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벅수와 중흥마을
칠량면 흥학리 중흥마을은 후등이 소의 멍에 형이라서 ‘가치(駕峙)’또는 ‘가재’라 불렀는데, 1938년 중흥으로 개칭되었다 한다.
중흥과 월송어귀 ‘벅수개’라 불리는 마을의 입구 벅수고개에는 밤나무로 만든 벅수(장승)가 남여 한 쌍씩 모두 4기가 마을 수호의 상징으로 서 있다.
한 백년 전만 해도 이 고개에는 일백여기의 벅수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4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오래 되어 썩은 벅수를 모두 철거했기 때문이다.
“저 아래까지 있었는디, 지금은 제일 중요한 양반들만 (남아) 있다. 우리 올 때는 있었는디, 그 앞서 인공(6·25) 때만 해도 율변 마을 쪽까지 있었다.” 마을 주민 안00(63세) 씨의 이야기이다.
이 장승은 1975년 마을주민 차00(현 73세) 씨가 조각해 세운 것으로, 고개의 양쪽에 나란히 서서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이 ‘할아버지・할머니 벅수’는 모두 민둥머리 형태로 얼굴 부위의 눈, 코, 귀, 입, 수염 등은 조각으로 표현했고, 전체적인 인상은 위압적이다.
할아버지 벅수라 불리는 남자 벅수는 마을에 잡기가 들어오면 단숨에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칠 것처럼 무서운 형상을 하고 있다. 할머니 벅수인 여자 벅수는 살짝 치켜뜬 눈매에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고 있어 남자 벅수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 당산제와 묘한 바위들
“우리 마을이 생긴 것은 내가 알기로는 근(거의) 4백년 가까이라 한지, 아마 그 이전에 생겼을 것이여. 아마 그 때부터 선조들이 지켜나가 온 당산제를 모시고 있제. 저그 오면서 봤을 것이여. 장승, 그것하고 선돌... 옛날에는 촌립이라고 하면 모도(모두) 병마가 심했다 말입니다. 그런데 당산제를 깨끗이 잘 모시면 그 해 일이 무탈하니 잘 지나가고, 좀 어떻게 해서, 그란께 잘못 모시게 됐다 하면, 마을에 해로운 일이 생겼제.” 이 마을의 산증인 차00(73세) 씨의 이야기이다.
“그 전에는 윤번으로 모시고, 유사 없는 사람한테 맡기기도 하곤 했는데, 마을에서 정월 보름날, 음력으로 열 낫날(열나흘날)에는 당산제를 모시게 된다. 그런데 정월달 보름 이내에 마을에서 소 새끼를 낳거나, 사람을 출생하게 되거나 하면, 제사를 안 모셔야 써. 그런데 제사를 모시게 되면 피해가 와부러. 그래서 그것이 과연 연금이로구나, 무시 못 할 연금이로구나. 지금에 와서 그것이 미신이라고 하지마는 과연 연금 있노라 해서, 당산제를 지낸다. 그러면 사람이 애기를 낳거나 하면 2월 초하렛날로 연기를 해 제사를 다시 모시게 된다. 내 나이 70인데, 그런 꼴을 두 번 겪었다.” 깊게 패인 주름살이 나이를 말해주는 차00 씨의 당산제에 대한 술회이다.
“제사는 당산나무, 장승 넷, 남생이 바위, 선돌 일곱 반데 모신다. 제물은 추름(추렴)을 해서 장만해 모신 셈이여. 우리 마을에 자랑이라고는 그 것밖에 없다. 또 우리 마을 주위에는 묘한 바위가 있다. 각시바우가 있고, 그 옆에 마당바우, 배바우, 그 건너 그라고 저 맞은편에 서방바우, 그 옆에 병풍바우, 명막바우란 바우가 있단 말입니다. 그라면(그러면) 어떻게 하냐하면 재미로, ‘신랑이 각시한테 왔다 거가 방죽이 있어 놀다가 요기다 마당바우, 배바우에서 배를 타고 명막바우로 갔다...’는 과연 그럴듯한 전설이 되었고, 방죽골 이라고, 저수지 막기 이전에, 그것이 일제말엽에 막았지마는 현재 농수로 쓰고 있지만, 방죽골이 결국 막혔다.” 바위는 명주리에서 부터 중흥을 거쳐 장포까지 걸쳐 이어지는 셈이다. “제사에 쓰는 물은 어디서 길러 오나요?”
