 있지만
형옥의 사이에 원왕(원통히 여김)이 지극히 많다.
형옥의 평, 불평(不平)은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옥리(獄吏)의 잘잘못에 있다.
따라서 언문으로써 옥사(獄辭)를 평이하게 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다섯째..언문을 실행하는 것은 국가의 풍속을 변하게 하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반드시 재상과 군신에게 문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행하지 않고서 이배(吏輩)공장들을 시켜 추진함은 천하후세에 누가된다.
언문 같은 것은 국가 완급(緩急)에 부득이한 일이 아닌데도
언문제작에 급급하는 일은 성궁의 쇠약을 부채질하니 신등(臣等)은 옳은 바를 모르겠다.
여섯째..동궁(東宮)은 덕성이 성취(成就)하였다 할지라도
계속 성학(成學)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하는데
문사(文士)의 육례(六禮)에 불과한 언문을 배워서는 안 된다.
이러한 언문은 만가지 치도에 하나도 이익됨이 없다.
상(上)이 상소를 보시고,
"너희들은 언문이 용음(用音), 합자(合字)가 옛 전자(篆字)와 반대된다고 하나
설총의 이두 또한 이두 제작의 본의는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함인데, 언문 제작은 그 뜻이 아닌가? 너희들은 운서(韻書)를 알며, 사성칠음(四聲七音), 자모(字母)를 아느냐? 내가 운서를 바로 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 하겠는가?
또한 상소 중에 신기(新奇)의 일예(一藝)라 했으나 그렇지 않고
노래(老來)하여 무료하여 다만 글을 가까이 할 뿐이다.
어찌 새 것을 좋아해서 만들었겠는가?
나는 연로하여 모든 업무는 세자가 전적으로 참가하는데 언문제작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세자가 동궁에만 있다면 어찌 환관이 어찌 일을 맡을 수가 있는가?
너희들은 신으로서 나의 뜻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 때에 의금부에 갇혔던 사람은,
최만리(崔萬理) - 부제학(副提學)
신석조(辛碩租) - 직제학(直提學)
김 문(金 汶) - 직전(直殿)
정창손(鄭昌孫) - 응교(應敎)
하위지(河緯地) - 부교리(副敎理)
송처억(宋處億) - 부수찬(副修撰)
조 근( * ) - 저작랑(著作郞)
첫째, 우리 조선은 계속 중국을 섬겨오고 중화의 제도를 지켜왔는데,
이렇게 새로운 문자를 만드니 놀랍고 중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비난 받을 수 있다.
둘째, 몽골이나 서하, 여진, 일본은 저 나름의 문자가 있지만 이는 오랑캐의 일이다.
새로운 문자를 만다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가 되는 것이다.
셋째, 이미 설총의 이두를 사용해서 문자를 알게 된 사람이 많다.
새로운 문자는 여기에 혼란을 불러올 것이며,
또 언문은 너무 쉽기 때문에 성현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학문에는 방해되고 정치에는 유익하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것이 없다.
넷째, 왕은 언문으로 옥송 같은 것을 쓰면 어리석은 백성들이라도 모두 알아들어
억울함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고문으로 억지로 고백하는 것이 오히려 많으니
옥졸 관리들의 문제이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언문으로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다섯째, 언어를 만드는 일은 풍속을 바꾸는 일이므로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고 중의를 모으며 몇 번이나 검토하고
중국에 알려야 부끄러움이 없고 시행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가르치고 책을 만들고 인쇄하니
언문은 그리 급한 일도 아닌데,
어째서 이것만은 보급에 서둘러 왕의 건강마저도 망치고 있다.
여섯째, 여러 취미생활은 사람의 기운을 갉아먹는데, 세자는 아직 유학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
하지만 언문은 재주의 한 가지뿐이고 정치에 유익한 것은 조금도 없는데
이에 정신을 소모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 소견(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외)
- 나는 조선이다. 이한 지음
※ 아래 지문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의 ‘상소문’ 일부이다. 이를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시오.
