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도 어디에 피어있는가에 따라서 아름다움의 가치가 다르다. 길가에 핀 진달래보다
멀리 떨어질수록, 바위위에 피어있을수록, 다 같은 바위라도 아무도 꺾지 못할 강물위의
바위에서 강물보고 피어있는 진달래가 더욱더 아름답다. 나는 그런 진달래를 모두 보았다.
일흔이 넘어도 해마다 보아도 진달래는 심금을 울린다. 343미터 소금산에는 출렁다리도
있어서 아이들도 젊은 청춘남녀도 50대 미만의 젊은 분들도 좁은 길에 뒤섞여 산행을
즐긴다. 우리들 초노(初老)들도 마음만은 어린애와 같다. 산으로 오르면서 몇 장의 사진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산행에 익숙한 몇 명은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고 좀 불편한 친구들은
아래에서 머뭇거리고 L S G와 나는 서서히 오르다 내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경치가 좋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젊고 아이들도 꽃가지 만져보고 감상하는 등 모습을 볼 때마다 시적인
감흥을 자아내게 한다. 내가 짓기에는 역부족이나 옛 선비들이 지은 한시가 떠오른다.
L S G에게 “한시 하나 읊어볼까?”하니 좋다고 해서 읊어보았다. L S G는 고교 때 상원
교지를 편집한 주역이다. 그래서인지 잘 들어주어 나도 신명이 나서 몇 수를 더 읊조렸다.
들어주니 고마웠다. 한시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는 기막힌 사연들이 많이 함축
되어 있다. 유명한 권필은 글자 하나 잘못 넣어 연산군에 의해 매 맞아 귀양 가다 죽었다.
그 때 그 때 맞춰서 적용해 읊을 수 있는 한시가 제법 된다. 그러나 시도를 해보면 관심
있는 분이 그리 많지가 않다. 국문과를 나와서 기관의長도 술잔을 기울이다 한시 한수
읊으려하면 주머니에서 슬며시 휴대폰을 꺼낸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
과거 김수학 경북도지사는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했던 분이다. 누구한테서나 끊임없이
배우고 알려고 노력한 분이다. 마음속 자신에게 맞으면 취하고 아니면 버린다. 내가
존경하는 유명한 교수님은 휴대폰을 아직도 011을 사용하고 있다. 아예 전화를 받는
것이 귀찮아서다. 내려올 때 비가 조금 뿌렸지만 심하지 않아서 S G와 나는 남강을
따라 올라갔다. 산자락을 강에 담고 우뚝 솟은 봉우리가 몇 개나 이어져있다. 바위틈엔
소나무와 강물 향해 늘어져 피어있는 바위틈진달래는 마치 강원도 홍천의 남한강의
팔봉암과 같아보였다. 맑고 푸른 강물은 그리 깊지도 않고 강가엔 모래도 제법 있어서
연인들이 산책하기에는 멋진 강변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에 앉아 술 한 잔 하자
하니 S G가 내려가서 점심을 먹자한다. 푸른 강물에 발을 담가있는 산봉우리와 진달래를
쳐다보며 모래에다 발자국을 남기면서 강 따라 내려왔다. 조금 내려오니 옛 열차 길이
있다. 관광을 위해 몇 대의 열차가 사람들을 태우고 기념으로 지나간다. 간현주차장
바로 위 남강 옆에는 산이 있고 강 건너는 모래벌판이다.
S G는 이곳이 과거 군대시절 유격훈련 장이라고 한다. 70년대 초반이었다. 유격훈련 생각
하면 나도 군대라는 곳이 어떤지를 실감나게 겪었다. 2차 대전 때의 부친세대와 6.25전쟁
그리고 아재들 형들과 우리들이 겪어온 월남전 1.21사태 등에 유격대가 있었지만 전 군인이
유격훈련을 받게 된 동기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일당의 소위 1.21사태였다.
우리 부친들 세대는 일본 식민지시대와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생사를 함께한 한 많은 삶을
보낸 세대들이다. 나도 2살이라 엄마 등에 업히고 형은 엄마 손에 잡혀서 피난을 갔다.
아버지는 지게에 짐을 가득히 지고 갔다. 아래 사진처럼 이다. 그 후 고교시절까지 가난한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고생도 좀하곤 했지만, 경제개발 덕분에 어른 들 보다는 좀
나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 때는 부친들 세대가 주역이었고, 경제개발 시대 때는
우리들이 일선에서 일했던 주역들이다. 군대생활도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있어 죽을 고생
좀 했었던 70년대 초가 아니었던가. 그 중에서도 유격훈련은 그야말로 정신력이 없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훈련이었다. 1968년 1월21일 즉 1.21일 사태였다. 김신조 유격대가
청와대 습격으로 인해 새로 생겨난 혹독한 훈련이 유격훈련이었다. 나는 2번 겪었는데
모두가 3일 훈련 안 받고 석 달 군대생활 더하라면 하겠다고 했던 그런 훈련이었다.