“정한수라고, 정한수는 전에 마을 뒷산에 부샘골이 있어, 그 우물에서 길러왔는데, 최근에는 물이 나오지 않아 정화수라고 맑은 (수도) 물을 떠다가 제사를 지낸다.”
다. 장승 제작기
“직접 장승을 깎았다고 하던데요?” “내가 그 때 1975년도에 그랬던가? 그 전에도 한번 깡캈던가(깎았던가) 몰라. 장승이 오래돼서, 밤나무로 깡크고 그랬는디, 내가 우리 집에서 깎았제. 한 30년 됐다. 인자 그래도 한 백년은 견딜 것 같다.” 차00 씨의 장승 제작 동기이다.
“전에는 장승이 한 백여기 되었다던데요?”
“백(100)기라고 확실한 숫자는 몰라도, 지금 현 위치에서 율변쪽 마을입구 끝머리까지, 서 있었다. 거기 있는 장승들은 모양도 여러 가지로 총 든 놈, 칼 든 놈, 만들어 가지고, 거그 온 사람들은 안 돌아볼 수 없고, 장승이 방패를 하고 있는 형국이라, 지금은 전부 싹없어져 버렸지마는... 유래가 뭐라냐? 내가 아는 범위까지는 우 아래 우리가 말한 남매 또는 내외 뿐이여.”
“장승을 깎는 무슨 특별한 기술이라도 있었던가요?”
“아니 기술이라기보다는 내가 전에 목수였는디, 전에 거 보고 그냥 깎았제.” 중흥 마을의 수호신으로 통하는 이 벅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마을의 액운을 몰아내고 평화와 안녕을 빌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라. 당산제 의식
지금도 매년 음력 1월 14일이면 모든 주민들이 벅수 앞에 모여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는 대부분 정월대보름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장승에게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장승제 준비는 한달 전(12월 25일) “동계날”에 ‘유사’ ‘집사’ ‘축관’ ‘헌관’ 각 1인씩의 제주(祭主) 선출로 시작된다. 장승제의 제주는 그 부락에서 가장 깨끗하고 부정이 없는 남자를 선정하게 되는데, 구체적으로 상중이라던 지 가족 중 출산을 했다던 지 환자가 있어도 안 되고 흉물을 보았거나 만진 사람도 안 된다.”
제주로 선출된 사람은 제삿날까지 부인과 별거를 하며 매일 골짜기 깨끗한 물에서 목욕을 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사람과 만나지도 못하며 한 달간 심신을 깨끗이 한다. 정월 초하루 차례도 안지내고, 한 주 전부터는 외출도 삼가고 집에서 매일 목욕재계하며 근신한다.
제일 사나흘(3~4일) 전에는 주민들이 미리 제관의 집과 제장마다 새끼로 꼰 금줄을 걸어 놓았다. 또 벅수고개 양편에 세워져 있는 벅수주위에 정월 14일 아침에 유사 댁에서 볏짚을 왼쪽으로 꼬아 만든 새끼로 금줄을 드리운다. 이를 ‘금줄 두르기’라고 한다.
제의(祭儀)로는 밤 8시부터 9시 사이에 제관(유사) 2명이 1차로 당산나무와 선 독에 당산제를 지내고, 2차로 벅수고개로 이동하여 벅수 전에 음식을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제관이 잔을 올리고 차례로 여러 번 절하고 마을의 안녕을 축원한다.
