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주아 경제학의 위기
케인즈 이전의 경제 정설은 신고전학파 또는 한계효용학파로 불렀다. 이들은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이전 반세기 동안 주류 경제학을 괴롭혔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등장했다.
당시까지 경제학자들은 18세기 중반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사상에 의존했다.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가 옛 지주들, 중상주의자들과 패권을 다투고 있던 때에 글을 썼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이 사회의 부를 증진시키는지, 그리고 무엇이 상이한 사회 계급들-특히 신흥 자본가 계급과 옛 지주들-사이에서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객관적 가치척도를 고안했다. 스미스는 비록 일관되게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노동이 가치척도라고 주장했다. 리카도는 더 나아가 노동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전체 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리카도는 후세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남겼다. 하나는 이론적 문제였는데, 즉 자본의 양은 똑같지만 노동의 양을 달리 사용하는 자본가 사이에서 이윤이 어떻게 평균화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데올로기적 문제였는데, 즉 한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한다는 설명 말고 도대체 어떻게 이윤이 존재를 정당화하는 설명을 할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현존 사회를 비판하는 급진파들이 리카도의 체계를 이용해 지주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전체를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반세기 동안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허우적거렸다.
한계효용학파는 객관적 가치척도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라고 여겨 이를 폐기하면서 리카도 체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스미스와리카도의 주장을 모두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스미스와 리카도의 주장에서 시장의 자유로운 작용을 정당화하는 듯한 것은 열렬히 받아들였다. 애덤 스시스의 보이지 않은 손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사회 전체이익으르 만족시키는 최선의 길은 개별적 이해관계에만 관심을 가진 생산자들에게 자유경쟁을 허용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다. 당시 한계효용학파는 자신들의 체계 중심에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 밭티스 세가 주장했고 리카도가 받아들인 법칙을 갖다 놓았다. 이 법칙은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기 때문에 전반적인 과잉생산 공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세는 한 기업이 생산한 재화에서 원료지 외의 추가 가치는 노동자들에게 지급된 임금과 자본가에게 지급된 이윤을 합친 것과 ‘똑같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경제 전체로 보면, 대중의 주머니 속에 있는 임금과 이윤의 총량은 생산된 재화를 모두 살 수 있는 양과 정확히 똑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재화를 팔지 않으려 하거나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소비하지 않으려 하지만 않는다면 불황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계효용학파는 경제학의 주된 관심이 무엇이어냐 하는지를 둘러싸고 스미스-리카도의 전통과 단절했다. 그들은 부의 창출이나 계급 간 부의 분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인간이 의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시장을 통한 가격 결정이 자동으로 가장 효율적인 경제 운영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이 생산에서 객관적 필수 조건이라고 강조하는 옛 가치론을 버렸다.
그들에게 가치는 객관적 척도가 아니라 개인이 한 상품의 추가 한 단위(한계 증가분)에서 얻는 효용이라는 주관적 척도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각 상품의 한계효용을 어떻게 비교하는지를 보여 주는 곡선을 그릴 수 있는데, 이 곡선은 사람들이 자유 시장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때 개별 상품을 구입하는 데 쓸 용의가 있는 상대적 양을 가리킨다.
이 곡선은 재화의 생산비를 나타낼 수도 있다. 한계효용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두 가지 방식으로 측정했다. 제번스와 마셜 같은 사람들은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힘든 일이나 마이너스 효횽, 즉 불편을 경험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노동자들은 일을 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투자가들은 얼마간의 부를 현재 소비하지 않는 희생을 통해서 미래에 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다. 임금과 이윤은 저마다 겪는 불편에 대한 보상이며 따라서 똑같이 공평하다. 뵘바베르크 같은 한계효용 경제학자들은 노동이라는 고통과 저축이라는 희생을 조야하게 똑같이 취급하기 힘들다는 점을 시인하면서 다른 견해를 채택ㄷ했다. 그들은 생산비ㄱㅏ 생산에 사용된 다양한 재화(노동자의 소비재 더하기 원료와 기계류 등)의 효용에 달려 있지만, 재화가 즉시 소비되지 않고 오랫동안 생산수단으로 사용될 때 생기는 생산량의 증가분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추가요소가 자본에대한 이자 상환의 기초였다.
모든 한계효용 경제학자들은 노동과 자본이 모두 생산요소이며,, 각각은 총효용을 증가시킨 것에 대해 (임금과 이윤으로)보상받는다고 주장했다. 개별재화의 추가 증가분(한계증가분)을 제공할 때 드는 비용은 수요곡선으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수요곡선이 공급곡선과 만나는 지점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한계비용과 그 상품 구매자가 얻는 한계효용이 같아진다. 그 지점에서 재화가격은 생산자가 소비자의 필요를 가장 효율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게 해 준다.
모든 한계효용 경제학자들은 오직 하나의 균형점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렇게 되는 이유가 바로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져 단지 한번만 만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수요측면에서 특정 재화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그 재화를 많이 소유할수록 줄어들고 그래서 더 많이 구할 수 있다면 그 재화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 것이다. 이와달리 공급측면에서 리카도가 농업에서 수립한 수확체감의 법칙을 공업에 적용해, 더 많이 생산할수록 재화의 생산비가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100만 1번째 생산하는 재화의 소형도구나 나사, 자동차, 햄버거는 항상 100만 번째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든다. 이 때문에 공급 비용은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항상 증가하며, 사람들이 특정 재화를 더 많이 구할 수 있다면 그 재화에 지불할 용의가 있는 가격은 더 떨어질 것이다.
더욱이 한ㄱㅖ효용 경제학자들은 공급곡선과 수요곡선이 개별재화뿐 아니라 경제에서 생산되는 재화 전체에 대해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소비자가 자신의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자신이 가진 재산의 한도 안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매할 수 있다면, 특정 가격으로 최대의 효용을 얻을 수 있는 재화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생산자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생산할 수 있고 또 그 재화의 가격을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비용으로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생산물을 생산할 것이다. 즉 토지, 노동, 자본의 가장 경제적인 조합을 선택할 것이다. 전체 경제는 거리의 시장과 같은 것이다. 즉 과일과 채소를 사려는 사람은 사과, 토마토, 감자 등을 어떻게 조합해서 사야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최고의 가치을 얻을 수 있을지를 계산하고, 파는 사람은 자신의 재화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가격을 계산하는 시장말이다. 저마다 상대방과 흥정을 해서 거래가 성사되면 전체 생산물이 팔리게 된다.
