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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을 고대사(古代史) 산책(散策) 시인, 전충주시의원 박 대 성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 고대사의 봄 삼한(三韓) 그 아득한 몽환(夢幻)의 발자취"
<삼한(三韓)시대의 읍락소국(邑落小國)
물 억새의 땅>>>>완장성(薍長省)과 낭자곡성(娘子谷城)>
삼한(三韓)은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서 거주하던 농경인 들로서, 고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거주하던 반농반목 및 수렵채집 민족인 예맥(濊貊)인과 함께 현 한민족의 주류 조상이 되는 한(韓)인들의 나라들을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진국(辰國)(B.C 4세기-)과 삼한시대(원삼국시대<B.C 300ㅡD.C 300>)의 고대사는 우리민족에 의한 역사 기록이 거의 전무하여 한마디로 잃어버린 시대라 해도 이론(異論)을 제기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지근(至近)거리의 중국이나 먼 나라 서양의 역사기록에 견주어 빈약하리만큼 역사의 유물적 전적(典籍)이나 사료(史料)가 없는 것은 지리적 문명사적(文明史的)으로 보았을 때 한반도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초기문명권과의 접촉기회가 요원하게도 드물었고 인구이동이 완만하여 유사이전엔 일찍이 우리의 고유문자가 실재(實在)하였는지 유무는 알 길이 없음을 말해준다.
우리 역사 속의 진국과 삼한 시대는 왠지 따스한 봄날만 같이 아늑하고 한가롭고 포근한 분위기 속에 유순한 토착민들이 수렵과 채집과 농경을 영위하면서 평화롭게 살던 시대 일 찌도 모른다는 관념적 사고(思考)를 하게도 한다.
그 대략적 이유라면 정복과 피지배와 상호 핍박의 역사 기록과 흔적이 아예 없다보니 우리 후손들의 정신적인 상상력의 단절에서 오는 망각의 미로에서 느끼는 꿈결 같은 몽환의 시대로 부각되어 지지는 않았을까 도 생각을 하게 된다.
비견(比肩)하여 보건데 길고 큰 대하(大河)를 중심으로 태동의 기지개를 하며 일어난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두강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나일의 이집트, 인더스, 황하문명권은 그 문명의 특질대로 연질(軟質) 점토판에 첨필(尖筆)로 눌러쓰는 쐐기문자(楔形설형문자)와 생긴 형상대로 본을 뜨거나 그림으로 그려서 그 낱낱이 뜻을 가지는 상형문자인 표의(表意)문자, 사람목소리를 특정한 기호로 나타내는 로마자나 한글과 같은 표음(表音)문자 등이 있어서 그들 역사의 역동적이고 스펙터클한 족적을 수많은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그 진면목을 엿 볼 수 있다.
근세의 획기적으로 발전된 고고학적 발굴과 채증의 고도화 덕분으로 수 만 년 전의 석기인 들의 경이로운 예술성과 감각으로 그려놓은 동굴벽화를 볼 수도 있고 석벽과 바위에 새긴 암각화와 신전의 부조(浮彫), 금석문과 파피루스 문서, 사막 동굴의 양피지(羊皮紙) 두루마리, 죽간(竹簡)과 목독(木牘), 진시황릉의 토용(土俑) 갱(坑) 등 다종(多種) 다수의 유물적 전거(典據) 로서 화려하게 현시(顯示)되고 보고 되고있다.
우리나라의 진국과 삼한시대는 우리와 생활양태와 문화권이 같은 이웃나라 중국은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한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가는 동주(東周)말기부터 진, 한(秦, 漢)과 후한(後漢)시대와 위, 촉. 오(魏蜀吳)의 소위 삼국시대였으며 우리 동양과 이질적 문화의 먼 서양은 B .C 5세기 후반 그리스 철학의 황금기인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시대가 지난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과 포에니 전쟁, 로마제국의 전성기이기도 하고 인도의 쿠샨왕조와 서로마의 쇠퇴기 이기도하다.
