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181
이성봉 작사 · 나운영 작곡
1.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오시리
세상 끝 날의 징조가 뚜렷하니 깨어 있으라
2. 다시오시게 될 주께서 어떤 상급 내려 주실까
맡은 달란트 얼마를 남겼는가 셈 해 보아라
3. 너의 등잔 안에 기름을 가득 가득 채워 넣으라
등불 밝 혀서 오시는 신랑 예수 영접 하여라
4. 그 날 그 시간을 모르니 모두 깨어 나와 있으라
충성 다 하면 어린 양 잔치 자리 참여 하리라
후렴 죽기까지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
내가 속히 오 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찬송 작사자는 「한국의 무디」라 불리는 20세기 한국성결교회의 대부흥사 이성봉(李聖鳳,1900~1965) 목사다. 그에 대한 글이 웹사이트에 올라 있어서 요약 인용한다.
이성봉 목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로서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말 그대로 그는 한국의 방방곡곡은 물론 만주와 일본, 미국까지 전도 집회를 다녔고, 그의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감동을 받아 크리시천이 되었다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성봉 목사는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6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가정 형편으로 인해 소학교만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이성봉은 비탄하여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는 등 신앙도 방황을 거듭하였고 청년 시절에는 생업에만 급급하여 교회를 멀리하고 타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면학의 꿈이 사라진 후 공허한 삶을 돈벌이로 대치하며 살아갔다.
1920년 6월 24일 주일에 과수원에서 과일을 싣고 평양으로 가던 그는 가자묘 앞길에서 갑자기 오른쪽 넓적다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그는 3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였다. 이렇게 재출발한 이성봉은 드디어 1925년 26세의 나이로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뜨거운 영적 신앙 단련과 사명의 무장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첫 사역지가 수원으로 결정되자 신풍리에 셋집을 얻어 교회를 개척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수원성결교회다.
이성봉 목사는 찬송을 은혜스럽게 부르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찬송은 뭇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신학생 시절부터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며 가는 곳마다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그는 심학교 졸업반 시절 3일간의 금식기도 중에 예례미야서를 읽다가 부흥사로서의 소명을 받았다. 신의주로부터 시작한 그의 부흥회는 양시, 안동, 비현 등지로까지 이어졌는데 그것이 성공적인 집회로 소문이 나서 그는 성결교회뿐만 아니라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등에서까지 부흥회 청빙을 받게 되었다.
목회보다도 부흥회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기 시작한 이성봉 목사는 1939년 교단 총회시에 교단 소속 부흥강사로 임명받고 본격적인 부흥강사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9년부터는 일본 선교에도 힘썼고 1941년에는 만주 지방에까지 전도 여행을 다녔는데 이 목사의 회갑 당시에는 그가 인도한 집회가 이미 1천 교회를 훨씬 넘을 정도였다. 해방 이후에는 폐허가 된 한국성결교회의 재건에 앞장서고, 6 · 25전쟁 이후 1954년 5월부터는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교단 회년기념 전도단을 이끌고 1년간 70여 지역을 전도하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61년부터는 복음의 전파와 분열된 교단의 화합을 위하여 성결교단의 모든 교회를 순방하였다.
그가 1963년 2월 27일까지 480개 교회를 순방 집회한 후 1965년 7월 23일, 마침내 분열된 두 개의 성결 교단은 역사적인 합동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합동 총회에서 "주를 사랑하자"는 설교를 한 것을 마지막으로, 총회를 마친 후 10일 만인 1965년 8월 2일, 66세를 일기로 40년간의 부흥강사의 생애를 마쳤다.
작곡은 연세대음대 학장을 지낸 나운영(羅運榮,1922 ~ 1993) 장로가 하였다. 나운영은 「찬불가」를 작곡한 사람이다. 그의 곡이 어떻게 찬송가에 채택되었는가?
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다시는 찬불가 작곡을 하지 않고 오직 찬송가만 작곡하겠습니다." 맹세하고 그대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회개한 사실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자세히 전말을 적어 남긴다.