사회전체의 총공급곡선과 총수요곡선을 합하면 전체경제에서 생산된 재화의 범위와 수량이 사람들이 사려고 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판매자가 자신의ㅓ 재화를 사는 구매자가 치르려는 하는 가격(즉 이 재화의 한계효용)보다 더 많인 받으려고 우길 때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방정식은 균형에 맞지 않게 되고,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일치를 이뤄지지 못하고, 판매되지 않은 재화가 재고로 쌓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은 여느 재화와 다를 게 없다. 노동자가 자신이 노동이 창출하는 추가 효용보ㄷㅏ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한다면 어느 누구도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실업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임금을 낮춰서라도 일할 준비가 돼 있다면 수요와 공급은 다시 일치하고 완전고용으로ㅑㅗ 되돌아갈 것이다.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지 않게 만드는 인위적요인(노동조합의 압력이나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국가보조금)만 없다면, 세의 법칙은 제대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최저임금 도입이 일자를 파괴할 것이라는 주장의저변에 깔려 있는 사상이다.
*한계효용 이론의 문제점
마셜은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억만장자가 절제의 대가로 이윤을 받는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며, 절제보다는 기다림의 대가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수긍했다. 그는 수확체감의법칙이 적용되지 않은 일이 왜 일어나는지를 자기 책의 여러 곳과 부록에서 설명하려고 했다. 따라서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ㅣ 예상하지 못한 점에서 교차하거나 심지어 한 점이 아니라 여러 점에서 교차하기조차 한다. 이것이 안정적 균형점이 단 하나뿐이라는 생각 자체를 뒤흔든는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는 노동가치론을 사용하는 것이 때로는 더 낫다고 주장했다. 화폐의 실질 가치는 몇 가지 점에서 상품보다는 노동에서 더 잘 측정된다고 말했다.
마셜은 자신이론에 있는 커다란 결점,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경제에서 벌어질 사태를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을 언뜻 시인했다. 한계효용이론은 소비자의 특정한 선호 체계에 바탕을 둔 특정한 수요가, 현재의 기술적 조건과 현재의 토지, 노동, 자본에 바탕을 둔 공급과 만났을 때 가격이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은 자본이 끊임없이 축적되고 생산기술이 끊임없이 발전해서 생산에 투입되는 기존 생산물의수요.공급 패턴이 바뀌는 현실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발라의 분석은 모두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특징적인 양상-축적, 기술변화, 그에 따른 생산비 감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한계효용 경제학자들은 실제로 경제가 호황과 불황의 경기순환을 겪는단는 것을 인정해야 햇다. 이들 주장과 달리 순환에서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수요와 공급이 항상 균형을 유지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들은 ㄹ기본적으로 건강한 체제를 일시적으로 왜곡시키는 외부적 요소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제번스는 무역풍을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는 태양의 흑점 때문에 경기순환이 발생한다고 썼으며, 발라는 가격이 수요.공급과 맞지 않아서 경제위기라는 혼란이 일어난다고 보면서 그것은 마치 얕은 호수위에 태품이 지나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경제위기를 일시적 일탈로 여기고, 효율적인 경제의 작동방식을 규정하는 불가항력적 법칙 체계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다.
한계효용학파의 논리는 현존 경젠체제가 최상의 가능한 세계이며, 최적의 생산조건을 제공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희소자원을 경쟁적 부문들 사이에 배분할 수 있는 법칙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한계효용이론은 경제적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표현한 것과 다름없었다. 소비자들이 자기 돈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소비하는 것은 곧 가격메커니즘을 통해 원하는 생산품목에 투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현재의 부와 소득 불평등을 정당화 수 있다.
부자의 소비가 가난한 자의 소비보다 비중이 더 큰 것은 그 자체로 선거결과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는 경우에만 획득되고 또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한 기업인의 부는 언제나 소비자가 투표한 결과가 된다.
*케인스와 세의 법칙
케인스는 경제 정설의 주요 주장 두 가지-세의 법칙과 임금삭감이 완전고용 회복 방안이라는 생각-에 도전했다.
세의 법칙은 재화를 생산하는 데 지급한 임금과 이윤이 그 재화를 사기위해 필요한 총액과 같으며 따라서 그 재화는 항상 다 팔릴 수 있다는 것이다.
케인스는 이 주장이 사람들이 저축을 할 때마다 저축하지 않았으면 그냥 소비됐을 상품과노동이 자동으로 자본재생산에 투자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교환이 없는 일종의 로빈슨 크루소 경제에서는 사실일 수 있는데, 그런 경제에서는 개인들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생산하고, 현재의 생산활동의 결과인 생산물의 일부를 미래의 생산을 위해 남겨 놓을 때만 저축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폐경제에서는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화폐경제에서는 저축이라는 것이 화폐가 재화구입에 쓰이지 않고 비축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화폐축장의 형태로 저축이 이뤄질 수 있다면 임금과 이윤으로 지급된 화폐 중의 일부는 재화에 소비되지 않을 것이고, 생산된 재화가 모두 팔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재화시장에서 과잉생산이 발생할 수 있다.
케인스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활동을 같은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착시 현상에 속기 때문에 이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생각은 노동과 재화가 바로 소비돼서 저축이 이뤄지지 않으면 투자도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저축과 투자는 같지 않다. 그 둘은 흔히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에서 하는 서로 다른 활동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투자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저축을 원할 수도 있다.
케인스는 사람들이 다양한 동기로 저축을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물건을 사기를 원하거나,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일정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거나, 예측하지 못한 사건에 대비해서 자신을 보호하기를 원하거나,투기적 이유 등등 때문에 저축을 한다. 이모든요소들이 맞물려 사람들의 저축 성향이 결정된다.