군 복무 시에는 월남전도 치열해서 많은 군인들이 참전을 했었다. 우리 고교 동기 중,
L중대장도 전사를 했었다지. S동기는 월남전에 참전해서 무공을 세우고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카페에서 내 글을 읽고는 격려의 글도 남겨주니 글을 쓰는데도 힘이 된다.
특히 한시를 좋아하고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으니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새로운
우정이 싹트고 있다. 2학년 때인가 같은 반을 하면서 한자하나 배운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나라가 힘들었던 시대와 함께 혹독했던 우리들의 군대생활의 한 단면을 살펴보았다.
약간의 비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오후 점심시간에 둘이서 점심 먹을 장소를 찾다가 식당 뒤편
섬강 가 바로 옆에 식탁과 의자가 있다. 둘이서 도시락을 펴놓고 막걸리 소주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조금 지나니 강변에서 쑥을 뜯고 지나가던 L W H 부인 이 우리도 여기로 오라고
해야겠다고 하더니 ㄴ국장을 데리고왔다. 이내 곧 동석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서 너 명이
더 합석을 하게 되니 명당자리가 되었다. 강물이 푸르고 강가에는 군데군데 벚꽃들이
있어서 봄의 경치가 그야말로 서정적이다. 강물위에 물새도 첨벙거린다. 그야말로 지상의
낙원이다. 술이 있고 친구들도 있고 자연도 벗 삼으니 이보다 더 좋은 자리가 없다. 우리
나라는 정말로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둘이서 경탄하며 애기를 하다 보니 자연히
금강산과 백두산 이야기도 새어 나온다.
S G는 백두산 금강산을 구경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20여 년 전 백두산 금강산을 다녀
왔었다. 보고 느낀 것 생각하면 참 많은 소재가 있는데 여기서는 몇 가지만 남겨보고 싶다.
백두산에 가서 천지를 보려고 할 때 운이 좋지 않을 때는 열흘을 올라가도 못 봤다는 여행객
이야기를 들었다. 그만큼 천지는 구름에 쌓여있어 보기가 힘들다. 나는 30분 기다리다가 온
천지를 볼 수 있었다. 안개가 서서히 그러다가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가고 푸른 천지가 나타
났던 것이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였다. 천지 이외 주변의 산들은 별로 볼게 없었다.
반면에 금강산은 그야말로 천하 명산이다. 중국에 명산이 그렇게 많아도 오죽하면 중국의
시인이 “原生地高麗 一見地金剛”이라고 고려 때 중국의 선비가 시를 남겼을까. 그리고
우리 속담에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했으니 정말로 명산중의 명산이다. 만 이천 봉우리와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나오는 상팔담을 비롯해서 해금강 등 주로 외금강 방면을 이틀
동안 구경했다. 나무꾼과 선녀이야기가 있는 계곡에서 계곡물 1병 떠 넣으려고 하니 대번에 “규-정 위반입니다”고 하면서 북한의 여자경비원이 안된다고 말한다. 내가 선녀계곡에서
물 한 병을 담아오려고 한 것은 6.25전쟁 때 1950년 10월26일 국군이 마지막 점령지인
압록강 초산까지 점령을 하였을 때 국군 병사가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
에게 기념으로 바쳤다는 생각이 나서다. 그래서 나도 금강산 물을 병에 담아 기념으로
가져가서 평생 동안 책상 위 꽃병으로 할 까 생각이 나서였다. 다음코스로 해금강을 볼 수
있는 산봉우리로 갔다. 조금 멀고 높아서 가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평생에 한번인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을 하고 가자 마음먹고는 산을 올랐다. 도중에 산언저리 길에서
7~8명이 돌 서너 개를 옆에 두고 길 보수를 하고 있는데 40대쯤 보이는 젊은 분들이다.
한분만 일하고 나머지는 보고만 있다. 해금강을 구경하고 돌아오는데 2시간이 지났는데도
거의 그대로였다. 아! 그렇구나! 일하는 모습에서 자본주의 남한과 공산주의 북한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1시간쯤 올라 산을 넘으니
해금강이 환희 보인다. 해금강! 그야말로 반은 그림이요 반은 시다(半似丹靑半似詩).
넋이 나간 사람이 되고 만다. 혼자 바위에 앉아서 한참동안 이 절경을 감상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크고 작은 바위들이 산에서 바다까지 수놓아있고 높고 낮은
산봉우리 그리고 바다가 삼위일체가 된 천하제일의 절경이다. 삼십 여분 동안 구경하다가
산을 내려 왔다. 산 중턱 노점에서 싸리 짚 모자 하나를 사서 쓰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 느낀 금강산 온정마을에 사는 일반 주민들의 생활상이다. 온정각에 도착해서는
본부에서 좀 떨어져있는 외진 곳으로 혼자 걸어갔다. 백여 미터쯤 되는 시내를 건너면 70여
호 마을이 있다. 처마까지 둑으로 쌓여 있어 지붕만 보이고 주민들 가정은 볼 수가 없었다.