‘당산제축문’다음과 같다.
“유 세 차 우지월우지삭일우지 유 학 0 0 0 감소고우
당산지신근이기서유역시유
초춘구역모사민역축수급
곡류유비명충잡충일체제거
풍요일년구현주과재진궐령
형강흠향상
향”
(維 歲 次 于支月于支朔日于支 幼 學 0 0 0 敢昭告于
堂山之神謹以氣序流易時維 初春驅疫模死民疫蓄獸及 穀類莠秕螟虫雜虫一切除去 豊謠一年具縣酒果載陳厥靈 兄降歆饗尙 饗)
이렇게 해서 당산제가 끝나면 제물을 조금씩 떼어서 제관이 벅수 주위에 뿌리고 마을의 태평과 소원성취를 기원한다. 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음복을 하며 흥겨운 농악놀이를 벌인다.
“이 당산제를 정성껏 모신 탓인지 중흥 마을은 일제 때나 6·25동란을 겪으면서도 다른 마을처럼 사람이 죽거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절에도 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제.” 차인옥 씨의 이야기이다. “6·25 때 다른 마을에서는 마을회관 같은 데서 손구락(손가락)만한 아그들도 다 죽인 판인디, 우리 마을에서는 사람하나 까딱 안했다. 그 때는 칠팔십호 사람 수도 많았고, 젊은이도 많았는데... 여그 할머니(당산나무)가 그 영험이 크다고 했다. 경찰 수복 때도 좌익이라고 저 완도까지 끌려갔다가 살아서 돌아 왔어.”
마. 남생이 바위
장승에서 마을도로로 약간 내려오는 곳에 ‘남생이 바위’가 있다.
“도로 공사 중 포크레인으로 파 버려서 원 모습을 상실했다”고 한다. 손00(67세, 최00 씨의 처) 씨의 이야기이다.
“앞전 도로가 안 났을 때에는 컷어요. 그 때는 길이 안 나갔고, 지역이 높은데 있었지. 질(길) 내면서, 대고(마음대로) 치워놨는디... 큰 놈 묻은 다고, 바위를 다 캐어 대고 치워버렸어. 딴 놈을 묻을려고 하니까, 말썽이 되갔고... 다른 놈 묻을려고 했는디, (마을에) 불이 나고 해서, 원래 돌을 갔다 놓았제.” 본래의 남생이 바위보다 모양이 많이 상했다.
“공그리(콘크리트) 하면서 포크레인으로, 일하는 양반들이 많이 파서 끼래져(망가져) 버렸어. 망가져 버린 거지요...” 밭에서 일을 하고 계신 아주머니는 이 마을에 시집온 지 벌써 40여년이 되었단다.
“이 부분 산 지역은 큰 길에서 보면, 완전히 거북이 모습이라, 길 내고, 땅을 파버려 본 모습이 상실됐다.”고 한다.
“이 양반(남생이 바위)을 모시는 제는 해마다 정월 보름 지낸다. 전에는 마을 어른들이 모셨는디, 늙으시니까 안모시고, 우리 집에서 모신다. 한 이십년 가까이 모시고 있지요. 나한테 일임해. 유고 있으면 안 모시고, 초상나면 안 모시고, 출산 했을 때는 다른 분이 모신다. 손 없는 분이...” “상당히 오래 모시네요?”
“다 역사가 있는디, 자제분들이 교회 다니고, 신중하니 안하고 해서... 우리들 같으면 물어보고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른다. 전에는 (당산제가) 괜 찬했어요. 지금은 우리가 잘 모시고 있지요.” 비교적 손이 없고 집안이 깨끗해 마을에서도 이들 내외에게 제물 등을 맡기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8분의 제사를 지내요. 사장(당산)나무 한 분, 회관앞 두 분(선돌), 남생이 한 분, (벅수) 저 양반 네 분... 제는 여덜(덟) 상을 차려요.” “사장나무는 여섯 그루이던데요?”