반면에 투자 수준은 기업인이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윤(케인스가 자본의 한계효율이라고 부른)에 달려 있다고 케인스는 주장했다. 미래의 예상이윤이 낮다면-그리고 자본주의가 노쇠해지면서 이윤이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저축의 규모와 무관하게 투자는 조금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경제의 총생산물은 다 팔릴 수 없다. 세의 법칙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배제한 사태, 즉 과잉생산이 벌어진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지면 처음에는 기업에 재고가 쌓일 것이다. 기업은 생산을 줄이거나(또는파산하거나) 임금과 이윤 수준을 낮추는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저축이 투자와 같은 수준이 될 때까지 줄어들어야만 총지출이 모든 생산물의 시장을 제공하는 균형에 도달할 것이다.
케인스는 공급과 수요에 대한 낡은 정설을 뒤집었다. 낡은 정설은 저축이 증가하면 완전고용과 산업시설의 완전한 가동을 유지할 정도로 투자가 증가한다고 봤다. 케인스는 투자가 저축만큼 높지 않다면 저축이 투자만큼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경제가 수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업인들이 경제가 계속 확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윤이 낮을것이라고 예측할 거이고 이에 따라 성장이 멈출 것이다. 그러고 나면 경제의생산량 수준은 투자가들이 다른 투자가들의 행동을 어떻게 예상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낡은 정설이 주장한것과 달리,이 생산량의 수준은 반드시 수요.공급이 노동과 자원의완전한 활용을 보장하는 수준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설[경제학]의 커다란 실패는 대규모 실업과 반복되는 과잉생산 공황이라는 매우 명백한 형실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실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정설의승리는 오로지 이데올로기적 이유로만 설명할 수 있는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일이었다고 케인스는 주장했다. 정설이 투영된 환경에.....정설이 여러모로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설이 수많은 사회적 불의와 명백한 잔혹성을 진보의 계획에서 불가피한 사건으로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 덕분을....정설은 권력자의 입맛에 맞았다. 정설이 개별자본가의 자유로운 활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권력자 배후에 있는 지배적 사회세력의지지를 얻게 됐다.
*케인스와 임금삭감
임금삭감이 고용을 늘린다는생각에 대한 케인스의 비판은 세의 법칙에 대한 공격처럼 신랄했다. 당시 경제정설은 1921년 이후부터, 특히 1930년대 초 영국에서 경험한 매우 높은수준의 실업을 단순히 무시할 수 없었다. 마셜 후계자인 피구는 실업이 자유시장체제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불완전성 때문에 높아진다고 주장햇다.
피구는 노동자들이 실질임금보다는 화폐임금에 관심을 더 많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물가가하락해 실질임금 가치가 오를 때조차 노동자들은 화폐임금의 삭감에 저항한다. 이렇게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의 인상을 깨닫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임금을 고집하다가 일자리를 잃는다. 케인스도 오랫동안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30년 초불황규모 때문에 그는 이 주장에 도전하게됐다. 피구의 주장에 두가지 중대한오류를 지적했다.
첫째, 피구의 주장은 경제전체에서 화폐임금이 삭감되면 재화의수요가 증대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지급하는 임금을 줄이며, 그 기업은경쟁업체들보다 가격을 낮춰 상품을더 많이 파는 데 도움이 될지라도 경제전체에서는 이런효과가나타날 수 없다. 사실 임금삭감은 소비재수요를 줄일 뿐이고, 수요감소를 충분히 상쇄할 만큼 자동으로 투자를 늘리지는 못할 것이다. 노동자의 소득을 기업과 주식소유자, 소비성향이 노동자보다낮은 집단에게 재분배하면 유효수요가 감소하고 실업이 증대할 수 있다. 임금삭감이 고용감소로 이어지고 고용감소가 임금을 더 삭감하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둘째로, 케인스는 설사 개별노동자나 노동자 집단이 원하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의 실질임금을 낮출 방도는 사실상 없다고 주장했다. 고전학파이론으 노동자들이 화폐임금의 감소를 받아들여서 실질임금을 낮추는 것이 항상 가능하고...노동자들이노동의대가로 받은 실질임금을 스스로 결정할 지위에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모든 신고전학파이론은 가격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임금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모든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가격이 떨어질 것이며,임금 구매력도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로, 실생활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화폐임금을 다른 집단 노동자들의 화폐임금과 비교하지 실질임금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이런 화폐환상주장이 다른 두 주장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케인스의 중심주장으로 제시되곤 햇다. 이것은 사실상 실업을 야기하는 것이 화폐임금에 대한 집착이라는 의미로서 피구의주장에 다시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많은 케인스주의자들은 케인스가 비판했던 실업설명방식 즉 경기침체를 독점기업, 노동조합, 최저임금제 등의 탓으로 돌리는 주장으로 사실상 회귀했다. 이것은 만약 경쟁이회복될 수 있다면 자동적인 힘이 실업문제를해결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급진적 언사와 보수적 정책
케인스는 오늘날 지배집단에서 다시 유행하는 신념 즉 자유시장체제가 인류의 모든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신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케인스는 실업의대안이 임금삭감이나 부자들에게 저축을 위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아니라고 주장했따.
케인스는 <일반이론>에서 이자가 저축하는 사람들의절제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을혹평하면서 오늘날이자는 진정한 희생을 전혀 보상하지 못하고 있으며 토지의 지대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하고는 배당금으로 살아가는 불로소득 생활자의 점진적 안락사를 주장하기도 햇다.
그러나 케인스는 이말을 그 어떤 의미에서도 현존하는 경제체제에 대한 혁명적 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현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현존 국가가 낡은 정설을 버리고 투자와 소비수준을 높이기 위해 경제생활에 개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조치가 필수적이다.
첫째로, 정부가 화폐시장에 개입해서 이자율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소득을 절약하기보다 소비하도록촉진하고 그래서 다른 기업들의 생산물에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기업이 투자할 수 있도록 고무할 것이다. 물론 케인스는 이자율에 영향을 미치는 화폐정책이 성공을 거둘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회의적이라고 지적햇다
둘째로, 정부는 차입으로 자금을 충당해 직접 지출할 수 있다. 이런 적자재정은 재화의수요와 고용 규모를 늘릴 것이다 또한 승수효과 때문에 세수가 늘어나 적자재정은 결국 상쇄될 것이다. 정부지출덕분에 일자리를 얻은 노동자는 자신의 임금을 소비할 것이고, 그래서 다른 노동자들이생산한 상품에 시장을 제공할 것이고 그러면 이 노동자들도 임금을소비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시장은 계속 커져 갈 것이다. 경제가 완전고용 수준에 근접해 갈수록 정부수입은 소득세와 소비세를 통해 이전의 재정지출 증가를 충분히 충당할 수 있을 때까지 증가할 것이다.