그래도 그나마 조금이나마 다행 인 것은 일찍이 은(殷)의 갑골문으로부터 수세기를 거치며 발전하며 체계화된 한문(漢文)이란 상형문자가 만들어진 중국에서 그들의 동쪽 변방이란 뜻의 중화(中華)의식 속에 동북아 역사에서 간과(看過) 할 수 없었던 동이(東夷)로 기록되고 편찬된 사기(史記)와 후한서, 삼국지,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 위략(魏略)등에 간헐적(間歇的)으로 기록되어져서 어렴풋이나마 대개(大槪)의 윤각을 더듬을 수 있고 그 후 고려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조선조의 동국여지승람과 동사강목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다시 부연(敷衍)되고 재조명 되었다.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던 진국과 삼한의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는 원주(原住)토착민과 이미 이주해온 예맥 이유민들에 의한 세형(細形)동검과 점토대(粘土帶 <덧 띠>)토기문화로 대표되는 중남부 청동기 문명과 중국대륙의 패권 다툼에서 비롯한 빈번한 전란과 고조선의 몰락,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이 유목민족 흉노를 막기 위한 장성을 쌓기에 과중한 부역, 한 무제의 한사군설치 등으로 북방 유이민(流移民)들의 대거 한반도 유입으로 인하여 대륙의 초기 철기문화가 반도로 전해 들어옴으로서 고고자료 상에서는 청동기시대 말-초기철기시대 무렵에 종래 고고학계에서 막연히 '이주민'이라고 지칭되던 외래문화의 유물세트 자체가 명확하게 전모를 드러낸 경우가 거의 없는 반면, 토착사회에서 새로운 외래유물을 수용하고 있는 현상 내지는 토착유물과 외래유물이 공서상종(共棲相從)되는 현상이 오히려 더 일반적으로 관찰된다.
이는 이 무렵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토착민들의 간섭 없이 오랫동안 자신들만의 문화요소를 보존한 이주민 집단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는 설령 세형동검문화를 전파한 이유민이 존재하였더라도 그들의 수가 매우 적었거나, 이들 이주민들이 토착사회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말의 삼한시대 한반도 중남부의 상황은 차라리 이들 선주민들이 기후와 정치 사회 환경 등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한 결과로서 외부집단 혹은 새로운 이주민들과의 적극적인 교섭과 융화로 나타난 변화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로 진국을 이은 삼한의 토착세력에 의한 통치연맹체제도 서서히 오랜 시간을 두고 변화 되어가서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사로국 신라로 변진의 가야 여러 소국들은 철기무역의 김해지역 금관가야에서 후에 고령지방의 대가야로 세력교체 되었으나 결국은 사로국 신라에 병합되어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로 변천해 간다.
<동국여지승람 서문(序文)>에
우리 동방(東邦)은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우고,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았는데 모두 평양(平壤)에 도읍하였고,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는 사군(四郡)과 이부(二府)를 두었습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이 오이처럼 나뉘어져 마한(馬韓)은 54국을 통솔하고,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은 각각 12국을 통솔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고할 만한 도적(圖籍)이 없으니 자세히 알지 못한다.
