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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타니 후미오,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경전이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보니 불교 초학자들이 어느 경전을 먼저 읽어야 할지 종잡기 힘들다. 불교의 세계를 알아가면서 불교의 각 종파를 알게 되고 그 종파들이 저마다 제일의 가르침으로 꼽는 소위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는 것도 아는 단계에 이르면, 무엇보다 “불교사상의 원류, 경전의 원시림”으로 평가받는 «아함경»을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함경»은 원전인 빨리어본, 그리고 한역본이 현존한다. 사실 한역본은 산스크리트어역본에서 번역한 것인데, 이 산스크리트어역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실전되었다. 그간 국내에 번역된 «아함경»은 한역본에서 번역한 것이므로, 이것은 빨리어본-산스크리트어역본-한역본-한글역본의 삼중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역에 중역을 거듭하여 오역의 가능성이 많으므로, 빨리어본에서 직접 번역할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다. 더구나 빨리어본과 한역본은 그 체제가 다를 뿐아니라 내용이 다른 대목이 많으므로 “경전의 원시림”에 최대한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빨리어본 «아함경»을 직접 번역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이 시대에 이 역경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재가신자인 전재성 박사의 번역으로 «쌍윳따니까야»(잡아함, 총11권, 1999년~2002년), «맛지마니까야»(중아함, 총5권, 2003년)가 완역되었고, 각묵스님의 번역으로 «디가니까야»(장아함, 총3권, 2006년)가 완역되었다. 이것은 최근 육칠년 사이에 진행된 작업이다. 각묵스님은 «아함경» 완역을 목표로 하고 있으므로 각묵스님 번역본의 «맛지마니까야»와 «쌍윳따니까야»도 수년 내에 출간될 것이다. 두 분의 역경사업은 필생을 건 작업이자 단독의 작업이다. 나는 두 분의 역경사업에 대하여 평할 만한 역량이 되지 않거니와, 설령 역량이 된다해도 차마 평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많은 번역자들처럼 고료를 바라고 하는 작업이 아니라 필생을 건 청빈하고 고독한 작업이며, 비록 흠결이 있다하더라도 아주 먼훗날 완결본을 위한 위대한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번역본들이 모두 주석을 상세히 달고 있고 편집이 조밀하지 않아 권수가 많고 가격도 권당 3만원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빨리5부 중에서 3부만 번역된 «아함경»의 한글번역본을 모두 구입하려면 거금 57만원이나 든다. 우리가 한글로 번역된 «아함경»을 읽기 위해서 거금을 들여 모두 19권(나머지도 번역되면 더 많아질 것이다)을 구입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함경»을 읽으려는 열망을 사그러지게 하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독역본이나 영역본의 경우 각 니까야 별로 한 권씩, 그러니까 3권만 구입하면 된다는 사실은 참 난감하기까지 하다. 물론 언젠가는 우리도 각묵스님과 전재성 박사의 공들인 번역을 밑거름으로 콤팩트한 경전을 소유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간단하나마 «아함경»을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이 있다. 이제 이야기하려는 책,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빨리어본 «아함경»에서 채록하여 일역한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의 편역자는 增谷文雄, 즉 마스타니 후미오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편역자를 “증곡문웅”이라고만 표기해 놓아 검색을 불편하게 해 놓았다. 그래서 마스타니 후미오의 «불교개론»이나 «아함경»을 감동적으로 읽었던 나도 이 책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빌려와 찬찬히 읽어보니 과연 마스타니 후미오였다.
이 책은 아함부에서 뽑아낸 약 90여편의 경전을 모두 8장으로 나누어 편집했다. 이 가운데 제1장 ‘구도’와 제2장 ‘전도의 시작’ 그리고 제7장 ‘최후의 설법’은 대체로 편년사적 순서로 배열했다. 또 제3장 ‘근본설법’에서 제6장 ‘비유설법’에 이르는 것은 모두 설법의 내용과 주제, 형식과 유형에 따라 집록했다. 제8장은 ‘성구’편인데 여기서는 약 150개의 성구를 수록했다. 이것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몇 가지는 제자들의 것도 있다. 이런 방식은 «법구경»에서 배운 것이다.