이런 두 조치는 완전고용을 이루기 위한 전형적인 케인스주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1940~1960년대와 1970년초에 보수당과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이 경제관리의 핵심으로 여긴정책이다.
<일반이론>의 몇 가지 점을 보면 케인스는 더 급진적인 형태의 국가개입을 기대한 듯하다. 근는 국가가 투자의 장기적 결과를 측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그래서 투자를 직접 조직하는 막중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주장햇다. 케인스는 다소 포괄적인 투자의 사회화가 완전고용에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 사회주의는 아니다.
국가가 전체 자원을 새로운 투자에 집중하도록 결정하기만 하면 필요한 것을 모두 달성할 것이다. 그래서 정부당국이 민간사업과 조화를이룰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절충안과 방책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 전통과 단절없이 필수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낮은이자율과 채권소유자의 입지를 약화시켜서 불가피하게 투자의 사회화가 뒤따를 것이며, 정부의 경기부양에 의존하는사업가들은 정부가 점점 더 중심적인 구실을 하도록 용인하게 될 것이다. 과거와는 급진적으로 단절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중앙 통제가....완전고용을....실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고전학파이론은 다시 제 효과를 낼 것이다.....그러면 개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특히 무엇을 생산할지, 생산요소를어떤 비율로 배합할지,최종생산물의 가치를 개인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할지가 결정되는 것에 대한 고전학파의 분석에.....아무런 반대도 없을 것이다.
*잘못된 처방들
케인스는 자신의 방법이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자체에서 구할 뿐 아니라 젊을이들을 마르크스주의의 유혹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케인스의 처방이 지닌 효과를제한하고자 한 것이 대자본들만은 아니었다. 케인스의 생각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조처들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케인스의 처방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통계를 보면 케인스가 지지한 로이드조시의 공공사업계획이 추진됐더라도 1930~1933년에 실업자의ㅣ수가 89% 가까이 증가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통계는 1930년대 불황이 가장 심각하던 시점에 완전고용 달성에 필요한 일자리 300만개를 제공하려면 정부지출이 약 56% 증가해야 했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케인스가 선호한 점진적 수단을 사용해서는 그러한 가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본의 해외도피, 수입증가, 경상수지 불균형, 이자율 급등으로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영국경제가 비록계획되지는 않더라도 국가가 주로 통제하는 경제체제로 바뀌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 이런 과감한 개입은 완전한 전시경제가 확립되도 나서야 선진국들에서 등장했는데, 처음에는 1935년 이후 나치독일에서, 그다음에는 939~1940년 영국에서, 그리고 1941년 미국에서 등장했다. 그 전에는 경제가 순환하며 회복과 후퇴를 거듭했을 뿐이다. 즉 1833~1936년에는 생산량이 증가했다가 그다음에는 급격히 떨어졋다. 미국은 1933~1936년에정부의 재정적자를 활용해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투입했지만, 1937년 가을에는 역사사상 가장 급격한 경기후퇴를 경험했다. 그리고 전시경제가 시작되면서 국가의 권한이 점진적으로 증가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투자에 대한 중요한결정권을 모두 장악하게 됐다. 1943년 미국에서는 국가는 총투자의90%를 차지했다. 만약 이것이 케인스주의라면 이는 케인스 자신이대공황 때 제안한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이었다. 당시 케인스는 정부가 정부지출과 계획, 회복과 사회개혁을 혼동하지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케인스는 1930년대의 자유시장경제가 불황의해결책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줬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제한적 국가개입이라는 그의 주장 역시 더 나은 답변이 되지는 못했다.
*케인스주의와 전후 호황
경제학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전후의 경험을 바탕으로 케인스주의 처방을 지지했다. 이들은 정부들이 이전과 달리 케인스의 학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장기호황이 가능했다고주장했다. 이런 견해가 널리 퍼져 거의 20여 년 동안 의심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케인스주의를 비판하는 일부 맑스주의자들도 이 견해을 받아들엿다. 그래서 폴 매틱은 호화을 적자재정지출과 정부가 유도한 생산을 통해 非시장재화의 생산에 노동과 유휴자본을 끌어들인 정부의 노력 덕분이라고 봤다.
그러나 케인스주의 정책 덕분에 1930년대의 불황을 끝낼 수 있었다는 앞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이런 견해도 사실ㄹ과 부합하지 않았다. 예컨대 영국정부는 재정적자 즉 케인스주의의 방식을 이용하지 않았다.
정부가 실제로 경제에 개입했을 때 문제는 흑자를적자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자의 규모를 줄이는거이었다. 전반적 효과는 자제였다. 정부가 투자를 사회화한 것이 호황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다. 총투자에서 공공부문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양차 대전사이보다 전후에 평균적으로 낮았다
그리고 공공부문의 차입필요성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사실상 줄어들었다. 사실 1970년대까지 정부개입의 주된형태는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지출을 늘리기 보다는 경제성장속도를 늦추기 위한 금융긴축이엇다.
장기호황이 끝나고 1974~1976년에 선진국 경제들이 경기후퇴로 접어들고 나서야 정부들은 필사적으로 수요을 확대하기 위해 케인스주의 정책에 의존햇다. 그리고 이런 정책이 효과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인플레이션만 부추기고 생산을 실질적으로 증대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자 그들은 케인스주의 정책을 내던져 버렸고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그렇다고 정부의 재정적자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1990년대에 주요 서방 정부들은 재정적자를 안고 있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대략 1.5%였고, 이탈리아와 일본은 대략 7%였다. 그렇지만 이런 재정적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가 없던 1950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완전고용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런 증거를 보면 장기호황이 케인스주의적 적자재정의 결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적자재정이 아닌 다른 어떤 것 덕분에 장기호황 동안경제는 깊은 침체에 빠지지 않으면서 계속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 덕분에 자본가들은 미래이윤을 기대하면 투자할 수 있었고, 그래서 다른 자본가들이 투자 성과를 낙관할 수 있는 안정적 환경을 만들어 줬다.
