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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 수 있단 일언에 출가
인도철학·선불교 안목 탁월
대만서 보조선·화엄 심층연구
학회지평 확대·후학양성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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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좌 법산!’ 아직 낯설다. 동국대 강단을 떠난지 1년밖에 안 되었으니 ‘교수 법산’이 어울릴 터. 하지만 선입관은 이내 무너졌다. “관세음보살”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미소 속에는 꽁꽁 얼어붙은 강이라도 녹일만한 온후함이 배어 있었다. 차 한 잔 따르는 손길엔 힘이 묻어났다. 수좌만이 가질 수 있을 법한 묵직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런 힘이 전해졌다. 법산 스님은 앉자마자 실상사 백장선원에서 동안거를 보내며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전한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백장 스님의 일언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곳이 백장선원입니다.”
평소 백장선원 입방 인원은 8명에서 10명 정도. 그런데 지게가 딱 10개 있단다. 한 사람에 하나씩. 삽, 호미, 낫 등의 농기구도 딱 그만큼만 있다. 백장선원에서는 운력을 해야만 한다는 무언의 암시다.
“포크레인도 빌리고, 용접기도 삽니다. 하지만 그 도구를 사용하는 건 선방 스님입니다.”
2010년 동안거 때 백장선원 식수가 끊겼다. 평소 백장선원은 계곡물을 식수로 사용해 왔는데, 겨울에 접어드니 계곡이 얼어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식이면 매년 동안거가 버거울 터. 식수원을 찾아 나섰다. 주변 계곡을 샅샅이 뒤져 결국 ‘석간수’를 찾아냈다. 끝난 게 아니다. 이 물을 백장선원으로 끌어와야 하는데 거리가 무려 700m.
좌선을 마치면 모두 함께 곡괭이와 삽을 들었다. 땅을 파 수로를 만들고 파이프를 묻었다. 파이프를 잇는 용접도 선방 스님의 몫이다. 물 저장 탱크 3개도 사와 묻었다. 물이 흐른다. 백장선원 전 대중이 써도 남을 정도다. 지난 동안거 때 마무리됐으니 이 운력은 2년 동안 진행된 셈이다.
일화 한 토막을 전하는 내내 스님은 미소를 보였다. 강단에서 보인 웃음이나, “관세음보살” 하며 인사를 건네며 보인 미소와는 또 다른 미소였다. 환희심이 가득한 미소였다. 파안미소란 이런 것일까! 그 미소에 ‘수좌 법산’은 아직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송두리째 뽑혀 나갔던 것이다.
법산 스님은 2011년 2월 정년퇴임했다. 1985년 6월 중국문화대학에서 ‘보조선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음해인 1986년 3월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임용돼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뿐만 아니라 보조사상연구원을 비롯해 한국선학회, 인도철학회, 한국정토학회, 아태불교문화연구원 등의 회장 및 원장을 맡으며 불교학자들의 활동 기반을 넓혔고, 최초의 종합역사서이자 불교백과사전인 ‘조선불교통사’ 역주팀을 8년간 이끈 후 8권으로 펴냈다. 보조 스님의 사상이 담긴 ‘보조전서’를 한글화 해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조계종 교육위원회위원장, 승가고시위원장을 역임하며 조계종 승가교육제도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법산 스님이 선방으로 향한 것은 지난 2006년 10월. 벽송사에 처음 가부좌를 틀었을 때 학계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선방은 ‘수좌 몫’이라는 의식이 아직도 팽배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랄 만하다. 사실 스님은 오래 전부터 ‘수행 없는 학문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후학들에게 강조한 ‘말’을 스스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궁금했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수행을 강조하는 이유가.
어쩌면 모든 사람들에게 “관세음보살”하며 인사를 건네는 일상에도 그 이유가 함축돼 있을 것 같아 여쭤 보았다. 스님은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하지만 가슴에 관세음보살상인 호신상을 모시고 있다.