1990년 8월 14일, 서울 수유리 크리스천아카데미하우스에서는 한국찬송가위원회 주최, 한국찬송가공회와 기독교방송 후원으로 한 · 중 · 일 3국의 「아세아찬송가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 둘째 날인 8월15일 정오 12시, 발제 강연을 하기 전 나운영 장로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발제 강연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한 · 중 ·일 세미나 강사와 모든 참가자들 앞에서, 저의 잘못을 회개하는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한때 잘못인 줄도 모르고 찬불가를 작곡한 것을 회개합니다.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고, '이 손에 피가 마르기까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만 작곡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국제 세미나 자리에서 회개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200여 명의 참가자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이 자리에는 찬불가 문제를 집회하게 문제 삼는 인사들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나 장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를 매도하고 있다. 여기서 나 박사가 찬불가를 작곡하게 된 경위를, 가장 잘 아는 필자가 밝혀 두려 한다.
흔히 「찬불가」라고 말하는 노래는 원불교교정원 교화부에서 발행한 「원불교 성가」(126곡 수록, 1968년 3월 초판)에 들어 있는 곡조들을 말한다, 초판에 총 126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작곡자와 작곡 편수를 그 책 139쪽에 실려 있는 순서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김동진(18곡), 김세형(16곡), 이홍렬(14곡), 진순용(10곡), 김인수(5곡), 구연소(1곡), 김대현(9곡), 김성태(6곡), 박도유(2곡), 김회조(10곡), 송관은(9곡), 나운영(11곡), 정회갑(12곡), 김달서(3곡), 총 126곡이다.
위의 작고자들 거의 모두가 크리스들이다. 찬불가 출판을 주도한 인물은, 본디 정동감리교회 교인으로서 이화여대를 졸업한 황온순(黃溫順, 1903 ~ 2004) 씨다. 그가 기독교를 떠나 원불교로 간 것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정동교회 시절의 어느 날, 이화여고 운동장에서 테니스 복장으로 공을 치는데, 정동교회 담임목사가 "말만한 처녀가 허벅지를 다 드러내놓고 공을 치다니...."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하여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TV에 출연한 본인에게 직접 들었다. 그의 별세 기사가 웹페이지에 떠 있기에 여기 인용한다.
황온순(黃溫順, 법호 팔타우너. 八跢圓) 종사(宗師)가 2004년 6월 29일 오후 12시 20분 서울 위생병원에서 노환으로 열반하였다. 세수 102세. 법랍 68세.
1903년 7월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모정리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고인은 1936년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고 원불교와 인연을 맺었고, "종교는 모든 사람을 올바르고 진실하게 개조시키는 공장" 이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에 발심, 1941년 서울교당을 오가며 공도(公道)에 헌신하였다.
이화학당 중등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고인은 1945년 8 · 15 광복이 되자 서울 한남동에 보화원(普和園)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전쟁 고아들을 수용해 보살피는 한편 해외에서 귀환하는 동포들을 위해 구호소를 마련하고 구호물품을 전달하는 등 사회봉사에 깊은 열정을 보였다.....
기독교에서 원불교로 개종하고 보니, 예불 때 부를 노래가 없었다. 어떤 절에는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한다. 1950년대 후반에 나도 이런 노래를 들었다.
불타 사랑하심은 불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악하나 불타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불경에 쓰셨네.
이렇게 고친 찬불가는 미국 하와이 어느 절에서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찬송가 편집자인 하인스 심 박사가 1954년 하와이에 갔다가 절 구경을 갔더니, 절간에서 아니들이 이렇게 노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Yes, Buddha loves me!
Yes, Buddha lovs me!
1960년대 중반 어느 날, 나운영 선생이 나를 찾아와 이런 말을 하였다.
"이번에 원불교에서 찬불가를 내겠다며 황온순 씨가 내게 작곡을 부탁해 왔습니다."
나는 깜작 놀라 물었다.
"그래, 어떻게 대답하셨어요?"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내 작곡의 기본정신은 성경에 있는데 잘못 부탁하셨습니다. 그랬죠, 그런데 상관없다는 거예요. 어제 작곡을 해서 보냈습니다."
"아이구, 큰일났군요! 교계에서 문제가 될 게 분명합니다."
그러자 나운영 선생은 이상하다는 듯 이렇게 반문하였다.
"문제가 되면 저쪽에서 돼야지요. 입장을 바꿔서, 우리 찬송가를 불교인이 작곡하였다면 실릴 수 있겠습니까?"
나운영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잘못인 줄 깨닫고 회개한 후 매월 찬송가 7곡씩을 작곡하여, 그가 개척하여 세운 교회에서 매월 마지막 주일에 봉헌예배를 드리기를 15년, 별세 직전까지 1,200여 곡을 하나님께 봉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