이것은 장기호황의 뿌리가 흔히 말하는 정부지출이 아니라 군비지출이라는 특별한 형태의 지출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무기생산이 정부가 조직한 투자의한 형태이고, 이것은 민간자본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경제가 장기간 거의 완전고용 수준을 유지한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무기생산은 민간자본에게 확실한 시장과 높은 이윤을 기대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민간투자를 촉진했다. 이렇게 자본주의경제가 군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전후 미국의 경험을 보면 군비지출이 소모적일고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높은 수준의 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 형태의 지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중대한결함이다. 그래서 미국의 재정적자가 영구적일 수밖에 없다.
*절충주의 실패
케인스는 자유기업체계를 가만히 놔두면 완전고용과 자원의 최대이용을 보장할 것이라는 신고전학파 경제사상에 도전햇다. 그러나 신고전학파에 도전할 때조차 그는 신고전학파 체계의 이론적 구조는 대부분 그대로 놔뒀다. 그는 신고전학파 이론에서 자신의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그냥 자신의 새 이론에 임시방편으로 갖다 붙였다.
일반이론에서 대부분에서 케인스는 한계효용학파의 개념들을 사용했다. 정설파와 마찬가지로 케인스도 기업의 한계생산비와 사람들이 그 상품에 치를 준비가 돼 있는 가격이 같아질 때까지 기업은 생산을 확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실질임금이 한계비용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재화가 판매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실질임금이 하락해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엿다. 그가 정설파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원칙이 아니라 적용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재화를 더 많이 판매하기 위해 실질임금을 ㅎ삭감하는 것이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햇다. 정부가 경제를 부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정부가 경제를 부양한다면 경제는 신고전학파 정설이 제시한 길을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케인스의 동료인 피에로 스라파는 1926년의 주요 논문에서 수확체감이 아니라 수확체증이 일반적이라고까지 주장햇다. 이 주장은 신고전학파 이론 체계의 전체 구조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엇다. 기업의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생산비가 낮아진다면 수요와 공급 사이의 안정적 균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기업규모도 무한적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균형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주장은 기업이 성장할수록 한계비용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그 기업이 독점기업으로 성장해서 판매가격을 어느 정도 좌우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독점이라는 가정을 전반적으로 도입하면 경제이론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일반이론>에서 케인스는 생산량의 증가를 측정하는 방법을 다뤘다. 그는 한 시점의 서로 다른 물질적 상품들을 합산해서 그것과 나중의 다른 상품들을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케인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고전학파 이론의 가정들을 내던지고 반쯤 노동가치론으로 전환해 특정한 자본설비와 결합된 고용의 양은 그 결과가 나오는 생산량의 만족스런 지표가 될 것이라는 일반적 가정을 받아들였다.
케인스는 신고전학파 이론을 절반쯤 포기했으면서도 이것을 그 논리적 결론까지 밀고 나아가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를 꽤 절충적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동가치론 도입했을 뿐, 그다음에는 잊엇다.
케인스는-신고전학파 이론에 따르면- 생산량 증가와 함께 일어나야 하는 생활수준의 하락을 노동자들이 감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케인스는 노동자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실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되돌아갔다.
<일반이론>은 임금삭감이 불황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케인스 자신은 사실상 임금이 문제이며, 임금을 억제하기 위해 필요한 실업수준-1970년대와 1980년에 우파 경제학자들이 자연 실업율이라고 불렀던-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케인스의 절충주의는 투자가 왜 완전고용 수준에 못 미치는지를 논의할 때 가장 강력하고 가장해롭다. 이 문제가 자신의 전체이론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데도, 케인스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네 가지 이유만 제시했다.
첫째, 이자율 수준이다. 이자율의 중요성은 케인스저작에 대한 논의에서 흔히 경시된다.그러나 일반이론으 매우 많은 부분이 이자율에 관한 것이다.
옛 정설은 저축이 투자보다 많아지면 이자율이 떨어져서 투자비를 낮추고 그 결과 투자가 늘어나 저축과 비슷한 수준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경제성장의 핵심이 저축이라는 옛 정설의 주장에 깔려 있는 이론적 근거였다. 또한 옛 정설은 이윤과 이자를 정당화하는 데 봉사했다. 즉 이윤과 이자는 자본을 추가로 투입해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저축한 것에 대한 보상이며, 이자율은 투자의 한계생산성과 같은 것이었다.
케인스는 이런 견해에 강력하게 도전했다. ㄹ그는 이자율과 이윤율은 다르며 이자율은 자본생산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축을 현금형태로 유지하려 하는지, 아니면 기업이나 은행이나 국가에 빌려주려 하는지(이른바 유동성 선호)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현금 선호도가 높아질수록 이자율은 더 높아질 것이며, 기업의 차입비용도 그만큼 더 늘어날 것이다. 차입수준이 이자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자율이 투자수준을 결정하다 그러나 정부는 화폐시장에 개입해 사람들의 현금 보유욕과 이자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잇다. 그리고 정부가 화폐시장에 개입해 이자율을 낮게 유지한다면투자가 늘어날 것이다.
케인스가 생각한 투자를 촉진하는 두 번째 요소는, 기업이 미래를 어떻게 예상하는가 하는 것이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상수익을 계산하기 위해 우리 지식의 기반이 매우불완전하다는 점이다. 한 기업이 투자를 해서 성공할지는 다른 기업들이 투자해서 재화의 판매시장을 제공할 것인지에 달려있기 때문에 전반적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실질적 효율성ㄹ이 아니라 군중심리 즉 서로 경쟁하는 전체의 평균적 선호다. 진정한 장기 예측을 바탕으로 한 투자는 오늘날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적 이익을 토대로 자본재의 한계효율을 측정하고 직접 투자를 조직해야 할 매우 커다란 책임을 지고있기 때문에 정부는 꽤 쉽게 경제를 구제할 수 있다고 암시햇다. 그러나 케인스가 말한 기대를 결정하는 요인은 정부의 조치뿐 아니라 기업인들이 정부의 조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었다. 국가 개입은 어떤 때에는 쉽지만 다른 때는 매우 어렵다.
세 번째로, 케인스는 ㄴ투자의 위험을 무릅쓰려는 태도를 투자가들의 행동에 대한 다른 투자가들의 예상뿐 아니라 개인적 심리-그는 기업인의 야성적 혈기라고 표현-하고도 연결시켰다.