한 가지 더 밝혀둘 것은 번역용어에 관한 부분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기는 데 더 뜻이 있으므로 경전고유의 서술방식이라 하더라도 뜻이 통하도록 과감히 손질을 했다. 그리고 옛 불교술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늘의 적당한 말로 바꾸었다. 다만 ‘여래’ ‘열반’과 같은 용어는 현대의 말로 바꾸기 어려워 그대로 두었다. 옛 번역자들도 이런 경우는 ‘존중고’(尊重故)라 하여 그냥 두었던 선례가 있다. 그러나 인명과 지명 등 고유명사는 종래의 한역을 피하고 원음을 표기했다.1
마스타니 후미오의 머리말에서 인용한 위 인용문은 이 책의 소개문으로 읽힐 만하다. 위 인용문에서 “경전고유의 서술방식이라 하더라도 뜻이 통하도록 과감히 손질했다”는 말은, 경전의 정형구나 반복구를 생략하였고 그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뜻이 통하도록 필요한 문장을 삽입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책의 무게를 덜기 위한 방편일 뿐 뜻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들고 다니기에 편한 한 권의 책으로 «아함경»을 맛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머리말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소개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아함경» 빨리5부뿐만 아니라 율장까지도 망라하여 채록하긴 했지만, «쌍윳따니까야»에서 주로 채록하였다. 이는 «쌍윳따니까야»가 긴 설법들을 모아놓은 «디가니까야»나 중간 길이의 설법들을 모아놓은 «맛지마니까야»에 비해 각 경의 길이가 짧고 또 고층(古層)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과 편역자 나름의 의도에 의하여 이 책에 실린 경들은 짤막짤막하다. 그래서 읽기가 수월하면서도 한 대목 한 대목 쉬면서 읽도록 만들고 있다. 읽고 쉬는 호흡이 참 편하다. 경전처럼 늘 곁에 두고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실제로 이 책은 경전이다!
그리고 이 책은 각 경마다 출전과 그 경전명을 밝히고 있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것도 빨리5부와 한역아함경을 공히 밝히고 있다. 하기야 빨리5부와 한역아함경의 비교목록을 세계 최초로 제시한 이도 일본학자이니 이러한 색인작업은 일본인으로서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마스타니 후미오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본이 1936년~1942년 사이에 빨리5부의 경전뿐만 아니라 율장과 논장까지 완역한 이후에 이뤄진 결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현재 일본에는 한역경전들을 문헌비평하여 편집한 «大正新修大藏經», 한역경전류를 일역한 «國譯大藏經», 그리고 빨리어 삼장을 비롯한 남방의 중요 전적을 일역한 «南傳大藏經»이 완비되어 있다. 세계에서 일본만큼 불교의 문헌을 완비한 나라도 없다. 이러한 성과 이후에 마스타니 후미오 같은 학자들도 나오는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은 간략한 경전도 나오는 것이다. 빨리어 삼장의 번역만을 놓고 비교하자면 우리나라는 일본에 한 60년 정도 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의 진보가 반드시 신심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종교의 불가사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불교의 학문적 연구의 진보가 불교 자체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일까? 불교의 역사나 문헌 등의 사실을 아무리 분명하게 밝혀 낸다고 해도, 이것으로 불교에 대한 신심이나 실천이 반드시 깊어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2
자국의 학문적 연구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질 만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겸허함을 갖춘 일본 불교학자들의 세계가 자못 궁금하다.
