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는 이태리계 입니다. 시인 아폴리네르 처럼. 토목기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액 상 프로방스의 식수 공사에 참여 했는데 그래서 에밀 졸라는 어린시절을 거기서 보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죽습니다. 졸라의 어머니 에밀리는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남편이 일하던 회사와 소송에 휘말리고. 어린 졸라는 정의가 불의를 이기지 못하는 현실을 경험 하지요. 가난때문에 공부를 제데로 못하고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 그래서 그의 가슴 속에는 한을 갖고 있는 작가 입니다. 제2제정 말기를 그린 그의 <루공 마까르>총서 20권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나나><목로주점><대지>같은 명작이 포함 되어 있지요. 1895년에는 프랑스문인협회장 까지 지내도 그는 佛文壇의 국외자 였습니다. 에드몽드 드 콩쿠르 같은 주류들의 질시의 대상 이었고 소위 말하는 " 기득권L'establishment "밖에서 맴도는 역외자의 서러움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브루주아 비평가들은 그를 '하수구' '시궁창'의 작가라는 경멸을 서슴치 않았고 가톨릭으로 부터는 ' 호전적 반교권주의자 '란 비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카데미 프랑세스 회원으로 입후보 했지만 낙선을 경험 했고. 작품으로 대중적 명성은 대단 했지만 저주받는 작가였고 저주받는 인물 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문란 했던 사생활도 비난의 한축을 이루었고. 그는 아내 알렉상드린과 세탁부이자 어린 하녀였던 쟌느 로즈와 두집 살림을 했습니다. 로즈와 사이에 두자녀도 있고. 그는 1897년 상원 부의장 이었던 쉐레르 케스네르의 권유로 그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 드는데 그 밑바닥에는 공정치 못한 사회에 대한 어릴적 기억과 작가로 등장한뒤 프랑스 문단으로 부터 받았던 부당한 멸시등이 작용 합니다. 결국 그는 1898년 1월 13일 <여명>紙에 대통령 포르에 보내는 글을 써들고 찿아 갔는데 그 글을 읽은 클레망소 (나중에 1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佛首相역임)가 <나는 고발한다>로 제목을 달아 발표 합니다. 이로써 프랑스 지성계는 모리스 바레스를 정점으로한 右派와 에밀 졸라로 대표되는 左派로 둘로 갈라져 오늘날 까지도 그 흐름은 프랑스 지성계를 도도히 적시고 있습니다.---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