빨랫줄에 말리는 옷만 보였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50여 미터 쯤 되는 군 초소에서 군인
둘이 찍지 말라고 좌우로 손을 흔든다. 나는 모자를 벗었다 썼다 하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런 손짓을 하지 않았다. 시냇가로 좀 더 몇 발자국 다가가니 저쪽에서 40대 아주머니
둘이서 다가온다. 들에 나가 일하고 점심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모양이다. 불과 20여 미터
앞을 지나가는데 흰 치마저고리에 왼손에는 봄나물을 담은 보자기를 들고 오른손에는
호미를 들고 간다. 아직 여기는 비닐봉지가 없구나 생각했다. 머리에는 비녀를 꽂았는데
몇 올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바람에 나부낀다. 3~4미터 쯤 떨어져서 다른 한 아주머니도
비슷한 모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둘이는 말없이 마을로 가고 있었다. 한참동안 서서
보았다. 화장도 하지 않고 씻지도 않아서 그런지 수심에 찬 그 중년의 정감어린모습은
금방 보아도 우리 50년대 엄마나 아주머니를 연상하게 했다. 50년대 시집간 누님 같은
모습이다. 마을로 갈 때까지 보고 있었다. 그토록 깨끗한 얕은 시냇물 가의 모래 위를 걸어
가면서도 발도 씻지 않고 간다. 내 마음도 점점 애처로워 지면서 수심만 쌓여져 가고 있다.
시집간 누님의 처량한 모습처럼 보이니 마음이 우울해진다. 다시 내를 건너 돌아와서
온정각 식당으로 왔다. 일행들이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는 자리에 앉았다. 식당에는 북한
접대원아가씨들 대여섯 명이 안내 겸 음식을 배부하고 있었다. 모두가 미모의 아가씨
들이다. 그중에서도 반장되는 아가씨는 더욱 더 미모가 출중하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음식을 가져온 아가씨가 잘못해서 상위에 소주병을 넘어뜨렸다. 순간 미모의 반장은 정색을
하면서 나무라기 시작한다. 나는“이 아가씨 머러카지 마세요. 내가 소주 3병을 더 시키고
안주도 하나 더 시킬테니 이제 더 머러카지 마세요”하니 반장 아가씨는 소리 없이 환희
웃는다. 옆에 다른 아가씨들도 함께 웃었는데 소주병을 깨트린 아가씨는 궤면 쩍은 모습으로 얼굴을 돌려서 서있었다. 이내 곧 소주3병이 나오고 안주도 따라 나왔다. 곰곰이 생각하니
경상도 사투리라 박장(拍掌)없이 소리 없이 대소(大笑)하였던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고 남으로 출발했다. 검문소에 내려서 신분과 짐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검문을 하는 북한 분은 촘촘히 조사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나에게는 가방도 보지 않고
대충 보고는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생각해보니 금강산에서 산 싸리 짚
모자를 쓴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금강산을 출발했다.
조금을 지나오니 길가의 작은 산에는 옛 일본 시대 때 놓았던 나무 전봇대가 줄지어 남아
있다. 창가를 바라보니 들녘에는 콩밭과 벼가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넓은 저 들길 끝에서
부터 가까이로 눈길을 끌어오다 무심코 콩밭을 보니 콩밭이랑 저 멀리서 두 명의 어른이
2~3미터 거리를 두고 밭고랑에 쭈그리고 앉아서 콩잎 사이로 부러운 듯 우리들 버스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어릴 적 초등학교 2~3학년 시절이 금방 떠오른다. “나도
어릴 적에 시골 콩밭에서 김을 매다가 길가는 버스를 한참동안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일안해서 좋겠다.”하면서…. 5월의 녹음이 짙어져가는 논밭을 지나니
금방 38선에 도착한 후 남으로 내려왔다. 남으로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다. 산과 들 내와 강
사람들도 한 핏줄이라 제주도에서 만주까지 가보면 우리나라라는 느낌이 마음속 뚜렷하게
심어진다. 2박3일 금강산 산행을 통해 구경을 하면서 북한사람들의 생활상을 눈여겨보니
우리민족이라는 동포애가 깊게 자아내게 한다. 한민족의 모양(생김새)은 북한뿐만 아니라
북간도 만주까지 다 같음을 보았다. 사람이 원수지간으로 갈라놓았으니 언젠가는 사람이
통일도 시킬 것이다. 북녘의 아름다운 산들을 구석구석 다녀보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다리에
힘이 있고 정신이 온전할 때 가야하는데 어쩌면 다 글렀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복잡할
때는 옛 사람의 삶을 알 수 있게 하는 한시가 마음을 씻어준다.
◈ 산소식(충지 冲止 :1226~1292년)<한가한 속에 스스로 기뻐함>
日日看山看不足 날마다 산을 봐도 언제나 보고 싶고
時時聽水聽無厭 때때로 듣는 물소리도 싫증이 나질 않네.
自然耳目皆淸快 저절로 귀와 눈이 모두 맑고 시원해서
聲色中間好養恬 소리와 빛 사이에서 고요함을 기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