“사장나무는 원래 일곱(그루) 나무였는데, 태풍 많이 온 해에 이쪽 가 하나는 넘어져 버렸지요. (처음) 숨겄을(심었을) 때, 나무가 그냥 난 것이 아니고, 일곱그루 심었는디, 칠성이라고... 딱 일곱 개 숨겄는디, 지금은 여섯 그루가 있지요.” 당산나무 앞에는 제물을 차릴 때 쓰이는 (석)상이 놓여 있다. “지금은 얼마나 믿어요?”
“지금은 미신이라고, 인정하지도, 잘 믿지도 않지만, 만약에 안 모시면 안된께, 안 모실 수는 없어요.” 하시면서 손씨 아주머니는 밭일을 재촉하신다.
“다른 부락 같잖아, 지금도 농토가 많은 마을은, 잘잘한(조그마한) 주위 일곱 개 부락에서 첨에는 제일 부촌 이었는데, 지금은 농사가 돈이 되지 않아 조금 못사는 동네로 되었지요.” 하시면서
“제사 모실 때의 사진 같은 거 있으면 잘 보관해 놔요.”하고 당부하신다. 이러한 제사가 언제까지 이어질는지 모르지만, 제사를 모시는 소박한 시골 아녀자의 바램인 셈이다. 마을에서도 그들 내외가 제사를 지낼 때 지극으로 정성을 들인다고 전한다.
바. 율변장수와 남생이 바우
또 다른 시각에서 본 남생이 바위와 이에 관한 전설을 소개한다.
“남생이 바우, 그것이 지금 파란을 많이 겼었지. 도로를 확장한다고 하면서, 사람 힘으로는 못 든께(옮기니께), 장비, 포크레인으로 들어싼께, 많이 망가졌지.” “또 율변 장사에 관한 이야기도 있던 지요?”
“그래 그 유래가, 옛날 전설에 의한다면, 우리 마을이 상당히 부촌이랄까, 밥을 먹고 살았어. 율변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거든 ‘남생이 주둥아리가 율변을 보고 있어, 남생이가 율변에서 먹고 똥을 이쪽으로 싼께 그쪽(율변)이 가난하고 중흥이 잘 산다’고, 그래서 어느 율변 장수가 이 바위를 들어 위치를 바꿔 버렸제. 주둥이를 중흥 쪽으로 돌려 버렸단 만시... 그래가지고 집에 가서 병이 나부렀어,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아프기 시작하고... 귀신이 씌웠던 모양이라, 그래서 앓아 누웠는디, 용한 점쟁이한테 가서 점을 치니까, 점쟁이가 ‘혹시 최근 돌을 만진 적이 있느냐?’ 하고 물어본께 그 남생이 바위를 만진 것이 생각나 ‘그렇다’고 대답했제. 그러니까 그 점쟁이가 말하기를 ‘당신이 아픈 것은 그 바위를 건드려서 생긴 병이니, 이를 원래대로 해 놓아야 아프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재앙을 받지 않는다’고 하여, 그 환자가 머리를 싸매고 와서 어떻게 그 바위를 들어서 원래대로 돌려놓게 되었던 모양이라. 그래서 살게 되었다고 해. 또 율변 사람들에게 재앙이 없어졌다고 전해 온다만시.” 최00 씨의 이야기이다.
“마을회관 앞 선돌 하나는 오래되어 보이지 않던데요?”
“선돌 중 하나는 옛것이고, 하나는 납작하니 컸는데, 똘(물길) 내고 하면서 포크레인이 밀어버렸지. 그래서 마을에서 기운 센 젊은이들한테 말해, 새로 산에서 가져왔제.”
* 최근에는 서울 향우들이 버스를 대절해 와,중흥마을 당산제를 같이 지내면서 고향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