기원전 323년경 조선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의 왕이 스스로 칭왕(稱王)을 했을 때 한(韓)씨라고 자칭한 기록이 있고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익산에서 건마국의 왕으로 새 출발을 했을때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자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 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은 그의 근신과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韓)의 지역에 거처하며 스스로 한 왕(韓 王)이라 칭했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의 토착민 집단을 한(韓)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불확실하다.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남주(南走)하여 한지(韓地)에 거주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했다는 위략(魏略)의 기록을 근거로 준왕 남주 이후부터 중남부지역이 한으로 칭해졌다는 설이 있으나 의문이 없지 않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서북지방의 위만조선과 함께 중부 이남지역에는 진국이라는 정치집단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삼국지≫동이전에 인용된≪위략≫의 기록에는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이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右渠)와 뜻이 맞지 않아 동쪽 진국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어 기원전 2세기경 중남부지역의 저명한 정치집단으로서 진국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런데 진국의 이름은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군현(漢郡縣)의 설치라는 서북한지역의 정치적인 파동 이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그 대신 중부 이남지역의 정치집단들은 한(韓)으로 불려지고 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 建武) 20년(기원후 44) 廉斯人蘇馬諟를 ‘韓廉斯邑君’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한(韓)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남부지역의 정치집단에 대해 ‘한(韓)’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 유래에 대해서는 한씨(韓氏) 성을 가진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주(南走)와 결부시키거나, 간(馯)이라는 종족명에서 근거해 후한대(後漢代)부터 ‘한’이라는 정치집단명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한’은 ‘크다, 높다’의 뜻을 가진 알타이어의 ‘한(khan, han)’이라는 말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서, 고조선 지배씨족의 이름이 되고 이것이 다시 국명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혹은 문헌자료에 나오는 ‘진국’과 한왕(韓王)의 존재를 근거로 위씨조선(衛氏朝鮮)의 멸망을 한 형성의 시발점으로 잡는 견해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한 [三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중국의 사기(史記) 본문에는 ‘진번 진국(眞番·辰國)’이라고 되어 있으나,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교감본(校勘本)에는 ‘진번방중국(眞番旁衆國)’이라고 되어 있고, 동(同) 열전(列傳) 백납본(百衲本)에는 ‘진번방진국(眞番旁辰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자치통감(資治通鑑) 한기 13편(漢紀十三篇)에는 ‘진국(辰國)’으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어느 기록이 정확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기 송판본(宋板本)에는 ‘진번방진국(眞番旁辰國)’으로 되어있다고 하므로 중국(衆國)은 진국(辰國)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참조>『사기』「조선열전」
사료에서는 진번과 인접한 국가들은 ‘중(衆)’(무리)과 ‘국(國)’(나라)의 두 글자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사기(史記)에서의 ‘중국(衆國)’이란 표현은 다른 사료들, 특히 한서(漢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비추어 보아, 한반도 남부의 부족연맹체를 지칭하는 ‘진국(辰國)’을 의미한다는 진국설(辰國說)도 개진(開陳)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병도, 개국과 진국(蓋國과 辰國) pp. 238∼241) 그러나 진국(辰國)이라는 나라 하나만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은 해석상 난점이 없지 않다. 설사 진국(辰國)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하여도 그것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하나인 진국(辰國)이지, 옛 삼한(三韓)땅에 진국만이 있었다고 보는 데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존속하였던 정치집단의 성격규명에 있는 것이다.
辰韓者古之辰國也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정사 삼국지(三國志) 중 한(韓)의 기록>
傳子至孫右渠, …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중략) 진번·진국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서》(漢書)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古之辰國也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삼국지》(三國志). 한(韓)의 기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 凡七十八國 … 皆古之辰國也
한(韓)은 세 갈래가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변한)이 있으며... 모두 78개국이다... 전부 옛날의 진국이다.
《후한서》(後漢書) . 한(韓)의 기록
위 세 가지 내용 중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右渠)때에 진번과 진국이 외교문서로서 한(漢)나라 왕을 만나고자 했는데 못 만나게 방해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셋째는 둘 다 같은 내용인데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쓴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의 각기 다른 기록인데 삼한이 진국에서 비롯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진국(辰國)이 삼한 이전 기원전 3,4세기 세형동검문화와 점토대(粘土帶)토기문화가 성행했던 중남부 지역에서 청동기 제작과 보급을 통해 원거리 교역을 주관하면서 일정 범위의 정치집단들을 통활 하던 구심체로 해석 할 수도 있고 거의 삼한과 같은 시기에 병존하였던 영향력 있던 연맹체적 성격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러나 B.C 4세기 전후하여 진국(辰國)이 지금의 경기도 강원도를 경계로 그 이남의 중남부를 포용한 명실상부한 통활 통치의 구심적 연맹체임을 결코 완강히 부정 할 명분도 없을 것 같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 지리고(地理考) 삼한고(三韓考)에
삼한 땅은 지금의 한수(漢水) 이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한(馬韓)은 경기ㆍ충청ㆍ전라도 땅이며, 서쪽은 바다를 건너 청제양월(靑齊揚越 청주ㆍ제주ㆍ양주(揚州)ㆍ월주(越州) 지역)과 통하고, 동남은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과 통하고, 북쪽은 삼한 한수를 한계로 조선과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ㆍ변한(弁韓)과 연하였는데, 뒤에 백제가 그 땅을 차지하였다.