1.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한 이유를 중심으로 지문을 요약하시오.(40점)
2. 아래 지문 중,【가】와【나】의 논지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작성하시오.(60점)
신들이 엎드려 살피건대, 언문(諺文)의 제작은 지극히 신묘(神妙)한 일입니다. 또한 천고의 역사에서 월등히 뛰어난 지혜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 감히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적어 아뢰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의 재가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역대 임금 이래로 큰 나라 중국을 지성으로 섬기고 한결같이 그 제도를 준수하여 지금은 문자와 법률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사정이 그러한데 이제 언문을 창제하시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바탕으로 삼았기에 새 글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날 중국의 전서(篆書)를 본떴다 하더라도 소리를 글자에 결합하는 것은 완전히 옛 것에 어긋나니 실로 옛 글자와는 바탕이 다릅니다. 만약 언문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 이를 비난하여 논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큰 나라를 섬기고 사모함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예로부터 중국 대륙의 여러 지역은 풍습과 말이 비록 달랐지만 이로 말미암아 따로 문자를 만든 일은 없습니다. 오직 몽골 · 서하 · 여진 · 일본 · 서번과 같은 무리들이 각각의 문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니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전해 오는 책에 ‘중국의 문화로 인해 오랑캐가 변했지 오랑캐가 중국을 변화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는 우리나라를 높이 평가하여 예악과 문물이 중국에 견줄 만하다고 여겨 왔습니다.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고 하니, 이는 이른바 가치 있는 것을 버리고 쓸모없는 것을 취하는 일과 같습니다. 어찌 문명[*학술과 교화가 진보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진 상태]에 큰 누를 끼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신라 설총이 만든 이두는 비록 촌스럽고 속되다고 하여도, 모두 중국에서 통용하는 글자를 빌려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두는 조사와 같은 부분적인 곳에만 사용하는 까닭에 문자와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서리[*胥吏, 관청에 속해 있는 말단 행정 요원]나 노비들까지도 꼭 이를 익히고자 한다면, 먼저 두어 권의 책을 읽고서 문자를 대강 익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지해야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두로 말미암아 문자를 배우는 일이 자못 많아서 학문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물며 이두가 사용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관청의 장부나 모임의 일을 적는 데 막히는 것이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예로부터 써 온 폐단이 없는 이두를 두고 따로 촌스럽고 저속하고 이익이 없는 글자를 만들고자 하십니까? 또한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언문만으로 벼슬길에 올라 출세하게 된다면 후진들이 모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스물 일곱 자의 언문으로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거늘 무엇 때문에 마음을 괴롭게 하고, 생각을 수고로이 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연마하려고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한다면 수십 년이 지난 뒤에는 틀림없이 문자를 아는 사람이 적게 될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무엇인가를 고쳐 새롭게 하려는 사람은 응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이번의 언문도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재주일 뿐이지 학문에 손해만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거듭 헤아려 보아도 옳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무릇 보람 있는 일을 위해서는 손쉽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근래 조치하는 것은 모두 빨리 이루는 것에 힘쓰니 아마도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아닌 듯합니다. 혹시 언문을 어쩔 수 없이 만들었다고 하신다면 이는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과 논의하고 아래로 백관들과 논의했어야 합니다. 설령 백관들이 모두 옳다 하더라도 거듭 생각하여, 옛날의 제왕들에게 맞추어 보아도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의 성인을 기다려 의심이 없어진 연후에야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을 폭넓게 들으시지도 않고 갑자기 아전 무리 십여 인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고, 또 옛사람이 이미 이룩해 놓은 서적을 고쳐 근거 없는 언문을 억지로 끌어다 부치며, 기능공 수십 인을 모아 판각[*목판에 글자를 양각하여 찍어내는 일]을 하여 급히 천하에 알리려 하시니 후세의 공론이 어떠하겠습니까.
다음글 지은이 : 문학박사 황재순(시교육청 장학사)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불쌍하게 태어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글은 세종 시절에 어떤 실패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당시 세종의 개인적인 꿈은 한자의 한국식 발음을 모두 중국식 발음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중국의 한족이 몽고족인 원나라를 몽고로 쫓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는데,
명나라에서는 그동안 몽고족에 의하여 망가진 한자 발음을 버리고
한족 고유의 한자 발음을 되찾고자 "운회(韻會)"라는 책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이라는 책을 펴 낸 바 있다.
세종은 그것이 부러웠고 이 기회에 우리도 모든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바꾸어 국제화, 세계화에 앞장서고 싶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 두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표시해 낼 수 있는 발음기호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존의 한국식 발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한자만으로는 새로운 발음을 표시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이 직접 집현전으로 가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발음기호의 제작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부탁한 까닭으로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도 안 되어 있다.
당시에 집현전 책임자는 부제학 최만리였다. (대제학으로 정인지가 있었으나 당시 집현전 대제학은 겸직이었고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제 집현전의 업무는 하지도 않았다)
당시 최만리는 조선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선비이자 학자였다.