마스타니 후미오, «부처님의 가르침»(불교시대사, 1992) 7~8면
미즈노 고겐, «경전의 성립과 전개»(시공사, 1996) 19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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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타니 후미오, «아함경»과 «불교개론»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학자들의 글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었나 보다. 내가 이 책을 택한 것은 순전히 «아함경»을 읽고 싶은 마음의 연장선이었다. 아함경을 읽게 된 계기는 작년 여름에 어느 절집에서 우연히 만난 스님께서 «아함경»과 «금강경»을 읽어보라고 권해서였다. 그저 혼자서 불교를 배우려고 이책 저책 뒤적이며 «벽암록»이니 «무문관»이니 하는 수준에 맞지도 않는 책들, 이제 보면 참으로 불요불급했던 책들을 읽고 있었던 나는, 그 스님의 권에 따라 «아함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내가 구입한 역본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한문에서 번역한 역본이었다.
그러나 그저 경전을 읽는다는 의미만 있을 뿐, 부처님이 가르치신 사성제가 무엇이고, 팔정도가 무엇이고, 연기가 무엇이고 열반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이지만, 나는 아직 불교를 배우는 초보자 중의 초보자다. 이렇게 진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배우기를 그칠 수 없는 것은, 구도자의 삶이 항상 내 마음 한 켠에 청정한 영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상에서 평범하게 살지라도 나는 그 영상만큼은 지울 수 없어 어떤 식으로든 그 영상과 더불어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끈질긴 호흡 끝에 «아함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별도의 진척이 보이지 않았으니 나로서는 나에 대하여 참 실망할 만도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빨리어에서 번역한 역본이 있다길래 내쳐 그것을 구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중부아함), «쌍윳타니까야»(상응부아함)는 무려 십수 권에 이르고 권당 가격도 만만치 않아 포기했다. 그러다가 택한 책이 바로 이 책, 마스타니 후미오의 «아함경»이다.
이 책은 «아함경»이라는 서명을 달고 있지만, «아함경» 번역서가 아니라 «아함경» 해설서이다. 아주 쉽고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이야기와도 같은 해설서. 그러나 절실한 마음을 일으키는 해설서. 이 책을 읽다보면 일본학자들의 저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 마스타니 후미오는 철두철미 빨리어 원전을 토대로 «아함경»을 해설한다. «아함경»을 해설하되 각종 학문적 논의를 일별하면서 차곡차곡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의 경우는 부처님의 일생을 이야기하면서 각종 학문적 논의들을 섭렵한 흔적을 역력히 드러내느라 책의 생동감이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마스타니 후미오의 «아함경»은 저자 자신의 학문적 역량이 상당할 텐데도 그런 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내면적 접근을 하면서 내용을 서술해 나간다. 그래서 그가 감동하는 대목에서 나도 감동하고, 그가 조심스러워 하는 대목에서 나도 조심스러워 한다. 경전과 저자와 독자가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는 극동아시아의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견해와 다른 견해를 서술할 때에는 각별히 조심스럽다. 이 조심스러움은 대승불교의 역사 역시 위대한 불교의 역사임을 주저없이 인정하기에 가능하다.
내용은 1. 그 사람, 2. 그 사상, 3. 그 실천, 이 세 대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함경»을 해설한다는 명목하에, «아함경»의 텍스트에 근거하여, 그리고 «아함경»에 대한 자신의 웅숭 깊은 이해를 토대로, 저자는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들을 이야기한다. 사성제, 팔정도, 연기, 열반, 선우, 삼보, 이타행 등등, 불교의 근본 주제들이 하나하나 이야기된다. 빨리어에 기반한 그의 설명은 이해하기 쉽고 십분 공감이 되고 부드럽다. 그 주제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서양철학자들의 견해가 가끔씩 등장하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나같은 경우에는 삶의 가르침에 관한 한 서양철학자들의 견해를 평가절하하는 편에 속하기 때문에 저자가 그들의 견해를 삽입한 것이 이채롭긴 했지만, 다른 독자들로선 환영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마음에 잘 스며든 탓일까. 마치 한 줄기 바람을 쐬고 난 기분이다. 아무튼 이 책의 내용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육박하거나 강렬한 호흡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늘 곁에 두어야 하는 책인 것만 같다.