진한은 지금의 경상도 낙동강(洛東江) 이동의 지역으로, 북쪽은 예(濊)ㆍ맥(貊)과 연하고, 서북쪽은 마한과 접하고, 서쪽 지경은 대부분 변한과 섞여 살아 경계가 불분명하고, 동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과 통하였는데, 마한에 복속(服屬)되었다가 뒤에 신라가 되었다.
변한은 지금의 경상도 낙동강 이서의 지역으로, 서남쪽은 지리산(智異山)을 걸쳐 지금 전라도 동남 지역에 이르고, 동쪽은 진한과 섞여 살아 경계가 불분명하고, 서북쪽은 마한과 접하고, 동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과 통하였는데, 마한에 복속되었다가 뒤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변한 땅은 또 나뉘어 5가야(伽倻)의 땅이 되고,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가야금(伽倻琴)을 변한금(弁韓琴)이라 하였으니, 그것 또한 증거가 된다. 지리산 서쪽에 있는 땅은 백제에 흡수되었다.
상고하건대 삼한(三韓)은 소소한 지방의 연혁에 비할 것이 아닌데, 우리나라 문헌에 증빙할 만한 것이 없어, 수천 년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에서 비로소 삼한전(三韓傳)을 두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韓)에는 3종이 있는데,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국(國)은 군(郡)과 같다)으로 되었고, 북쪽은 낙랑(樂浪)과 연하고, 남쪽은 왜국과 접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으로 되었고, 북쪽은 예(濊)ㆍ맥(貊)과 접하였다. 변진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으로 남쪽은 역시 왜국과 접하였다. 모두 78국인데, 동서는 바다로 한계 하였다.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변한·진한 24국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中 변진
삼한(三韓)은 한반도 중남부에서 거주하던 농경인 들로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거주하던 반농반목 및 수렵채집 민족인 예맥(濊貊)인과 함께 현 한민족의 주류 조상이 되는 한(韓)인들의 나라들을 말한다.
기록에 의하면 진국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 쪼개졌다고 나온다.
삼한은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있던 마한 진한 변한을 이르는 말이다.
삼한이란 이 세 개의 통치 집단은 모두 청동기 문화단계 이래 중부이남 지역에 생긴 토착민 사회가 발전한 것으로 그 성립을 구성하는 각기의 소국들이 지역별로 소국연맹체를 형성해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분립되어 졌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대의 우리 충주 지역은 한반도 중남부 내륙에 깊숙이 위치하여 있고 동서로는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이 남서진한 사이에 있는 분지(盆地)로서 동남(東南)이 백두대간의 소백준령에 걸쳐 있고 서북으로 남한강이 흐르면서 완만한 구릉이 펼쳐진 동남 고준(東南 高竣) 서북 평활(西北 平闊)의 지형이다.