양차 대전 사이의 심각한 불황같은 위기가 결코 경제적 원인이 아니라 심리변화 때문에 발생햇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스는 개별기업이나 개인의 투자 수준이 시간이 갈수록 하락하는 객관적인 경제적 이유가 있다고 주장햇다. 그는 자본투자가 확대되는 과정 자체가 투자의 수익성-투자의 한계효율=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투자 수익성 하락은 투자위험을 증대시키고 그래서 야성적 혈기는 자본가들이 투자의 위험을 감수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게 되고 경제성장이 투자를 정당화할 것이라는 기대를 허물어 버리기 십상이다.
투자 수익성 하락에 대한 케인스의 설명은 가치가 수요와공급에 달려 있다는 한계효용론의 주장을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한계효용론적 방법에 기초한 것이엇다. 자본 공급이 증대하면 자본은 덜 희소해질 것이다. 그 결과 자본의 추가 단위당 가치가 하락해서 결국 영에 도달할 것이다.
자본의 한계효율 하락은 완전고용의 장애물은 현존 체제의 내재적 경향에 있지, 저축성향, 유동성 선호, 기대, 야성적 혈기이면의 심리에 있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개념은 맑스의 이윤율저하 경향과 매우 비슷하다. 맑스는 노돟ㅇ자들이 투자의 결정 기준자체를 바꾸기 위해 생산수단을 통제권을 장악해야한다는 혁명적 결론을 이끌어 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로서 케인스는 그런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어떤 때 그는 한계효율의 객관적 성격을 강조하기를 꺼렸으며, 오히려 한계효율이 기대에 달려있다고 강조햇다. 또 어떤 때는 한계효율 하락 때문에 자본가들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받아들일 것이고, 축적된 부의 수익률이 점차 소멸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바람직하지 못한 여러 특징을 점차 제거하는 현명한 방법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개념은 일반이론에서 자본축적이 일어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려는 노력은 이것뿐이다.
*전후 종합
전후 30년 동안 주류 경제학을 지배했던 케인스주의 이론은 –정성케인주의나 전후 신고전학파 종합-은 케인스 이론에서 신고전학파의의 요소가 아닌 것을 모두 제거했다. 그 때 이후 이 이론은 소득, 이자율, 투자, 저축, 화폐의 수요.공급 사이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방정식 체계-1937년 힉스가 처음 개발한 이른바 IS-LM곡선-로 전락했다.
이 이론은 경제가 실업의 함정에 빠지는 원인을 밝히려고 고안된 케인스의 논리 체계를 인과관계의 중요성이 결여된 일반 연립방정식 체계로 바꿔 놓았다. 따라서 이런 경제 모델은 낡은 신한계효용이론-가격기구 덕분에 개별 상품들이 수요를 만족시킬 만큼 적절한 양으로 생산된다고 설명하는-에 덧붙여진 것쯤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이론은 정부가 불황-호황 순환을 없애고 완전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따라야 할 황금법칙을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낡은 이론들 가운데는 케인스가 <일반이론>에서 반박한 것도 있다. 임금을 삭감해서 실업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ㅑ. 왜냐하면 새 정설 방정식 체계는 정부가 경제법직에 따라 개입한다면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방정식은 일정량의 자본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는 실질임금률수준에서 일정량의 노동을 고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실업이 계속된다면 임금이 균형이상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케인스주의자들은 케인스가 매우 비판했던 방식 즉 경기침체를 독점기업, 노동조합, 처저임금법 등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실업을 설명했다.
그들이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만약 경쟁이 회복되기만 하면 자동적 힘이 고용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따라서 케인주의는 사실상 오늘날의 경제가 이론의 특별한 경우 즉 경직된 임금을 가정하는 경우와 부합한다는 단서를 달고서 전통적 시장 이론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현대의 평가이다.
실제로 케인스주의자들은 임금의 경직성 때문에 실업률이 어떤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인플레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개념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필립스 곡선인데, 이 곡선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사이에 반비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런 견해에서 한발만 더 나아가면 자연실업률 가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실업률의 평균수준이 올라간다면 그것은 케인스 자신이 언급했던 체제의 비합리성 때문이아니라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자연실업률을 높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받아들이게 된다.
케인스주의 가르침을 배운 정치인들과 학자들은전에 자신들이 반대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정책을 결정할 때 똑같은 한계를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그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높은 실업률, 복지삭감, 노동자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유연성, 노동조합의 힘을 억제하는 법률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됐다.이것은 오늘날 모든 주류 정당정치인들의 연설과 언론의 경제 논평들 그리고 특정 국가들에대한 IMF,세계은행의 보고서에서 발견된 내용이다.
*칼레츠키와 급진적 케인주의
칼레츠키는 케인스 이전의 주류경제학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점을 맑스와 룩셈부르크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유효수요의 수준이 과거의 투자결정에 달려 있다는 견해와 경제를 총체성으로 보는 관점이었다. 그는경제 통계를 연구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고전학파의 중심 가정인 수확체감의 법칙이 틀렸다고 확신햇다. 그는 수확체감은 단지 원료를 생산할 때만 일어나며 제조업에서는 오히려 수확체증법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맑스이론의 주요 요소들-노동가치론, 생산과정에서 착취로 획득하는 잉여가치가 이윤의 원천이라는 견해, 이윤율 저하 경향-은 무시했다. 그는 가치이론에는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으며 이윤은 기업이 시장을 얼마나 독점적으로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봤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이윤율 추세를 분명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 경제는 발전 후기 단계에서는 성장의 속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봣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 혁신 성향의 감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혁신성향의 감퇴는 새 원료와 새로 개발할 토지 등을 발견하는 일의 중요성 감소, 그리고 새 발명의 적용을 방해하는 자본주의 독점적 성격 강화와 관련이 있다고 봣다.
호황이 지속되자 칼레츠키와 그 영향을 받은 급진적 케인스주의는 유효수요와 완전고용을 유지하는 문제를 경제적 문제 즉 체제의 동역학에 내재적 문제로 보지 않고 정치적 문제-대기업을 설득해서 그들의 본성과 반대로 행동하게 하고 투자를 결정할 때 정부개입을 받아들이게 하는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군비경제는 체제의 근본적 동역학의 몇 가지 측면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 아니라 대기업이 쉽게 받아들이는 투자형태가 중요했다.