“한 번쯤 대만에 가 보신 분들은 보셨을 겁니다. 거리마다 ‘아미타불’이라 쓴 크고 작은 벽보가 가득하지요. 몇 걸음만 걷다 눈을 돌려 보면 어김없이 ‘아미타불’이 눈에 띕니다. 그 이유를 대만 스님에게 물었어요.”
답변은 간단했다. 아미타불 글씨를 보는 순간, 아미타불을 한 번쯤 생각하지 않겠느냐는 것. 시각을 통해 사유를 이끌어 낸다는 말이다. 사유는 곧 언행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첫 단계가 언행이라는 점을 착안해 보면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법산 스님은 ‘선’을 꺼내 들었다.
“선,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선은 심사정려(深思靜慮) 혹은 기악(棄惡)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고요히 의심하거나 나쁜 것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생각이 깊지 못하면 모든 일이 조잡하고 진실되지 못해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옳은 것은 보리의 길이요, 그른 것은 번뇌의 길입니다. 깨닫게 되면 악을 일으키는 번뇌는 선으로 가는 보리의 밝음에 밀려 제거되게 되니, 악을 버리게 하는 것이 곧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무엇보다 정혜는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닦는 것이며 실천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음과 입이 선하며, 안으로 생각하는 마음이나 밖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하나가 되면 정혜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를 스스로 알아 수행하는 게 참선입니다. 간화선도 여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법산 스님은 정혜를 등불에 비유했다. 정은 등불이요, 혜는 불빛이다. 등불은 불빛의 체(體)가 되고, 불빛은 등불의 용(用)이다. 등불 없는 불빛도, 불빛 없는 등불도 있을 수 없다. 등불과 불빛 이름은 다르지만 본래 하나이듯 정혜 또한 하나라는 설명이다.
“선의 참구는 평소 일상생활에서 한 결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일행삼매라 하지 않습니까. 정혜는 좌복 위에서만 발현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에 따라 언제든 발현될 수 있는 겁니다.”
백장선원 운력 일화를 소개하며 웃음을 잃지 않았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운력과 수행이 어디 둘이던가. 그러고 보니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안녕하세요” 대신 “관세음보살” 인사를 하는 이유가 읽혀진다. 관세음보살 한 번 염하는 순간 상대도 한번쯤 관세음보살을 떠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산 스님 스스로 관세음보살을 일상에서 염하며 자신을 반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세음보살을 마음에 새길 때 모든 걱정근심은 사라지고, 중생을 아끼는 잔잔한 미소가 제 얼굴에 떠오릅니다. 길을 걸을 때 한 걸음 한 걸음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닮아 가고자 하는 원력에 다름 아니다.
순간, 법산 스님의 책 ‘말 있는 곳에서 말 없는 곳으로’에서 본 한 대목이 스쳐갔다. 대만 유학 당시 스님은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기숙사와 연구소, 사무실 등에서 임시로 머물렀을 뿐이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혜일강당이란 절이었다. 혜일강당이라 하면 중국불교의 거장 인순 스님이 상주하던 절이다. 당시 주지 스님은 “우리 불교의 출가제자는 한국이든 중국이든 똑같은 부처님 제자이니 같이 살면서 수행하자”며 흔쾌히 승낙했다.
주지실에서 나온 스님은 법당으로 향했다. ‘이렇게 낯설고 물설고 말도 설은 이국 타향에서도 부처님의 자비로운 은혜로써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법산 스님의 신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걷고자 하는 우리에게 신심은 얼마큼 중요한 것일까.
“‘화엄경’에 신심을 사람의 손에 비유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은 손이 있기에 보산(寶山)에 들어가 마음대로 보배를 취할 수 있다. 신심이 있는 사람은 신심으로 인하여 불법에 들어가 마음대로 더러움 없는 보배를 취하게 된다.’”
용수보살도 대지도론을 통해 ‘신심이 없는 사람은 보배산에 들어가도 취할 것이 없다’ 했다. ‘삭발염의를 해도 신심이 없다면 법해(法海) 가운데 들어갈 수 없다. 마른 나무에 꽃과 열매가 맺힐 수 없듯이 사문과를 증득할 수 없다’는 일언이 신심의 중요성을 대변한다.
