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영해삼일운동은 1919년 3월18일 영해장날에 일어났는데 한강이남에서 수천명이 모여서 일어난 최초최대의 민족 독립운동이었음이 서울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고, 경주지방법원에서 보관된 참가자 판결문서가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물론 처벌을 가볍게 받으려고 사건을 축소하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한 점은 감안해야 되겠지요.
삼일독립운동은 민족대표인 손병희선생(당시 동학 제3대교주)이 일제가 강탈해간 우리나라 주권을 찾기 위하여 민족대표를 길러냈고 삼일운동에 전 국민이 하나되기 위하여 각 종교계 대표들을 33인이 서명토록 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배포하였고 서울에서는 탑골공원에서 수천명이 궐기하고 도심지에 행진했습니다.
그 후 한강이남에는 3.18 영해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당일에 8명이 총맞아 순국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나 쉬쉬하며 숨기고 나라잃은 울분을 속으로 심켰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로부터 12일 후 4월1일 천안의 아우네 장터에 유관순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서울보다 한달 후 일어났습니다. 4월5일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났고, 4월15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에 일제가 23명을 불태워 죽인 만행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우리나라 삼대 삼일독립운동이라고 합니다. (영해 천안 화성)
영해시장에서 총맞아 죽은 애국선열들의 숫자나 만세운동에 참가한 군중으로 보나 3일간 각 면별로 진행된 기간으로 볼 때도 당연 우리나라 대도시를 제외하고 최초이자 최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육이 잘못되어 삼일운동이 유관순이 만세불러서 일어난 것으로 착각하고 또 그렇게 교육하고 있습니다.
동학혁명도 1871년 3월10일 (양력4월29일) 전국에서 500여명이 영해 우정동 병풍바위(지금 창수면 신기리)에 집결하여 영해관아에 진입하여 최초의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그 뒤 일월산을 비롯하여 교전과 검거로 91명이 희생되고 제2대교주 해월 최경오(나중에 최시형으로 개명)가 직접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23년 후 전라도 고부에서 물세 못내겠다고 붓물싸움에서 발단된 것이 마치 원조인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신인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한문영인본자료 교남공적이라는 문서와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된 영해부적변문축이라는 문서에 명백하게 입증됩니다. (이 두가지 한문으로 된 문서를 정리하여 후천개벽의 횃불이라는 책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만인평등을 위하여 선각자들이 목숨을 바쳤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피흘린 사람들의 후손이 영해 영양 울진지방에서 살고 있습니다.
필자는 지난해와 금년에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삼일운동 기념행사에서 슬라이드 파워포인트 화면을 준비해서 참석자에게 보여준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파일로 첨부하였으니 그대로 클릭해 보시거나 저장해서 보셔도 됩니다.
보실때 슬라이드 쇼로 전체화면으로 보시고 마우스 왼쪽을 계속 클릭하시면 다음화면이 순서대로 나타납니다.
삼일구국운동-김.p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