*스라파와 한계효용 이론에 대한 비판
스라파의 관심은 유효수요나 실업원인이 아니라 신고전학파 이론의 이론적 기초를 파괴하는 것과 리카도나 맑스의 견해를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상품에 의한 상품생산>은 매우 형식주의적인 경제 모델을 제시하면서 리가도 주장했지만 한계효용학파가 폐기한 가정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상품들의 물질적 양와 그들의 교환가격을 도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지난 주류경제학자들이 수요와공급이 중심적 구실을 한다고설명한 것과 다르게, 이 책은 수요와 공급이 현재의 구체적 생산조직의 부산물이고 생산물이 투자, 자본가들이 소비, 노동자들의 소비로 분배되는 과정의 부산물임을 보여줬다.
이 책은 균형가격을 결정하는 데는 수요 방정식이 있을 수 없다. 분배의 한계생산성 이론-주류 경제학자들이 이윤을 정당화하고 최저임금법을 반대할 때 내세우는 주장-은 완전히 허튼소리이다. 이윤율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본의 양 따위는 없다는 점을 결정적으로 보여줬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이윤과 ㅇ이자가 자제,기다림, 생산 시간에 대한 보상이며 추가 자본이 생산한 가치(한계생산물)의 증가와 동일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윤율은 한계생산물을 총자본의 가치로 나눈 것이다. 그러나 그 자본가치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생산수단과 원료(몇 톤의 철, 몇 리터의 석유, 몇 킬로와트의 전기등)를 이루는 서로 다른 물질적 재화의 측정치를 합산하는 것으로는 그런 가치를 얻을 수 없다. 사실 한계효용 이론에 따르면, 가치는 한계생산물의 가치에 달려 있고 이윤의 크기도 똑같은 것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자본에 대한 이윤의 비율 즉 이윤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게 된다. 이윤율과 이자는 자본의 양에 달려 있고 자본의 양은 이윤율과 이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계효용 주장은 임금이 떨어지면 자본가들이 자본집약적 생산기술에서 노동 집약적 기술로 전환하는 것이 이로울것이고 그래서 실업 노동자들을 흡수한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칼도와 로빈슨은 임금을 낮춰 이윤을 늘리는 방식은 가격을 변경시켜 그들이 재전환이라고 부르는 과정-자본가들이 노동 집약적 방법보다는 자본 집약적 방법을ㅇ 사용해서 노동력을 줄이는 것이 더 수익성 높게 되는 변화-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신고전학파에 대한 다른 비판들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공급과 수요가 신속하게 저절로 조정된다는 신고전학파의 가정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지적됐다.
빌라는 경제 전체를 대리해서 가격을 올리고 내리는 구실을 하는 모종의 경매인이 있는 것처럼 글을 썼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조정은 상품별로 시차를 두고 즉흥적으로 이뤄진다. 심지어 한 상품의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기 전에도 다른 관련 상품들의 생산조건이 바뀔 수 있으며 그래서 첫 번째 상품의 수요.공급의 조건이 바뀌기도 한다. 예컨대 곡물의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루도록 곡물가격이 변동할 때쯤 그 곡물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비료의 가격이 오르내릴 수 있고, 그래서 곡물공급 비용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면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슘페터는 일부 혼란 때문에 균형이 파괴되면, 새 균형이 이뤄지는 과정은 낡은 완전경쟁 이론의 주장과 달리 그다지 확실하고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햇다. 조정을 위한 고군분투 자체가 그 체제를 새 균형에 더 가까워지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만든다.
슘페터는 완전경쟁이라는 신고전학파의 가정은 기업이 혁신을 위해 장기적으로 투자한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완전경쟁 상황에서는 한 기업이 투자의 성과를거두기 시작하자마자 다른 기업들이 그 기업의 혁신 성과를 이용하며너 그 시장에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새 생산방식과 새 상품도입은 처음부터 완전한 경쟁이나 완전한 신속한 경쟁과 거의 양립할 없다. 사실 완전경쟁은 새로운 것이 도입될 때마다 항상 일시적으로저지됐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동역학의 기초는 신고전학파의 모델의 완전경쟁과 가격유연성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거의 독점에 가까운 기업들의 투쟁을 통해 일어나는 창조적 파괴라고 봤다. 슘페터는 이런 특징들은 생산을 극대화하는 경향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경기침체기에는 체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햇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답변할 수 없었다.
정설은 이런 도전에 사실상 신학적 방식으로 대응햇다. 즉 과거와 미래가 다르지 않은 공상적 세계를 만들어 냈고,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정확히 안다면 경제가 제대로 작동할 것임을 보여주는 복잡한 수학 공리들을 고안해 냈다.
*새고전학파와 공급중시 혁명
1970년대 중반 장기 호황의 종말조차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신념을 깨뜨리지 못햇다. 오히려 처음에 그들의 신념은 더 강해졌다. 그들은 실패한 것이 자유시장이 아니라 시장의 자유로운 활동에 개입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햇다. 이들을 비판하는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케인주의의 합의가 1970년대에 퇴색해 갔다. 새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주의 경제학이 이론적으로 부적절하고 거시경제학은 확고한 미시경제학적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케인스주의 경제학이 새로운 거시경제이론, 즉 시장은 항상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고 경제주체들은 항상 최적화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이론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들은 보이지 않은 손이 항상 경제를 효율적 자원배분으로 이끈다고 생각햇다.
이런 견해의 논리적 극단은 정부의 경제개입에 일절 반대하는 것이었다. 경제이론의 핵심교훈은 경쟁적 경제를 자유롭게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원을 배분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낼 것이라는 전제이다. 경기후퇴는 저절로 치유될 것이다.
자유방임 사회에서 경기후퇴는 재조정 시기이며.....개인들이 합법적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의 표현이다. 경기후퇴를 이용해서 이윤을 뽑아내려는 기업가의 민첩함과 자유가 보장돼야만 경기후퇴를 끝내고 실업을 줄일 가능성이 가장 빨라 발견될 것이다.