같은 저자의 또 다른 저서, «불교개론»도 읽어보았다. «불교개론»과 «아함경»은 중복되는 내용이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 역시 기쁘게 읽었다. «불교개론»은 «아함경»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불교의 역사”, “경전과 종파”를 덧붙혀서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 선불교까지 이어지는 불교의 역사와 경전 번역 등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불교에 입문하기 원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두 책 중 어느 책을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들은 이원섭 선생의 탁월한 번역을 거쳐서 더욱 빛난다. 일본 저자들에 대한 이유 없는 선입견이 이 책을 늦게 만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마스타니 후미오 교수의 '아함경 이야기'
각묵스님께서 초기불교에 관한 개론서로 적극 추천하시는 마스타니 후미오 교수의 '아함경 이야기' 를 오늘 이곳 카페에서 쭉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책으로서의 가치를 결정적으로 의심하게 하는 내용이 있어서 도움을 받고자 몇자 적어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마스타니 후미오 교수는 불교의 내세사상이나 윤회사상을 단연코 부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더군요.
" 생각컨대 만일 붓다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라는 것이 다른 종교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내세의 복지에 관한 것이었다고 하면 그것은 도저히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이라거나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라거나 또는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불교의 긴 흐름을 돌이켜볼 때 그런 내세설이 주장된 일도 있었다고 해야 겠지만 붓다의 사상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나는 목소리를 높여 확언하고 싶다"
언뜻 이 부분만 보면 기독교의 천국이라거나 정토신앙의 극락과 같은 개념을 부인한 것이지 윤회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라고 볼 여지도 있겠지만 이 분은 자신의 다른 저서 "불교개론"에서 "세상에서는 흔히 윤회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인도에 보편화된 하나의 상식이었을 뿐 결코 붓다의 생각이 아니었다"고 밝히면서 부처님법의 다섯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법의 다섯가지 특징중 3가지가 위에 적시되어 있습니다.)
이 불교개론의 내용도 언뜻보면 부처님이 윤회자체를 부인하신게 아니라 윤회의 주체문제에서 당시의 인도사상과 달랐다는 것을 말한게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아함경이야기와 불교개론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윤회라거나 내세와 같은 것은 부처님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법의 다섯가지 특징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윤회는 부정하면서도 연기법에 대해서는 참 자세히도 설명하고 있더군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윤회가 부처님의 가르침인지에 대해서는 재론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다들 잘 아시리라 봅니다. 이곳 카페의 묻고 답하기를 검색해 보면 윤회에 관한 질문도 많고 그때마다 각묵스님의 확고하고도 단호한 설명을 자세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의문을 갖는 것은 윤회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어떻게 그런 책이 이 초불카페에서 초기불교에 관한 추천서적으로 거론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도움을 요청하는 부분은 ..윤회사상을 부인하면서 과연 연기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경북대 의과대학원 강병조 교수도 이런 주장을 했더군요. 이곳 초불카페에 올려진 자료에 있습니다.
"윤회는 불교의 고유사상이 아니다. 윤회를 실체로서가 아니라 기능, 즉 심리적윤회로 파악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분도 연기법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참.. 이런 자료들을 읽다보면 그동안 가졌던 불교관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동요를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이런 주장자체에 흔들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정통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이 초불카페의 추천서적에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어서 정말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링크 사이트 들어가시면 원문 보실 수 있습니다.)
* <아함경 이야기 > - 마스타니 후미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sw030501&logNo=40009454491&from=search
첫댓글 ㅎㅎㅎㅎ 초불카페에서야 뭔 소린지도 모르고 추천서적으로 올려놓았겠지요... 자기들이 떠들고 있는 이야기가 뭔소린지 모르고 떠들어대고 있는게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요.. 저책 저도 구입해서 보아야 겠습니다..스스로 숙고하는 냉철한 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요즘입니다.. 인식의 끝까지 사고하여 거기서 윤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결론까지는 내리지요.. 하지만 그걸 팔정도로 다시 돌려서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가 까지는 못가는 것 같습니다. 즉 사념처의 이해에 까지는 못가는 거지요.. 그게 한계라고 봅니다.. 현상단멸에 그냥 머무르고 말지요..