공직생활 20여년을 아무 이권도 없는 집현전에서만 근무한 진정한 선비였다. (중간에 사또로 한 번 발령 난 적이 있으나 집현전 일이 많아서 6개월 늦게 부임해서는 6개월 만에 집현전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있다)
당시에 발음기호 즉 한글 개발 작업은 최만리 지휘하에 착착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귀신인 최만리가 그 일을 모를 리가 없고 세종의 신임 또한 두터웠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종합해 보건대 최만리가 한글 개발 실무팀의 대장이었음이 분명하다.
최만리 이하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이 새로운 옥편에 사용할 발음기호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였고, 세종의 속셈이 우리 나라의 한자 발음을 명나라 한족의 중국어 발음으로 바꾸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최만리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발음기호를 하나하나 만들어 갔고,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이 되었다.
이 때만 해도 이 글자가 얼마나 대단한 글자인지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세종도 최만리도 그저 이 글자가 나중에 다른 책을 쓰기 위한 소도구 정도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날짜를 기록해 둔 사람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날짜도 없이 12월 기록 맨 끝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약 한 달 뒤에 세종은 중국식 한자발음 사전에 해당하는 "운회'라는 책의 대대적인 번역사업 계획을 발표한다.
세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편찬위원 명단에 올랐다.
여기에 최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이 발끈하였다.
오랫 동안 써 오던 우리 나라식 한자 발음을 버리고 왜 중국식 발음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
당시 집현전 학자의 상당수가 세종의 새로운 음운정책에 반대하였고 세종에게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상소문을 써서는 최만리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걸 보고 이번에는 세종이 발끈하였다.
그렇게 믿었던 최만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당장 그 일당을 잡아서 가두라 하였다. 그 때가 저녁 나절이었다.
최만리에게 직접 하문한 내용은 바로 이 한 마디였다.
"운(韻)에 대해서 뭘 아시오?"
<<중국어에서 운이란 발음에서 모음부분 이하를 말하는 것으로(산, 간, 만 발음에서의 [an] 발음) 한시를 쓸 때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며, 중국 본토 발음인가 사투리 발음인가 하는 것을 가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은 이 기회에 정말 한자 문화권의 후진성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고, 최만리는 갑작스러운 발음 변동에 대한 대규모 혼란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최만리는 "지금까지 힘들게 만들었던 그 발음기호들이 겨우 이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하면서 홧김에 발음기호(한글)에 대한 비판도 몇 마디 곁들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어 최만리가 한글창제 반대의 선봉에 섰다느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글 창제과정에서는 아무도 반대한 사람이 없었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위 상소문은 한글 창제 한참 뒤에 나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세종은 사무실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고, 최만리, 신석조, 정창손,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들은 의금부 감옥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세종은 이들을 거의 다 석방하였다.
대학자들을 마냥 가두어 둘 수는 없었다.
여기서의 하위지는 나중에 사육신의 한 명이 된다.
정창손만을 파직시킨 것으로 보아 이 상소문의 책임 집필자는 최만리가 아니라 정창손일 가능성이 많다.
이 정창손은 나중에 영의정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는 대정치가가 된다.
그러나 최만리는 단단히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임금과는 일 못하겠소"
사표를 내고는 출근도 안 하고 집에 콕 박혀서는 아프다면서 생전 나오지도 않았다.
세종은 다급해졌다.
"집현전 부제학 자리는 항상 비어 있소. 언제든지 나오고 싶을 때에 나와 주시오"
최만리는 끝내 안 나왔고, 그로부터 1년 반인가 뒤에 세상을 뜬다.
최만리는 집현전 장기근속자답게 엄청 가난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존경했다.
세종조에 청백리가 모두 15명인데 최만리가 서열 두 번째로 올라 있다.
세종 시절 청백리의 첫째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한성부윤 "정 척"이라는 분이었고 최만리 다음 서열로 청백리에 오른 분은 그 유명한 "황 희" 정승이다.
청백리에 오른 최만리는 역대 왕들의 위패가 있는 종묘에서 세종과 함께 모셔지고 있다.
그러나 해주 최씨 최만리는 어느 한글학자의 한번 실수로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다.
그 한글 학자는 일제시대의 일본학자 "고쿠라 진페이"가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최만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최만리는 억울하다. 최만리 후손 해주 최씨는 조만간 최만리 복권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최만리가 한글창제팀장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최만리에 대한 상세한 논문은 이미 1950년대에 이숭녕 박사에 의해서 두 편인가 발표된 것이 있다.