그러므로 아주 넓고 광활한 평야와 삼각주가 발달한 강 하류와 바다를 접하여 해상 통로가 원활한 곳 보다는 유이민(流移民)의 접근이 쉽지가 않아 인구 유입이 늦어 졌을 것이므로 거의 오랜 시기로 부터 살아오던 토착민에 의한 수렵과 채집과 농경의 수단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특히 남한강과 달천이 오대산과 소백산맥 좌안은 물론 월악산과 속리산 일대에서 흘러 내려와서 충주 탄금대 금휴포(琴休浦)에서 두 물이 합류하여 사방에 물이 지천이다 보니 곳곳에 물 억새가 자생하여 숲을 이루니 옛 이름 <물 억새 길게 자라는 땅>이란 뜻의 완장성(薍長省)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 서기63년 백제2대 다루왕(多婁王)36년에 척지(拓地)하였다는 삼국사기 권(卷) 제1ㅡ 신라기 탈해왕(脫解王)편 계해(癸亥) 탈해7년에 나오는 낭자곡성(娘子谷城)은 이미 삼한시대에 충주의 한 성(城)임을 이글에 이은 후편(8,9편)에 발제(發題)적 의미로 거론키로 하겠다. >”
우리 지역은 남한강 중류의 하안 단구 형(河岸 段丘 形) 지대가 발달하여 석기시대로 부터 고기잡이와 농사짓기와 수렵으로 살기가 편한 강변의 단구면(段丘面)에 자연스럽게 집중적으로 논밭과 취락(聚落)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읍락의 중심 취락은 하천을 끼거나 인근지역의 조망(照望)과 방어에 편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구릉지대(丘陵地帶)에 위치함으로써 토루(土壘)·목책(木柵)·환호(環濠)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속리에서 발원한 곡류하천(曲流河川) 달천(達川)이 굽이쳐 내려오다 태백산군(太白山群)에서 내려온 대류(大流) 남한강과 합수 되는 지역 충주분지 평야 일대가 선(先)캄브리아 기(期) 시원생대(始原生代)의 변성암이나 퇴적암 지대가 중생대의 쥐라기와 백악기 사이에 일어난 후기 대보조산(大寶造山)운동에 의한 습곡(褶曲)작용으로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가로지르고 관입 장력에 의해 저반(底盤)의 화강암이 솟아올라 기존의 변성, 퇴적암이 갈라져 산으로 밀려나고 풍화작용에 침식이 빠른 화강암이 드러나 쉽게 변식(變蝕)된 침식분지이기에 수시로 범람하는 크고 작은 하천의 충적토(沖積土)가 쌓이게 됨으로서 천혜의 기름진 토양이 만들어져 농업생산성이 높아져 크게 농경의 진전을 보았을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삼한에는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밭에는 잡곡을 심고 논에는 벼를 심었을 것이지만, 이전 시기보다 철제와 나무 농기구가 발달함에 따라 가경지(可耕地)가 확대되고 작업 효율이 크게 높아졌을 것이다.
이미 삼한 사회에서는 자포니카<추청,고시히까리>쌀 같이 지금의 우리 동아시아인의 입맛에 좋은 쌀알이 둥글고 찰진 벼농사는 아닐지 몰라도 낱알이 길고 미질이 건조하고 아밀로스 함량이 높아 점도(粘度)가 낮은 동남아시아 전승의 인디카<안남미(安南米)>의 쌀농사는 지어 졌을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삼한사회의 제정(祭政)은 분리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사를 지내는 천군(天君)을 뽑아 천제(天祭)를 지내는 장소이며 죄인에겐 치외법권 구역인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만들어 읍락 통치권자의 정치적, 사법적 권위에 제동을 걸기도 하였던 것 같다.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통전(通典)』 등에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그 중 가장 자세한 기록인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서는 소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하늘을 믿으므로 국읍(國邑)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신들을 섬긴다. 도망자가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어서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부도(浮屠)를 세운 것과 같으나 그 행해진 바의 선악은 달랐다.”
삼한은 토지가 비옥해 벼농사를 짓고 오곡(五穀)을 재배하는 토착농경사회이며 양잠을 하여 견포를 직조하였다.
가옥은 수혈주거(竪穴住居)로서 대개 평지에 움집 이였고 지상가옥으로 발전하는 과도단계이나, 일반적인 가옥형태는 서까래가 있고 지붕 위에 풀이나 갈대와·볏짚을 이은 井(정)자형으로 나무나 흙을 쌓은 귀틀집으로 초가집의 원초 형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례(葬禮)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이 없다고 하여 토광목관묘가 주된 묘제임을 알 수 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자료에 의해 토광목관묘에서 매장주체부가 확대되면서 목관 바같에 목곽을 설치한 토광목곽묘로 발전해 갔으며, 봉분 주위에 ‘ㄷ’자형, 원형, 반원형 등의 물도랑을 판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가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소와 말을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변진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하고 죽은 자가 승천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삼한에서는 비단과 각종 포 금포(綿布)·광폭세포(廣幅細布)가 생산되었으며, 베두루마기(布袍)와 짚신, 가죽신(革履) 등을 신었다고 한다. 비단옷과 가죽신 등은 신지, 읍차 등 지배계층의 의복이며, 베옷과 짚신은 일반 읍락 민 하호(下戶)들의 의복이었을 것이다.
