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온갖 편법 동원해 'SSM(기업형 수퍼마켓) 영토확장'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에 관련법안은 6년째 '계류 중' '英 로비로 법 지연' 논란도
유통사들 "우선 내고 보자" 경쟁적으로 점포 늘려나가
"피자집 공사 한다더니 수퍼마켓이었다니…", "영국 대기업이 우리 정부를 '협박'했다"….
기업형 수퍼마켓(SSM)을 둘러싼 시비가 끝이 없다. 지역 영세 상인들은 대기업이 '구멍가게'에까지 손을 뻗친다며 반발하고, SSM 관련 법안들은 6년째 국회에 계류된 채 혼선만 빚어왔다. 이런 와중에서도 대형 유통업체들은 갖가지 편법을 동원하며 '우선 내고 보자' 식의 점포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피자가게가 수퍼마켓으로 둔갑?
'꼼수 출점' 논란은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개점한 '롯데마이슈퍼' 대학로점 때문에 불거졌다. 롯데슈퍼측은 이 점포 개점을 위한 실내 공사를 하면서 공사 가림막에 피자집 리모델링 중이라는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지난 21일 개점한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의 '롯데슈퍼 원효로점' 역시 '스시 뷔페'로 위장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롯데슈퍼측은 "원래 피자집이 들어오기로 했던 곳에 급히 입점하는 바람에 빚어진 오해다", "건물 주인이 스시 뷔페를 유치하려다가 실패한 후 우리가 들어가기로 하면서 안내문을 떼어내도록 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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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1일 서울 대학로에 개점한‘롯데마이슈퍼’(왼쪽). 지난 21일 개점한 서울 원효로1가의‘롯데슈퍼 원효로점’. 두 점포는 다른 용도로 공사를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논란을 빚고 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하지만 주변 상인들은 "속이려는 꼼수"라며 반발하고 있다. 현행법상 사업조정신청이 있을 경우 관계기관은 해당 업체에 개업 연기 권고를 내릴 수 있는데 롯데의 '꼼수' 때문에 대응할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
롯데슈퍼 못지않게 SSM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홈플러스(SSM 이름은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역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홈플러스의 대주주인 영국 테스코 사가 '통상 마찰' 등을 거론하며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최근 국회에서 "SSM법이 표류하고 있는 것은 홈플러스와 테스코가 영국 정부 및 대사관 등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오락가락·지지부진 SSM 규제법안, 입법되더라도 효과 미지수
SSM 규제법안은 국회에서 6년 반 가까이 처리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정부의 오락가락·우유부단한 태도도 한몫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엔 기업경쟁력을 내세우며 SSM에 다소 우호적인 입장이었지만 '기업 논리로 서민경제와 골목상권을 고사시킨다'는 비난 여론이 일자 태도가 바뀌었다.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과 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상생법) 등을 입안하며, SSM 규제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 유통법은 재래시장으로부터 500m 이내에 SSM이 입점할 경우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도록 했고, 상생법은 대기업의 투자 지분이 51% 이상인 SSM 프랜차이즈 사업도 사업조정 신청 대상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WTO(세계무역기구) 국제 통상 규범에 어긋난다거나 한·EU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에 밀려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대형 유통기업의 SSM 영토 확장은 계속됐다. 한 유통업체 임원은 "언제 어떤 규제가 더 생길지 모르니 먼저 점포를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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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정치권은 유통법은 25일, 상생법은 이번 정기국회가 끝나기 전에 처리하기로 22일 합의했다. 그러나 이들 법안이 힘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통상교섭본부는 여전히 상생법이 한·EU FTA에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고수하고 있고, '사업 자체를 막는 입법'이라는 대형 유통업체의 반발도 만만찮다.
한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는 "상생법은 점포의 지분 51% 이상을 대기업이 투자하면 사업조정대상이 되고 즉시 영업을 정지해야 한다"면서 "보통 SSM 점포를 개설하려면 10억~12억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이 법이야말로 중소상인들의 투자비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김경배 회장은 "현재 유통법은 대기업 로비로 SSM 규제 범위가 1km에서 500m로 줄어드는 등 조건이 크게 완화됐다"며 "법이 통과돼도 대기업이 동네 골목까지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 SSM·기업형 수퍼마켓(Super Supermarket)
대형마트보다 작고 일반 동네 수퍼마켓보다 큰 유통 매장. 300~3000㎡(약 100~1000평) 규모의 매장이 해당되며, 일반적으로 개인 점포를 제외한 대기업 계열 수퍼마켓을 지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