그런데 기존의 선입관들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여 아직도 많은 국사 책에서 한글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만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최만리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비판하고 있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부터 빨리 고치는 일이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쁜 최만리"가 들어갈 뻔 하였으나 마침 그 때 필자가 교과서심의위원으로 있던 때여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다행히 뺄 수 있었다.
세종의 소원이었던 한자발음의 중국화 정책은 최만리를 숭배하는 많은 선비들의 외면으로 실패로 끝났다.
세종의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의 한자발음이 중국어의 한자발음과 같아졌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어의 정확한 발음을 귀로 확인하기 위하여 요동으로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족 출신 관리(명나라 한림원 주부 황찬선생을 말함)를 만나려고 요동으로 열 몇 번이나 출장 갔다 온 성삼문(신숙주도 동행)만 엄청 고생했다.(성삼문의 출장 목적은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으로서는 애써 만든 발음기호까지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어린 백성이... " 어쩌고 하는 서문을 붙여서 백성용 글자로 반포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최만리 사후 1년 반 뒤의 일이었다. 이 글자들의 명칭은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배우기가 너무너무 쉬워서 별도의 교육기관이 없이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훈민정음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수천 년 전에 만든 지구상의 모든 글자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최신 모드로 만들어진 글자가 바로 우리 나라 한글이다.
어찌 우리 한글을 아주아주 옛날에 만든 다른 나라의 구식 글자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너무 쉽게 만든 것도 탈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수치로 생각하였고 모든 국가의 공식장부에서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그래서 서민들과 여자들 사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전승되었다.
여자들끼리만 전승되던 한글은 연산군의 모친 윤비가 죽는 데에 크게 공헌을 세웠다고 하여 효자 연산군에 의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도 있다.
어쟀든 조선 시대의 공식 문자는 여전히 한자로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글이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승격되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글을 우리 나라의 공식 글자로 승격시키는 데에는 1890년대에 일본의 힘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일본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에 그리 해 준 것은 아니고, 우리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중국과 떼어 놓겠다는 전략적 필요성이 그 이유였고,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서민들의 힘을 강화시켜 기존 우리 양반들의 발언권을 축소시켜 놓자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물론 그 전에 신부나 목사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평등과 자유"라는 무기를 들고 우리 나라 서민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하여 서민들의 글자인 한글을 사용한 성경을 보급한 것도 때늦은 한글 발전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글 성경 때문에 우리 나라의 민심이 적지 않게 흔들렸고 그 빈틈을 일본이 적절히 잘 활용한 셈이었다.
이 때 일본이 조금만 더 약하게 나왔다면 우리 나라도 저 동남아나 아프리카처럼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 나라에 독립협회도 만들어 주고 독립문도 세우게 하고 독립신문도 창간되게 하여 신문사 윤전기용 한글 활자를 무제한 제작하여 우리 나라에 보급하였다.
<<1890년대만 해도 "독립"의 개념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우리도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라는 개념이었다. 일본은 이 때에 우리 나라에 심어 준 "독립정신" 때문에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덕분에 우리 나라는 갑자기 한글시대로 급속하게 변해 갔다.
한글 창제 450년 만에 맞이한 때늦은 한글시대의 새로운 주인공은 최남선, 이광수 등 중인계급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1940년대 초에 내선일체인지 뭔지 때문에 3, 4년간 한글을 안 써도 되게 해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 앞으로 조선 사람들을 절대로 차별대우하지 않겠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도 좋고, 국어를 일본어를 써도 좋다. 그러니까 완전히 일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말이다. 어때? 좋지? 근데말이야... 이제 완전히 일본 사람이 되었으니 젊은 놈들 우리 일본 군대에 좀 보내 줄래?... 라는 속셈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러니까 이상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면
한글은 세종의 잘못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고, 최만리는 억울하며, 일본의 침략준비 수순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재탄생하였으나, 그 품질은 가장 최근 모드로 만든 것이니만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현재 해주최씨에서는 최만리선생의 복권운동을 벌이고 한글학회 등 서한, 청와대 민원, 국회 과거역사진상위원회 구성 촉구, 어학사저자 김윤경의 훈장박탈, 친일파로 등재 또한 갑자상소를 잘 모르고 편집하여 이를 배포한 학자들을 상대로 소송 진행 중에 있습니다.
위의 내용을 읽으셨다면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느 한글학자의 한번 실수로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다.
그 한글 학자는 일제시대의 일본학자 "고쿠라 진페이"가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최만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