농업을 주로 한 삼한 사회에서는 5월의 파종(播種)과 10월의 수확 후에 제천의식을 행하고 모든 씨족원이 모여 음주와 가무로 밤을 지새웠다.
삼한 사람들은 금은과 화려한 비단을 진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구슬을 소중하게 여겨 의복에 장식하거나 목걸이 또는 귀걸이로 만들어 달고 다녔다. 삼한 사람들이 구슬을 소중히 여긴 것은 청동기 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습속이었다. 청동기 시대의 구슬은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라 청동검·청동거울과 함께 수장의 권위를 과시하는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삼한의 노래와 관련하여 《삼국지》에서는 중국의 축(筑)과 비슷한 모양의 슬(瑟)이라는 현악기가 삼한에 있는데 그것을 연주한 곡도 있다고 하였다. 최근 전남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 모양의 현악기가 바로 이 ‘슬’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우리 충주지역은 특히 남한강과 그 지천(支川)들과 달천(達川)강의 풍부한 물을 배경으로 산수가 우아하고 풍요로워 민물고기와 야생동물과 산야에 채집물량이 풍성하여 원시시대로부터 신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인 삼한시대에도 강가 선상지(扇狀地)가 넓고 하상 단구(段丘)면은 물론 곳곳의 곡류하천을 낀 논밭을 가꾸면서 씨족과 부족의 소규모 집단취락(聚落) 촌(村)을 이루면서 점차 발전하여 몇 십, 몇 백 내지는 일, 이천 여 호(戶) 정도 단위의 군집(群集) 형태의 읍락(邑落)이 존재했을 것이다.
금릉동과 호암동의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과 말의 철제 재갈 등의 주인들은 그 시대의 이 지역 군장(群長)격인 읍차(邑借),험측(險側),살해(殺奚),번예(樊濊),견지(遣支),신지(臣智),거수(渠帥),주수(主帥) 등으로 불리는 거수 중에 우리지역 우두머리는 읍차나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때 직제와 같이 읍군(邑君)정도의 직위를 가진 정치적 통솔자들이었을 것이고 그들 중심으로 대내외적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단일한 읍락집단의 수장(首長)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예조(濊條)에 거론하기를--- 예(濊)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대신 후(侯)·삼로(三老)와 함께 읍군(邑君)이라는 관리가 있어 이들이 하호(下戶)를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읍군· 읍장은 삼로·후 등과 함께 토착민 세력의 규모와 크기에 따라 구분되어 봉해진 중국식 관직명으로 여겨진다.
또, 『후한서(後漢書)』 한조(韓條)에서는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B.C44년 에 소마시(蘇馬諟)를 한(韓)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켜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읍군이라는 명칭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 한조(韓條)에는 경초연간(景初年間, 237∼239)에 명제(明帝)가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몰래 파견하여 낙랑·대방의 두 군을 평정하고, 우리나라의 여러 신지(臣智)들에게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주고, 그 다음 사람들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특히 우리지역 완장성과는 대(對)백제 항쟁에서 유의미한 관계였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삼국지≫동이전에는 “국읍(國邑)에는 주수(主帥)가 있으나 읍락(邑落)들이 잡거(雜居)하여 서로 잘 제어하지 못 한다”고 하여 삼한의 각 국은 국읍과 다수의 읍락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국‘國’은 지배적인 읍‘邑’을 뜻하므로 국읍이란 다수의 읍락들 중에서도 중심적 기능을 발휘하는 대(大)읍락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삼한의 각 국은 대소의 읍락들로 구성된 정치집단이라 하겠다. 읍락(邑落)은 소국 형성 이전부터 각지에 성립되어 있었던 개별적인 정치집단들로 이들은 청동기문화 단계의 씨족, 부족적(部族的 ) 결합원리와 정치형태에 바탕을 둔 집단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삼한 각 소국의 성립은 이러한 소규모 집단들이 철기문화의 확산과 유이민의 이동이라는 정치·문화적 변화에 대응하여 지연(地緣)에 바탕을 둔 보다 확대된 정치집단으로 통합 발전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제2편 낭자곡성(娘子谷城)과 낭성은 어디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