법산 스님은 신심을 돈독케 하는 다양한 방편이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만큼 소중한지부터 사유해 보라 권한다. 자신을 알아야 타인의 고귀함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으므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요, 내가 건강하므로 모두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충만하다 해도 ‘나’ 하나 없으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로 인해 모든 것이 있고, 이 세상 모든 것으로 인해 ‘나’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나’ 또한 ‘나’만큼 고귀합니다.”
생명의 존엄성과 그 연관성 즉, 상생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은 변하는 것이리라.
벽송사에서 첫 안거를 마친 법산 스님은 2006년 10월부터 ‘금강경’ 10만 독송을 발원했다. 현재 2만독을 했다고 한다. 산술적으로는 향후 20년이 더 걸려야 10만 독송을 회향할 것이다. 인도불교에서부터 선까지 아우르는 대학자가 ‘금강경’ 10만 독송을 발원한 점도 예사롭지 않다.
“상을 여읜다는 것. 이치로는 알 수 있지만 체득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혹, 체득되었다 해도 세파에 이끌려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정진이다. ‘금강경’ 한 구 절 한 구절을 깊이 사유하며 자신을 반추해 본다는 뜻이리라. 그 과정에서 캐낸 ‘금강경’ 정수가 궁금하다. 언젠가 그 법이 세상에 전해질 것이다.
2006년 벽송사에서 첫 안거
금강경 10만독 원력도 세워
불교학, 실천 이어져야 완결
진리탐구 이전 신심 다져야
가정형편상 중학교 입학이 어려웠던 스님은 “절에선 공부할 수 있다”는 할머니 한 마디에 출가를 결심했다. 경남대 전신인 마산대학 재학 시절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싶다면 문법을 독파하라”는 김도완 교수의 한마디에 산스크리트어 문법책을 몽땅 외워버렸다. 남다른 산스크리어 실력에 놀란 서경수 교수가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편입학해 보라’는 권유에 곧바로 상경했다. 인도 유학을 준비하던 당시 ‘오래지 않아 중국과의 교류가 열리게 되면 학문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라는 탄허 스님의 간곡한 조언 한마디에 대만 유학을 결정했다. 이처럼 스님은 자신을 아끼는 ‘어른’이 ‘해 보라’하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실행에 옮겼다. ‘무서운’ 결단력이다.
법산 스님이 가는 길목이라 해서 역경과 고난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스님은 주변의 제반 상황을 인욕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아마도 그 동력은 두터운 신심일 것이다.
불교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수행을 강조한 이유를 조금은 알 듯하다. 교단과 선방을 오가라는 뜻이 아니다. 불교학을 공부하는 궁극적 이유, 교학을 연구해 가는 동안 자신은 이 세계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살피라는 뜻일 것이다. 부처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법산 스님은 직접 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선과 교를 넘나들고 있는 법산 스님은 그 어디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스님만의 길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도종환 시인의 ‘멀리가는 물’처럼.
‘…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면서/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 그러나 다시 /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 결국 다시 맑아지며 /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心性)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
법산 스님은 ‘법해’로 들어가 보배를 손에 쥘 것이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벌써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법산 스님의 강연, 법문에 청중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만 중국문화대학에서 ‘보조선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만에 대한불교 홍법원을 설립했다. 한국선학회 회장, 동국대 불교대학장, 한국정토학회장, 정각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1년 정년퇴임했다. 저서로는 ‘말 있는 곳에서 말 없는 곳으로’, ‘문답으로 풀어보는 불교입문’, ‘물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 등이 있다.
첫댓글 법산스님께서 선원장으로 주석하고 계시는 백장선원으로 대중공양갑니다 열분의 수좌들이 하안거중이신데
과일과 떡, 차 그리고 점심공양으로 냉면을 올릴예정입니다 함께 해주신 다도반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