그들은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시장에서 실ㄹ업은 항상 자발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실업의 규칙적 변동은 사실 여가 수요가 경기순환과반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경제전체의 거시경제적 변동을 가속하거나 감속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입을 최대한 줄이는 것, 특히 소득세를 줄여서 기업의 창의력을 고무할 공급측면의ㅣ 유인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레이건 시절에 공급중시학파은 세금감면의 효과 아주 클 것이므로 정부의 총수입이 늘어나서 자동으로 균형예산을 이룰 수밖에 없고 자유시장이 경제를 자연스런 호황으로 되돌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가 1980년대의 통화공급, 인플레이션, 경제의 순환운동을 통제하는 데 실패(영국의 대처)했음에도 되살아난 도그마를 철저하게 밀어붙이려는 새고전학파의 열의는 꺾이지 않았다. 정부의 개입조처는 기업의 행동을 바라던 바대로 바꿀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합리적 기대 때문에 기업ㄹ은 항상 정부개입의 효과를 미리 감소시킬 것이 때문이다. 정부의 적자 지출처럼 통화공급을 약간 조정하는 조처는 공급과 수요가 서로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을 막았다.새고전학파는 호화와 불황은 중앙은행이 사기해위 결과라고 주장했다.
심각한 국ㅂ제적 경기후퇴를 세 번이나 겪었는데도 자유방임 경제의 불안정성과 비합리성을 부인한 새고전학파가 지적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학술 경제학이 대부분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한 가지 중요한 자산이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지배계급, 그리고 언론과 대학의 요직을차지한 지배계급의 충복들에게 위안이 됐던 것이다.
서방선진국들에서 잠시 나타난 호황은 규제완화, 민영화, 부자들의 탐욕에 대한제약의 전면폐기가 경제성장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그들의 낙관을 입증하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옛 공산주의진영의 위기와 몰락은 국가계획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입증하는 듯했다.
제3세계에서는 경제발전을 억누르는 제1세계의 힘을 분쇄할 수 있는 것은 믽족국가뿐이라며 국가에 의존하던 종속이론 경제학자들이 이제는 자유시장, 균형예산, IMF와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이고 있다. 서방에서 많ㄹ은 저명한 좌파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이 입증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정설의 붕괴:오스트리아학파
1980년대 말의 호황이 자유시장과 새고전학파 견해를 강화해 준 것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의 초의 불황은 이들에게 반격을 가했다. 1990년대 초의 불황은 새고전학파의 맹목적 확신으로도 진정시키기 힘든 공포감을 자아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고전학파 균형이론의 주요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상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첫 번째 학파는 제약없는 자유시장을 지지한다는 점에서는 새고전학파와 동일했꼬 그 이론적 기원은 멩거와 뵘바베르크가 주창하고, 미제스, 하이에크, 슘페터가 다양하게 발전시킨 한계효용이론이었다. 하이에크는 대처가 좋아했다. 규제가 없어지고 노동조합이 약화되기만 하면 경제는 자동으로 최적의 조건을 회복할 것이라고 수년 동안 주장했다. 1970년에 실업이 주기적으로 확대되는 이유는 실질임금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실업의 책임은 시장을 비효율적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노동조합에 있으므로 노동조합의 힘은 근절돼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학자들이 보통 경쟁과정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하는 균형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균형이라는 개념의 유효성에서 근본적 문제는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균형보다는 질서라는 용어를 더 선호했다. 그는 나중에 경쟁의 결과가 예측할 수 없고 원래 의도했거나 의도할 수 있었던 것과 대체로 다른 한에서만 경쟁은 가치있는 것이라고 썼다. 시장에서 만들어지는 자생적 질서는 일ㅇ반여론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필요가 항상 덜 중요한 필요보다 먼저 충족되도록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호황과 불황을 만들어내는 압력을 설명하려 한 저작에서 가격메커니즘이 자기 균형적 체제라고 썼다. 그가 보기에 유일한 문제는 이 메커니즘에서 화폐는 그 본성상 일종의 느슨한 접합제라는 것이었다. 화폐가 없어도 그 메커니즘이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균형개념이 대량실업과 불황-호황 순환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명백히 중돌할 때는 그 개념을 비판했지만, 노동조합을 비판하고 자유시장을 옹호하려 할 때는 그 개념으로 돌아갔다.
그는 제약받지 않은 시장이 최선의 가능한 세계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런 시장은 기업들이 새롭고 더 효율적이 생산방식을 역동적으로 채택하도록 고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시장이 대중의 삶ㅇ르 거듭거듭 엄청나게 파괴한다는 점도 인정하다. 대중이 져야 할 변화의 부담을 경감하려는 노력을 거부해야만 경쟁이 작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집단은 하이에크저작뿐만 아니라 슘페터의 영향을 받았다.
슘페터는 맑스가 말한 이윤율도, 케인스가 말한 투자한계효율도 하락하지 않으며, 위기가악화하는 경향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에 슘페터는 체제가 독점과 불완전 경쟁에 기초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혁신이 경제를 엄청나게 성장시켜서 지금 수준으로 보면 빈곤이라고 할 만한 것이 50년 안에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케인주의와 복잡성 이론가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시장가격이 정보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고 완전경쟁이 혁신과 양립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신고전학파 이론이 결코 탄탄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렷다. 최저임금법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주장이 경험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유시장정설에 대한 약간다른 방향에서 비판한 이론가 집단은 카오스와 복잡성 집단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학적 방법을 경제에 적용해, 공급과 수요의 조정을 바탕으로 한 체제가 가격의 오르내림을 통해 균형상태에 도달하기는커녕 카오스 이론에 따라 움직이며 그 체제에는 엄청나게 많은 자연지반 상태 즉 평형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방정식 체계를 이용해 안정성 가정을 검증했더니 균형체계가 안정적이라는설득력 있는 근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카오스이론은 외부교란 요인이 없을 때조차 상시적이고 거대하며 규칙적이지 않은 변동이 일어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고전학파원리에 기초한 경제가 완전고용의 조건에 주목할 것으로 기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경제가 혼란(카오스)스럽게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요행을 바라는 것뿐이다. 우리는 비합리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며 불평하지 말고 꾹 참아야 한다는 것이ㅣ 메시지이다. 신고전학파 정설에 대한 비판은 결국 새고전학파의 체제 옹호론과 마찬가지로 전체 경제체제(거시-경제)의 무질서와 비인간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귀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